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27화 (26/34)
  • 1.

    “그러니까 휴가를 가잔 말야.”

    김낙원이 주장했다.

    카페 안은 쾌적하고 시원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햇빛이 쏟아지는 바깥이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여름이 되어가면서 부쩍 이 괴리가 심해져, 카페 안으로만 들어오면 차원이동을 하는 듯한 감각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오늘도 외근을 핑계대고 나와, 법원에 일을 보러갔다 바로 여기로 퇴근해 와서는 이런 증상을 호소하고 있던 중이었다.

    “내내 서울에 남아있다간 더위를 먹고는 이차원(異次元)으로 날려가게 된다고. 에어컨 있는 데에서 바깥에 한 발짝만 내딛으면 신기루가 보인다? 그리곤 차가 제멋대로 움직여서 여기로 온다니까.”

    목화는 웃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투정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손님도 몇 없었다. 꽃테이블 쪽에 남아있었던 직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다'라고 생각하는 얼굴로 슬슬 자리를 피했다.

    물론 정말로 그런 차가 있다면 카센터로 보내야겠지. 그렇지만 낙원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어떤 핑계를 대서든 목화를 끌고 가자는 데 있었다.

    “이럴 땐 휴가를 가야 된다니까.”

    그제야 테이블용으로 꽃을 다듬고 있던 목화가 약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대꾸했다.

    “다녀와라.”

    “무슨 소리야,”

    저럴 줄 알았던 낙원이 곧바로 웃으면서 받아쳤다.

    “사장이 가는 데 월급사장이 안 가는 게 어딨어. 쉬면 같이 쉬어야지. 같이 가자구.”

    언뜻 들으면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 같아서 말이 되는 듯도 하지만, 까놓고 보면 오로지 자기가 그러고 싶다는 것 외엔 아무런 이유가 없는 논리였다.

    낙원과 함께 있게 된 지 이제 1년 3개월, 이제 슬슬 그의 패턴에 익숙해져가던 목화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사장이 놀면 나라도 벌어야지.”

    야, 말 좀 늘었다.

    속으로 자기가 저 꽃을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스스로에게 감탄을 하던 낙원은, 결국 대놓고 공세에 나섰다.

    “잠깐 여기 휴가 팻말 좀 붙여두고 가자니까. 이 카페 골목에서 아직까지 안 쉰 데는 우리밖에 없어. 다들 돌아가면서 쉰다고. 여기 들어오면서 있는 계단 카페도 못 봤냐? 거기도 벌써 갔더라.”

    “……”

    조금은 흔들리는 눈치였다. 낙원은 은근하게 공략했다.

    “그리고 직원 애들도 좀 쉬어야지. 응?”

    옆을 지나가던 직원이 그 말을 듣고 묘하게 표정이 변했다. 차마 자기네들 휴가는 안 줘도 된다는 소리는 못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자기들 핑계를 대는 게 괘씸하다는 얼굴이었다. 낙원은 거기에 대고 싱긋 웃어주었다.

    저것들은 내가 이걸 박목화한테 차려줬다는 걸 잊고 있는 것 같단 말야.

    어떻게 된 게 박목화 주변에만 갖다놓으면 이상하게 놈의 편이 된다. 박목화는 사람을 극과 극으로 만든다고, 낙원은 생각했다. 칼로 찌를 정도의 증오를 불태우든지, 아니면 자석의 반대편이 되어 형님 형님 거리면서 달라붙든지.

    그리고 어느 쪽으로 가도 낙원에게는 딱히 좋을 것이 없었다. 양쪽 다 방어를 해야 하는 건 그였다.

    “그러니까 휴가 좀 가자구.”

    목화가 손을 멈추더니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그 한숨소리를 훔쳐들은 낙원이 싱글싱글 진심으로 웃기 시작했다. 박목화를 흔들 수 있다는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놈과 같이 가는 여행, 이 두 달간 얼마나 이걸 바라왔던가.

    동거 첫날 이후로 녀석은 좀처럼 그런 분위기를 만들지 않았다. 박목화에게도 그 일이 꽤나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보름간은 저녁조차 같이 먹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밥을 같이 먹기 시작한 뒤에도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침대를 같이 쓰면 뭐하나. 씻자마자 바로 놈이 눕고 나면 끝이었다. 무덤에 들어가버린 것처럼 고단하게 자는 놈을 깨울 수도 없다. 옆에 누워있으면 잠도 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힘든 것은 자신이었다.

    여름이 다가오고 더워지기 시작하자 박목화도 셔츠 단추른 다 채우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누워 있다가 놈이 뒤척이기라도 하는 날이면, 잠옷 사이로 보이는 맨 피부에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당연히 얼굴에도 티가 좀 났을 것이다.

    드디어 며칠 전엔 서경위가 '경정님,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하고 작작 좀 하시죠 라는 말을 꿀꺽 삼킨 얼굴로 간언했다.

    말하는 어조만 보면 횡음(橫淫)을 일삼는 조선시대 왕한테 간언하는 것 같아서, 김낙원은 픽하고 비웃고 말았다.

    글쎄, 간음이나마 맘껏 할 수 있다면 좋겠다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있는 건 좋으니 이게 죽을 맛이다. 이차원으로 날아갈 것 같다느니 공중을 부유하는 느낌이라느니 한 낙원의 말은 사실 아주 과장만은 아니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다 어느 날 빽 돌아서 덮치는 날엔, 예전처럼 깁스를 한 환자 몸도 아니니 놈이 봐줄 리도 없을 텐데 말이다.

    첫날에는 좋았는데.

    그 생각만이 맴돌던 낙원의 머릿속엔 빨리 휴가를 가서, 둘만 있는 곳에서, 박목화가 자신을 피하지 못 할 상황에서 술을 먹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강박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낙원은 강력하게 휴가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가자.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가고나면 오히려 건조해서 더위가 덜 느껴지거든. 필리핀은 너무 가까워서 요새 물이 좀 안 좋고, 몰디브는 어때. 얼마 안 가 바다로 사라질 곳이니까 가는 의미가 있잖아.”

    “……”

    “타히티도 가는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꽤 좋아. 관광객도 의외로 많지 않은데 인프라는 괜찮거든. 서비스도 좋고, 바다는 원색이고.”

    되도록 사람이 적고 허니문 같은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곳.

    방갈로 같은 곳애서 처박혀 있다가 심심하면 스노클링이나 좀 하고, 박목화는 내내 수영복을 입게 할 수 있는 곳.

    낙원은 자기의 기준에 맞는 여러 곳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꿈을 펼쳤다.

    “의외로 하와이 같은 데도 가보면 군도라서, 관광객 잘 없는 섬으로 보트 타고 들어가서 리조트에서만 버틸 수도 있는데……”

    거기까지 듣던 박목화가 손을 내저었다.

    낙원은 말을 멈추고 목화를 쳐다보았다. 역시 하와이는 너무 신혼여행지 뻘인가. 좀 다른 데를 얘기해볼 걸 그랬나.

    뭘 얘기해야 넘어올까. 낙원은 머리를 굴렸다.

    코타키나발루? 아니면 녀석이 비행기를 힘들어할지도 모르니, 이번엔 가깝게 일본으로 오키나와?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언제 갈 건데.”

    “……!”

    넘어온 건가. 낙원이 믿어지지 않아 재빨리 대답했다.

    “네가 된다고만 하면 당장이라도 휴가원 낼 수 있어. 열흘 안으로는 간다.”

    그러자 박목화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해외는 안 돼.”

    “왜……?!”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카페 안에 있던 여자 손님들이 놀라서 쳐다볼 정도였다.

    왜 안 된다는 거냐. 설마 해외가 처음이라? 아니 처음이라고 해도, 내가 데리고 가줄 텐데 무슨-

    낙원이 막 설득을 위해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목화가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보면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출국금지 안 풀렸잖아.”

    “……”

    그랬다. 작년 동양사건 이래 내려진 출국금지조치는 광우가 잡히지 않은 지금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 서류를 자기 손으로 송치시켜놓고 잊고 있었던 거다.

    지금 그 조치를 풀려고 하면, 어느 형한테 전화를 해봐야 하나. 낙원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누굴 쑤셔야 그게 풀리지?

    “알아볼게.”

    낙원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사적 감정이 지나치게 앞선 낙원의 얼굴을 본 목화가,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는 가줄 테니,”

    목화가 꽃을 담은 유리병을 내려놓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국내로 해라.”

    낙원은 '같이 가준다'는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서경위, 지금이 7월이야, 7월.”

    낙원은 달력을 보면서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예? 예, 그렇습니다.”

    서경위는 '저 경정이 왜 또 저러나'라는 얼굴로 여상하게 대답했다.

    “애인이 없는 자네야 뭐 휴가계획도 없을 테니 지금이 7월이란 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서경위가 약하게나마 항의했다. 그러나 낙원의 귀에는 그런 항의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7월에, 국내라. 합법적으로 벗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바다를 포기할 수는 없는데.

    “국내 바닷가로 뭐 추천할만한 데 있어?”

    “국내에서 바다요?”

    서경위가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쩐 일로 국내를 묻냐는 그 얼굴에, 낙원은 웃는 얼굴로 대강 대꾸했다.

    “환율이 올랐잖아.”

    “……”

    그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이유에 서경위가 잠시 침묵했다.

    “뭐어, ……소비가 그간 워낙 크셨으니까……”

    100억 카페를 꾹 짚어 중얼거린 서경위가 그에게 대답했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검색해보시죠.”

    그리고는 자기 업무로 돌아간다. 직장에서 검색을 권하다니, 이 녀석도 무뎌졌어.

    아무리 더운 날에도 복장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딱딱한 놈이었던 서경위가 망가진 걸 보는 게 즐거워, 낙원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 웃음이 뚝 멈췄던 건 포털 사이트를 켜자마자 보인 기사제목 때문이었다.

    <해운대 오늘 10만 명 몰려.>

    ……보지 말자, 생각했지만 낙원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그 기사를 클릭하고 있었다.

    그러자마자 뜬 입추의 여지가 없는 바글바글한 까만 머리의 물결에,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저게 사람 물이지 바다냐. 애새끼가 들어가서 오줌을 갈겼는지 뭘 했는지 모르는 물에 처박히자는 거야 뭐야.

    “저걸 휴가라고……”

    “바닷가면 일선에선 고생 좀 하겠네요. 서울은 여름 되면 그래도 좀 나은데.”

    그때 서경위가 덤덤하게 건넨 말에, 낙원은 지금 이 자식이 꽤 고단수로 이미 그런 기사가 있다는 걸 알고 검색을 권한 게 아닌가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다음 말은 꽤 쓸만했다.

    “아, 제주도는 어떠세요? 동창이 거기로 발령났는데, 여름에도 특별히 바빠지진 않는다고 했거든요. 그럼 치안도 괜찮단 얘기 아닐까요?”

    경찰대 출신다운 추천 기준이었지만, 그래도 이번엔 쓸만했다.

    낙원은 싱긋 웃었다.

    “그건 나쁘지 않은데.”

    바깥으로 뜨지 못하는 건 섭섭하지만, 그 정도면……

    거기까지 생각한 낙원은 문득 지금 자신이 박목화와 같이 갈 휴가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작년 여름에 억지로 별장으로 끌고 가 재웠던 걸 생각하면, 같이 가주겠다고 한 녀석과 같이 할 계획을 짠다는 건 얼마나 달콤한 일인가.

    낙원은 싱긋 웃으면서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내년도 있겠지.

    기분 좋게 웃는 상관을 보면서, 서경위는 그 꽃집누님 꽤나 고생하시겠구나 하고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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