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20화 (19/34)
  • 4.

    “……아뇨, 그렇지만.”

    누님의 말에 드물게도 이의를 제기했던 목화는, 곧 말에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챙겨주는 게 흔하니.'

    그 '사람'이 김낙원만 아니었다면 참 좋은 말씀이었다. 누님은 워낙 좋은 사람이라 좋은 사람만 보이는 모양이라고, 목화는 잠시 생각했다. 호의로 그 가게를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를 어떻게든 거절하고자 했던 그는 이어진 누님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해준 거려니, 해.”

    “누님하고 그 녀석이 어떻게 같습니까-……”

    바로 튀어나온 항의에, 누님이 재밌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누님과는 너무나 다른 존재였다. 비교가 불가능했다. 김낙원은 달랐다. 누구하고도 달랐다. 1년 넘게 거의 매일 보았는데도, 그 속에 든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큰 가게를 만들어서 넘길 생각을 했을까 고민하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팠다.

    어째 그 뒤로 며칠 동안 꽃집에 나타나지 않는가 했더니 누님을 들쑤신 모양이다.

    ……하기야, 순순히 물러날 놈은 아니지.

    박목화는 고개를 저었다.

    입으로 말해오는 감정도 일을 벌이는 방식도, 모든 게 과격했다. 그를 진심으로 화나게 만드는 인간도, 이토록 난처하게 만드는 인간도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같이 있으면 어이없게 휘둘려버린다.

    놈이 개업하는 줄 알고 따라갔던 그 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속이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 김낙원과 누님이 어떻게 같냐는 목화의 항의에 정애가 한참을 웃더니 이야기했다.

    “그래도 왜, 너 여기 있었음 하는 마음은 같잖니.”

    “……”

    목화는 잠시 후에 대답했다.

    '여기 있을 겁니다.'

    누님은 그에게 있을 곳을 마련해준 사람이었다. 여기 있을 테니까 안심하시라고, 다시 한번 이야기하려던 목화는 움찔했다. 누님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전화기를 울렸기 때문이다.

    “너에겐 더 큰 짐일지도 모르지만……”

    “아닙니다, 누님.”

    목화는 재빨리 부정했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대답한 뒤에는 누님의 이야기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기 이미 직원들도 있다는 데 그 사람들은 어쩌니.'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너 월급 사장 시켜줬다셈치고, 한번 가봐. 그래도 그렇게 내팽개치면 가엾잖니.' ……

    누님의 말은 분명 옳았다. 목화는 결국 얼마 안가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김낙원이 무어라 이야기했는지는 몰라도, 누님은 어찌됐건 이미 결심하신 듯 했다.

    이곳을 마련해준 사람도 어차피 누님이었다. 다른 데서 일하길 원하신다면 따르는 수밖에.

    목화는 꽃집을 한 바퀴 돌아본 뒤, 결국 일어섰다.

    놈이 해놓은 짓을 어쨌든 한번 제대로 보기는 해야 할 듯 싶었다.

    “사장님-”

    한 명의 부름에 그쪽을 돌아보자, 이번엔 사방에서 아르바이트생들의 소리 죽인 부름이 울렸다.

    '사장님 저기에서도 찾으시고요.' '아까 명함 찾으신 분들이……'

    오랜만에 나타난 책임자에, 고용된 지 며칠이 되도록 아무런 제반 설명도 듣지 못했던 알바생들은 너무나 기뻐하면서 달라붙었다.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사장님!'하고 그를 반갑게 부르는 바람에, 생전 처음 보는 알바생들이 어떻게 자신을 아는지 알 수가 없어 경계심을 표했던 것도 잠시였다.

    정장 바지를 입은 남자 알바생이 이끄는 대로 카운터로 간 박목화는, 영업증 옆에 붙어있는 증명사진 크기의 자기 사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김낙원이 이게 사장이라고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 사진은 박목화가 교도소에 들어갈 때 찍었던, 스포츠머리의 전과자 기록 사진이었다.

    '실물이 훨씬 나으시네요, 사장님.'

    알바생이 한숨 놨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전에 운동하셨었나봐요. 아니 무슨 이런 사진을 갖다놓고……'

    다른 알바생 하나도 쪼르르 달려와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바로 지시를 내려달라는 얼굴들로 옹기종기 모여든 5명의 알바생들에게, 그는 어쩔 수 없이 사장 행세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 합시다.'

    카페와 꽃을 같이 한다는 것은 생각 외로 바쁜 일이었다. 어느 쪽이건 손이 비면 가서 도와줘야 했다.

    개업 초기라 그런지 꾸준히 커피 맛을 보려고 들어온 남녀 손님들이 앉아서 수다를 떨다가도 꽃을 구경하고 나갔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해주다보면 작은 화분을 같이 계산해달라고 불쑥 사가거나 장미 한 송이를 사서 여자에게 안겨주는 남자 손님도 있었다.

    커피도 뽑으면서 꽃을 다룰 줄 아는 남자 알바생이 솜씨 좋게 꽃을 다루는 것을 보고, 박목화는 의외로 배울 게 많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녁 시간이 되자 손님이 더 몰려 들어왔다. 5시간이 지나간 건 한 순간이었다.

    간신히 문을 닫고 정리하자 10시 반이 되어 있었다.

    “에코 아트 스쿨 출신이에요. 손흘림 커피는 우리 커피 문화 연구회에서 배웠고요. 나중에 저도 이런 카페를 여자친구랑 내는 게 꿈입니다.”

    사장과 알바생, 아니 직원 간의 미팅은 그렇게 그날 저녁 처음으로 이뤄졌다.

    가게를 정리하고 앉아서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자 양쪽 일을 같이 하는 직원이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에코'가 옆의 남자 직원을 쳐다보자 하나씩 자신이 어디에서 일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 미학에서 1년 반 일했고요……”

    “전 박이추 선생님 밑에서 반년간 일했고요……”

    “저는 지인에서……”

    “저는 부암동……”

    다섯 명이 차례대로 소개를 하더니, 박목화를 일시에 쳐다보았다. 흥미진진한 눈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그 눈들이 여자였다면 조금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박목화입니다.”

    놈의 배려인지는 몰라도, 직원들이 전부 남자라 그나마 대하기는 편했다.

    “앞으로 형제처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 뿐이었다.

    박목화는 더 이상의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싱긋 웃었다. 다섯 명의 남자 동생들이란 그에게는 익숙한 관계였다.

    박목화는 몰랐지만 그간 참으로 물을 게 많았던 직원들의 눈빛이, 한 순간 원일 휘하 말 많던 동생들의 형님을 대하는 눈빛처럼 바뀌어 있었다.

    “사장님, 저희 데려온 사람 있잖아요, 잘 아시는 분이세요?”

    카페를 완전히 정리하고 문을 나서면서 '에코'가 물었다. 박목화는 그 말에 대답을 골랐다.

    “음.”

    무어라 말하기 힘든 관계기는 했다. 그렇지만 잘 안다고 할 수도 있는, 관계기도 했다.

    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코' 옆의 '지인'이 그에게 물었다.

    “근데 그 사람이요, 제대로 된 손흘림 카페를 연다면서 저희를 온갖 데에서 다 섭외를 해서 데려와놓고는 어쩌면 그렇게 얼굴 한번 안 비추죠?”

    '맞아,' '맞아,' 새로 생긴 동생들이 모두 맞장구를 쳤다. 박목화는 어두워진 골목길을 힐끗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곧 볼 거다.”

    빵빵, 어두운 골목에서 이직한 곳의 첫 출근을 축하한다는 양 사브의 클렉슨이 두 번 울렸다.

    하여간 양반은 못 되는 녀석이었다.

    “안녕,”

    3년간 거의 매일같이 봤던 얼굴, 그러나 요 며칠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 차문을 열고 주황색 헤드라이트 불빛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일 보자.”

    박목화는 직원들을 돌아보면서 인사했다. 그러자 '예, 사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다섯 명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부산스러운 인사와 함께 우르르 흩어져 가는 직원들에게서 그는 곧 눈을 떼었다.

    바로 앞까지 온 김낙원은 어쩐지 평소와 달랐다. 분명히 만나자마자 '그러게 빨리 받지 그랬냐'는 둥, '것 봐라 내 안목이 좋지', '네 누님은 내 손 안에 있다' 따위로 말해오겠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놈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멋쩍어하는 것처럼 시선을 돌린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며칠간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쳐다보고 있자 놈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녁 먹으러 갈까?”

    박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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