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15화 (14/34)
  • 3. 반지하의 동거

    축대도 떨어져나간 오래된 주택 사이로 나타난 연립주택 앞에서 김낙원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알려준 대로 이 연립주택을 찾아내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쭉 가라는 말은 맞았다. 하지만 '전철역에서 걸어서 10분' 전단지를 본 지 15분이 지나도록 목적지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놈이 교도소에서 나온 지도 꽤 되었는데도 아직도 그 몸을 유지하는 비결을 알 것 같았다. 매일 이 거리에서 그것도 언덕을 넘어 전철역을 왕복하기 때문이다.

    전철역에서 길을 물어 들어온 골목은 단층집들이 썰물 때의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길이었다. 골목을 지나자 오르막길이 나왔다. 길 가엔 군데군데 밟히고 뭉쳐서 더러워진 채 얼어붙은 눈의 흔적이 여실했다.

    차를 제대로 주차할 공간도 부족한 언덕을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자 드디어 목적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찾아낸 주소는 4층짜리 연립주택 한 동이었다. 갈라진 담벼락에 페인트질이 벗겨진 문패에는 연립주택이 항상 그러하듯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붙어었었다.

    <장미빌라>

    과연 정애가 골랐을 것 같은 이름이었다. 김낙원은 혀를 차면서 세탁물이 널린 시멘트마당을 헤치고 들어가 입구를 간신히 찾아냈다.

    메모지를 다시 열자 그때껏 발견하지 못했던-혹은 읽고 싶지 않았던-주소의 놀라운 점이 눈에 들어왔다.

    B 101호.

    “지하?”

    김낙원은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뇌까렸다.

    입구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낙원은 숨을 들이키고는, 각오를 하고 성큼성큼 들어섰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는 열쇠달린 자전거가 몇 개씩 쓰러져 있었다. 한쪽 팔이 부자유스러운 상황에서는 균형 잡기도 생각 외로 힘들었다. 김낙원은 장애물을 넘는 심정으로 자전거와 흩어진 우편물을 헤치고 계단에 무사히 발을 디뎠다.

    텅, 소리가 계단을 타고 복도를 울렸다.

    아래쪽에는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내려가는 게 맞을까. 정말 지하도 사람 사는 데가 맞나라는 의구심이 잠깐 들었지만 내려가 보지 않을 수도 없다. 왼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아래쪽을 비추자 한때는 페인트칠 된 철문이었을 것도 같은 것이 보였다.

    김낙원은 두 번째로 숨을 내쉬었다.

    황량한 계단을 내려가자 콘크리트 벽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갈라진 벽을 보면서 그는 미심쩍은 마음으로 한 발자국씩 내딛었다.

    그래도 다 내려오자 최소한 지하실은 아니었다. 살풍경하긴 하지만 치워져있는 것이, 사람 사는 데 같기는 했다. 놈 성격에 문 앞을 쓰레기로 어지럽혀둘 놈은 아니었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양쪽에 있는 철문 중에 찌그러진 알루미늄 문패로 101이라고 쓰여 있는 문에 다가가 열쇠를 꽂았다. 열쇠가 맞아 들어갈 때까지도 반신반의했던 김낙원은 세 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맞는 모양이었다.

    “……”

    자, 생각해봐.

    김낙원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도 놈이 먼저 '같이 가자'고 이야길 했다고. 놈은 화도 냈고, 보호도 하려고 했으며, 그 결과 낙원에게 무려 자기 방 열쇠까지 넘겨준 것이다. 이 얘긴 한시적이기는 해도 최소한 같이 살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동거제안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기분이 살아났다. 김낙원은 싱긋 웃었다. 놈의 태도 하나로 세상이 바뀌는 경험은 이미 해보았다. 일주일간 전화가 오지 않은 것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비교대상을 가상의 개로 잡았다가, 김원일 이상일 수도 있는 위치로 단숨에 격상되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거'라는 말이 가져오는 효과는 드라마틱했다. 스스로 감탄할 지경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불평할 수는 없지.”

    김낙원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지하라고 불평할 게 아니었다. 잘 생각해보면 놈이 스스로 열쇠를 넘겨줬다는 건 놈이 자신의 방으로 직접 초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직을 나와 놈이 처음으로 얻은 방이다. 김원일이나 동생들이 발을 들여놓았을 리는 없었다.

    겨우 팔을 찔린 것만으로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싼 대가지. 김낙원은 웃으면서 문을 열었다. 딸각, 문이 열렸다.

    반지하에도 햇빛이 드는군.

    첫 감상은 그러했다. 방 안은 보이지 않고 오후 4시의 기울어진 노란 햇빛만이 눈을 정면으로 찔러왔다.

    블라인드도 안 달았나 생각하던 김낙원은 곧 그 생각의 맹점을 깨달았다. 놈이 이 시간에 집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자 햇빛에 침잠된 시야로도 살풍경한 방안이 눈에 들어왔다. 몇 평 안 될 것 같은 작은 방에는 작은 냉장고에 개켜진 요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낙원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러나 정말 그것 뿐인 게 맞았다.

    남자 둘만 저기 널브러져 있으면 감방에 신임 죄수로 들어온 기분이겠는데.

    피식 웃고 구두를 벗고 방바닥 위로 올라섰던 그는 양말 속으로 파고드는 냉기에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이놈이 크리스마스라는 말에도 멀뚱히 쳐다볼 뿐일 정도로 사회화 안 된 이유를 알 법도 했다. 이토록 감방 같은 환경을 집이라고 매일 돌아가고 있으니 사회 전체를 감방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하나 이상할 게 없었다.

    이 날씨에도 보일러를 방에 들어와서 켠다는 것부터 그렇다. 가스 값 정도는 얼마든지 내주겠다. 그는 우선 보일러부터 켜고 방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바닥은 참으로 깨끗했다. 전자레인지 하나가 설치되어있는 간이부엌과 화장실도 참으로 깨끗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냉장고도 깨끗했다.

    문을 열자 시선은 헤맬 것도 없었다. 고작 김치에 밑반찬 하나와 냉동된 밥이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김낙원은 냉장고를 미련 없이 닫았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 신발을 신고 핸드폰을 켰다.

    이대로는 굶어죽을 터였다.

    “응, 서경위. 나다.”

    신호가 간지 정확히 10초 만에 서경위가 받았다.

    '퇴원하셨습니까', 소리가 전화 저편에서 들려왔다. 아직 서 내에 있는 모양이었다. 배경음으로 그 말을 듣자마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형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경정이 퇴원했대.' '어째서 벌써?!'

    “미안한데 내가 팔이 좀 불편해서 말이야.”

    이렇게 서두를 시작하자 그의 미안한데라는 말에 놀랐는지 서경위쪽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부터 내가 불러주는 주소로 내 차를 가지고 와줄 수 없겠나? 아, 차 안에 내가 부탁할 물건을 가득 채워서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곧 서경위의 강한 어조가 들려왔다. 약한 척은 확실히 쓸모가 있군. 김낙원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전화에 대고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다.

    “일단 거위털 이불과 접히는 매트리스부터, 그리고 대형 마트에 가연 식료품 코너에 설 기념으로 나온 한우세트가 있을 거야. 선물용 말고, 응, 그래, 차라리 제수용으로……”

    감방에 새로 들어온 신참은 본래 사식을 잔뜩 가져오는 법이지.

    한참을 주문한 김낙원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박목화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낯선 소리가 철문 밖으로 들리고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약간 뒤로 물러났다.

    처음에는 누굴 불렀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먼저 보내지 말 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열쇠를 내준 뒤였다.

    죽을 뻔 했는데도 위기감이 없군. 그는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습격을 당한 뒤에는 본래 숨어 지내는 법이다. 가장 상관이 없는 사람 집에 숨어, 두 달 정도 지나면 적들이 쑤시고 다니기 마련이므로 누구인지 자연히 알게 되기 마련이었다.

    방 열쇠를 준 것은 오로지 놈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누가 노리고 있는지 정체를 알지 못하는 동안에는 설사 부모상이 있더라도 나다니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형사라고 해도 꽤 조심을 할 텐데, 일반인이라면 죽을 뻔한 것만으로도 알아서 숨어있을 테고. 그런데 저 놈은 간이 큰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다.

    -……아까는 정말로 놀랐다.

    놈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락을 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재수가 없었다면 자신이 전화를 미룬 사이, 놈은 이미 죽어 장례까지 끝난 뒤였을 수도 있었다.

    조직에 있을 때에는 그런 경우도 종종 겪었다. 몇 년간 소식이 없으면 감방에 들어갔거나, 이미 재까지 뿌린 뒤곤 했다.

    그렇게 생각을 한 만으로도 갑자기 한기가 돌았다. 목화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한기는 그것만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 속에 뭔가 잔뜩 걸려 있는 기분이 다시 들어 목화는 꿀꺽 목울대를 넘겼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처음 놈이 팔을 다쳐서 들어왔을 때를 목화는 기억했다. 놈의 팔을 보고 벌떡 일어나던 그 순간 속에서 생겨난 한기였다. 쉽게 떨어질 리 없었다.

    어떻게 된 거냐, 우선은 놈에게 정황을 듣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그 와중에도 손에는 땀이 축축이 배어 있었다. 놈에게 주소를 적어주기 위해 볼펜을 쥐었을 때에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드나들던 놈이 갑자기 다시는 오지 않았을 때에는 조금 더 다른 생각을 했어야 하는 건데. 원일이 말도 일리가 있기는 했지만, 아예 연락을 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도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생각이 모자랐다. 박목화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놈의 한량 짓에 자신도 넘어갔던 모양이었다. 놈은 경찰이었다. 위험이 사고로나 생겨나는 일반인과는 달랐다. 놈은 충분히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너무 생각이 없어. 박목화는 얼굴을 찌푸렸다.

    문을 두드리자 놈은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기본은 있는 모양이다. 박목화가 입을 열었다.

    “나다.”

    그러자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터폰 눌러.”

    박목화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없었던 물건이 철문 옆에 생겨 있었다. 비디오인터폰이었다. 열쇠도 아래쪽에 새로 더 달려 있었다.

    이런 걸 준비할 정신은 있는 놈이 사람을 부르나. 그가 고개를 흔들면서 인터폰을 눌렀을 때였다. 곧 문이 열렸다.

    들어선 그는 잠시 놀라 가만히 서 있었다.

    “……”

    오른팔을 붕대로 감고 있는 김낙원이 싱글거리면서 쳐다보지만 않았다면 그는 눈을 씻고 본다는 고전적인 행동을 했을 지도 모른다.

    “이번 달 방값하고 유지비 내줄 테니까 보일러 좀 틀고 다녀. 넌 춥지도 않냐?”

    과연 방 안은 훈훈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조금 더 다른 본질적인 문제가 놈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박목화가 손을 들어 벽에 걸려있는 그것을 가리키자, 김낙원이 웃으면서 왼손에 쥔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었다.

    “벽걸이 TV도 연말 세일하던데. 어때, 좋지 않아? 보증금으로 받아둬. 여기 보증금 값보다 비쌀 테지만 말야.”

    아까의 낯선 소리는 이 TV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박목화가 해연히 놀란 얼굴로 놈을 내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놀란 얼굴을 하건 말건 김낙원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

    “오늘 보신각 타종은 여기서 보자고. 내일 설날이라 안 나가지? 할인마트에서 특자 붙은 고기류는 싹쓸이해왔지. 난 환자니 단백질을 먹어야지.”

    그 말에 따라 냉장고를 열어본 박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냉동고에는 얼려진 고기가 꽉꽉 들어차 있었고, 이름만 있었던 냉장고 신선실에는 야채와 과일이 종류별로 갖춰져 있었다.

    칸마다 차 있는 것은 양념과 반찬통이었고, 계란은 홈 파인 숫자대로 맞춰져서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계란 위에는 유기농 유정란의 스탬프까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하는 방법은 내가 다 가르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다 노력의 문제다. 왼손으로 할 수 없는 것만 시켜주지. 이 정도 아니고서야 남자 둘이 어떻게 먹고 살겠어?”

    잠시 놈을 방에 들여놓은 것이 후회되었다.

    박목화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방바닥에 주저앉았을 때였다. 김낙원이 왼손으로 뭔가를 건넸다. 이게 뭔가 하고 쳐다보자 한 번 더 내민다. 받아들자 하얀 털 담요였다. 부들거리는 털 뭉치 같은 것을 손으로 받아들고 내려다보자 놈이 한 마디 덧붙였다.

    “거위털이야. 겨울엔 쓸 만하지.”

    아침에 개켜두고 나갔던 이불과 요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새 이불과 요에 박목화는 두 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이런 걸 다 사러 나갔나?”

    위험을 모르는 거냐는 물음에 김낙원은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내 팔이 이런데 운전이나 할 수 있어? 전부 서경위를 시켰지. 여기 주소는 그 놈 혼자 알아.”

    나름 철저하기는 한데, 그 방식조차 너무나 놈다웠다. 박목화는 피식 웃었다.

    “……넌 정말로 다른 게 없군.”

    아무래도 저 놈은 간담이 큰 게 맞는 모양이다.

    보통 칼에 찔리고 나면 다들 위축되기 마련이었다.

    멋모르고 어깨에 힘주고 들어왔던 놈들이 한번 찔릴 위기를 겪고 나면, 덩치가 아까울 정도로 졸아들어 벌벌 떨다 새벽녘에 사라지는 일도 많았다.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피가 꿀럭꿀럭 흘러나오는 배를 부여잡고 숨어 밤을 견디는 날이면 아무리 이를 악 물어도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파, 죽어요, 엄마 같은 약한 소리를 하는 녀석들도 그는 여럿 보아왔다. 덩치가 아니라 악이 얼마나 버틸지를 결정짓는다는 이야긴 거기에서 나왔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놈은 거물이었다.

    명치를 찌르려 달려드는 칼을 팔로 막았다면 다시 팔을 쓰지 못하더라도 놀라울 게 없었다. 용케 병신은 되지 않았더라도 뼈가 비틀리고 살이 갈라지는 경험을 한 놈이, 어떻게 저토록 자기대로 있을 수 있을까.

    “그 소리 너한테 세 번째로 듣는데.”

    여전히 TV를 보던 낙원이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웃으면서 물었다.

    “좋은 거냐?”

    놈은 강했다.

    박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기의식이 좀 없기는 해도 놈답긴 했다.

    “그렇겠지. …너는.”

    넌 무섭지도 않았냐고 물으려던 박목화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최초로 칼에 찔렸던 때를 기억했다. 손가락 사이로 엉켜드는 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몸을 움직여 형님의 차를 타고 도망쳤던 때를.

    그때 형님이 뭐라고 했던가.

    무서운 건 잊으라고, 너는 산다고. 너는 내가 살린다고.

    그래서 그는 정말로 잊었다. 들리는 건 형님의 목소리 뿐이었다. 그는 오로지 그짓만을 생각했다. 더 이상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응, 무섭던데.”

    그때였다. 여전히 TV에 눈을 둔 김낙원이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양 중얼거렸다.

    “꽤 무섭더라고.”

    여상한 말투는 꼭 TV쇼프로에서 하고 있던 체험담을 보면서 하는 이야기 같았지만, 박목화는 놈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었다.

    “용케 살았더라, 너도.”

    역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낙원이 한 이야기에, 박목화는 문득 웃고 말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지난 살아왔던 시간에 칭찬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에게 칭찬받을 일 따윈 한 적이 없는데도.

    사람이 있기 때문인가. 방 안이 따뜻했다. 바닥에서 올라온 온기가 놈의 체온과 합쳐졌다. 목화는 처음으로 이 방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살았으면 좋은 거지.”

    놈이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나란히 앉아서 새해를 맞을 수 있으니.”

    TV에서는 드디어 타종 한 시간 전이라는 자막이 뜨고 있었다. 간담이 크다 못해 긍정적인 놈의 말을 박목화는 조금, 아주 조금 받아들였다.

    놈과 나란히 어깨를 하고 앉은 것이다.

    “……”

    TV에서는 쇼프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그는 놈과 나란히 어깨를 하고 앉아 TV를 보았다. 동생들과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김낙원은 철저하게 쇼프로만 돌려보면서 누가 나오면 뒷담을 깠다. 클럽에서 봤는데도 가까이 보면 피부가 더럽다던가, 저 놈은 사실은 키가 작아서 자신이 주문하는 곳에서 키높이 구두를 주문한다던가, 저 여자는 자기 친구가 하는 성형외과에서 코 수술을 하고 협찬해달라고 졸랐다던가 하는 것들이었다.

    무슨 경찰이 그렇게 시간이 많고 돈이 많아 TV를 보고 클럽을 다니는지, 박목화는 생전 처음 보는 연예인들의 뒷이야기를 정신없이 들으면서 침묵했다.

    그래도 남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건 좋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도, 정적은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

    참 잘 떠든다. 목화는 놈을 보면서 생각했다. 놈은 이런 점도 그와는 달랐다. 다르기로는 오늘 방에 들여놓고 알게 된 사는 방식만큼은 아니겠지만, 있으면 있을수록 다른 점만이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왜 이런 놈이 계속 왔을까. 박목화는 낮에 생각하다 멈추었던 부분으로 돌아갔다. 먼저 연락해야 한다는 부담을 덜자 오히려 생각이 빠르게 돌아간다.

    막내가 죽기 전에는 최소한 한 가지는 명확했다. 놈은 정보를 얻기 위해 왔다. 그렇다고 해도 왜 그때에도 먹을 것을 사다주면서까지 매 끼니를 챙겨주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놈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줄곧 입을 다물어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경찰은 총을 쏘는 것도 일이 복잡해진다고 들었다. 간부라서 다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위험부담을 안고서까지 자신을 구하러 왔는지도 궁금했다. 이 반 년 간 놈은 왜 그토록 매일같이 드나든 건가. 무엇이 놈을 바꾼 건가……

    박목화가 생각에 빠졌을 때였다. 한창 TV를 보던 놈이 문득 물었다.

    “저녁은 뭘 먹었냐?”

    박목화는 간단히 대꾸했다.

    “시켰지.”

    “설마 그 식당에서?!”

    놈이 소리를 지르더니, 역시 내가 안 사다주니까 못 먹을 걸 먹는다'고 투덜거렸다. 역시 자신을 찌른 새끼에게는 가중처벌을 해야 한다고도 중얼거렸다.

    박목화는 가만히 있다 드디어 입 밖에 의문을 내었다.

    “왜 너는 계속 나한테 밥을 사다줬지?”

    그러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

    왜냐니. 왜냐면, 그러니까 그건-

    낙원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잠시 적막하게 TV소리만이 방 안에 들렸다. 한참을 그가 답이 없자 놈이 그를 돌아보았다. 신기해하는 얼굴이었다. 평소의 무표정과는 달랐다.

    “네가 그렇게 말이 없는 건 처음 보는군,”

    김낙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건 박목화에게 그런 질문을 받은 게 처음이기 때문일 터였다.

    그는 박목화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놈은 별다른 자각 없이 물어본 듯 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TV를 본다.

    다행이라고, 낙원은 생각했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야 간단했다. 그러고 싶으니까, 다. 왜 그러고 싶냐면, 놈이 좋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낙원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아무 감정도 없는 상대에게, 뭐하러 시간도 돈과 정성을 바쳐가며 밥을 사들고 반 년 넘게 꽃집을 드나들며 챙기겠나.

    그랬다. 너무나 간단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그 날, 머리에 총을 맞은 건 조희용만은 아니었다.

    놈이 잃을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앞으로 걷지 못할 길 뒤로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보았다.

    걸어와서는 안 되는 길이었다. 그는 나중에야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던 길은 피와 욕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자신이 내리친 놈의 손에서 흘러내린 피와, 놈의 귀를 깨물고 여린 목덜미를 거리낌 없이 탐했던 욕망이.

    그는 놈의 체온을 알았다. 빳빳하게 다린 셔츠를 젖히고 내부로 파고들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도 알고 있었다. 명백한 욕구로 놈의 옷을 벗기면서도 주먹 한번 쥐지 못하도록 했던 건 놈의 인생에 오로지 그밖에 없었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놈은 꼿꼿했고, 서툴렀으며, 너무나 서툴러서, 욕망과 폭력의 경계도 알지 못했다.

    그런 놈의 등을 잡아 누르고 핀셋을 하나씩 꽂아 나간 것은 자신이었다. 보호관찰에 힘입어 제도권의 옷을 입고, 정애가 해준 꽃집을 무기 삼아 양손을 결박하고 마음껏 놈이 바르작거리는 것을 맛보면서 즐거워한 것은 자신이었다.

    놈은 아직도 그걸 폭력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탐했던 그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 뿐이었다.

    평생 그는 그렇게 해왔다.

    하고 싶은 대로, 뒤돌아보는 법 없이.

    그러다 놈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자신이 했던 모든 것이 되돌아왔던 것이다.

    “……”

    김낙원은 잠시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었다. 웃음이 나와서였다.

    왜 오른팔을 내리쳤을까, 니중에야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던 일이 생각났다. 자신이 속죄를 하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스스로의 순진한 발상에 그저 웃음만이 나왔다.

    귀엽기도 하지, 그런 걸로 일이 끝날 리가 있나. 세상에 그렇게 쉽게 '없었던 일이 되는' 방법이 있다면 그는 애진즉에 신이 되었을 것이다. 놈을 종교로 귀의시켜, 자, 나를 용서해라. 하느님이 그러란다 하고.

    결국 그것도 나 좋을 대로 했던 짓이지.

    목에 고정키로 걸려있는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최동훈의 '인과응보' 소리에 할 말을 찾지 못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혹여 삶이 자신에게 대가를 치르게 한다면 꽤 적절한 대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그것도 놈이 직접 찔러 팔 병신이 되었을 때에나 가능한 대가겠지. 그렇지만 놈이 직접 찌를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자신이 했던 짓이 더러운 건 용서를 빌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용서 하나 받자고 다 잊은 놈의 머릿속을 쑤셔, 그 일을 떠올려, 폭력이 아니라 더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거라고 알게 하는 것만큼 웃기는 짓이 어디 있을까.

    ……아마도 놈에게 가진 게 감정이 아니라 욕망이었다면 차라리 놈을 꼬셨을 터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축소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한 번 더 놈과 자는 것이다. 강압을 줄이고, 놈을 느끼게 해서.

    남자 사이에 섹스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두 번 세 번 만지고 자고 나면 놈이 스스로 육체의 공포를 담금질로 극복했듯이 곧 아무것도 아닌 걸로 느끼고 말 터였다. 놈은 고통을 견디고 일상이 되는 것에 익숙하니 남들보다 더 이런 방법이 잘 먹혀들었을 것이다.

    데이트 강간을 하는 놈들이 흔히 하는 짓거리였다. 처음에는 좀 강압적인 구석이 있었더라도 두 번만 자면 상대는 어딜 가서 호소할 데도 없기 마련이다.

    흉기만 들지 않았다면 법적으로도 강간으로 걸릴 일은 절대로 없다. 그렇게 한 달 사귀고 헤어지면 남녀 간의 일이 될 뿐이었다. 박목화의 보호관찰 기간이 풀린 것은 고작 한 달 전이었다. 그런 식으로 말만으로 구슬려서 몇 번 더 자는 건 그에겐 일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대가 놈이 되면 불가능했다.

    후회라는 게 이런 거라는 것을 그는 매일매일 뼈저리게 느꼈다. 반년을 드나들면서 손 한번 내밀지 못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고작 놈에게 밥을 챙겨주는 정도였다. 놈에게 일상이 되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정도가 놈을 건드리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 그의 한계선이었다.

    이런 이야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설사 정애가 보낸 꽃 더미보다 못할지라도 비참할지언정 말로는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게 그의 처지였다. 시간이 지나, 어떻게든 놈의 일상이 되고나면 조금씩 손을 뻗어볼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박목화가 문득 그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른 생각에 빠졌던 그는 갑자기 시야에 박목화가 꽉 차자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놈을 쳐다보았다. 놈이 손을 뻗었다.

    “……!”

    놈이 뻗은 손이, 물러난 그의 이마에 닿았다.

    “열 나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아프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놈의 손바닥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김낙원은 이때야말로 아픈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놈의 손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가 다시 낙원에게로 돌아왔다. 조금 더 오래 머무른 손의 체온에 낙원이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진통제 줘?”

    아니, 괜찮아. 여기에 있어. 속으로 말했지만 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말이 없자 틀림없이 그가 아프다고 생각했는지 박목화가 일어났다.

    “냉장고 위에 있는 거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놈이 몸을 돌린 뒤에야 찬찬히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느꼈던 놈의 체온이었다.

    곧 목화가 다가와 냉장고 위에 놓은 약을 가져다주었다. 약을 삼킬 무렵엔 물어본 것을 잊은 듯 박목화가 옆에 앉아서 다시 TV를 보기 시작했지만, 그 뒤에도 어쩐지 신경이 쓰인 김낙원은 입을 열지 못했다.

    “…새해가 오고 있습니다. 모두 다 함께 숫자를 세겠습니다.”

    TV에서는 드디어 타종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보신각을 비춰주는 화면과 함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송년을 알렸다.

    “십, 구.”

    이제 곧 새해였다.

    “…칠, 육.”

    새해에는 미친 소가 잡히기를. 낙원은 속으로 잠깐 소원을 빌었다. ……그래서 놈이 자신의 앞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삼, 이, ……일!”

    종소리가 화면을 통해 울리기 시작했다. 새해가 왔다고 소리치는 아나운서의 빠른 말소리와 폭죽소리가 요란하게 섞여 들렸다. 그리고 낙원은 잠시라도 타종에 정신을 빼앗겼을 놈에게 인사했다.

    “해피 뉴 이어.”

    그러자 박목화가 피식 웃더니 같은 말을 돌려주었다.

    “새해에는 찔리지 마라.”

    그제야 낙원은 평소처럼 싱긋 웃었다. 세상에서 그를 찌를 유일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 그에게 그렇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찔리고 다닐 리가 있나.”

    그의 말에 놈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TV를 끄고 자리를 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였다.

    한쪽에 접혀있었던 게 요가 아니라 그가 주문한 접히는 매트리스라는 걸 박목화는 그제야 안 모양이었다. 펴다가 놀라서 쳐다보는 놈에게 낙원이 설명했다.

    “침대는 여기에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급하게 부탁했지. 아, 이제 여기 인터넷도 된다.”

    “……?”

    의아한 얼굴을 한 박목화 앞에서 그는 옆에 세워둔 무선 키보드를 꺼내, 리모컨을 눌러 TV를 모니터 화면으로 바꾸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너도 좀 써. 인터넷만 있으면 요즘은 감방도 PC방이지.”

    모뎀 연결이 빨리 안 된다던 업체 사람을 당장 불러 단숨에 설치를 하게 만든 건 그의 경찰이라는 신분 덕이었다. 어떠냐, 하고 자랑스레 보여준 김낙원 앞에서 놈은 감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 방이 무슨,”

    내 방이 무슨 감방이냐는 소리일 것이다. 중얼거리는 것을 듣자마자 김낙원이 왼손으로 어이, 하고 벽을 가리켰다.

    “이걸 보라고.”

    여기에 와서 가장 놀랐던 벽면을 가리켰다. 새로 도배를 하려다가 시간이 없어서 못한 게 증거가 될 줄은 몰랐지만, 이것만큼 그를 놀래킨 것도 없었다. 찢어진 벽지 사이로 콘크리트 벽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할 말이 없어진 박목화 앞에서 그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했다.

    “낮에 들어와 보니 완전히 죄수 사는 방이던데.”

    '이렇게 나와 살면서도 네가 사회물이 들지 않는 이유를 알겠더군' , 이라고도 그는 덧붙였다.

    “그러니까 난 단지 사람 사는 방으로 만드는 것 뿐이라니까.”

    그러자 놈이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들이려고.”

    대체 얼마나 산다고 이런 돈을 들이는 건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단 며칠을 살아도 이 돈을 들이는데 주저했을 김낙원은 아니지만, 그에게 더욱 중요했던 건 그가 얼마나 이 방에 사느냐가 아니었다. 이 방에 살 박목화였다.

    사실 이런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여기로 내려올 때까진 어떻게 내가 여기에 사느냐고 생각했어도, 냉장고를 막상 열었을 땐 이 방에 살고 있는 놈이 더 걱정되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만일 자신의 아파트로 갔다면 놈은 다시 이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정애가 마련해준 방을 아무 이유 없이 벗어날 놈이 아니었다. 이 방에 손을 댈 기회는 한시적으로 동거를 하게 된 지금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놈의 공간에 끼어들어 살아볼 기회가 또 올지는 알 수 없었다.

    같이 새해를 맞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범인에게 사식을 넣어 줄 마음이 생겼다면, 놈의 방에 들어올 기회를 제공해줬다는 점에선 나중에 잡아넣고 나면 감옥으로 감사인사를 하러 갈 마음까지 생겼다.

    특히 목화가 이 말을 했을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누워라. 이불이나 덮어주게.”

    사식을 세 번은 넣어주자. 김낙원은 그 순간 속으로 결심했다. 그가 자리에 눕자 목화가 오른팔이 스치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불을 껐다.

    방 안에 어둠이 찾아왔다.

    위에 달린 창문으로 어두운 방 안에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비쳐들어왔다.

    저 불빛 색깔하며 창문 위치가 딱 감방을 떠올리게 한다고, 연수 때 잠깐 교도소를 가보았던 김낙원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놈이 아직까지도 사회화가 안 되는 건 다 이런 곳에 살아서였다. 내일은 블라인드도 달아야겠군, 그는 생각했다.

    그래도 주황색 불빛이 새어 들어와 비치는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놈이다.

    요를 버린 바람에 옆에 누운 박목화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비쳤다. 놈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바로 누워 베개를 베고 누운 모습이 어찌나 딱딱해 보이는 지, 자신과 똑같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 같은 이불을 덮고 같은 베개를 베고 있다고는 도무지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놈은 벌써 잠들기 시작했는지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렇게 굳은 자세로 잘도 잔다. 김낙원은 신기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켜 놈을 쳐다보았다.

    반듯하게 누운 녀석의 얼굴은 잠든 뒤에도 굳건했다. 곧은 이마와 꽉 다문 입술의 언저리를 김낙원의 시선이 몇 번 맴돌았다. 턱과 목에서 내려가는 약간의 굴곡에 고르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이불의 움직임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귀를 기울이면 숨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손 한번 뻗으면 닿을 거리에, 놈이 누워 있었다.

    “……”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간 것은 놈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 뒤에야 깨달았다. 자신의 손등 위로 주황색 불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자신의 손인 줄 몰랐다가, 잠시 후에 깨닫자마자 퍼뜩 놀라 손을 거둬들였다.

    “……!”

    뭐하는 짓이냐.

    손을 치우고 드러난 놈의 얼굴을 보자 다행히 눈치를 채지 못한 듯 놈은 여전히 꽉 다문 얼굴로 자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자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놈의 숨에 따라 김낙원은 잠시 가빠졌던 숨을 되돌렸다.

    그리고 자리에 쓰러지듯 도로 누웠다.

    하마터면 반년의 인내를 한 번에 물거품으로 만들 뻔 했다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렇게 참으려고 했건만 너무 까까이 있는 놈의 얼굴을 보자 정신이 나갔던 것이다.

    정신 차리자. 만일 오른손만 된다면 양 뺨을 몇 번 두드리고 싶은 심정으로 김낙원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착각하지 마라. 이건 제대로 된 동거가 아니었다.

    놈이 지금 방 열쇠를 내주고 들어오게 한 건 그가 목숨을 건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지, 진짜 동거를 원해서는 아닌 것이다.

    당초 생각했던 대로 책임감이니 죄책감이니 하는 것으로 꼬여낸 것도 아니었다. 놈은 오로지 죽을 뻔한 위기를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겪은 유경험자로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장소를 빌려준 것 뿐이었다.

    요구르트 아줌마나 역사 여직원보다야 낫다는 걸 알게 돼서 기쁘긴 하지만, 잊으면 안 된다.

    김낙원은 누운 채로 어떻게든 크리스마스이브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정애가 보낸 꽃 따위에 밀린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과연 이쪽은 좀 효과가 있었다. 비참하지만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몇 번 숨을 길게 내쉰 김낙원이 어떻게든 놈에 대한 생각을 내쫓으려고 애썼다. 조금이라도 눈치를 채는 순간 아무 생각도 없던 놈은 단숨에 경계심을 품을 테고, 그러면 바로 여기에선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다시 놈의 테두리에 들어가기 위해선 훨씬 더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할 터였다.

    쫓겨나가지 않으려면 놈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내쫓아야 했다.

    -이런 바보 같을 데가 있나.

    김낙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기껏 동거를 하러 들어와서는 놈이 옆에 있다는 것을 잊어야 하다니.

    그러나 놈이 옆에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잘 잊혀지지 않았다. 몇 번 몸을 틀어도 놈의 숨소리는 그의 귀를 쫓아왔다. 매트리스를 산 것부터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퀸 사이즈라지만 매트리스가 아니라 요를 두 개 깔았다면 저렇게 잘 들리지는 않을 텐데.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었다. 평소라면 피식 웃기라도 했을 테지만 김낙원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놈이 너무 잘 덮어준 이불은 왼손만으로 잘 끌어올려지지도 않았다. 고르게 자는 놈의 숨소리가 계속 귓전을 맴맴 돌았다.

    ……자고 있다면 조금은 손을 내밀어 봐도 모르지 않을까.

    잠시 그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았을 때였다.

    누워서 몸을 돌리자 똑바로 자는 놈의 옆얼굴이 검게 비쳤다. 먹지로 그린 수묵화 같은 얼굴선을 보면서 주춤주춤 몰래 손을 올리다가, 무슨 소리가 들리자마자 퍼뜩 놀라 다시 손을 내렸다.

    “……!”

    귀를 기울여보자 바깥에서 난 자동차 소리였다. 이 작은 연립주택에도 차를 몰고 다니는 인간이 있는지, 낮에 봤던 시멘트마당에 주차를 하는 모양이었다.

    반지하라 그런지 창가로 들이대는 차 소리가 무슨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김낙원은 짜증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때였다. 차 소리에는 꿈쩍도 안하던 박목화가 약간 고개를 돌렸다.

    사람 소리에는 예민한 것이다.

    김낙원은 헛생각을 포기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고개를 돌리고 다시 놈의 존재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까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 않았다.

    이미 심란해진 뒤에는 다른 것만 맴맴 돌았다.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라는 게 이토록 사람을 피 말릴 수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김낙원은 잠시 동거하기로 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

    평생 뭔가를 참아본 적이 없었던 그가 기약도 없고 형태도 없는 무언가를 위해서 견디는 것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또다시 이브의 꽃 더미를 떠올려보았지만 두 번째는 효과가 없었다. 똑바로 누워도 돌려 누워도 놈의 숨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미칠 지경이었다.

    꽤 쌓여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즉물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손만 다치지 않았다면 찬물로 샤워라도 하러 갔을지 모른다. 허벅지를 찌르면서 밤을 샜다는 소리를, 반대의 의미지만 김낙원은 완전하게 이해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동거가 아니라 고문이라고, 속으로 혀도 차고 스스로를 비웃어도 보았지만 그런다고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다 병 나겠군. 불편한 팔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돌려 누운 채 김낙원은 눈을 감고 어떻게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은 이미 손댈 수 없는 놈의 등 뒤로 도망쳐버린 뒤였다.

    차 엔진소리가 멎자 차가 창을 막았는지 주황색 불빛이 더 희미해졌다. 방안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혼자 몇 번을 눈을 감았다 뜨면서 놈의 기척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던 김낙원이, 간신히 잠을 이룰 수 있었던 건 새벽에 놈이 일어난 뒤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1월 2일, 여기저기 인사하면서 수사부로 들어오던 서경위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뒤로 물러날 뻔 했다.

    “……경정님, 아직 퇴원이 일렀던 건……”

    저 경정 얼굴이 저렇게 초췌한 것은 처음 보았다. 오른팔이 목에 걸린 고정기로 고정되어있는 거야 이미 이틀 전에 보았지만 이만큼 안색이 나쁘지는 않았었다. 무려 경정의 눈 밑이 검었다.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이라 다크써클이 있다고 해도 크게 흉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싱글싱글 웃던 이미지가 있는 만큼, 저 경정의 초췌한 모습이란 것은 충격이었다.

    수사부 내가 왜 그리 조용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이었구나 싶은 게 더 무서운 것이다.

    “진통제 안 받아오셨습니까?”

    혹시 진통제가 모자라서 밤을 샜나 싶어 서경위가 그렇게 물었다. 너무 아프면 잠들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경정님……?”

    두 번 세 번 불렀을 때에야 경정이 고개를 들었다.

    “왜.”

    전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말투에 빈정거리는 기색조차 사라져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딘가 사나워진 것이, 빈정거리지 않는 것이 편안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여유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저, 다시 병원으로 가보시는 건…”

    무려 서경위가 먼저 조퇴를 권했다. 그러나 경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것이었다.

    “아니 됐어.”

    저렇게까지 아프면 아예 나오지 않을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자기를 찌른 범인을 잡고 싶은가. 별 생각이 다 들 때였다. 서경위가 쳐다보는 동안 경정이 서랍을 열더니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찌나 자연스러운 동작인지 하마터면 라이터를 꺼내줄 뻔 했다. 그러나 서경위는 곧 정신을 차리고 경정을 붙들었다.

    “경정님, 당분간은 금연을 하셔야……”

    말리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경정인 만큼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서경위가, 다음 순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 그렇지.”

    하고 저 경정이 입에 물기까지 했던 담배를 얌전히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이다!

    서경위는 잠시 얼어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뒤에서 사람들이 '역시 금연 금단증상이 무섭지'라고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서경위만큼은 뭔가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저 경정은 금연 때문에 괴로워질 거라면 차라리 피우는 것을 선택할 인간이었다. 그리고 건강 문제로 금연을 선택했다면, 사람들 앞에서 금연초라도 피울 인간이기도 했다. 그에 덤으로, 담배를 여전히 피우는 사람들을 골라 찾아다니면서 빈정거리며 약을 올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것이다.

    어쨌든 최소한 저렇게 물었던 담배를 자기 손으로 순순히 쓰레기통에 버릴 리가 없었다.

    “경정님.”

    대체 무슨 문제인가 싶어서 서경위가 놀란 마음에 경정을 다시 불렀을 때였다. 경정이 느리게 그를 쳐다보았다. 항상 빙글거리던 웃음이 사라지자 눈 밑의 다크써클이 두드러져 보였다.

    언제나 자신을 잘 챙기다 못해 남들 야근하는 중에도 혼자 생생한 얼굴로 다니곤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입술도 까칠하게 일어난 것이, 병원에 있을 때보다도 더 오히려 한참 앓다 일어난 사람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 피로한 그늘이 지자 인상이 더 깊어졌다. 살짝 두드러진 음영이 타인의 눈을 더 강렬하게 끌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서경위는 잠시 생각했다.

    “아, 단순한 수면부족이야. 신경 쓰지 말고 보고나 해봐.”

    무척 신경이 쓰입니다. 서경위는 그렇게 말하려다 어쩔 수 없이 보고부터 들어갔다.

    “500m 앞 보도에 나와 있던 CCTV까지 수거해서 본 결과 범인으로 보이는 자가 쓰레기통에 투척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수색해보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점퍼가 나와서 지문채취 중입니다.”

    “그건 좀 고무적이군.”

    김낙원의 눈에 비로소 조금 생기가 돌아왔다.

    “놈은 흉기를 다룰 때 처음부터 장갑을 끼고 있었으니 어차피 흉기 쪽에선 지문채취는 힘들었을 거야. 하나만 생각한 놈이군.”

    서경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겉옷 쪽은 일단 도주할 때 갈아입은 것 같습니다만, 최근에는 옷에서도 채취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5일내로 국과수 쪽에서 결과가 나온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경정이 조금씩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듯 했다. 서경위가 보고를 계속했다.

    “그리고 경정님이 담당하셨던 사건을 쭉 조사해보았습니다만, 보복을 가할 정도의 조직은 현제로서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거나 통폐합된 케이스는 여럿 있습니다만 경정님이 직접 현장에 계셨던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현재로서는 동양 건을 제외하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김낙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 역시 현장에 어슬렁거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게 열성적으로 쫓아다닐 거였다면 최동훈처럼 검사로 남았을 것이다. 서류와 사건 양쪽에 치여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자리로.

    “최초목격자인 카페의 주인과 의사를 만나 보시겠습니까? 일단 진술은 확보해두었습니다만.”

    “아, 그건 됐어.”

    낙원은 손을 내저었다.

    “은인을 귀찮게 할 필요는 없지. 내가 나중에 따로 가서 만나는 게 낫겠어.”

    결국 카페에 가겠다는 소리였지만 어쩐 일인지 서경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시던가요' 같은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제법 머리가 커서 한 마디씩 지지 않고 말을 하던 부하가 순순한 게 희한해서, 김낙원은 한 번 더 말해보았다.

    “지금 갈까?”

    그토록 싫어하던 조퇴에 외근을 하겠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새해 첫 근무신데 너무하십니다, 류의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김낙원은 서경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 같이 가시죠.”

    이틀간의 수면부족이 누구의 눈에도 심각해보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낙원은 서경위를 쳐다보다가, 이 날 처음으로 싱긋 웃었다.

    “날 닮아간다 했더니, 이런 것도 닮을 셈인가?”

    “……아닙니다.”

    서경위가 매우 불쾌한 얼굴로 부정했지만 김낙원은 이미 웃음을 터뜨린 뒤였다.

    그리고 김낙원은 서경위 차를 타고 수사부를 벗어났다.

    박목화는 꽃집의 문을 열었다. 조금 차지만 시원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불었다. 겉옷을 두껍게 입지 않아도 춥지 않은 날씨는 오랜 만이었다. 햇살도 내리쬐고 겨울치고는 따뜻한 날이다.

    그는 오랜만에 차양을 내리고 화분을 바깥으로 내놓은 뒤 물을 뜨러 다녀왔다. 주변은 평소와 같았다.

    날씨가 따듯해도 겨울은 겨울이라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역사 앞은 한산했다.

    이곳은 지대가 약간 높은 편이라 시야에 막히는 게 없었다. 공영주차장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주차되어있는 차 한 대는 잠복을 하고 있는 형사들일 것이다. 먼지 쌓인 뚜껑만 봐도 감이 왔다.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보여,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아주머니가 밀고 오던 요구르트 카트를 같이 밀어 올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제는 인사를 하는 데에는 거리끼지 않게 되었다. 아주머니도 그를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아유, 꽃집총각, 새해 복 많이 받아.”

    그리고 꽃집 앞을 쳐다본 아주머니가 한 마디 덧붙였다.

    “오늘은 오랜만에 물건을 내놓네.”

    “날이 따뜻해서요. 그러고 보니 요즘 주변에 혹시 서성거리는 사람 없던가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응? 아니 본 적이 없는데. 왜?”

    차에서 보이는 시야는 전방 뿐이지만 아주머니는 역사 전체를 돌아다닌다. 아주머니는 기억을 더듬어보는 눈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노숙자 때문에? 아유, 말도 말어. 여긴 노숙자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서울역은 아주……”

    알아서 해답을 스스로 내놓은 아주머니가 다른 역에서 일하는 요구르트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는 카트를 전철역까지 끌어올렸다.

    “그래서 그 친구는 어떻게 됐어? 이제 백수 벗어난 거야?”

    못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아, 연락이 왔습니다.”

    목화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요구르트 아주머니는 잘됐다면서 몇 마디 더 늘어놓았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범인이 역사 주변에 온 적이 없다면 놈이 자신의 방에서 머무르는 것이 가장 안전할 터였다. 그렇다면 아직 안전할 때 범인을 잡아야한다.

    가게로 들어간 목화는 전화기를 들었다.

    “원일아.”

    전화기 저편에서 이제 잠이 깬 녀석이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아들었다. '형님.' 소리가 곧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최소한 자신의 주변에 범인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인해야 했다. 목화는 입을 열었다.

    “요즘……”

    놈을 지키겠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동기로, 박목화가 오랜만에 움직였다.

    오랜만에 마신 커피는 더 값졌다. 잠시 담배에 대한 욕구를 잊은 김낙원은 만족스럽게 카페를 나왔다.

    주인이 정성껏 내린 커피는 향부터가 달랐다. 주인이 특별히 내어준 에르메스 컵을 손에 들자 고소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아주 진한 씁쓸함이 입안에 퍼지고, 깨끗하게 넘어갔다. 커피만으로도 온 보람이 있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소리를 질러준 게 고마울 뿐이지. 정신없는 순간에 그 어두운 곳에서 대체 뭘 봤겠나.

    형식적인 질문 몇 한 뒤에는 옆에서 서경위가 쳐다보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아, 이게 마시고 싶었습니다.'라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역시 커피 쪽이 본론이었다.

    단지 '경찰이셨군요'하고 무척 놀라는 눈치길래, '아, 의사셨더군요.'하고 맞대응을 해줬을 뿐이다. 어쩌다 카페를 하게 되었냐고 처음으로 개인적인 질문을 하자 '현대 의료계의 병폐에 질려서'라는 무척 유머러스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말고 이대로 카페 손님과 주인관계로 있자는 소리구나, 하고 생각할 때였다. '어떻게 그렇게 자주 오셨습니까'라는 주인의 방어용 질문에, 서경위가 대신 대답했다.

    '경정님께서는 상당히 자주 혼자 한가하십니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같이 오자고 했군. 김낙원은 서경위를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커피를 다 마신 뒤에 나오자 서경위가 물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꽃집.”

    한 치도 망설이지 않은 대꾸에 서경위가 웃었다.

    “이제 좀 정상으로 보이십니다.”

    '아, 저는 서로 돌아갑니다.'라고 서경위가 덧붙였다. 쪼잔한 면으로 치면 최검이랑도 닮았다. 경대 출신의 세상물정 모르던 놈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니면 내 탓인가.

    아니 내 덕이겠지, 하고 낙원은 수정했다.

    “오랫동안 드나드시는군요.”

    운전해가면서 서경위가 이야기했다. 그리고 가볍게 덧붙였다.

    “누가 보면 연애하는 줄 알겠습니다.”

    하하, 그 말에 김낙원이 웃었다.

    “박광우가 그쪽에 나타날 가능성이 있어서 계속 들르시는 거죠? 경정님도 가만히 보면 형사의 자질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 외로 한번 놓친 건 끝까지 쫓는 면이라던가.”

    꽤 머리가 큰 줄 알았더니, 아직은 멀었군.

    자신에게 그런 면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현재 박광우에 대한 모든 억하심정은 다, 전부, 박목화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굳이 말한다면 연적을 미리 치우고 싶은 마음에 가까웠다.

    그래도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좋았다.

    그는 웃으면서 내버려두었다. 서경위는 혼자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쪽도 조희용에게 당한 게 있으니 꽤 원한이 있을 텐데, 김갑선 쪽 잔당이 있기는 합니까? 여전히 동생들이 따른다면서요. 그러면 내버려두지 않았을 텐데.”

    “잘 아네.”

    김낙원이 칭찬해주었다. 현재로선 80점.

    “김갑선이 미친 소처럼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무리를 가진 것도 아니고, 지금 잔당들은 다 흡수되거나 수감됐지.”

    “동양 일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나오는군요.”

    서경위가 중얼거렸다.

    “이번 일은 일반용의자는 득실거리고, 1순위는 어디 갔는지 모르고, 참 알 수가 없네요……”

    일반용의자가 득실거린다는 건 부러 하는 소리겠지만, 뒷말은 맞았다.

    병원에 있으면서도 계속 찜찜했던 부분이었다. 용의자순위를 낮추면 지나치게 바글거리고, 정말 그 정도 원한을 가진 놈으로 축소하면 아무도 없다.

    사실은 김갑선조차 제 1 용의자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죽은 조희용이 되살아나면 모를까, 이미 그 자리를 떴던 김갑선이 뭐하러 그에게 이를 간단 말인가? 동양 일에 관여한 형사들도 다 알까 말까인데.

    그 뒤로는 그가 직접적으로 잡는데 관여했던 박광우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건 아무래도 박광우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자기 손을 더럽힐 놈도 아니고, 시켰다면 김원일 아래의 동생들이다.

    죽으려면 진작 죽었겠다.

    김낙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거처는 옮기신 거죠?”

    서경위가 운전하면서 물었다.

    “그래, 한 번 실패했으면 또 올 가능성이 많으니까.”

    그러자 서경위가 작년 마지막 날에 왔던 곳을 잊을 수가 없는지 혀를 내둘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시킨 목록을 사는 데만 해도 3시간이 걸렸는데, 헤매는 바람에 무려 2시간 여를 더 차도 잘 빠지지 않는 골목에서 헤매다 간신히 찾아왔던 것이다.

    “대체 어디에서 그런 곳을 구하셨습니까. 부동산 사이트에서라도 찾으셨나보죠?”

    텅 비었던 방을 본 탓인지 사람이 살고 있는 방으로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새로 구한 곳으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김낙원은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뭐, 누가 내가 그런 곳에 있다고 상상이나 하겠나?”

    '그건 그렇죠.'

    서경위가 운전하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일 재습격 가능성이 있다면, 확실히 지금처럼 다친 상태로는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박목화의 판단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옳은 것이었다. 누구도 찾아올 수 없고 예측할 수조차 없다는 점에서는 완벽한지도 몰랐다.

    “일단 새로 옮기신 곳은 계속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우선은 불편하시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쪽으로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간병인을 통해서 새어나갈지도 모르니까요. 퇴근하실 땐 제 차를 이용하시고요. 꽃집에서 갈 땐 괜찮으시겠습니까?”

    꽃집을 가면 그런 칼 든 놈 하나쯤은 한 손으로도 요리할 수 있는 전직 행동대장이 버티고 있었다. 아수라장을 몇 십 번은 헤쳐온, 중세시대로 치면 십자군전쟁을 3차까지는 겪었을 백전의 꽃집 총각이지.

    차라리 거기에 나타나면 일이 쉬워질 것이다. 김낙원은 싱긋 웃었다.

    그러나 적대시하는 관계라고 생각하는 서경위를 혼란에 빠뜨릴 이유는 없었으므로, 그는 가볍게 말을 얼버무렸다.

    “뭐 거긴 잠복 팀이 있어서 범인이 오랫동안 서성거리기는 어려워. 차라리 거기에서 시간을 보내다 놈과 함께 전철을 타는 편이 안전하겠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서경위는 어쨌거나 그가 뭔가 생각하는 게 있어서 그런다고 여겼는지, 더 이상 파고들지는 않았다.

    “운전하실 수 없으니 불편하실 텐데요. 내일 모시러 갈까요?”

    “아냐 됐어.”

    김낙원은 손을 내저었다. 나오다가 서경위가 박목화와 마주쳐도 곤란했다.

    “자네의 차를 이용하는 건 꽃집까지로 제한하지.”

    “예.”

    꽃집이 보였다. 차가 섰다. 낙원이 꽃집 앞에 내리자 서경위가 안쪽에서 인사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경정님.”

    낙원은 웃으면서 놈을 보냈다. 그리고 꽃집 안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응, 그래. 알았다.”

    낙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는 놈이 막 전화기를 내려놓던 중이었다. 녀석이 전화를 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는 뭔가 생소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정애 전화 같지도 않은데,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박목화가 그를 돌아보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왜 왔냐?”

    -이 소리는 처음 들었다.

    여태껏 드나들면서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던 질문에, 김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당황했다. 왜 왔냐니. 이유라고는 놈을 보러 오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낙원은 왜 먹을 걸 사왔냐고 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목화가 다시 물었다.

    “왜 온 거냐?”

    “……”

    낙원이 여전히 할 말을 찾지 못했을 때였다.

    두 번을 물어본 목화가 벌떡 일어났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러나 목화는 그대로 낙원 앞을 지나, 성큼성큼 창문으로 향했다. 블라인드 사이를 벌려 바깥을 살펴보는 그 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팔을 다치고 왔던 때에 그랬었다고 기억을 상기하기도 전이었다. 바깥을 살핀 목화가, 다시 블라인드를 내리더니 돌아섰다. 굳은 얼굴이었다.

    “열쇠가 없냐?”

    “있지.”

    낙원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대답을 하고나서야 놈이 어째서 얼굴을 굳혔는지 깨달았다. 자기 방에 가라고 열쇠를 준 건 혹시 습격을 당할까봐 그런 것인데, 왜 위험하게 여기로 왔냐는 것이다.

    “왜 바로 집에 가지 않은 거냐.”

    역시 목화의 다음 말은 그것이었다.

    놈의 얼굴은 심각했다. 거기에 대고 '네 얼굴이 보고 싶었지'라고는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던 낙원이 미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목화의 얼굴이 한층 더 굳더니 낙원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아직도 네가 일반인인 줄 아나? 습격을 당했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당해보니 무섭더라면서. 며칠이나 됐다고 그새 잊었어?”

    박목화답지 않게 엄청나게 긴 말이 쏟아졌기 때문에 낙원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 있었다. 그러나 예상외의 설교라서,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일반인이 아니면 내가 뭐라는 거야,”

    그러나 목화의 대답은 분명했다.

    “경찰.”

    반박을 하려던 낙원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형사가 아니라 간부니까 다르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습격당한 지금에 와선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전직 행동대장으로 생사를 가르던 박목화의 입으로 '넌 일반인이 아니다'라고 듣는 건 기분이 달랐다.

    꽃집을 배경으로 서 있어도 아직도 조폭으로밖에 안 보이는 놈이었다. '넌 아직도 네가 감방에 있는 줄 아냐'라고 그가 몇 번이나 비아냥거렸던 그 박목화가 자신에게 일반인이 아니라고 하다니.

    문득, 팔을 다친 게 여러모로 짜증이 나서 김낙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다친 뒤로 다들 너무 말이 많았다.

    “이봐, 경찰이라고 해서 일반인이 아니란 얘긴……”

    “습격을 당하는 일반인은 없다.”

    그때였다. 놈이 그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확고한 말투였다.

    처음으로 말을 끊겨본 낙원이 기가 막혀서 자리에 앉은 놈을 쳐다보았다. 서경위와 최검도 그러더니, 이 놈은 아예 말까지 끊으면서 행동까지 구속하려고 들어? 다른 놈도 아니고, 그 말 없던 박목화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에 김낙원은 울컥했다.

    참을까.

    그렇지만 그 '참을까'라고 생각한 시점에서 이미 낙원의 인내는 끊겨 있었다. 낙원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넌 김갑선 잡히기 전엔 일반인 되기는 어렵겠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 지 알 수가 있나.”

    “……”

    박목화가 입을 다물었다. 낙원이 덧붙였다.

    “너 손 털었다고 생각해도 일이 그렇게 쉽겠어? 그 놈 잡혀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지. 맨날 그렇게 긴장하고 살면 어떻게 꽃집을 하나, 응?”

    낙원은 계속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이나 해보라는 식으로 쿡쿡 찔렀다.

    생각해보면 그간 참 많이 참았지. 반년,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몸이 편할 때에는 그래도 놈이니까 참자, 가 되었지만 가뜩이나 팔 다친 게 불편한데 '일반인 아님' 소리까지 들어가며 참을 수는 없었다.

    “나야 당분간 네 기준으로 일반인이 아니래도, 범인만 잡히면 바로 서류나 처리하는 안전한 공무원으로 돌아간다지만 너는 어떻게 하냐, 응? 너든 이 꽃집이든 한쪽만 잘못되어도 누님 눈에 눈물이 날 텐데. 넌 누님이 울면 안 되잖아, 그렇지?”

    목화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넌 누님 소리만 나오면 얼굴이 변하지. 왠지 속이 꼬여버린 김낙원은 부러 들리게 혀를 찼다.

    “누님 소리만 나오면 이러는 거 봐라. 이야- 친누나라고 해도 그렇게 잡혀 살면 다들 시스콤이라고 그래. 하기는 뭐 네가 약한 게 정애 뿐이냐? 역사 여직원에, 요구르트 아줌마에, 하다못해 지나가는 손님도 여자한테는 천사지 천사. 너무 근육이 무거워서 못 날아서 그렇지. 어디 여기에 링 없나 링?”

    김낙원이 부러 박목화 머리 쪽으로 왼손을 휘휘 젓더니 뭔가 깨달았다는 양 아아, 했다.

    “아, 있어도 반쪽짜리겠구만. 여자한테만 약하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목화의 얼굴이 굳어진 채로 이마가 조금 붉어졌다. 잔뜩 비아냥거리던 김낙원은 오랜만에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놈의 얼굴을 감상하다, 결국 이것도 놈의 누님이 끌어낸 거라는 생각을 하고는 또 기분이 틀어졌다.

    “그날 내가 예약했던 디너만 갔어도 내가 찔렸겠냐?”

    너는 여자에게만 약하지.

    “지금 이렇게 정신이 있냐 없냐 소리를 할 정도면 그때 그 꽃 좀 말고 나 좀 챙기지 그랬냐? 응?”

    “…무슨 말도 안 되는……”

    목화가 기가 막혔는지 허를 찔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니까 외려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거다. 박목화니까.

    -말도 안 되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끼면서 김낙원이 비틀리게 웃었다.

    아무리 일방적이라고는 해도, 약속을 던진 게 여자였으면 네가 그렇게 담담하게 걷어찼겠냐는 소리잖아 지금. 여자들 배려해주는 반만큼, 아니 반의반만큼만 날 신경 쓰지 그랬냐, 응?

    네 전화기는 90년대에 태어났냐고, 받을 수만 있고 걸 수는 없냐고, 사람이 온다 그러고 일주일씩 안 보일 때에는 걱정도 안 되더냐고 낙원은 말을 해버릴 뻔 했다. 그러나 자존심 탓에 앞에 말을 모두 삼키고는 뒷말만 내뱉었다.

    “역시 일반인이 아니라서 찔려야 챙기나보지? 일상도 소중하다는 걸 좀 알아봐라. 넌 누님한테는 평소에 연락 좀 하냐? 사람이 맨날 찔리고 납치당하고 살 수 있나.”

    “……”

    기가 막혔던 모양이었다.

    서 있던 박목화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자리에서 나왔다. 자신의 앞을 지나쳐갈 때까지도 낙원은 놈이 설마 어디로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가, 놈이 문을 열려고 할 때에야 소리를 냈다.

    “어디 가는 거냐?”

    그러자 놈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담배.”

    저 놈이 담배를 피운다고?

    잠시 거기에 생각이 미친 낙원이 창문으로 내다보자, 놈은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고 있었다. 저 아래 가판대가 보였다.

    놈이 허리를 숙이더니 담배를 받아들었다. 곧 이어 놈이 익숙한 연기를 뿜는 것을 보면서 낙원은 눈을 뗐다.

    ……아니 그런데 저 놈, 얘기하다 말고 나가서 나도 못 피우는 담배를 피워?

    괜히 방에 들여놨나.

    “디스하고 라이터 주십시오.”

    목화는 오랜만에 담배를 물었다. 그는 웬만해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피우는 내내 오른손에 담배가 들려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면 대처를 금방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바로 옆에서 새 담뱃갑에서 벗겨낸 비닐 껍데기가 주위를 휘돌더니, 아차 하는 순간 멀리로 날아갔다.

    눈을 들자 멀리 보이는 전철역사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입구에 있는 작은 꽃집은 하얀 빛을 거기에 더할 뿐이었다. 저 속에 있을 놈을 생각하자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담배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짧은 순간 외에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는 생각을 그만두는 것에 익숙했다. 대개의 경우 그는 생각을 그치자, 라고 하면 곧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별다른 도구는 필요가 없었다.

    담배가 필요할 때에는 쉽게 생각를 그만두지 못할 정도로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뿐이었다.

    놈의 일에 괜히 끼어든 게 아닐까. 박목화는 연기를 내뿜으면서 생각했다. 오랜만의 후회였다. 그러고 보면 왜 놈의 일에 당연히 끼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놈은 동생도 아니었고 누님도 아니었다. 형님은 더더욱 아니었다. 광우형님과 비슷한 부분은 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놈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점이었다.

    최소한 어떤 이름도 없다는 점에선 그러했다.

    놈이나 그나 서로 '너' 이상으로는 칭해본 적이 없었다. 형님 자가 끼어들지 않는 관계라니, 있어본 지가 까마득하다.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이렇게 아무 관계도 아닌 놈을 왜 도와주고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던 목화는 담뱃재를 떨었다.

    ……이미 시작한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저렇게 위험도 모르는 김낙원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저 놈은 아무것도 몰랐다. 이번에는 팔을 찔리는 것으로 끝나서 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대체 어느 쪽이 시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 쪽에서 숙련자를 보낸다면 다음번엔 단번에 죽을 것이다.

    명치를 노린 거라면 두 번도 세 번도 노릴 수 있었다. 그 정도 각오가 없다면 애초 경찰을 찌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일이 말로는 최근 경찰을 노렸다는 조직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형사라면 모를까, 윗선을 누가 건드리느냐고. 형사를 찔렀어도 감방행은 피할 수 없는데, 윗선이라면 형량이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럴 리가 있느냐고 하던 원일이, 당한 게 김낙원이라는 이야길 하자 곧 돌아섰다. '그래도 악덕공장주 양반이라면 따로 원한을 샀을지도 모르지요' 잡혀온 행동대원을 쓸데없이 깐죽거려놔서 아주 밑바닥까지 까뒤집었다던가. 마음에 안 든다고 쓸데없이 콩밥 좀 더 먹게 조작 좀 했다던가.

    그가 알고 있는 낙원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상상이 잘 되는 예들이었다. 한참 열거를 하며 이야기를 늘어놓던 원일이, 꼭 알아보겠다고 이야기했다.

    다음 습격이 언제 있을지 몰랐다.

    누구인지 모른다면 방비도 할 수 없다. 저 놈을 그대로 내버려뒀다간 또 카페 같은 데서 어슬렁거리다 찔릴 듯 했다. 그리고 분명 일상이 중요했다는 둥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다.

    그렇게 놈이 죽으면, 그때에는 담배 한 대로 머리를 비우기 쉽지 않을 듯 했다.

    역시 방에 데려가는 수밖에 없나.

    “……”

    목화는 담배를 쓰레기통에 비벼 껐다. 결정했으면 고민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왜 아무런 관계도 아닌 놈을 도와줘야만 하는지에 대해선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놈이 있는 꽃집으로 다시 올라가, 문을 열었다.

    “얘기하다말고 담배를 피우러 가냐.”

    그러나 놈의 첫 마디는 그러했다.

    잠깐 목화는 이대로 문을 닫고 나가서 한 대를 더 피울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다시 들어왔다.

    “피우고 싶어도 못 피우는 내 앞에서, 담배 소리가 나와?”

    두 번째부터 목화는 놈이 무어라 하건 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찔렸기 때문이지.”

    사실을 짚어주었을 뿐이다.

    그러자 잠깐 놈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였을 뿐, 곧 놈이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지만 이미 그때엔 목화는 듣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대체 뭐에 꼬인 건지는 몰라도 참으로 놈은 한결같았다. 칼에 찔려도, 깁스를 해도, 열 오르게 하는 성격만큼은 바뀌는 게 없다.

    방금 전 자신이 사실이라는 이름의 스트레이트를 날렸다는 것은 모르는 채, 목화는 저 놈 누가 입 좀 닥치게 해줬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

    “……안 가냐.”

    그러자 놈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양 일축했다.

    “나 혼자 갔다가, 그 때야말로 따라와서 덮치면 다친 내가 어떻게 하라구?”

    그 말도 맞았다.

    목화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철저하게 무시했다. 몇 번을 갈구다 지쳤는지 놈이 입을 다물었을 때에는 저녁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먹고, 그리고 역시 아무 말 없이 1시간이 걸려 박목화의 집으로 갔다.

    잘 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었던 건 똑같았다.

    화가 났던 탓인가, 김낙원은 며칠 만에 놈을 쳐다보지도 않고 푹 잤다. 그것 하나는 좋은 점이었다.

    “이것도 조서라고 썼나보지.”

    서류 넘기는 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김낙원이 비아냥거리면서 계급을 붙였다.

    “이경장, 아무리 곰손이래도 손으로 쳐 손으로. 발로 치지 말고. 응? 손으로 쳤다구?”

    수사부 안에서 남자들이 목울대로 침 넘기는 소리와 머리를 긁적이는 소리, 그리고 불쌍하다는 시선들이 서로 교차했다.

    이경장 앞에서 보란 듯이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한 김낙원이 경장에게 출력한 서류를 내밀었다.

    “그럼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설명해봐.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눈 밑의 다크써클은 사라지고 원래의 김경정이 돌아와버렸다. 수사부 전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제 제출할 걸,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잠시나마 김경정을 안되었다고 생각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더 많았다.

    아침부터 혼난 인간이 2시가 된 지금 다섯을 넘었다. 다들 어지간한 이야긴 서로 하면서 갈구는 사이였다. 그러나 꼬인 놈이 더 꼬아대자 버틸 수가 없었다.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비난을 받는 거라면 차라리 낫다. 듣지 않은 샘 치면 되니까. 그리나 김낙원은 말끝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응?'하고 덧붙이고는 반드시 대답을 기다렸다. 그 인터랙티브한 갈굼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선에 있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잘 하기가 어려웠다. 말로 먹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질문도 참으로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왜 말이 되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뭐라고 한단 말인가. 사건 경위를 적었을 뿐인데.

    “아, 그러니까, 독산동에서 한 동짜리 빌라에서 살던 여자가……”

    이경장이 땀을 뻘뻘 흘렸다.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은 의외로 서경위였다.

    “경정님, 아직 퇴원하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좀 쉬어가면서 일하시는 편이.”

    은근히 휴식을 권하는 말이었다. 가능하다면 일찍 가도 좋다, 처리해주겠다는 제안까지 내포한 말이었다.

    그러나 김낙원은 그런 얕은 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늘은 그럴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가기는 갈 것이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비록 어제 놈이 담배를 피운 이후로 말을 나눈 횟수가 열 번을 넘지 않더라도, 박목화가 차린 아침 식사가 오로지 나물, 국, 밥이라는 교도소 식단이었던 탓에 쳐다보지도 못하고 일어났어도, 10분 빨리 탄 전철이 전설의 출근 전철이라 붕대감은 팔이 사람들 사이에 끼는 위험천만한 일이 벌어졌더라도, 뭐 놈에게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여기 놈들에게 풀고는 있었지만 사실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랬다.

    박목화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놈이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야 한 생각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놈이 어제 했던 모든 행동은 다 자신을 걱정해서였다. 순간 이경장을 갈구느라 싱글싱글 웃고 있던 웃음이 입가에 좀 더 짙어졌다.

    놈이 좀 독단적이었으면 어때. 그런 거야말로 박목화가 얼마나 자신을 신경 쓰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인 것이다.

    놈이 자신을 걱정하고 신경 쓴다는 것만으로도 낙원은 놈이 나가서 담배를 한 대를 피우건 한 갑을 피우건 상관하지 않을 아주 너그러운 기분이 되었다. 오늘은 놈이 뭐라고 해도 듣지 못한 척, 기왕 왔으니 집에 같이 가기나 하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꽃집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오늘 ㄹ항목까지 끝내야 해. 대체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뭘했나, 응? 서경위.”

    “거기까지라면 오늘 중에는……”

    낙원은 싱긋 웃었다.

    “내가 여태껏 일찍 빠져줘서 좋았지? 오늘은 끝날 때까지 일한다.”

    대강 속도를 보면 9시 무렵에 끝날 듯 했다.

    그 다음에 꽃집으로 가야겠어. 낙원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때껏 경장이 웅얼웅얼 자기 행동을 변명하는 것을 들으면서 점점 웃음이 짙어지는 것을 보았던 수사부 전원이, 악마의 웃음을 보았노라고 후에 회상했다.

    꽃집에 도착하자 8시 반이었다. 점점 빨라지려는 속도를 어떻게든 늦추려 한 게 이 시간이었다. 9시에 도착해서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닫으라고 할 셈이었는데, 삼십 분은 꽃집에 있어야 할 모양이다.

    어찌되었건 여기로 오면 놈은 자신과 함께 퇴근해야 한다는 것은 어제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런 기회를 놓칠 낙원이 아니었다.

    그가 들어서자 꽃을 정리하고 있던 놈이 돌아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여긴 왜 또 왔냐'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같은 질문을 받으면 이번엔 아예 농담처럼 웃으면서 '너 보러 왔지'라고 말하려 했던 김낙원은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아니 그렇지만, 고작 이틀 만에 적응해서 얘기하지 않을 놈이 아닌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잘 왔다.”

    “……?!”

    박목화가 그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걸어나왔다.

    잘 왔다고?

    김낙원은 잠시 자기 귀를 의심했다. 놈이 할 말이 아니었다. 여태껏 이곳을 드나들면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게다가 바로 이 문제로 싸운 게 어제였다. 오늘 아침까지도 냉랭했는데, 오늘 하루 사이에 대체 놈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길래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이럴 리가 없는데. 낙원이 놈을 놀라서 쳐다보았을 때였다.

    박목화가 다가왔다. 놈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지만 놈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놈의 얼굴이 가까이 왔을 때였다. 놈은 그의 앞을 쓱 지나쳤다.

    몸을 돌리자 녀석은 바로 유리문을 열고 나가고 있었다. 역시 나에게 잘 왔다는 소리를 하고 나니까 담배가 피우고 싶었나. 김낙원의 머리에 퍼뜩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면 이번에 담배가 다시 손에 잡히기 시작했는데 꽃집에선 금연이라 못 피웠다던가? 아니 그래도, 잠깐 정도는 역시 앞에서 피워도 상관없었을 텐데.

    낙원이 어떻게든 놈이 참고 그 말을 한 뒤 담배를 피운다, 로 생각을 몰고 가려 했을 때였다. 그를 더 놀래킬 것은 따로 있었다.

    “……!”

    유리문을 열고 나간 목화가, 앞에 내놓았던 모판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비켜.”

    이 말을 듣지 않았으면 낙원은 놀라서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을 터였다.

    하마터면 어떻게 내 계획을 알았느냐고 무심코 물어볼 뻔했다. 설마 텔레파시가 통했나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잠깐 했던 낙원이 곧 정신을 차렸다.

    놈이 이상했다.

    오자마자 이야길 하고 가자가자 노래를 불러도 30분은 걸려야 간신히 일어날까 말까였다. 김낙원의 눈이 시계에 가 멎었다. 8시 30분, 맞았다. 저 놈이 이 시간에 가게를 닫아? 믿어지지 않았다.

    뭔가 일이 있는 건가. 그렇지만 대체 어떤 일이길래……

    낙원이 생각하는 와중에도 놈은 계속해서 들락날락하면서 바깥의 화분들을 들여오고 있었다. 일단 닫는 준비를 하는 것만은 확실한듯 했다.

    “뭐냐?”

    왔다갔다 하는 목화에게 물어보았지만 놈은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어차피 오른팔 때문에 최대의 도움이 비키는 것 뿐인 낙원은 일단 놈이 다 들여오기를 기다렸다. 어찌되었든 놈은 자신을 떼어놓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게 동거자의 장점인지도 몰랐다. 김낙원은 팔짱을 낄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작게 웃었다.

    5분 뒤, 목화가 바쁘게 움직인 끝에 바깥에 내놓은 테이블까지 전부 안으로 들여놓고 정리를 끝마쳤다.

    “뭐냐? 같이 가려고?”

    오늘 좀 심경의 변화가 있었냐. 낙원이 기뻐하는 기색을 최대한 누르고 물었을 때였다.

    박목화는 앞치마를 벗고 셔츠를 정리하더니, 전부 준비를 끝마친 뒤에야 낙원을 돌아보았다.

    “네가 찔렸던 곳이 어디라고 했지?”

    “카페 주차장.”

    낙원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 대답했다. 그러자 목화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거기 주소를 써라.”

    설마 뭔가 정보가 들어왔나. 낙원은 재빨리 대강의 주소를 쓴 뒤 위치까지 그렸다. 왼손이라 좀 삐뚤삐뚤하긴 했어도 그렇게 엉망만은 아니었다. 약도에 주차장 모습까지 대강 그려서 목화에게 내밀었을 때였다.

    받아든 목화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어떤 정보냐. 그렇게 물은 낙원이었지만 놈의 대답은 엉뚱했다.

    “차 열쇠.”

    놈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내밀었다.

    “……?”

    내 차? 키를 달라고?

    놈의 손바닥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놈의 굳은 얼굴에서는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낙원은 일단 서경위에게 받아둔 자동차 키를 가방에서 꺼내 내밀었다.

    “뭐야, 왜?”

    이번에도 놈은 대답은 하지 않고 다른 것을 물었다.

    “차는 공영주차장에?”

    낙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불안해졌다. 대체 어디에 필요한 거냐 싶었지만, 나름 동생들까지 시켜서 뭔가 들으려고 하는 놈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뭔가 생각이 있겠지 하고 낙원은 일단 넘겼다. 그리고 차 키를 받아 쥔 박목화가 드디어 입을 열었을 때엔 정말로 놀랐다.

    “지금 다녀올 테니 넌 여기 있어라.”

    “……! 뭐라구?”

    어딜 다녀온다는 거냐, 설마 그 카페에 너 혼자?

    낙원이 놀라서 되묻자 박목화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되물었다.

    “찔렸던 곳에, 다시 갈 거냐?”

    이 시간엔 곤란했다.

    김낙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은 지 벌써 며칠 째인가. 습격자가 최대 두 달 전부터 그의 행동반경을 보아왔다면, 범인이 다시 그 카페에 나타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흉기는 아니래도 준하는 것을 얻어낸 수색 팀도 철수한 뒤였다. 이 밤에 거길 가는 것은 확실히 위험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여기에 두고-…

    “내 눈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겠지. 어떤 곳인지.”

    커피가 맛있는 곳일 뿐이야. 낙원이 반사적으로 얘기를 하려다 말았다. '꼭 직접 네 눈으로 현장을 봐야 하는 거냐, 네가 탐정이라도 되냐.'고 말이 나오려는 걸, 박목화의 얼굴을 본 김낙원이 꾹 삼키고 말았다. 놈의 얼굴은 위압적일만큼 진지했다.

    그런데 이봐, 너 혼자 다녀오겠다면 말이다. 나는 어디 있으라는 거냐. 설마 나더러 이 꽃집에서 혼자 기다리라는 소리인 건 아니겠지?

    “집에는 같이 가야 하니 넌 여기서 기다려.”

    그러나 그 설마가 맞았다.

    “여기서?!”

    박목화는 그가 놀라건 말건 고개만 끄덕여보이고는, 자동차 키와 메모지를 쥔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잡을 새도 없었다. '어라?'하다가 '이봐!'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딸랑, 문을 연 놈이 그를 돌아보더니 딱 한 마디를 했다.

    “불 끈다.”

    “……! 이봐,”

    한 발짝 늦었다. 놈이 스위치로 손을 뻗었다. 놈을 잡을 시간이 없었던 김낙원은 상대적으로 가까운 소파로 들어가 앉는 수밖에 없었다.

    딸랑, 문이 크게 흔들렸다.

    불이 꺼졌다.

    그리고 놈이 나간 잠시 후엔 문 쪽에서 딸깍, 하는 소리까지 났다. 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놈이 문을 잠근 모양이었다.

    “……”

    김낙원이 정신을 차렸을 땐 꽃집에 갇힌 뒤였다.

    놈이 불을 끈 건 단순히 혼자 여기에 있는 게 바깥에 보이면 위험할까봐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가두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설마 놈한테 이렇게 휘둘릴 줄이야. 예상도 하지 못한 김낙원은 혀만 찰 뿐이었다.

    단숨에 어두워진 가게에는 꽃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보라색 자외선 등만이 불안하게 빛났다. 그 불빛에는 놈이 재빨리 쌓아놓은 모판과 화분들만 잔뜩 비쳤다.

    놈은 간 것이다. 그것도 무려 그의 차를 가지고.

    이봐. 같이 일찍 들어가려고 일을 한 거지, 이러자고 이 시간까지 일을 한 게 아니었다구. 낙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이대로 놈을 기다려야 하나 생각했지만, 어떻게 머리를 굴려보아도 결론은 같았다.

    딴 데를 가려고 해도 놈이 잠그고 가면서 가게 열쇠도 주지 않은 이상, 꽃집 문을 열어놓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여기에서 놈의 말대로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하는 듯 했다.

    언젠가 여기에서 놈을 기다렸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엔 돌아올지 안 올지 모르는 놈을 기다렸다면, 여기에선 놈이 먼저 기다리라고 했던 것만 다른가.

    ……어느 쪽이건 한심한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낙원은 얼굴을 찌푸리고 등을 뒤로 기댔다.

    오랜만에 운전해서 그런가 아니면 놈의 차종이 낯설어서 그런가, 박목화는 이마를 찌푸렸다.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운전이 힘들었다.

    목화는 카페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카페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뿐이다.

    “……”

    밤이었다. 놈이 찔렸던 시각은 11시 반이라고 했지만 이미 9시가 넘어 있었다. 어두운 정도는 비슷할 것이다.

    놈이 그토록 강조하는 이브였다지만 옷 가게가 그렇게 오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저기 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듯한 골목 건너편의 가게들이 문을 닫고, 위에 있는 빌라로 올라가는 로비의 불이 켜지고 나면, 이 콘크리트 기둥이 드리우는 그림자도 따라서 옅어지거나 어두워질 터였다.

    밤새도록 계속해서 켜져 있을 편의점의 하얀 불빛을 따라 목화는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칼에 찔렸던 김낙원을 보았다. 하얀 페인트로 그려진 사람 모습이 바닥에 누운 채 희게 빛났다.

    팔을 찔렸으니 정신을 단번에 잃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낙원은 분명 움직였다. 피해서, 본능적으로 불빛을 향해. 목화는 그곳에 서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편의점과 가로등이 보였다. 낙원은 꽤 기민하게 움직인 편이었다.

    낙원이 쓰러진 곳은 편의점의 하얀 불빛과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이 겹쳐지는 몇 없는 밝은 장소였다. 카페 뒷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곳은 이 정도일 것이다.

    주차장은 전체적으로 어두웠고 주변이 소란스러워서, 어지간해서는 두 번째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습격을 한 놈은 최소한 장소를 고를 줄 알았다. 경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2시간 전에는 여기에 도착했을 터였다.

    김낙원이 평소 나오던 시간이 있는 만큼 지금부터 기다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림자가 변하는 만큼 놈이 기다리는 장소도 바뀌었을 것이다.

    박목화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 역시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박목화의 발걸음이 주차장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차 뒤로 움직였다. 작은 화분들을 놓아놓은 화단이었다.

    작은 화분의 안쪽에는 지금도 꽁초가 버려져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습격자는 이곳에서 누구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게 담배를 피우면서 서성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가장 어두운 이곳에서는 카페의 뒷문이 보이지 않았다.

    목화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주차장 바닥에서는 쉽게 소리가 났다. 최대한 가까이에 있으려 했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장소는 주차한 곳 옆일 테지만 만일 밝은 곳에 세워두었다면-……

    10시가 넘으면 가게의 불빛이 꺼진다.

    한 시간 뒤에 변해 있을 어둠의 농도를 따라 조금씩 움직인 박목화가 드디어 기둥 뒤에 섰다. 뒷문이 보이고, 어둠 속에 자신의 그림자를 감춘 채.

    기둥 뒤에서 그는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곳까지 직선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페 뒷문까지 빠르게 뛰어가본 박목화는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차로 돌아왔다.

    정말로 경험자라면 이상한 일이었다.

    소리가 들렸을 때에는 이미 칼을 뺀 뒤였다고 했던가.

    “운이 좋은 건가……”

    박목화는 시동을 걸면서 중얼거렸다.

    김낙원은 어두운 꽃집 안에 혼자 앉아 있었다.

    “……”

    꽃 냉장고가 간헐적으로 소음을 토해냈다. 보라색 자외선 등이 어둠 속에서 수초처럼 꽃집을 비추었다.

    언젠가 놈이 이곳을 자기 눈앞에서 떠났던 때가 떠올랐다. 아까와 비슷했지만 상황은 전혀 달랐다. 박광우에게 배신당한 게 아니라는 걸, 놈이 알게 되었을 때다.

    놈이 떠났다고 생각했다.

    김낙원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보라색 불빛에 비친 자신의 손등에는 엷지만 흰 흉터가 남아 있었다. 스스로 내리쳤을 때의 상처다.

    ……놈의 손등에는 아직도 이것의 두 배는 되는 길이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얀 심줄 같은 그 흉터는 아무래도 지워지지 않을 듯 했다. 역시 자신이 만든 상처였다.

    놈이 돌아왔을 때 남긴 것이다.

    주인 없는 빈 집을 지키는 개 같았다. 놈이 떠났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묘한 패배감에 젖어 무작정 기다렸다. 테이블 위에는 정리하다 만 꽃들이 널려 있었고, 검정색의 긴 앞치마가 놈이 던져놓고 나간 그대로 있었더랬다.

    바닥에 떨어진 꽃들을 잘근잘근 뭉개는 것도 곧 질려서 불을 끄고 들어앉았다.

    왜 여기 있는 거냐.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더랬다. 그리고 놈이 답 대신 돌아왔을 땐, 자신은 놈을 강간했다. 수조로 돌아온 아가미가 찢긴 물고기처럼 또 다시 폭력의 그물로 놈을 얽매어-

    그렇게 내리쳤던 것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놈에게 여기에 있는 건 적의를 가진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양, 깨진 화분조각으로 오른손을 내리쳤다. 보라색으로 비치는 검붉은 액체의 기억이 선명했다.

    김낙원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놈이 와서 물었지.

    '왜.'

    왜 여기에 있느냐고.

    그때는 몰랐다. 몰랐으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답할 수 없었으므로 불쾌했다.

    고작 가게 문이 닫히지 않은 것 따위,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어떤 말을 들이대도 대답이 되지 않았다. 놈이 이 꽃집을 떠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자신은 떠나지 못한 이유는 한 가지 뿐이었다.

    -왜 여기 있는 거냐.

    낙원은 스스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입가를 비틀고 웃었다. 대답은 알고 있었다. 단지 그때는 몰라서 말하지 못했고, 지금은 놈의 상처를 볼 때마다 눈 돌리기에 바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놈이 없는 꽃집에서 김낙원은 혼자 뇌까렸다.

    “돌아오면 좋겠으니까, 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으니까. 그 바람만큼 외려 자신이 벗어나지 못했던 거다. 꽃집에 울리는 소리가 그의 귀로 다시 돌아왔다.

    김낙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은 놈이 '기다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주인 없는 빈 집을 지키는 개라고는 해도, 그때에 비하면 많이 출세한 셈이다. 최소한 주인이 명령은 해놓고 갔으니.

    어째서 직접 눈으로 보겠다고 한 건지는 모르지만 놈도 분명 자신을 신경 써서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 점점 차가워졌다. 물기가 곧 습기로 올랐던 5월의 날씨를 떠올린 김낙원이, 날씨만큼이나 변한 놈과의 관계를 떠올리고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비웃음이 섞이지 않은 진짜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사라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꽃집 안의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날이 추웠다. 소파 밑에 작은 보일러를 켰는데도 꽃집 안 전체를 데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처 언제 오는 거냐.

    후, 하고 숨을 내쉬면 입김이 서릴 무렵, 낙원이 잔뜩 이마를 찌푸렸을 때에야 박목화가 왔다.

    문 앞에서 뚜벅뚜벅 하는 발소리가 멈추고 웅크려 앉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문을 여는 모양이다.

    “찔려죽기 전에 얼어 죽겠다.”

    딸깍, 열쇠가 돌아가자마자부터 낙원이 빈정댔다. 뭐라고 말하려 하던 박목화는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오라고 손짓했을 뿐이다.

    그래도 기다리라고 말을 하고 나오라고 손짓을 해주다니, 빈 집을 지키는 개치곤 정말 신세 많이 나아졌는데.

    낙원은 피식 웃으면서 따라 나갔다.

    누워있던 낙원의 귀에 무언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 있자 음식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국인가.

    “……”

    낙원은 거위털 이불로 몸을 싼 채 기분 좋게 놈이 깨워주길 기다렸다. 이런 게 동거의 참맛인지도 몰랐다.

    아직 일어나기 싫은 기분에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옆으로 굴렸다 바로 누웠다. 이불은 폭신하고 밤새 난방을 돌린 방은 따듯했다. 발가락까지 쭈욱 뻗어 기지개를 켠 낙원은 흐뭇한 마음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벽걸이 TV와 바로 다음날로 창가에 달았던 목제 블라인드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은 사람이 사는 방처럼 보인다.

    TV 아래에는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비데와 공기청정기를 들여놨을 때의 놈의 얼굴은 볼만했지. 낙원이 이불에 파묻혀 싱긋 웃었다.

    다른 쪽 벽 앞, 거의 비어있던 행거에는 서경위가 사온 옷이 가득 걸려있었다. 팔이 나을 때까지 어차피 입지 못하지만 놈과 옷을 같은 곳에 걸어 두니 더욱 동거하는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이제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필수품들을 들여놓았다 생각하던 낙원은 일부러 빼먹은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채워놓고 청소기에 생각이 미친 건, 놈이 바닥을 쓸며 청소할 때였다. 당장 주문하려다가 그만둔 것은 허리를 숙이고 빗질을 하는 놈의 등근육과 날개 뼈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거의 하루 종일 돌리고 있는 보일러 탓에 놈은 방안에서 얇은 티를 입고 있었다.

    여름엔 에어컨을 틀고 카디건을, 겨울엔 보일러를 틀고 반팔을 입는 집안의 기본조건이 지켜진 탓인지 놈의 옆에서도 이젠 좀 잘만 했다. 물론 아직 잠을 설치기는 하지만 동 터올 때 자는 게 아니라, 3시 무렵엔 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 놈이 해준 아침밥을 먹는다니, 오른팔을 찔러준 새끼에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제는 1시간이나 기다려줬고, 그 뒤에 싸우지도 않았으니 좀 제대로 된 아침밥이 나올 것이다.

    며칠 전부터 보복성으로 힘들게 밥을 먹었던 것을 떠올린 낙원이 느긋하게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과연 놈이 그를 불렀다.

    “일어나.”

    낙원은 행복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차려진 밥상을 보았다.

    “……!”

    낙원은 눈을 부릅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눈앞에 차려진 밥상에는 국 하나와 나물 하나, 젓갈 하나에 밥이 놓인 게 끝이었던 것이다. 이 며칠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상차림이었다.

    누굴 골탕 먹이나 싶어 낙원이 기가 막힌 얼굴로 놈을 쳐다보았지만, 놈은 너무나 멀쩡한 얼굴로 상 앞에 앉을 뿐이었다.

    “야, 여기가 교도소냐?”

    낙원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기왕 사람을 빈 집 지킨 개로 만들었음 밥까지는 책임을 져야지,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러나 박목화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아니'라는 그 소리도 없는 말에 낙원이 기가 막혀서 말했다.

    “그것도 아닌데 왜 사람을 굶겨. 벌써 며칠 째야, 이게.”

    “……”

    그러자 박목화는 무슨 이야길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을 본 뒤에야 낙원은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이건 놈의 본래 식단이었다. 골탕 먹이려고 차리는 것도 아니었고, 화가 나서 이렇게 차리는 것도 아니었다. 놈은 화가 났다고 평소 생활을 바꿀 수 있는 놈이 못 되었다. 여태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인지도 모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손만 찔리지 않았다면 자신이 할 것이다. 갑자기 오른팔을 찌른 새끼가 상당한 증오를 가지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식재료도 사오기 어려운 이 손으로는 요리는커녕 밑준비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놈 식단에 맞추자니 굶어죽을 판이었다.

    그래도 일단 준비를 하는 게 놈이니 어쩔 수 없다. 낙원은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일단 밥에 손을 댔다. 더 이상 아침밥을 거르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 모르지. 조촐한 식사여도 맛만 있다면 반찬이 한 개여도 상관없는 법이다. 조촐하다기보다는 가난해 보이는 식단이었지만 낙원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만 맛있어도, 하고 수저를 뜬 낙원은 첫 입을 먹어보고 절망했다.

    싱거웠다.

    끝없이 싱거웠다. 놈은 간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콩나물국의 시원함은 간이 빈 것에서 나오는 모양이었다. 시장에서 파는 걸 데워먹어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소금 줘.”

    박목화가 일어나서 가져왔다. 렌지 위에 소금이 있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좀 치고 나자 먹을 만은 했지만 식권으로 사먹는 3500원짜리 백반보다도 더 맛이 없었다. 낙원은 속으로 한숨을 쉰 뒤 이번에는 콩나물에 도전했다.

    그리고 이 소금이 왜 올라가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물이었다.

    시장에서 천원에 한 움큼 집어주는 나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는 물에 넣고 끓이고, 하나는 소금에 무친 듯 했다.

    그런다고 요리가 되는 게 아니지 않나. 낙원이 뭐라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입을 다무는 게 가장 좋을 듯 했다. 챙겨준 사람 정성이 있으니 맛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도저히 나물 한 젓갈과 국 한 숟갈을 끝으로 미적거리던 그는 도저히 두 번째를 풀 용기가 나지 않아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좀 식단을 바꿔볼 순 없냐?”

    낙원의 말에 목화는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고개를 저은 것이다.

    역시 '아니'라는 뜻의 소리 없는 말에 낙원이 잠깐 절망했다.

    “이봐, 요리라는 건 노력의 문제야. 최소한 아침이라면 썬업 계란프라이가 안되더라도 스크램블 정도, 그것도 안 되면 고기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 뭐 생선구이도 좋지. 이 정도의 주식은 나와줘야 되는 거 아냐?”

    “……”

    “어차피 집에서 먹는 건 아침 뿐인데 바깥에서 조미료로 찌든 밥을 먹기 전에 좀 맛있는 걸 먹어볼 생각은 없냐? 내가 손만 움직였어도 널 이 꼴로는 안 내벼려뒀어. 더 맛있는 걸 해서 먹였지. 어떻게 하는 건지 이야긴 다 할 테니, 좀 해보면 어때?”

    그러나 이번에도 목화의 대답은 간단했다.

    고개를 내저은 것이다.

    “됐어.”

    그래도 말이 소리가 되어서 나왔다는 점만이 좀 달랐다.

    ……이런 것에도 만족한다면 확실히 노력하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무리 김낙원이라도 자기가 현재 못하는 걸 신세지고 있는 놈 더러 꼭 하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어쨌든 놈이 한 거니까. 그런 생각으로 하는 수 없이 콩나물국을 몇 숟가락 더 펐지만 역시 먹기는 어려웠다. 김낙원은 결국 다시 숟가락을 놓았다.

    곁눈질로 보자 놈은 이미 밥 한 공기를 거의 해치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먹을 수가 있냐. 이런 감방 밥을.”

    낙원이 한숨처럼 중얼거린 말에 목화가 대꾸했다.

    “난 매일 이렇게 먹는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럽 굳은 얼굴이라, 놈을 본 김낙원은 억지로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은 뒤 국으로 넘겼다.

    참 자신도 정성이다 싶었다. 놈이 해준 것만 아니었다면 입을 안대는 건 둘째 치고 혹독하게 비판했을 이 식사를 어떻게든 하고 있다는 점이. 그래도 그렇게 해서 반쯤 먹어가자 후회가 마구마구 밀려왔다.

    역시 놈을 데리고 가서 집에 있었어야 하는 건데.

    “……건데.”

    무심코 중얼거린 모양이었다.

    옆에서 밥을 거의 다 먹어가던 박목화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고작 밥 한 끼에 목숨을 걸겠다는 거냐.”

    그리고는 놈이 중얼거렸다.

    '머리도…'

    그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뻔했다. 머리도 다쳤냐는 소리다. 기가 막힌 낙원이 울컥해서 쏘아붙였다.

    새끼가, 그래도 네가 해준 밥이라 먹어주려고 한 사람한테 그게 할소리냐.

    “그래, 감방 밥을 먹으려고 한 걸 보니 내 머리가 어떻게 되긴 됐지.”

    낙원이 잔뜩 비꼬았다. 놈도 기분이 좋지는 않은가 보았다.

    “그렇게 찔려놓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이상했다.”

    목화가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상을 치웠다.

    뭐라고 말하려던 낙원이 말을 멈췄던 건, 놈이 너무나 이런 싸움을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치한 말싸움이었다. 밥이 어쩌니 저쩌니, 정말로 사소한 것으로 서로 꼬투리 잡고 싸우는 거다. 낙원은 일상적으로 비꼬는 게 익숙했지만 놈은 그런 것에 조금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간 몇 번 말싸움이란 걸 했답시고 반격이랍시고 한 말이 저거다.

    김낙원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하찮았다.

    어쩌면 말싸움할 상대가 없었던 게 아닐까, 낙원은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박목화 인생에 서로 말을 주고받을 상대가 있었을까 싶었다. 누님누님, 형님형님, 놈이 만든 관계라는 게 '님' 자를 듣든가 하든가 외에는 선택이 없는 것이다.

    서로 말 놓는 상대라고 치면 고등학교 때로 되돌아가야겠지만, 그런 까마득한 옛날을 생각해봐야 헛수고다. 게다가 저 놈 상대라면 고등학교 때도 결코 동급생이 편안하게 말을 놓고 투닥거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평생 수직적인 관계만 맺고 살아온 놈이, 그 수직 그래프 어떤 점에도 찍을 수 없는 상대하고 싸우려니 오죽 당황했을까.

    “넌 할 말이라곤 정신 차리라는 것 밖에 없냐? 어휘력 부족이야, 새꺄.”

    기분이 좋아진 김낙원이 싱긋 웃으면서 핵심을 찔렀다.

    왜인지는 몰랐다. 놈 인생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정의되지 않은 관계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쳐서?

    ……발상이 귀엽기도 하지. 그렇계 생각하면서도 김낙원은 기분이 좋아지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보였는지, 놈이 잠시 당황해서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역시 어휘가 부족해서 그럴 것이다. 뭐가 그렇게 좋냐고 툭 한 마디 던지지도 못하는 덩치 큰 놈이 갑자기 김정애가 그토록 바라던 테디베어로 보여, 김낙원은 정신을 치리기 위해 머리를 두어 번 흔들어줘야 했다.

    출근준비를 서둘러야 할 듯 싶었다.

    “어이, 나 셔츠 좀 입혀줘.”

    낙원이 소리를 내자 목화가 돌아보았다.

    “셔츠……?”

    어제만 해도 스웨터를 입지 않았느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아, 너무 편하게 입고 갔더니 기강이 안 서. 보는 눈도 좋지 않아서.”

    서경위가 들었다면 백안시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낙원이, 놈의 손을 기다리는 양 왼손에 셔츠를 들고 팔을 벌렸다.

    목화기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다가와 그에게 입혀주었다. 낙원이 든 셔츠는 팔이 넓게 나온 놈의 것이있다. 붕대를 감은 오른쪽 팔이 무리 없이 셔츠 속으로 들어갔다.

    놈의 셔츠를 입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사실 심장이 뛰었다. 녀석의 것은 결코 좋은 감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주문해온 그의 것에 비해서는 한창 질이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셔츠와 셔츠를 입혀주는 놈의 손끝 하나가 닿을 때마다 속이 근질거렸다.

    속으로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표정관리에 애쓰던 김낙원이, 일단 놈이 단추를 잠그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피부가 일일이 작은 심장이 된 것 같았다. 작게 두근, 두근, 하고 열기를 띠는 자신의 피부에 김낙원은 기분이 좋다 못해 넋이 나갔다. 수없이 연애를 해보았고 상대의 옷을 입혀준 적도, 상대가 옷을 입혀준 적도 많았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흔히 말하는 연애의 시작이 이런 건가.

    바로 자신의 턱 아래에서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는 놈을 내려다보면서 김낙원이 잠시 생각했다. 이 덩치 큰 놈이 자기 옷인데도 불구하고 단추를 몇 번 놓쳐가며 하나씩 껴주고 있는 게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였다.

    오죽 타인에게 옷을 입혀준 적도 없으면 저렇게 못하냐 그래.

    빌어먹을, 그 점까지 사랑스러웠다.

    비꼬고 싶었던 김낙원이 어떻게 해도 빈정대게 되지가 않아서, 웃으면서 귀엽다는 의미로 한 마디 했다.

    “곰손이다, 너.”

    담배를 피우고 싶은 기분을 누르면서 낙원이 이야기했다.

    나름 김정애가 보는 눈은 있다. 놈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놈은 확실히 테디베어가 잘 어울렸다.

    낙원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올려다보는 놈 앞에서 싱긋 웃었다.

    곰손이라.

    박목화는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셔츠 단추를 끼울 때에는 확실히 서툴긴 했지만, 그건 평소 해야 했던 것의 반대 방향이라 잠깐 헷갈렸을 뿐이다.

    타인에게 옷을 입혀준 적은 처음이었다.

    “……”

    목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같이 있었던 사람은 형님과 동생들 뿐이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이렇게 누군가와 같이 있어보는 건 처음인 듯 했다. 그것도 자신이 돌봐주면서.

    목화는 돌봐주는 걸 생각하다 피식 웃어버렸다.

    그냥 돌봐주는 것도 아니었다. 놈은 말도 정말 많았다. 저 식단 이야기는 처음 놈이 이 방에 왔을 때부터 한 얘기였다. 단지 그 전에는 아예 숟가락도 잡지 않았을 뿐이다. 어쩐 일로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 앉는다 했다.

    감방 밥 소리를 아침만 해도 최소한 다섯 번은 들은 듯하다. 박목화는 스스로의 인내심에 탄복했다.

    이렇게 말 많은 놈을 용케 방에 두고 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놈이 지나치게 말이 많은 탓인지도 몰랐다. 놈이 그렇게 화를 내게 만드는데도, 막상 돌아서면 머리는 금세 식었다.

    처음에 입을 다물면 한 번에 끝난다. 화가 날 소리를 한 번 하고, 상대를 하면 더 가일층 화나게 하는 소리를 늘어놓아도, 자신은 놈더러 나가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어쨌거나 데리고 있어야 할 놈이라고 어느 순간 마음속에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화를 내게 만드는 놈도 처음이지만 화가 나는데도 잡아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놈은 자신에게 처음인 것이 꽤 많았다.

    손을 내려다본 목화가 문득 고개를 저었다. 처음으로 타인에게 옷을 입혀준 게 하필이면 김낙원이라는 생각을 하자 그때가 떠올라서였다.

    여태껏 놈의 체온을 느낀 적은 두어 번 있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놈의 체온이 흉기가 되었던 순간을 그는 기억했다. 등에서 느껴진 그 체온은 그저 폭력으로만 느껴졌는데.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놈의 얼굴을 보면서 숙이는 기분이 이전과 전혀 달랐다. 사람의 체온을 손끝으로, 손등으로 느꼈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놈의 맨살에 자신의 손이 닿았을 땐 자기도 모르게 놀라 손을 놓아버렸다. 셔츠를 제대로 입히지 못했던 건 그 탓도 조금은 있었다.

    놈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 부분에 열이 오르는 듯 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허리를 숙이면서 단추를 채워가는 작업은 오랜만에 사람의 체온을 느끼게 했다.

    무서울 정도로 따스했다. 타인이 손끌에 와 닿는, 언제 적에 경험했는지 이미 오래전에 잊었던 감각.

    그래서 놈을 내보내지 못하는 걸까. 목화는 생각했다. 놈과 이야기하다보면 비록 열이 치솟기는 해도, 그것만큼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도 없었다.

    불이 치솟아야 따뜻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진지하게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게 비록 싸우기 위해서지만 아주 부담스러우면서도 속에서는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이마에 열이 오른다.

    좋지 않은 경험이지만 그게 사람의 체온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했다. 어렸을 적 가끔 열이 오르면 어머니 대신 하연이 이마를 만져주었듯이, 그렇게.

    '열이 오르게 한다'는 점에서는 놈을 따라올 사람이 없겠지.

    목화는 피식 웃었다. 그때였다.

    “꽃집총각-”

    바깥에서 아주머니가 불러, 목화는 잠시 일어났다. 나가보자 손님이 테이블 위에 놓인 조화를 묻고 있었다.

    무사히 흥정을 마치고 팔면서, 이걸로 고기라도 좀 사올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에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사실은 너무 시끄러워서, 뭔가 놈이 입을 닥치고 먹고 있는 게 좀 보고 싶었다.

    워낙 원일이 언제나 고기고기 했던 탓인가. 고기면 만족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설날에 김낙원이 잔뜩 사왔던 것도 고기였으니 사실은 이 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양쪽 다 들으면 오만상을 찌푸리며 화낼 소리를 태연히 생각한 목화가, 정육점을 들러야겠다고 결심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서경위를 비롯한 수사부 전원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김낙원을 보면서 외려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기분이 좋아졌을까 싶어서였다. 어제라면 마빡이 깨졌을 일이 오늘은 알았어, 가봐로 바뀌어 있었다. 무려 콧노래까지 들었다는 사람도 나왔다.

    ……분명 누군가는 지금 기분이 바닥을 기겠군.

    누구 하나 말로 꺼내지는 않았어도, 저 경정을 아는 시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저, 경정님.”

    서경위가 먼저 서류를 들고 말을 걸었다. 자료 결과가 막 나온 참이었다.

    김낙원은 웃으면서 돌아보았다.

    “지문 채취결과 나왔습니다.”

    “이렇게 빨리?”

    낙원은 놀라면서 일어났다.

    자료실로 가면서 서경위가 이야기했다.

    “국과수 쪽에 동기 녀석이 하나 들어가 있어서요. 분류할 때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지요. 생각 외로 채취하기 쉬웠답니다. FDB(:지문 데이터 뱅크)에서도 전과자 지문으로 분류되어 있었다는군요.”

    자료실에서 본 서류에는 과연 지문도 선명하게 찍혀 나와 있었다. 내심 동양을 생각하고 내려다보았던 김낙원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짐작가는 이름들을 모두 훌륭하게 비껴나간 새로운 얼굴과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전형적인 스포츠머리에 찢어진 눈, 튀어나온 광대뼈의 얼굴은 어떻게 보아도 낯설었다. 이름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김명보?”

    소리 내어 읽어봤지만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옆에 쓰여 있는 전과 이력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처음 들어보는 조직이었다.

    “……칠성?”

    김낙원이 생소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을 지켜보던 서경위가 물었다.

    “아무 관계가 없으십니까?”

    “촌스러워서 우습다는 점 외에는.”

    김낙원이 대꾸했다.

    서경위도 희한해하던 참이었다. 이번에 경정의 원한관계를 조사하느라 경정의 파일을 전부 뒤져보았지만 저 조직과는 아무러 상관이 없는 게 맞았다.

    “예전에 있었던 칠성파에서 행동대장 격 하나가 독립했는데, 본파가 사라지니까 그 이름을 은근슬쩍 쓰고 있다고 하더군요.”

    뭘 좋은 이름이라고 그렇게 씩이나. 낙원이 피식 비웃고는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뭘로 장사하는데?”

    “그게 말입니다……”

    서경위가 약간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세븐스타 무슨 무역이라고 이미 취득한 회사가 있는데, 중국이나 동남아하고 교류를 합니다. 대상만 알지 구체적으로 뭘 파는지는 모릅니다만, 마약 담당에게 물어봐도 마약 입수책으로는 이 조직은 리스트에 올라가 있지 않다고 합니다. 뭘 다루고 있는지는 몰라도 불법이겠죠.”

    “그것도 생명이 달린.”

    김낙원이 중얼거렸다.

    자신을 노렸을 때엔, 들키면 그 몇 배의 보복을 받을 것을 예상하고서도 일을 벌려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 정도라면 조직의 생사가 달려 있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어째서 자신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찔리지 않았다면 애초 그런 조직이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 대체 어째서.

    그쪽 담당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쪽도 갑자기 하지 않던 짓을 해서 놀랐을 것이다. 알려줘야겠다고 김낙원은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나를……”

    무심코 중얼거렸을 때였다. 옆에 서 있던 서경위가 가장 적절한 해답을 내놓았다.

    “경정님도 모르는 사이 원한을 쌓으신 건 아닙니까?”

    김낙원이 대강 손을 내저었다. 이 1년간 동양건만 맡았는데 관련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뭐, 상관없지. 어쨌든 증거가 나왔으니 수배를 해. 거처를 뒤지면 흉기가 나올 지도 모르지. 놈은 안심하고 있을 테니까. '왜'는 그 뒤에 찾지.”

    불구속 수사를 하려고 해도 전과자인 놈이 저항을 하거나 도주를 하려고 하면 바로 구속으로 넘어간다. 명백한 용의자였다. 일단 잡고 나서 찾자는 말에 서경위가 동의했다.

    “더 알아보지요. 일단 이걸 증거로 해서 수배해보겠습니다. 지문이 나온 쪽이 흉기가 아니라서 아쉽긴 합니다만, 일단 족치다 보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죠.”

    김낙원이 그 말에 싱긋 웃었다.

    그리고 서경위가 수사부에 전달하러 가려고 할 때였다. 김낙원은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참 서경위, 전달하고 나서 잠깐 음식 좀 사다줘.”

    도저히 그 아침밥으로는 안 되겠다.

    김낙원은 생각했다. 혹시라도 남으면 싸들고 가서 집에서 먹자고 생각한 김낙원이 개수를 좀 많이 불렀다.

    “빠오즈로 5박스.”

    그리고 몇 시간 뒤엔, 김낙원은 남은 세 개의 박스를 들고 서경위의 차에 탄 채 꽃집으로 가고 있었다.

    딸랑, 유리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라고 소리를 내려던 박목화가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또 왔냐.”

    그래도 처음 왜 왔냐에 비교하면 정말 많이 양호해졌다. 김낙원은 싱긋 웃었다.

    “이번엔 선물도 있다.”

    그리고 김낙원은 테이블 위에 박스를 풀었다. 익숙한 로고를 본 박목화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너, 설마 이걸 네가……”

    “가서 사올 수 있을 리가 없지.”

    김낙원은 오른팔을 가리켰다. 그 복잡한 백화점 본점 지하에서, 한쪽 팔을 고정기에 넣은 채 뭔가를 사온다는 건 기적이었다.

    굳이 일상에서 그런 기적을 바랄 필요가 있나.

    “서경위 시켰어.”

    김낙원이 먼저 이야기했다. 그러자 놈이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타협인지도 몰랐다. 그는 놈이 걱정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또한 알아주고, 그리고 놈은 그가 어쨌거나 먹고는 살아야 하며, 거기에 더해 조금은 제멋대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박목화가 젓가락을 들었을 때 낙원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놈이야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최소한 그에게는 그러했다. 오랜만에 먹는 빠오즈는 맛있었다.

    며칠 만에 서로 소리를 지르거나 비꼬는 법 없이, 편안하게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리고 김낙원은 가게 한 구석에 앉아 놈이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이젠 제법 손님맞이도 하고 터무니없이 가격을 후려쳐도 넘어가지 않는다. 꽃다발도 그런대로 잘 만들었다. 꽃집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다 같이 온다는 점이 참 다행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선 생각 외로 조용했다.

    그간 서로 화가 나서 아무 말 없이 탔던 때와 겉으로 보기엔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낙원은 달라진 점을 속에서부터 깊이 느끼고 있었다. 거울처럼 변한 검은색의 유리에 놈이 비쳤다. 놈의 얼굴도 분명 편안해보였다.

    덜컹덜컹, 전철이 한강을 건너면서 흔들렸을 때였다. 김낙원이 목화의 손을 쥐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쥐었을 뿐이다.

    그러나 놈은 뿌리치지 않았다.

    “……”

    뿌리쳤다간 오른팔을 목에 메고 있는 낙원이 균형을 잡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놈은 손을 놓지 않았다.

    놈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쭉 그러했다.

    이제야 놈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만족감 때문인가, 낙원은 오랜만에 놈의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편안하게 잠을 이루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