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3화 (3/103)

제자 이풍 - [1]

영원한 덕이 떠나지 않는다면(常德不離)

갓난아기로 되돌아갈 수 있다(復歸於嬰兒).

- 도덕경(道德經) 제28장

어느 도사가 조선 말기부터 살아온 백이십 살이요, 백 년 넘게 무공과 선도(仙道)를 수련해왔노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감탄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 도사가 천하제일의 고수이리라 기대할지 모른다. 또한 한 세기에 걸친 수행으로 말미암아 일반인들로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경지의 정신세계에 도달했으리라 믿을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허풍개가 언제나 자신의 나이를 절반쯤 줄여서 말하는 이유였다. 그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웠다.

허풍개는 분명 고수였지만 천하제일의 고수는 아니었고, 살아온 세월만큼의 현자도 아니었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나잇값을 못 하는 편이었다.

그 사실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반로환동하여 젊어 보이게 된 지금, 허풍개가 내심 기쁜 것은 나잇값을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그는 한 스무 살쯤으로 보였다. 이 나이에 사회적 위치를 신경 쓸 필요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허풍개는 자신만만하게 스타벅스에 들어가 자신만만하게 코히 한 잔을 주문하고는, 마시지는 않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약속 시간이 되어서야 만나기로 한 남자가 도착했다. 마흔다섯쯤 돼보이는 중년 남자가 허풍개의 앞에 섰다.

“무적비비탄 형님?”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별호였다. 경찰들이 지어준 별호답게 영 쌈마이한, 그래도 쭉 사용해서 유명해진 별호.

“그래, 오랜만이다. 이풍.”

이풍은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허풍개를 바라보았다. 그 눈썹이 꿈틀거렸다.

“반로환동하셨단 개소린 들었지만, 이건 씨······ 못 알아보겠는데요.”

“조용히. 어디 가서 나 젊어진 거 말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 아예 딴 사람인 척하고 다닐 거라 하셨지. 이유는 말 안 해줬지만요.”

이풍은 허풍개를 유심히 살피더니 계속 말했다.

“그런데 정말 형님이 맞습니까?”

“왜. 의심스러우냐?”

“당연히 의심스럽지. 반로환동이 진짜 되는 거요?”

“되지 물론.”

“그리 대단한 거 했으면 나랑 다시 일할 필요도 없겠네?”

“뭔 소리냐.”

“이젠 어디 회장님들한테 양생술 전수하면서 떼돈 벌면 되겠소. 나한테 무공 배우면 나처럼 회춘할 수 있다, 하면서.”

“지랄 마라. 동자공(童子功) 익힌 놈이 누구한테 양생술을 가르쳐.”

“그건 그렇다 치고. 애초에 출소했단 말 자체를 못 들었는데요.”

“감형됐다.”

“조회해봤더니 출소 일자 달라진 거 없던데? 딴 교도소로 이감됐다고만 나오드만.”

“조작했어.”

“뭔 수로?”

“박 회장이 해줬어.”

“그게 돼?”

“되나 보지 뭐. 수감인 보호 프로그램인가 뭔가 이용했다던데, 정확힌 잘 모르겠고······ 모습은 달라졌어도 목소리가 똑같은데 모르겠나?”

“사 년 만에 듣는 건데 뭔 수로 구분해? 맨날 자식새끼 목소리 듣는 에미도 아들 사칭하는 사기 전화에 잘만 걸리는데.”

존대하다가 존대하지 않다가 그러고 있다. 어지간히도 의심스러운 모양인데, 정작 허풍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의심하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곧 분명해질 텐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길 십여 분,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세한 대화는 내 사무실에서 나눕시다. 중요한 말은 사람들 듣는 데서 함부로 할 수 없으니까······”

그리 말하면서 이풍은 허풍개를 안내했다. 허풍개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경관을 살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십 년 넘게 활동해온 곳이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시간이 오 년이나 흘렀지만 이 동인천역 주변은 변한 것이 없었다.

차이나타운이 아닌데도 거리의 가게에는 간판에 한문들이 쓰여있다. 촌스럽다 못해 예스러운 한문들은 녹슬고 얼룩져서 제대로 알아보기도 어렵다.

삼십 년 전부터 그랬다.

나라의 발전과 지역 개발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간 동인천 할렘가, 이풍과 허풍개의 사무소는 그 구석에 있었다.

“여긴 오랜만이죠?”

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이었다.

“뒤져!”

고함과 함께 야구방망이가 덮쳐왔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허풍개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한가로이 상황을 파악했다.

이풍 저놈, 아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릴 때 지시를 내려둔 모양이지? 누군가 들어오면 바로 덮치라 해뒀나.

허풍개는 머리를 향해 다가오는 방망이를 슬쩍 피했다. 그러나 기습해온 것은 세 명이었다.

양쪽에서 망치와 대걸레 자루가 덮쳐왔다. 이것은 피할 수 없었으므로 허풍개는 역공에 나섰다.

요란스럽게 팔다리를 휘젓지는 않았다.

“흡······”

허풍개는 그저 손을 뻗어서 손가락으로 둘의 가슴을 쿡 찔렀다. 경혈을 찔린 두 명은 손에 든 것을 휘두르다 말고 움직이지 못했다.

점혈(點穴)이라는 기술이다. 경혈을 찔러 몸을 마비시키는, 문외한이 보면 거의 마법이나 다름없는 기술. 이것만 봐도 고수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뭐야······”

남은 한 명,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던 청년은 기습이 실패하고 두 명이 무력화된 상황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래서 이제 그만두려나?

아니었다. 청년은 이를 악물더니 야구방망이를 크게 휘둘러왔다. 머리를 쪼개버리려는 듯한 그 기세에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좀 혼쭐낼 필요가 있겠다.

허풍개는 다가온 야구방망이에 손바닥을 붙였다. 그리고 손목을 회전하자 방망이도 회전했다.

휘둘러진 힘 그대로, 야구방망이는 제 주인의 배를 쳤다.

청년은 입에서 침을 토하며 고꾸라졌다.

“사장님 부하직원들이요?”

허풍개가 뒤돌아서서 물은 그때, 이풍은 위스키병을 철퇴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이쪽의 머리를 겨냥한 위스키병이 매서웠지만 허풍개는 최대한 온건하게 제압하기로 했다. 부하들 앞이니까 체면을 보존해줘야 할 것 아닌가.

주머니에 넣어두고 있던 왼손을 꺼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무슨 고약한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막 허풍개의 머리에 닿으려던 위스키병과 그것을 쥔 이풍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바닥에 쓰러진 한 명과 마비된 두 명은 부들거리는 사장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양반도 점혈을 당한 것인가. 하지만 방금은 아무것도 닿지 않았는데 어째서?

아니, 무언가가 닿긴 닿았던 모양이다.

탁, 하고 플라스틱 BB탄 한 알이 떨어졌다. BB탄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네 명의 눈알도 그 조그만 것을 쫓아 굴렀다.

허풍개는 이풍의 손에서 위스키병을 빼앗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다음에야 점혈을 풀어주었다.

비로소 입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이풍이 늦게나마 대답했다.

“그래. 교육 잘 시켰지?”

“확실히 말은 잘 듣네요. 사장이 시켰다고 진짜 사람 담그려고 들고.”

“아주 기특해.”

허풍개는 이풍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의심 끝났니?”

이풍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충은요.”

*******

이풍은 옷을 털고 부하직원들 앞에 섰다.

그 얼굴에서는 방금 기습하려다 실패했다는 무안함 따윈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이 진짜 무적비비탄이었다면 위협이 안 되었을 테니 문제가 없고 가짜였다면 당연히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그 태도를 통해 아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풍은 그저 태평한 얼굴로 허풍개에게 자신의 부하직원들을 소개했다.

“내 밑에서 일하는 애들이야. 나한테 무공도 배우고 내 일도 거들고 그러는 거지. 얼굴 봐뒀다가 가끔 무공도 봐주고 그래.”

사람들 앞에서는 허풍개가 아랫사람처럼 굴기로 약속해두었다.

“사장님 제자들이라고요?”

좆밥 새끼가 누굴 가르치냐, 하는 표정을 지었더니 이풍이 설명했다.

“제자? 응, 제자지. 실력은 변변찮지만······”

무공을 가르쳐준다는 이유로 월급 이상의 충성을 받는 모양이다.

허풍개가 알아서 해석하고 있을 때 예의 부하직원들이 이쪽에 시선을 보내왔다. 그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누구예요? 좆나 고수 같은데.”

이풍이 히죽 웃었다.

“고수면 알아볼 수나 있냐?”

“못 알아보죠. 그럼 고수 아니에요?”

“좆나 고수가 맞아. 이제부터 우리랑 같이 일할 거니까 잘 해줘라.”

“우리 후배라고요?”

“후배는 지랄. 셋이서 발려놓고 선배 대접받게?”

“아니, 우리가 그래도 족보가 있는 놈들인데······”

“우리 주제에 뭔 얼어죽을 족보?”

“사장님이 무적비비탄 대협이랑 십 년 넘게 파트너였던 분 아닙니까. 반쯤은 제자였다고 들었는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적비비탄쪽 직계 아니에요?”

이풍은 허풍개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새꺄, 이 친구가 그 양반 직속제자야.”

그리 자칭하기로 말해두었는데 벌써 그 설정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아직도 예전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양이다.

“무적비비탄 제자라고요?”

부하직원이 눈을 크게 떴다. 이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러니까 쟤한테 깝치지 마라. 어디 가서 우리 족보 무적비비탄쪽이라 하지도 말고. 무적비비탄 그 인간 성질 지랄 맞어. 웬 개잡놈들이 지 이름 팔고 다니는 거 보면 빡돌아서 친히 조지려 할 거다.”

허풍개가 노려보았지만 이풍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한편 부하직원 세 명이 허풍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달라진 게 느껴졌다. 방금까지는 굴욕감과 적대심을 애써 숨기고 있던 그들의 얼굴에 경외심이 떠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럴 만도 하다. 무적비비탄이면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 제자라면 강할 법도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한편 허풍개도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풍의 제자들이라고?

그 이풍은 허풍개의 제자였으므로, 굳이 말하자면 저들은 사손(師孫)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손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한번 보자.

맨눈으로 무형의 것들을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눈을 살짝 감으면 그게 보인다.

저들의 혈관과 림프선에 흐르는 기(氣).

꼭 기가 많아야만 고수인 것은 아니지만 대강 연관지어 짐작할 수는 있다.

그리고 허풍개가 보건대 저들은 척 보기에도 고수가 아니었다. 저들의 몸에 흐르는 기는 일반인들의 것과 별 차이가 없었으니까.

이 정도면 하수 중에서도 밑바닥, 사실상 무공을 익혔다고 봐주기도 어려운 건달 나부랭이들이었다.

‘그나마 한 놈은 좀 낫긴 한데, 그래봤자······.’

결국 다 절세고수에 준한다고 평가되는 무적비비탄의 눈에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이풍의 제자들이 잘날 수가 없다. 이풍부터가 하수 아닌가. 이풍은 무적비비탄의 제자지만, 고수의 제자라고 고수는 아닌 법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하수의 제자는 으레 하수인 법이라서 저들은 하수였다.

품평을 마칠 즈음 이풍이 물어왔다.

“지낼 곳은 있나?”

허풍개는 애써 겸손한 말투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럼 내 숙소에서 지내도록 해. 여기 옆 건물 보이지? 저기 웬 침술원 있는 곳, 저 2층이 원룸이니까 저기서 지내. 원래 월세 15만 원씩 받는 건데 돈 낼 필요는 없어.”

“고맙습니다.”

허풍개는 꾸벅 허리 숙여 예를 표한 다음, 이풍에게 속삭였다.

“저거 내 건물 아니냐?”

“맞아요. 근데 나도 애들 앞에서 가오 좀 잡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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