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4화 (4/103)
  • 제자 이풍 - [2]

    사람들 사이에 건물주는 인생의 승리자로 통하는 법이지만, 이 구역에서는 아니었다. 여기서는 빌라든 상가 건물이든 헐값이기 때문이다. 가난뱅이와 양아치만 가득한 이 동네에 누가 가게를 차리고 장사한단 말인가.

    허풍개의 상가 주택도 가치가 없다시피 했다. 3층짜리인데 원룸으로 내줄 방은 고작 세 개. 상가인 1층에는 그 누구도 세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허풍개는 자신이 건물을 직접 사용했다. 2층의 방 하나는 거처로 삼고 1층 상가에서는 침술원을 열어 운영해왔다.

    그 침술원은 무림에서 유명했는데, 어지간한 일로는 함부로 접근해선 안 되는 곳으로 통했다. 덕분에 허풍개가 침술원을 운영하는 동안 그 영업은 지극히 평온했다.

    하기야 누가 감히 무적비비탄의 사업장에 손을 댈 것인가?

    “뭐 하는 놈들이 이랬냐.”

    허풍개가 눈매를 좁혔다. 그 시선은 모조리 깨져버린 침술원의 유리창에 꽂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동네 양아치들이 이랬냐. 아니면 어디 족보 있는 놈들?”

    침술원 내부도 유리창보다 나은 꼴이 아니다. 탁자며 의자며 죄다 박살나서 톱밥이 흩날리고 있다. 아예 작정하고 깨부순 모양이다.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무적비비탄은 여기저기 원한 산 곳이 많았으니까. 수감 된 동안 사소한 보복을 당하는 것쯤은 충분히 일어날 법하다.

    “몰라요, 몇 주 전인가? 웬 놈들이 밤중에 이래놨어. 출소하신다고 미리 말했음 애들 시켜서 진작 치워놨을 건데······ 내일 바로 청소업자 불러서 치우게 할까요?”

    이풍의 말에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줘.”

    “오랜만에 돌아오셨는데 못 볼 꼴 보였네요. 이거 참 죄송스럽네. 아무튼 늦었지만 출소 축하합니다. 당장 쓸 돈은 있어요? 출소 축하금이라도 좀 드릴까?”

    “됐어. 이만 들어가.”

    이풍은 꾸벅 인사하더니 뒤돌아섰다.

    홀로 남은 허풍개는 침술원의 참상을 다시 보고는 한숨 쉬었다.

    오늘은 출소한 지 고작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남들 같으면 바깥세상에 적응할 겸 휴식을 만끽하겠지만, 허풍개는 쉴 수 없었다.

    시간 낭비는 싹 질색이니, 침술원 영업은 가능하면 빨리 재개하는 게 좋겠다. 그러니까 청소도 지금 하자.

    허풍개는 이풍이 완전히 떠나간 뒤 제 할 일을 시작했다.

    빗자루로 바닥에 떨어진 유리와 톱밥을 쓸고, 쓰레기를 줍고, 망가진 가구를 바깥에 내놓았다. 그 모든 일을 혼자서 하자니 막막했지만 묵묵히 했다.

    계속 청소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누군가는 말없이 집게를 들어서 청소를 거들기 시작했는데, 허풍개는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이풍의 부하직원 중 하나였다. 야구방망이를 사람 머리 쪼갤 것처럼 휘두르던 청년이던가?

    “됐으니까 안 도와줘도 됩니다.”

    허풍개가 말했더니 청년은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우리 앞으로 같이 일할 거 아니야? 서로 도움 주고받으면서 친해져야지.”

    허풍개는 됐으니 꺼지라고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혼자서 청소하자니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방적인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도 뭐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랑 친해진다고 도와줄 수 있는 거 딱히 없는데.”

    “도와줄 수 있는 게 없긴 왜 없어?”

    “그럼 있습니까.”

    “사장님이 그 쪽한테 무공 배워보랬는데. 하루에 삼십 분 정도만······.”

    “무공을 봐달라고?”

    “안 되나?”

    괜히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확실히, 이 청년은 무공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거기 있던 세 명 중에서 그쪽이 가장 나았죠.”

    허풍개의 말에 청년이 반색했다.

    “그래 보였어?”

    “예.”

    청년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이래 봬도 어릴 적에 영약 좀 먹은 놈이야.”

    허풍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영약은 비싸다. 일반 가정집에서는 구할 수 없는 가격이다.

    “집이 부자인가보네. 그런데 왜 이런 데서 일합니까?”

    “어릴 때나 집이 부자였지 지금은 아니거든. 엄마가 이모 보증만 안 서줬으면 지금도 영약 먹는 건데······.”

    청년이 말하길, 영약을 먹는 김에 무공도 같이 배웠다고 했다. 동네에 있던 문파에서 제대로 배웠다고.

    딱히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일반가정의 자녀들이 태권도장에 다닐 때 부잣집 자녀들은 무공을 익히는 법이다.

    무공을 제대로 익히려거든 값비싼 영약을 복용해야 하므로 돈이 끔찍하게 많이 들긴 하지만, 그럴 가치는 있다. 제대로 익힐 경우 심신 건강과 수명 연장의 효과가 확실한 까닭이다.

    괜히 무공이 부유층의 전유물이 된 게 아니다. 한국의 절세고수 중 하나는 기업인이 아니던가.

    “이름이?”

    “이도혁.”

    허풍개는 이도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 한번 봐주죠. 그럼 됐나?”

    “아니, 부탁 또 하나 있는데······ 무적비비탄 대협의 제자라고 했지?”

    “그런데요.”

    “그분 얘기 좀 들려줄 수 있어?”

    “그걸 왜?”

    “내가 그분 팬이라서.”

    허풍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적비비탄의 팬이라고요?”

    “내가 괜히 사장님 밑에서 일하는 게 아니지. 사장님이 무적비비탄 대협이랑 사업파트너였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온 거거든?”

    이도혁이 자랑스럽게 설명했고, 허풍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동안 자신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사람을 만난 적은 많았다. 하지만 정체를 숨긴 마당에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분이 자기 얘기 함부로 하는 걸 안 좋아합니다.”

    “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고.”

    놀랍게도 이도혁은 진정한 무적비비탄의 팬인 것 같았다. 그가 싫어한다는 말 한마디에 바로 조르길 포기한 걸 보니.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로도 한참을 청소해서야 겨우 청소가 끝났다. 비로소 잘 수 있게 되었다.

    둘은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허풍개가 자신의 숙소 문을 열자 옆에서 이도혁이 웃었다.

    “이웃이네?”

    수고했단 인사를 건넨 뒤, 허풍개는 자신의 집에 들어왔다.

    원래 자신이 쓰던 방이었다. 가장 좋은 방은 아니지만, 가장 구석에 있는 데다 따로 방음 처리를 해두어서 가장 조용한 방. 변변한 가구는커녕 TV와 냉장고조차 없는 그 삭막한 풍경이 허풍개의 생활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허풍개는 방 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미 잘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잠들 수는 없었다. 청소하느라 저녁 수련을 하지 못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해야 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한시라도 빨리 신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림인들이 꿈에 그리는 반로환동을 했음에도, 남은 수명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반로환동한 덕을 보기는 보았다. 덕분에 수명이 한 십 년은 연장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보다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허풍개가 아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

    예로부터 반로환동한 고수는 나름대로 있었지만 그들이 두 세기를 넘게 살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젊음을 돌려받았다면 몸의 수명 또한 돌려받아야 했을 텐데 어째서인가?

    그것은 진정으로 젊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겉보기로는 젊어졌을지라도 혼백은 낡았고 줄어든 텔로미어는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림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반로환동한 대부분은 약 백삼십 년 살고 죽었다. 인간 수명의 한계치다. 그리고 자신은 그보다 열 살 어린 백이십 살.

    십 년 내로 신선이 되지 않으면, 죽는다. 늙어서 죽는다. 피할 수 없는 죽음, 허풍개가 젊을 적부터 두려워해 온 그것이다.

    그러니 죽기 싫거든 단 한시도 쉴 수 없다. 허풍개는 못다 한 숙제를 해치우듯, 그러나 공들여서 오늘치 수련을 이어나갔다.

    복기, 기도, 그리고 존사(存思)······.

    여기까지 끝내고는 마지막 일과를 해야 했다.

    낡은 책을 펼쳤다.

    공과격(功過格), 하루에 벌인 선행과 잘못을 따져서 점수를 매기는 책이다.

    공(功)은 가점이고 과(過)는 감점이다. 허풍개는 오늘의 점수를 계산해보았다.

    남을 상처 입히지 않는 수준의 폭력을 휘둘렀으니 과 1점, 방금 세상의 복(福)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으니 공 1점, 청소를 남 미루지 않고 직접 했으니 공 1점. 간신히 플러스(+)다.

    이 공과 점수를 최대한 높게 유지하지 않으면 신선이 될 수 없다. 신선이 되려거든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도가의 윤리설에 의하면 그렇다.

    그렇다고 속 편히 공덕만 쌓는다고 신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신선으로의 길은 험난하고도 멀기 그지없다. 수많은 선도 수행자 중에서 신선이 된 인물은 손에 꼽힌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긴 하루였지만, 죽음에서의 도피는 겨우 한 발짝 내디뎠을 뿐이다.

    허풍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잠을 청했다.

    *******

    허풍개는 약 이십육 년 동안 침술원을 운영했다. 점혈을 연습하면서 인체의 혈도(穴道)를 공부했고, 혈도에 익숙해지면서 절로 침술에도 익숙해진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허풍개는 무림인이었으므로 주 수입은 무림에서의 활동이지 침술 치료비 따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그 돈을 세탁하려면 합법적인 사업장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마침 침술 치료비는 딱히 정해진 것이 없으니 수입이 어떻다고 맘대로 우기기 제격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누군가를 치료하는 것은 공과격에서 공(功)으로 계산된다는 점이었다.

    안정적으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면서 돈까지 벌린다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좋은 일은 가능하면 빨리할수록 좋다. 이런 생각에서 허풍개는 동이 트자마자 바로 침술원에 앉아 영업개시 팻말을 걸었다.

    밤새 침술원의 청소가 끝난 것을 보고 이풍은 어이없어 했다.

    “아니, 유리창도 아직 안 달렸는데 뭐 그리 급하다고······”

    “당분간 할 게 없으니 이거라도 해야지. 왜, 내가 할 만한 일 당장 얻어줄 수 있나?”

    “아뇨. 형님한테 일 구해드리려면 시간 좀 걸리죠. 보채지 말고 기다려줘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무적비비탄의 이름을 쓸 수도 없게 된 마당이니까. 무림에서 제대로 된 일을 맡으려면 사람들 앞에 실력을 다시 보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력을 보이는 것은, 무적비비탄에게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풍이 자기 할 일을 하러 간 가운데, 허풍개는 침술원에서 환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당연히 환자는 바로 오지 않았다. 애초에 방금 개업했거니와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비는 시간 동안에도 허풍개는 쉬지 않았다. 감옥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련을 했다. 태극권을 수련하고, 기 호흡을 하고······.

    첫 환자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네 시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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