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호텔에 도착해서 방에 짐을 풀고 커튼을 걷은 순간, 낙원은 부산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최상층이라 바다가 멀리까지 보여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푸른 바다가 아니라 검은 색 바다를 보았을 것이다.
십만 명이란 건 우습게 볼 숫자가 아니었다. 백사장은 아예 보이지 않았고 해변에는 비치파라솔 뭉치들과 까만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만이 가득했다.
“……”
사람 구경하러 왔다면 확실히 이만한 장관도 찾아보기 어렵겠어. 좀 있다 저 점들에 합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저절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된다.
낙원은 창가에서 물러나 목화를 돌아보았다.
목화 역시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방향이 달랐다.
“뭘 봐?”
낙원은 그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목화가 팔을 뻗어 가리켰다.
그 방향에서 보이는 건 수영장이었다.
이 호텔은 건물이 두 개라, 그들이 있는 곳은 새로 지어진 건물의 고층이었고 옆쪽에 보이는 건 구관이었다. 그리고 구관에 딸려 있는 수영장이 이 신관의 고층에선 훤히 내려다보였던 것이다.
문제는 내려다보이는 수준이 거의 새로 이사 온 빌라에서 카페가 보이는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가족인 듯싶은 사람들 사이로 튜브를 끼고 뛰어다니는 애들까지 전부 보였다. 창가에서 크로키를 해도 될 정도였다.
저기라면 별로 전관을 대여하고 싶지도 않군. 저렇게 바깥에서 다 보여서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낙원이 혀를 찼을 때였다.
목화가 중얼거렸다.
“수영장이라니 오랜만이다.”
너, 가본 적이 있긴 하냐?
낙원은 하마터면 바로 되물을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좋은 기억력은 조각난 정보를 간신히 찾아낼 수 있었다. 박하연이 사건 있기 전, 고등학교 때 수영부에 있었다는 깨알 같은 정보였다.
박목화의 수영복 차림이라.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다음 순간 낙원은 스스로를 자조했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서 남자 수영복 차림 따위에 반응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야. 그나마도 그냥 반응하는 것도 아니고, 입히는 거 하나에 이렇게 목매달 줄은 더더욱 몰랐지.
그러나 자조를 하건 어쨌건 손은 이미 핸드폰을 잡고 있었다. 녀석을 합법적으로 벗길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손이 움직인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면 어때, 우리도 깨알처럼 보일 텐데. 낙원이 전관대여를 해달라고 하기 위해 막 핸드폰을 켜면서 '내려갈까?'하고 물어보려고 했을 때였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박목화가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봐라, 애들도 있다.”
“……”
넌 애들도 신기하냐.
고등학교 이후로는 시민 수영장 따위에도 한 번 가보지 못한 박목화의 발언에, 낙원은 핸드폰을 바로 꺼버리고 말았다.
……그래, 사람 구경하고 싶은 게 저 놈 소원이었지.
이번엔 말 그대로 '바캉스'를 가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비행기 안에서의 자신의 결심을 떠올린 낙원이 애들은 유치원 가면 떼거지로 있다든가, 사람 구경은 지금 해변만 내려다봐도 개미떼처럼 새까맣다든가 하는 소릴 꿀꺽 삼키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럼 좀 있다 내려가자.”
해가 들어가면 조금이라도 낫겠지 싶어 한 말이었다. 그러자 목화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낙원은 녀석이 뭘 원하는지 좀 알 것 같았다. 하여간 사람들 있는데서 같이 놀아보고 싶은 거다.
하기야 조폭 행동대장 시절엔 낮에 다닐 일도 별로 없었을 테지. 나와서 처박혀 있던 꽃집도 여하간 혼자 하는 일이고.
이대로라면 전관대여는 못하겠구나. 낙원은 얌전히 사우나를 포기했다. 수영복 차림까진 봐준다. 애들 사이에 섞여 놀더라도 그 정도는 괜찮다. 어차피 가족단위로 노는 덴데 아줌마나 아저씨들이 멀거니 녀석을 볼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사우나는 달랐다. 자신도 마음껏 보지 못하는 녀석의 알몸을 남들이 본다는 걸 생각만 해도 짜증이 벌컥 치밀어 올랐다.
“씻자면서,”
목화가 던진 말에 낙원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냐. 어차피 해변에 내려가서 좀 걷다보면 땀이 날 텐데 뭘. 그리고 더워죽겠는데 무슨 사우나야- 저녁에 들어와서 수영장이나 가자구.”
일리가 있다 싶었는지 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낙원은 십년감수한 기분을 느끼면서 싱긋 웃었다.
“그럼 옷이나 갈아입자.”
그리고 낙원은 바로 양복을 벗었다. 세미나에 출석도장 하나 찍고 명함 몇 개 받아오느라 입었던 옷이었다. 효용이 끝난 양복을 옷장에 걸면서 해변용의 티셔츠를 꺼내 입던 낙원은 움찔했다.
목화가 멀뚱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뭐해, 옷 안 갈아입어?”
바닷가로 온 이유가 애초 무엇이던가. 녀석을 좀 벗겨보자는 야망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해변을 걷는데 반바지라도 입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돌아보았던 낙원은,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목화의 대꾸에 그날 세 번째로 좌절했다.
“무슨 옷?”
낙원은 짐을 재빨리 풀어헤쳤다. 그러나 가방을 탈탈 털어도 나오는 거라곤 자신의 옷 뿐이었다. 목화의 옷은 서울에서 입던 셔츠와 바지류의 것들 뿐이었다.
“야, 넌 놀러오는데 당연히-……”
낙원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흐리고 말았다. 오늘의 실패가 다 무엇 때문이던가. '당연히'라는 게 녀석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은 자신의 폐착이었다. 일반인의 기준으로 한번쯤 물놀이라도 가본 적이 있을 거다 따위를 생각해선 안 되었던 거다.
저 녀석은 꽃집 하기 전엔 어버이날에 사람들이 꽃을 산다는 것도 몰랐어.
낙원은 한숨을 내쉬면서 생각했다. 그 시끄럽던 동생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크리스마스와 발렌타인데이 따윈 술집 가는 날인 줄 알았다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녀석이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짓은 고등학교 때 판타지 세계로 넘어갔다가 서른 살 되어 돌아온 차원이동물의 주인공을 붙잡고 '너는 왜 물놀이의 기본도 모르냐!'라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수영장에 애들이 있는 게 신기하다는 놈한테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을 기대하다니.
어쩐지 짐이 너무 가볍더라니. 아예 챙길 게 없어서였군.
“……수영복은 살 거지?”
그건 사야겠지. 박목화가 고개를 끄덕인 걸 확인한 낙원이 스스로의 성정을 간신히 다스리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그거 살 때 옷들도 좀 사자구. 어때?”
쇼핑을 하자는 소리에 녀석이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지만 낙원은 밀어붙였다.
“너 나가면 쪄죽어. 여기가 서울하고 온도가 같은 줄 아냐?”
“……내려가 보고.”
온도 이야기에 목화가 대답을 유보했다. 낙원은 싱긋 웃었다. 그나마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한 가지는 생겼다는 생각에서였다.
반드시 머리에 나사못 한두 개쯤 풀린 것 같은 긴장감 전무(全無)인 옷들로 입혀주마. 네 동생들은 양아치 같은 화려한 티셔츠도 잘만 입더만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낙원은 단단히 결심을 하곤 목화와 함께 해변으로 내려갔다.
7월의 바다는 짠내보다 사람냄새로 후끈했다. 오기 전에 봤던 기사 속 사진에는 과장이 없었다. 오히려 카메라 앵글로 담을 수 있는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을 뿐이다.
고공사진으로 찍으면 발 하나 들이밀 틈도 없을 것 같은 해변에는 소음과 비린내도 더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더위와 습기와 햇살까지.
쨍한 햇살 속에서 보이는 거라곤 온통 사람, 사람, 사람 뿐이었다.
물 반 고기 반 수준이 아니라 욕탕이군. 낙원은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바다 색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으로 가득찬 해변에는 사람 무게로 바다가 넘친 것처럼 파도가 밀려왔다 거품처럼 꺼졌다.
해변이라고 알려주는 지표는 오로지 모래 뿐이었다. 그나마도 모래 위는 뭘로 젖었는지 모를 발자국과 비치파라솔 사이로 뛰어다니는 애들과 잡상인으로 가득했다.
'거기 아빠랑 들어가!', '당신은 쟤 좀 잡아!' 애들을 불러제끼는 목소리 사이로 '아이스크림, 냉커피-!'하고 외치는 잡상인들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애와 햇빛과 소음의 결합이라니 이렇게 최악일 수가 없다.
그나마 해변 옆으로 목재로 된 길을 설치해놔서인지 걷는 건 불편하지 않았다. 애들 뱉어놓은 쭈쭈바에 쓰레기가 뒹굴다 묻힌 모래 사이로 걸어야 했다면 낙원은 진즉에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슬리퍼로 밟히는 게 땅이고 푹푹 가라앉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폭발직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던 낙원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애초 이런 델 걷자고 한 녀석을 쳐다보기 위해서였다. 박목화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호텔로 돌아갔을 길이었으므로, 그에겐 목화를 볼 권리가 있었다. 낙원은 제멋대로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한 뒤 박목화를 쳐다보았다.
그래, 걸어보니 좋냐?
입 밖으로 이런 말이 나가려는 걸 참으면서 목화를 돌아봤을 때였다.
“……”
박목화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조금이라도 힘들어 하는 것 같으면 '역시 됐지?' 이렇게 물으려고 했던 낙원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녀석은 이 번잡스러운 해변을 걷는 게 정말로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그 평온한 얼굴만 보면 뒷배경으로 어디 조용한 산사의 대웅전 처마를 깔아줘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넌 부처냐?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자기도 모르게 비꼬려는 말이 나가려다 멈췄던 건, 그래도 더위를 느끼는 모양인지 셔츠 단추를 한 개 풀고 있는 녀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구두가 아니라 자신이 가져온 예비용 슬리퍼를 신겨놓긴 했지만, 긴 바지에 셔츠차림이니 덥기도 할 터였다.
녀석의 얼굴에도 분명히 땀이 흘렀다. 그런데도 평온해서 낙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게 좋으면 걸어주지 뭐.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이 든 것도 한 순간이었다. 어떤 때라도 자신의 몸이 불편한 건 참은 적이 없었던 낙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지만 저 녀석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뭘 어쩌란 말이냐.
낙원은 셔츠 사이로 힐끗 보이는 쇄골을 훔쳐보면서 눈으로나마 자신을 달랬다. 그리고 정말로 잠깐 더위를 잊고는, 이런 걸로 달래진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그때였다.
“저기요, 저희 사진 좀 찍어주세요-!”
그의 앞으로 여름 해변답게 약간 탄 듯한 팔이 불쑥 내밀어졌다.
낙원이 고개를 돌리자 젊은 여자 셋이 까르르 웃으면서 낙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핫팬츠에 원색 찬란한 비키니 상의 사이로 가슴골이 드러나는, 본격적인 해변가 차림의 여자들이었다. 말투만 들어봐도 서울에서 놀러온 여자들이라는 게 티가 났다.
무시할까 하고 목화를 돌아보자 녀석은 약간 당황한 듯했다.
그래, 누가 저 놈한테 사진을 찍어달라고 사진기를 들이민 적이 있었을까.
낙원은 다시 한 번 이 휴가의 목적을 상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남들 같은 휴가, 말 그대로 '바캉스'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바캉스엔 가끔씩 이런 불청객들이 껴드는 법이다. 낙원이 똑딱이 같은 은색 디카를 집어 들었다.
“그러죠.”
'하나, 둘, 셋!'
속으로야 귀찮아하건 말건, 낙원이 엷게 웃음기까지 띠고 소리를 내자 여자들 셋이 깔깔대고 팔짱을 끼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낙원은 습관적으로 한 번 찍고 흩어지려는 여자들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디카는 한 번 찍은 걸로는 흔들릴지 모르니까, 한 번 더, 라는 그 제스처에 여자들이 <까-,>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모였다.
가져가라고 낙원은 사진기를 내밀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바로 사진기를 받아가지 않았다. 두 장 해주면 됐지 뭘 더 바라나 싶어 낙원이 사진기를 내밀자 받으러온 여자가 사진기는 받지 않고 은근히 허리를 숙이면서 그에게 붙어왔다.
“저어기, 두 분만 오신 거예요?”
뭐하냐. 헌팅하냐?
낙원은 피식 웃었다. 여자 꽤나 꼬셔보고 꼬심을 당해보았던 입장의 낙원으로서는 가소로울 정도로 속이 빤히 보이는 헌팅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둘에 여자는 셋. 보통 여자들은 이렇게 자신이 선택을 당할 입장이 될 게 뻔한 상황에선 먼저 안 덤비는데 말이다. 아가씨, 그렇게 자신 있어?
낙원이 픽 웃는 걸 어떻게 오해를 했는지, 여자가 한 번 더 말을 붙여왔다.
“남자 둘이면 재미없잖아요. 저희랑……”
거기까지만 해라.
낙원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됐습니다. 저 친구가 저래 뵈도 재밌는 친구라.”
그럼, 이 해변을 걸으면서 평온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보기만 해도 재미가 뚝뚝 떨어졌다.
낙원이 그렇게 대꾸하고 몇 걸음 떨어졌다. 그리고 가자고 목화를 끌어당겼을 때였다.
목화는 예상 외로 바로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처음부터 말을 붙였던 여자 하나가 투덜거리는 걸 들은 모양이었다. 재수 없다는 소리 속에 섞인 얼굴값 한다는 욕에, 낙원은 픽 웃으면서 목화를 한 번 더 끌어당겼다.
“가자.”
그리고 몇 걸음 옮긴 뒤에 목화가 의외의 말을 해왔다.
“그렇게 해도 되는 거냐?”
“뭐?”
낙원은 햇빛 속에 억눌렀던 성질이 갑자기 울컥 치솟는 것을 느끼곤, 휙 뒤를 돌아보았다. 박목화의 얼굴이 약간 딱딱했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아까 그 여자들한테 심하게 군 것 같지는 않았다. 헌팅이야 걸 수도 있는 거고 거절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낙원은 목화에게 대놓고 물었다.
“뭐야, 그 여자들하고 놀고 싶었어?”
비꼬려던 건 아니지만 말이 좋게 나가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긍정의 말이 나오거나 그래도 어떻게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면 '네 취향은 누님이잖아'라고 쏴줄 요량으로 한 말에, 목화는 다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잖아.”
낙원은 단번에 말을 끊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얘긴 됐다고 재빠르게 팔을 휘저었다.
제발 자각 좀 해라, 박목화. 내가 아무렴 너한테 봉사활동 한다고 같이 이 여름에 부산을 내려오겠냐. 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너하고 연애를 하고 있는 거란 말야.
그러나 차마 그 말을 입 밖에서 내어서 할 수도 없는 처지를 생각하고 낙원은 한숨만 쉬고 말았다. 그래, 끝의 말은 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연애를 하고 싶단 말이다'로.
같이 내려와주길래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고작 스쳐지나가는 여자들이 상처를 입냐 안 입냐가 더 중요하단 말이냐. 아직 멀었구나. 낙원은 오늘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아니, 나는……”
“쇼핑이나 가자.”
낙원은 목화의 말을 끊고 잡아끌었다. 그러느라 낙원은 목화가 이상한 얼굴을 하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목화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긴, 그럴 거면 애초 왜 사진을 두 번이나 찍어줬냐는 이야기였다.
“백화점 가자.”
낙원은 차를 타면서 바로 내비를 찍었다. 가서 쇼핑이라도 하면 기분이 좀 풀리겠지. 낙원은 스스로를 그렇게 달랬다.
서경위한테 재벌집 후계자 소리를 들은 김에 재벌집 후계자는 아니래도 땅 부자 졸부집 망나니 아들노릇 정도는 충분히 해줄 셈이었다.
'인맥관리'해줄 사람이 없는 날엔 TV 트렌디 드라마에서 재벌집 마나님들과 후계자님들 하는 꼴을 보고 그 상상력을 마음껏 비웃으면서 시청하는 게 취미였던 낙원은, 어지간한 드라마에서 나온 짓은 다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상층 펜트하우스의 스위트룸을 옷상자와 구두상자로 전부 채워주랴? 진짜 후계자는 바빠서 비서나 시켜야 하는 짓이지.
남자니까 여자들 옷보다야 돈이 적게는 세 배에서 많게는 열 배 가량 더 많이 들겠지만, 그깟 걸 못해줄 그는 아니었다. 부산이라 짐이 걱정된다면 전부 서울로 배달을 시켜줄 수도 있었다.
뭐부터 해줄까. 혼자 녀석의 셔츠 사이즈 보고 청승맞게 주문해서 채워놓던 짓이 아니라, 본체인 녀석을 들고 가 하나씩 맞춰볼 생각을 하니 이제야 좀 휴가 같다.
그는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비를 찍고 있을 때였다. 목화가 불길하게도 입을 열었다.
“원일이가 그러는데,”
그 이름부터 불길하다.
제발 거기서 그만, 낙원이 속으로 외쳤을 때였다. 그러나 이번엔 휴가가 아니라 분명히 '바캉스'라고 인식시켜주는 듯한 박목화의 말은 평온하게 이어졌다.
“부산에 있는 시장에 유부우동이 맛있대.”
“……”
사실은 날 골탕 먹이기 위해 다 짜고 하는 짓이 아닐까.
낙원은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7월에 무슨 유부우동을 먹으라는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그는 박목화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목화의 얼굴은 아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했다.
……녀석은 어쩌면 진심으로 이 휴가를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어딜 가자, 뭘 먹자는 이야길 목화가 먼저 꺼낸 적은 없었다. 거기에 뭐가 있고 뭘 먹을 게 있다는 정보까지 듣고 이야길 할 정도로 녀석이 이 휴가에 관심이 많다는 건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되씹어보면 부산을 간다는 이야길 동생한테 하면서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냥 환영도 아니고 쌍수 들어 환영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시장을-……
서울에서도 절대로 가지 않는 곳인데.
다른 거라면 금방 알았다, 가자했을 테지만 낙원은 이번만큼은 쉽게 양보하지 못하고 녀석의 맘을 돌리려고 시도했다.
“수영복은 좋은 걸 사야지. 일단 쇼핑 좀 하고 먹으러 가면 어때?”
그러나 목화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음.'하는 얼굴로 진지하게 앉아있는 녀석을 보고는, 낙원은 녀석이 어지간히 가고 싶은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내비를 검색창으로 바꾸었다.
“뭐, 어디 시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 나오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러나 부산시장과 유부우동을 찍자마자 나오는 시장 이름에 낙원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정말로 어쩔 수 없이 내비에 그 시장 이름을 찍기 시작했다.
만일 목화가 시장 이름을 두 번이나 틀리게 찍고 나서 나지막한 소리로 욕을 내뱉은 낙원을 보았다면 '다른 데로 갈까?'라고 물어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목화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까 낙원의 말에 끊겨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럴 거면 애초 왜 사진을 두 번이나 찍어줬냐는 것이다.
그는 길을 걷다가 모르는 사람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면 어떻게 대응하는 게 보통인지는 잘 몰랐다.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렇게 입은 여자들이 콧소리를 내면서 부탁을 해을 땐, 그냥 사진을 찍어달라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도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절하겠지 하고 아무 생각이 없었던 일에 의외로 열심히 두 번씩이나 찍어준 건 김낙원이었다. 오해를 불러온 건 낙원이라는 거다.
아까 여자들 셋이 하던 말들도 거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낙원에게 말을 붙였던 생머리 여자가 친구들에게 돌아갔을 때, 제일 처음 나왔던 말은 '뭐야, 저럴 거면서-'였다.
목화는 낙원이 잡아끄는 데도 불구하고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화를 내면서 이야기한 것까지 그는 듣고 있었다.
'얼굴 값 한다고, 선수 아냐? 그럴 거면서 뭘 저렇게 웃으면서 두 번이나 찍어.'
'맞아, 그냥 가면 되지.'
그냥 무시하고 가도 되는 일이었나.
그럼 녀석은 그냥 가도 되는 일에 멈춰 서서 두 번씩이나 웃으면서 찍어준 건가. 왜 그랬냐고 물으려던 걸 채 묻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이 일은 이상할 정도로 끈덕지게 뇌리 속에 기억이 남았다.
목화가 왜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내비를 다 찍은 낙원이 드디어 차를 출발시켰다.
“가자. 가서 니 말대로 하자.”
무엇을? 목화가 쳐다보았을 땐, 낙원은 백화점을 포기한 채 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