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1화 (1/103)
  • 21세기 반로환동전

    서장 무적비비탄(無敵BB彈) - [1]

    백이십 년을 살았다.

    조국의 멸망을 보았다.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강철과 콘크리트가 강산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의 탄생과 죽음을 보았고 때로는 거기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수많은 경험을 쌓으며 값진 지식을 얻으려 애썼다.

    그러나 여전히, 지혜로워지지는 못했다.

    백 년의 수행 끝에 늙은 도사의 머리에 남은 것이라곤 수치와 집착뿐이니.

    *******

    “저 노인네가 저기 왜 갇혀있냐고? 아, 노인 수형자를 너무 대충 처넣은 거 아니냐 이건가?”

    “예, 65세 이상 수형자면 1급 아닙니까? 특별히 다뤄야······”

    “괜찮어. 주름살 자글자글하지만 실은 환갑 막 넘긴 양반이래.”

    “어, 일흔은 넘은 줄 알았습니다.”

    “젊을 때 고생깨나 했나 보지. 아님 나이를 구라쳤든가. 아무튼 저기 혼자 넣어놔도 괜찮어. 오히려 안 그러면 큰일나.”

    “큰일 난다뇨?”

    “옛날에, 그러니까 십오 년 전에······ 같이 방 쓰던 조폭 새끼들이 죄 얻어터져서 고소할 거니 민원 넣을 거니 지랄발광한 적 있다. 살해위협도 엄청나게 받았다니까 3평 방 혼자 쓰게 해야 돼.”

    “혼자서 다 팼다고요? 그럼······”

    “무림인. 진짜 고수여.”

    “무공 쓰는 거 보신 적 있습니까?”

    “직접 본 적은 없는데, TV에서 본 적은 있다. 너도 쪼끄말 때 봤을 것 같은데······ 혼자서 방송국 테러한 양반, 기억 안 나냐?”

    “얼추 기억 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럼 저 양반이?”

    “그 뒤로 잡혀서 6년 형 받은 거지 뭐. 시간도 꽤 지났겠다, 한 내 년쯤이면 풀어줄 것도 같은데.”

    “6년 형이요?”

    “어.”

    “제 기억으론 저 양반이 그방송국 쳐들어갔을 때 직원부터 사장까지 죄다 병원 실려 간 걸로 아는데요. 연예인도 몇 명 쓰러져서 난리 난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죽거나 다친 사람이 한 트럭이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고작 6년 형이요?”

    “그때 죽거나 불구 된 사람 없을걸.”

    긴가민가한 젊은 교도관은 스마트폰을 켜서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다.

    사건으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꽤 찾을 수 있었다. ‘무림고수 방송국 습격 사건’······.

    그중 하나를 읽어내린 젊은 교도관은 눈을 껌벅였다.

    “어, 진짜네요. 사망자가 없다네. 어떻게?”

    중년 교도관이 씩 웃었다.

    “저 양반이 저래 보여도 도사야.”

    젊은 교도관은 늙은 무림인을 바라보았다. 도사?

    수염을 짧게 깎아서인지 그리 보이지는 않았다. 울분이 가득 찬 얼굴을 봐서는 딱히 수행이 깊어 보이지도······.

    “도사라고 누구 안 죽일 이유가 있습니까?”

    “도교 쪽에도 뭐냐, 살생 금지? 뭐 그런 불교랑 비슷한 계율이 있다더라고. 아무튼 살인 혐의는 없대. 아무튼 저 양반 말 나온 김에······ 가서 죽 좀 끓여와라.”

    “죽이요? 방금 식사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먹을 거 아니다. 저 도사님 식사야. 저 양반 콩밥 안 처먹고 이것만 먹는다.”

    이유를 물었더니 대충 이런 설명이 돌아왔다.

    도사들에게는 식사에 관련된 금기도 있어서, 벽곡(辟穀)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쌀이며 콩 따위 오곡을 먹어서도 안 되고 고기나 야채 따위 일상적인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저기 선반에 쌀이랑 참깨 있는데, 한 끼 분량 미리 담아놨으니까 같이 끓이면······”

    “방금 저 양반, 쌀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또 호마반(胡麻飯)이라 해서 약으로 친댄다. 나도 자세힌 모르니까 그냥 죽이나 끓여와라, 엉?”

    젊은 교도관은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는 무림인들이 여럿 갇혀있었다.

    우선 다양한 문파의 간부와 두목들이 보였다. 그들은 감옥 갱단을 결성할 예정인지 오순도순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출소해서는 반성하여 새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교도소에서 쌓은 인맥을 활용하여 더욱 왕성하게 활동할 것이다.

    마교도(魔敎徒) 또한 보였다.

    술 마시다 시비가 붙은 여섯 명을 칼로 찔러 죽인 놈이었다. 마공(魔功)이 발작한 것이니 심신미약이었다 주장하여 감형받으려다 결국 사형이 선고된 쓰레기······.

    맙소사, 그 마교도는 교도소에 반입이 금지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젊은 교도관이 노려봐도 신경도 안 쓰는 꼴이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보나 마나 교도관 중 누군가가 저 금지된 기호품을 갖다 바쳤을 것이다. 뇌물을 받아서는 아니고, 그저 얌전히 지내길 바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저 마교도는 입소한 이후 감형될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포자기한 모양이라, 아예 막 나가기로 했는지 온갖 패악질을 부려댔다.

    그 와중에 교도관들은 그 비위를 맞춰주려 애썼다. 한번 난동을 부리기라도 하면 제압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리고 젊은 교도관으로서는, 기회가 되면 총으로 콱 쏴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여간 병신들, 명색이 간수씩이나 돼서 범죄자 눈치나 보고. 배알도 없나?

    속으로 동료들을 욕하던 젊은 교도관은 문득 비참해졌다. 웬 무림인의 식성을 맞춰주겠답시고 부엌에 향하는 자신도 나은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정말이지,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말이 좋아서 무림인이지 결국에는 조폭 아닌가.

    고작 조폭들이 으스대는 꼴을 보아넘기기 힘들다. 잡혀 온 놈들마저 상전 행세를 하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물 왜 이리 안 줄어······”

    화가 난 나머지 물 조절에 실패했다.

    결국 끓인 호마반인가 하는 참깨죽은 아무리 봐도 사람이 먹을 만한 물건이 못 되었다.

    다시 끓이자니 그것은 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젊은 교도관은 대충 끓인 죽을 그대로 도사에게 가져갔다.

    “저기, 도사님?”

    도사는 명상 중인 모양이었다.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니.

    이건 좀 도사답기도 하고.

    젊은 교도관은 늙은 도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제가 요리 솜씨가 없어서 말입니다. 잘 된 건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못 드시겠으면 다시 끓여오······”

    슬쩍 죽을 내밀자 도사가 눈을 떴다.

    도사는 죽을 흘긋 보더니, 마치 숭늉을 마시듯 모조리 마셔버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는 명상을 재개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젊은 교도관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잠시 후에야 깨달았다. 어안이 벙벙한 채 빈 냄비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적어도 요리 솜씨 가지고 별말은 안 하는군.

    돌아가서 방금 자신이 본 놀라운 일을 전했더니, 중년 교도관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양반은 원래 그래.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해.”

    “여기서 시간 아낄 이유가 뭐 있다고 그럽니까?”

    “수련.”

    “수련이요? 하기야 제가 볼 때도 명상하고 있긴 했는데, 나름 열심인가 봅니다?”

    “열심히 한다는 말론 부족하고, 그냥 깨어있는 시간 내내 수련하는데······ 보면 안다. 감탄이 절로 나올걸?”

    *******

    중년 교도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도사는 부지런했다. 그것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늙어서 잠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원체 부지런한 것인지. 도사는 언제나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는 가부좌를 틀고 복기(服氣)했다. 주변의 기(氣)를 흡수하는 기 호흡, 흔히 말하는 내공 수련이다.

    여기까지는 별로 특이할 게 없었다. 수감 된 무림인들이 흔히 하는 게 내공 수련 아닌가. 지켜보는 교도관의 입장에는 저게 정말 수련이기나 한지, 아니면 그냥 시간을 죽이겠답시고 허튼짓을 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저 도사의 경우에는 분명히 달랐다. 도사가 특유의 호흡을 할 때면, 복도 전체에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때마다 젊은 교도관은 일종의 경이를 느끼곤 했다.

    주변의 모든 공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뱉기라도 하는 것일까. 지상에서 고래가 호흡하더라도 그게 가능할 것인가. 아무리 봐도 인간의 폐활량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무공에 문외한이어도 이런 기현상이 놀라운 것임을 못 알아볼 수는 없다. 숨 쉬는 것만 봐도 저 도사가 단순히 길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 하고 다니는 작자들과는 다르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다 한 시간 지나면 비로소 아침 식사 시간이다.

    도사는 몇 초 만에 식사를 마치고는 본격적인 무공 수련을 시작했다.

    도사다운 무공이었다. 워낙에 유명하고 또 흔해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태극권(太極拳).

    도사는 그 권법을 네 시간 내내 수련했다. 저러는 것이 더 힘들지 않나 싶을 만치 느릿느릿하게, 그러나 결코 끊어지는 일 없이 계속.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나면 또 복기하다가, 다시금 태극권 수련으로 저녁 먹을 때까지 시간을 보낸 뒤에야 잠이 들었다.

    그렇듯 도사는 아주 짧은 식사의 시간 수십 초를 제외하고는 전부 수련에 할애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교도관은 도사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도사는 오늘 바닥에 떨어진 조그만 돌조각을 벽에 튕기는 연습을 했다. 귀한 구경을 한다는 듯 중년 교도관이 신나게 말했다.

    “저게 그 유명한 탄지신공(彈指神功)이야! 저 양반이 저걸로 방송국이며 지하조직이며 싹 다 털어버렸지 아마?”

    중년 교도관은 소싯적에 저 도사의 팬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저 도사가 무림에서 절세고수로 통한다고 자랑스레 설명했다.

    그리고 절세고수가 무기를 갖지 못하도록, 저 도사가 있는 방은 바닥에 돌조각이 굴러다니지 않게 청소를 특별히 신경 써야 한다고도 말했다.

    만약 저 도사한테 저런 조그만 돌조각 서른 개만 있으면 여기 있는 교도관을 싹 다 제압하고 남을 것이라고도.

    “저 양반이 날뛰면 정말 총을 쏴야겠군요, 그럼?”

    젊은 교도관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더니, 중년 교도관이 씩 웃었다.

    “교도관 모두가 총으로 무장한 걸 전제로 말한 건데?”

    “그래도 전멸할 거라고요?”

    “저 양반 잡으러 경찰들 처음 출동했을 때 죄다 쓰러졌다더라고. 결국엔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뒤에야 항복했고······ 그거 보면 권총 갖곤 안 돼. 자동소총이랑 방탄복으로 제대로 무장해야 저 양반 상대할 수 있어.”

    “정말 고수긴 한가 보네요······.”

    젊은 교도관은 순수하게 감탄할 수 있었는데, 그로서는 저 도사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진 마당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죽을 끓여줘야 하는 수고야 여전하지만, 여기 갇힌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저 도사야말로 양반이다. 그 사실을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잘 알았다.

    여기 갇힌 무림인들은 여기가 호텔인 줄 아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교도관들은 그 생각을 정정해주려 하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TV가 잘 나오지 않기라도 하면 교도관들을 상대로 호통을 쳐댔는데, 그때마다 교도관들은 호텔 급사처럼 굽신거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놈의 마교도······.

    그 인간 말종은 요새 담배론 만족을 못 하겠으니 아편이나 필로폰을 구해달라며 떼쓰고 있었다.

    또다시 발작하려는 마공을 진정시키려면 약 기운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교도관들이 무슨 수로 마약을 갖다 바치겠는가?

    헛소리 말라고 했더니 요새는 숫제 깽판을 쳐댔다. 노동하다가 난데없이 같은 죄수를 두들겨 패지 않나. 모두가 자는 중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모두를 못살게 굴지 않나.

    그때마다 젊은 교도관은 잔뜩 화가 나서 달려갔지만, 막상 마교도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온몸이 굳어서는 성낼 용기마저 사라졌다.

    “뭘, 봐?”

    핏발 선 마교도의 눈, 제 눈앞이 아니라 구십 미터 너머를 바라보는 듯한 그 공허한 눈은 아무리 봐도 짐승에 가깝지 않은가. 게다가 입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일을 낼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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