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32화 (31/34)

6.

방으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때까지도 둘 사이엔 침묵만이 흘렀다.

낙원은 어떻게든 말을 꺼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박목화를 쳐다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박목화는 박목화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선을 아래로 두곤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하기야 녀석한테 먼저 말을 바란다는 게 좀 어이없는 일이긴 했다.

낙원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어떻게든 수습을 위해 한 마디 했다.

“비 많이 온다.”

소개팅 나가서 처음 만난 남녀가 가장 많이 한다는 대화 1순위가 날씨였던가. 평소라면 이런 얘길 할 리가 없는 김낙원의 어색한 수습에 그래도 박목화가 '음,'하고 받아주었다.

낙원은 속으로 안도했다. 이럴 땐 이 녀석이 과묵한 게 다행이었다.

“저녁은 어쩔래? 8시 넘어서 라운지에선 못 먹을 것 같은데.”

낙원은 평소처럼 대화를 재개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목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래 뭘 먹든 상관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낙원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물었다.

“비 오니까 나가긴 뭐하고 룸서비스나 시켜먹을까?”

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서 먹다 보면 좀 잊겠지. 낙원은 속으로 조금 안심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복도를 걷는 동안 낙원이 평소처럼 물었다.

“중식이 좋냐, 양식이 좋냐? 여기 요리부의 요리사가 나쁘지 않다던데, 양식으로 해볼까?”

목화는 알아서 하라는 듯 '그래'라고 중얼거렸다.

둘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커튼을 열고 나갔던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미 해변에는 쓰레기만 점점이 나뒹굴고 있었다. 너무 많이 오는 비에 다들 놀지 못하고 철수한 듯했다.

“내일은 좀 깨끗하겠는데?”

낙원이 웃으면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목화가 들고 온 쇼핑백을 탁자에 놓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낙원은 곧 그 쇼핑백 속에 들어있는 수영복을 떠올리곤, 자신이 했던 말까지 바로 떠올리고 말았다.

<남자 수영복 골라주면서 속으로 상상할 때 나도 내가 변태 같아, 새끼야.>

……아무래도 박목화는 조금도 잊고 있지 않은 듯했다.

하기야 자신이라도 그런 소릴 들었으면 잊기 어려울 것 같았다. 평생 동안 기억할지도 모른다.

낙원은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재빨리 돌렸다. 민망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감각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박목화가 놀리거나 떠올리게 하는 법 없이, 그래도 최대한 피해주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착한 놈.

낙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라'라고 누가 노래를 했던가. 박목화가 착하다고 하면 뒤집어질 놈들 많긴 하겠지만, 그의 기준에선 지극히 선량했다.

만약 그였다면 쇼핑백을 얌전히 탁자에 놓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내밀고 들어와 '입어봐 줄까, 변태새끼야?'라고 대뜸 놀리는 것부터 시작했을지도 몰랐다.

박목화가 자신과 달라서 다행이었다. 숨을 두어 번 들이켠 낙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메뉴판을 꺼내 박목화에게 건넸다.

“뭐 먹을래?”

그나마 저녁을 먹어야 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낙원의 수습에 목화가 메뉴판을 대강 보더니 접어서 돌려주었다.

“라면이면 돼.”

호텔 룸서비스로 라면이라. 낙원은 싱긋 웃었다. 아마도 녀석은 컵라면 같은 걸로 대강 먹는 걸 생각했겠지만, 의외로 마음에 드는 메뉴였다. 낙원은 전화기를 들고 바로 주문했다.

“해물라면으로 두 개 올려주세요.”

조리부에서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예, 알겠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룸서비스가 올라왔다.

“룸서비스입니다.”

직원이 정중하게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 오색 보자기를 씌운 해물라면 두 개 옆에 놓여 있는 와인을 발견한 순간 낙원은 인생 두 번째로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

그 와인은 낙원이 이 호텔에 숙박을 잡으면서 '룸서비스를 시키면 같이 올려 달라'고 특별히 따로 주문했던 것이었다. 그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룸서비스를 시키면서 취소했어야 하는 건데-

“기다리셨습니다.”

낙원이 어떻게 당황해하건, 직원이 상큼하게 웃으면서 바구니에 담긴 와인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양 옆으로 해물라면을 내려놓았다.

이그제큐티브 룸 중에서도 제일 비싼 최상층 방 안에 있는 남자 둘과 라면과 와인의 조합에 직원이 뭘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직원 건너편에 있는 박목화가 뭘 생각할지는 더욱 그러했다.

낙원은 차마 박목화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혹시 자빠뜨려볼까 하는 맘에 방에 와인 시켜놓고 그러는 게……>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체 아까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어떻게 맨 정신으로 그런 소릴 했냐. 낙원이 스스로에게 따져 묻는 사이, 직원이 와인을 따서 글라스에 따라주었다.

잠시 방안에는 와인을 따르는 또르르 소리만이 정적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두 잔을 따른 직원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좋은 저녁 되십시오.”

그리고 직원이 나가서 방문을 닫았다.

“……”

낙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박목화가 테이블로 의자를 당겨 앉더니 젓가락을 들었다. 낙원은 조용히 일어나 와인 두 잔과 병을 창가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도 젓가락을 들었다.

해물라면이 매워서 화끈한 건지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어컨이 틀어져있는 실내에서 낙원은 더위를 느껴야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먹는 내내 생각해보았어도 결론은 한 가지였다. 자신이 되레 찔려서 혼자 난리를 피웠다는 거다. 낙원은 방 한쪽으로 그릇을 치워놓으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남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 어떻네, 봐주지 않으니까 돌 것 같았네 할 때마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딨냐고 비웃었건만.

<난 세상에 인과응보라는 게 있다는 걸 널 사랑하고 나서야 믿은 사람이야……!>

자신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 낙원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평소 생각했던 거라곤 해도 그런 진실을 상대에게 내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자책과 후회 속에서 낙원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녀석을 곁눈질해보았지만 목화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놀리지도 않고 뭐라고 하는 법도 없이, 혼자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은 그 얼굴에 낙원은 더 이상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어떤 결론을 낼지 알 수가 없었다.

돌린 시선에 아까 치워놓았던 와인병과 잔이 보았다. 이 민망함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놓는 게 좋지 않을까. 낙원이 그런 생각에 막 일어났을 때였다.

“한 잔만 줘.”

목화가 그렇게 말했다.

“……”

치우려는 게 아니라 마시려는 걸로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그렇지만, 아까 그런 말을 듣고도 마시겠다는 건……

묘한 기대감이 생겨난 낙원이 목화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그러나 녀석의 얼굴에는 미동도 없었다. 그냥 마시고 싶으니까 가져다 달라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아예 아까의 이야긴 없었던 걸로 하자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낙원은 생각했다. 상처를 입건 뭘 했건, 박목화의 패턴은 대개 속으로 삭히고 묵혀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아물 때까지 연한 배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기다리는 아르마딜로. 언젠가 깨달았던 녀석의 패턴을 떠올린 낙원은, 자신이 안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묘한 분노를 느꼈다.

그렇게 민망하고 무안한 말을 대량으로 퍼부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녹아버리고 끝난단 말이지.

무슨 얘길 어떻게 더 해야 네 속으로 들어가 보냐. 낙원이 허탈하게 웃으면서 아까 직원이 따라놓고 간 와인 잔을 건넸다. 그리고 자신도 집어 들었다.

어두운 유리에 비가 끊임없이 맺히고 떨어졌다. 비가 쏟아 붓는 기세는 좀처럼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낙원이 바깥 저 멀리, 이제는 일렁이는 형체로도 잘 보이지 않는 검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저녁에,”

목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

낙원이 바다를 쳐다보면서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했을 때였다.

역시 바깥을 쳐다보고 있던 목화가 그에게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영장 가기로 하지 않았던가?”

낙원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홱 녀석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너,' 낙원이 혼란스러워하면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했을 때였다.

박목화의 담담하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바깥을 가리켰다. 낙원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목화가 바라보던 쪽을 쳐다보았다. 비가 쏟아지는 밤의 수영장은 텅 비어 있었다.

“가자.”

목화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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