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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보름을조심하라-34화 (33/34)
  • 8.

    목화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아침이었다. 하얀 햇살이 커튼 사이로 세어 들어오고 있었다. 방은 매우 밝았다.

    그는 잠시 뒤척이다 구겨진 시트에 불편함을 느끼고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어젯밤이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어제에 일어난 일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김낙원과 나란히 누워있었다.

    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녀석은 다 벗은 어깨를 드러내고 누워있었다. 자신도 가운 하나를 걸쳤을 뿐이었다.

    흘러내린 이불에, 목화는 잠시 당황했다. 분명 녀석과 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밝은 햇살속에서 일어나 녀석과 잤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보다가 겸연쩍어진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됐다. 어차피 나중에 녀석이 일어나면 어떻게든 이야기하겠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약간 얼굴이 붉어진 느낌이 들었다.

    목화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시 잠들기 위해 자리에 도로 누웠다. 그리고 베개 속으로 파고들었을 때였다.

    뒤척이다 옆을 돌아보자, 녀석이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화는 놀라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깼으면,”

    깼으면 말하지 그랬냐. 목화가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낙원이 거두절미하고 그의 말을 뚝 끊더니 바로 입을 열어 물었다.

    “너, 기억은 하냐?”

    “……”

    기억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흉흉한 얼굴이었다. 희한하다. 어떻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살기를 풍길 수 있는 걸까, 목화는 잠시 신기하게 생각했다.

    “해, 안 해?”

    바로 윽박지르듯이 소리를 낸다.

    그 어조에 목화는 잠시 안한다고 말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이렇게 비틀리게 만드는 걸 보면 녀석의 비꼬는 병에는 전염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화는 결국 한숨을 쉬고 대꾸했다

    “……한다.”

    머리를 다친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루 사이에 기억을 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 선명한 기억들을.

    윽박지르고 따질 것도 없는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목화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펴고 활짝 웃었다. 목화는 몰랐지만 언젠가 김반장이 낙원더러 '해바라기처럼 웃으면서 까댄다'고 했을 때의 바로 그 웃음이었다.

    행복의 절정에 오른 낙원이 그에게 손을 뻗쳤다.

    “그래, 하자.”

    그리고 그의 위로 올라왔다. 목화가 어어, 하고 소리를 냈을 때에는 이미 녀석이 몸 위로 올라와 있었다. 겹쳐지는 무게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목화는 당황했다. 자신이 당황하는 것이 녀석이 올라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익숙한 느낌이 들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난 너 때문에 악몽 꿨어.”

    낙원이 속삭여왔다. 악몽은 무슨 악몽. 그렇게 물으려던 그는 곧 낙원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녀석은 자신이 잊으면 어떻게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눈 감기 전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대로 자고 잊어버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평생 쫓아다니겠다는 그 소리에 목화는 잠깐 웃었더랬다.

    어떻게 잊겠냐.

    그는 생각했다. 이전에도 잊었던 게 아니었다. 자신의 가슴 안, 어느 한 구석에 쌓아두었을 뿐이다. 녀석의 입술에 닿기 전 그 진심을 귀엽다고 느꼈던 기억들을 목화는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난 너 때문에 요새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알아?”

    낙원이 시비를 걸듯이 그에게 이야기해왔다. '어째서'라는 목화의 물음에 낙원이 싱긋 웃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해왔다.

    “네 맨살이 보였으니까.”

    내가 언제라고 물을 틈도 없었다. 위에 올라와있던 녀석이 내내 여기가 보였다면서 그의 쇄골 아래 가슴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거침없이 더듬는 손의 감촉이 익숙해서, 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몇 번이나 자신을 쓰다듬었던 손길이었다. 기억은 나지만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하얀 햇살 아래 밝은 침대 위에서 되감겼다.

    그러나 낙원은 그가 당황한 틈을 타 좀 더 아래로 손을 뻗어갔다. 다 벗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던 목화는 거칠 것 없이 내려온 녀석의 손이 그의 성기를 감아쥐자 자기도 모르게 작게 몸부림을 쳤다. 이끌려 올라오는 성감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아래쪽으로 피가 쏠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리 사이로 자연스럽게 손을 집어넣은 녀석이 부드럽게 그의 성기를 쓰다듬더니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녀석의 움직임이 햇살 아래에 너무 잘 보여서, 목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

    환한 햇살 속에서 드러난 녀석의 얼굴은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생김새 그대로였다. 그러나 느낌은 달랐다.

    녀석이 자신을 이렇게 바라보았던가, 목화는 생경하게 녀석을 쳐다보았다. 열정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길에는 욕망이 느껴졌다. 그러나 위협적인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저런 눈이었던가. 목화는 녀석을 바라보다 문득 귀가 얼룩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만든 상처였다. 엉망이 된 귓불과 피가 엉겨 딱지가 진 상처에, 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괜찮냐고 손을 뻗었다.

    자신도 아팠다. 녀석도 분명히 아팠을 것이다……

    녀석이 고개 숙인 목에는 잇자국이 나 있었다. 모두 자신이 남긴 상처였다. 그러나 낙원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목화의 손이 닿자 녀석은 상처 난 목덜미를 지나 등 쪽으로 끌어당겼다.

    낙원의 등을 쥐자마자 어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목화가 놀라 자기도 모르게 손을 떼었을 때였다. 녀석이 자신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은 놈의 체온에 목화는 당황했다. 그 체온마저 익숙했기 때문이다. 낙원이 뻣뻣해진 성기에 자기 몸을 부대껴왔다. 가장 자극이 약한 곳에 와 닿은 체온에, 목화는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그 모든 것이 햇살 속에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겨울부터 지금까지 월동했으니까 이젠 좀 해도 되지 않겠냐.”

    -여름인데.

    낙원이 그렇게 속삭여왔다. 무슨 상관이 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녀석이 꼿꼿하게 일어난 자신의 성기를 입으로 물었기 때문이다. 지나친 자극에 목화는 단숨에 도달했다.

    “흐읏…!”

    사정해놓고 목화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였다. 낙원이 그것을 삼키더니 웃었다. 성기를 도로 입에 담는 녀석의 입술에 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발기했다.

    낙원이 몇 번 쓸어보더니 허벅지 사이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햇살에 비친 녀석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움찔거리던 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그 머리카락을 쥐려다 다시 손을 폈다. 그리고 어깨를 잡으려다 거기서도 멈칫했다. 몸의 아래쪽으로 내려간 녀석의 어깨에 벌겋게 남아있던 손자국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긴 것이었다.

    낙원이 그의 다리 사이를 입술로 더듬으면서 약간씩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목화가 침대에 못 박힌 것처럼 어떻게든 움직이지 않으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물었다.

    “왜, 그렇게 좋냐?”

    그러나 여유 있는 양 묻는 녀석의 호흡도 거칠었다. 햇살 속에서 드러난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숨길 수 없는 자신의 흥분을, 낙원이 목화의 몸에 거칠게 비벼왔다. 그리고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간밤보다는 수월하게 들어오는 녀석의 몸에 목화가 놀랐을 때였다. 통증은 있었지만 견딜만 했다.

    낙원이 그의 위로 체중을 실어왔다. 기억은 있지만 낯선 그 느낌에 목화가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의 몸이 위에 실린다는 것은 익숙해지기 힘든 감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낙원이 그의 내부로 좀 더 깊숙이 들어왔다.

    더 이상 넣어질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파고든 성기에 내부가 억지로 벌려지다가 허리를 뒤로 물릴 때 내장이 딸려가는 듯한 감각에 목화의 목구멍에서 신음이 걸려나왔다.

    녀석의 숨소리가 목화의 귓전을 울렸다. 녀석은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기묘한 얼굴이었다. 목화의 몸 안을 비집고 들어오던 놈의 성기가 어느 순간 간밤에 괴롭혔던 곳을 짓눌러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통증에 쾌감이 더해지자 현기증으로 몸에 힘이 풀렸다.

    목화는 스스로의 흥분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하으으, 목구멍에 걸려있던 신음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떨려나왔다. 녀석의 숨이 거칠어졌다.

    -미운 놈.

    어젯밤 그렇게 말했던 것을 떠올린 목화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눌렀다. 그 말을 듣고 좋아하던 낙원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바로 앞에 있는 녀석의 목덜미를 다시 물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듯한 다리 사이가 쓸려서 아팠다. 낙원의 체온이 닿아있는 몸 전체가 화끈거리며 열이 올랐다.

    갈증이 났다. 일어나자마자 무슨 짓이냐고 하고 싶어도, 그 말을 할 때 다른 것까지 떨려나올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생각도 하지 않았던 몸의 부분이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놈의 것이 들어온 몸 안쪽 깊은 곳이 뜨거웠다. 거친 통증 속에서 가끔 허리가 녹을 정도의 쾌감이 치고 올라왔다.

    낙원이 비벼대는 다리 사이에서 자신의 것까지 도로 세워진 것을 햇빛 속에서 본 목화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녀석이 자신의 몸을 구길 것처럼 더 깊숙이 들어왔다.

    -……!

    다리 사이가 젖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목화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목이 탔지만 그냥 이대로 자고 싶었다. 아까 눈을 뜨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화,”

    녀석이 그를 불렀다. 눈을 가늘게 뜨자 햇빛 속에 빛나는 녀석이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무언가 시원한 것이 그의 몸에 와 닿아, 목화는 잠시 눈을 떴다. 낙원이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를 닦아주고 있었다.

    “좀 있다 나가서 산책할까?”

    낙원이 그렇게 물어왔다.

    ……체력이 모자란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이 녀석은 정말로 그 사이 월동이라도 하면서 체력을 아껴둔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목화가 도로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을 닦아주던 낙원이 계속해서 옆에서 말을 이었다.

    “오늘 수영장은 못 가겠지. 햇빛이 너무 세서,”

    자신이 상처 입힌 그 목덜미와 귀가 대낮의 수영장에서 드러나는 상상을 하고 목화가 눈을 감은 채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낙원도 같이 웃었다. 그리고 녀석이 계속해서 옆에서 속삭였다.

    “그럼 하루 종일 누워있을까. 자고 깨고, 다시 자고, 하루 종일 같이……”

    목화는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다.

    녀석이 뭐라고 하든, 일어나면 그는 산책을 할 생각이었다. 약속했던 대로 바다에 같이 몸을 담그기 위해서였다.

    문득 목화의 귀에 바다의 소리가 들렸다.

    -남쪽 바다의 소리다.

    목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해변에는 파도가 쳤다. 시끄러운 사람 소리는 저 멀리로 사라지고 하얗고 빛나는 모래 사이로 파도가 스며들었다가, 다시 푸른색의 물로 넘실거리면서 해변을 철썩 두드렸다.

    처음 와본 남쪽의 바다였다. 그 소리는 여태껏 꿈꾸었던 무음(無音)의 바다와는 달랐다.

    걸어가던 그는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온 바다의 냄새를 맡았다. 아직 들어가본 적 없고 맡아본 적 없는 해수(海水)의 냄새였다. 이 바다에서는 짠 내가 났다. 기억 속에서는 입에 담아본 적 없는 짠물이었다.

    그러나 기억도 하지 못하는 옛날, 바다 속에서 그는 첫 울음 대신 그 짠물을 맛보았을 터였다. 그는 처음 들이켰을 해수의 맛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는 그 맛은 짜고 비렸다.

    바다 속에서 아이를 낳고 탯줄을 끊어버렸다고 하던 나이든 해녀의 기억이 그에게는 없었다. 한 번도 안겨본 적 없는 어머니의 품을 상상할 때면, 그리움도 뭣도 없이 찝찝한 맛이 났다.

    여름철 간장 종지를 덮어놓지 않아 말라붙은 찌꺼기를 보고 그는 아마도 저런 걸 거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잊어버릴 수도 없고 구애받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도 잊으려고 놓아둔 끝에 반쯤 발효된 듯한 맛과 냄새였다.

    저 바다도 멀리 나가면 곧 푸른색을 잃을 것이다. 깊이 잠겨들면 색깔도 냄새도 없는 검은색의 물들로 넘실거릴 것이다. 중력의 힘으로 끌어당기는 그 자연스러운 나락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검고 막막한 바다에 잠겨있던 그를 누군가 태왁으로 건져 올려 푸르고 하얀 해변에 올려놓은 것만 같았다.

    그는 해변을 걸었다.

    그리고 그 핏줄의 비린내를 잊으려는 것처럼, 그는 시원한 바람을 가득 들이켰다. 남쪽 바다의 내음이 다시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모래가 보일 정도로 투명한 푸른색의 바다에 파도가 하얗게 부서졌다.

    푸른 바다에서는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햇살에 미온으로 덥혀진 미풍이었다. 그리고 그 미풍을 가득 담았던 숨을 내쉬었을 때, 목화의 옆에는 익숙한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가 걸어가는 길 뒤로 모래에 네 개의 발자국이 찍혔다. 두 사람이 걸어간 자국에 다시 파도가 스며들어, 하얗게 지워나갔다. 그 바다의 꿈은 낙원(樂園)같았다.

    - 바캉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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