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24화 (23/34)
  • 8.

    수요일 당일, 낙원의 기분은 하늘을 찔렀다. <해바라기처럼 웃으면서 까댄다.> 최근 유치원을 다니는 딸을 둔 김반장이 조서를 집어던지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서경위도 그 기분 좋음의 여파에 된서리를 맞았다. 카페 골목에 사는 커플의 수줍음과는 백만 광년 쯤 떨어진 낙원이 '애인'과의 '동거 시작'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서경위 요새 쓸쓸하겠어. 애인이란 게 원래 있다가 없으면 더 쓸쓸하거든.”

    “……아, 예……”

    서경위가 말을 흐렸다.

    “애인은 말야, 역시 꽃처럼 예쁘고 조용한 맛이 있어야 돼. 그래야 막판에 감동을 시키거든.”

    낙원은 제멋대로 단정내린 목화의 매력을 이야기하곤 웃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면 아마도 서경위는 진지하게 낙원 밑에서 전출되는 것을 고려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관의 애인자랑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기에, 서경위는 이전의 그 여대생을 떠올리곤 한숨을 쉬고 말았다.

    “같이 살잔 소리에 그러지 뭐 하고 상큼하게 대답을 하는데 아주……”

    낙원 버전으로 재해석된 동거승낙 이야기까지 듣던 서경위는 문득 그게 프러포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경정 치고는 프러포즈 대사가 단순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한테 같이 살잔 소린 결혼하자는 소리가 아닌가.

    “아, 그럼 결혼을 하시나요?”

    이사도 가고 카페도 꾸미고 했던 게, 신혼집 꾸미고 여자 주려고 부업도 하나 마련한 거구나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상관이라고 서경위가 축하드린단 말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상관은 뜻밖에도 생소하다는 얼굴을 했다. 전혀 생각도 안 해봤다는 얼굴이었다.

    “아냐, 결혼은 무슨……”

    서경위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럼 그 꽃다운 나이의 여대생을 홀랑 먹어놓고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건가. 상관의 사생활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조차 잊은 채 서경위는 다음 순간 큰 소리로 항의했다.

    “혼인빙자 간음죄 아직 안 없어졌습니다, 경정님. 나이도 어린데……”

    그제야 부하가 뭘 생각하는지 알아챈 낙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게 언제 적 얘기야? 생판 다른 사람인데.”

    혼인빙자라니, 무슨. 낙원은 그럴 일이 없다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애인이니 뭐니 이야기하곤 있지만 놈은 아직 연애의 연자도 모르는 채, 이쪽이 잡아끄는 대로 조금씩 힘겹게 움직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간음이나마 실컷 해봤음 좋겠군, 서경위. 오늘부터는 어떻게는 꼬셔서 해볼 생각이지만.

    낙원은 시계를 힐끗 보고는 상의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그럼 난 이만.”

    그리고 기분 좋게 사라진 그의 뒤에서, 아까 집어던진 조서를 도로 들고 들어온 김반장이 물었다.

    “뭐야, 새로 애인 갈아치웠대? 뭘 저렇게 실실대?”

    “상대가 바뀐 건 맞는 것 같습니다만……”

    서경위의 머릿속에선 이전에 낙원이 했던 '담번엔 플로리스트를 사귀어봐, 그럼 고충을 알게 될 테니'가 복잡한 심정과 함께 뒤엉켰다.

    일전의 여자친구하고 헤어진 지 오래되었다면, 그래서 플로리스트 운운을 했던 거라면, 자신이 알기로 김경정이 만나온 플로리스트로 '꽃 같이 조용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김정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서경위가 헉 하고 재빨리 입을 닫았다.

    그러면 말이 되었다. 왜 그렇게 박목화의 꽃집을 뻔질나게 드나들고, 쓰잘데기없이 김정애의 꽃집 쪽에도 형사를 배치하라고 했는지. 갑자기 박목화에게 친절해진 거하며, 종종 외근 나가서는 그 여자가 병원에 있는 사이 심지어 그 꽃집까지 봐주라고 했는지-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박목화에게까지 잘했던 거다.

    그리고 그 정도 연상녀하고니까 결혼을 집에서 허락을 안 해줄게 뻔해서 아예 생각도 안 하는 거야……!

    뒤죽박죽이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올바른 길로 들어선 서경위가 김낙원의 드넓은 취향에 숨을 몰아쉬고 있을 무렵, 불운하게도 그 말을 들어버린 김반장도 하얗게 질려서는 되물었다.

    “그……?”

    “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여하간 참고인에 범죄자와 얽힌 여자였다. 보통이라면 상관의 약점을 잡았다고 기뻐했겠지만 상대는 그 김경정이었다. 이걸 눈치 챘다고 하면 잘근잘근 더 괴롭힘만 당하고 말리라.

    잠시 후에 김반장이 담뱃갑을 더듬으며 허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경정 취향, 자기 나이에서 플러스마이너스 10은 가뿐하게 커버하는구만……”

    '과연 보통은 아냐.' 김반장이 혀를 내두르면서 중얼거린 말에, 서경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어떤 오해를 받고 있는지는 모르는 채, 김낙원은 새 집으로 차를 달렸다. 실제로 낙원이 제멋대로 '애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이 여자 나이 플러스마이너스 10 정도를 커버하는 수준이 아닌, 상상 그 이상의 상대라는 것을 알았다면 김반장부터 몸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낙원의 눈에는 김반장 정도는 간단히 눕힐 수 있는 단단한 육체에, 무표정으로 돌아가면 벼린 칼 같은 위협감을 주는 박목화가 커다란 참나무에 핀 소박한 흰 꽃처럼 보였다.

    이미 버린 눈이지.

    서경위에게 이야기한 '꽃처럼 예쁘고 조용한'의 미사여구를 스스로 되씹어본 김낙원이 싱긋 웃었다.

    자신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박목화를 알면 알수록, 옆에 있으면 있을수록 정말로 그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놈의 눈에는 자신이 어떻게 비칠까.

    낙원의 입가에 걸려있던 웃음이 잠시 멈췄다. 아직까지는 생각하기 싫은 부분이다. 처음 박목화의 껍질을 뚫고 상처를 입힌 뒤로, 낙원은 놈의 귀에는 온갖 말을 속삭였지만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마음을 떠보는 일만큼은 하지 못했다.

    놈의 마음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는 아마 박목화 자신도 아직 잘 모를 것이다.

    먼저 공격해놓고 상처 입혀놓곤 매일 와서 귀찮게 구는 녀석일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달라붙는 녀석일지, 그 달라붙는 건 귀찮은지 어쩐지 박목화가 생각하기 전에 옆자리에 파고들어 자리를 잡고 싶은 게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어떤 체온이건 달라붙으면 떼내지를 못하는 놈의 습성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러지 뭐,'하고 담담하게 대답했던 걸 보면 이 전략이 먹히긴 한 거라고, 낙원은 자축했다. 발톱을 가진 짐승의 체온이라고 해도 파고들면 품고 마는 놈이니까 먹혀든 거다.

    그래도 정말 발톱을 드러내서 뱃가죽을 찢어놓을 게 아니니까 괜찮아. 낙원은 멋대로 스스로의 행위에 방어적 판정을 내렸다.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평생이라도 발톱 따윈 집어넣고 고양이처럼 골골거려줄 테니까.

    ……떨어지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생각하고 낙원은 다시 웃었다. 그리고 막 핸들을 틀어 빌라로 통하는 언덕을 올랐을 때였다.

    “어이쿠 형님, 형님은 가만히 계시라니깐요!”

    이 달콤한 보금자리에서는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야야 거길 들어……!”

    '……란이 엉덩이처럼 사뿐하게 들라니깐' '고것 엉덩이는 아직 손도 못 대봤는데 무슨…' '이렇게 아랫도리에 힘이 부실해서야 당연한 거 아냐.'

    보지 않아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있는 수준 낮은 지껄임에, 낙원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재빨리 빌라 담 안쪽으로 들어섰다. 빨리 퇴근한다고 와서 지금이 5시다. 주민들 들어올 시간에 뭐하는 거냐.

    박목화의 짐은 많지 않을 터였다. 그 방에 가본 낙원은 녀석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이제 막 감방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회에 나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녀석의 방엔 그 흔한 TV조차 없었다.

    냉골 반지하방에 그나마 사람답게 살라고 세간을 갖춰놓고 나오긴 했지만 그런 거야 정말 사는 동안 쓰라는 거다. 자신이 갖춰준 걸 놓고 온다면 가방 하나 달랑 들면 끝날 것들 뿐이었다. 낙원은 그래서 녀석이 이사한다는 건 가방 하나 들고 오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여지는 풍경은 그 반대였다. 5층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사다리를 대고 있는 거대한 이삿짐 차와 용역 직원 캡을 쓴 다섯 명의 모습에 낙원은 허, 하고 차갑게 웃었다. 박목화는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도 없는 데에 뭘 옮길 게 있다고 다 왔어?

    “이젠 그 등짝이 아주 눈에 익으려고 한다?”

    걷어차고 싶은 기분을 억누른 낙원이 뒤에서 손가락으로 톡, 밀면서 말을 던졌다.

    민 건 원일인데 다섯 명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엇……!”

    동시에 터진 소리에 영혼의 쌍둥이라도 되냐, 비꼬려던 낙원은 말을 꿀꺽 삼켰다. 그랬다간 놈들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박목화가 같이 그 영혼의 형제에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얘기다.

    “여긴 뭐하러 왔냐? 주거침입으로 넣어주랴?”

    “아니, 뭐……”

    그룹 보자마자 엉거주춤 멈춰선 놈들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했다. 자신과 마주칠 때마다 움찔거리긴 했지만 뭔가가 더 어색했다.

    평소라면 벌써 '아 우리 형님이 계신데……!' 따위의 말로 발언할 원일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눈을 피하는 게 그랬다. 멋쩍어하는 듯한 느낌에, 낙원은 이게 뭔가 싶어 이마를 찌푸렸다.

    “뭐야?”

    “……아니 그게,”

    -저걸 정말 형수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원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눈짓해보았지만 누구도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 들지 않았다. 이 짐은 어디까지나 형님이 떠맡으시라는 무언의 도피였다.

    의리 없는 것들. 씩씩거리던 원일의 머릿속에 그래도 저 놈 나쁜 놈은 아니라며 웃으시던 목화형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다. 원일은 간신히 입을 열고 앞자를 떼었다.

    “형……”

    낙원은 저것들이 뭘 하나 하고 쳐다보다, 원일이 드디어 매번 하던 레퍼토리의 운을 떼자 코웃음을 쳤다.

    “형님이 이사가신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냐고?”

    “아 그거지 그거-!”

    원일의 얼굴이 밝아지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바로 놈들이 이구동성으로 '맞습니다!'하고 합창을 했다. 낙원은 몰랐지만 그것이 놈들의 마음속에서 형수소리만큼은 포기하자고 합의를 본 순간이었다.

    “그 방에서 들고 올 게 뭐가 있다고 이 난리야?”

    낙원은 성큼성큼 걸어가 거대한 이삿짐 차의 문을 열어젖혔다. 어어- 뒤에서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뭐야?”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적제공간은 너무 커서 눈이 어두운 데 익숙해지고 나서야 바닥에 깔린 뭔가가 보일 정도였다. 입구 쪽에 처박힌 짐은 슈트케이스 하나면 다 해결될 것 같은 작은 가방 두어 개였다.

    놈들이 지들끼리 가만히 있으라는 둥 잘 들라는 둥 난리들 쳤던 건 그 방에 자신이 사서 달아줬던 티비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낙원이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지금 뭐하냐?”

    그러자 원일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우물쭈물 말을 뱉었다.

    “아니 그게…”

    그러나 기가 죽은 건 한순간이었다. 원일은 곧 팔을 커다랗게 휘저으면서 큰 소리를 쳤다.

    “그래도 목화 형님이 이사 오시는 건데 뭐 좀 티가 나야지, 티가-!”

    뒤에서 동생들도 똑같은 생각인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다.

    '목화 형님이 본래 검소하신 거야 알지만……' '감찰기간만 끝나면 우리가 모셔갔을 텐데,' '말도 마소, 난 아주 눈물이 나서……'

    그나마 자신이 가기 전엔 더 훵했던 방이다. 이제 와서 챙겨주는 양 하기는.

    비꼬려던 낙원은 곧 이사하기 전엔 박목화가 놈들을 오지도 못하게 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박목화 입장에선 감찰 중이니까 신경을 쓴 거겠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동생이니 뭐니 하면서 유대감을 과시하던 것들이 가보지도 못한 곳에 있어봤다는 건 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몸만 오게 하실 수는 없다.' 지들끼리 그렇게 진지하게 떠드는 소리들을 들으면서 낙원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삿짐이 없으면 이사차라도 들고 와야 한다는 그 해괴한 논리가 어디에서 나온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한 건 사다리였다.

    옮길 것도 없는데 사다리는 왜 남의 집 베란다 앞에 댄 거냐.

    낙원이 사다리차를 휙 쳐다보자 이번엔 둘째가 나섰다.

    “하여간 형님이 오시는데 동네가 다 알아야지-”

    “우리 형님 이사 오시는데 암 것도 없으면 섭섭하다구,”

    “세상은 기세야, 기세!”

    “이사라면 역시 이래야 폼이 나지……!”

    신나서 외치는 원일이를 보면서 낙원이 혀를 쯧쯧 찼다.

    형님이 오면 폼이 나야 한다. 조폭들의 논리였다.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사다리까지 대놓는 놈들을 보자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것들하고 박목화는 역시 반반 섞어야 돼.

    박목화가 폼에 목숨 거는 스케일의 반만 되었어도 세상 살기 좀 수월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우선은 터무니없는 스케일을 가진 저 놈들부터 이 평화로운 동네에서 내쫓는 게 급선무였다.

    “하여튼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응?”

    낙원이 싱긋 웃으면서 타일렀다.

    오늘부터 박목화와 같이 살 집을 저놈들의 소란스러움으로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놈들이 온 이상 이미 틀렸다는 걸 그는 알아야했다.

    “치사하다, 경찰양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셋째가 그렇게 외치자, 다 같이 맞다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온갖 욕설은 들어봤지만 치사하다는 소리는 새로웠다.

    “목화 형님은 혼자 모실 수 있는 게 아냐!”

    역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넷째가 굵은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넷이 왁자지껄하게 지르는 소리들 속에 알아들을 수 없는 항의들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우린 형님을 생각해서 참으려고 했는데,' '형님만 괜찮으시다면 봐주려고 했는데……!'

    저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봐주긴 누가 뭘 봐줘.

    얼마 없는 인내심이 뚝 끊긴 낙원이 드디어 핸드폰을 꺼내서 서에 전화를 하려고 했을 때였다.

    “왔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화였다.

    “형님……!”

    단숨에 달려가는 놈들을 보고 낙원은 혀를 찼다. 단체로 호모냐. 가끔 조폭들 중에서도 의리 찾는 것들을 볼 때마다 비웃으면서 했던 말이지만, 저 놈들을 보면 정말 그런가 싶어서 기분이 나빠진단 말야.

    낙원은 그러나 자신도 그 호모새끼들 중에 하나라는 걸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저 우락부락한 개새끼들은 플라토닉한 고작 동생일 뿐이고, 자신은 어쨌거나 에로스한 관계에 도달해본 진짜 호모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런 관계를 노리고 동거를 하려고 한다는 점도 달랐다.

    “짐은 이게 다지?”

    낙원이 이삿짐차를 가리키자 박목화가 그 안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뭘 이런 차를 끌고 왔냐고 묻지 않는 건 아마 그만큼 저 놈들과 어울려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나랑 살아라. 그럼 일반시민으로 만들어주마.

    낙원은 자신과도 인연이 없는 단어를 속으로 내뱉으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목화에게 가면서 아까까지 놈들이 낑낑대며 옮겨왔던 티비를 발로 툭 건드렸다. 티비가 콰직, 하고 땅바닥에 엎어졌다.

    '어어……!'하고 소리 지르는 놈들에게 그는 간단하게 지시를 내렸다.

    “안엔 내 거 있으니까, 이건 버려.”

    그리고 그는 이삿짐차 속에 있던 가방 두 개를 손에 들었다.

    “가자. 이게 다지?”

    목화에게 그렇게 말을 건네자, 목화는 가방을 그의 손에서 받아들고 빌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까지는 낙원의 예상 그대로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낙원은 저 놈들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형님 집들이요……!”

    원일이 그렇게 외치자 목화가 발을 멈춘 것이다.

    “집들이해주십시오, 형님-!”

    “저희 오늘에야 그 집 가보고 아주 눈물을 흘렸다니깐요. 이젠 저희 눈으로 꼭 형님 어떻게 사실지를 봐야……!”

    “저희 그냥 가면 저 악덕공장주가 형님을 어떤 골방에 밀어 넣을지 걱정이 되어서 잠도 못 잘거구만요.”

    '우오오 형님 집들이이-', 바로 끈덕지게 달라붙는 그 솜씨는 분명 조폭의 그것이었다. 거머리같이 붙어서 뜯어먹으려고 덤비는 그 기세에, 낙원은 혀를 차면서 재빨리 핸드폰을 켰다. 젠장, 아까 빨리 치워버렸어야 했는데.

    “괜찮겠냐?”

    그러나 목화가 그렇게 물어왔을 땐, 낙원은 언제 켰냐는 양 핸드폰을 끄고 말았다.

    “그러라 그래.”

    낙원은 결국 웃으면서 그렇게 대꾸했다.

    '나는 관대하다', 언젠가 옛날 영화에서 왕이 내뱉었던 소릴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낙원은 빌라 로비의 문을 열었다.

    “집은 좋네-”

    “야 경찰양반이 얼마나 해먹었으면,”

    “글쎄 해먹은 것만으로는 어렵다니까……”

    저 딴에는 속삭인답시고 '역시 공장' 어쩌구하는 놈들을 뒤로 하고 들어온 낙원은 우선 박목화의 짐을 거실에 내려놓았다.

    신혼집 차리는 기분으로 하나씩 신경 써서 내장을 시킨 이 집에 저 놈들까지 들여놓게 되다니. 첫날이니 오늘 저녁엔 분위기 좀 잡아보자 하고 마음을 먹었던 게 허무해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박목화가 이 집에 낯설어하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형님, 저 경찰이 앉기 전에 소파에 앉으세요.”

    “목화형님, 주인의식……!”

    이상한 데서 경쟁의식을 불태우는 놈들이었지만, 그래도 박목화가 어색하게 소파에 앉는 걸 보면서 낙원은 기분을 조금 풀었다.

    둘만 들어왔다면 박목화는 이 집에 손님처럼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거라고는 해도 사무적으로 오케이를 했던 녀석이, 정말 이 집에 들어와서도 돈 때문이니까 하고 선을 그어버리면 자신은 방법이 없었다.

    그 반지하 방처럼 두 번만 뒤척이면 바로 옆에 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방 달라고 해서 들어가 버리면 그만이었다. 공기와 물만 있어도 만족하면서 살 것 같은 목화에게 거실에서 같이 TV를 보자든가 밥 먹자고 꼬시는 게 쉬울 것 같지도 않았다.

    '주인의식'이라, 나쁘지 않은 슬로건이군.

    “형님, 양반다리, 양반다리……!”

    넷째가 우렁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기세가 어쩌구 했던 놈이었다. 그러자 박목화가 고개를 젓더니 웃고 말았다.

    이 집에 들어온 지 15분도 안 되어 웃다니, 기록적이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싱긋 웃곤 박목화 바로 옆에 턱하니 걸터앉았다.

    “소파 편하지?”

    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뭘 생각했는지 잠깐 웃었다.

    그때 거실바닥에 앉아있던 놈들 사이에서 '헤에,'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단시간 내에 웃는 걸 본 놈들이 놀라는 걸 거다. 낙원도 궁금해져서,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때 원일이 불쑥 끼어들었다.

    “우리 음식 배달이나 시켜주쇼.”

    “형님 좋은 생각이십니다……”

    “난 탕수육.”

    “양장피, 양장피!”

    단숨에 시끌벅적해진 놈들을 보고 낙원이 한 번 비꼬았다.

    “한 게 뭐가 있다고 밥을 먹냐? 빈 사다리 올리는 게 그렇게 힘들었나보지?”

    “아- 누가 경찰 아니랄까봐 치사하게……”

    우우우 거리는 놈들에게 낙원이 물었다.

    “밥 먹음 갈 거냐?”

    “아 그럼, 우리가 뭐…… 우리가 뭐 계속 눌러앉아 있을까봐?”

    원일이 기세 좋게 말을 시작한 것치곤 더듬거리다 말을 마쳤다. 오늘 아무래도 저것들 상태가 희한하다.

    낙원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 번 놈들을 훑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치백단인 그였어도, 원일이 생략한 말이 '신혼집에 있을까봐'라는 거였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낙원은 배달 집 전단지를 찾아 전화기를 들었다.

    “넌 뭐 먹을 거냐?”

    목화를 돌아보자 원일이 먼저 대답했다.

    “형님은 우동이요.”

    목화를 돌아보자 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놈들끼리 같이 있을 땐 매일같이 시켜먹었을 테니 알기도 하겠지.

    낙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입맛이 썼다. 백반 같은 거엔 조금도 맛을 따지지 않는 놈이라 신경 쓰지 못했지만, 중국집은 그래도 취향이란 게 있었구나 싶어서였다.

    뭐 하나라도 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생기면 짜증이 난단 말야.

    낙원은 스스로를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전화기를 원일에게 넘겼다.

    “우동 두 개 더해서 알아서 시켜.”

    그러자 원일은 곧장 막내에게 돌렸다. 막내는 과연 이런 데 이력이 난듯 줄줄줄 불러댔다.

    “우동 둘, 자장면 곱빼기로 둘, 삼선 둘, 탕수육 한 개, 양장피 한 개……”

    돈 내는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사양도 염치도 없이 줄줄 불러대는 놈들을 보면, 박목화가 어떻게 저 놈들을 길러왔는지가 한 눈에 보였다. 지 먹는 거엔 관심도 없는 게 동생들은 꽤나 먹여왔구나 싶었다.

    이제는 돌아갈 일 없는 반지하방을 떠올린 낙원은 목화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목화 뒤로 가죽 소파와 하얀 벽이 보이자 조금 마음을 놓았다. 언제나 놈의 배경으로 황량하고 횡한 시멘트벽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도 악몽인 것이다.

    이십분쯤 지나자 음식이 왔다.

    차례대로 탕수육과 자장면이 날라져오는 동안 낙원은 목화에게 우동을 건네주었다. 과연 익숙한 음식을 먹자 편하게 먹긴 한다.

    이 집에서 처음 먹는 게 중국집 배달음식이라.

    본래 생각했던 메뉴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었지만 이것도 나름 이사 온 첫날답긴 하다.

    목화의 모습에 생각을 바꾼 낙원이 서(署)에서나 가끔 먹었던 배달음식을 아무 말 없이 먹어치웠다. '싸구려 입맛하고는,'하고 중얼거린 게 불평의 전부였다.

    이런 시끄럽고 싸구려인 조폭 새끼들이라도 목화한텐 가끔 쓸모가 있으니까. 낙원은 최대한 관대해진 마음으로 간신히 식사를 마쳤다.

    웬일인지 다 먹자 놈들은 번개같이 치우곤, 정말로 군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형님.”

    원일이 일어나자 다 같이 일어난다.

    어씬 일이냐. 밥값은 한다. 낙원은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기분으로 놈들이 줄줄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돈 낸 보람이 느껴졌다.

    “형님 그럼 몸 건강히 계시고,”

    “저희 필요하면 1번만 눌러주십쇼. 당장 달려옵니다……!”

    “저기 아래서 누가 난동이라도 부리면 바로 부르시구요.”

    그러나 현관에 선 놈들의 인사말은 끝날 줄을 몰랐다.

    낙원은 싱긋 웃으면서 말을 끊었다. 관대함의 한계였다.

    “잘 가라.”

    그리고 손수 문을 열어준 낙원의 기세에, 원일 휘하 박목화의 자칭 동생들이 줄줄이 몰려나가면서도 못내 안심이 안 되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형님……!”

    잘 하면 너희들, 나한테 형님 잘 모시라고 하겠다?

    정말로 그 말을 입 밖에 냈다면 정곡을 찔린 다섯 명이 얼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 낙원은 저 놈들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쾅!

    낙원은 재빨리 막내까지 내보낸 뒤 문을 닫고 잠가버렸다.

    “야 아주 눈치가 보여서……”

    계단을 다 내려온 원일이 빌라 현관에서야 커다란 한숨을 쉬면서 운을 떼었다.

    “신혼집이라고 아주 저 경찰양반색시가 유세를 떠는데……”

    차마 형수라고는 부르지 못한 원일의 마지막 타협점, '양반색시'라는 단어가 나오자 동생들이 모두 찬동을 했다.

    “아 그 양반색시가 베란다에 하트 식물 놔둔 거 보셨어요?”

    하트 모양 철사를 타고 오른 녹색 아이비 화분에 차마 눈 둘 곳을 몰랐던 셋째가 치를 떨었다.

    “부엌에 가니까 컵이 다 두 개 씩이라 난 물도 못 떠오구……”

    막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빨리 밥 먹고 나오느라 아주 혼났다니깐요.”

    맞다고, 다 같이 커다랗게 숨을 쉬었다. 체할 것 같다고 문질러 달라던 셋째한테 담배를 물리던 둘째가 한 마디 했다.

    “형님은 그 까칠한 양반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드신 걸까?”

    그러나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건, 소파 옆에 그 경찰이 앉자 살풋 웃으셨던 형님의 모습이었다.

    땅이 꺼질듯이 커다랗게 한숨을 쉰 원일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뭐, 하여간 형님한테는 잘 하는 것 같고……”

    형님이 맘에 드신다는데, 뭐라고 하겠나.

    형님 눈은 워낙 높으니까, 분명 형님의 눈에만 보이는 뭔가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목화 형님처럼 무덤덤한 분한텐 열 번 스무 번 삼십 번쯤 덤비고 붙어있는 정신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고.

    다시 한 번 한숨을 쉰 원일은 말을 돌렸다.

    “야, 그래도 이만하면 눈치 안 보이게 잘 나온 거겠지? 응?”

    “아 그럼요……!”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던 동생들은 빌라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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