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른손
아침식사로 나온 것은 삶은 계란 다섯 개였다.
“……”
잠시 말을 잇지 못했던 낙원이, 쏟아지려는 웃음을 참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썹업 후라이와 스크램블 에그의 대신인 거냐?”
박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들어올 때면 정육점이 닫는 바람에, 어제 박목화가 그나마 놈이 말했던 것을 떠올려 슈퍼에서 사가지고 온 것이다.
낙원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삼키고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감방에서 그래도 찜질방으르 올라섰네. 봐라, 하면 되잖아.”
단백질 소리를 하니까 신경 써준 게 어디냐 싶었다. 놈이 그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이상한 얼굴을 했지만, 낙원은 상관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감방 수준을 벗어난 게 어디냐 싶었기 때문이다.
낙원은 그래도 좀 나아진 식단에 만족하면서, 중학교 이래 먹어본 적이 없는 삶은 계란을 꾸역꾸역 다 먹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팔을 꿰맨 실밥을 푸는 날이었다.
김낙원은 오랜만에 입원해 있던 병원으로 연락해서 예약을 잡을까 하다가, 다른 것에 생각이 미쳤다.
“실밥은 아무데서나 풀어도 상관없는 거죠?”
그건 그렇지만 그 뒤의 상태를 봐야 하니 오라고 하는 소리를 낙원은 바로 씹고 전화기를 닫았다. 그리고 서경위에게 전화한 뒤 알아낸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대학병원이었다.
“아, 예. …그때의 경찰입니다만,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실밥 푸를 때가 돼서요. 그쪽에서 가능하겠습니까? 예, 예.”
그때 카페에서 그를 구해줬던 주인의 친구였다. 기왕 병원에 가야 하는 거라면 뭐라도 이야기를 듣는 게 좋지 않을까, 낙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마웠다고 이야기를 하자, 하얀 가운을 입은 카페 주인의 친구는 웃으면서 응대했다. 외과여서 다행이라고 낙원은 생각했다. 실밥을 뽑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대로 안정하시면 곧 회복하겠군요. 아무는 속도도 빠른데요.”
운이 좋았다고 웃는 의사에게 김낙원이 물었다.
“그 카페 하시는 분 말입니다. 어째서 카페를 하게 되신 겁니까?”
의사는 생각 외로 말을 까다롭게 고르지는 않았다. 시원시원하게 입을 연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외과과장 딸하고 결혼을 했는데 얼마 후에 그 과장이 밀려나고 라이벌이 새 과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에는 사사건건 괴롭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병원을 찾다가 중국에 있는 한인 대상의 병원을 찾았다고 했다.
그게 이 병원을 그만둔 이유지만, 중국에서도 버티기 어려웠는지 몇 달 만에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와 카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돈으로요?”
라고 묻자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기반을 다 털어서 중국 갔다가, 또 다 팔아서 왔을 땐 홀몸이었을 테니까. 아, 과장 딸하고는 중국 가기 전에 이미 이혼을 했지요. 좀 공주님 같은 여자라서.”
솜씨가 아까운 친구라는 말도 덧붙였다. 현대 의료 사회의 병폐에 질렸다고 했던 카페 주인의 말이 아주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중국이라, 중국.
……그 촌스러운 놈들도 중국에 선을 대고 있다고 했지.
김낙원은 기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쪽 관련으로는 자신은 전혀 몰랐다. 왜 날 찌른 걸까. 범인을 잡을 무렵이 되자 슬슬 궁금해지기조차 했다.
“중국 어디에서 일했는지는 혹시 아십니까?”
아, 의사가 손쉽게 가르쳐주었다.
“난양 이식 병원인가, 어딘지는 기억이 안 나고 대강 이런 이름이었죠.”
“이식이요?”
낙원이 묻자 의사가 대답해주었다.
“녀석 전문이 이식입니다. 저희 병원에서는 증례가 많이 생기지 않으니까 중국으로 간 거죠.”
알겠다고 하고 그는 일단 의사 앞에서 처치실로 옮겼다. 새 붕대를 감고 나가는 길엔 김낙원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퍼뜩 그려지는 그림으로 보면 가장 억울한 것은 자신이었다.
낙원은 수사부로 돌아갔다. 아까부터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자 서경위에게서 온 메시지가 5개나 되었다.
'수배했습니다.' '검거했습니다. 검거과정 중 이경장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흉기 발견. 루미놀 반응.' '자신은 경찰을 찌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빨리 오라는 말이 계속 뒤에 붙어있었지만, 김낙원이 그대로 향한 곳은 카페였다.
“자 봐라.”
김낙원은 카페에서 입수했던 주차장 CCTV 테이프를 틀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둥에서 튀어나오는 검은 인영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5초 뒤, 팔에 찔리고 뒤로 물러나면서 쓰러지는 자신의 앞에서 검은 인영이 쓴 모자 끝이 홱 돌아갔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카페 뒷문에서 나오던 의사와 주인이 소리를 질렀을 때일 것이다.
“여기가 중요하지.”
서경위와 최검이 중요하다는 말에 눈을 부릅떴다.
비디오 속에서 검은 인영이 칼을 팔에서 뽑아들었다. 은색 빛이 하얀 불빛에 반짝였다. 그때였다. 검은 모자가 갑자기 주춤하더니, 그대로 칼을 지니고 뛰기 시작했다.
“알겠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눈초리로 김낙원을 올려다보았다. 낙원이 혀를 부러 소리나게 찼다.
“놈이 뭘 봤겠어. 내 얼굴을 이때 처음으로 봤단 말야.”
“……!”
김낙원이 자신의 무고를 입증해줄 장면을 한 번 더 돌렸다. CCTV상에서는 명암이 확실히 갈리지는 않았지만, 다시 보자 처음 찔렸을 때에는 어두운 곳이고 뒤로 물러나면서 밝은 곳에 쓰러진 것이 보였다.
팔에 꽂힌 흉기를 뺀 놈이 주춤한 것은 자신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목표물이 아니었다. 그 2, 3초간의 망설임이 목격자와 자신의 목숨을 남겼던 것이다.
“놈은 충분히 칼을 꽂을 시간이 있었어. 문제는 노린 게 내가 아니었다는 거지.”
CCTV로는 보이지 않지만 카페 주인과 친구가 나와서 소리를 지른 그 뒷문은 이곳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둘이 뛰어오더라도, 일단 찌른 뒤 흉기로 위협하면서 도주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한 거리였다.
어둠 속에서 기다렸던 습격자가 마지막에 힘을 잃었던 건 오로지 자신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도주를 하면서도 손에 익은 흉기는 버리지 않고 점퍼만 버리고 갔던 거다.
“며칠만 뒀더라면 재습격이 있었을 거야. 단지 내가 아니라, 카페 주인이나 그 친구한테.”
김낙원이 중얼거렸다.
“친구요? 그 의사 말입니까?”
서경위가 물었다. 김낙원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주인을 중국에서 구해준 브로커 친구.”
'그 병원이요?'
카페 주인은 며칠 만에 불쑥 찾아와 낮부터 예전 일을 물어보는 김낙원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장기 이식 병원이죠? 한인 상대라면, 도너가 중국인이나 동남아인인.'
국제부에 있던 여자동기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의 이야기라 생각하고 장기밀매 조직 취재도 했었는데, 얼마 안 지나 딸이 신장염에 걸렸다는 것이다. 투석을 하다하다 어떻게든 이식을 해줄 사람을 찾는데 '찾겠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막막해지더란다.
한국에서는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기사를 쓴지 1년 6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변한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 했다.
결국 자신이 취재했던 몇 년 전의 취재원인 브로커를 찾아, 호통을 질타하던 그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사정사정한 끝에 간신히 필리핀인 도너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그때 발로 뛰는 기자여서 나았다고 생각한 건, 사기를 치는 브로커가 아니라 제대로 된 브로커를 안다는 점 하나 뿐이었다고 했다.
여자는 딸을 살린 뒤에 결국 그 잘 나가던 국제부 기자를 그만두었다. 취직 축하 파티에는 모두 모였어도 사직 파티를 열어준 건 김낙원 뿐이었다. 그때 술 먹다가 '너, 하늘 쳐다보던 놈 망가지는 거 좋아한다며. 년은 어때냐.'하고 울면서 해준 얘기다.
'한인들이 그리로 가서 이식수술을 많이 받는다더군요. 브로커들이 껴서 제대로 된 병원도 아닌 경우가 많다고. ……모르고 가셨죠?'
카페주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깐깐한 얼굴에 잠깐 회한이 스쳤다.
'처음에는 제대로 된 병원으로 보였는데. 결석이 낀 신장을 이식하라는 소리에 못 하겠다고 개복했던 걸 덮고 나서, 모든 건 그 뒤지요……'
낙원이 궁금한 건 그곳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느냐였다.
모르고서라도 한 번 발을 들이면, 이미 범죄를 저지르게 된 입장에선 의사가 가장 중죄였다. 한국이라면 15년 형이었다. 외국이라면 여권을 뺏기고 나서 탈출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들었다.
'어떻게 빠져나왔습니까? 그것도 이런 카페를 차릴 돈까지 가지고?'
낙원이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거기에서 만난 브로커가 어찌저찌 들고 왔던 돈에 여권까지 돌려줘서 탈출을 했던 모양인데, 그 브로커 친구도 그것 때문에 위험해져서 두 달 전에 탈출을 했다고 연락이 온 게 마지막이래. 입을 열면 귀찮아지니까 선을 댄 우리나라 놈한테 중국식 요구를 한 거야.”
카페를 다녀왔던 서경위가 갑자기 오한이 드는지 어깨를 굳혔다.
일상적인 카페라고 생각했던 곳이 갑자기 홍콩 액션 느와르에나 나올 듯한 '보복 습격'의 장이 되자 다녀왔던 게 찝찝해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두 달 전부터 드나들기 시작해서, 바에 앉아계셨던 경정님을 보고 오해한 겁니까? 막판에야 사진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그런 셈이지.
김낙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 봐라.'하고 하는 듯이 CCTV를 가리켰다.
“역시 오해였지 않나. 내가 찔릴 일 따위를 했을 리가 없지.”
그러나 그의 의도는 이번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그동안 가만히 듣고 있었던 최검이 그 말만큼은 봐 넘기지 못한 것이다.
“무슨 소리야. 인과응보지. 난 지금 '하늘의 그물은 성기지만 악인은 놓치지 않는다'는 진리를 봤다구.”
동시에 서경위가 말했다.
“그러게 왜 카페에 그렇게 자주 드나드셨습니까.”
“……”
김낙원이 이마를 찌푸렸다.
한 마디씩 더 퍼부으려던 서경위와 최검 모두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아졌냐. 낙원이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어찌되었건 그래서 난 살았잖나. 그러니 살인미수를 적용해. 법이 오해라고 봐주던? 놈은 경정 시해 기도범이야.”
무슨 자기가 황제라도 되는 양 시해니, 기도니 라는 말을 쓰는 김낙원을 서경위가 한숨을 쉬며 바라보았다.
“날 죽일 뻔한 건 사실이지. 그 조직도 교사범이야. 철저하게 적출해. 오해라고 해도 칼을 들이대는 놈들인 건 변하지 않아. 잘못했음 시민이 죽을 뻔한 일에,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 대신 칼을 맞아준 거지.”
서경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일이 많아질 거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김낙원은 이미 성큼성큼 나가면서 왼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럼 난 이만.”
대체 어디가 그럴 짓을 하지 않았다, 냐. 소리쳐 부르지도 못한 서경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넷… 아니, 다섯 근만 주십시오.”
그때 목화는 오랜만에 일찍 끝내고 집에 오다 정육점에 들렀다.
내내 따뜻하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자 다니는 사람도 적었다. 꽃집에 혼자 앉아있던 목화는 놈에게 '오늘은 가지 않는다'라는 문자를 받은 뒤엔 더 이상 버티지 않고 일찍 닫기로 결정했다. 오랜만에 집에 일찍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가는 길에 정육점에 들른 건, 내일 아침 놈이 식단으로 투덜거리는 걸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놈은 매일 아침 투덜거렸다. 투덜거리는 말이 이전의 감방 밥에서 요즘은 '감방 밥도 반찬 두 개는 더 나온다던데'라는 식으로 변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불평하는 것치고는 먹는 양이 조금씩 많아지고는 있었지만, 한 번 놈의 입을 꾹 다물게 해보고 싶기도 했다.
어차피 놈의 식성에 맞추지 못할 거라면 놈의 입을 가장 효과적으로 틀어막을 수단을 사자.
그게 목화의 생각이었다.
냉동실에 꽉꽉 채워놓은 고기가 설날 세 끼 만에 모두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다섯 근도 모자라지 않을까 싶었다.
한 끼 해보고, 괜찮으면 또 사지.
고기를 사들고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신발을 벗고 올라서자 놈이 이불로 몸을 싸고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인기척에 눈을 뜨더니 그를 쳐다보았다.
“어라, 웬일로 일찍 왔냐? 역시 춥지?”
네가 안 온다고 하길래, 라고 무심코 대답하려 했던 목화가 말을 멈추었다. 꼭 놈이 오지 않아서 일찍 닫았다는 것처럼 들려서였다.
음, 하고 목화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낙원은 별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손에 들린 봉지를 가리켰다.
“그건 뭐냐?”
“아, 고기.”
목화의 대답에 놈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잘 됐다. 배고픈데 시켜먹기는 싫었지. 구워 먹자.”
놈의 입에서 이렇게 빨리 순순히 '잘됐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목화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놈이 왼손으로 봉지를 채갔다.
스테이크도 할 수 있겠는데, 하고 중얼거린다. 꽤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야 너 부르스타 안 키우지? 저기 렌지 내려. 앉아서 구워먹는 게 맛이지.”
렌지를 내려라, 평소에 고기 좀 키워라, 너 평소 식단 너무 가난하다, 등등 놈의 목소리로 곧 시끄러워진다. 단숨에 시끌시끌해지는 좁은 방 안에서 목화는 잠시 잘 사왔다고 생각했다.
“나 오늘 실밥 뜯었다.”
낙원이 말을 꺼냈다. 그러냐, 놈은 별 말 없이 고기를 집어먹었다.
사실 정말로 해야 하는 말은 따로 있었다. 오늘 혼자 일찍 들어온 건 그런 이유였다.
'이봐, 내 탓이 아니었어.'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실밥을 뜯었다고 보고하는 선에서 멈춰버릴까. 낙원은 고민하고 있었다.
놈이 자신을 걱정하는 게 좋았다. 그것만큼 강력한 감정을 언제 또 놈한테 받아볼까. 그러니까 싸울 때조차도 사실은 좋았었다.
놈이 자신을 울컥하게 만들 때마다 놈이 자신에게 익숙해져가는 신호 같아서, 약 오르고 약이 오른 만큼 또 퍼부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는데.
드디어 놈도 '이 정도까지만 네가 안전에 신경 쓰면 가게 오는 것 정도는 봐주지', 하고 돌아섰건만, 꼭 말을 해야 할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박목화 얼굴 보기 전에 결정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놈이 일찍 들어왔다. 고기를 먹으면서 낙원이 놈을 힐끗 쳐다보았을 때였다.
“네가 어디 딴 데 안 가고 방에 들어와 있어서 다행이다.”
꼭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양, 놈이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너 좀 걱정이 되기는 했나보지.”
“……”
놈이 자신을 걱정하는 건 진심이었다.
만약 나중에 자신이 말하지 않은 걸 알면, 일이 꽤 복잡해질 터였다. 낙원은 '진심'이라는 물건이 참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놈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좋으면서도 또 그것 때문에 속이기 어려웠다. 거짓말은 인간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평소 주장하던 그였지만, 놈을 속인다는 생각을 하면 속에서 뭔가 저어하는 것이 있었다.
낙원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기만 집어먹었다.
“다음엔 갈비가 좋을까, 아니면 구이로 사올까. 냉장고를 채워둬야지.”
목화가 그를 보더니 그렇게 한 마디 했다. '다음'이라는 말이 그렇게 달콤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만일 얘기를 하게 되면 더 이상 같이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면에서는 자신을 잘못 본 그 바보에게 감사인사라도 해야 할 지 몰랐다.
“음.”
낙원은 자신이 놈이 된 것처럼 목구멍을 울려 소리를 내고는 고기를 집어먹었다. 얘기를 해도, 다음이 있을까……?
자리를 펴고 누울 때까지도 낙원은 결정하지 못했다.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 든 탓인가, 아니면 내일까지는 이야기를 해야 해서일까.
오랜만에 옆에 놈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날은 추웠다. 보일러를 최대로 틀어놓았어도 방은 전체가 다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약간 찬 공기가 코끝에 스칠 때마다 외풍을 타고 놈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고른 숨소리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소리를 안정적으로 느끼면서 잠들었는데, 평안이 깨지는 데에는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처음 이 반지하에 왔을 때는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싫은데, 그런데 놈의 옆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게 더더욱 싫었다.
낙원은 놈을 돌아보았다.
언젠가처럼 창문에서 새어 들어온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에 놈의 얼굴이 비쳤다. 놈은 단색의 먹으로 그려진 산(山)같았다. 오를 수도 없고, 올라서도 안 되는데도 계속 사람을 잡아끈다.
대개 누워 있을 때에는 빈틈이 생기는데도, 똑바로 서 있는 놈을 그대로 눕히기라도 한 양 놈의 얼굴에는 빈틈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만 봐서는 자는지 자지 않는지 알 수 없어서, 낙원은 낮게 물어보았다.
“자냐……?”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거기에 조금 적극적이 된 낙원은 약간 몸을 일으켜 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놈이 숨을 쉬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누운 그대로,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곽은 거대한 새를 떠올리게 했다.
지금은 잠들어 고개를 떨구고 있지만 언제 날개를 펼지 모르는 커다란 새. 날지 않고 뛰어 부딪치기만 해도 대개의 짐승들이 나가떨어질 것 같은, 육식성의 위압감 있는 몸집.
그러나 낙원은 놈의 식성을 잘 알고 있었다.
놈이 두른 깃털이 아무리 갑옷처럼 두껍더라도 놈의 입은 우직한 초식동물이었다. 곰 같은 잡식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놈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을 찾으라면 입맛을 바꾸지 못해 멸종한 스테고 사우러스를 꼽을 것이다. 단지 이 녀석은 우연히 비슷한 먹이를 찾아준 사람에 의해 현대까지 생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박광우가 보여주는 길을 따라갈 땐 오로지 그 놈에게서만 받아먹고, 그 풀이 떨어지고 나면 차마 달라고 하지도 못한 채 물러나 버린다.
지금은 누님이 준 물을 받아먹으면서 연명도 하고, 그나마 자신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는 있지만 박광우가 부르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하기야 철마다 먹이에 따라 식성을 바꿀 수 있는 놈이었다면 진작부터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봐, 알고 있냐.
김낙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네가 좋지만, 그 입맛만큼은 버려줬으면 좋겠어.
그래서 범인이 잡힌 걸 이야기해주기가 싫었다.
지금이라면 박광우가 부르더라도 놈은 책임감으로라도 곁에 남을 테니까. 가능하다면 계속해서 놈이 그렇게 자신을 염려해줬으면 했다……
환상이라고 해도 좋았다.
김낙원은 놈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꼭 지금 손을 내밀면 놈이 자신의 손에서 먹이를 받아먹을 것만 같았다.
주황색 불빛을 따라 주춤주춤 내밀었던 손이, 놈의 얼굴 위를 새끼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틈새를 남기고 쓰다듬었다. 실제로는 닿지 않았지만 그의 손이 박목화의 피부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갔다. 곧은 이마에서 콧등으로, 인중에서 입술 위를 몇 번 감돌다 턱을 쓰다듬었다.
낙원은 놈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목 아래로 더 손을 내리지 못하고 한숨을 쉰 뒤 옆으로 비키려 했을 때였다.
오른팔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한 김낙원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고 있었던 그 선을 넘었다. 목화의 뺨에 손가락이 닿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놈의 얼굴에 손이 닿은 지도 몰랐다. 조금 더 놈을 가까이 보기 위해 조심해서 앞으로 다가섰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박목화가 눈을 떴다.
“……!”
그리고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에 놀랐는지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 했다. 우연히 손이 닿았을 뿐이라고 변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목화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뭐하냐.”
뭐라고 말을 하지, 김낙원이 재빨리 머리를 굴렸지만 위급할 때마다 잘도 돌아가던 머리는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워낙 가까우니 우연히 손이 닿은 것 뿐이다, 라고 변명을 하려던 김낙원은 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말을 멈추었다. 어떻게 말해야 범인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쫓겨나지 않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낙원은 그 자리에 정지했다.
“……”
목화는 누운 채로 놈을 올려다보다, 놈이 답을 하지 않자 어쩐지 예전에도 이랬었다는 생각이 났다.
……여관.
그래, 여관에 갔을 때다.
목화는 놈이 자신에게 손을 뻗었던 때를 기억했다. 해치지 않을 거라고 말이라도 하듯이 천천히 부드럽게 뻗어온 강렬한 체온.
낙원이 숨을 토해냈다. 그 숨에도 놈의 체온이 섞여 있었다. 지금 목화의 귀에 들리는 놈의 숨소리도 그러했다. 열(熱)을 띤 숨소리.
'보여줘.'
놈은 부탁했었다.
낮은 목소리가 놈의 손에 닿아있던 피부로부터 울려왔다. 누구도 만지지 않은 복부로 손을 뻗어왔을 때에는 체온을 가진 그 손을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열기가 전염이라도 되는 양, 놈의 손이 닿은 곳이 따끔거렸다. 뱃속에서 근질거리는 무언가가 치밀었다.
-상처에 와 닿았던 그 온기를 기억한다.
손이 닿았고, 숨이 닿았고, 놈의 입술이 닿았다.
누구도 그런 적이 없었다. 놈의 체온은 부드럽거나 스며드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온기는 또 하나의 칼처럼 이미 다 아문 흉터를 저며 들었다. 목화는 그 자리에 상처가 있음을 놈의 체온으로 다시 한 번 깨달아야했다. 그러나 그 강렬한 온기는 오래토록 남았다.
목화는 그 뒤로도 종종 스스로의 상처 위에 손을 얹곤 했다. 어머니들이 애기가 아프면 안고 어르며 배를 문지르듯이, 그러나 그 자신은 한 번도 없는 경험을 떠올려.
그래서 목화가 자신의 체온으로 반추하는 것은 놈의 체온이었다. 때로 다 아문 상처가 아플 때면 그는 유일하게 그 흉터를 본 놈의 온기를 떠올렸다. 살을 저미듯이 아파도, 놈의 체온을 떠올리면 너무 뜨거워서 그 고통을 잊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꽃집을 떠났다 돌아온 날, 놈이 자신의 손등을 내리친 뒤에 붕대를 내밀었을 때 순순히 손을 내밀었는지도 모른다.
손등을 보고 혀를 차는 하얀 불빛 아래의 놈이 가진 것은 호의였지만, 그 호의가 진심인 만큼 냉장고가 울어대는 보랏빛 바닥에서 놈이 자신에게 드러냈던 적의와 욕망 역시 진실이었다.
놈이 적인지 아군인지 그로서는 구분이 가지 않았다. 붕대를 꺼냈다고 해도 놈이 치료를 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무언가에 심사가 꼬이면 또 내리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그는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놈이 자신의 손에 붕대를 감는 것을 기다렸던 건, 놈의 체온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에 와 닿았던 그 입술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놈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상처 낸 손등에 입술을 대주었다.
놈이 사준 밥을 먹고 다시 여관을 갔던 건, 놈의 체온에 끌렸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고 나온 놈이, 자신의 손등을 보고 기묘한 표정을 짓는 것을 목화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낙원에게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놈이 자신의 손가락을 입술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때서야 목화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놈과 이곳을 왔는지 깨달았다.
체온이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만져주지 않았던 방식으로 자신의 흉터에 닿아왔던 바로 그 온기를 그는 바랐던 것이다.
놈의 숙인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놈의 모양 좋은 입술이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머무르며 온기를 불어내다. 드디어 자신이 상처 입힌 손등에 이르렀을 때는 조금 더 깊은 숨을 토해냈다.
그는 놈의 체온에 이끌려갔다. 놈의 물기어린 머리카락이 팔목에 닿았다. 간지러운 열기가 조금씩 퍼져가다. 그 열기에 순간적으로 휩쓸렸다. 누가 먼저 뒹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열기를 가진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에 맞댄 것은 처음이었다. 놀랍게도 싫지 않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놈의 얼굴은 그가 아는 누구와도 달랐다.
놈은 욕망과 적의와 호의가 뒤섞인 숨을 토해내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그 얼굴조차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일그러질수록 놈의 본질이 드러나는 느낌까지 들었다. 입매를 비틀고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욕망에 솔직하고 충실한 김낙원이.
그는 놈의 폭력보다 욕망에 졌다. 목화는 그 뜨거움에 잠시 모든 것을 잊었다. 그러나 샤워를 하고 돌아오자 낙원은 사라져 있었다.
“그때, 여관에서……”
목화는 문득 중얼거렸다. 열기를 띤 녀석의 숨소리에 그때가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운이다. 그 때 낙원이 사라진 침대 옆에는 메모가 남아 있었다.
“……”
낙원은 목화의 말에 숨을 삼켰다.
여관에 갔던 일을 떠올린 걸 보면 놈은 이미 그의 욕망을 알아챈 듯 했다.
끝났다고, 낙원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놈은 그를 내쫓고 말 것이다. 자신의 호의가 어떤 방향에서 왔는지 안다면, 박목화는 앞으로 당연히 자신을 경계할 터였다.
그는 목화를 이미 자신의 욕망으로 휘둘렀던 전력이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었다. 지금 놈이 잊고 있는 건 오로지 자신이 욕망을 드리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김낙원은 생각했다.
눈앞에서 반년의 시간이 부서져갔다. 같은 방에서 자기는커녕, 가게에 드나드는 걸 봐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낙원은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놈을 보면 놈의 고개를 자신에게 돌리고 싶었고, 놈의 얼굴을 내려다보면 만지고 싶었으며, 만지고 나면 놈의 셔츠 깊숙이 손을 넣어 누구도 닿지 못한 놈에게로 파고들고 싶은 건 당연한 게 아닌가.
낙원은 뻔뻔하게 스스로를 변명했다. 이미 그는 놈의 체온을 알고 있었다. 가장 깊숙이 그 좁은 골반 사이로 파고들어 욕망을 풀었던 경험은 때때로 양날의 칼이 되어 그를 괴롭히곤 했다.
이미 한번 경험한 욕망에 끌리는 것은 지나치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욕망을 억제해본 적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거세당한 양 반 년을 버텨왔다. 한계였다.
-어차피 신뢰를 받을 수 없다면, 욕망에나 충실해져 볼까.
그렇게 생각했던 낙원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럴 거라면 진작 때려 쳤을 것이다. 때려 칠 기회는 얼마든지 많았다. 그는 이 반 년 간 가면을 쓴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자원 봉사하는 마돈나를 사귀려 1년을 야학에서 생활법률 따위를 가르친 전력도 있는 그였다. 그깟 반년, 놈을 손아귀에 떨어뜨리기 위 해 가면을 쓰는 건 간단했다.
그러나 그는 놈에게 가면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놈이 좋다는 더 본질적인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다.
낙원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놈의 얼굴이 몇 번이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낙원은 그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겼으면, 하고 바랐다.
닿지 않고 쓰다듬었던 놈의 이마와 콧등에서 이어지는 인중과 입술이 시야를 몇 번씩 맴돌았다.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목이 말라 침을 삼키곤 놈의 얼굴에서 시선을 비켰다.
그때였다.
놈이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급한 일이 뭐였지?”
무슨 이야기지, 라고 생각했다. 낙원은 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놈이 '그때, 여관에서'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을 떠올렸다.
여관을 간 것은 두 번이었다. 언제 적을 이야기하는지는 몰라도, 두 번 다 그는 욕망에 충실했고 너무나 충실했던 끝에 도망쳤다. 무엇이 그토록 자신을 놈에게로 끌어당기는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놈의 가운을 벌리고 흉터를 맛보고는 퍼뜩 놀라 머리 위로 찬물을 부은 주제에, 다시 가서는 놈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침대에 처박혀 놈과 뒹굴었던 주제에, 또 마지막에는 스스로의 욕망의 색깔을 알 수가 없어 도망쳤더랬다. 놈이 샤워하던 사이에.
……그제야 낙원은 놈이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곧 알아들었다.
메모. 그때 나가려다 말고 침대에 남겨뒀던 메모였다. 급한 일이 있어서 간다고 남겼던 그 메모의 뒷이야기를 묻는다는 건.
그러고 보니 놈은 그때 화를 내지 않았지.
낙원은 목화를 다시 돌아보았다. 어쩌면 놈은, 그렇게까지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닌지도 몰랐다. 놈은 고통을 참을 수는 있어도 숨기지는 못했다. 그런 놈이, 그때의 이야기를 저렇게 꺼낼 수 있다면-……
놈은 허리만 숙이면 얼굴이 닿을 듯한 거리에 있었다. 낙원은 끌려가듯 놈에게 몸을 숙였다. 놈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다가갔다. 손을 내밀었다가 놈의 어깨를 잡는 것만으로도 닿을 수 없는 놈에게 닿았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좀 더, 그는 바랐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에 와 있었다. 팔을 뻗으면 안을 거리였다.
……그렇지만 과연 팔을 뻗어도 될까?
낙원은 반 년을 버텼던 이성의 마지막 벽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그는 너무나 가까이에 와 있었다.
놈은 자신의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목화의 몸에 닿은 손으로부터 온기가 손가락의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와,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따가울 정도로 뜨겁게 데워져갔다.
어찌할 수 없게 된 낙원이, 비록 왼손이지만 놈을 꽉 껴안았다. 누워 있던 놈의 몸 위로 몸이 쓰러지면서 겹쳤다.
“……!”
놈은 가만히 있었다. 팔 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사내 놈이 왜 그렇게 좋을까, 웃으려 든 것도 잠깐이었다. 낙원은 웃지도 못했다.
잠옷으로 입는 셔츠 타입의 파자마에 얼굴을 묻었을 땐, 놈의 냄새가 났다.
물냄새였다. 고여있거나 담겨있는 물이 아닌, 식물의 수관에 흐르는 물냄새. 혈관에 도는 놈의 살내음. 반 년만이라는 인식이 어딘가 숨어있는 이성에서 알려왔지만 속에서 치밀던 무언가에 불을 더 지폈을 뿐이었다.
어깨를 껴안았던 손을 움직여 피부를 더듬어갔다. 딱딱한 단추가 손끝에 느껴졌다. 한 손만으로도 풀기 어려운 단추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열에 들뜬 손가락은 두어 번을 실수하다, 간신히 풀어냈다.
첫 단추를 어찌어찌 풀어내린 낙원은 드러난 맨살에 왼손이 닿자 모든 것을 잊었다. 그리고 손바닥 움푹 파인 곳까지 놈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 천천히 더듬어갔다. 장인이 무두질한 가죽처럼 약간 찬 듯한 피부가 그의 손바닥이 지나가면 따뜻해졌다.
낙원은 숨을 옅게 들이켰다.
“……”
-뭘 믿고.
목화는 아래에 깔린 채 부옇게 흐려지는 머릿속에서도 붕대에 감긴 낙원의 오른팔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저 팔로 덤비겠다는 건가. 지금 그 팔은 붕대와 함께 그의 체중을 감당하기에도 버거워보였다.
하기야, 낙원이라면 '나 환자니까 치지 마'로 압박을 줄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잠시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목화 자신이 봐줄 마음이 있을 때였다.
보호관찰 기간도 끝났다. 한 대 치기만 해도 바로 재소자가 되어 꽃집을 접어야 하는 때는 지난 것이다. 낙원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성한 자기 몸을 가지고 덤벼드는 것 뿐이었다.
그렇지만 녀석은 환자였다.
그것도 그가 오른팔에 손만 뻗어 쥐면, 기껏 실밥을 빼고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터질 중상의 환자.
뭘 믿고 이러는 건가.
그저 물어보았을 뿐인데 갑자기 덤벼든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놈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을까. 목화는 낙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놈의 얼굴은 이미 열에 들떠 있었다. 저렇게 욕망에 솔직한 얼굴은 분명 본 기억이 있었다.
그때다. 그 여관에서…
순간 셔츠 속으로 파고든 놈의 손이 움직였다. 약간 차가워져 있던 맨살에 놈의 체온이 느껴지자 마치 뜨거운 인두가 파고든 듯 했다.
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싫다는 혐오감보다도, 지나치게 뜨거워서였다. 열기에 휩쓸릴 것만 같아서였다. 목화가 눈을 깜박였을 때였다.
낙원이, 자신의 귀에 입술을 댔다.
“……!”
낙원은 목화의 귓불을 약하게 깨물었다. 놈의 귀에서는 물내음도 살내음도 나지 않았다. 가장 바깥에 나기 시작한 나뭇가지의 눈처럼 귓불은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웠고 약간 물컹한 살집이 있기까지 했다.
모든 게 단단해 보이는 놈의 몸에서 이런 연약한 곳을 맛볼 때마다 낙원의 속 깊은 곳에서 충동이 끓어올랐다. 이미 그는 놈의 귀와 목덜미의 감촉을 알았다. 아는 만큼 더 목이 말랐다.
입술에 닿은 귀 끝이 찼다. 낙원은 그 여린 살을 살살 깨물고 데웠다. 아직도 솜털이 남아 있던 놈의 귀 끝이 손에 닿은 몸과 같은 온도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귀 뒤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선을 부드럽게 핥았다.
곧은 목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광택을 뿜어내는 건장한 놈의 목과, 단단한 근육 사이에 자리잡은 놀랍도록 연약한 유두처럼.
손끝에 놈의 그것이 닿았을 때 김낙원은 충동적으로 눌렀다. 손가락 사이에 끼고 지분거렸다. 놈이 무어라 소리를 냈지만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럴 정신이 있다면 여자도 아닌 남자의 젖꼭지 따위가 뭐가 아쉬워서 만지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놈의 것이라면 뭐든지 목이 말랐다. 낙원은 몸을 숙여, 헤쳐진 놈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반쯤 발기한 것처럼 서 있는 유두를 입안에 넣었다.
부드러웠다. 손끝으로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단단한 근육과는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그 피부를 혀로 굴리자 놈이 본능적인 경련을 일으켰다. 김낙원은 달래기라도 할 듯 약하게 핥았지만 결코 몸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다른 쪽으로 입술을 가져갔을 뿐이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탓에 목화의 가슴은 반만 헤쳐져 있었. 아직 헤쳐지지 않은 놈의 얇은 셔츠 위로 찬 공기 때문인지 그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뻣뻣하게 선 쪽을 낙원은 입으로 물었다.
목화가 숨을 들이켰다. 경련을 일으킨 놈이 무어라 소리를 냈다. 어떤 소리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소리가 귀로 들린 뒤엔 낙원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충동은 한 순간 열정으로 타올랐다. 낙원이 놈의 몸을 더듬던 입술에 체중을 실었다. 단추를 풀어가던 낙원의 손이 근육 사이로 미끄러졌다, 단단한 복부에 닿았다. 상처를 더듬으려던 순간 놈이 몸을 움츠리는가 싶더니, 더 내려가기 전 그의 손목을 잡았다.
“……뭐하자는 거냐.”
놈의 숨도 거칠어져 있었지만 저지하고 있는 손아귀 힘은 진짜였다. 오른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왼손을 놈의 손아귀에서 빼낼 수가 없었다.
낙원은 부질없이 몇 번 움직이려 했다. 불가능했다… 가빠진 숨을 되돌려 힘을 넣어보려 애썼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낙원은 약간 분기에 찬 채 얼굴을 들어올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목화는 말이 없었지만 눈빛이 아까의 질문을 거듭했다. 뭐하자는 거냐.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낙원이 어떻게든 대답하려 했을 때였다.
“이제 나에게서 알아낼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않나.”
목화가 말했다.
'그런 게 아냐.'
낙원은 숨을 몰아쉬면서 빠르게 중얼거렸다.
목화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갈증이 오른 입술 사이로는 거친 숨만이 새어나왔다.
그런 게 아냐. 그런 이유로 몸을 겹친 것이 아니었다. 절망이 어두운 물처럼 스며들었다. 지금까지 이 모든 걸 그렇게 생각했던 건가. 숨이 가빠진 머리가 삽시간에 침잠했다.
여관에서는 어디까지 놈의 체온을 맛보았지? 희미하게 떠올리자, 어쩌면 놈은 여관에서 몸을 겹쳤던 것과 꽃집에서 당한 일을 나눠서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놈이 기억하는 한, 놈이 여관에서 내놓은 체온은 확실히 거기까지였다. 더 아래로는 놈이 허락한 적이 없었다. 그 아래로는 자신이, 오로지 폭력으로 놈을 억지로 비틀고 파고들었더랬다. 그러니까 놈은 자신의 손을 잡고 저지한 것이다.
더 하면, 폭력이 된다고.
자신의 탓이었다. 놈이 참고 견뎌야 하는 고통과 폭력을 만든 것은 그였다.
“싫으면 쳐.”
그래서 낙원은 소리를 쥐어짰다. 미묘하게 떨려 나오는 목소리가 비참했다.
놈은 어차피 자신보다 강했다. 다치지 않았더라도 그는 박목화를 당해낼 수 없었다. 한 대 치는 것만으로도, 아니 단지 손으로 가볍게 밀어내려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놈이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육체적인 문제 뿐만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그는 이미 목화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러나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화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왜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막바로 밀어내지 않는 것을 보니 놈의 마음에 조금은 더 들어간 것 같은데. 낙원은 피식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지금은 놈이 그를 경계하게 될 그 이유를 이야기해야 했다. 이제는 피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참을 걸,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나 이러고 있는 중에도 몸이 닿아있는 하반신의 욕망도 숨기지 못하는 낙원으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약점을 잡기는커녕 자신이 붙잡혀 버렸다. 감정조차 이야기할 수 없어서 끙끙거린 게 반 년이었다. 욕망을 걸어 잠그고 놈의 옆에서 일상이 되고 싶어 한 지가 반 년이란 얘기다.
놈이 자신에게 왜 호의를 가지느냐는 의문을 가질 때마다, 대답 한번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놈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였다.
그러나 이미 그는 욕망으로 발가벗겨진 뒤였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었다.
어쩌면 그가 감정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놈의 주변에서 맴돌았던 것도 비겁한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낙원은 자신을 드러낸 이후에야 그걸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놈의 일상이 되기를 바랐다. 목화가 자신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도 받아들여주기를 원했다. 확실히 비겁했다…
그렇지만 그건 놈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밀어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목화는 자신을 경계할 것이다. 밀어낼 것이고, 앞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게 마지막으로 놈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이리라, 낙원은 체념과 함께 생각했다. 그 뒤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낙원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처음으로 그 한 마디를 목화의 시선 앞에 노출시켰다.
“사랑한다.”
…
목화는 낙원의 얼굴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상했다. 울 것 같은 표정이라고 목화는 생각했다.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낭패한 얼굴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언제나의 웃음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그가 모르던 낙원이었다. 웃으면 입매가 일그러졌고, 숨을 내쉬면서 이마를 찌푸렸다.
멍청한 짓을 했다는 얼굴이었다.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대로 침묵 속에 시간이 흐르면서 놈의 표정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심지어는 겁을 먹은 듯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얼굴에 놀라던 목화가 놈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내뱉은 두 번째 말을 들었다.
“사랑해.”
이를 악 다물고 내뱉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공포의 눈빛이었다. 그렇게 말한 뒤에도 낙원의 표정은 계속 바뀌었다. 도와줘, 라고도 보이는 얼굴이었다.
놈에게서 저런 얼굴을 볼 줄은 몰랐다.
일순, 속이 지끈했다. 예전부터 느꼈던,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얼굴이었다. 얹히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목화는 아무 얘기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대응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목화는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서 힘을 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낙원이 자신의 손목을 잡은 그의 오른손으로 몸을 숙여, 가볍게 끌어당겼다.
목화는 낙원이 자신의 손을 가져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마치 낙원이 상처를 입혔던 꽃집에서처럼, 그렇게.
그러나 이번에는 이유가 달랐다. 뭔가가 달랐다. 그 때는 보호관찰에 대한 생각을 하며, 많은 생각을 하며 저항을 포기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놀라서, 그리고 가슴팍이 답답해서 어떤 생각도 가능하지 않았다.
손등에는 낙원이 남겼던 상처가 여전히 하얗게 남아 있었다. 어린 아이가 잘못 그은 하얀 크레파스 자국처럼.
낙원이 남긴 흉터였다. 낙원은 천천히 목화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목화는 놀랐지만 손을 잡아 빼지는 않았다. 놈의 입술이 파랗게 돋은 핏줄 사이로 하얗게 손등을 횡단하는 흉터 위로 닿아왔다. 천천히, 가볍게, 쪼는 듯이.
놈의 겁내는 듯한 얼굴에는 욕망만이 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어떤 얼굴과도 달랐다. 빈정거림도 여유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즐거움도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서 목화는 어쩌면 놈이 하고 싶어 하는 건 이전에 그에게 했던 짓과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그만큼 놈이 자신의 흉터에 닿아오는 방식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직접적이었다.
흉터에 입술이 조심스럽게 비벼졌다. 한 번 깊이 상처받았다가 갑옷처럼 새로 돋아난 살 특유의, 자기 것 같지 않으면서도 이상하도록 민감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어떤 것이 그에게 주어졌다고 목화는 느꼈다. 지금 애원하는 어린애 같은 얼굴로 달라불은 낙원은 그에게 지킴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
참아왔다. 정신을 누르려고 하는 자들은 익숙했다. 그저 참고 아무것도 아닌 듯 흘려보내면 그만이었다.
낙원이 그에게 했던 짓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틀렸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에게 보호받는 자가 폭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의 존재를 요구해오고 있는 것이다.
당황했다. 이것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문득 귀에 작은 진동음이 들려왔다.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던 냉장고 소리였다.
동시에 낙원이 몸을 움직였다. 목화의 배에 얼굴을 묻고, 흉터에 입술을 부볐다. 목화는 움찔했지만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안으로 패이고 옆으로 찢겨진 우둘투둘한 상처였다. 거기에 닿은 것은 오로지 놈밖에 없었다.
하얗게 꼬아진 삼줄 같은 세 개의 흉터가 치골과 복부 사이에서 숨을 쉴 때마다 올라갔다, 내려왔다. 위에 것은 급소에 가까웠지만 길고 얇았고, 복부 아래쪽의 것은 깊고 작았다. 그리고 마지막 것은 가장 크고 깊은 것이었다.
세 개의 상처가 그가 움찔거리자 문신처럼 따라 움직였다. 이중에 가장 치명적인 문신 두 개를 새겨 넣은 막내는 낙원이 죽였다. 그 총소리를 어렴풋이 목화는 기억했다. 총을 쏜 것은 김낙원이었다.
그때였다.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낙원이 자신에게 속삭여왔다. 그리고 그 반 년밖에 되지 않은 새로운 흉터를 핥아 올렸다. 목화의 움찔거림이 경련처럼 커졌다. 그 행위는 더 이상 힘의 문제가 아니었다.
목화는 같은 남자에게서 이런 접근법을 겪는 것이 처음이었다. 낙원의 혀는 말을 걸어오고 있었고 그에 대답할지 대답하지 않을지는 그에게 선택권이 있었다…
부하들도 광우형님조차도 목화에게 있어서는 이미 주어진 사람들이었다. 위계질서와 함께 주어진 사람들인 것이다.
“……”
처음으로 싫으면 밀어낼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싫지 않았다.
문득, 인중 아래쪽에 다시 무언가 걸린 느낌이 났다. 그리고 이번에 그 감각은 아주 생소하고 뜨거운 것이 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상처 위에는 입술의 감촉만이 남았다. 오랫동안 체온이 닿아 있던 흉터는 안쪽까지 따뜻했다. 더 이상 목화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이봐, 사랑해.”
“이봐, 사랑해.”
덧붙일 말은 없었지만 반복이라면 할 수 있었다. 일단 한번 입으로 뱉어보자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씨발, 낙원은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목화의 귀에 두 번 세 번 그 말을 불어넣었다. 촌스러운 고백인데다가 어린애처럼 달려드는 형국이다. 자신이 누군가의 귀에 대고 이따위 말을 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른 놈들처럼 애송이가 되고 말았군.'
낙원은 언뜻 생각했다. 이성은 문득 수치를 느꼈지만 그럼에도 행복했다. 목화가 살아있다는 것이, 그래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지독하게 기뻤다.
목화가 점점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 반응을 느낀 낙원은 애송이라도 좋다고 결정하고 그 생각을 치워버렸다. 좁은 골반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낙원이 좁은 골반 사이에 자리 잡은 놈의 사내를 더듬었을 때였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여태껏 놈에게서 얻어냈던 소리 중에 가장 큰 소리였다. 그리고 거기에 입 맞추었을 때에는, 목화가 놀랐는지 숨소리에 신음이 섞였다.
“흣!”
이봐, 사랑해. 사랑한다고, 낙원은 두어 번 그 신음에 대해 보답하듯 뇌까렸다.
놈은 곧 격하게 몸을 비틀었다. 몸을 빼내려는 것을 붙잡은 낙원이 움츠리느라 둥글게 만 등을 쓸어올렸다. 허리부터 쓸어올리자 녀석은 더 피할 곳을 찾지 못했다.
어디를 잡아야 멈출 수 있는 지 몰라 몸을 틀면서도 붙잡을 곳을 찾지 못하던 목화가 붙잡은 것은 낙원의 머리카락이었다.
낙원의 손이 그 등을 몇 번 쓸어내리다, 갑주같이 단단한 상체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낙원은 빳빳하게 선 놈의 것을 혀로 가볍게 핥았다. 살내음이 바로 와 닿았다. 체온이 다 여기로 몰려 있는 듯 했다.
그 뜨거움에 혐오감은 들지 않았다. 열기가 전염된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상관없지. 사랑하니까. 아까 처음으로 내뱉었던 말이 여러 가지에 이유가 되는 것에 신기해하면서 낙원은 놈의 것을 입에 물었다.
“……!”
목화가 몸부림쳤다. 몸을 빼지도 못하고 내밀지도 못한 채 자신의 머리카락을 붙잡는다. 세게 붙잡지도 못하고 자꾸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빠뜨리면서도 어떻게든 옭아매려고 드는 놈을, 낙원이 성기 아랫부분까지 잠시 물었다, 놓았다가, 다시 혀로 핥았다.
녀석이 몸부림쳤다. 목화가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이런 건 처음인 모양이었다. 강렬한 자극에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그것조차 사랑스러웠다.
쿠퍼액까지 핥자 목화가 어떻게 하지 못하고 등만을 격렬하게 뒤척였다. 머리카락을 잡을수록 더 깊숙이 허용하게 된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었다.
목화의 손이 머리카락을 간신히 놓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입에 물자 낙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오른쪽 어깨가 아팠지만 낙원도 놈도 그런 것엔 생각이 미칠 정신이 없었다.
흣, 과 큭, 이 섞인 이를 악문 소리가 머리 위에서 연신 터졌다. 어떻게든 참으려고 드는 게 놈의 최선이었다. 벌게진 얼굴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베개에 묻는 게 고작이었다.
낙원은 목화의 처음 맛보는 뜨거움에 어떻게든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덤벼들었다. 몸싸움을 하듯 뒤척거리다 베개가 등 뒤에서 빠져나가 바깥으로 밀려났다. 낙원이 입에 문 채로 혀를 움직였을 때였다. 드디어 놈이 이로 물었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아, 와 하아, 가 섞인 연약한 소리였다.
목화의 몸에서 의외의 연약한 부분을 찾아냈을 때처럼 낙원의 속에서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낙원은 놈이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입을 떼었다. 그리고 등을 더듬던 손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저항이 왔지만 강한 것은 아니었다.
낙원은 놈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 채로 조금씩 몸을 붙였다. 그리고 드디어 좁은 골반 사이로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힐끗 스친 녀석의 얼굴에 다시 말이 터져 나왔다.
목화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낙원은 놈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린 쿠퍼액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고.
그 말을 되뇌일수록 박목화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이십 번쯤 속삭였을 때에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낙원은 자신도 그렇다는 것은 몰랐다. 그저 목화에게 더 닿고 싶어 비좁은 다리 사이를 어떻게든 파고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파고들었을 때에는, 그 빡빡함에 신음했다.
“흐으,”
소리를 낸 것은 낙원이 먼저였다. 천천히, 더 깊숙이 안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약간 뒤로 물렸다 앞으로 넣으면서 조금씩 움직이면서 들어가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목화가 얼굴을 돌리려 했다. 베개 없이 바닥에 누운 얼굴을 낙원이 본능적으로 쫓아갔다.
목화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낙원은 맺힌 땀을 입술로 훔쳤다. 놈의 몸에 뿌리 끝까지 들어간 건 그때였다. 목화가 고통으로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낙원이 그 입술 위로 입을 맞췄다.
“……!”
목화의 눈이 깜박였다. 놈에게는 처음일 것이다. 여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박목화의 입술을 낙원은 마음껏 누르고 탐했다.
언제나 굳게 다물려 있던 놈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입을 맞추고 혀로 입술 안쪽의 부드러운 피부를 살짝 핥으면서 낙원이 허리를 움직였다. 빠져나가는 기색에 약간 편안해졌던 놈의 얼굴이, 다시 깊숙이 들어오자 아픔에 일그러졌다. 그래도 목화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사랑해.”
말문이 터진 김낙원이 주문이라도 되는 양 속삭였다. 입속에서 웅얼거린 말은 다시 입 맞춘 녀석의 입술로 옮겨갔다.
목화는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하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그 찌푸리는 얼굴조차 사랑스러워, 낙원은 왼손으로 놈의 몸을 더듬어가다 연약했던 유두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목화의 목구멍에서 터진 신음이, 그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허리가 움직인 듯한 감각에 낙원이 목화를 더 쓰다듬었다. 입술을 핥자 놈이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입을 벌렸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온 낙원이, 목화의 몸속에서 조금 더 격하게 움직여갔다.
한 번 풀린 욕망이 치달려가는 것에 다시 고삐를 잡았던 건 놈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욕망을 풀고 끝나는 게 아니라 몸을 겹치는 시간이 길어지기를 그는 바랐다.
몇 번을 더 격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움직여갔을 때였다. 어느 순간 배에 꼿꼿해진 놈의 성기가 와 닿았다. 낙원은 웃었다.
그 웃음에 목화가 다시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낙원이 쿡쿡 찌르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복부에 와 닿은 놈이 빳빳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낙원은 집요하게 같은 부분까지만 추삽질을 계속했다. 목화의 돌린 얼굴이 벌게지더니, 이마를 찌푸렸다가, 결국 커다랗게 숨을 토해냈다.
그 숨소리에 마지막 남아있었던 고삐가 끊겼다. 생각은 전부 풀려나가고 최후에 남은 것은 본능적인 욕망 뿐이었다.
손에 닿는 몸이 뜨거웠다. 귀에 닿는 숨소리가 가빠왔다. 자신의 것인지 놈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숨소리가 섞일 정도로 목화가 가까웠다.
낙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움직임이 박차를 가했다. 격렬하게 드나들기 시작한 낙원이 어느 순간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을 때였다.
팔이 그의 등에 와 닿았다.
이마를 찌푸린 목화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등을 둥글게 말았다. 어떨 때 놈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낙원은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허리가 세차게 움직였다. 붕대를 감은 오른팔이 몸 사이에 눌려 있었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선 신경이 미치지 않았다.
목을 깨물었다. 놈이 목을 숙였다. 목덜미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귀로 이어지는 연약한 피부를 그는 잘근잘근 씹고 핥았다.
목화가 그의 어깨를 잡은 팔을 움직였다. 어색한 움직임이었지만 놈의 팔이 견갑골을 몇 번 격하게 쓰다듬었을 땐, 낙원 역시 더 이상은 참지 못했다. 어느 부분에 다다르자 배에 닿은 놈의 성기가 꼿꼿하게 흔들렸다.
사정은 길었다.
놈이 숨을 토해내다 못해 아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배가 따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목화의 몸속에서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낙원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사랑한다고, 낙원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속삭였다. 생각이 아니라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높은 곳에 오른 것처럼 정신이 멍멍했다.
속삭임이 놈의 귀에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숨을 돌리고, 침을 삼키고 나자 정신이 약간씩 돌아왔다.
“……”
그제야 본 녀석은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속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일 것이다.
낙원은 목화의 감긴 눈꺼풀 위로 입을 맞췄다. 놈의 체온에 정신이 조금씩 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목화에게 입술세례를 퍼부었다. 이마에도, 코에도, 뺨에도, 입술에도.
“……사랑해.”
낙원이 한 번 더 속삭였다. 반복할수록 말은 입과 혀에 각인되는 것처럼 들러붙어 머릿속을 잠식해갔다. 입술 위로 몇 번씩 키스를 한 뒤에야 놈은 눈을 떴다.
그러나 목화의 눈에 대고 그가 한 번 더 속삭이자, '사랑해' 소리가 미처 다 떨어지기도 전에 녀석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다는 건, 입술을 한 번 더 누른 뒤에야 알았다. 목화는 음,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규칙적인 숨소리였다. 낙원은 웃고 말았다.
목화는 눈을 깜박였다. 얼굴에 비치고 있는 것은 아침 햇빛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이 방이 이렇게 밝았던가 하고 그는 놀랐다. 머리맡에서는 뭔가 보글보글 끓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다음으로는 따뜻하고 맛있는 냄새가 느껴졌다.
목화는 기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어젯밤에 벌여버린 일의 생소함이 무색하게도, 이상할 정도로 담담한 기분이었다.
“일어나.”
왼손으로 꽤나 끙끙대면서 아침을 준비했을 낙원이 그를 깨웠다. 목화는 잠시 낙원처럼 이불을 두른 채 좀 버텨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도무지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포기하고 일어났다.
다시 어젯밤을 떠올리게 하는 건 갈아 입혀진 티셔츠였다. 그대로 잠든 자신을 어떻게든 놈이 한 손으로 닦아주고 갈아입혀준 모양이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니 몸 안쪽이 둔탁하게 아려왔다. 싸움을 벌이고 난 다음 멍든 곳의 둔통과도 닮은 데가 있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달랐다.
문득 몸 안이 따뜻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약간 더운 듯 했다. 게다가 가슴팍에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은 더 심해져 있었다. 난방을 좀 세게 틀고 자서 몸에 이상이 온 모양이라고 목화는 생각했다.
식탁으로 향했다. 걷다 보니 허리까지 아파왔지만 합의에 의한 일이었으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놈이 온 얼굴로 웃는 것을 보니 한 마디 정도는 해줘야겠다 하던 생각도 사라졌다.
놈이 차린 밥상도 삶은 계란 뿐이었다. 너도 이거냐, 라고 생각하는 목화의 얼굴을 눈치라도 챈 듯 낙원이 빠르게 변명했다.
“아냐, 내 쪽은 시간을 정확히 맞춘 반숙이라고.”
목화는 그 말에 웃고 말았다. 놈은 여전히 뻔뻔했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었다. 분명 어깨가 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발소에 들어가 머리를 아주 약간 자른 다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면서도 분명 기분이 상쾌해져 나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피로가 많이 쌓여 있었던가, 하고 목화는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늦잠을 잤다 해도, 지난밤을 되짚어보면 피로가 풀릴 이유는 없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목화는 계란을 집어 들었다. 건조한 껍질 안에서 따뜻하고 매끄러운 온도가 전해져왔다. 게다가 계란은 뭐가 그렇게 놈이 주장한 것처럼 다른지는 몰라도, 분명 자신이 했던 것보다 조금은 나은 맛이 났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놈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다 나으면 진짜 썹업과 스크램블을 해주지.”
“계속 계란인가…”
“꼭 한식을 원한다면 국이나 찌개류도 해줄 수 있어. 어때?”
응? 그제서야 낙원의 말에서 뭔가를 느낀 목화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놈이 하는 말이 동거 제안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팔이 다 나아도 같이 아침밥을 먹자는 이야기인 것이다.
목화가 대답이 없는 동안, 낙원은 약간 안절부절못하는 듯싶더니 말 없이 계란을 까서 건네주었다. 목화는 계란을 두 개 더 먹었다. 식탁 위에는 하얀 껍질이 수북했다.
낙원이 약간 주저하는 듯싶더니 그에게 또 다시 말을 건네왔다.
“사실은 어제, 범인을 잡았어. 뭐 알고 보니 목표를 착각한 거였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찔린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아니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뭐야, 그랬나. 목화가 담담히 넘겼을 때였다. 낙원이 더 분명하게 말해왔다.
“그래도 같이 있자고. 내가 안전해도, 내가 팔이 나아져도, 그 뒤에도.”
놈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언제나의 비틀린 웃음이 사라진 그 얼굴에, 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났다. 갑자기, 그 자리에 앉아있기가 힘들 정도로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출근, 안 하냐?”
“어? 응.”
낙원이 곧 따라 일어났다.
밥상을 치우고 씻고 출근준비를 하는 중에도, 낙원의 시선을 몇 번 느꼈지만 목화는 돌아보지 않았다.
최소한 빠르게 대답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늦은 출근을 위해 탄 전철은 오늘따라 웬일인지 사람이 많았다.
덜컹, 덜컹 소리를 내며 기차처럼 달리는 전철의 창에서는 하얀 불빛이 몇 차례나 검은 동굴을 비추었다 사라졌다. 그리고는 언제나 다시 밝은 승강장이 돌아오는 것이다.
옆에 서 있는 놈에게서 시선이 여러 번 느껴졌지만 목화는 여전히 모르는 척 돌아보지 않았다. 긴 시간 동안 결정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도, 놈을 위해서도.
어쨌든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놈의 팔은 아직 다 낫지 않았다.
시간은 충분했다. 같이 살자는 이야긴 그때 가서 놈의 투정이 좀 적어지면 생각해볼 수도 있으리라. 최소한 이제 빈정거리는 느낌은 줄어들었다. 앞으로는 더 전망이 나을 것이다.
전철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 어둠 바깥으로 빠져 나왔다. 하얀 아침 햇빛이 창문을 통해 똑바로 쏟아졌다. 눈이 부신 듯, 꽉 찬 전철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돌려댔다. 목화가 눈을 가늘게 한 채 묵묵히 서 있을 때였다.
문득 누군가의 손이 그가 쥐고 있던 손잡이 위에 겹쳐졌다.
“……?”
목화는 손잡이에서 손을 내리지 않은 채 자신의 손을 잡은 사람을 찾으러 고개를 돌렸다. 놈과 자신 사이에는 사람이 두 명이나 껴 있었다.
목화는 잡힌 손을 팔을 굽혀서 얼굴 높이까지 들어보았다. 그 팔에 이어진 낙원은 아까의 진지한 얼굴이었다가, 목화의 시선이 닿자 활짝 웃었다.
놈이라는 것을 확인한 목화가, 사람들 너머로 서 있는 낙원의 얼굴을 본 후 입 꼬리를 조금 올렸다. 조금은 어이가 없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게다가 낙원은 오직 그 왼손만으로 몸의 균형을 지탱하고 있었다. 목화는 팔을 내렸지만, 손은 빼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
힐끗 돌아보자 낙원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져 있었다. 햇살을 정면으로 받는데도, 놈은 조금도 찌푸리지 않고 웃었다.
손잡이의 온도가 조금 올랐다.
같이 살자는 건 아직 결정할 수 없어도, 같이 있자는 거라면 목화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햇살 속에서 놈이 '뭐하냐, 돌아오지 않고'라고 이야기를 했던 그때부터.
낙원에게 보이지 않았지만, 목화의 입매에도 미소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그는 모든 것을 입 밖으로 내어 대답할 필요를 느껴본 적은 없었다. 어젯밤에 두 몸으로 나눈 이야기로 충분하다.
꽃집이 있는 4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내릴 때까지 목화는 놈의 손을 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손을 놓고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환승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해 줄을 선 뒤에선, 오늘 자체 휴가를 내기로 결심한 낙원이 그를 쫓아 뛰어오고 있었다.
“같이 가.”
놈이 다시 그의 손을 잡았을 때, 목화는 피식 실소하고 말았다. 자신이 놓더라도 낙원은 얼마든지 계속해서 따라올 터였다.
놈은 동생들이나 형님과는 또 달랐다. 처음에는 그가 익숙한 그 힘의 방식으로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매번 그를 놀라게 했다. 그에게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걸어온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고 아마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낙원의 감정을 전부 받아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잡힌 손을 빼지는 않겠다고 목화는 생각했다.
역사로 비쳐든 겨울햇살이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두 사람의 손을 하얗게 비췄다.
- 겨울,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