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26화 (25/34)

10.

저녁 8시 반, 낙원은 퇴근하자마자 와인을 사들고 집에 들어왔다.

간밤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하여간 술이었다.

낙원은 들어오자마자 거실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환하게 불 켜진 카페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리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카페에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 바로 식별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리고 시력이 특히 좋은 편인 김낙원은 그 사람들 중에서도 한 사람을 등만으로도 알아보았다.

꼿꼿이 편 등과 그 덩치는 흔한 것이 아니었다. 멀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녀석의 등에 단정한 매무새를 더하고 있는 건 동거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준비해준 셔츠와 바지였다.

하얀 셔츠에 바지라는 기본차림이라도 옷 따라 사람도 바뀌어 보인다. 간단한 셔츠라도 가격과 매무새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렇지만 놈은 뭘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리 옷장 속에 준비해놓은 옷들을 보고서도 상표는커녕 들춰도 보지 않은 채, 뭐가 이렇게 많냐고 중얼거린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가 '남는 상품권으로 샀다'고 하자 어디 유치원에서 배운 듯한 예절로 '고맙다'고 인사를 마쳤다.

의식주에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다보니 뭐가 비싼 건지 구분 못하는 놈이라는 게 이럴 땐 고마운 일이었다. 아마 알았다면 그렇게 끝내진 못했겠지. 뭐가 어찌되었건, 낙원의 입장에선 놈이 입고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즐거웠다.

놈이야 알건 모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보는 게 누군데.

흐뭇한 마음으로 멀리서도 빛나는 하얀 등을 내려다보던 낙원은 녀석의 손목에 언젠간 피아제 폴로를 채워주겠다는 꿈을 키웠다. 분명 놈의 손목에는 꽤 잘 어울릴 것이다. 저 놈 주위에 있는 깡패 새끼들은 어차피 롤렉스 따위나, 그것도 영문자 보고 알 놈들이니 폴로 같은 건 알 일도 없으리라.

목화 녀석이야 1만 원짜리 시장 시계와 뭐가 다른지도 모르고 쓰겠지만, 피아제 폴로가 채워진 손목을 보게 되는 건 역시 자신의 눈이었다.

꼭 채워주겠다는 마음을 먹던 낙원이 그 손목을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런 손으로 녀석이 꽃을 만지는 걸 보면, 지나치게 위험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혼자 망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숨이 가빠졌었던 낙원이,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훔쳐보는 변태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녀석을 보는 게 즐겁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오늘은 다시 와인을 먹여보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있었다.

낙원은 싱긋 웃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할 셈이었다.

“여보세요?”

바로 아래가 다 보이지 않냐. 바쁘면 애들이 부를 거라고, 애초 집에서 좀 놀라고 꼬셔보자는 마음에 시작했던 일이었다. 매일같이 일만 하지 않아도 사람이 산다는 걸 좀 알아주지 않을까 해서 벌인 일이다.

카페에 동거까지 성공한 지금, 낙원에게는 이 '삶의 질을 높이고픈' 꿈들이 모두 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다.

“어, 나 왔다고. 저녁 안 먹을 거냐?”

낙원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신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물었다. 그러나 박목화의 목소리는 '바쁘다'고 알려왔다.

정말 바쁘긴 한 것 같았다. '……해주시고요', '……고맙습니다' 같은 소리들이 핸드폰 저편으로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래도 낙원은 전혀 꺾이지 않은 채 제안을 마쳤다.

“차릴 테니까 먹으러 와라.”

그렇지만 놈의 대답은 확고했다.

“바빠.”

-나하고 밥 먹는 것보다 더 바쁜 일이 어딨냐.

하마터면 속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할 뻔 했던 김낙원은 숨을 한 번 들이쉰 뒤에 녀석에게 핑계를 댔다.

“저녁만 먹고 다시 내려가도 돼. 밥은 먹고 일을 해야지. 너, 거기 직원 애들 전부 굶기면서 일할 셈이냐? 교대도 좀 해줘가면서 밥도 먹여야지.”

“……”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목화의 말이 없었다. 직원들이야 어찌되었건 사실 이미 고용계약서에 싸인한 이상 신경도 쓰지 않았던 낙원은, 왜 자신이 놈한테 잘 해주려고 하면 언제나 목화 주위의 다른 추종자 새끼들을 들먹여야 하는 거냐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래서야 협박할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동거도 하게 되었겠다, 이번엔 좀 다르게 해보자는 생각에 낙원은 덧붙였다.

“……나도 배고프고 말야.”

뭐, 직원들 때문에 움직이게 되더라도 자신 때문도 조금은 있다고 생각하는 게, 기분이라도 더 좋겠지.

그때 핸드폰 너머로 '드셔야죠, 사장님', '드시고 오세요-'하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이놈은 어딜 가나 자기 추종자를 만든다.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던 낙원은, 그래도 그 목소리들이 사내새끼들인 게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정애 이외에 또 여자를 들먹거리면서 놈의 행동을 유도해야 했다면 속이 어떻게 꼬였을지 모른다.

“안 와?”

다시 묻자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목화가 대꾸했다.

“역시 많이 바빠.”

'너네 다녀와라'는 소리가 그리고 바로 들려왔다.

그러니까 지금, 놈이 애들더러 저녁 먹으라고 교대를 시키는 거란 말이지.

낙원은 울컥했다. 놀라고 실컷 가게 차려서 보내놨더니 이게 무슨 짓인가. 당장 올라와서 네 밥부터 챙겨먹으라고, 넌 사장이라고, 낙원이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이런 걸로도 다 안 되면 써먹을 비장의 무기는 따로 있었다.

너, 사실은 나하고 같이 먹는 걸 피하는 거지.

여하간 올라와서 먹고 술을 먹여놓기만 하면, 하고 낙원이 멋대로 꿈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목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챙겨먹고.”

“……”

간단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낙원은 놈이 자신을 신경써줬다는 것에 놀라 잠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건 녀석이 '그럼,'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이었다. 낙원은 재빨리 녀석을 붙들었다.

“야, 그래도 우선 너부터 먹어야지. 뭘 그렇게 열심히 하고 그래, 그럴 필요도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눈앞에 없어도 당장 이마를 찌푸리는 얼굴이 보일 것 같은 목소리였다.

“다 네 돈인데, 그렇게 허술하게 일해서 어느 세월에 갚아.”

“……! 아냐,”

그렇게 갚아야 할 돈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려던 낙원이, '뭐가?'라고 물어온 목화의 진지한 목소리에 두 번째로 할 말을 잃었다.

사실을 밝힐 수도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용돈이니까 안 갚아도 된다고 배짱을 부렸다간, 아파트까지 팔 정도로 돈이 어려운 줄 알고 시작된 동거의 구실이 깨질 수도 있었다. 어제는 어찌저찌 녀석이 넘어가 자고가긴 했어도, 다시 따지기 시작하면 일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낙원은 일생 중 드물게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 드문 상황이 최근 들어 벌써 두 번째였다.

“뭐가 아냐.”

“……아니, 그렇게 빨리 갚을 필요는 없다고……”

그러자 놈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알았다.'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뚜뚜 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전화기를 손에 든 채, 낙원은 허망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서 카페를 내려다보았다.

저 가게를 만들 때에는 놈을 놀게 하겠다는 원대한 야망이 있었건만, 이제 와선 놈을 더 바쁘게 하는 일만 제공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겠다는 건 기쁘지만, 그렇지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착잡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김낙원이 카페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때였다. 무척 좋은 시력으로 내려다보면서 박목화의 실루엣을 찾고 있던 그는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카페의 손님들이 아무리 대개 여자라지만, 놈의 주변을 둘러싼 건 그 중에서도 정말 여자, 여자, 여자였다.

놈이 서 있는 꽃 포장대의 가까이에 있는 모든 자리가 여자들로 꽉 차 있었다.

“……!”

꽃집에서 포장하러 들락거리면서 놈을 훔쳐보는 여자들도 싫었던 김낙원은, 순간 자신이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꽃집은 앉을 곳이 없다. 포장하면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카페는, 앉아있는 것 자체가 커피값에 포함된 당연한 권리였다. 이 여자들은 내쫓기는커녕 박목화가 어설프게나마 접대를 해줘야 하는 손님들이었다.

그동안 왜 이 당연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가.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놀란 그는 자신이 카페로 결정했던 이유를 빠르게 돌이켜보았다. 직원 여러 명을 고용해서 놈이 별 일을 안 해도 될 거라고 생각했지. 그랬었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었다!

“젠장,”

낙원은 결국 빠르게 옷을 다시 갖춰 입었다.

저녁도 가져다주고 주위의 여자들에게서 자리 하나라도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선 하여간 빨리 저 아래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정말 겉옷을 다시 입고 나와 아래로 내려오던 낙원은, 이렇게 밥을 가져다주고 가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전의 꽃집일 할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

한숨이 나온다.

결국 그 돈은, 꽃집보다 조금 더 편한 의자와 커피가 나오는 휴게실에서 놈을 기다리기 위해 들어간 셈이었다.

그나마 자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놈이 새로운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일을 하고, 쫓아낼 수도 없는 여자들이 한 가득인 그런 휴게실 말이다.

과연 놈이 본래의 꿈대로 '사장'자리에 익숙해져서 올라와서 같이 저녁밥도 먹고 연락이 올 때까지 노는 일이 생길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김낙원은, 자신의 꿈이 정말 말 그대로 꿈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봄바람치고는 무더운 바람이, 라일락 향기를 가득 안고 불어왔다. 그 바람을 맞으면서 내려가던 낙원은 다시 한 번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래도 박목화, 나는 너와 같이 나란히 앉아서 저녁밥을 먹는 꿈을 꾸었었는데 말이다……

일장춘몽이었다.

- 백억 카페, Fin.

<카페가 잘되는 이유>

카페 안에서는 '에코 형'으로 불리는 박영일은 출근하자마자 같이 일하는 녀석들의 군기를 잡았다.

“나왔으면 재깍재깍 바닥 치우자. 오늘 플로어 당번 누구야?”

'지인'이 나와서 자진 신고했다.

“죄송해요. 제가 한 번 더 커피를 내리는 연습을 하다가…”

옆에서 '미학'이 끼어들었다.

“지인이 형은 10분만 일찍 오면 되는데. 봐, 사장님이 결국 다 치우시잖아-”

'에코 형', 박영일이 가볍게 나무랐다.

“자기 일을 못해서 사장 형이 하게 해야겠냐.”

목화가 바닥을 청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장 형은 너무 부지런하단 말야. 이젠 에코로 불리는 데 자신도 더 익숙해진 박영일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추'가 가서 목화를 재빨리 붙잡았다.

“사장님, 지인이가 할 테니까 하지 마세요.”

“맞아요, 오늘 당번이거든요.”

목화는 하던 걸 다 끝낸 뒤에야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인이, 불러.”

이 전에 일했던 곳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건 모두 저 사장 형이 그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 탓이었다.

처음 소개를 했을 때부터 목화는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한 명 정도는 무어라 할 법 한데도, 그들은 그렇게 불리는 걸 기꺼워했다.

<꼭 동호회 같은 데서 아이디로 불리는 것 같단 말야.>하고 이야기했던 건 이추였다. 존경하는 선생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게 죄송스럽다면서도, 사장 형이 그렇게 부르면 자신이 정말 그 정도로 커피를 잘 뽑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는 것이다.

다섯 명은 곧 자기들끼리도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어쩐지 출신지 같아서 책임감이 더 생기긴 한다.

'에코' 박영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뭘 조금만 잘못해도 스쿨 탓인 것 같으니 더 열심히 할 수밖에.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들 사이를 엮어주고 있는 건 사장 형의 존재였다.

있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형이라고 부르고 싶고 기대고 싶고 믿어도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만이 그런 걸 느끼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에코는 처음 이곳에 출근했던 때를 떠올렸다.

스카우트를 했던 남자는 놀랍게도 선불을 제시했다. 우선 그 첫 달 치 월급을 선불해주겠다는 것이다. 대신 한 달은 버텨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법적 제재가 들어가게 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여간 나쁘지 않은 조건에 그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그 남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누구도 없는 상황에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미 선불을 받은 이상 멋대로 어디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정은 다들 마찬가지라, 역시 이상한 곳이었다고 다들 울부짖었다.

이추는 심지어 선불 받고 다방에 팔려갔다는 자기 아는 여동생의 이야기를 해서 모두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 세계에도 나름 호러가 존재했다. 선불 받고 갔더니 섹시 바였다더라, 누구는 비키니 바였다더라-

<선불이 너무 많지 않았어? 이러다 여기 호빠로 바뀌면 어떻게 해?>

그 말에 계약서를 누군가 서둘러 뒤져보았다가, 카페에서 주류도 팔 수 있는 허가를 받아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다들 정말로 공포에 질렸다. 사장 형이 왔던 건, 내일까지도 아무도 오지 않으면 진짜 다들 나오지 않기로 입을 맞춰놓았던 바로 그때였다.

“사장 형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지.”

에코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러자 미학이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월급 진짜 딱딱 나와요. 사장님이 엄청 챙기더라구요. 이런 데 진짜 드문데…”

“그 스카웃맨 저번에 온 거 봤어요? 진짜 싸가지야. 사장 형 없었으면 이 가게 말아먹었을 거면서 사장 형한테 엄청 딱딱거린다니까요.”

사장 형에 대한 칭찬은 곧 그 스카웃맨에 대한 욕으로 바로 넘어갔다. 언제나의 패턴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주 명품으로 휘감았다는 둥, 어디 땅 부자 졸부임에 틀림없다는 둥, 나 청담동에서 일할 때 그런 날라리 여럿 봤다는 이야기들.

“…엇!”

이추가 나지막하게 소리를 냈다. 모두가 이추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보고는, 일단 에코부터 얼굴을 팍 찡그렸다.

스카웃맨보다도 그들이 싫어하는 존재였다.

“저 동생들 또 왔다.”

미학이 투덜거렸다. 사장 형은 너무 좋은데 저 동생들은 싫다는 게 그들 모두의 일치된 견해였다.

다섯 명이 낄낄거리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커다란 웃음소리와 말소리에 앉아있던 여자 손님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글세, 시끄럽다니까요.”

“저 스포츠머리 봐, 진짜 손님들이 무서워해요.”

“꼭 조폭 같다니깐요.”

마지막으로 지인이 덧붙였다.

“저 동생들하고 있으면 사장 형까지 꼭 조폭처럼 보인다니까……”

에코가 알겠다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오늘은 꼭 쫓아내자.”

심기를 다지는 그 한 마디에, 목화 형이 '형제처럼 지냅시다'라고 한 뒤로 자칭 목화의 동생들이 된 직원들이 '예.'하고 비장하게 답했다.

맞어, 형님 운운하는 것들하고 묶이니까 사장 형이 꼭 조폭 같아 보이잖아.

에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 형이 말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끊어줘야 할 때였다. 저것들을 꼭 이 카페에서 한번 쫓아내고 말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은 에코가 이제 막 자리에 앉은 그 다섯 명을 향해 걸어갔다. 물이 담긴 쟁반을 들고 간 에코가, 물을 내려놓으면서 꼭 주문을 받으려는 것처럼 허리를 굽혔다.

“저기요, 사장 형의 동생 분들 되시죠?”

목소리는 낮았고 어조는 공손했다.

'야, 우리더러 목화형님 동생 맞냐고 묻는데.'

'맞잖아요, 형님.'

자기들끼리 오간 끝에 막내인 듯싶은 사람이 그에게 대꾸했다.

“맞는데.”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 에코가 싱긋 웃으면서 일어났다.

“주문 받지 않겠습니다.”

어어, 막내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야-,”

자신을 부르는 그 소리에 에코는 직원정신과 친절을 잠시 옆에 밀어둔 채 상큼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른 손님들 무서워하시니까 여기 너무 오래 계시지는 마세요. 물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에코는 물 두 잔을 전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다른 직원들이 '에코 형 끝내준다'하고 입을 움직였다. 이추는 손가락도 들어보였다.

그러던 녀석들의 얼굴색이 달라진 건 그 다음이었다. 손가락으로 급히 뒤를 가리키는 손짓에, 에코는 휙 뒤를 돌아보았다.

“목화형님 안 계신데서 얘기 좀 하자.”

아까 자신을 불렀던 그 막내가 뒤에 서 있었다. 그 뒤로도 줄줄이 일어나 있는 커다란 몸집에 위협적인 덩치들을 보고, 에코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용 탈의실을 지나 이추가 가끔 담배를 피우는 뒤뜰로 나가자마자 에코는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쳤다.

“형님 운운하면서 여길 찾아오시면 사장님에게 폐가 되지 않습니까.”

“뭐?!”

바로 자신을 둘러싼 그 동생들이 우렁차게 소리를 냈다. 이런 소리조차 컸다. 실외로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에코가 배에 더 힘을 주었다.

“자꾸 형님이니 뭐니 하니까 사장님이 꼭 조폭처럼 보이신단 말입니다.”

탈의실을 따라 나오는 길부터 '한 주먹도 되지 않을 게,'라고 중얼거리고 있던 원오가 그 말에는 흠칫했다. 다른 넷도 마찬가지였다.

원일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티가 났냐, 우리가.' 꼭 정곡을 찔렸다는 양 하는 말에 에코는 코웃음을 쳤다.

이젠 별 이상한 걸로 겁을 다 주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이 조폭은 무슨 조폭이야, 동네 어울려 다니는 백수건달들이지.

사장 형을 봐라. 12시 정오부터 정확하게 나와서 준비하고 아까는 플로어당번도 아닌데 청소를 하고 있었다. 꽃도 아주 센스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기본기는 의외로 탄탄해서, 포장기술을 조금만 가르쳐도 금방 늘었다.

무엇보다도 아침부터 일어나 낮에 일하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가는 엄청난 성실형이었다.

이전에 뭘 했는진 모르지만 회사를 다녔어도 과장급까진 충분히 바라보다 사내에서 줄 잘못 타서 희망퇴직 받고 나온 사람 같지 않냐고, 이추가 이야기했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분명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나왔을 거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런 사장 형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조폭들이 어딨어.

우리 사장 형이 왜 너희들 형님이야. 이런 분한테 누명을 씌우긴. 그리고 무슨 조폭들이 이렇게 매일 한낮에 하릴없이 나와서 카페로 형님을 보러 나오냐.

에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처음에 뒤에서 따라오는 위협적인 덩치들에 사실은 좀 겁을 먹었었지만, 이런 물덩치들, 하고 배에 힘을 주자 두려운 게 없었다.

먼저 소리치길 잘했지. 에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기선제압을 하자 자기들끼리 수군대기나 하고 별 대답도 없는 걸 보면, 역시 조폭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동네 백수건달이 맞는 거다.

“다른 손님들께도 폐가 되지 않습니까. 다섯 명이 그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자리나 차지하고, 시끄럽게 떠들고, 형님형님 소리를 그렇게 크게 내시면 위화감 듭니다.”

사장 형에게 빌붙지 말란 말야. 에코는 진심으로 사장 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또박또박 따지면서 덤볐다.

-원래 모르면 무서운 게 없는 법이다.

에코가 따지는 말에 원일부터 원오까지 모두 겸연쩍어하면서 머리를 긁적이거나 딴 데를 보았다.

“뭐, 저 녀석 말하는 게 재수 없긴 해도 하는 말에 틀린 건 없다. 형님의 신분이 발각나면 어떻게 하냐.”

원일이 그렇게 작게 동생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막내 원오가 거기엔 찬성하면서도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그건 맞는데요, 형님. 왜 저 녀석이 저렇게 나서는 거냐고요. 언제부터 지가 목화형님을 알았다고. 막말로 말입니다. 저희야 평생 형님한테 붙어있겠지만 저건 직원 아닙니까, 직원. 시급 좀만 더 주는 데 있으면 금방 옮길 놈이-……”

다 들린다, 다 들려.

에코가 분노했다. 그때 에코의 신변을 걱정한 미학과 이추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뒤로는 지인이에 부암까지 보였다. 플로어에 사장님만 남기고 다 온 모양이었다.

빨리 한 명이라도 가서 도와드리라고 에코가 손사래를 치는 동안 원오의 말이 이어졌다.

“안 그러냐구요. 월급 10만원 더 주는 데 있어 봐요. 저런 놈들이 낼름 옮기지. 그럴 거면서 챙기는 척을 하고 우릴 까는 거 아닙니까, 형님.”

'음.' 원일이 고민하는 얼굴로 에코를 쳐다보았다. 이 순간에 바로 전치 8주쯤의 부상을 당하느냐 마느냐가 갈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던 에코가 허, 하고 기가 막힌 소릴 냈다.

“가만 들어보니까 그쪽만 사장 형을 염려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에코의 말에 원일을 비롯한 다섯 명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때 원오의 말을 들으면서 속이 배배 꼬이고 있었던 나머지 넷이 줄줄이 걸어 나와서 에코의 옆에 섰다.

하얀 셔츠에 넥타이, 까만 바지를 입은 정직 직원들의 차림새에 원일을 비롯한 동생들이 멀거니 그들을 쳐다보았다. 얘네가 뭐하나, 라는 시선에 에코가 공손한 듯한 말투로 끝까지 따져들었다.

“저희도 사장 형이 형제처럼 생각하자고 말씀해주신 입장이거든요. 진짜로 핏줄 통하는 동생 분들은 아니시죠? 너무 안 닮았잖아요.”

'맞아', '에코 형, 옳아요!' 옆에서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일과 동생들이 멈칫했다.

“아니 뭐 핏줄이 중요해? 너희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목화 형님하고 우린 생사를 몇 번을 넘어온-……”

원오가 분통을 터뜨리는 찰나 에코가 말을 툭 가로챘다.

“아, 그러셨어요? 어디 해병대라도 같이 다녀오셨나 보죠? 어쨌거나 그건 옛날 얘기고요, 사장 형은 지금 사장 형이잖아요. 진심으로 사장 형을 생각해주신다면 형님소리부터 그만두셔야죠. 얼마나 위화감이 드는지 아세요?”

아무렴 고등학교 졸업하고 내내 손님을 접대하는 서비스직종에서 종사해온 에코의 말빨을 원오가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원오는 끝까지 분을 참지 못했다.

“형님이 형님이지 왜 니들 형이야……!”

여기에만큼은 원일이와 다른 동생들도 모두 우르르 고개를 끄덕였다. 원오가 힘을 얻어서 마저 소리를 질렀다.

“우린 친동생이나 다름없어. 형님도 그러셨다구. 우리가 친동생이니까 너네들은 형님의 양동생이다!”

유치한 소리에 에코는 머리까지 화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엄청나게 유치한 소리지만 그만큼 사람 제대로 열 받게 하는 말이었다. 갑자기 떨려난 듯한 그 느낌에 에코가 결국 공손한 말투를 집어치우고 소리쳤다.

“뭐가 되었든 진심으로 사장 형이 걱정되면 꺼지지 못해! 지금 너희들 때문에 형이 혼자 플로어에서 일하는 거 안 보여?! 여기에서 도움이 되는 건 우리야!”

사실을 내포한 기백에 원일이부터 원오까지 기가 눌려버렸다.

직원들이 모두 카페로 돌아간 뒤 원일이 툭 중얼거렸다.

“원래 허여멀건 한 것들이 더 독해.”

셋째가 원오를 토닥거리고는 담배를 물려주었다. 담배를 문 원오가 한 대를 다 태울 듯한 기세로 빨아들였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는 그제야 억울해했다.

“아니 그렇지만 우리가 뭔 잘못을 그렇게 했어요. 저흰 그냥 목화형님 매상 올려드리려고 왔던 것 뿐인데……”

원일이 원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역시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저 직원 말에 틀린 건 없었다. 새 작업장에 가셨으면 첫날 매상 올려드리고 빠졌어야 하는 거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 직원도 독한 놈이었다.

혼자 자기들 다섯 명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런 소릴 저렇게 또박또박하고…

“아니 근데 너무 노려보고 그러잖아요.”

“한 대 툭 치면 바로 넘어갈 것 같이 생겨가지고서는 뭘 믿고 그렇게 소리를 친대요?”

“진짜 독하다, 독해.”

동생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분통도 터뜨리지 않은 채 경탄을 했다. 원일도 그 일반인답지 않은 배짱에는 혀를 내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허여멀건 하게 생긴 것들이 더하다니까.”

원일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사실을 토로했다.

“그 공장주 경찰양반 알지? 다 그 양반색시가 끌어온 것들 아냐. 오죽하겠어.”

그 말에 '아아, 그렇구나'하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한 원일이마저 너무나 그럴 듯해서 고개를 커다랗게 끄덕였다.

“내가 비록 직원이긴 하지만,”

에코가 플로어로 돌아가면서 탈의실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사장 형이 자르기 전까진 진짜 내 발로는 먼저 안 나간다.”

그렇게 말하면서 에코가 이를 갈았다. 양동생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자극을 받은 결과였다. 그 말에 열을 받은 게 그 하나만은 아니었다. 이추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코 형, 저도 마찬가지에요.”

'저것들 아래가 될 순 없어.' 미학에 지인이까지 이를 갈았다. 부암조차 고개를 끄덕여, 다섯은 모두 그 순간 합심을 했다.

“누가 도움이 되는지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사장 형이 아무렴-”

에코를 위시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들 플로어로 돌아갔다. 저것들 따위에게 질 수는 없다는 기묘한 불쾌감과 함께 연대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박목화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플로어에서 혼자 일하다가, 직원들이 복귀하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환영했다. 그 얼굴을 본 직원들은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어디서 불러도 사장 형과 함께 할 터였다.

남자직원들의 결속은 카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번창하는 카페의 저력에는 이런 힘도 자리 잡고 있었다.

김낙원이 모르는 사이 카페에는 '훈남 카페'라는 명성까지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박목화의 일은 점점 더 바빠졌다.

한가한 카페를 생각했던 낙원이 분통을 터뜨렸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게 늦어 있었다.

- 카페가 잘 되는 이유, Fin.

<바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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