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29화 (28/34)
  • 3.

    “가자.”

    낙원은 차 트렁크에 짐을 실으면서 목화에게 말했다. 목화는 잠깐만, 하듯 그를 돌아보곤 카페 쪽으로 걸어갔다. 카페의 직원들에게 인사를 해두고 가고 싶은 듯했다.

    뭐, 국내도 나쁘지 않아.

    고작 3박 4일이라 카페 직원들에게 휴가를 주지 않고 주말 알바를 한 명 부르기로 한 건 꽤 만족스러웠다. 휴가를 가자고 할 때 그렇게 쳐다보지만 않았어도 너희들도 쉬었을 텐데 말이다.

    낙원은 웃으면서 카페 안쪽을 쳐다보았다.

    목화가 인사를 하는 게 유리창을 통해 보였다.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목화는 손을 흔들었을 뿐인데 직원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무슨 국빈이 인사하고 가는 양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저것들이 손님은 안 보고 고작 며칠, 그것도 부산 가는 사람을 붙들고 뭐하는 거야. 차에 기대어 있던 낙원은 이마를 찌푸렸다.

    누가 보면 어디 내전 중인 아프가니스탄이나 티베트쯤 가는 줄 알겠다?

    심지어 한 직원이 목화의 팔을 잡은 순간, 낙원은 차에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일으켜 카페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뭐하냐? 안 가고.”

    커다란 소리에 직원부터 손님들까지 전부 다 그를 쳐다보았다. 세미나를 가기 위한 양복 차림에 휴일용 선글라스를 쓴 낙원이 좀 수상쩍게 보인 모양이다. 앉아있던 여자 손님들이 심지어 재빨리 눈을 내리깔기까지 했다.

    언젠가 녀석과 함께 휴가를 갔을 때 휴게소에서 '엘리트 조폭' 소리를 들었던 굴욕이 떠올라, 낙원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손님들은 다 팽개쳐두고 뭐하냐? 부산 안 가봤어, 부산? 전부 서울밖엔 한 번도 못 가본 서울 촌놈인 것도 아니고. 가 일해-”

    내용과 말투의 위협성에 비해 억양만큼은 부드러웠다. 낙원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휘휘 팔을 젓자 직원들이 뭐라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항의들을 얼굴에 하나씩 새기면서 흩어져갔다.

    '저것도 사장이라고.', '진짜 형 아니면 여기 일 안 한다, 안 해.' 같은 그런 투덜거림들이 너무 빤하게 보이고 들려서, 낙원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목화의 팔을 잡고 끌었다.

    “가자.”

    “음.”

    목화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같이 걸어 나왔다. 그래도 직원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 건 잊지 않아서,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비틀리려는 마음을 힘들게 눌러야했다.

    “가면 뭘 하냐면 말야,”

    낙원은 운전하면서 그 사이 짜둔 계획을 줄줄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단 렌트를 하고, 그리고 세미나장 가면 넌 차 안에서 15분만 기다려. 방명록만 쓰고 나올게. 그 뒤엔 호텔에 짐을 풀자. 호텔에 노천온천이 있는 사우나가 있다니까, 거기에서 좀 씻고 놀다가 산책 좀 하고 라운지에서 저녁을 먹자구.”

    사우나는 가서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면 전용으로 두 시간은 대관할 수 있다. 이그제큐티브 라운지도 최상층 사람들만 가게 되어 있는 곳이니까, 사람으로 꽉 차지는 않을 터였다.

    거기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방에 돌아와 미리 시켜둔 와인을 마신다. 바다로만 나가지 않으면 그 10만 명 인파와 부딪칠 일은 없겠지.

    사람을 최대한 피해 오로지 바다는 풍경으로만 보자. 그리고 목화를 합법적으로 벗기고 술을 먹이자는 낙원의 검은 계획이었다.

    생각만 해도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서, 낙원은 의도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몇 번 풀어주면서 달려야 했다.

    “좋지?”

    낙원이 오로지 확인만을 위해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목화가 잠깐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댄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손아귀에 힘을 풀어야 했다. 그리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휴가철에, 주말까지 겹치자 김포공항마저 사람이 많았다.

    “여기도 사람이 많군,”

    항공사 카운터 앞에 줄을 서면서 낙원이 중얼거렸다.

    역시 남들 다 가는 휴가철에 휴가를 간다는 건 자신에게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엔 그냥 휴가가 아니니까.

    같이 줄을 서 있는 목화를 곁눈질했을 때였다. 목화가 문득 그를 돌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목화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낙원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응.”

    낙원이 대답하면서 무슨 이야기든 좋으니까 하라고 눈으로 재촉했다.

    그러자 녀석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했다.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곳으로 가보는 게, 처음이다.”

    그리고 목화가 작게 웃었다.

    ……뭐 사람 많은 곳에 가기 싫다고 하는 것도, 언제나 인파로 복잡한 곳을 겪을 수 있는 사람의 감상인지도 모르지.

    낙원은 입맛 쓰게 인정했다. 어쨌거나 이번이 박목화에게 여러모로 특이한 경험이라는 건 알아야만 했다.

    녀석이 고향 운운한 뒤에 한 번 더 기록을 찾아봤지만, 박하연은 둘째 치고 그 삼촌도 딱 한 번 면회를 온 게 끝이었다. 키운 정이란 것도 있을 법한데 어디까지나 녀석을 업둥이처럼 취급했던 모양이다.

    가족끼리 바캉스라던지 하는 어린 시절의 경험 같은 건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성장 과정에, 소년원에 교도소 경험들까지 생각하면 녀석한테 집단이란 어디까지나 동년배 이상의 남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위협적인 사회였을 테다.

    일반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으로 '놀러' 가보는 건 진짜 처음이겠지.

    -어이, 이러지 마.

    난 사람 많은 데는 딱 질색이란 말야. 낙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1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는 해운대 앞으로 숙소를 정한 걸로 난 할만큼 했어. 애들은 빽빽 울 거고, 잡상인으로 엄청나게 시끄러울 거야. 헤엄도 제대로 못 치는 인간들의 튜브 물놀이는 원래 구경만 하는 거야. 구경도 바로 옆에서 하면 시끄럽고 번잡하다구. 위에서 내려다봐야 맛이란 말야.

    그렇지만 옆에서 별 말 없이 비행기 밖 빛나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박목화에겐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낙원은 사람들이 여태껏 자신 앞에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항의를 했던 그 기분을 고스란히 맛보았다.

    도저히 녀석이 속삭여왔던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처음이다.'

    나한테도 그래. 낙원은 천천히 되씹었다. 박목화가 그렇게 낮게 이야기해온 것도 웃은 것도 처음이었다. 그 인파 속에서 녀석은 분명히 자신만을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웃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 속의 하나로 인식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군.

    낙원은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다'는 기분도 평생에 걸쳐 별로 가져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러나 이 녀석과 만난 뒤론 이런 기분을 가질 일이 너무나 많았다. 지금도, 그랬다.

    “해운대 사람이 10만 명이래.”

    낙원은 입을 열었다. 박목화가 돌아보더니 '많구나'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투엔 오로지 신기해하는 것만이 느껴졌다. 짜증내거나 싫다는 기색 따윈 손톱만큼도 없었다.

    하긴 녀석은 원래 시끄러운 데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그 원일이 휘하 시끄러운 놈들과 같이 다녔던 걸 떠올린 낙원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쩌면 시끄러워서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지.

    낙원은 발상을 바꾸었다. 그러자 오히려 이해가 갔다. 일당백은 될 정도로 시끄러운 놈들이니까.

    지난 여름이든 고기집이든 처음 이사를 왔던 날이든, 박목화가 그 녀석들과 있을 때 편안해보인 것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건 녀석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 외로 외로움을 탄다. 낙원은 처음 보았을 때 무기질의 뿔을 떠올리게 했던 박목화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

    단단해 뵈는 놈의 속이 어떻게 여린지 그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보다도 녀석은 좀 더 외로움을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이번엔 둘 뿐이었다.

    박목화는 동생들을 부르고 싶다는 이야긴 하지 않았다. 작년에 제멋대로 쫓아오긴 했지만 동생들이 왔을 때 확실히 편안해보였던 걸 생각한다면, 휴가 이야길 처음에 했을 때 같이 가는 거 아니냐고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목화는 둘만 간다는 게 확실한 상황인데도 휴가를 준비하는 내내 그런 이야긴 꺼내지 않았다.

    자신이 원일을 위시한 다섯 명만큼이나 시끄럽던가, 아니면 그만큼 박목화가 자신을 편안해한단 소리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십만 명 속에서 유일하게 녀석이 말을 건네고 웃는 한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번잡스러웠던 여행이 삽시간에 호사스러운 여행이 되는 기분을 느끼면서 낙원은 조용히 마음을 결정했다.

    그래. 올해엔 너한테 남들 가는 바캉스라는 게 뭔지를 느끼게 해주마.

    내년엔 둘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이 되게 해줄 테니까. 이번에 군중에 질리고 나면 내년에는 더 좋아하게 되지 않겠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낙원은 목화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말을 건넸다.

    “해변은 호텔 앞이니까 잠깐 산책하고 오자구.”

    그러자 목화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녀석은 정말로 사람 구경이 하고 싶은 거구나. 낙원은 사람들이 가장 바글거릴 바다를 최소화했던 계획에 조용히 X표를 쳤다. 군중에 질리는 데에는 한 시간이면 되지 않겠나.

    “응.”

    낙원은 각오를 새로이 다지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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