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21화 (20/34)

5.

빌라까지 올라오는 동안 놀랍게도 박목화는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그 가게가 나쁘지 않았던 거라고, 낙원은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러게 빨리 받지 그랬냐. 내 안목이 얼마나 높은데. 진작 받았으면 그 여자한테는 안 가봤을 거 아니냐.

……낮에 그 정애가 했던 말만 생각하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벌겋게 치밀었다. 부끄러움이라든가 수치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본 김낙원은 시선을 딴 데 돌렸다가, 재빨리 생각을 돌렸다.

“일 해보니 어때?”

“나쁘진 않다.”

어쩐 일인지 놈은 선선히 그렇게 대꾸했다. 놈이 그렇게 대답할 정도면 정말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낙원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그 가게 만드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 줄 아냐.”

이런 가게에서 남자직원만 끌어오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냐. 아무리 정직원 대우를 해주겠다고 해도 솜씨도 있고 일도 꼼꼼하면서 계속 이쪽 일을 할 남자애들로만 스카웃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그렇지만 남자로만 끌어오느라 힘들었다는 소릴 놈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사심어린 고생은 슬쩍 피한 낙원이 이 얘기만 덧붙였다.

“애들 일 잘 하지? 가게 동선도 괜찮고.”

'음,' 박목화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소릴 냈다.

“하루만 해봐도 매상 꽤 나가지? 내가 거기 만드느라……”

그러자 목화가 피식 웃었다.

“네가 웬일로 그런 말을 안 하나 싶었지.”

“……”

날은 5월에 들어와서 제법 더워져 있었다. 저녁바람만이 가을처럼 선선했다.

올라오는 길에는 빌라 앞 화단에 심어놓은 라일락이 특유의 향기를 풍겼다. 어둠 속에 보이지 않아도 그 꽃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는 특유의 향기였다.

낙원은 자랑을 멈추고 놈을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비친 놈의 단단한 어깨가 약간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거기에서 놈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알아채는 것처럼, 놈도 자신의 성격을 조금은 알게 된 모양이다.

그게 기분이 좋아서 낙원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리고 빌라로 들어갔다. 놈은 의아한 얼굴로 따라왔다. 5층짜리지만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던 낙원이, 4층에서 놈과 같이 내린 뒤 문을 활짝 열었다.

“……이 집이야.”

사실은 '우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낙원은 앞 단어를 목구멍으로 삼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들어가 커튼을 열었다.

불 켜진 카페가 바로 환히 내려다보인다. 이 점 때문에 샀던 낙원이 어떠냐고 박목화를 돌아보았다.

“네가 저 아래의 월급사장이라 치고, 여긴 네 사택으로 치자구. 여기로 이사오는 거, 어때?”

목화가 그를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에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불편해졌다.

저 카페도 잘 보이지 않느냐든가, 장사하는 곳과 집이 가까운 게 편할 거라든가, 덧붙일 말은 많았다. 단지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놈을 설득할 수 있을 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확신이 서지 않자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의외로 이번 일에 많은 걸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낙원은 깨달았다.

무슨 말을 꺼냈다가 잘못되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과, 혹시 어떻게 이야기를 하면 놈이 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여서 뭘 말해야 할지 감을 못 잡는 거다.

같이 살자는 종류의 이야기를 여지껏 이리저리 돌려서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그의 집으로 초대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놈은 언제나 묵묵부답이었더랬다. 별다른 대꾸도 없이 저 혼자 일하다, 힐끗 쳐다보면 그만이다. 낙원은 그럴 때면 다른 이야기를 꺼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는 건가, 낙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이나 먹자고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저……”

“그러지.”

응?!

김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의심하면서 놈을 돌아보았다.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아니 그러기엔 너무 고마운 비소식을 몰고 온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꺼내놓은 박목화는 담담한 얼굴로 그 자리에 멀쩡하게 서 있었다.

“뭐라고?”

역시 자신의 귀를 의심한 김낙원이 되묻자, 박목화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알겠다고.”

“……”

진짜냐.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제는, 받아주는 거냐.

삶의 질을 올려보겠다고 인부들 시켜 삽질하던 몇 달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삽질이 길긴 했어도 성과가 있구나 싶었다. 정애가 고깝긴 해도 정말 드라마틱한 효과는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자한테 들은 말은 깨끗하게 잊었다.

그래, 그렇게 좋다. 어쩌란 말인가. 그동안 붙어서 꽃집 일을 해준 보상을 다 받은 듯 했다.

그럼, 이런 고급 인력을 1년이나 그따위로 부려왔는데. 와서 살아주는 정도는 해줄 때도 됐지.

낙원은 실실 웃었다.

몸만 와서 살아라. 내가 다 해주마.

낙원이 저녁준비를 해놓은 부엌을 가리키면서 놈에게 이야기했다.

“너 오면 밥은 내가 해주마.”

그러나 그때였다.

박목화가 이상하다는 얼굴이 되어 그에게 되물어왔다.

“월급사장이라면서. 네가 왜 여기에?”

“……?!”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낙원이 드물게도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있자, 목화가 한 번 더 물었다.

“사택이라면서. 너도 여기에 사는 거냐?”

그제야 낙원은 놈이 아까 자신이 한 이야기를 정말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가 저 아래의 월급사장이라 치고, 여긴 네 사택으로 치자구.'

그리고 자신이 뭐라고 했지? 여기로 이사 오는 게 어떠냐고, 그렇게만 이야기를 했던가-

낙원은 못 박힌 듯이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이 했던 말을 되감아보고는, 자신이 정말 드물게도 의도적이지 않은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라 말할 수도 없는 실수였다. 사택 제공을 해준다는 소리만 했을 뿐, 자신과 같이 살자는 이야기는 없었던 것이다.

……

어쩐지, 놈이, 저렇게 쉽게 승낙을 한다 했지.

-그렇지만 이것도 나름 기회가 아닌가.

낙원은 재빨리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굴리면서 놈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너도 여기에 사는 거냐고 묻는 놈의 얼굴에는 별다른 불쾌감이 떠올라있지 않았다.

낙원은 당황한 얼굴을 빠르게 수습한 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내가 사택이라고 집 하나 따로 너한테 내줄 정도로 돈이 썩어나겠냐?”

사실은 썩어났다.

그러나 부동산 부자의 아들이자 자기 몫의 건물에서 매달 월급을 제외하고 몇 천만원씩 세를 받아처먹는 김낙원이 당당하게 그렇게 내뱉자, 박목화의 얼굴에 미미하나마 '하긴, 그런가'라는 긍정의 빛이 떠올랐다.

역시 이거구나.

낙원은 안도하면서 재빨리 쐐기를 박아넣었다.

“저 아래 가게 차리느라 난 그 동안 모아놓은 돈도 다 날렸어. 내 아파트도 팔아서 여기로 이사온 거니까, 같이 살자구.”

교묘하게 자신의 아파트를 판 값도 여기에 보탰다는 뉘앙스를 넣어 그렇게 말하자, 박목화의 얼굴이 '그렇구나'하는 이해로 바뀌었다. 그리고 동시에 놈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무슨 돈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쓰냐는 뒷말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귀를 곤두세우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을 한숨이 들렸다. 그러더니 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겨울, 그 반지하방에 들어가서 살고 있다가 깁스를 풀자마자 내쫓겼던 낙원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내내 기다려왔던 동거 승낙의 순간이었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그러니까 말이다, 돈 아끼는 셈치고 저녁은 내가 집에서 차려주마.”

항생제를 쓰지 않은 유기농 계란과 수제 훈제 햄으로 만든 카르보나라를 준비하러 가면서 낙원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박목화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모로 가도 서울로 가기만 하면 된다.

김낙원은 옛 속담의 중요성을 실감하면서 싱긋 웃었다. 그리고 놈을 부엌으로 잡아끌었다.

“맛있을 거야. 기다리라구.”

그토록 바라왔던, 놈과의 동거와 저녁시간의 확보를 이룩해낸 김낙원의 말에는 힘이 넘쳤다.

“수요일이다, 그날 오는 거야. 알았지?”

목화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낙원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똑바로 쳐다보는 낙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어쨌는지, 목화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달콤함이 혈관까지 스며들었다.

꼼수를 썼다는 것에 따른 씁쓸함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뭐라고 하건 박목화는 자신을 이유만 있다면 같이 살아도 될 정도의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었단 얘기다. 달콤한 쾌거였다.

낙원은 소리 내어 웃고는 놈을 다시 부엌으로 끌었다.

쾌거를 거둔 낙원은 힘이 넘쳤다.

목화는 그토록 외식을 좋아하던 놈이 집에서 밥을 차려먹을 정도로 돈이 모자라다는 소리에 놀라 혀를 차면서도 결국 그 힘에 이끌려 따라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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