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33화 (32/34)

7.

<우천 시 영업합니다>라고는 쓰여 있었지만 수영장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풍이라 그렇습니다, 직원을 부르자 올라온 직원이 그렇게 대답했다. 오늘 밤에 지나간답니다.

잘 됐네. 낙원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웃었다.

“얘기 들었지요. 퇴근해도 좋아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탈의실에 들어간 낙원은 문을 잠가버렸다. 탈의실에 들어갔을 땐 박목화는 이미 아까 사온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합법적으로 드디어 벗겨놓은 맨몸에, 낙원은 빙그레 웃었다.

“어울린다.”

검은 색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평범한 수영복이었지만 맨몸이라는 것만으로도 멋졌다. 셔츠도 잘 벗지 않던 박목화는 의외로 수영복 차림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원래 수영부랬지. 낙원은 상기했다. 녀석의 배 근처에는 언젠가 보았던 하얀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깊숙이 찔린 배신의 흔적이었다.

고등학생일 때와 지금의 박목화 사이를 단칼에 갈라놓는 듯한 그 흉터를, 그러나 녀석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어울린다는 말에 박목화는 '그러냐'하는 듯한 담담한 얼굴로 돌아보고는 걸어 나갔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바로 비바람이 들이쳤다. 강풍이었다.

바닥에 부딪친 빗방울이 무릎까지 튕겨 오르는 비속을 녀석은 신경도 쓰지 않고 걸어갔다. 위협감이 들 정도로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등에 삽시간에 물이 타고 흘렀다.

이럴 때 수영을 하겠다고 나오는 녀석이 좋다.

낙원은 웃으면서 자신도 수영복 차림으로 걸어 나갔다.

박목화가 무슨 생각으로 수영장을 오자고 했는지는 그도 몰랐다. 그렇지만 아무리 자신의 말을 모두 없었던 얘기로 생각한다고 해도, 최소한 자신이 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시선에 대해선 잊기 어려울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오자고 했을 땐 볼 테면 봐라, 상상할 테면 상상해라라는 뜻이 아니겠냐고 낙원은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껏 박목화를 바라보았다. 처음의 민망함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놓고 이야기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낙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었다.

녀석의 벗은 몸을 보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최초에 상처를 입힌 뒤로, 그는 녀석의 등을 쳐다보는 것을 저어했었다. 그 등에 품었던 자신의 욕망에 또 다시 날이 서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서 움직이는 박목화의 몸은 그때의 흉포한 욕망보다도 조금 더 다른 무언가를 불러일으켰다.

낙원의 눈은 녀석의 움직임을 쫓아갔다. 비가 몰아치는 호텔 수영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는 목화의 등에는 생생함이 있었다.

그때였다. 박목화가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

물이 조금 튀는가 싶더니 그 물마저 빗물에 바로 섞였다. 미등을 켠 수영장 물 위로 녀석이 물을 가르는 모습이 보였다. 두어 번 어깨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몇 미터를 가르는 모습에, 낙원은 녀석이 생각보다 더 물에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영활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상상도 못해본 것이었다. 녀석은 분명 생기에 넘쳤다.

그 근육과 등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던 낙원이 갑자기 깨달았다. 그는, 녀석이 이렇게 움직이는 걸 보는 게 처음이었다.

언제나 꽃집이나 카페 안에서 서 있는 모습만 보았던 그는 박목화가 이렇게 생생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기묘할 정도로 낯설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감을 하지 못했던 근육이 그의 눈앞에서 확연하게 움직였다. 매우 실용적으로 발달된 근육이었다. 견갑골부터 허벅지까지, 녀석의 몸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그 남자다운 몸을 보던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자조했다. 어이가 없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남자의 벗은 몸에 느꼈다고.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박은 바로 그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박목화를 본 뒤부터지.

낙원이 피식 웃었다. 갈 데까지 갔어, 김낙원. 누구나 내려다볼 수 있는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은 남자의 벗은 몸을 보면서 흥분한다. 누가 봐도 훌륭한 변태 아닌가.

그러나 다음 순간 낙원은 여전히 놈의 등을 눈으로 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웃고 말았다. 아무려면 어때. 어차피 변태같이 느껴진다고 고백도 했는데.

대놓고 보자고 낙원은 아예 수영장 옆에 비치의자를 끌어다 놓았다. 턱을 괴고 앉아서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한참을 그렇게 오가던 녀석이 배영을 하더니 물에 뜬 채 입술을 달싹였다. 낙원은 녀석이 무어라 중얼거리는지 읽어냈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었다.

목화는 쏟아지는 빗물에 잠시 눈을 감았다. 물속에 잠겼던 게 무척 옛날처럼 느껴졌다.

불도 꺼진 컴컴한 수영장 속에서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을 등대 삼아 몇 번씩 오가고 나면, 바다 속에 잠긴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한 번도 가본 기억이 없는 바다가 왜 그렇게 친숙하게 느껴지는지 그때 그는 몰랐다. 언젠가 학교를 졸업하면 가볼 수 있겠지, 목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척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막연한 상상 속에서도 그의 바다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푸른 바다에 하얀 파도, 갈매기나 파란 하늘을 그리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그는 일관되게 검은 바다를 꿈꾸었다.

막막한 어둠 속 잠깐씩 하얀 포말이 일어났다 부서지는 바다에서, 어느 까만 파도에 잠겨 헤엄도 뭣도 치지 않고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가는 듯한 그의 꿈은 밤처럼 막막했다.

초등학교 때 바다를 그리라던 말에 그렇게 검은 색과 하얀 색만 써서 그린 그림을 보고 삼촌은 형언할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한참 뒤에 그에게 물었던 건 <숨 막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남의 이야기처럼 목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바다에서 태어나 그대로 버려질 뻔 하다 뭍으로 끌려나왔다던,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를 삼촌에게 들은 어느 겨울 날 이후로는 수영장에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바다는 그의 꿈으로 찾아들곤 했다. 눈 감으면 떨어져 내리는 어둠처럼 까맣고 광대한 액체에서 그는 홀로 끝없이 바닥으로 내려가곤 했다.

숨이 막힌다는 답답함보다도, 중력이 잡아당기는 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는 혼자였다. 그게 그의 바다였다.

“……”

목화는 눈을 떴다. 더 이상 비가 얼굴에 떨어지지 않아서였다. 그러자 낙원의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 떠도 돼.”

그리고 낙원이 싱긋 웃었다.

빗소리 때문인가. 낙원이 물속에 들어와 바로 옆에 서 있을 때까지도 녀석은 그의 기척을 눈치 채지 못하는 듯했다.

본래 온천물을 가져다쓴다던 수영장 물은 빗물과 섞여 미지근했다. 몸을 물에 담그자 적당히 시원한 느낌이다.

낙원은 목화의 옆에서 녀석의 얼굴에 빗방울이 맺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하기만 해도 단단해보이던 얼굴이 긴장이 풀렸는지 편안해보였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숙인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졌다. 낙원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기고는 녀석의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박목화가 눈을 떴다. 눈 뜨라고 이야기하자 깜박거리는 박목화의 눈을 낙원은 웃으면서 내려다보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일어나-”

그러자 박목화가 일어나더니 수영장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섰다. 낙원도 나란히 서 있다가 머리를 물 위로 내놓은 채로 헤엄쳐갔다. 오랜만에 물속이라 그런지 시원하긴 했다.

“뭐해, 진짜 화초에 물주는 것처럼 그러고 서 있을 거냐?”

낙원은 물속에서 가만히 서 있는 박목화를 보고 그렇게 소리 내서 웃었다.

“내일 아침에 비 그치면 사람들 좀 몰리기 전에 바다 나가서 같이 수영할까? 그래도 생각보다는 깨끗하던데?”

낙원의 말에 목화가 다시 눈을 깜빡였다.

녀석은 정말로 알고 이야길 하는 건지 모르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목화는 생각했다.

-파랗다.

한낮, 처음으로 실체를 보았던 그 바다를 보고 목화가 처음 느낀 감상이었다. 그의 꿈속에선 냄새가 없었다. 온도도 색깔도 없었다. 그렇지만 푸른 바다에서는 짠 내가 더운 바람에 섞여 불어왔다.

그 수많은 사람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멀리 보이는 바다의 푸른색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몇 번이나 꿈꾸었던 것과는 달랐다. 많이, 달랐다.

그 안에 들어가면 어떨까, 박목화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그러자는 이야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잠겨드는 그 느낌도 다를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같이 들어간다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어.

목화는 조용히 물을 헤치면서 생각했다. 아마도 바다는 무척 커서, 같이 들어간다고 해도 눈을 감으면 녀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테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다를 테지.

많이, 다르겠지.

목화는 낙원을 쳐다보았다. 나란히 서자 조금 더 큰 키에 시선이 올라갔다.

김낙원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졌다. 성가시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녀석의 얼굴은 남자 치고도 매끈했다.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이라고 동생 원일이 이야기했던 게 떠올라, 목화는 피식 웃었다.

예쁘게 생긴 편이었다.

목화도 그건 알고 있었다. 낮에 수영복 매장의 여직원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바다를 걷고 있으면 당연히 여자들이 말을 걸어올 얼굴이기도 했다.

피부는 수영장에서 비추는 빛에 희게 빛났지만 쇄골 아래의 몸은 도저히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사무직인 경찰 간부 같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녀석이. 목화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엔 입 밖으로 내어 묻지는 않았다. 아까의 대답 같은 걸 두 번을 듣는다는 건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녀석이 얼굴을 붉혔던 것을 떠올린 목화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조금 돌렸다. 그리고 몸을 숨기듯이 물속으로 가라앉혔다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다시 똑바로 섰다.

“너, 바다에서 수영한 적은 있어? 수영장하곤 달라.”

그때였다. 낙원이 놀리듯이 이야기했다. 목화는 물에 몸을 담근 채 그를 진지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김낙원이 싱긋 웃었다.

“수영장처럼 둥둥 떠 있고 싶으면 머리를 내놓고 평형으로 하라구. 바다에 처음 들어가면 다들 무서워서 배영은 어려워하니까.”

목화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번 해보고는 녀석에게 반문했다.

“이건가?”

머리를 내놓고 하라는 대로 평형으로 헤엄쳐가자 낙원이 뒤따라 왔다. 개헤엄 같은 방법에 금방 익숙해진 목화는 바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녀석은 계속해서 따라왔다.

멈춰 서자 옆에 선다. 옆에 바짝 붙어선 김낙원이 그를 바라보았다.

따라오는 시선에 목화는 움찔했다.

계속 이렇게 보고 있었나. 그는 처음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잠깐 돌렸다가 다시 녀석을 쳐다보았다.

“잠기면 어떤데.”

정말로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목화가 그렇게 묻자 김낙원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물 먹는 거지.”

“……그런 거냐.”

목화는 녀석다운 간단한 대꾸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낙원이 덧붙여왔다.

“당황하지 말고 바로 올라오면 돼.”

올라온다, 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에, 목화는 수영장 벽에 기대어 선 채 낙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로 저 녀석이 알고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면서 이야기하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 박목화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혼란이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은-……

목화는 생각을 하다 말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물에 담갔다.

꽃 같은 놈이라 그런지 물속에선 잘 웃는다. 낙원은 박목화를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저 바다에선 물 먹지 마라. 오늘 비온데다 사람들 엄청 많아서 꽤 더러울 걸?”

이런 말에도 작게 웃고 마는 것이다.

“그래.”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빗속으로 헤엄쳐가는 박목화를 낙원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녀석은 물속에선 긴장을 푸는 모양이었다. 부레가 없어 부지런히 움직여주는 상어처럼 헤엄쳐가는 박목화의 등에 저절로 시선이 따라갔다.

예전에 할아버지 재산을 상속받았을 때 건물 중에 수영장이 딸린 피트니스 센터가 있었을 텐데. 돌아가면 밤에 거기나 가볼까. 깨끗하게 비워놓고 시람 없을 때.

……그렇지만 그땐 정말로 참지 못 할지도 모른다.

낙원은 물속에서 자신의 몸을 식히면서 생각했다. 다 내려다보이는 호텔 수영장에서도 녀석의 움직이는 등을 가만히 눈으로만 쫓고 있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그땐 더하겠지.

낙원이 비를 맞으면서 숨을 몇 번 들이켰다. 수영장의 물은 점점 빗물에 섞여, 조금씩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몸의 열을 식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낙원이 계속해서 박목화의 움직임을 쫓고 있을 때였다.

박목화가 먼저 수영장에서 바깥으로 나가더니 그를 돌아보았다.

“씻으러 간다.”

“어, 기다려.”

낙원은 녀석을 따라 곧 수영장에서 걸어 나왔다.

들어가면 몸이 가벼워지는 것과 반대로, 물 밖으로 나오면 바로 몸이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랜만에 온 수영장의 그 느낌에 낙원은 잠깐 비틀거렸다. 그리고 훨씬 더 오랜만에 왔을 박목화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녀석은 세게 몰아치는 비속에서도 태연하게 앞서 걷고 있었다.

“같이 못 가냐?”

낙원이 소리를 치자 박목화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박목화의 얼굴은 평소의 담담한 그것이 아니었다. 약간 당황해하는 듯한 얼굴에, 낙원은 저 녀석이 왜 저러지라고 생각하다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

시선은 시선이라고 쳐도 자신의 남자로서의 반응은 눈치 채지 않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더 이상 민망할 일이 뭐가 있으랴 생각했던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렇지만 어쩌라구-

이미 고백도 하고 관계도 가져봤는데 그 뒤로는 손을 못 대봤어. 틈도 안 줬던 인간이 오늘 갑자기 반나체로 앞에서 돌아다니는데, 너 같으면 발기를 안 하고 배기겠냐?

애초 오늘 이렇게까지 얘길 했는데 수영장에 와 놓고 나한테 반응을 하지 말라는 게 더 무리한 주문 아냐? 네가 신경 안 쓰고 씹겠다고 나까지 그 장단에 맞춰줘야 될 이유는 또 뭐냐.

낙원은 어울리지 않는 자책에서 곧 그다운 남 탓으로 빠르게 전환했다. 탈의실로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따라 들어가자 박목화가 탈의실 한쪽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바로 눈을 마주쳐오지 않는 폼이 그래도 신경을 쓰는 것 같아서, 낙원은 피식 웃었다.

왜, 아까까진 내가 했던 얘기를 아예 없는 셈 칠 것처럼 굴더니.

“역시 신경 쓰이냐?”

낙원이 뻔뻔스럽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렇지?”

박목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녀석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도 좋았다. 자신이 했던 말들이 박목화의 안에서 그냥 녹아 없어진 게 아니라, 담담하게 한 번에 잊고 넘겨버리지 못 할 정도로 의식하게 만들었다면 그걸로 족했다.

낙원은 목화의 팔을 붙잡고 욕실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몸을 녀석의 바로 앞으로 가까이 붙였다. 평소에 팔을 잡아끌던 것과는 달랐다.

손에 잡힌 녀석의 맨살은 비에 젖어 축축했고 그러면서도 따끈했다. 그 체온에 자신의 체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간 낙원이 좀 더 뻔뻔스럽게 속삭였다.

“너 아까 차 안에서 내가 했던 얘기 다 들었잖아. 그래놓고 같이 술 마시고 수영하러 온 거야. 그 얘긴 이래도 괜찮다는 거 아냐?”

박목화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그건,' 녀석이 반박을 시작했지만 낙원은 그 말을 듣지도 않고 끊었다.

“여기서 나 밀면 유리 깨진다.”

싫다면 쳐라.

그리고 낙원은 녀석의 몸을 밀어붙인 채로 입술을 댔다.

안다 물론. 녀석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그냥 잊고 넘어가주려고 했다는 거.

그렇지만 그런 생각 따윈 바로 앞애 느껴지는 녀석의 체온 앞에서 하얗게 날아갔다.

내 잘못이 아냐. 이번엔 네가 정말 괜찮다고 한 거나 마찬가지야.

낙원이 목화의 이마에 먼저 입술을 댔다. 붙잡은 팔과는 달리 내내 비를 맞았던 목화의 이마는 약간 차가웠다.

물방울이 묻어나는 그 시원한 체온에, 낙원은그 비를 자신의 입술로 훔쳤다. 그리고 막 녀석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려고 했을 때였다.

박목화가 그를 밀어냈다.

“……!”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됐어.”

되긴 뭐가 돼.

낙원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너만 되면 다냐……?! 그러나 박목화는 그렇게 말한 뒤, 욕실 유리문 밖으로 성큼 발을 내딛고 있었다. 이대로 나가면 전혀 돌아볼 것 같지 않은 기세였다.

이 정도로 한번 의식을 했던 녀석이 떠나버리면 그 뒤엔 정말 상대도 하지 않고 떠날지도 모른다. 다급한 마음에 낙원은 <거기 서!>라는 것보다 좀 더 효과적인 말을 외쳤다.

“너 나 지금 희롱하냐?”

“……?!”

박목화가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됐어. 낙원은 일단 녀석을 잡아둔 것에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한 마디를 던진 게 그래도 주효했다. 그리고 낙원은 체면이고 뭐고 다 떨쳐야 하는 때라는 것을 깨닫고 정말 꺼내지 않으려던 말을 꺼냈다.

“너, 두 달 전에 나한테 키스했던 건 기억하냐?”

박목화가 아무 말 없이 우뚝 멈춰 섰다.

그 얼굴에는 당황이 가득했다.

“……그건……”

안다, 술 때문.

그러나 낙원은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다.

“너 내가 여자였음 넌 꼼짝없이 성희롱이야, 그거. 술 먹고 키스하고 그냥 잤잖아. 그럼 내가 너한테 이렇게 목매다는 데에 너도 분명히 일조하고 있는 거 야냐, 응?”

목화가 거기에 대해서만큼은 할 말이 없었던지, 잠깐 곤란한 얼굴을 하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이야-

낙원은 갑자기 정말로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차에서 널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아느냐는 둥, 자고 싶다는 둥 했던 이야기를 다 들어놓고 나서도 수영장에 왔으면, 이게 박목화만 아니어도 누구나 걔가 유혹했네, 라고 말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은 전부 잊어주마, 라는 관대한 태도로 일관해놓고 자신이 덤비는 건 밀치고 떠나려던 녀석이, '내가 여자였음' 이 한 마디에는 바로 미안하단 소리가 나와? 그것도 두 달 전의 일에?

“너 이제 보니 여자 좀 밝힌다? 내가 여자라고 생각하니까 이제야 미안하냐? 아무 감정 없는 사람한테 술 먹고 실수했다고 생각하니까 지금 바로 사과하는 거 아냐. 너 술집여자들한테 인기 좋았다더니 그 여자들한테도 이래놓고 사과해서 꼬신 거 아냐? 그 여자들은 너한테 신사답다는 둥 하면서 끌려들어간 거 아니냐구.”

박목화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간신히 틈을 보인 상대에게 거의 반년 만에 어프로치를 했다가 바로 '됐다' 소리를 듣고 밀쳐진 김낙원은 말할수록 열이 받아서 마지막으로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이거 알고 보니 선수 아냐, 선수-”

도저히 그 말은 넘어갈 수 없었던지 박목화가 바로 입을 열었다.

“대체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

“누가 누구긴, 내가 너한테 하는 소리지. 이 꽃 같은 새끼야, 남자의 순정을 갖고 노니까 좋냐?”

낙원은 대뜸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

목화는 자칭 '순정남'이라는 김낙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꽃 같은 새끼야라는 욕은 처음 들어본다. 선수라는 소리도 처음 들어보았다. 잘 구분은 가지 않았지만 지금 녀석이 자신에게 욕하고 따지는 것 같기는 했다.

녀석이 저렇게 욕하고 소리 지르면서 따질 게 있던가. 박목화는 순정소리는 잠시 떼어둔 채 생각했다. 그러나 낙원은 그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뭐야? 가게 해다 줘, 집 해다 바쳐, 사랑한다고 소리도 질러줘. 어떻게 하면 자볼까 그 생각밖에 안 나서 내 자신이 변태 같다고까지 했는데 다 벗고 수영장 오자는 저의가 뭐야? 내 순정을 시험하는 거냐?”

그런 건, 아닌데.

박목화가 당황했다. 무엇보다 녀석에게 순정이란 게 있는지도 몰랐던 그가, 굳이 시험을 하려고 들 리 없었다.

그가 당황하는 새 '순정' 운운하던 김낙원은 매우 당당하게 그에게 소리쳤다.

“그래놓고 키스하니까 뒤로 빼냐? 먼저 한 건 너 아냐, 너.”

그 먼저라는 건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사고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술과 결합된 사고라고는 해도 할 말이 없었던 목화는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왜 했는데, 왜-”

김낙원이 당당하게 소리를 치는 동안, 목화도 스스로에게 그것을 물었다. 사고였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난 이유를 더듬어보면, 녀석을 쓰다듬어주려다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정말 왜 그랬던가.

-귀엽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목화는 스스로의 기억에 고개를 기울이고는 낙원을 바라보았다. 자기를 농락했네, 희롱했네, 비난을 퍼붓는 녀석은 지칠 줄을 몰랐다.

어쩌다 녀석을 귀엽다고 생각했을까. 목화는 의아해졌다.

수영복만 입고 서 있는 김낙원은 자신보다도 키가 조금 더 컸다. 덩치는 있어도 주로 어깨에 근육이 몰려 있어서 어딘가 곰 같은 느낌을 주는 동생들과는 달리 다 벗고 있어도 세련된 인상을 풍기는 녀석에게선 귀엽다고 느낄 여지가 없었다.

비아냥대면서 웃는 얼굴은 잘생기고 매끈한 만큼 더 날카로웠다.

녀석의 어디를 귀엽다고 느꼈던 걸까. 목화는 고민했다. 역시 술 탓인가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좀 받아주면 안 되냐?”

김낙원이 소리쳤다.

“이 내가 이만큼 매달리는 게 흔한 일인 줄 아냐? 네가 이렇게 남의 순정을 짓밟아놓고 잘 살 줄 알아……?!”

진심이 섞여 있는 절박한 목소리에 박목화는 움찔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자 김낙원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와 원망과 다른 무언가가 뒤섞인 눈이었다. '순정'이라는 단어만 걸러듣는다면, 놈은 분명 진심이었다.

“다른 놈이면 몰라도 네가 지금 밟고 가는 건 나야, 나. 알고나 있냐? 이대로 가면 평생 날 미워하게 해주마.”

“……”

순정이란 게 녀석에게 있던가 라고 생각했던 목화는 아까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순정은 몰라도 녀석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달려든다는 것만큼은 그는 알고 있었다. 만일 순정이 한 사람만을 보는 거라면 녀석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녀석은 분명 지금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너라면 정말 그렇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평생 누구도 강하게 원망해본 적 없는 박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보지도 못한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하연이 자신을 변호해주지 않았을 때에도, 삼촌이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갔을 때에도 그는 누구도 무엇도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

막내가 그를 찔렀을 때 했던 말은 '네가 왜'라는 물음이었지 원망이 아니었다. 혹시 형님이 시킨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그는 오로지 의문만을 품어왔더랬다.

“꼭 그렇게 만들어주마.”

-이상한 일이다.

녀석은 분명히 진심이었다. 독기어린 말에는 원망이 서려 있었다.

목화는 저 놈이라면 어떤 짓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녀석이라면 예전에 협박했던 것처럼 누님도, 동생들도 괴롭힐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전에 했던 것처럼 그를 상처 입히려 들지도 몰랐다.

너라면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이 1년 동안 옆에 붙어있었듯이 진심으로 평생 동안 쫓아다니면서. 그러나 정말로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위협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박목화는 물었다.

“어떻게 할 건데.”

“……”

그러자 낙원이 허를 찔린 듯한 얼굴을 했다. 흔치 않게 본심을 드러낸 당황한 얼굴이었다.

진심인데도 진심이 아니었다는 그 얼굴에, 박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예전에 왜 이 녀석을 귀엽다고 생각했었는지 갑자기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속이 간질거린다. 위협감이 들지 않았던 이유를 그는 깨달았다. 상대가 좋아하는 일을 하든 싫어하는 일을 하던 방법과 시기부터 상세하게 늘어놓는 녀석이, 아무런 방법 없이 평생 같은 단어를 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진심이 평생 쫓아오겠다는 걸로 들리는 거다.

“그냥, 쫓아오겠다는 거냐?”

목화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김낙원이 더욱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입히지 못한 채, 녀석은 입술만 우물거리고 말았다.

목화는 녀석의 잘생긴 얼굴이 귀부터 조금씩 붉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붉은 색을 띤 미열이 자신의 가슴 속에서도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김낙원.”

목화는 녀석에게 다가섰다.

낙원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녀석이 이렇게 당황하는 걸 보는 일은 흔치 않았다.

목화는 작게 웃었다. 녀석이 조금 더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였다. 그 낯선 마음에, 목화는 낙원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한 걸음이었지만 그 거리는 매우 컸다.

목화는 가까이 간 녀석에게서 비냄새를 맡았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아직 맺혀있던 그 물기에, 목화는 아까 수영장에서 누워있을 때 녀석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고개를 숙인 녀석은 비를 막아주고 있었더랬다.

낙원은 좀 더 가까이 온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건 불안한 눈동자였다. 그 흔들리는 눈에, 목화는 녀석을 붙잡고 입술을 겹쳤다.

녀석의 입술에선 비의 맛이 났다.

놀란 듯한 움직임과 함께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경험이 많지 않은 그로서는 과거의 무엇과 비교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최소한 두 달 전의 사고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희롱한 게 아냐. 목화는 그제야 반박했다. 그건 분명히 사고가 맞았다. 의도가 있었다면 기억이 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입술의 감촉은 부드러웠고 체온의 존재는 뚜렷했다. 그 온도의 선명함에, 비로소 목화는 자신이 김낙원과 키스를 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에는 낙원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

입술을 뗀 것도 잠시, 낙원이 그를 욕실 벽으로 밀어붙였다. 맨몸에 와 닿은 녀석의 손은 입김만큼 뜨거웠다. 다시 입술에 와 닿은 놈의 체온은 아까보다 더 선명했다.

목화는 벽에 기대 선 채로 낙원의 입술 세례를 받았다. 녀석은 맹목적으로 그의 입술을 열고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차가웠던 혀가 엉키자 금세 뜨거워졌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체온을 느껴보는 건 처음이었다. 남자였다. 체온은 자신만큼이나 높았고, 지방질 없이 맨살에 부딪쳐온 가슴에선 바로 심장의 고동이 잡힐 듯이 느껴졌다.

목화는 눈을 한번 감았다 다시 떴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온 낙원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녀석의 손이 자신을 더 끌어당긴 순간 도로 흐려졌다.

<눈 감아도 돼.>

낙원이 속삭였다. 너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그 말에도 불구하고 목화는 그러나 쉽게 눈을 감지 못했다.

그가 눈을 감은 건 낙원의 입술이 눈꺼풀과 눈썹 사이로 떨어져 내렸을 때였다. 이마로, 이마에서 코로, 코에서 눈 위로 몇 번이고 와 닿은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체온에 목화는 조금씩 경계를 풀었다.

미열이 넘쳐흘러 뜨거울 정도의 체온으로 되돌아왔다. 맨살에 부딪쳐온 녀석의 몸은 아직 묻어 있던 빗방울조차 데울 정도로 뜨거웠다.

“……”

이 체온을 느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한 번, 추웠던 겨울 날 녀석을 용인한 적이 있다. 그 전에 김낙원이 휘둘렀던 악의에도 불구하고 받아주고 말았던 건 혼자가 아니라는 그 달콤함 때문이었다.

설사 그 말이 빈 말이라고 해도 좋았다. 자신에게 파고드는 체온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외로움의 필요를 단번에 '그건 감방에서나 찾고'라고 끊었던 낙원의 말이 떠올라, 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옆에 내가 있잖아'라고 했던가-

“박목화.”

김낙원이 그를 불렀다. 자신의 팔 안에 있는 이 육체가 놈의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낙원이 목화의 이름을 부르자 '음'하는 녀석 특유의 대답이 돌아왔다. 맞닿아있는 맨살의 가슴을 통해 들려온 대답이었다.

낙원은 자신의 몸을 울리는 그 대답에 활짝 웃었다.

“네가 먼저 한 거다.”

“……”

목화는 말이 없었다. 드물게 곤혹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설마 이제 와서 왜 그랬을까 라고 생각하는 걸까 싶어, 낙원은 웃으면서 녀석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왜, 또 자자고 할 거냐? 그리고 또 두 달을 잊은 척 할래?”

이번엔 네가 잊어도 내가 못 잊어.

이번만큼은 못 넘어가. 낙원이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네가 먼저 다가왔잖냐. 먼저 키스했잖아. 자신이 되돌린 입술에서도 녀석은 순순히 눈을 감아주었다.

이제 와서 밀어내지 말라고, 계속해서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금세 초조해진 낙원이 박목화를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

그러나 목화는 여전히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낙원은 녀석이 또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게 두려워졌다. 방금 전까지 스스로에게 '나는 안 잊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정말로 그 일이 있었는지, 자신의 상상 속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는지 두려워진다.

낙원은 녀석의 몸을 꽉 껴안았다.

박목화였다. 녀석이 여기에 있었다. 목화가 자신을 받아들여준다.

그 실감을 낙원은 다시 녀석의 입술에서 찾았다. 남자다운 선의 입술이었다. 이 입술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온 순간을 떠올리고,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녀석을 꽉 껴안았다.

'네가 먼저 했잖아.'

낙원은 재차 녀석에게 속삭였다. 낙원의 팔 안에 간신히 들어온 그 육체의 단단함이 그에게 이게 누구인지를 일깨웠다. 낙원은 녀석의 몸을 더 꽉 안았다. 품에 꽉차는 단단한 몸이 차다고 느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그 몸의 온도에 낙원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쏴- 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려 바닥을 적셨다.

발에 와 닿는 물은 아직 찼다. 낙원은 녀석의 발 옆에 자신의 발을 겹치고 자신의 몸으로 녀석의 몸을 덮었다. 좁은 샤워부스 안이 가득 찼다.

그러나 그렇게 좁은 곳이 둘의 몸으로 가득 찬 뒤에도 실감이 나지 않은 낙원이, 박목화의 눈을 다시 감게 했다. 그리고 감긴 눈꺼풀 위로 입을 맞췄다. 놈의 체온에 자신의 입술이 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목화에게 다시 입술세례를 퍼부었다. 이마에도, 코에도, 뺨에도, 입술에도.

혀로 더듬자 박목화가 약하게 목을 움직였다. 따라오는 그 몸짓에 낙원이 미칠 듯이 기뻐하면서 녀석의 입술을 벌렸다.

녀석의 입술에서도 비냄새가 났다. 촉촉한 냄새였다. 그리고 다시 맛본 입술 안. 그 뜨거운 체온에 닿은 뒤에야 낙원은 녀석이 받아들여주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색하게 얽어온 혀의 서툰 움직임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색하건 서투르건 하여간 녀석이 반응해준 것만으로도 낙원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녀석이 먼저 키스를 해왔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났다.

'박목화', 두 번째로 부르자 녀석이 작게 웃었다.

웃음이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좁은 샤워부스 안에 나지막하게 울렸다.

“네가 먼저 한 거야,”

낙원은 두 번째로 속삭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러고 가서 잊은 척 하면, 넌 내 순정을 희롱하고 짓밟는 거야. 그럼 죽……”

죽여 버릴 테다.

낙원은 그 끝의 말은 삼켰다. 현실 가능성이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죽이긴 왜 죽여. 평생 따라다니고 쫓아다니면서 묶어놓고 괴롭히겠지. 그러니까 넌 오래 살아야 돼.

뭔가 상관없는 일들까지 마음껏 뒤섞어 생각한 낙원이, 웃다가 곤란해 하는 박목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짓궂게 물었다.

“왜 했냐?”

“……”

목화의 얼굴에 더 곤란해 하는 빛이 번졌다. 녀석도 모르는 것이리라. 낙원은 소리 내어 웃었다.

녀석이 이럴수록 정말로 실감이 났다. 박목화가 자신에게 먼저 다가왔다는 것, 받아들여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녀석도 자기감정을 전혀 모른다는 것-

“왜인지 모르겠어?”

낙원은 좀 더 녀석에게 가까이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녀석의 몸을 쓸어내렸다. 아까 눈으로만 쫓았던 등 근육이 움쩔거렸다. 놀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맨살이 부대끼는 것 자체가 오랜만인 낙원이 녀석의 어깨를 안고 있었던 손을 등으로, 허리로 점점 아래쪽으로 쓸어내렸다. 요란한 물소리 속에서 박목화가 조금 더 움찔거렸다.

피하려는 듯한 그 움직임에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녀석을 쫓았다. 아직도 차가운 샤워부스의 벽에 등을 기댄 녀석을 더 밀어붙이면서,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육체를 갈구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빗소리처럼 귓가를 울렸다. 녀석의 숨이 거칠어졌다. 낙원은 목화의 입술에 퍼붓던 키스를 턱으로, 목으로 조금씩 더 아래쪽으로 퍼부었다. 이로 약하게 물었다가 입술로 문지르는 그 감촉에 박목화가 얕게 숨을 헐떡였다.

“이래도 모르겠어?”

낙원이 물었다. 박목화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낙원이 웃었다. 그리고 물소리에 섞인 그 호흡에 낙원이 좀 더 몸을 숙였다. 목에서 쇄골로 내려오자 녀석은 좀 더 뒤로 물러나려고 들었다.

낙원은 어깨로 목화를 밀었다. 더 물러날 틈도 없이 샤워부스의 벽으로 녀석의 등을 압박하면서 낙원이 녀석의 쇄골 안 움푹 파인 곳에 입술을 댔다.

잘근거리는 감촉에 목화가 숨을 들이켰다. 물소리도 무엇도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건장한 놈의 몸과, 단단한 근육 사이에 자리 잡은 놀랍도록 연약한 유두만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연약한 감촉이었다. 손끝에 닿은 놈의 유두를 낙원은 손가락 사이에 끼고 지분거렸다.

놈이 무어라 소리를 냈지만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알겠다'는 대답이 아니라면 그는 무엇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놈의 것이라면 뭐든지 목이 말랐다.

낙원은 몸을 숙여, 드러난 놈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반쯤 서 있는 유두를 입안에 넣었다. 부드러웠다. 손끝으로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모든 게 단단해 보이는 놈의 몸에서 이런 연약한 곳을 맛보았던 촉감의 기억은 낙원에게도 선명했다. 이미 그는 놈의 귀와 목덜미, 유두와 성기의 감촉까지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게 무척 오래된 기억이었을 뿐이다.

단단한 근육과는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그 피부를 혀로 굴리자 놈이 본능적인 경련을 일으켰다. 낙원은 달래기라도 할 듯 약하게 핥았지만 녀석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다른 쪽으로 입술을 가져갔을 뿐이다.

아직 차가운 몸에 물기가 남아있는 녀석의 유두는 빳빳하게 서 있었다. 낙원은 그것을 입으로 물었다.

“너…”

목화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경련을 일으킨 놈이 다시 무어라 소리를 냈다. 한숨 같고 신음 같은 기묘한 소리였다.

금방이라도 밀어낼 것 같은 녀석의 몸에 낙원이 이를 세워 잘근거리며 혀로 짓눌렀다. 입술에 닿은 유두의 끝, 그 여린 살을 낙원은 살살 깨물고 데웠다.

유두의 안쪽에서는 놈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낙원은 녀석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그 심장 위로 입을 맞췄다.

놈의 몸에서는 더 이상 물내음도 나지 않았다.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와 살내음만이, 그에게는 전부였다.

“이렇게 해도 모르겠어?”

낙원이 다시 물었다. 묻는 그도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목화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감고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하는 듯한 녀석의 모습에, 낙원은 다시 녀석을 흔들기 위해 덤벼들었다. 그러나 돌진은 결코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 부드러웠다.

낙원은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던 박목화의 배 위를 부드럽게 핥아 내려갔다.

붓처럼 부드럽게 쓸었다가, 약하게 이를 드러내고는 다시 혀로 맛본다. 그 근육 위를 덮은 복부의 피부는 보이는 것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연약한 피부 안쪽 탄력적인 근육이 잘게 경련했다.

“모르겠다.”

그때였다. 목화가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혼란에 낙원은 자신의 내부에서 뜨거운 것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그만큼 놈을 흔든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열정이 그를 움직였다. 낙원이 놈의 몸을 더듬던 입술에 체중을 실었다. 언제나 꽉꽉 닫혀 있던 단추도 셔츠도 여기에는 없었다.

낙원의 손이 거칠 것 없이 가슴을 내려가 단단한 복부 아래로 미끄러졌다. 상처를 더듬으려던 순간 놈이 몸을 움츠렸다.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 손으로 그를 밀어내거나 저지하지는 않았다.

이래도 아직도 모르겠냐고 낙원은 생각했다.

넌 지금 날 받아주고 있는 거야.

언젠가 그 손등에 입술을 맞췄던 기억을 낙원은 선명하게 떠올렸다. 자신이 남긴 상처였다.

어린 아이가 잘못 그은 하얀 크레파스 자국 같은 흉터. 한 번 찢기고 새로 돋아난 살 특유의, 자기 것 같지 않으면서도 이상하도록 민감한 감촉이었더랬다. 그 감촉과 복부의 상처는 또 조금 달랐다.

낙원은 목화의 배에 얼굴을 묻고, 흉터에 입술을 부볐다. 안으로 패이고 옆으로 찢겨진 우둘투둘한 상처였다.

수영복 위로 드러난 이 흉터를 보았을 때, 과거의 고등학생과 지금의 이 녀석을 갈라놓은 틈 같다고 느꼈던 것을 낙원은 떠올렸다. 그 정도로 이 흉터는 깊었다.

하얗게 남은 세 개의 흉터가 내려간 수영복과 복부 사이에서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위에 것은 급소에 가까웠지만 길고 얇았고, 복부 아래쪽의 것은 깊고 작았다. 그리고 마지막 것은 가장 크고 깊은 것이었다.

세 개의 상처가 목화가 움찔거릴 때마다 문신처럼 따라 움직인다. 그것이 목화가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처럼 그에게는 느껴졌다. 이 상처를 입고도 살아있다는 증명.

낙원은 무릎을 꿇은 채 경애를 담아 혀로 그 흉터를 핥았다. 그러자 흉터가 급박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박목화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하아, 하아, 숨소리와 같이 내뱉는 그 약한 소리는 성기를 물었을 때보다 더 흥분하는 것처럼 들렸다.

녀석의 무릎이 꺾였다. 낙원은 무너지는 것처럼 미끄러져 내려오는 녀석의 배와 흉터와 배꼽의 주위에 입을 맞추고 핥았다. 그리고 샤워부스의 벽을 타고 내려온 목화가 그와 시선의 높이가 같아졌을 때 그에게 속삭였다.

“넌 나한테 네 상처를 허락해주고 있는 거야.”

그 정도로 나를, 받아주고 있는 거야.

그렇게 확인해오는 낙원의 말에 박목화가 움찔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시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이 된 박목화를 낙원은 꽉 껴안았다.

'그냥 그렇다고 말해.'

낙원은 속삭였다. 그럼 되는 거야. 샤워부스의 벽에 기대어 앉게 된 목화가 낙원이 자신을 안아오자 무어라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낙원은 더 가까이 가 귀를 기울였다. '너도……'라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리고 목화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귀 끝을 약하게 물어왔다.

처음에는 꼭 애무같이 약한 움직임이었다. 낙원이 당황해하면서도 녀석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건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박목화가 그의 귀에서 한번 입술을 떼더니 다시 물어왔다.

“……!”

아팠다. 녀석의 단단한 이가 있는 힘껏 그의 귀를 물고 있었다.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고통스러운 그 감각에, 낙원이 반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그러자 박목화가 중얼거렸다.

'그때,'

-너도 그때.

그 말에 낙원은 그제서야 녀석이 자신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옛날 자신이 했던 짓이었다. 낙원은 처음 자신이 이 녀석에게 이를 세웠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녀석을 탐했던 욕망의 순간이었다. 빈틈없는 등을 꺾어, 테이블 위에 엎어놓고 내리눌렀던 정복의 감촉.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녀석의 팔을 꺾어 고통으로 경련하게 하면서 느꼈던 성감. 억지로 다리를 벌리고 표본처럼 누르고 압정을 꽂는 것처럼 파고들었던 어린아이 같은 즐거움.

“……아팠냐.”

낙원은 이를 악문 채로 신음을 눌러 참고 그 말만을 내뱉었다. 그러자 박목화가 귀에서 입을 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내가.' 목화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더니 다시 귀를 강하게 물어왔다.

“……!”

나는 얼마나 아팠는지 아느냐고 녀석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팠다. 녀석이 단단히 자신을 잡지 않았다면 자제를 잃고 바르작거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아픔에 낙원은 간신히 신음을 눌러 삼켰다.

그래도 자신이 했던 짓에 비하면 덜 하리라. 최소한 녀석은 자신을 뒤에서 짓누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귀를 그렇게 물면서 놈을 강간했었다. 저항조차 하지 못하게 하면서 뒤에서 짓누른 채로. 녀석은 그때 자신의 이름조차 몰랐더랬다…

그는 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는 알았다. 박목화였다.

앞쪽에서 귀를 물고 있는 녀석의 턱이 자신의 목에 닿아있었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박목화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착한 놈. 김낙원은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피식 웃었다. 그러나 곧 그 웃음은 고통 속에 뭉개졌다. 그 정도로 아팠다.

귓불이 뜨끈했다.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더 큰 아픔에 그 느낌마저 지워졌다. 현기증이 일 정도의 아픔이었다.

“미안해.”

낙원은 간신히 그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고통 속에서도 욕망에 불이 붙는 것을 느끼고 낙원은 스스로 자조했다. 박목화가 준 아픔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웅크렸다 일어나 살아가던 녀석이었다. 배를 찔려도 웅크리고 잊어버리던 녀석이, 자신이 준 상처를 다시 기억하고 자신에게 되갚는다.

녀석을 배신하고 몇 번씩이나 찔렀던 막내 조희용이 얼마나 저 박목화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했는지 낙원은 알고 있었다.

흉터가 아닌 상처를 남기고 싶었을 거다. 자기가 박목화를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면서 이를 갈고 쫓고 싶은 것처럼, 박목화도 배를 부여잡고 자신을 기억하기를. 그 상처에 몸부림치기를. 그렇게 초라해지기를.

그러나 그렇게 아끼던 막내가 새긴 배신의 상처마저 잊고 복수도 하지 않던 박목화가, 자신이 입힌 상처는 일부라도 자신에게 되갚으려 하고 있었다.

그게 꼭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 같아서, 낙원은 고통 속에서도 피식 웃었다.

그때였다. 박목화가 자신을 꽉 껴안고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쁜 새끼.”

처음 들어본 욕설이었다.

녀석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욕설에,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흥분했다. 피가 쏠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넌 알고 있냐. 넌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던 놈이야. 아무도 욕하지 않고, 그저 너 하나 참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놈이야.

그랬던 네가-…

어떤 속삭임보다도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듯한 그 욕에 가슴이 뛰었다. 욕설에 흥분하고 고통에 좋아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우면서도, 웃음이 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녀석에게 느꼈다.

박목화를 가지고 싶었다. 낙원은 소원했다.

저 녀석이 있는 힘껏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려고 애쓴 것이다. 나쁜 새끼가 그 답이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심장이 뜨거워지는 듯한 그 느낌에, 낙원은 한 번 더 사과했다.

“미안하다.”

평생 동안 누구에게도 무엇도 사과한 적이 없던 낙원이 그렇게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욕해줘서 고맙다고, 낙원은 그렇게 덧붙였다. 이것도 진심이었다. 그러자 박목화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때 아팠지.”

박목화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낙원은 웃었다. 그리고 웃는지 우는지 모를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낙원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미안해.'

지금이라면 그렇게 하지 못 할 텐데. 놈을 향한 욕망에 날이 설 때마다 그 자신에게 제동을 걸게 했던 그 뭔가가 무엇이었던가를 낙원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녀석을 상처 입혔기 때문이었다. 죄책감이라는 게 그에게 너무나 낯설어, 그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을 스스로 신경 쓰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었다.

미안해. 낙원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사랑한다고도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이 우는 듯한 소리를 띠고 들렸다. 나쁜 새끼라고 욕해줘서 고맙다고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넌 날 분명히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라고도 덧붙였다. 녀석이 반박한다면 네가 언제 남을 원망하고 아프다고 이야기해보았느냐고, 욕은 해보았느냐고 이야기해줄 셈이었다.

그러나 박목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을 껴안고 있던 목화의 팔에서 점점 힘이 풀렸다.

“……”

낙원은 박목화를 샤워부스의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몸의 아래로 아래로 더듬으며 입을 맞췄다. 샤워기에서 더운 물이 쏟아졌다. 따뜻한 비였다.

이미 녀석의 몸에는 온기가 있었지만 낙원은 계속해서 열기를 담고 입을 맞추었다. 알몸으로 벗겨내는 동안 녀석은 움찔거리기만 했을 뿐 저항하지 않았다.

낙원이 좁은 골반 사이에 자리 잡은 놈의 성기를 더듬자 한숨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낙원이 거기에 입 맞추자 목화가 놀랐는지 숨이 거칠어졌다. 목화가 '너,'라고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숨소리조차 물소리에 섞여 흘렀다.

낙원은 녀석이 몸을 빼내려는 것을 붙잡았다. 움츠리려고 하던 녀석이 등을 구부렸다. 정말 아르마딜로처럼 행동하는 박목화의 앞에서 낙원이 작게 웃었다.

'처음은 아니잖아.'

낙원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그는 녀석이 이런 애무에 익숙한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허리부터 쓸어올리자 녀석은 더 피하지 못했다. 이미 녀석의 것은 빳빳하게 일어나 있었다.

낙원의 손이 복부를 몇 번 쓸어내리다, 알몸이 된 하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발기한 놈의 것을 혀로 가볍게 핥았다. 물방울과 섞인 살내음이 혀와 코로 와 닿았다. 녀석도 이미 흥분해 있었다. 약한 정액의 맛이 났다.

가볍게 쥔 낙원이 꼭 맛보려는 것처럼 그 위에서 혀를 굴렸다. 이미 아는 맛이었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녀석의 맛이었다.

박목화는 거칠게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이럴 땐 좀 더 반응을 해줘도 되는 거야.”

낙원은 속삭였다. 그리고 목화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 그러자 바로 힘이 들어간 손끝이 자신의 손을 잡아왔다. 저지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 정도의 힘은 또 아니었다. 손이 그를 꽉 잡았다가 잠시 힘을 풀었을 때, 그는 놈의 것을 입에 물었다.

“……!”

녀석은 뜨거웠다. 체온이 다 여기로 몰려 있는 듯했다.

목화가 몸부림쳤다. 몸을 빼지도 못하고 내밀지도 못한 채 자신의 머리카락을 붙잡는다. 아까 녀석이 물었던 귀가 아파서,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이러다 깨문다.'

속삭이자 녀석이 그 와중에도 픽 웃었다. 그리고 저절로 머리카락을 당기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순간 낙원이 성기 아랫부분까지 단번에 입에 담았다. 그리고 빨면서 점점 뱉어내다가, 다시 혀로 핥았다.

녀석의 손가락이 욕실바닥을 긁었다.

어떻게 하지 못하고 격렬하게 뒤척이는 그 모습에 낙원이 녀석의 것을 좀 더 격렬하게 애무했다. 입에 문 채로 혀를 움직이자 입 안에서 커져간다. 녀석이 자신에게 반응하는 기쁨에 낙원이 도드라진 성기의 혈관을 핥았다.

박목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찰박거리는 물소리 사이로 녀석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입 안에 가득 담자 드디어 녀석이 참고 있었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라고 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하아, 라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까 나쁜 새끼라고 했을 때와 비슷한 연약한 소리였다.

그리고 드디어 녀석이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낙원은 입 안에 담았던 녀석의 것을 조금씩 굴리면서 녀석을 조정했다. 목화의 몸에서 의외의 연약한 부분을 찾아냈을 때와 다르지 않은 기쁨이었다.

따라오는 몸짓에 낙원이 입을 떼었다. 박목화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얼굴을 했다. 선명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은 녀석에게 흥분했다.

그는 입을 떼고 녀석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채로 몸을 붙였다. 그리고 이미 성기를 세운 녀석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것을 누르고는 비벼대듯이 문질렀다. 자신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몸짓이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 속에서 맞닿아있는 몸 사이로 열기가 퍼져나갔다. 녀석의 유두가 바짝 서 있었다. 녀석의 허리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왔다. 언뜻 내려다본 목화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삽입을 닮은 그 몸짓에 박목화가 반응했다. 욕실바닥을 긁던 녀석의 손을 끌자 녀석이 그의 등을 껴안았다. 낙원이 녀석의 것 위로 자신의 몸을 몇 번 비볐다.

-좋지.

낙원이 속삭였다. 박목화가 무어라 반박하고 싶으면서도 안 되는 남자의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낙원이 좀 더 거칠게 녀석의 것 위로 자신의 몸을 비볐을 때였다.

어느 순간 배와 허벅지가 뜨거워졌다.

“으…!”

눈을 감아버린 목화의 위에서 낙원이 작게 속삭였다.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따라붙었다. 그 두 마디를 되뇌일수록 박목화가 얼굴을 돌리더니, 몇 번을 속삭이자 돌린 귀까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낙원이 다시 녀석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려고 했을 때였다.

“……올라가자.”

박목화가 얼굴을 돌린 채로 중얼거렸다.

낙원이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녀석을 꽉 끌어안았다. 허락이었다.

알았다고, 낙원은 녀석을 끌어안은 채로 일어났다.

방으로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 길었다.

몸을 씻어내고 나오는 길에 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을 입으려던 녀석을 제지한 것은 낙원이었다.

'밤이니까 괜찮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대강 가운만 입혔다. 올라가는 길도 긴데 옷을 입으면서 녀석의 기분이 바뀌면 큰일이었다. 평소라면 따르지 않았을 녀석은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

달아오른 몸이 대강 샤워기로 씻어내는 와중에도 조금도 식혀지지 않아서, 옷을 입을 수가 없었던 게 낙원의 진짜 이유였다. 가운을 걸치고 나오던 길엔 다행히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도 박목화는 말이 없었다. 잠시 아까의 일이 사실이었던가를 생각하던 낙원이, 목화의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리고 목화에게 한 마디 했다.

“너, 사실은 선수지.”

“뭐……”

박목화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잖아. 아니면 어떻게 아까 수영장으로 내려오자는 소릴해? 나 봐라, 너한테 낚인 거.”

올라가면서 긴장을 풀기 위한 실없는 소리였다. 낙원이 싱긋 웃으면서 던진 말에, 박목화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실없는 소리란 걸 알았어도 역시 '선수' 소리는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누구한테 하는 얘기냐. 두 번이나 사진을 찍어주면서 웃었던 놈이-……”

목화의 중얼거림에 낙원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

되묻다가 기억난 건, 낮에 말을 걸어왔던 여자들이었다. 해변에서 헌팅한답시고 사진을 찍어달라던 그 여자들. 두 번을 찍었는지 세 번을 찍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런 걸 기억하고 있었어?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어주고 사진 찍어준 게 그렇게 신경 쓰였던 거냐?”

그냥 실없는 소리로 던졌던 말에 대어가 걸린 느낌이었다.

낙원이 실실 웃기 시작하자 목화는 '저게 왜 저러나'라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낙원의 기분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래서 여자직원한테 옷 봐달라고 할 때 여자한테 약하다는 둥 했구나. 그걸 기억하고 투덜거리고, 선수 같다고 하자 네가 더 그렇다고 했단 말이지. 낙원은 속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박목화, 너 그만큼 나한테 신경을 썼단 얘기잖아-

낙원은 엘리베이터 안이라는 것도 잊고 박목화에게 다가갔다. 목화가 움찔했다. CCTV를 가리켰지만 낙원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뭐 어때, 구경 실컷 하라지.'

낙원의 말에 박목화가 말도 안 된다고 밀어내려고 했을 때였다. 낙원이 고개를 숙이면서 속삭였다.

“왜 신경 쓰였는지 얘기해줄까?”

그리고 목화가 그를 쳐다본 순간, 낙원이 입술을 겹쳤다. 아직 물기가 남은 입술을 더듬은 낙원이 '질투야.'라고 속삭였다.

속삭임 치고도 단호한 말투였다. 아니라면 세뇌라도 시켜주겠다는 마음이 담긴 그 말투에, 박목화가 숨 한 번 쉬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냐.”

어이없어하는 말투였다. 그러나 얼굴에는 약간의 혼란이 담겨 있있다.

낙원은 싱긋 웃으면서 녀석의 혼란을 틈타 한 번 더 입술을 훔쳤다. 아까는 허락은 기쁘지만 여기서 하면 안 되겠냐고 생각했는데, 올라가는 것에도 나름의 맛이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운만 입고 키스한 낙원이 생각했다.

박목화의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흥분한 낙원이 막 녀석의 입술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땡,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서 열렸다.

낙원은 녀석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녀석의 팔을 잡은 채로 복도로 걸어 나와,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는 다시 목화의 입술을 탐했다. 녀석은 순순히 따라주었다.

어두웠던 욕실과는 달리 좀 더 선명한 불빛 아래 녀석의 입술이 부은 것이 보였다. 그렇게 부을 정도로 물고 빤 건 자신이었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숨이 거칠어졌다.

둘은 서로 엉킨 채로 침대로 쓰러졌다. 낙원은 목화의 가운을 헤쳤다. 단단한 몸에는 방금 전에 자신이 남긴 잇자국이 밝게 남아 있었다.

낙원이 웃으면서 쇄골에 남은 그 자국에 다시 입술을 겹쳤다. 그러면서 목화의 몸 위로 올라갔을 때였다.

박목화가 그의 목을 약하게 물었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 긴장했다. 귀는 만지기도 힘들 정도로 부어 있었다. 녀석이 남긴 흔적도 남아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목을 무는 행위에 그가 움찔거리자 목화가 작게 웃었다.

'나도, 그랬어.'

속삭여오는 그 말에 낙원은 녀석의 쇄골을 핥았다.

분이 풀리지 않으면 잡아먹어도 좋다. 솔직한 그의 생각이었다. 잡아먹힐 정도로 녀석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겨준다면 나름 괜찮을 듯했다. 처음으로 원망하고 처음으로 욕설을 내뱉은 끝에 녀석이 분을 터뜨리는 거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패지만 않는다면 괜찮아. 낙원은 그렇게 생각하고 싱긋 웃었다. 네가 주먹을 들어버리면, 난 오늘 밤에 널 안을 수가 없게 되거든.

바꿔 말해서, 안게만 해준다면 그 다음엔 죽여도 좋다는 거다.

낙원은 그렇게 자신을 허락한 채로 녀석의 턱에 목을 물렸다. 박목화는 그의 목을 단번에 강하게 물지는 않았다. 꼭 짐승이 맛보는 것처럼 이로 약하게 씹고는 뱉어냈다가, 조금 강하게 물고 씹는다.

그때마다 약간씩 긴장하면서 녀석의 몸을 더듬어 헤치던 낙원은 이게 꼭 애무 같다고 느꼈다. 녀석이 짐승이라면, 녀석은 지금 자신에게 배를 보인 채로 목을 물고 있는 셈이었다.

가운을 헤치자 놈의 벗은 허벅지가 드러났다. 낙원은 그 비좁은 다리 사이로 자신의 몸을 밀어넣었다. 올라오는 동안 식었을 것 같던 녀석의 몸은 그의 감촉에 빠르게 반응했다.

발기하기 시작한 녀석의 성기를 낙원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허벅지 사이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있었다.

낙원은 다리 안쪽으로 조금씩 더 손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체중을 실었다. 약간의 저항감을 느끼는 것 같던 목화가 그의 손길을 따라 무릎을 세웠다.

낙원은 그 사이를 벌리고 바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들이밀기도 전에 그 좁고 뜨거운 느낌에 신음했다. 녀석의 발기한 성기와 자신의 복부가 부대꼈다.

낙원은 우선 녀석의 것을 손으로 더듬었다. 약간씩 흐르는 액체를 쓰다듬던 낙원이 아까처럼 좀 더 강하게 몸을 비벼 올렸다. 박목화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를 드러냈다. 목 어림이 꽉 물리는 듯한 그 느낌에, 낙원은 녀석의 위에서 의도하지 않게 사정했다.

뜨끈한 감촉에 박목화가 얼굴을 찌푸리며 거칠어진 숨을 내뱉었다. 그 찌푸린 얼굴만으로도 낙원은 곧 다시 흥분을 겪었다. 그리고 사정한 액체의 도움으로 그 다리 사이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목화가 목을 젖히고 잠시 경련했다. 그리고 약하게 중얼거렸다.

'나쁜…'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신음소리와 함께 언뜻 귀를 스쳤다.

낙원은 그 낯선 욕설에 다시 한 번 흥분했다.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지나치게 조여서 순간 이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낙원은 이를 악물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목화의 허벅지를 벌리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놈의 내부는 좁고 뜨거웠다. 낙원은 천천히, 더 깊숙이 안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점점 더 깊이 들어가자 목화가 얼굴을 찌푸렸다. 낙원은 약간 뒤로 물렸다 앞으로 들이밀면서 녀석의 좁은 내부를 만끽했다. 아플 정도로 조였지만 환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조금씩 움직이면서 들어가자 곤욕스러운 기분이 들었는지 목화가 얼굴을 돌리려 했다. 낙원은 쇄골 어림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목화의 얼굴을 쫓았다. 그리고 그 돌린 턱선을 핥았다.

박목화가 고개를 조금 더 돌렸다. 낙원은 목화의 목 옆, 여린 살을 핥으면서 녀석의 내부로 좀 더 깊이 몸을 놀렸다.

놈의 몸에 뿌리 끝까지 들어가자 목화가 고통스러웠는지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입술은 약간 부어 있었다. 그것조차 사랑스러워, 낙원이 넋을 잃고 그 입술 위로 입을 맞췄다.

자신을 물어뜯어 상흔을 남긴 단단한 이였다. 그리고 그는 이 안쪽 입안의 부드러운 피부들 혀로 살짝 핥았다.

허리를 움직이자 빠져나가는 기색에 약간 편안해졌던 놈의 얼굴이, 다시 깊숙이 들어오면서 아픔에 일그러졌다. 그래도 이로 그의 혀를 물지는 않았다. 허락을 받았다는 게 다시 실감이 난다.

낙원은 녀석의 입술을 핥고는 다리 사이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벗은 허벅지와 다리 안쪽, 채 발기하지 못한 놈의 성기를 가볍게 쥐자 박목화가 이상한 신음소리를 냈다. 진저리를 치는 듯한 낮은 소리였다.

낙원은 성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까 혀로 굴렸던 그 부분을 손으로 가볍게 쓸었다. 발기하기 시작한 성기가 자신의 복부를 압박해왔다.

낙원은 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안쪽으로 좀 더 깊숙이 전진했다. 그리고 녀석이 아파하기 전에 얕게 찌르듯이 뒤로 물러났다. 목화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낙원은 맺힌 땀을 입술로 훔쳤다.

목화는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하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 찌푸리는 얼굴조차 사랑스러워, 낙원은 놈의 몸을 더듬어가다 연약했던 유두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목화의 목구멍에서 신음이 터졌다. 유두가 빳빳해지는 것이 녀석의 성기보다 더 빨랐다.

목화의 신음은 낙원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목화의 허리가 잔 경련을 일으키자 낙원이 목화를 조금 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낙원은 머리에 치밀어오른 열기로 점차 생각이 어려워졌다.

다시 입술을 핥자 놈이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입을 벌렸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온 낙원이, 목화의 몸속에서 조금 더 격하게 움직여갔다. 몇 번을 반복하자 박목화가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숨을 쉬었다.

몇 번을 더 그렇게 찌르듯이 움직인 낙원이 녀석의 내부를 한 번 휘젓듯이 돌렸다. 그 순간 배에 꼿꼿해진 놈의 성기가 와 닿았다.

“너,”

얼굴을 찡그린 목화가 숨을 헐떡였다. 낙원은 그 자리에서 쿡쿡 찌르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복부에 와 닿은 놈이 순식간에 빳빳해진다.

낙원은 집요하게 그 부분까지만 추삽질을 계속했다. 박목화의 성기가 팽팽해졌다. 내부를 자극하는 그 움직임에 처음으로 무언가를 느낀 박목화가 입을 벌렸다, 닫았다.

“……새끼, 윽!”

이를 악물고 내뱉은 그 두 번째 욕설에 낙원은 이성을 잃고 날뛸 뻔했다. 녀석이 느꼈다는 것의 반증 같아서였다. 그래도 그는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아까 알게 된 곳을 지긋이 누르듯이 내리박았다.

얼굴을 좀 더 찡그린 박목화가 자신을 밀어내려는 것처럼 손에 힘을 주었다가,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낙원은 녀석의 내부에서 자신의 몸을 빼내다가 다시 그곳까지 단번에 짓뭉개듯이 진입했다. 그러자 허윽,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박목화가 조금 더 고개를 돌렸다. 낙원은 녀석의 얼굴을 쫓아가면서 집요하게 똑같은 방식의 삽입을 반복했다. 박목화의 다리가 조금 더 벌어졌다.

녀석이 자신을 받아주고 있는 그 움직임에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순정은 통하는구나.

내내 쳐다보고 참기만 하던 그동안의 시간이 보답을 받는 것 같았다. 낙원은 박목화의 몸에서 허리를 빼내면서 속삭였다.

“……너도 날 좋아하는 거야.”

주문처럼 단호한 속삭임이었다. 안 되면 그렇다고 세뇌라도 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긴 속삭임이다.

박목화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려 했다. 낙원은 그 순간 다시 아까의 그곳으로 파고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삽입에 박목화가 저으려던 고개가 앞뒤로 휘둘렸다.

봐, 그렇다니까. 낙원이 녀석의 얼굴을 쫓아 입술을 누르면서 다시 속삭였다. 너도 날 좋아하는 거란 말이다.

-봐, 질투도 하고, 지금은 느끼잖아.

아니라고 말할 틈 없이 낙원은 녀석의 내부로 강하게 쳐올렸다. 팽팽해져있던 목화의 성기에서 약간씩 액체가 흘러나왔다.

느끼고 있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도록 낙원이 목화의 몸 안쪽을 몇 번이고 쳐올렸다. 박목화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약하게 진저리를 쳤다. 좀 더 진한 액체가 흘러 그의 복부를 적셨다.

박목화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라는 소리 따윈 들을 필요가 없었다. 사실로 만들 테니까.

낙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고 다시 녀석의 아랫입술을 물고 빨았다.

“사랑한단 말야…”

그는 그렇게 속삭였다.

입속에서 웅얼거린 말은 다시 입 맞춘 녀석의 입술로 옮겨갔다. 목화의 돌린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아까 돌리고 있던 귀까지 붉어졌던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붉어진다. 달아오른 얼굴과 반대로 찌푸린 이마에 욕망이 날뛰기 시작했다.

낙원은 더 깊숙이 녀석의 내부로 전진했다. 아까와는 달랐다. 몇 번을 어떻게 삽입했는지 이젠 알 수가 없었다.

낙원이 박아 넣을 때마다 박목화가 귀 바로 옆에서 신음 섞인 숨을 토해냈다. 고개를 돌린 목화의 뺨 위로 낙원의 땀방울이 떨어졌다. 그 숨소리에 뭔가가 툭 끊기는 듯했다.

낙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통제를 잃은 몸이 강하게 맞부딪쳐갔다. 맞물린 부분의 질척한 소리가 거친 숨소리에 섞여 울렸다. 격렬하게 파고들던 낙원이 어느 순간 뿌리 끝까지 한 번 더 강하게 파고들었을 때였다.

박목화가 한쪽 팔을 그의 등에 감았다. 한 쪽 손은 시트를 그러쥔 채였다. 두 손으로 안으면 자신을 저지할까봐 그런다는 걸, 낙원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괜찮아,' 그는 말했다. 네 뜻대로 해. 그러자 박목화가 어렵게 두 손으로 땀에 젖은 그의 등을 붙잡았다. 그렇게 하자 정말로 녀석의 몸 위에 온전히 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허락받은 듯한 그 기쁨에, 낙원은 녀석의 팔 밖으로 자신의 팔을 빼어 녀석의 어깨를 껴안았다. 이렇게 껴안은 건 처음이었다. 더 깊숙이 파고들자 어깨 안쪽으로 녀석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신음도 숨소리도 너무나 가까웠다. 더 이상 녀석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목화가 그의 등을 붙잡은 채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오는 그 반응에 낙원은 허리를 세차게 움직였다.

목화의 몸이 낙원의 허리짓에 따라 흔들린다. 손에 닿는 몸이 뜨거웠다. 귀에 닿는 숨소리가 가빠왔다. 자신의 것인지 놈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음과 숨소리가 섞일 정도로 녀석이 가까웠다.

좀 더 깊숙이 녀석의 몸 안으로 자신을 찔러 넣었을 때였다.

다시 녀석이 그의 목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약하게였다.

“……!”

몸의 반응에 어쩔 줄 모르다 자신을 물어버린 듯한, 애무 같은 몸짓이었다. 아픔보다 흥분이 먼저 왔다.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앓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간신히 되물었다.

'좋냐.'

속삭이면서 깊숙이 틀어박는 그에게, 녀석이 아무 말 없이 다시 그의 목을 물어왔다.

-미운 것 같긴, 흣…, 하다…

박목화가 가빠진 호흡 사이로 내뱉었다. 낙원은 그 말에 웃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웃지 못하고 그저 놈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갖고 싶었다. 이 좁은 내부를 휘젓고 싶었다. 녀석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밉다는 말이 불러일으킨 흥분은 나쁘다는 것보다 좀 더 컸다. 낙원은 온 몸으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박목화가 그의 등에 두른 팔을 움직였다. 시트를 쥘 때처럼 자신의 등을 그러쥐는 목화의 손이 땀에 미끄러지자, 낙원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배를 찌르던 녀석의 성기도 좀 더 부풀었다고 느꼈다. 피부 위로 뜨끈한 액체가 토해졌다. 배 아래부터 놈의 허벅지까지 젖어가는 느낌 속에서, 낙원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

온 몸이 잘게 떨려왔다. 사정은 길었다.

아래에 눌린 놈에게서 거칠어진 호흡이 새어나왔다. 점차 호흡이 길어지는 것을 귀로 들으면서 낙원도 숨을 몰아쉬었다.

먼저 팔을 시트 위에 뻗은 것은 목화였다. 온 몸이 젖은 듯한 느낌이었다. 녀석의 안에서 부유하는 기분으로 낙원은 그 몸 위에서 숨을 고르다가, 박목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 이러고 나서……”

아직도 숨은 고르지 않았다. 낙원은 약간씩 헐떡이면서 말을 이었다.

“다 잊었다고 하면, 죽여 버린다.”

박목화는 말이 없었다. 간신히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감았다. 자고 나서 모르는 척 하면 정말 그렇게 할 거라고 낙원은 뻗어버린 놈의 위에서 속삭였다.

순정남의 이름을 걸고 평생 괴롭혀주마.

그러나 낙원의 맹세에도 목화는 말이 없었다. 속삭임이 녀석의 귀에 닿았을까 닿지 않았을까. 낙원은 잠깐 고민하다 자신도 목화의 옆에 누웠다. 젖은 시트를 밀어놓고 목화의 옆에 뻗었다.

마지막으로 목화를 돌아본 낙원이, 녀석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다 자신도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녀석이 아까 살짝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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