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8화 (8/103)
  • 소가주(小家主) 오은림 - [2]

    허풍개가 승리자로서 예를 표했다.

    “좋은 일수(一手)였습니다. 성함이?”

    그리 말하면서 허풍개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우월감을 숨기려는 기색조차 없이 담담했다.

    그러나 패배한 오가장 소가주는 그러지 못해서,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실패했다. 붉어진 얼굴로 심호흡하고 있었다.

    패배가 부끄러운 걸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자기랑 나이가 비슷하거나 어려 보이는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져버렸지 않은가. 그러니까 두 배는 수치스러울 것이다.

    그 수치심을 허풍개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난 백 년 넘게 느껴온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상황에 조금이나마 달래줄 말도 알고 있었다.

    “오은림입니다. 참 귀한 기예를 봤어요······ 선생님 성함은요?”

    “이률이요. 그리고 전 보기보다 나이가 많고 수련한 기간도 길었으니 그리 자랑스러운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옆에서 이도혁이 그랬느냐는 듯 시선을 보내왔지만 무시했다.

    오은림이 물었다.

    “어······ 그래요? 얼마나 잡수셨는데요?”

    “그건 비밀이고. 아무튼 제가 그 나이 때는 그만한 성취를 못 이뤘으니 실력에 충분히 자부심을 품으셔도 됩니다.”

    그 말 한마디 들었다고 우울감 가득한 얼굴이 활짝 펴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말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았던 걸까. 오은림은 애써 호흡을 고르고 진정했다. 겨우 평정심을 되찾고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진짜 스승님보다 강한 건가요?”

    “제가 보기로는요.”

    “스승님을 지금 뵐 수 없으니까 실력을 겨룰 수도 없잖아요.”

    “직접 견줘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더 강하다고 확신해요.”

    오은림은 억지로나마 웃었다.

    “뭐, 그건 제 깜냥으로 알 수 있는 건 아니고······ 아무튼 정말이라면 그거 대단하네요. 이제 무적비비탄 대협이 출소하시면 두 절세고수가 한 지붕 아래 있는 건가? 무림인들이 다들 기겁하겠네······.”

    “사실 무적비비탄이 진짜 절세고수는 아니었지요.”

    “아니, 자기 스승을 그리 비하해도 돼요?”

    “사실이니 뭐.”

    오은림이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이풍이 껄껄 웃어댔다. 그리고 말했다.

    “아무튼 아가씨, 한 번 싸워본 김에 본가에 돌아가서 말 좀 잘해줄래요?”

    “말 좀 잘해달라뇨?”

    “무적비비탄 형님의 제자가 세상에 나왔다고 좀 전해줘요. 이 친구가 무림에서 일하고 싶은데 실력을 보일 기회도 없었고 인맥도 없어서 당장엔 그러질 못하거든.”

    “이 선생님은 아직 무림초출도 아닌 건가요?”

    “그래요. 게다가 무적비비탄 그 형님이 왕따 기질이 있던 분이잖소? 자기 제자를 어릴 때부터 무림인들한테 얼굴 보여주고 다니면서 인맥 늘려줘도 모자랄 마당에 수련만 시켰다네.”

    오은림은 일단 말은 전해보겠노라 대답했고 이풍은 만족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풍은 웃다 말고 정색하더니, 이도혁에게 말했다.

    “도혁아? 이제 심각한 표정 지어라.”

    “예?”

    “이제 여기 나갈 거잖아. 여기서 서로 싸운 척해야지. 그래야 꼬붕들을 위해 한 따까리 치러주신 아가씨가 상납급을 챙기실 수 있을 거 아니야? 음, 아예 너 기브스라도 할까? 붕대며 뭐며 다 여기 있는데.”

    오은림이 질색했다.

    “안 돼요. 그럼 제가 무적비비탄 대협의 침술원에 와서 패악질 부린 것 같잖아요. 소문나면 어떡해요?”

    “아, 내가 생각이 짧았네. 미안해요. 그럼 그냥 표정으로만 연출합시다. 자, 이제 웃지 말고 모두 정색······.”

    *******

    네 명이 들어간 침술원을 바라보며 남자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한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무림인들의 싸움은 일반인들한테 공개되는 게 아니래. 무공이 유출될까 봐.”

    “그러니까 쌈질도 저런 곳에서 은밀하게 하는 거다?”

    “그래.”

    무림인들의 사정이야 어떻건 이가 빠진 남자로서는 싸움의 과정을 지켜볼 수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누가 이겼는가? 그래서 이쪽의 처분은 어찌 될 것인가?

    그 결과를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침술원에 들어간 지 이십 분 후였다.

    침술원을 나온 네 명은 모두 표정이 굳어있었다. 다들 서로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된 듯, 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어쨌건 넷 다 멀쩡했는데, 대체 어찌 된 것이냐 물어볼 배짱은 여기 남자들에게 없었다.

    그들은 이번 일로 자기네 조직은 이번 달 바쳐야 할 상납금이 두 배가 되었으리란 사실에만, 그리고 자기네가 그 원인이 되었음에 추궁당하리란 사실에만 겁먹었을 뿐이다.

    오가장 소가주 오은림이 말했다.

    “너희? 돌아가.”

    “예? 예······.”

    남자들은 즉시 복종했다.

    세 명의 남자가 떠나간 가운데, 이제 이 자리에는 열한 명만 남게 되었다.

    오은림은 포박되어 눕혀진 세 명의 건달을 보았다. 총을 쏘았다는 놈과 그 패거리.

    “얘들아? 쟤네 몸수색 좀 해봐.”

    오은림의 수행원들이 세 명의 품을 뒤졌다. 필로폰과 코카인, 그리고 총 한 자루가 더 나왔다.

    결국, 총이 두 자루나 있었다.

    “아니, 이 새끼들 대체······”

    이풍이 경악하는 가운데 오은림이 물었다.

    “이거 얼마에 샀니?”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초저주파가 묻어나왔다. 무림에서 살기(殺氣)라고도 부르는 그것이다.

    건달들은 몸을 떨다가 이내 대답했다.

    “구십만 원에······”

    “구십만 원?”

    오은림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압수한 총 두 자루를 보았다.

    콜트권총. 총기 번호가 없는 걸 보니 명국(明國)제 카피인 것 같았다.

    짝퉁이 구십만 원인 것은 물론 바가지였지만, 세상에는 인건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밀반입하기 힘든 품목일수록 그것은 얼마나 비싸지던가? 그 점을 고려할 때 불법 총기 가격이 구십만 원이란 것은 거저나 다름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싸니까 아무나 막 가지고 다니는구나.”

    오은림이 혀를 찼다. 이풍이 물었다.

    “요즘 총 들고 다니는 놈들이 그리 많습니까?”

    오은림이 대답했다.

    “많으니까 조심해요. 요즘엔 진짜 별놈들이 다 총을 갖고 다녀. 나도 괜히 보디가드 넷이나 데리고 다니는 거 아니에요.”

    오은림이 말하길, 실제로 무림인 몇몇이 총 맞아 죽었다고 했다. 그중에는 고수도 몇 명 있었다고.

    결국 몸값 비싼 고수들은 이제 유사시 대신 총 맞아줄 보디가드 서너 명을 거느리고 다니게 됐다는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런 불법 무기를 밀매하는 자들을 잡아내야 할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 오가장에서 얘네들 잡아갈 거라 했죠?”

    이풍의 물음에 오은림이 대답했다.

    “예. 그럼 감사히 잡아갈게요. 얘들아, 이 새끼들 신원 조회되니?”

    그녀의 수행원이 대답했다.

    “예, 다 수배된 놈들 같은데요. 원래 약 팔던 놈들 같은데.”

    말없이 있던 허풍개가 입을 열었다.

    “이놈들, 수배됐다고요?”

    “예? 예.”

    “그럼 이번 건은 악인 계도로 쳐도 되겠네.”

    “악인 계도요? 뭐, 그렇죠······”

    그제야 허풍개가 웃었다.

    이풍도 웃으면서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저기, 아가씨? 이놈들 잡으면 포상금이 있다고 들었는데······”

    오은림은 자린고비처럼 굴지 않았다. 소가주인 그녀의 권한은 막대했다.

    “제 출동비로 방금 그 애들 조직에서 천만 원 정도 줄 거 같은데······ 미리 반 갈라드릴게요. 그 정도면 될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요.”

    이풍이 반색하는 가운데, 오은림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챙겨온 가방에서 웬 목함을 꺼내 허풍개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선물인데, 선생님이 받아주시면······.”

    목함에는 청화단(靑和丹)이라 적혀있었다.

    단약(丹藥), 그러니까 영약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이풍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사천만 원 넘는 거 아니야? 이걸 막 줘도 돼요?”

    “당연히 막 주면 안 되고, 원래 저 먹으려고 챙긴 거지만, 제 똥이 되는 것보다야······ 새로운 절세고수이신 여기 선생님과의 친목을 위해 바쳐지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요.”

    그리 말하면서 오은림은 허풍개의 안색을 살폈다. 선물이 효과가 있을까?

    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방금 한 번 웃은 것을 빼고는 지겨울 만치 무표정하던 그 얼굴에 기쁨의 감정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스승인 무적비비탄이 영약 선물을 그리 좋아했다던데 제자도 마찬가지인가보지?

    오은림이 놀라는 가운데, 허풍개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아뇨, 뭘······ 아무튼 뜻깊은 시간이었네요.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네. 더 친해지자는 의미로 부족하나마 접대를 해드릴 생각이 있는데······, 어떡하실래요?”

    그리 말하면서 오은림은 거절당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딱 좋은 분위기 아닌가.

    그러나 접대란 단어를 들은 순간 허풍개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은림은 당황했다.

    이풍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어왔다.

    “접대요?”

    “뭔가 문제라도······”

    “무적비비탄 형님이 대접하기 힘든 분이었단 건 알지요?”

    “물론 알죠. 저희 오가장에서 무적비비탄 대협을 흠모해서 대접해드리고 싶어했는데 한 번도 못 그랬잖아요. 그러니 제자 분께라도 접대해드리고 싶은 건데.”

    “접대하기 어려운 거, 이 친구도 그래요.”

    그 말뜻을 오은림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무적비비탄에 관한 정보는 무림에서 유명했던 것이다.

    “혹시 이 오빠도 동자공 익혔나요?”

    “그래요. 그러니 일단 밤 접대는 절대 불가능하지.”

    “혹시 벽곡도 하시고?”

    “맞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웬 이상한 죽이나 먹습디다. 본죽에서 끓여주는 맛난 게 아니라 포로한테 줘도 인권유린이라고 욕먹을 그런 거요. 그러니까 식사 접대 한번 해주기도 불가능합니다.”

    “어······ 그것참, 유감······”

    또라이가 또 있었네, 하는 생각이 그녀의 표정에서 보이고 있었지만 허풍개는 무시했다.

    허풍개는 그저 그녀가 억지로 그놈의 대접을 해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만족했다.

    *******

    오은림과 그 수행원들이 떠나간 뒤, 이풍은 부하직원들을 모아놓고 배달 음식을 잔뜩 시켰다. 그러고는 호탕하게 외쳤다.

    “어제 온 그 신입 알지? 그 친구 온 지 이틀 만에 바로 돈 벌었다! 회식이다!”

    굴러온 돌이 밉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파티였다. 이풍은 기꺼이 지갑까지 꺼냈다.

    “이건 니들 용돈하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하직원들이 다들 헤벌쭉 웃는 가운데,  딱 한 명의 표정만 굳어있었다.

    이도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사장님?”

    “응?”

    “이거 그 친구 덕에 돈 번 기념 파티 아닌가요?”

    “어, 맞어.”

    “그런데 왜 그 친구는 이 자리에 없는지······”

    이 자리에는 넷뿐이었다. 이풍과 부하직원 셋.

    허풍개는 회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지적하니 이풍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여기 불렀으면 인상 팍팍 찌푸리면서 싫어했을걸?”

    “그래도······”

    “내가 무적비비탄 그 양반이랑 오래 다녀서 잘 알어. 억지로라도 파티 같은 곳에 데리고 가면 진심으로 싫어해. 남들 맛난 거 처먹는 거 보기나 하라는 거냐, 이렇게 욕까지 하던가? 그래서 나중에는 예의상으로도 술자리에 안 데리고 갔어. 그 양반도 시간 낭비 안 하게 되니 그걸 더 좋아했고.”

    “그러고 보니 벽곡인지 뭔지 한다고 아무거나 못 먹는다고 했죠.”

    “쌀밥에 김치도 못 먹는다? 쌀은 벽곡······ 그러니까 오곡을 먹지 말아야 해서. 김치는 오신채(五辛菜)를 피해야 하는데 마늘이 거기 들어가니까 못 먹지. 고기랑 생선은 당연히 못 먹고.”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기겁했다.

    “그럼 대체 뭘 먹을 수 있는데요?”

    “송진에 들깨에 참깨에 뭔 이상한 것들을 섞은 죽들을 먹는데······ 아무리 봐도 사람 먹을 게 아냐. 나도 옛날에 수련하겠답시고 똑같이 먹어보다가 속 버리고 영양실조 걸려서 병원 실려 간 적 있다.

    내 보기엔 다 소용없는 짓 같어. 왜, 만력제 그 양반은 기름진 음식 먹을 거 다 먹고 궁녀들이랑 떡치고 죽이고 별짓을 다 했는데 멀쩡히 승천했잖아?”

    “그래도 그런 걸 하니까 고수 된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이풍은 순순히 인정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런 짓까지 해서 고수가 되어야 하나? 맛난 것도 못 먹고, 거시기도 못 놀려? 그럼 삶에 즐거움이 있나? 그런 식으로 삶에 즐거움을 싹 거세하면서까지 수련할 필요가 뭐고 돈 많을 이유가 뭐야? 난 잘 모르겠어······.”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나고 있었다. 이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날씨가 안 좋네. 번개 내리겠다. 얘들아? 잠깐 다들 일어나서 플러그 안 뽑힌 거 있으면 다 뽑자. 우리 건물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거라 번개 맞음 전자제품 다 작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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