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주도……?”
그러나 의외로 목화는 그 말에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덥지도 않다는데. 남쪽이고 바다도 있고 섬이다. 좋잖아.”
낙원은 간단명료하게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정리해서 찬양했다. 그러나 박목화는 드물게도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냐, 그……”
너 사실은 비행기 못 타냐.
낙원은 녀석이 곤란해 하는 얼굴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제주도는 배로도 갈 수 있다는 소릴 하려고 했을 때였다.
목화가 망설이는 것 같더니 결국 말을 꺼냈다.
“고향이라서.”
“……”
낙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박목화의 출생지가 '우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서류를 봤던 기억도 난다. 그렇지만 그게 제주도 옆에 있는 섬이라는 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녀석에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그렇지만 녀석에게 들었던 이야기만 떠올려도 녀석한테는 조금이라도 연관되고 싶지 않은 곳임에는 분명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고 서울로 보내져서 살아온 녀석에게는, 그런 곳 근처엔 가기도 싫은 모양이었다.
왜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
……아니, 그렇지만 누가 출생지로만 적혀있는 그 조그만 섬 하나 때문에 제주도 전체를 가기 싫어할 줄 알았겠냐고. 이건 꼭 자기가 태어난 데가 영주 어딘가인데 경상북도 전체를 가기 싫다는 거랑 비슷한 얘기 아냐.
바꿔 말하자면, 그만큼 태어난 곳이 꺼려진단 얘기다. 워낙 호오(好惡)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감정 표현조차 하지 않는 놈이라, 그 정도로 꺼려할 줄은 몰랐다.
갑자기 낙원은 자신이 놈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을 깊숙이 깨달았다. 같이 살게 된 뒤에야 녀석의 입맛이 있긴 했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박광우는 알까. 그렇게 챙겨줬으니까 알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낙원은 기분이 뒤틀리려는 것을 누르고 일단 말을 돌렸다.
“부하가 추천하는 곳이 그렇지 뭐. 그럼 어디 갈까? 넌 뭐 마음에 드는 데 없냐?”
낙원은 애꿎은 서경위를 탓하면서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앞으로가 있으니까, 일단은 괜찮아.
어쨌거나 지금 박목화와 같이 있는 건 자신인 것이다.
“나?”
질문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려지자 목화는 놀란 듯했다. 여태껏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바캉스라는 것도 작년 여름 별장에 끌고 갈 때에야 즐겨봤던 녀석이, 뭘 생각해봤을 리가 없다.
목화가 곤혹스러워하는 얼굴에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즐거워졌다.
“그래, 같이 간다며. 넌 어디 가고 싶은 데 없냐고.”
목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고민하는 것만 봐도 좋았다. 같이 가주겠다고 하는 녀석을 위해 어딜 갈까 생각하던 때도 즐겁지만, 스스로 놈이 생각하는 것을 보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제야 정말로 휴가 같다. 낙원은 싱긋 웃었다. 박목화가 저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정말 같이 가려고 한다는 게 실감이 나서, 낙원은 날아갈 듯 기쁜 마음으로 다짐했다.
박목화, 네가 어딜 가고 싶다고 해도 가주마.
“……부산?”
그러나 간신히 말을 꺼낸 박목화의 대답에,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뭐?!”
이번엔 카페에 앉아있던 손님들 뿐만 아니라 직원들까지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낙원은 지금 그들의 시선 따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진심인가.
낙원은 놈을 재빨리 쳐다보았다. 그러나 당황한 얼굴의 녀석에게선, 정말로 그걸 진지하게 생각해봤다는 게 느껴졌다.
'해운대 10만 명'
타이틀과 함께 뇌리에 떠오른 그 사진에, 낙원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진심인 거야. 거기가 어떤 상황인 줄도 모르고……
“부산?”
가고 싶기만 하다면 갈라파고스부터 알래스카라도 같이 가줄 판에, 아니 해외는 안 된다고 했으니 백령도부터 울릉도까지 같이 가줄 판에 웬 부산? 그 사람 많은 대도시에서 대체 무슨 휴가를……?!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물었을 때였다.
목화가 왜 그렇게 묻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바다, 남쪽, 비행기.”
“……”
자신이 여태껏 주장했던 모든 요소가 들어가 있다는 그 대답에 낙원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그만큼 자신이 가고 싶다고 했던 곳들을 귀담아들어줬다는 얘기 같아서였다.
-네가 가자면, 못 갈 게 뭐가 있겠냐.
낙원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알았어. 준비해보지.”
목화는 몰랐지만 낙원의 심정은 처음 동거허락을 구할 때만큼 비장하고 진지했다. 평생에 이토록 각오를 다지고 대답한 적이 몇 번 없을 정도였다.
“서경위, 부산에 세미나 없는지 좀 알아봐.”
낙원은 공무원 식으로 해결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중순에 몇 개 있긴 한데……”
서경위가 말을 흐렸다. 이 녀석도 1년 반째, 슬슬 그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부산으로 가기로 하셨나보죠?”
은근슬쩍 넘겨보는 서경위의 말에 낙원은 싱긋 웃었다.
“세미나야, 세미나.”
휴가원은 아껴뒀다 출국 금지 풀릴 때 쓰자는 계산이었다.
부산 가는데 휴가원까지 낼 건 없고, 주말 끼고 세미나를 끼면 하루는 출장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하루는 월차로 하면 최소가 3박 4일이었다. 세미나 초청이면 비행기 표도 껴서 나오니까.
“초청에 비행기 표 껴서 나오면 동반으로 1인 더 달라고 해.”
낙원이 당부하자 서경위의 눈빛이 '역시'로 바뀌었다.
“부산이 좋으시대요?”
“뭐어…”
낙원이 별 말을 하지 않자 서경위가 알았다고 가면서 중얼거렸다.
'경정님도 의외로,'
“의외로 뭐?”
낙원이 되묻자 서경위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나 부하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생각이란 건 어차피 뻔한 얘기였다. 아마 그 뒤는 공처가라든가, 애인에게 꽤나 약하다든가, 그런 종류의 말들이 붙었을 것이다.
놈의 입에서 '어딜 가자'는 소리가 나오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줄 아냐.
낙원은 속으로 픽 웃고 말았다. 어디든 이번엔 놈이 원하는 대로 휴가 분위기를 내줄 셈이었다. 녀석이 처음으로 놀러 가는 거니까, 되도록 기분 좋게. 녀석한테서 셔츠를 탈의시키고, 좀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서-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진심으로 웃었을 때였다.
“그런데 가서 뭐하시게요? 서울이나 부산이나 그게 그건데. 저도 5월에 세미나로 출장 있어서 가봤더니 별로 다르지도 않던데요?”
서경위가 물어왔다. 예전에 자신도 출장으로 한 번 가봤던 기억을 떠올린 낙원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냥 대도시긴 했다. KTX 역으로 마중 나온 사람에게, 부산 사람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서울 사람다운 말을 내뱉었던 기억은 난다.
'바다는 바로 안 보이네?'
그래도 그게 몇 년 전인데.
“아직도 그렇게 놀 게 없어?”
서경위가 머리를 쥐어짜는 것 같더니 대답했다.
“전 5월에 다녀와서 최소한 바다는 한산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세미나에서 제공하는 호텔이 센텀이라서, 그때 같이 간 제 동기 하나가 온천 괜찮다고 추천하긴 했는데… 전 못 갔지만 다들 사우나 다녀와서 좋아하긴 하더라구요.”
“……”
너 미쳤냐, 라는 낙원의 눈빛에 서경위가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힐끗 쳐다보더니 멋쩍게 웃었다.
“7월에 온천이라니 뭐 그건 좀 그렇긴 하죠.”
“당연하지.”
낙원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제안이라고 단칼에 잘랐다. 7월에 온천, 그것도 남자끼리 온천을 간다니 제정신이냐.
그것도 박목화와.
박목화와 온천을 간다니. 상상만으로도 정신이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낙원은, 생각을 간신히 이었다.
……과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짓은 아니었다.
“온천이 어디라고?”
덥든지 말든지, 7월 광안리 온도는 가볍게 37도를 넘나든다든지 하는 것들은 낙원의 머릿속에선 이미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서경위가 '잠깐만요,'하더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저희 갔던 데는 센텀이지만 조선도 있고, 파라다이스 호텔도 있긴 한데요. 지금은 어딜 가셔도 숙박은 지금 다 마감이라……”
-휴가철이 다 그 모양이지.
낙원이 혀를 차자 서경위는 세미나를 준비하는 학회 측에 전화를 해보더니 곧이어 죄송하다는 얼굴로 이야기를 해왔다.
“세미나에도 숙박이 없답니다.”
“그럼 비행기든 기차든 교통이나 잡아달라고 해.”
서경위가 전화기를 든 채 망설였다.
“저기, 이 철에는 예약 없이 내려가시면 정말 방법이 없으실 텐데……”
“괜찮아.”
낙원은 자기 말대로 하라고 손짓했다. 서경위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명령불복종을 할 인간은 아니었다.
<예, 돌아오는 날짜는 당일이 아니고요……> 그래도 업무시간에 상사 휴가일정을 잡아주다가 무려 숙박까지 걱정해주다니, 처음에 비하면 정말 많이 무뎌졌단 말야.
언제 다른 데로 전출을 가도 꽤나 이쁨 받을 인간상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낙원은 유유자적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담배와 함께 전화를 하고 돌아오자 책상 위에는 항공사와 비행 일정이 적혀 있는 메모가 놓여 있었다.
일은 참 잘한단 말야. 낙원이 여상하게 메모를 접어 넣으면서 서경위에게 인사 겸 물어보았다.
“고마워. 그런데 1인 추가하려면 어디로 전화해야 하지?”
그러자 서경위가 머뭇거리더니 한 번 더 물어왔다.
“그건 제가 해드려도 됩니다만, 숙박 문제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내려가서 신세질 데라도 있으십니까?”
“뭐, 없다면 네 동기네라도 소개해주게?”
낙원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되묻자, 서경위가 움찔했다. 저 경정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걱정 마라. 내가 아무렴 박목화를 데리고 남의 집 따위에 비집고 들어가겠냐.
낙원은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됐어, 파라다이스 쪽에 잡아놨으니까.”
방금 전 아는 사람하고 통화를 마친 낙원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서경위가 놀랐는지 소리를 냈다.
“어,”
그리고 서경위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거긴 해운대 바로 앞이라 완전히 다 찼던데요. 어떻게-”
그러더니 서경위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역시 경정님 성함이 그랬던 건 파라다이스 그룹 후……”
저건 또 무슨 소리야.
그 희한한 말에 낙원은 대놓고 물어보았다.
“너 설마 나더러 파라다이스 그룹의 후계자라고 하는 거냐?”
“……!”
그러자 서경위 얼굴이 정곡을 찔린 듯했다. 낙원이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어떻게 상상하면 그렇게 되느냐 싶어서였다.
“파라다이스 그룹 후계자가 이름이 낙원이면 예진즉에 개명 신청했겠지 싶다?”
이름을 갖고 어디 후계자 운운을 하다니, 낙원은 마음껏 웃고 말았다.
후계자 이름으로 그룹 이름을 붙인다는 건, 재벌가 며느리로 어떤 여배우가 들어가자 따돌린답시고 영어로 이야기하면 불어로 대답하고 불어로 이야기하면 일어로 이야기하더란 소리 이후로 최고로 웃기는 이야기였다.
그때 그 소리를 들은 집안사람들이 그 일가는 프랑스랑 무역하는 것도 아닌데 불어는 왜 배우셨냐고 학구열 대단하다고 그랬었는데.
분명 이 얘기를 들으면 다들 이건희 아들들은 그럼 이름이 일성 이성 삼성이냐고 배를 잡고 웃으리라.
신문 유머란에 실릴 듯한 그 발상에 낙원이 웃고 있자 서경위가 겸연쩍어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세미나에서 들었던 얘긴데, 제 동기들 사이에선 경정님이 재벌 후계자라는 소문도 있었거든요. 취미로 일하시는 거라는 둥, 알뜰하게 경비를 타 가시는 것도 다 서민 따라하는 취미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세미나에 갔다가 '너 누구 밑에 있다며'라는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고 왔던 폐해다. 서경위가 정말 그런 거구나 하고 들었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 몇 번이나 사과했을 때였다.
낙원은 그 사과를 실컷 다 들은 뒤에야 조언을 시작했다.
“다음에 동기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몇 가지 정정해줘. 첫째, 그런 취미를 갖는 게 꼭 사람들이 생각하는 재벌 후계자여야만 가능한 건 아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서경위가 사과를 멈추고 낙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부동산 부잣집 아들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가능하다니까? 오히려 재벌집 후계자는 취미대로 못 살아.”
“그, 그……”
그럼 취미가 맞단 소립니까……! 그리고 그 정도면 보통 이야기하는 재벌집 후계자가 맞는 거 아닙니까.
상관이라고 차마 소리는 내지르지 못해도 얼굴만으로 무슨 소릴 하고 싶은지 다 표를 내는 서경위를 낙원은 웃으면서 내려다보았다. 참 이 녀석도 보는 재미가 있단 말야.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둘째, 취미대로 인생을 사는 게 뭐가 나쁜가?”
“……나쁩니다……!”
타인의 정신건강에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드디어 참지 못한 서경위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김낙원은 책상 위에 놓아둔 메모를 집어 들고 태연하게 묻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1인 추가하려면 어디로 전화해야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