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31화 (30/34)
  • 5.

    시장은 생각보다도 더 넓었다. 주차할 곳을 찾아 조금 돌던 낙원은 그나마 시장 옆에 로드샵이 있는 걸 보자마자 차를 대강 세우고 목화를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스포츠 웨어 샵을 들어가자마자 낙원은 직원들이 인사도 끝내기 전에 목화를 가리켰다.

    “이 친구 수영복 좀 봐주세요.”

    “놀러오셨나 봐요?”

    여자직원이 웃으면서 서울 말씨로 응대했다. 어지간히들 놀러오긴 하는 모양이다. 낙원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직원이 재빨리 남자 수영복 몇 개를 늘어놓았다. 낙원은 녀석을 불러왔다.

    “이건 어때?”

    펼쳐놓은 수영복을 놓고 묻자 목화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알았다'고 하더니 지갑부터 꺼냈다. 네가 왜 지갑을 꺼내냐. 그리고 뭐가 그렇게 빨라. 낙원은 우선 녀석을 막았다.

    “야, 좀 보고 사.”

    여자직원이 그러는 낙원을 보더니 애교 있게 웃었다.

    “두 분 친하신가 봐요, 남자 분들은 보통 서로 잘 안 봐주시는데.”

    “제가 잘 보니까요.”

    낙원이 유들유들하게 대꾸하곤 다른 것도 보여 달라고 했을 때였다.

    “남자 분들끼리만 놀러오셨어요? 바다 가면 잘 생겨서 인기 폭발이겠다- 걷고 있으면 막 말 걸어오고 안 그래요?”

    그 말에 낙원은 싱긋 웃어넘기곤 개 중 나은 걸 골랐다.

    “이걸로 다른 색깔은 없어요?”

    여직원이 안으로 상품을 찾으러 가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진짜 친하신가봐, 너무 잘 봐주신다-”

    “안 봐주면 권하는 대로 바로 살 녀석이라서요. 특히 여자 분이 권하면 끝이죠, 뭐.”

    아까 스쳐지나가던 여자들끼리 걱정하던 걸 생각한 낙원이 꼬여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낙원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목화의 반발을 들었다.

    “그건 너잖나.”

    “……!”

    허?

    낙원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목화를 쳐다보았다. 지금 너, 나한테 반박을 한 거냐? 아니, 그리고 내가 언제 여자가 권한다고 바로 산다고-

    그러나 목화는 그런 폭탄 같은 반박을 해놓고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양 태연하게 서 있었다. 그 태연함에 낙원이 놈의 앞에서 했던 행동들을 한순간에 돌이켜보았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할 수가 있냐? 게다가 항상 여자한테 약했던 건 누구야?

    낙원이 목화에게 막 무어라 하려고 했을 때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알았는지 옆에 서 있던 여직원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까 거가 마음에 안 들면 이건 어떠세요? 신상품인데, 친구 분 보기엔 어떠세요?”

    낙원은 울화를 가라앉히고 그 신상품이라는 걸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거기에서 거기긴 했지만 최소한 여태껏 내놨던 것 중에선 가장 나았다.

    “이건 어때?”

    그래도 낙원이 목화에게 물었을 때였다. 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주세요.”

    낙원은 그동안 봐두고 있었던 티셔츠와 반바지까지 휙 올려놓고 같이 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을 때였다. 먼저 지갑을 꺼내고 있었던 목화가 어쩐 일인지 반문을 했다.

    “네가 왜?”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와 돈을 꺼냈다.

    “야-”

    얌전히 있던 녀석이 오늘은 대체 왜 이러냐. 반응을 보여 달라고 항상 부르짖긴 했지만, 계산할 때만큼은 가만히 있어도 좋을 텐데 말이다.

    내가 한다고 당연하게 밀어내려던 낙원은 목화의 '왜?'라는 얼굴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자기 건데 왜 네가 계산을 하냐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면 같이 쇼핑하러 온 게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사다 뭘 안긴 적은 있어도, 같이 가서 산 적은 없었다. 그 얘긴 같이 사러왔다면 그게 언제든 녀석이 이렇게 나올 일이었다는 얘기였다.

    ……아까 백화점으로 가지 않길 잘 했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자칫했더라면 재벌집 후계자 노릇이 아니라, 실컷 다 골라놓고 계산할 때 되어서 옥신각신하는 진상 짓을 할 수도 있었단 생각이 들어서다.

    1년을 넘게 붙어있었는데도 여행을 오자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에서 녀석의 몰랐던 부분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다.

    초보 애인들이 허니문 갔다가 깨지고 돌아왔다는 이야길 알 것 같기도 했다. 상상도 안 해봤던 사람 많은 걸 좋아하질 않나. 이상한 부분에서 반발이 나오고 갑자기 반박한다.

    물건에는 그간 신경도 쓰지 않아서 내버려둔 거였구나. 낙원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얘긴, 지금 제대로 설득해놓지 않으면 다음에 혼자 녀석의 물건을 사서 챙겨놓는 짓조차 막힐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여자직원이 흥미진진하게 '이 카드로 해드리는 거 맞아요?'하고 묻는 동안, 낙원은 녀석을 가게 구석으로 끌고 가 진지하게 설득했다.

    “너, 정애가 차려준 꽃집 할 때 그 누님 만나면 누님이 고기 사줬지. 왜 그랬겠어. 누님 입장에선 어차피 네가 일해서 번 돈이 다 자기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 아냐. 너 지금은 어차피 내가 차린 카페에서 일해서 돈 벌지. 그렇지?”

    박목화가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게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생각하기 시작한 얼굴이었다.

    급할 땐 그 여자가 도움이 되는군. 낙원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우리 목화가 그렇게 좋아요?'의 환청을 재빨리 쫓아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어차피 네 돈이 다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건데, 기왕 하는 거 내 카드로 해서 내가 소득공제라도 받는 게 더 이득 아니냐. 그렇지.”

    “……아니 그렇지만,”

    넘어가는 듯했던 박목화가 곧 고개를 저으면서 반문하려고 했을 때였다.

    낙원은 직원에게 싱긋 웃으면서 소리쳤다.

    “예, 그걸로 해주세요-”

    그리고 낙원은 사인을 마친 뒤 재빨리 쇼핑백을 들고 여자직원의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받으면서 가게를 나왔다. 그러나 박목화는 이번엔 쉽게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가게를 나온 뒤에도 그를 붙잡더니 진지하게 반박을 시작했다.

    “너하고 누님은 달라.”

    당연히 다르지. 정애가 널 끌고 다니면서 옷을 사주고 그랬으면, 내가 그 여잘 내버려뒀겠냐? 낙원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옷은……”

    “이번은 사원여행으로 생각하는 게 어때?”

    낙원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목화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목화가 이해가 안 되는 얼굴로 길가에 우뚝 섰다. 낙원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회사에서도 연수 가면 회사 티 주잖냐? 내가 뭐 너 하나 건사하자고 로고 박힌 티셔츠를 몇 백 장씩 주문제작할 건 아니니까, 그냥 이걸 주는 걸로 만족해라 이거지.”

    “그게 무슨……”

    목화의 얼굴에 서서히 황당함이 번졌다.

    “너 나랑 같이 사택 살지. 그거랑 마찬가지야. 사장님하고 같이 출장 겸 연수 와서 비위를 맞추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라니까? 야, 남들은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사장 골프 치는 거 갤러리 해주고 '사장님 나이스샷!'도 해주는데, 넌 내가 쾌척해준 옷 하나도 못 입냐?”

    목화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낙원은 재빨리 쇼핑백을 손에 들려놓았다.

    이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줘야지. 이 더운 7월에 시장까지 와줬는데 그거 하나 못 받아 주냔 말야.

    그리고 목화가 아직 정신을 빼놓고 있는 사이 낙원은 빈손으로 녀석에게서 몇 걸음 벗어났다. 그때였다.

    “어어-”

    뭐야?

    지나가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친 낙원이, 상대가 크게 소리를 내자 고개를 들었다.

    어디 2000년대 초반 조폭 영화에서나 볼 것 같던 스포츠머리에 물 근육이 넘치는 중장년의 아저씨 하나가 그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면 이미 고개를 숙이고 저 멀리 피해갔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실제로 시장 길바닥답게 사람이 들끓던 곳에선, 이미 그 둘을 두고 공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낙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 이거 바라바라바라, 지금 내 칬나?! 니 사과도 안카나!”

    윽박지르는 꼴이 어디 조폭 전문 배우 교습소에서 나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말투다. 속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낙원은 바로 되받아쳤다.

    “글쎄, 빈말로도 죄송합니다가 나오지 않는 오버액션이라.”

    “…뭐……”

    예상 외의 반응에 상대가 놀랐는지 눈만 껌벅였다. 낙원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픽 웃으면서 덧붙였다.

    “왜, 서울말로 하니까 못 알아듣겠냐?”

    너도 동양의 행동대장을 끼고 살아봐라. 너 따위가 무섭나.

    '교습소'에서 나온 것 같은 상대는 이쪽이 말을 못 알아듣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뒤를 돌아보더니 지 패거리들을 불렀다.

    제일 잘 통하는 게 머리 숫자로 위협하는 거긴 하지.

    <형님->

    형님인지 행님인지 성님인지 구분이 안 가는 그 애매한 발음에 낙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부러 부딪쳐 와서 저런다는 게 너무 눈에 빤히 보여서였다.

    휴가용으로 대강 걸치고 나왔더니 서울에서 온 적당히 돈 많은 좆밥 정도로 보았나. 낙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시장 바닥에 나왔더니 역시 날파리들이 꼬인다. 사람 몰리는 휴가철에는 이상한 날파리들이 꼬이기 마련이라니까. 아까 세미나장 입구에서 그 날파리들을 청소해야 되는 청소부들의 연락처를 받아오긴 했는데 말야.

    개 중엔 서경위 동기도 있었더랬다. 그 동기는 과연 연락하면 언제쯤 도착하려나. 낙원은 한가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오기 전 서경위가 줬던 휴가철 사건 조서들엔 이런 케이스들이 좀 있긴 했는데 말이다……

    낙원이 팔짱을 끼고 남의 일 구경하듯 그 '행님' 얼굴 좀 보자고 하고 있을 때였다. 목화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해.”

    아니 좀 있다 오지. 네가 오면 장르가 바뀐단 말이다.

    낙원이 안타까워하면서 생각했다. 과연 목화가 등장하자 교습소가 술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좀 그쪽에 있어봤던 놈이면 녀석이 누군지는 몰라도 최소한 어딘가의 사람이구나 정도는 감이 오는 모양이었다.

    무기질의 도검처럼 담금질된 위협감, 낙원은 그걸 그렇게 평했고 김반장은 보다 간단하게 평가했다. '독하고 재수 없는 눈깔.' 한 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눈을 내리깔게 만드는 시선이라는 게 그 평가의 요체였다.

    <거기에서 치켜뜨면 싸움이 붙는 건데, 이미 심리적으로는 선방을 먹은 것과 마찬가지죠.>

    행동대장은 아무나 하냐고 김반장이 이야기했던 것을 낙원은 떠올렸다.

    교습소는 정말 자기도 모르게 약간 눈을 내리깔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눈깔을 치켜떴다.

    “뭐라고 씨부리쌋노-,”

    이야, 저렇게 시비가 걸리는구나. 낙원이 한가한 마음으로 구경하다, 교습소가 주먹을 날리려고 하자 반사적으로 뒤로 피했다. 그러나 교습소가 주먹을 휘두른 게 자신이 아니라 옆에 서 있던 목화였다는 걸 깨닫고 다음 순간 얼굴이 변했다.

    박목화를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상대를 걱정해서였다.

    “목…,”

    아니 왜 저 놈은 멀쩡하게 있던 박목화를 건드려-

    저 녀석을 건드리면 백이면 백 바로 폭력사건이 된단 말이다. 게다가 상대가 자신이라면 경찰간부라 가중처벌이지만, 박목화가 되면 어떤 식으로 비화가 될지 몰랐다.

    낙원이 재빨리 수습하기 위해 끼어들려고 했을 때였다. 뭐가 휙 지나간 것 같다고 느낀 순간, 그는 수습할 수 없는 사건 종결을 목격했다.

    “……”

    시장바닥에 누워있는 건 아까의 그 교습소였다. 어떤 조폭영화에서도 써주지 않을 것 같은 흉한 포즈로 널브러진 교습소가 제대로 된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우어어, 소리를 내면서 뒹굴었다.

    숨도 고르지 못하고 간간히 허억 소리도 섞여 있는 게 이번만큼은 오버 액션 같지 않았다.

    ……그러게 왜 덤비냐, 덤비길.

    목화가 내지르는 주먹의 위력을 실제로 겪은 적이 있었던 낙원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박목화.”

    낙원은 아래에서 뒹구는 놈을 발로 툭툭 치면서 목화를 불렀다.

    “7월 18일 오후 여섯 시, 너는 이 녀석에게 갑자기 주먹으로 가슴을 얻어맞고 숨쉬기가 어려워진 끝에 팔을 휘둘렀던 거다. 그러자 혼자 비틀거리다 넘어진 녀석이 누워서 오버액션을 하기 시작한 거야, 알겠지?”

    “……”

    목화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낙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문제는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10초 남짓이라 사람들이 보지를 못했는데, 다행히 목격자인 나는 휴가차 내려왔던 경찰간부라 이런 일에 익숙해서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거지. 내 소견으로는 이건 아주 명확한 정당방위인 거야.”

    그러자 박목화가 픽 웃었다.

    녀석의 귀중한 웃음을 보게 해주다니, 날파리도 좀 쓸만한데. 낙원은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는 목화를 타일렀다.

    “너도 말이다. 좀 적당히 팔을 휘두르지 그랬냐.”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목화 녀석도 좀 적당히 할 것이지. 조폭 영화 교습소에 진짜가 끼어든 거랑 마찬가지잖냐. 누가 봐도 시장바닥 날건달이 휴가철에 알바 뛰러 나온 수준인데 거기에 대고 '한 대 맞았다고 팔을 휘두르면' 어떻게 해. 조폭 영화가 갑자기 리얼 버라이어티 서바이벌 장르로 바뀌면 여기에 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냐, 응?

    그러나 아직 조폭 영화가 다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한 마디가 앞에서 들려왔다.

    “니네가 지금 뭐라고 씨부리쌋는기고……!”

    또 뭐야. 이것밖에 못 해?

    그새 낯익고 만 욕설에 낙원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까 이 교습소가 불러온 '행님'들이 이제야 도착했는지 그의 앞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 시장 길바닥에서 잘하는 짓이다. 서로 짜기라도 한 양 나타난 꼴에 흩어지는 시민들을 힐끗 곁눈질한 낙원이 피식 웃었다.

    진짜 영화를 찍어도 되겠네. 어떻게 저렇게 '길거리에서 주인공의 앞차기 맞고 쓰러지는 1인' 및 '각목 들고 설치다가 쓰러지는 1인' 같은 엑스트라 녀석들만 모아놨냐.

    문제는 박목화가 지나치게 주인공으로서의 포스가 있다는 점이었다. 별다른 긴장감도 보이지 않고 그에게 아까 샀던 쇼핑백을 건네는 점이 특히 그랬다.

    “구겨진다.”

    어이구야. 낙원은 혀를 찼다.

    아니 왜 여기에서 싸움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냐. 네가 그러니까 아직도 시비가 걸렸다 하면 너한테로 주먹이 날아오는 거야.

    “내 돈으로 사준 걸 아껴주는 건 고마운데 말이다, 박목화. 일단은 싸우지 않고 경찰을 부른다든지, 아니면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 뭐 이런 당연하고 건전하고 상식적인 생각은 안 떠오르냐?”

    낙원이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녀석의 손에 쇼핑백을 억지로 들렸다.

    박목화가 잠시 허를 찔린 듯한 얼굴을 했다. 마치 그런 생각은 처음 해봤다는 얼굴이었다.

    야, 여기 있잖냐. 경찰 간부 한 명. 왜 네가 해결을 하려고 들어.

    낙원은 피식 웃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이봐, 경찰을 부를 테니까 그쯤에서 접는 게 어때. 아니면 우리 도망간다?”

    놈들의 위협적으로 못 생긴 얼굴들이 잠깐 흔들렸다. 저게 무슨 소릴 하는 건가 헷갈려하는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낙원이 아까 받은 연락처로 통화버튼을 누르면서 싱긋 웃었다. 서경위 동기가 얼마나 유능한지 한 번 볼까. 그때였다.

    “형님-!”

    형님과 행님의 중간 발음에 낙원은 이마를 찌푸렸다. 영화 속 조폭 엑스트라 같던 이들 사이에서, 그래도 '너흰 이제 다 죽었다' 따위의 대사 한 마디는 칠 것 같은 '조연1'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저건 또 뭐야?

    “형님……!”

    감격이라는 양 눈까지 글썽거리며 튀어나온 '조연1'을 보고 박목화가 움찔했다. 뭐야, 설마 아는 사이인가. 낙원은 일단 누르려던 긴급연락처 단축 버튼에서 재빨리 손을 떼었다.

    “너……”

    박목화가 중얼거렸다. 낙원 및 그 뒤에 있었던 엑스트라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쪽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이 바라, 느그들 다 인사드려라. 내 학교 다닐 때 신세졌던 형님이시다-!”

    “……”

    그러니까, 감방 동기란 말야?

    낙원이 이 질긴 박목화의 자칭 동생들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애초 김원일이 이야기한 시장바닥을 오는 게 아니었다.

    간신히 둘만 왔다 싶었더니 어떻게 이 바닥에서도 또 감방동생을 보냐? 게다가 저 새끼도 박목화를 어지간히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박목화를 쳐다보는 꼴이 그 김원일 휘하 동생들을 바로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형님'의 저주다, 저주.

    낙원은 불쾌감에 젖어 대놓고 혀를 찼다. 업보란 게 있다면 박목화 업보엔 사내새끼들이 줄줄줄 딸려있을 거다. 아니 점집 가면 천생 조폭 팔자라고 할 놈이었다.

    옛날 박목화를 보고 길바닥에 칼 맞아 쓰러져서 죽을 놈이라면서 드라마를 기대했던 자신은 잊은 채, 낙원은 이번에야말로 잔뜩 꼬인 심사를 숨기지 못했다.

    넌 어떻게 왜 어딜 가서도 동생들이 잔뜩이냐?

    그러나 아무도 낙원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액스트라들이 바로 인사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인사드립니다-!”

    굉음 같은 소음과 90도 인사, 낙원은 자신이 질색하는 오래된 조폭 식에 치를 떨었다. 박목화는 그런 인사에는 다른 의미로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너무 익숙한 것이다.

    “됐다.”

    그러고 돌아서려는 박목화를, 그 자칭 동생이라는 감방동생은 놔주질 않았다.

    “형님, 언제 학교서 나오셨어요. 아니 부산 내려오셨음 저한테 먼저 말씀 좀 하시지. 저가 그때 그렇게 형님한테 연락처도 드리고 그랬구만.”

    “바빴다.”

    박목화의 그 한 마디에 '아우 형님,'하고 되지도 않는 애교 같은 소리가 터졌다. '행님이 갑자기 서울말 쓴다?'하고 뒤의 엑스트라들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낙원은 지금 저것들이 뭘 하나 쳐다보았다. 길바닥서 회포 푸냐? 왜, 감방을 학교라고 부르는 김에 동창회도 하지? 청주 18기 이런 걸로 사진도 찍어서 졸업 앨범도 하나 만들어주면 우리도 잡기 참 편할 텐데 말이다.

    “아니 그런데 여기까진 어쩐 일입니까요?”

    감방동생의 질문이 귀애 들어왔다. 박목화는 손에 든 쇼핑백에 힐끗 눈길을 주더니 대꾸했다.

    “놀러.”

    박목화의 간단한 대답에 감방동생이 호탕하게 웃었다.

    “아니 저 양반하고요? 아고고, 남자 둘만 와서 무슨 재미에요, 형님-”

    그럼 너하고 길바닥서 이러는 건 무슨 재미가 있겠냐.

    낙원은 잔뜩 꼬여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려다가, 박목화의 대답 좀 들어보잔 생각에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기다렸다.

    “저가 여자애들 좀 붙여드릴까요?”

    됐다고, 박목화는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오래 끌지 않고 물러났다.

    “간다.”

    그나마 너한테 일행이 있다는 건 잊어주지 않아서 고맙다. 낙원은 속으로 눌러 참고는 막 자리를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감방동생은 박목화를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

    “형님, 전번 주세요, 전번. 언제 함 연락드리게.”

    그리곤 박목화가 내준 핸드폰에 자기 번호 찍어서 거는 행태를 보고, 김낙원은 마지막 인내심이 툭 끊기는 것을 느꼈다.

    네가 지금 휴가 나온 군바리들한테 전번 따이는 20대 아가씨냐? 그걸 왜 줘? 대강 아무 숫자나 부르면 되는 걸 왜 못해?

    막 낙원이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목화가 그를 돌아보았다.

    “가자.”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형님-!>하고 소리 지르는 그 감방동생의 목소리와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목청껏 지르는 조폭식 인사 속에서 낙원은 부글거리는 속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전화번호 따위, 돌아가자마자 바꾸면 그만이다.

    괜찮아. 놀러온 거니까 좀 참자. 호텔로 돌아가서 라운지에서 저녁을 먹자구. 그땐 방해받을 일이 없겠지.

    새로운 인내심을 만들어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그렇게 주문을 걸면서 차 쪽으로 걸어가고 있던 때였다.

    -투둑.

    “……?”

    뭐야, 위를 쳐다본 낙원의 이마로 물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낙원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빗방울이 투두둑, 포석 위를 구르더니 틈새로 사라졌다.

    비였다.

    낙원은 목화와 함께 차를 타고 차문을 쾅 닫았다. 골고루 한다. 낙원은 시장을 떠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낙원은 운전하다 말고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까 시장으로 올 때에도 결코 시간이 적게 걸렸던 길은 아니었다. 30분 넘게 걸려서 왔던 길은 비가 오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막혔다.

    비는 갈수록 많이 쏟아졌고 길이 막히는 정도도 거기에 정비례해서 올라갔다. 특히 해운대 근처로 가는 길은 그냥 주차장이었다.

    놀러온 십만 명이 다 비를 맞고 튀려니 당연히 그렇겠지.

    “역시 사람 많은 덴……”

    낙원이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시간은 점점 7시 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라운지에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8시까지다. 이대로 가면 저녁도 먹지 못 할 듯했다.

    아까 그 감방동생 만나서 회포만 안 풀었어도 비 오기 전에 이 길 반은 가지 않았겠냐, 응?

    “넌 뭐 전국에 동생을 만들고 다니냐?”

    낙원은 불쑥 말을 던졌다.

    넌 대체 무슨 정을 그렇게 길바닥에 뿌리고 다니냐. 낙원의 마음속에서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군대에서 상병이었던 놈을 나중에 사회에서 마주쳐서 복수하는 경우는 봤어도, 그렇게 다시 봤다고 반갑다고 달려드는 경우는 드물다.

    감방이라면 당연히 더할 터였다. '인사해, 나 감방서 알았던 형님이야'한 뒤에 바로 칼로 찔려도 이상하지 않은 게 감방 형님과의 관계 아닌가.

    그런 사건들을 워낙 많이 접했던 낙원은 긴급연락처 단축버튼을 몇 번이나 누를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 인사에 안도와 함께 분노까지 느꼈다.

    저 박목화가 얼마나 잘 챙겨줬으면 조폭 영화 조연1이 하트 광선을 쏘면서 진심으로 형님 형님 하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지.”

    목화가 중얼거렸다.

    “네가 오죽 정을 뿌렸으면 그런 사내새끼들이 따라붙냐? 나중에 너, 전국 동생 모임 이딴 거 생기는 거 아냐? '목사모' 같은 거.”

    하하, 웃던 낙원이 스스로의 상상에 이를 갈았다.

    원일과 그 휘하 시끄러운 놈들은 다섯 명으로도 충분히 많았다.

    그 넘치는 동생들에 대한 정이 지금은 매우 고까운 정도에서 그치지만, 한 명이라도 늘어나서 행님이든 성님이든 박목화를 부르짖는 원육 따위가 생기는 날엔 자신이 아무래도 못 참지 싶었다.

    그 날이 아마도 '어찌할 수 없는' 사건이 생기는 날일 것이다.

    그때 가서 만일 박목화가 동생들에 대한 부탁의 말을 해온다면 해줄 말도 있었다.

    경찰 간부 하나가 무슨 힘이 있겠냐, 라고 하는 거지.

    낙원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워하다가 오로지 상상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이를 갈았다.

    비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아스팔트에 내리꽂히던 비가 차창까지 도로 튀어 올랐다. 차 덮개를 두드리는 비 소리가 요란했다.

    시간은 7시 40분이 넘어가는데 차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와이퍼가 매트로놈처럼 끊임없이 움직였지만 앞 유리는 계속 앞차의 빨간 후미등으로 빗자국 따라 번질 뿐이었다.

    “……감방에선 혼자는, 힘들어.”

    그때 목화가 불쑥 중얼거렸다.

    무리 짓고 서열을 잡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감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겐 그 무리가 생존을 위한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겐 동생이다.

    형님이다, 라는 그 단어가 위계를 잡는 그냥 빈말 같은 단어가 아니라 자신이 가져보지 않은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분명 그것도 그의 생존에 관련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혼자가 아닌 감각, 그것이 필요했다.

    자신을 찌른 건 막내였다. 누가 시켰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에겐 감방의 차가운 공기가 때때로 숨이 막혔다.

    외로움이란 그런 것이다. 찬 바닥을 짚던 손가락이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감각이 사라졌다가 쿡쿡 찔러 쑤셔오는 것처럼.

    마비된 것처럼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중에도 가끔씩 못 견디게 숨 막힐 때가 있었다. 빈말이라도 형으로 불리는 것이, 동생으로 부르는 게 필요했다.

    “그건 그때지. 부산까지 놀러 와서 뭘 또 동생을 찾아, 그럼.”

    낙원이 툭 말을 던졌다.

    가끔 목화는 저 녀석이 뭔가를 알고 이야기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말을 던지는 것 뿐인데 정곡을 찌르는 건지 잘 모를 때가 있었다.

    “……그런가.”

    목화가 되뇌었다.

    “지금은 내가 있잖냐.”

    낙원이 웃으면서 한 말에, 목화는 잠시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 말은 맞았다. 언제부터인가 분명히 옆에 녀석이 있었다. 동생도 형님도 무엇도 아닌 관계로.

    여자에게나 쏟아부어야 할 것 같은 정성을 자신에게 쏟아부으면서.

    원래는 여자가 있지 않았나. 치음엔 남자를 괴롭히는 데에 주력하는 이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했지만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본래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 녀석은 여자한테도 잘 웃었고 대하는 것도 능숙했다. 아까 사진 찍어 달라던 여자들을 떠올린 목화가 가만히 생각했다.

    왜 네가 여기에 있을까.

    “왜 있는 건데?”

    목화가 물었다.

    “……?!”

    낙원은 하마터면 앞차를 박을 뻔했다. 끼이, 간신히 급제동을 걸고 갓길로 차를 댄 낙원이 박목화를 돌아보았다.

    왜 있냐니?

    그럼 갔으면 좋겠냐?

    그렇지만 갔으면 좋겠냐고 대놓고 물었다가 녀석이 담담하게 <그래.>라고 했다간 자신이 일방적으로 붙어있는 관계도 종을 치게 된다는 생각에, 낙원은 한발 후퇴해서 물었다.

    “뭐, 있으면 안 되냐?”

    보통 이러면 어지간한 관계에선 <그건 아니고…>라고 대답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박목화는 예상을 깨고 고개를 기울이더니 담담하게 되물었다.

    “왜 있는데?”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이런 걸 묻지? 낙원은 목화를 힐끗 곁눈질했다. 목화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담담했다. 어쩌다 녀석이 이런 걸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낙원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좀 받아들여준 줄 알았는데, 자신의 착각이었던가.

    아냐, 같이 왔잖아. 낙원은 스스로를 달랬다. 아무한테도 같이 가자는 소리도 하지 않고 자신과 왔다. 여기에 있다는 것만큼 그동안 녀석이 자신에게 익숙해졌다는 걸 증명하는 건 없었다.

    최대한 녀석이 의문을 갖지 않게 옆자리로 파고틀자는 게 여태껏의 그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렇게 잘 해왔더랬다.

    이제 와서 그 익숙함에 의문이 들 리가-…

    그때 낙원의 머릿속에 아까 그 감방동생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그 조연1을 만난 뒤에 갑자기 생각이 달라진 걸까. 낙원은 자신이 가장 저어하던 생각을 하곤 그 조연1을 저주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박목화가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내 자리로 돌아가야겠어' 이런 말이 박목화의 입에서 나오는 게 가장 두려웠다.

    녀석이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게 된 건 조희용에게 배신당했을 때의 상황 탓이지 실제로 그만둬야겠다는 대단한 생각을 해서 나온 게 아니었다. 낙원은 자신이 광우가 사라진 그 잠깐을 틈타 곁으로 파고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친 소가 돌아오는 날, 박목화가 그 충실한 오른팔로 돌아가려고 든다면-

    “있으면 안 되냐?”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옆에 붙어있는 것밖에 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낙원이 다시 진지하게 그렇게 묻자 박목화는 고민하는 얼굴로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허락을 구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낙원은 대답이 없는 박목화를 기다리다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자 봐라, 나하고 있으니까 편하지 않냐? 지금 내가 운전해주지, 나랑 같이 휴가도 오지. 나랑 같이 살면서……”

    내가 여태껏 너한테 해준 게 얼마냐, 이렇게 늘어놓으려고 했던 낙원은 말을 흐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열거한 건 모두 녀석에게 별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맛있는 걸 먹건 좋은 걸 입건 편한데서 자건, 이건 오히려 자신이 필요해서 놈에게 강요한 것에 가까웠지 놈이 정말 필요로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낙원은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이 새낀 뭐가 이렇게 자연인이야.

    감방 하나에 동생 하나 넣어주고 밥만 제때 넣어주면 만족인 거 아냐?

    있는 힘껏 비굴해져도 애쓴 보람도 없다. 그렇게 성질을 누르고 옆에서 살갑게 굴어줬건만, 이 녀석을 설득할 수 있는 건 한 개도 없었다.

    낙원은 자신과 있어서 좋은 점을 열거하려던 전략을 포기하곤 거꾸로 쏘아붙였다.

    “내가 널 얼마나 신경써주는지 알기나 하냐? 휴가도 부산으로 왔지, 네가 사람 많은 데 좋아해서 해변도 걸어줬어. 내가 그 햇볕 속에서 걸어준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기나 하냐? 무려 시장까지 갔다가 이상한 놈하고 시비가 걸리질 않나, 네가 길바닥에서 동창회하는 것도 기다려줬다가 이젠 저녁도 굶게 생겼다.”

    안다, 말도 안 되는 거.

    박목화가 나한테 그러라고 시켰냐.

    낙원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열이 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름 녀석을 위해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이, 한 순간 그래서 '왜 하는데'로 뒤집혔는데도 할 말이 없어서였다.

    한번이라도 이 녀석이 자신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면-

    “그럼 왜……”

    왜냐고 묻지 말고 그냥 좀 해달라고 해, 이 꽃 같은 새끼야.

    낙원은 운전하다 말고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아, 어쩌라구, 내가 좋다는데……! 뭐 나는 같은 사내새끼 알몸이 보고 싶어서 바닷가 오자 그러고, 혹시 자빠뜨려볼까 하는 맘에 방에 와인 시켜놓고 그러는 게 마냥 좋기만 한 줄 아냐? 남자 수영복 골라주면서 속으로 상상하는 게? 나도 내가 그런 거 좋아할 때마다 변태 같아, 새끼야. 나도 멀쩡하게 여자 사귀고 자고 너 같은 놈은 그냥 구경하는 재미로 살았어.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어? 어쩌다 너 같은 놈이 마음에 든 게 문제지. 난 세상에 인과응보라는 게 있다는 걸 널 사랑하고 나서야 믿은 사람이야……!”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어, 그래.”

    목화가 드물게 곤란해하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고개를 돌린 뒤에야, 낙원은 방금 전 자신이 한 말을 돌이켰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이게 아냐. 낙원은 갑자기 세간에서 '쪽팔린다'고 이야기하는 그 민망함과 부끄러운 감각을 실감했다.

    얼굴이 화끈했다. 이전에 정애 그 여자가 '우리 목화가 그렇게 좋아요?'라고 물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민망함이었다.

    옛날 그 반지하방에서 박목화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땐 그래도 분위기라도 잡았다. 깁스한 환자를 때려죽이겠냐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한 건-…

    도망가고 싶다는 그 감정을, 낙원은 평생 최초로 느꼈다.

    그러나 평생 그를 따라다니던 강력한 행운은 어디로 갔는지, 불행히도 그는 운전 중이었다.

    그의 손은 핸들을 잡아야 했고 여기는 부산의 고가도로였으며 비가 와서 길은 막히고 있었다. 앞으로 30분은 더 가야 호텔에 도착해서 간신히 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박목화를 두고 내린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는 전방만을 보고 운전했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예상보다 더 걸린 40분 동안, 차 안에는 오로지 침묵과 빗소리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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