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9화 (9/103)
  • 소가주(小家主) 오은림 - [3]

    달리는 벤츠의 뒷좌석에서 오은림은 한숨 쉬었다.

    여러모로 피곤한 하루였다. 조폭들 앞에서 똥폼을 잡아야 하질 않나. 기습까지 해놓고서 확실한 실력 차이로 발려버리질 않나.

    소가주로서 무림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다 집어치우고 싶어진다.

    무적비비탄의 제자한테 져버린 것도 분한데, 그냥 틀어박혀서 무공 수련이나 계속하면 안 되는 것일까. 맘 같아서는 정말 그러고 싶은데.

    무공을 익히는 건 즐겁지만 그 무공을 내세워서 뭔가 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웬 폭력조직 두목 아재들한테 괜한 트집을 잡아서 돈을 뜯어낸다든가, 재능도 없는 주제에 영약만 잔뜩 처먹은 사장입네 의원입네 하는 중년들의 무공 스승 노릇 해주는 일들 말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딴 일들이나 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맘 같아서는 연애하면서 해외여행이나 즐기고 싶었는데 그러지도 못하게 된 마당이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말하면 그동안 먹은 영약 값 뱉어내라고 하겠지? 몰래 해외로 떠버리면 못 잡지 않을까.

    울적한 생각을 하면서 오은림은 창밖을 보았다. 비가 오고 있었다. 지금 느껴지는 우울감은 저 비 때문일지도 몰랐다.

    물론 우울하건 말건 할 일은 해야 했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버지? 일 끝났는데요. 예, 침술원에서 이런저런 일 생겼어요. 딱히 급하게 알려야 할 일은 아니구요. 일단 총 쏘던 약팔이 셋 잡은 거나 넘기려구요.”

    가문에서 아버지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가문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업무 보고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일에나 관심이 있었다.

    「수고했다. 일 마무리는 딴 애들 시키고, 넌 나랑 밥이나 먹자. 나 자주 먹는 거기 알지?」

    휴대전화 너머 아버지의 말에 오은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국밥집에 계세요?”

    「그래」

    “거기 계시면 지금 곁에 보디가드들도 없겠네요?”

    「국밥집에 어깨들을 왜 데려가니. 주인아줌마 장사 망치려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 생각 없는 양반.

    “요새 얼마나 흉흉한지 모르세요? 저 지금 약팔이 셋 잡았는데 총을 두 정이나 갖고 있었다니까요?”

    「괜찮아, 안 죽어」

    오은림은 가뜩이나 우울한 김에 짜증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았다. 내가 요새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아느냐느니. 좆같아 죽겠는데 배 나온 아저씨랑 밥이나 먹고 싶은 기분인 줄 아느냐느니.

    아버지는 속없이도 허허 웃으면서 딸의 투정을 듣기만 했다.

    하도 우울한 마당이라 그게 무슨 놀리는 태도처럼 여겨졌다. 오은림의 언성이 갈수록 높아지던 와중이었다.

    탁, 하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휴대전화를 놓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 너머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락 없이 다급한 목소리.

    「잠깐, 잠깐만, 그거 내려놔, 그거―」

    “아버지? 뭔 일 있어요?”

    ‘탕’, 하는 소리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도 그 소리는 생생했다. 총성. 몇 번 들어본 적 없는 소리지만 못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치 작은 천둥 같은 소리······.

    “아버지?”

    이윽고 진짜 천둥이 울려 퍼진다. 하늘에서 새하얀 선이 내리꽂히더니 가지를 치면서, ‘콰르릉’······.

    *******

    “한 번 쏜 총은 버려요. 쏜 총알에는 강선흔(腔線痕)이 남는데 이게 총마다 다른 지문 같은 거라서 짭새들이 기록해놔요. 좀 비싼 일회용품이라 생각하고 쏜 다음 바로 폐기해야 해.”

    “더 많이 팔려고 수작 부리는 거냐니? 그런 거 아니에요. 일본에 가져가면 아무리 싸도 한 정당 20만 엔에 팔 수 있어요. 여기서도 서너 배는 비싸게 팔 수 있는 걸 굳이 싸게 파는 거야. 애초에 스마트폰보다도 싸잖아요. 어디 가서 이 가격에 살 수는 있나?”

    “기관단총은 안 파냐고요? 미안, 그건 짭새가 엄청 예민하게 반응할 거라서요. 언젠가 들여올 거긴 한데 타이밍 봐서 들여올 거예요. 당분간은 거버먼트나 쏴요.”

    “아, 그래. 약도 팔아야지. 아편은 안 사요? 왜 다들 각성제만 사고 이건 안 사? 아편이 싸고 좋은데······.”

    “장사 얘기는 이쯤 하고······ 우리 이제 좋은 얘기 해요.”

    “마교(魔敎)가 뭔지 아나요?”

    “백련교예요. 명교라고도 해요.”

    “마교라고 무슨 마귀나 사탄을 모시는 건 아니구요. 백련교가 원래 불교에다 마니교가 섞인 건데요, 마니교 할 때 마(Ma)랑 중국어 마(魔)의 발음이 비슷해서 마교라고 부르던 게 쭉 내려와서 그리 불러요. 실은 정상적인 종교야.”

    “그래서 여기 무생노모의 자비와 그분의 의지에 따른 미륵하생에 관심 있는 분 있나요?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서 환생하고 싶은 분은?”

    “없죠? 하기야 요새 누가 그런 거에 관심 있어서 우리 교에 입교하겠어.”

    “그럼, 소싯적에 무협 소설 좀 보신 분 있나요? 무협 만화도 좋아요.”

    “오, 꽤 있네요. 그럼 천마(天魔)가 뭔지 알아요?”

    “제가 천마예요.”

    “자, 그래서 천마랑 같이 무림 정복 하고 싶은 분 없나요? 입교하면 아편 무한제공, 총기랑 탄약 반값 할인인데요.”

    “무림 정복이라면 어디를 정복하느냐고요? 당연히 한국을 정복하러 왔으니까 한국인인 여러분한테 말하는 거 아닐까요?”

    “천마면 중원을 정복해야지, 왜 애꿎은 해동을 노리냐고요?”

    “무슨 소리예요. 그쪽은 이미 진작에 끝났는데, 정복······.”

    “아, 번개 친다. 어두컴컴한데 비까지 내리고, 밀거래 분위기 끝내주네.”

    *******

    밖에서 비가 내리는 그때, 허풍개는 수련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이풍은 부하직원들과 회식을 즐기고 있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지금 그 머릿속에 자기 빼고 회식을 즐기고 있을 제자와 사손들에 대한 야속함 따윈 조금도 없었다.

    그저 희열만이 가득했다.

    바라지도 않았던 영약을 얻었다. 귀하디 귀한 약을.

    영약을 복용한 것은 오 년 만이었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 습격에 대한 보상으로 비싼 약을 한 번 받아먹고는 더 먹질 못했다. 오랜만에 먹는 영약이므로 그것은 몸에 더 쉽게 녹아내릴 것이다.

    영약에 깃든 기(氣)를 몸에 흡수하기 위해,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었다.

    도사로서의 수행 중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명상이다.

    도교의 명상은 불교의 참선(參禪)과는 다르다.

    불교의 명상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을 위함이라,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도교의 명상은 그 반대다. 마음속에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의념(意念)을 내면에 투사해야 한다.

    그와 같은 도교의 명상법을 존사(存思)라고 한다.

    체내의 장기에, 그러니까 십장(十藏) 혹은 삼단전(三丹田)에 생각을 집중한다.

    그리하여 체내에 깃든 신(神)을 뚜렷하게 이미지화한다.

    도가에서 이르길, 인간이 태어날 때 그 몸에는 천상 수백만 신들의 분신이 깃든다. 그러니 인간의 몸은 본디 신들의 궁전이라. 몸속에 머무는 신들이 인간의 몸을 가호하고 돌본다.

    그러나 인간이 땅을 기며 죽고야 마는 것은, 성장하며 지상의 더러운 것들을 입에 담고 온갖 추악한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체내신(體內神)들이 질려 몸을 떠나는 까닭이니.

    만약 깨끗한 것들만을 입에 담고 선한 행위를 반복하여 체내신들이 계속 몸에 머무르게 한다면,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 몸속 수백만 신들이 천상으로 복귀할 때 그들과 함께 천상에 오르거나 지상에 남아 죽지 않는 몸을 지니고 영원불멸할 수 있다.

    기필코 그리되리라.

    눈을 감고 삼단전을 관조했다. 그것들의 정식 명칭은 다음과 같다. 상단전 니환궁(泥丸宮), 중단전 강궁(絳宮), 하단전 황정궁(黃庭宮).

    부위의 이름마다 궁(宮)이 붙은 걸 보면 알 수 있듯, 그것들은 각기 다른 신들의 거처이다. 거기 깃든 신들의 이름을 외우고, 그들의 존재를 이미지화한다. 각 부위에 신들의 존재를 투영한다.

    그로써 각 부위와 기(氣)가 일체가 되도록 노력한다.

    명상을 거듭하는 중, 눈꺼풀 너머로는 선명한 기가 보인다.

    대자연의 기, 하늘에서 찬란한 번개가 내리친다.

    빛이 앞섰으니 곧이어 천둥이 뒤따를 것이다.

    올해 처음 보는 번개다. 주술적으로 의미가 있는 자연현상이다. 저런 것을 목격하면 도사로서 해야 할 것이 있다.

    방금까지 존사하던 방식 그대로, 허풍개는 세 개의 단전에 방금 본 번개를 존사한다.

    저 천상에 있는 번개가 자신의 몸에도 깃들도록. 그러기 위한 주문을 외운다.

    “뇌위진동변경인(雷威震動便驚人)······.”

    비로소 천둥이 울린다.

    그리고 내면에 번개 한 줄기가 내리꽂힌다. 가늘지만 선명한 빛 줄기가 가지를 치고 퍼져나간다.

    천둥 또한 약하게나마 내면에서 울려 퍼진다. ‘콰르릉’······.

    그 심상의 소리와 빛이 실로 선명하다.

    이윽고 눈을 뜬 허풍개는, 자신이 방금 내면에 심상화한 번개를 현실로 옮길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손가락이 번쩍거리고 있다.

    손가락 끝에서 조그맣고 새하얀 번개가 일어난다.

    실제 번개라기엔 너무나도 작아서 차라리 스파크에 가깝지만, 그래도 모양만은 선명한 번개다.

    아무튼 그 규모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람이 전기뱀장어도 아닌데 어찌 전기를 불러낼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마법이다. 도가에서는 방술(方術)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허풍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뇌법(雷法)이 성공했음을, 자신이 신선의 길에 몇 발짝 더 나아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림인으로서는 절세고수의 첫 계단에 발 디뎠단 것도.

    허풍개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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