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00억이 말이 됩니까, 100억이.”
서경위가 책상에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강한 어조로 이야기했지만, 김낙원은 책상에 엎어진 채로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뭐…… 노년에 그럭저럭 쓸만한 돈이긴 하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100억을 써서 카페를 만듭니까?!”
김낙원은 책상에 엎어진 채로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건물 좀 사고 인테리어 좀 새로 하고 빌라 한 동을 사면 뭐 그 정도 쯤이야……”
카페에 그런 돈을 들일 수 있다는 데 진심으로 서경위가 아까워하다 못해 어이없어하는 사이, 김낙원도 다른 의미로 진심으로 아까워하고 있었다.
-아깝다.
그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놈이 카페겸 꽃집을 하는 동안 자신이 사놓은 바로 위의 빌라에서 놈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겠다는 망상을 접어야 한다는 게 못내 아깝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다.
본래 김낙원의 꿈은 이러했다. 처음에는 카페 겸 꽃집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주는 카페로 한다. 바리스타 중에 한 명은 플로리스트 자격증이 있는 녀석으로 해서 꽃집 일도 겸하게 한다.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꽃 주문받을 때만 일을 하다보면, 놈도 일에서 손을 좀 떼게 될 터였다. 게다가 윗동에 있는 빌라에 있으면 일 받을 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내려가면 된다고 어떻게든 꼬셔서, 좀 노는 버릇을 슬슬 들여보자는 게 사실 김낙원의 취지였고 원대한 야망이었다.
웃기는 일이다.
전국의 꽃집이 그리도 바쁘고 손 놓을 틈이 없으며 각 이벤트 때마다 더 바빠진다는 사실 따위, 놈과 연관되기 전엔 알 필요도 없었던 일인데 말이다.
5월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건 그래도 괜찮다. 낙원이 이 결심을 했던 건 2월 달에 졸업식들과 꼭 겹치는 발렌타인데이 때부터였다. 12월 크리스마스 때 혼자 있다가 습격까지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열이 오른다.
그때부터 고작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놈의 태도는 도루묵이 아니었던가. 이대로면 여름휴가마저 2박 이상 가지 못할 거라는 건 뻔한 일이었다.
좀 놀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 박목화의 단단한 가드를 그 근원지인 꽃집부터 바꿔서 해결해보자는 취지였는데.
“삶의 질을 높이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낙원은 낙심해서 책상에 엎어진 채 것도 중얼거렸다.
어찌나 억울하고 아까웠던지, 이 화창한 봄날 근로자의 날에 쉬어주지도 않고 출근해 있을 정도로 쳐지고 우울한 상태였다.
그러나 정상인의 감각을 가진 서경위는 그런 김낙원의 마음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 정상인의 범주에서 도저히 짐작도 가지 않는 그 금액에만 올곧게 신경을 쏟았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100억은 어디에서 나온 돈입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돈이 나오죠?”
-어디긴, 놈의 퇴직금이지.
미친 소가 남겨놓고 간 그 돈.
범죄에 의해 나온 결과물이라는 걸 끝까지 입증하지 못해 결국 가압류가 풀릴 때까지, 낙원은 끈질기게 기다렸더랬다. 그리고 약의 영향으로 한참 동안 후유증을 앓았던 사이 놈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받아놨던 인감 위임장으로, 당당하게 불법을 자행했던 것이다.
어차피 미친 소가 그런 돈을 남겼다는 걸 알면 박목화는 빚진 기분만 더 느낄 테니, 널 위해 한 방에 써주마. 낙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몰랐지만 이는 일전에 정애가 1억을 쓴 것과 비슷한 경로로 똑같은 답에 이른 것이었다. 놈에게 가게를 만들어주자고, 횡령이 제일 나은 답이라고, 그렇게.
단지 정애보다 훨씬 더 큰 스케일의 김낙원인지라 그 '가게 만들기'에 단방에 그 돈을 털어넣었을 뿐이다.
그 김에 놈이 꽃집을 손 떼도 되도록 좀 편안한 고급 빌라 몇 채도 마련해주고, 그리고 자신도 놈이 꽃집에서 일하면 마음껏 볼 수 있도록 빌라 4층으로 이사까지 왔다.
이렇게 놈에게 온전히 투자해주고 한달 내내 공사해서 번듯한 가게를 차려줬구만, 대체 뭐가 불만이야.
김낙원은 책상에 엎어진 채로 한번 몸을 뒹굴, 하고 뒤집었다. 서경위는 여전히 그 돈의 출처를 추궁하느라 눈에 쌍심지를 켠 채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단위의 돈이 실제로 존재하느냐부터 따지고 싶은 얼굴이었다.
“원칙적으로 겸직은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대로면 감사가 나와도……”
낙원은 심드렁하게 서경위의 말을 끊었다.
“내 용돈이야.”
“……”
서경위의 입이 잠시 다물어지지 못하고 눈까지 덩달아 커졌다. 그러나 곧 저 경정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듯, 몇 번 입을 뻐끔거리다 간신히 항의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돈을 그렇게 단번에 털어넣으실 수 있는 겁니까……!”
위화감을 조성하시는 거라는 둥, 감사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둥, 상관의 용돈의 스케일에 어쩔 줄 저쩔 줄 몰라하던 서경위의 항의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채 김낙원은 내내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책상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서경위를 불렀다.
“서경위, 아직 그 여자친구 사귀나?”
서경위가 잠시 당황하는 듯 하더니 대답했다.
“……아니오, 헤어졌습니다만-”
그게 이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되물으려는 서경위의 말을 김낙원이 툭 끊었다.
“그럼 말야, 이번엔 꼭 플로리스트를 꼬셔보게.”
당하는 인간은 나만이어서는 안된다.
타인의 고통을 즐김으로써 어떻게든 자신의 불운한 처지를 희석해보고 싶었던 김낙원이 뒤이어 단언했다.
“그럼 내 마음을 알게 될 테니 말야.”
“예……?”
서경위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이는 사이, 그는 한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보자구,”
박목화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열쇠, 그러나 찾을 때마다 항상 그 유일한 열쇠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하기에 더더욱 찾기 싫었던 그 열쇠를 꽂아야 할 때인 듯 했다.
어쩔 수 없지.
낙원은 우울하게 한숨을 한번 쉰 뒤, 놈의 누님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꽃다발에 철사를 묶고 있는 중이었다.
솜씨 좋게 꽃줄기를 잡은 손을 휘휘 돌리면서 손님을 응대하던 여자가, 창 밖에 서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
낙원은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과는 반대로 웃고 있던 여자의 입가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대개의 여자와 눈이 마주치면 얼굴이 조금 붉어지거나, 당황하면서 눈을 돌리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그래, 저 여사장은 여자가 아니라, 놈의 '누님'이지.
낙원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꽃다발을 쥔 손님이 나오는 길로 꽃집 안을 들어섰다. 정애가 조심스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쩐 일로……”
그나마 그간 베푼 호의 탓에 경계가 누그러진 게 저 수준이다. 버릇대로 한 마디 비꼬려고 했던 낙원은, 정애의 뒤로 넘실거리는 붉은 물결을 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카네이션의 물결이었다.
이 꽃집은 바로 그 '어버이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사장에게 무어라 하려던 마음 따윈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올 해도 저 짓을 하면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깝지만 놈이 자신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을 거라는 걸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속은 쓰렸지만, 낙원은 붙임성 있게 웃으면서 용건을 밝혔다.
“가게를 해줬는데 녀석이 받질 않아서 말이죠.”
정애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낙원은 웃음을 잃지 않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 녀석 퇴직금으로 가게랑 집을 해다 줬는데, 내 돈으로 했다고 하니 저 가져라, 이렇게 나오지 뭡니까.”
여자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내버려둔다고 녀석이 쓸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내버려두기는 좀 큰돈이고…… 편한 길을 찾아주자는 생각에 플로리스트 카페를 차려줬는데, 퇴짜를 맞았죠. 원 쓸데없이 깐깐해서.”
“……그 애가 본래 그렇긴 하죠.”
여자가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그 애'라고 말하는 그 음성엔 자부심이 묻어났다. 자랑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지, 이 여자야. 그 곰새끼가 고생길을 자처한다는데.
낙원이 은근하게 말투를 바꾸었다.
“그 녀석 통장에 있는 돈은 옆 사람이 써주지 않는 한 안 없어져요. 아시죠? 그 녀석을 위해선 횡령이 최고라는 거.”
낙원은 여자가 이 말을 공감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1억, 그래서 쓰신 거 아닙니까.”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꽃집을 차릴 때 융자했던 1억을 그 돈으로 갚고 박목화 명의로 꽃집을 돌려준 여자. 놈 계좌에 있는 돈을 유용해서 놈을 위해서 썼던 여자. 덕분에 이 몇 년간 자신까지 고생은 좀 시켰어도, 여하간 이 빛이 비치는 세계에 놈을 묶어둔 건 이 여자였다.
……생각할수록 짜증나는 일이다.
다른 이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 따윈 적성에 맞지 않았다. 여자와 같은 방식이라는 것도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자가 했던 일이 확실히 녀석을 옆에 남겨두기엔 좋은 방식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성질을 누르고 선택한 길이었다. 놈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곤란했다.
낙원은, 이번엔 자신이 놈을 묶어둘 수 있기를 바랐다.
“……그 녀석을 위한 일이니까요. 플로리스트 카페가 뭐 손해날 일도 아니고,”
'직원은 엄선해서 골라놨다', '적당히 자리에만 있으면 굴러갈 가게다', '놈한테도 나쁜 일이 아니다' ……
그렇게 열심히 낙원이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있을 때였다.
올려다보던 정애가, 문득 한숨을 길게 쉬었다.
“경찰 양반,”
뭔가 해서 낙원이 말을 멈추자 여자가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우리 목화가 그렇게 좋아요?”
“……”
순간 말이 막혔다.
김낙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적은 김낙원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무려 여자, 그 중에서도 놈의 '누님', 한심한 듯도 하면서 애틋하게도 쳐다보는 무려 연민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데도 한 마디도 할 수 없다니-
그런데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좋아요. 그렇게 좋아요. 그렇게 좋아요……
마음을 쿡 찔러온 그 한 마디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이 질문 앞에서는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떠들고 있던 모든 사업계획과 여자를 설득하고자 했던 모든 말들이, 이미 여자가 한 질문의 답 그 자체였다. 속을 들킨 듯한 화끈함에, 낙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열이 올랐다.
게다가 이 여자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맴맴 도는 그 질문에 김낙원이 난생 처음으로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멍청히 서 있었을 때였다.
정적도 여자가 깼다.
연민의 눈초리로 올려다보던 여자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곧 통화버튼을 길게 누른 것이다.
“여보세요? ……응, 나지. 얘는, 누님 소리는 그만 하래도……”
그리고 정애가 조용히 나가보라는 손짓을 한 뒤에야, 낙원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꽃집을 빠져나갔다.
이렇게 여자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한 건 또 처음이었다.
가게 유리에 언뜻 비친 자신의 얼굴이 벌겋게 보였던 건, 자신이 잘못 본 탓일 것이다.
“……”
낙원은 스스로를 억지로 그렇게 달래면서 지하상가를 빠져나왔다.
-빌어먹을.
담배를 문 뒤에야 그는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렇게 우스운 꼴은 처음이었다. 그 새끼 때문에 별 꼴을 다 당해본다.
김낙원은 몇 마디 욕설을 내뱉고는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얼굴의 화끈거림은 한참 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형님, 그 경찰 양반 그렇게 큰 형님이 좋은 걸까요잉.”
저녁부터 술을 퍼먹던 셋째의 말에 원일이 뭐어, 하면서 이마를 문질렀다. 옛날에 술집 기집애들이 형님을 쫓아다니는 걸 보곤 제비, 그러니까 요샛말로 호스트를 했으면 강남땅에 아파트 두어 채는 그냥 받고도 남았을 겨라는 농담을 한 적은 있다. 그렇지만 사내새끼가……
원일은 머리를 긁적이다 한 마디만 했다.
“인기야 어쩔 수 없는 걸 어쩌겠냐.”
“그렇지만 남사스러울 수준 아닙니까요. 성격이 보통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어째 영 기생오라비 같이 생겨서는 하는 짓이 딱 술집 기집애 적금 깨서 큰 형님한테 바치는 것 같이 하는데……”
둘째가 걱정을 늘어놓았다. 툭 끼어들어 내뱉은 건 넷째였다.
“아 나 이러다 남자 형수 생기는 게 아닌가 덜컥 걱정된다 말입니다……!”
절대 거꾸로로는 생각하지 못하는 동생들의 아우성에, 역시 본래의 관계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원일이 얼굴을 구겼다. 가장 두려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원일이 어떻게든 부정했다.
“목화 형님이 뭐 그렇다고 받아줄 분이냐.”
“받아주시면 어쩝니까. 을매나 그 경찰 양반이 지금 지극정성입니까요……!”
하긴 보통 정성은 아니야. 뭔 날마다 도와주러 와, 밥 먹여줘. 은근 겸상을 허락하고 있는 걸 보면 목화 형님도 아주 또 마음에 안 든 것 같지는 않고……
아니 그렇지만-…
원일이 이마를 세차게 문질렀다.
“설마, 형님이 받아주시겠냐.”
“그렇죠?”
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서로 확인을 했다. 그리고 안심한 모양인지 왁자지껄 다른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원일이 진심으로 그 관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받아주시면 어떻게 하지.
그 낯짝에 대고 형수님 소리를 해야만 하는가, 원일은 엉뚱한 고민에 한참을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