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14화 (13/34)
  • 2.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에 다행히 당직을 피한 서경위는 오후에 일어날 생각이었다. 출근을 안 한다는 생각에 어젯밤은 늦게 자버렸기 때문이다. 실컷 자고 일어나 피로가 좀 풀리고 나면 애인이 하자는 대로 나가서 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있었을 때였다.

    핸드폰과 함께 호출기가 울렸다.

    “……아, 예. 접니다.”

    무슨 일로 비번인 사람에게까지 연락이 오나, 덜 깬 머리로 생각하면서도 반사적으로 TV를 켜서 뉴스 채널로 돌리고 있을 때였다.

    “예?!”

    잠이 한순간에 깼다. 서경위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애인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지만 대답할 틈도 없었다. 경위는 오랜 시간 동안 훈련 받은 대로 3분 안에 착복을 마치고 집을 나섰다.

    공식적인 뉴스채널에는 나오지 않을 테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속보, 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습격이었다.

    무려 김경정이 칼에 찔렸다.

    “경정님, 어떻게 된 겁니까……!”

    연락받은 병원으로 급히 달려온 서경위는 전해들은 문을 벌컥 열고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블라인드 사이로 비스듬히 스며드는 갈라진 햇살이었다.

    널찍한 방안에는 침대가 하나밖에 놓여 있지 않았다. 의사의 뒷모습에 가려져 앉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걱정된 서경위가 병실호수를 보려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어이, 서경위.”

    눌린 듯한 목소리가 났다. 이름을 부를 때조차도 약간 빈정대는 듯한 그 말투는 평소와 똑같았다. 서경위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안심했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예쁜 간호사가 상냥하게 막았다. 친절한 말투에 서경위는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예? 예.”

    그러자 병실 문이 쾅도 아니고 부드럽게 탁, 하고 닫혔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여태껏 거의 평생 경찰병원만 다닌 서경위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듯한 나무문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몇 분 동안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경정이 칼에 찔려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정말로 놀랐다.

    일선의 형사가 칼에 찔리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파출소에 근무를 할 시절에도 하다못해 술 먹고 취한 남자를 말리다 술병에 머리를 맞은 순경이 실려 가거나, 의처증 남편을 말리다 부엌칼에 찔리는 사고는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러 모로 경우가 달랐다.

    어떤 사고 경위도 없었다. 하다못해 술 먹고 주정을 부리다가 칼부림이 벌어졌다면 경정 개인의 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주차장에서 칼에 찔리고 쓰러진 것을 카페 주인이 신고해서 구급차로 실려왔다는 건, 노리고 한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경정은 간부였다.

    경찰 간부를 노리고 저지른 '습격'은 그 무게가 달랐다.

    그나저나 왜 경찰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이런 사립의료원에……

    “들어오세요.”

    그때였다. 문을 열더니 간호사가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면회를 너무 오래 하시면 환자에게 무리가 갈 수도 있습니다. 흥분시키지 말고, 차근차근 말씀해주세요.”

    “예.”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주의사항에 서경위는 자기도 모르게 뻣뻣하게 대답했다. 일전에 경찰병원에 입원한 순경들을 찾아갔을 때에는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경정이 많이 위급한 상태이긴 한 모양이다.

    아까는 급히 들어가느라 몰랐지만 개인 병실이었다.

    그래서 침대가 하나였구나. 당연한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려 왔다가 밖에서 숨을 돌리고 나자 병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경정은 편해 보였다. 죄수복 같은 파란 줄무늬가 아니라 아이보리색에 옅은 격자무늬가 들어간 가운 같은 병원복을 입고 앉아 있는 경정을 보자, 꼭 경정의 집안으로 들어온 듯 했다. 안색도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혈색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생기가 있었다.

    잠시 삼분착복을 하고 뛰어온 게 옳은 일이었나라는 섣부른 생각까지 들었다. 칼에 찔렸다면서 어떻게 혼자 앉아서……

    “앉아계셔도 괜찮습니까.”

    서경위가 근심 반 놀라움 반으로 묻자 경정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다친 건 팔이야. 못 들었나?”

    경정이 왼쪽 팔을 들어보였다.

    “이걸 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왼쪽 팔에는 링거가 꽂혀있을 뿐이었다. 서경위는 의아해서 쳐다보았다. 경정이 혀를 또 찼다.

    “오른팔은 다쳐서 들지도 못해.”

    아니 그럼 뭐 하러 왼쪽 팔을 들었단 말인가. 서경위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경정의 꼬인 성격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다쳐서도 이럴 줄은 몰랐다.

    “몇 주입니까?”

    “6주.”

    김낙원은 짧게 대꾸했다.

    “그 동안은 충격을 주면 안 돼. 하마터면 손 병신이 될 뻔 했으니, 죽었다 살아난 것치곤 싼 값이지.”

    확실히 싼 값이었다.

    김낙원은 서경위가 수첩을 꺼내 사고지점을 묻는 것을 대강 한 귀로 듣고 일러주며 생각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번뜩였던 그 은회 색 칼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목 언저리가 선듯했다.

    반사적으로 오른팔로 배를 감싼 순간 찔려, 박혔다. 살을 가르고 뼈 사이로 박혀든 칼을 놈이 잡아 빼려던 순간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쳤다. 쉽게 뽑히는 지점이었다면 바로 두 번째의 일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몸 안에서 비틀리던 그 감각이 아직도 선명했다.

    “……20cm 정도의 흉기.”

    낙원이 지시했다.

    “마지막에 도망가면서 팔에 박혀 있던 걸 뽑았어. 주변이 소란스러웠으니 피 묻은 흉기를 몸에 지니고 도주했을 가능성은 반반이야. 혹시 주변에 버리고 갔을지도 모르니 근처를 샅샅이 수색해.”

    예, 서경위가 대답했다.

    “그리고 보복 가능성이 있으니 동양 팀 전부를 이쪽으로 돌려.”

    김낙원의 말에 서경위가 놀란 얼굴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낙원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범인은 간부를 노렸다. 이 일의 심각성을 모르겠나?”

    “심각, 합니다.”

    서경위가 대답했다.

    “어떻게 감히 간부인 나를 노리나? 내가 최근 맡은 건은 이 동양 건 뿐이야. 누군가 내가 일을 주도했다는 걸 냄새를 맡고 보복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 그렇지 않나?”

    100% 아니라고 대답하기는 힘든 문제였다. 서경위가 힘들게 인정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대한민국 경찰 간부가 습격당한 이 건을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나? 몸싸움을 하다 찔린 것도 아니고, 일부러 노리고 숨어서 기다렸다 찔렀단 말이야. 이런 습격 건조차 제대로 못 잡으면 일선에서 뛰는 형사들은 어떻게 안심하고 카페를 가겠나. 가족하고 외식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응?”

    형사들은 카페를 가지 않습니다. 서경위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논리가 틀린 것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

    “그러니 전력을 기울여 범인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나? 범인을 잡고, 배후가 있다면 철저히 캐내어 뿌리까지 말살한다. 교도소 안으로 일파를 전부 처넣어 그 안에서 동창회를 하게 해주겠다는 각오로 이 일에 임하도록. 알겠나?”

    “예!”

    서경위가 어쨌거나 진지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간부가 칼에 찔렸다. 이 습격 건을 제대로 다루어야 한다는 심각성은 어차피 익히 알고 있을 터였다. 낙원은 미소를 띤 채로 말을 끝마쳤다.

    “가능한 한 모든 인력을 끌어 모아 이 일에 투입해. 범인을 잡을 때까지 전력으로 몰아붙인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키는 중키에 최근 두 달 간 내 행동반경을 주시하고 있었을 작자다. 내가 카페를 가기 시작한 건 그 즈음이니까. 집과 카페 주변에 맴돈 수상한 작자가 없었는지 잘 봐봐. 꽃집 근처 잠복 팀에게는 그간 별 보고 없었나 체크하고.”

    “예.”

    서경위가 수첩에 마구 휘갈겨 쓰는 동안 김낙원은 웃으면서 이를 갈았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감히 자신을 찌른 놈이 세상을 멀쩡하게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달 간은 오른팔도 쓰지 못할 뿐더러 담배도 피울 수 없었다. 똑같이 칼로 쑤셔주고픈 욕망이 들끓는 마당에 법의 힘을 이용활 바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옭아매야 하지 않겠나.

    아마도 법조계에 남아있는 연수원 동기들에게 연락해 경찰 간부를 찌른 죄를 가산시키면, 전 독재자 딸 뺨을 커터로 그은 놈의 형량 정도는 무리 없이 때릴 수 있을 것이다.

    정신 나간 배후가 있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의 길을 걸을 것이다. 감옥에서 잔뼈가 굵다 못해 발기도 못할 때까지 처넣어주지. 김낙원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런데 경정님.”

    한참 심각한 얼굴로 써내려가던 서경위가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최근 카페를 그렇게 자주 가셨습니까?”

    요즈음 '외근'을 써놓거나 조퇴를 한 적이 많았다는 것을 떠올린 김낙원이 잠시 움찔했다. 그러자 서경위가 그를 잠시, 그러나 충분히 시간을 들여 쳐다보더니 한 마디 하고는 고개를 다시 숙였다.

    “아아, 그래서 찔리셨군요.”

    뭐라고 할 수 없도록 '거기서'라는 말을 아주 약하게 덧붙인다. 의외의 한 방을 먹은 김낙원이 잠시 침묵했다.

    이 녀석, 제법 머리가 컸는데.

    그러나 의외의 한 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시 수첩에 써내려가던 서경위가 고개도 들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그때 경정님이 사정조사 받으시고 나서 돌아오셨을 때 말입니다. 경정님이 칼침을 맞느냐 마느냐로 수사부 안에서 내기가 있었던 건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김반장과 이경사를 비롯한 수사부 전원이 모두 '칼침을 맞는다'에 내기를 거는 바람에 내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던 내기다. 사법경찰 주제에 총까지 쏘는 저 경정이 언젠가 보복을 당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다들 그래서, 그가 돌아온 뒤에 내기의 내용이 바뀌었던-…, 김낙원이 잠시 신음했다.

    “연 내냐 내년이냐로 갈렸지?”

    자판기 앞에 모여 있던 형사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그가 끼어들어 뭐라 했던가. 내 몸은 내가 챙기니 너희들이나 조심하라고, 해가 갈 때까지 먼저 칼 맞는 인간이 커피를 사는 걸로 하자면서 여섯 잔은 얻어먹겠다고 했더랬지.

    “자판기 커피는 안 드시니까 스타벅스에서 밥보다 비싼 커피로 하시겠다면서요.”

    성실한 서경위의 회심의 일격이었다. 꼼꼼히 일지를 쓰는 부하가 수첩에서 내기 날짜를 찾아내 잠시 들어보였다.

    “올 해가 아직 6일이나 남았으니 커피 한번 쏘셔야겠는데요. 아직 수사부 안엔 입원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말입니다.”

    “……”

    커피 값을 아까워하는 게 아니라 '졌다'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걸 충분히 알면서 하는 말이다. 잠시 침묵을 지켰던 김낙원이 중얼거렸다.

    “내 밑에 오래 있긴 했던 모양이야, 서경위. 날 닮아가.”

    그렇지만 이번에도 서경위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아, 저는 외근과 조퇴를 밥 먹듯이 하고 카페에 가 있지 않으니까 괜찮습니다.”

    “……”

    그리고 연속 세 방을 먹인 서경위는 재빨리 수첩을 닫고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족에게 연락은 하셨습니까?”

    낙원은 피식 웃어버렸다.

    “아니. 다들 놀러갔는데 뭐하러 전화를 하나.”

    낙원이 웃으면서 한 말에 서경위가 물었다.

    “그럼 더 올 사람은요?”

    “내일 최검이 온다고 했는데.”

    서경위가 상관에 대한 예의로 물어보았다.

    “그럼 뭐 세면도구라도……”

    낙원이 손을 내저었다. 여기선 그런 건 필요가 없었다.

    “아니, 됐어. 자넨 여태껏 경찰병원만 갔나보지?”

    “예.”

    당연하지 않냐는 얼굴로 서경위가 쳐다보았다. 하기야 경대에 간 놈이 뭐하러 딴 데를 갔겠나 싶긴 했다.

    “왜 여기로 하셨습니까? 아무리 간호사가 예쁘고 친절해도, 경찰병원에 가셨으면 전부 산재로 처리될 뿐더러 우선 실력이 보장되는데요. 도검류 관련 창상은 아무래도 거기가 낫지 않습니까?”

    뭘 모르는 소리를 한다. 낙원은 서경위의 생각을 정정해주었다.

    “여기 의사 중에 아는 놈이 하나 있는데 그러더군. 경찰대에 의대 있는 거 아니지 않냐고. 경찰병원에 들어가는 놈들도 다 다른 데서 연수받고 가는데, 돈 더 주는 이 병원에 지원하는 놈들이 더 실력이 좋은 건 당연한 게 아니냐고 말이야.”

    서경위 얼굴에 '참 유유상종이다'라는 말이 쓰여지는 것을 낙원은 피식피식 웃으면서 지켜보았다. 서경위의 장점은 아무리 꼬이는 말을 들었어도 맞는 건 맞다고 인정하는 면일지도 몰랐다.

    “그렇기도 하군요. 그래서 여기로……”

    “아니.”

    낙원은 싱긋 웃으면서 말을 끊었다.

    “친절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중에선 꽤 값진 것이지.”

    “……”

    회칠된 하얀 벽 대신 따듯한 아이보리색의 벽지로 둘러싸인 병실은 넓고 아늑했다. 침대 옆의 사이드테이블에 놓인 가습기가 몽글한 수증기를 뿜어내고 TV와 냉장고, 개인욕실, 손님용 소파까지 갖추고 있는 병실은 과연 김낙원의 말대로 값진 친절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서경위가 한참을 침묵하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뭔가, 라는 얼굴로 쳐다보는 김낙원 앞에서 한숨의 이유를 밝혔다.

    “아닙니다. 정말로 평소와 똑같으셔서요……”

    “다를 것도 없지.”

    김낙원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대꾸했다. 서경위는 다시 한 번 함숨을 쉬더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내일 오겠다는 말만이 허공에 남았다.

    방문이 닫혔다.

    병실 안에 틀어놓은 가습기 만이 조용하게 하얀 숨을 토해냈다. 서경위가 빠지자 갑자기 한적해졌다. 링거와 함께 투여된 진통제의 효력이 꽤 좋은 모양인지 오른팔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고통은 나중에 올 것이다.

    낙원은 팔 두께만큼 붓기가 오른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서경위가 왜 '평소와 똑같다'고 말했는지는 사실 알고 있었다.

    보통은 이런 일을 당하면 놀라서라도 앓아눕기 마련이었다. 정신적인 충격도 생각보다 커서, 일선의 형사들도 한 번 찔린 뒤엔 날카로운 날이 붙어있는 것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작자들도 꽤 있다고 들었다. 해마다 교통계로 진출되는 놈들이 괜히 있는 건 아닌 것이다.

    오죽 날붙이가 무서워지면 가위를 눌려서 잠을 깨는 걸,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가위'가 무서워서 깬다고 하는 우스갯소리도 여름 괴담으로 돌곤 할까.

    무섭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이었다.

    칼날의 양쪽이 생과 사를 가른다는 이야길, 낙원은 처음으로 몸으로 깨달았다.

    한 순간이었다. 칼이 파고들어오는 데에는 결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초의 깜박임. 그 찰나에 날카로운 흉기가 살을 가르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배를 감싼 오른팔에 박히지 않았더라면 명치를 찔렸을 것이다. 혹, 뼈 사이에 박히지 않았더라도 두 번째로 휘두른 일격이 어디에 박혔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거의 아프다고 느낄 틈도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토록 실감한 적은 없었다.

    범인이 흉기를 빼는 순간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로 의식을 잃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의사는 이야기했다. 보통은 출혈하는 것을 보면서 공황상태가 된다는 이야기도 친절하게 덧붙여서.

    낙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둠 속에서 흐려지는 시야로도 선명하게 느꼈던 점성어린 액체를 떠올렸다. 팔이 뜨끈, 해지는 순간 시꺼멓게 보이는 액체가 손가락 끝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귀에도 들렸던 투둑, 투둑, 하고 비오는 듯 했던 그 소리. 아니, 귀가 아니라 몸으로 들은 것 같은 그 소리.

    ……놈은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낙원은 목화를 떠올렸다. 처음으로 놈이 그토록 말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놈의 배에는 세 개의 상흔이 있었다. 셋 다 목숨을 앗아갈 뻔 했던 치명적인 상처였다. 놈은 매번 찔리고, 그때마다 공포와 싸워가면서, 그 공포를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스스로 정신의 어딘가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을 것이다.

    어떤 공포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도록. 혹은 그런 것을 느끼면 입을 다물고 견디도록.

    그리고 그렇게 모든 상처를 '없는 것처럼' 넘기면서, 뜨거운 쇳물에 몇 번이고 넣었다. 식히며 담금질한 쇠처럼 단단한 갑옷을 스스로의 정신에 입고 또 덧씌웠겠지.

    그렇게 해서 놈은 무기질의 '뿔'이 된 것이다.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고 파고들 틈을 주지 않는 미친 소의 뿔이.

    일선의 형사들이 놈의 눈매만으로도 사람 같지 않은 새끼라고, 살아 숨 쉬는 것 같지 않다고 치를 떠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흉터를 지니고도 또 찔려가면서도 놈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십년 넘게 행동대장 노릇을 해왔던 것이다.

    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최소한 그 쇳물의 정체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음매 하나 보이지 않는 강철 같은 등을 그는 떠올렸다.

    가끔 손 하나 내려놓기도 저어되어, 외려 더 강하게 꽉 쥐어보곤 하던 단단한 어깨를.

    “……”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

    낙원은 웃었다.

    그는 그 어깨 위에 붙은 놈의 목덜미가 얼마나 여린지 알고 있었다. 등이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앞으로 돌려보면 그저 묘하게 여자에게 약한 탓에 흥정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박목화가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알아온 박목화의 여러 모습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버릴 수 있는 모습들.

    놈이 누님에게 약한 것은 진짜였다.

    굳이 그렇게 자학적인 증명까지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상처 입혔을 때만 떠올려도 놈의 갑옷 안의 진실은 분명했다. 놈은 분명 정에 약했다. 칼은 꽂히지 않더라도 호의는 배에 꽂고 몇 년이고 버틸 녀석.

    아아 그래.

    좀 움직일 만해지면, '네 놈이 같이 가주지 않아서 다쳤다'고 하고 가봐야겠다. 김낙원은 그 생각을 하고 싱글싱글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놈에게 밥 한 끼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고 나서 이번엔 범인 찾기에 도움 좀 청해봐야지.

    경권과 조폭 공조 수사다. 이 몸이 다쳤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낙원은 웃으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이미 도망간 김갑선 잔당이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꽤 빨리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최검이 왔다.

    둔한 덩치로 밖에서 인기척도 내지 않고 무거운 문을 살그머니 열고 안을 들여다보던 최검이 낙원과 눈이 마주쳤다.

    병실 문을 반 정도만 열고 붙잡고 선 최검이 아침 햇살 아래 미소 짓는 김낙원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멈칫 했다가, '괜찮냐,'고 물어보려 했을 때였다.

    “너 괜……”

    채 한 마디도 떨어지기 전에 김낙원이 빈정거렸다.

    “이 시간에 내가 잘 줄 알고 왔지?”

    '아침에 왔다갔다'로 면죄부를 삼으려 했던 최검이 속내를 찔려 움찔했다.

    “아니 너 말이다. 내가 출근하기 전에 들른다는 하드한 스케줄을 세웠을 땐 좀……”

    그러나 김낙원은 변명 따위는 한 귀로도 듣지 않았다.

    “어라, 너 또 살쪘냐?”

    아픈 곳을 불시에 찔러왔을 뿐이다. 담배를 끊고 살이 더 오른 최검은 갑자기 대답이 궁해졌다.

    “아니 그게……”

    낙원이 싱글싱글 웃었다.

    “그러게 휴일에 임신한 마누라 해달라는 대로 장모님 댁 가서 해주는 대로 다 받아먹으니까 그렇게 되지. 엉덩이가 무거우면 다 그렇게 되는 거야.”

    “……”

    최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다음날 왔으니 좋은 소리는 못들을 거라 생각하고 아침 일찍 온 거였는데 일어나서 기다릴 줄은 몰랐다.

    김낙원이 다쳤다고 김낙원이 아닌 게 아니지.

    “미안하다. 연락 받고 어제 안 와서.”

    “아니 누가 뭐랬냐.”

    그러나 낙원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양 쳐다보았다.

    “네 사건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어딨겠어? 아니 뭐, 좀 놀라긴 했지. 결혼하면 다 지 새끼에 마누라밖에 안 보인다지만 그래도 어떻게 친구가 죽어가는데 얼굴 한번 안 비치나, 응.”

    혀를 쯧쯧 찬다.

    “찔렸다고 했더니 '잠깐만, 오늘은 곤란해'? 야 진짜 그럴 줄은 몰랐어. 네 인간성을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래도 친구는 친구라고 속으로 좀 찔렸던 최검이, '인간성' 소리가 나오자 참지 못하고 반격했다. 김낙원에게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 어젠 크리스마스라서 검찰가족 자선파티까지 내정되어 있었다고. 희경인 그것 때문에 화장한다고 미용실 예약까지 해놓고 임산부 호흡요가인가 뭔가를 같이 하자는데 어디로 몸을 빼냐, 내가. 그래도 난 여기 병원 전화를 걸어서 그 네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의사랑 통화도 하고 다 알아봤다. 칼도 팔로 막았는데 팔도 나중에 붕대 풀면 된다고 괜찮다고 하더라. 내가 솔직히 너한테 인간성 소리 들어야겠냐?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최검은 쌓아놨던 말을 한 번에 쏟아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건 저 놈이 너무한 일이었다.

    세상에 저 김낙원에게서 인간성 운운소리를 듣다니, 한 집안의 가장이자 곧 태어날 동우 아버지가 그런 금수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해도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임신 7개월, 부성애가 최대치로 살이 올랐을 때였다. 아버지의 저력에는 김낙원도 후퇴했다. '내 인간성이 네가 이렇게 나올 정도냐'라고는 도저히 비꼴 수 없었던 탓이다.

    김낙원은 인정했다.

    “뭐, 입장 바꿔서 나라면 꽃다발 사들고 바로 갔지. 놀려주려고.”

    솔직한 말에 최검이 한숨을 내쉬었다. 김낙원 얼굴을 쳐다보다, 그리고 또 한 번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쨌거나 멀쩡해보여서 다행이다.”

    어째서 이런 걸로 무사를 확인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김낙원이 속으로 투덜거릴 때였다. 그래도 못내 그 '인간성'이 가슴에 맺힌 모양인지, 최검이 반격에 나섰다.

    “그런데 아까 그 얘기 말이다, 너 같은 놈도 안 찔리고 사는데 찔리냐고 인간성 알아보겠다고 놀려준단 소리지?”

    놈치고는 정확하게 포인트를 집은 반격이었다.

    실제로 그랬을 김낙원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최검이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너, 1년 전 연수원 동기생 모임에서 니왔던 얘기 기억하냐? 너 같은 놈이 칼침 하나 안 맞고 서른 살 넘기는 건 솔직히 너무한 거 아니냐고 희락이가 농 반 진담 반으로 했던 얘기.”

    “……”

    기억했다. 최검이 말을 이었다.

    “그때 네가 뭐라고 했냐? 세상에 인과응보라는 건 없다고, 우리가 잡는 건 다 조무래기들이라면서 너한테 통용되지 않는 걸 보라고 비웃었지?”

    참 그 동안 여기저기 씨앗을 잘도 뿌려놨었군. 김낙원이 속으로 혀를 찼다.

    서경위만큼이나 꼼꼼할 뿐 아니라 억울한 일은 절대 잊지 않는 최동훈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울분을 토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는 동기들이 흉악범들한테 앙심 품은 보복전화 받으면서 마누라한테 구박받을 때, 넌 서류 몇 장 써주고 형사들이 잡아오는 거 구경만 하겠다고 했지? 맨날 우리들이 야근하다 책상에 코 박고 자서 축농증 생길 때, 넌 한직에서 놀러 다니면서 봄이면 꽃구경이나 하겠다면서.”

    잘도 기억한다. 꽤나 맺힌 모양이었다.

    “그때가 나 강력부에서 한창 보복전화 받고 있을 때야. 집에 돌아가면 희경이가 이혼하자고 난리치지, 무기징역 처음으로 구형했던 진수 놈은 밤잠도 못 자고 그 범죄자 가족한테 시달리고 있었어 야. 내가 너한테 그 소리 듣고 진짜 세상 허망해서 희경이가 원하는 대로 과도 바꿨다.”

    과거를 떠올린 모양인지 최검이 씩씩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너 칼 맞았다는 전화 받는데 그때가 퍼뜩 떠오르더라. 사람 다쳤는데 그런 생각한 게 미안하긴 했는데, 너 아는 사람들 좀 다 붙잡고 불어봐. 너 칼 맞았다고 하니까 누가 놀라든?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고 다들 그러지 않어? 너 다친 거 희락이랑 진수한테 얘기하면 아마 정의가 살아있었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할 거다. 좀 너 여태껏 살아온 게 후회 안 되냐?”

    후회는, 칼 맞은 게 후회다.

    낙원이 속으로 생각했지만, 이미 수사부 내에서 내기가 성립이 안 된 역사가 있으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낙원은 그냥 아무 말 않기로 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최검이 훈계조로 말을 끝마쳤다.

    “너 이젠 좀 사람답게 살아봐. 인간성 좀 키워보라구.”

    그리고 거의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퍼부어본 최검은 그가 뭐라고 하기 전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럼 나 출근하러 간다. 저녁때 보자-”

    살이 더 오른 몸으로도 잽싸게 문을 열고 빠져나가면서 손을 흔든다. 어차피 그래봤자 저녁에 올 테니 그때 잡으면 그만이었다.

    자신을 찌른 범인에게 이가 갈렸다.

    그리고 5분 뒤, 담배를 찾으면서 습관적으로 서랍을 열었었던 낙원은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병원 창 너머로 보이는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을 무렵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나란히 들어온 건 서경위와 최검이었다. 둘 다 퇴근하고 바로 왔는지 약간 구겨진 양복 차림이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하루 종일 안 심심하든?”

    동시에 묻는 인사에 낙원은 둘을 힐끗 쳐다보았다.

    “언제 알았다고 같이 오냐.”

    “아, 최검사님과 저는 퇴근시간이 비슷하니까 주차장에서 뵈어서요. 그렇게 됐습니다.”

    여전히 '조퇴를 밥 먹듯이 하고 카페를 갔다'는 것에 앙심을 품은 듯한 발언이었다. 오래 가는군. 낙원은 픽 웃어버렸다.

    “그 카페 주차장 근처를 수색은 했습니다만, 흉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고는 해도 시간이 워낙 늦어 있었고 경찰보다는 구급차가 더 빨리 현장에 도착했던지라, 범인이 흉기를 지닌 채 도주했을 가능성도 꽤 있다고 여겨집니다.”

    서경위가 그 간의 진행상황을 보고했다.

    “다행히 개방형주차장인데도 불구하고 CCTV가 달려 있더군요. 현재로서는 테이프를 회수해서 검토 중입니다만,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고 어두웠기 때문에 몽타주를 만들기에는 난점이 많아 보입니다.”

    “나도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 다른 곳에서는 어때.”

    낙원의 물음에 서경위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경정님 아파트 주변은 경비 시스템이 철저해서 한 시간씩만 서성거렸어도 이틀 만에 신고가 들어갔을 것 같더군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외부로 향해있던 CCTV테이프를 두 달 전부터 가져왔습니다만, 아직 검토 중입니다. 꽃집 쪽 잠복 팀에서는 경정님 외에 그 근처를 서성거린 수상한 사람은 전혀 없답니다.”

    하긴 교대로 박광우가 언제 오나 눈 크게 뜨고 살폈을 놈들이 15분만 서성거려도 검문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현재는 20cm가량의 흉기에 주안점을 두고 폭력사범 중에 최근 석방된 자나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 자를 수색중입니다만……”

    꽤나 빨빨거리고 돌아다녔겠군. 성실한 보고에 알았다고 낙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경위가 사무적으로 말을 마쳤다.

    “주차장 보안이 허술한 것을 이용한 단순강도일 가능성도 배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김낙원이 피식 웃었다.

    “카페에 여자가 얼마나 많이 드나드는데 상식적으로 강도가 나를 노리나.”

    최검 역시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저 놈에겐 인과응보란 거지. 개인적인 원한관계는 체크해봤나?”

    아무렴 개인적인 원한으로 그런 계획범죄를 저지르겠나. 아침에 아무리 맺혔더라도 수사방향 흐리지 말라고 낙원이 말하려던 때였다.

    서경위가 둘을 힐끗 바라보더니 수첩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CCTV검토를 해보자 범인은 한 시간 전부터 기둥 뒤에 숨어있었더군요. 그 시간을 잠복해 있다가 칼을 들이댈 정도로 강한 원한관계는 흔한 것은 아닙니다. 일선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는 형사도 아니고 경정님 같은 사법경찰간부가 그런 경우는 거의 없기도 하고요. 단지,”

    “단지?”

    김낙원의 물음에 최검이 웃으면서 물었다.

    “저 녀석한텐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놈이 너무 많다는 거지?”

    서경위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김낙원이 침묵했다.

    농담 같지만 농담이 너무 많을 때에는 진실이 섞이기도 하는 법이다.

    “두 달 전부터 사건 당일까지 경정님의 행동반경을 따라다니면서 알았다기보다도, 이미 경정님이 그 카페를 드나들고 있다는 걸 안 사람의 소행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날 경정님이 카페에 계신 걸 알고 있었거나 짐작 가능했던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서경위의 질문에 김낙원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마흔 셋.”

    서경위가 잠시 놀란 얼굴을 했을 때였다. 어떻게 그렇게 많으냐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최검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설마 그 날 또 그랬어 응?!”

    김낙원이 불유쾌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 우울해서 인맥관리 좀 했다.”

    '으어 또-' 최검이 머리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야 내가 그러지 말랬지. 백주대낮에 도로에서 칼 맞는다고. 서경위, 이번 건 저 놈 탓이야, 확실해!”

    서경위가 놀라서 되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인맥관리라는 게 뭔데요?”

    최검이 한참을 '인과응보야', '원한이 하늘에 닿았던 게야' 등등 미신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동안 김낙원이 간단히 설명했다.

    “옛날에 알던 인간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놀아주는 거다.”

    “……?”

    최검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 놈은 말야, 풍물패인지 락밴드인지 대학 때 알던 사람부터 죽 전화를 돌리면서 약을 올리는 게 취미란 말야. 그런 걸 '인맥관리'라고 부른다고. 운동권하다 철도노조하러 들어간 그 선배한테 또 전화했지? 밴드하다 양육권까지 뺏긴 녀석한테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또 전화 때린 거 아냐, 엉?”

    낙원이 싱긋 웃었다.

    “너 카페에 있단 걸 다 안다는 걸 보니 일에 치여서 이혼조정 중이라는 진수한테까지 전화했구나. 한가해서 놀러 나와서 카페 있다 그랬지? 야- 뻔하다 뻔해.”

    최검이 억울한지 삿대질을 했다.

    “난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3학년 때 자원봉사 다니다 사시 1차 떨어진 날 네가 나한테 전화했던 거. 너처럼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닌데 한 우물도 못 파면 어디다 쓰냐고, 진짜 가슴이 턱 막히는데……”

    김낙원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을 끊었다.

    “덕분에 붙었잖냐.”

    최동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억울한 걸 가슴에 얹어두는 놈이 그런 이야길 들었으니 당장 다 때려치우고 처박혀서 공부했지, 그러지 않았다면 최검이 아니라 최선생이 되어 헌법 학원 강사라도 하면서 때마다 그의 전화를 받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검이 중얼중얼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기지만 악인은 놓치지 않는다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서경위가 한 마디로 정리했다.

    “원한을 먹고 사시는군요.”

    놈들이 칼 들고 기다리다 찌른 수 있을 리가 있나. 낙원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을 느끼면서 정정했다.

    “하늘 보기 바쁜 놈들이야. 그럴 인간들도 못 돼.”

    보복을 할 수 있는 놈은 애초 전화도 받지 않는다. 이상(理想)을 쫓다 지 발밑도 못 본 인간들은 뭐가 그렇게 고상하신지, 그가 속을 긁어놓을 걸 뻔히 알면서도 '아아, 너냐…'하고 말꼬리를 길게 끌면서 전화를 받곤 했다. 속으로는 저어되면서도 고매하신 인격에 딱 끊지도 못하는 것이다.

    꼬리를 끊고 도망가는 도마뱀도 못 되는 놈들이 발톱을 갖고 있을 리가 있나.

    그런 놈들이 무슨 칼을 든다고.

    낙원은 피식피식 비웃었다.

    그러자 조금은 유쾌해졌다. 그래도 그간 서경위가 제법 머리가 굵어진 모양이었다. 훌륭한 반격을 했다.

    “어쨌든 찔리셨지 않습니까. 핸드폰 사용내역 조회를 해본 후 43명에 대한 기본 조사 들어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놈, 제법 컸다.

    김낙원이 웃으면서 지시했다.

    “그 시간에 카페를 찾아내서 주차장에서 칼 들고 기다리기엔 생활력이 모자란 놈들이라서 말야. 정 의심스러우면 기본 조사를 하겠지만 영장 신청해도 불구속 나올 놈들이니 일단은 내버려둬. 우선은 흉기수색이 먼저다.”

    “알겠습니다.”

    김낙원은 이야기가 끝날 때면 언제나 그러했듯 자연스럽게 손을 서랍 쪽으로 향했다가,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손을 거둬들였다. 빨리 잡아야지. 잡고 나서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주고 말테다.

    그 동안 최검과 서경위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서 안에서 말입니다. 다들 커피를 먹겠다고 아우성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나도 연수원 동기 놈들한테 전화를 돌리니까, 다들 사건 듣는다고 송년회에 한 놈도 빠지지 않고 온다고 그러더라고.”

    그리고 평소 잘 알지도 못했던 서경위와 최검이 즐겁게 웃는 것이었다. 저 놈들 남 얘기로 왜 저리 쿵짝이 잘 맞아?

    하하하 소리에 어쩐지 심사가 비틀린 김낙원이 '첫 눈에 반했냐, 호모냐?'라고 말을 툭 던지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박목화가 떠올랐던 탓이다.

    내 허물이 없어야 남에게 뭐라고 하는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나도 많이 약해졌어.”

    낙원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통 이렇게 인정을 하면 기분이 나아진다는데, 더 불쾌해지기만 할 뿐이군.

    문득 조용해서 돌아보자, 옆에서 떠들고 있던 최검과 서경위가 어느새 입을 다문 채 해연히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아프냐? 아프지?”

    최검은 너스 콜이라도 누를 기세였다.

    “나 사실 네가 나한테 별 말 없을 때부터 좀 불안했어. 그래, 아무렴 너도 사람인데 칼침을 맞고도 제정신이겠냐.”

    최검의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자 기분이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김낙원은 싱긋 웃으면서 부정했다.

    “그래, 약해졌지.”

    다른 방향이었지만 꽤 효과가 있었다. 최동훈의 얼굴이 '약하다' 소리에 질려가는 걸 보면서 김낙원은 충분히 즐겼다.

    서경위가 중얼거렸다.

    “역시 이런 게 무서워서 다들 안 움직였나 봅니다……”

    “그건 무슨 소리야?”

    김낙원이 묻자 서경위가 잠깐 사이에 맺힌 땀을 훔치면서 대답했다.

    “아침에 가니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고 다들 좋아하더군요. 그러면서 경정님이 누워 있는 걸 직접 보고 한 마디 해줘야 하는데, 하길래 오늘 같이 가자고 권했지요. 수사부를 차려도 될 정도로 경정님 병실 넓더라고. 그런데 막상 움직이지는 않더라고요.”

    “그리고 자넬 응원만 하더라?”

    “……예, 그렇습니다.”

    서경위가 하는 수 없이 인정했다.

    오지 않은 놈들은 평소 같을까봐 두려운 것일 테지만, 칼에 찔려도 평소와 같다고 안심한 이 둘에겐 아무래도 찔려서 약해졌다는 게 더 호러인 모양이었다.

    김낙원이 싱긋 웃었다.

    “퇴원은 1주일 안으로 한다고 전해. 그 뒤엔 내가 직접 날 찌른 놈을 잡아줘야 하지 않겠나. 커피 한 잔으로 다들 연초에도 일하게 생겼군.”

    1주일 뒤라면 설날이었다.

    서경위가 그 심술에 역시 평소와 같다고 판단을 했는지 어쨌는지, 묘하게 안심이 되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 진척되면 알려줘.”

    이렇게 검경이 손발이 맞는 일이 또 있을까. 김낙원이 웃었다.

    어제 놈은 오지 않았다.

    오후 5시. 바깥에선 퇴근이 시작되었는지 웅웅대는 방송과 함께 사람들이 계단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꽃집 안으로는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 유리창 밖을 바라보던 목화가 다시 시선을 가게 안으로 돌렸다.

    “……”

    정적이 흘렀다. 가게 안은 조용했다. 커다란 꽃 냉장고가 토해내는 간헐적인 소리만이 가게 안을 울렸다.

    혼자였다.

    날이 추운 탓인가. 가게 안이 싸늘했다. 혼자라는 독기는 오랜만에 쐬는 만큼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목화는 전철에서처럼 어깨를 떨어냈다.

    반년 여, 놈을 보지 않고 지나간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목화는 잠시 놀랐다. 녀석은 매일같이 여기로 출퇴근을 찍었던 것이다.

    퇴원하고 꽃집으로 오면서도, 납치까지 당했던 정애누님 생각에 정말 여기로 와도 되나 고민하던 그를 놈이 '돌아오라'라고 했던 그 날 이후로.

    그런 말을 한 것은 놈이 처음이었다……

    그때였다.

    짤랑, 하고 열리는 문소리에 목화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문을 연 것은 인사를 하러 온 요구르트 아주머니였다.

    “아우, 추워. 나 이제 가-”

    목화는 짧게 한숨을 쉬면서 인사했다.

    “예,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돌아보았다.

    이 반 년 동안 놈은 갈 때마다 그가 듣건 말건 다음 날 무슨 일이 있는지 언제쯤 올 건지 혼자 떠들고 갔다. 그리고 늦어지면 여기로 오는 게 당연하다는 양 전화를 하거나 문자라도 남기곤 했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던 목화도 어느새 놈이 늦으면 한번쯤 전화기를 흘끗 쳐다보게 되었다.

    아무 필요가 없이 책상 한구석에 놓여있던 전화기가 놈이 전화를 거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활력을 얻었다. 이브 날 핸드폰을 고기 집까지 챙겨갔던 것도 그렇게 생긴 습관이었다. 그러나 전화는 받지 못했다.

    놈은 전화를 해서 뭐라고 말하려 했던 것일까.

    그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떠있지 않았다. 통화 목록을 눌러보면 부재중 통화로 남아있는 놈의 이름만이 떴다.

    <낙원>

    이렇게 놈이 온다고 하고 연락도 없이 오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

    전화를, 해볼까.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박목화는 그러나 결국 다시 핸드폰을 닫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쥔 채 목화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꽃집 안은 조용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 외에는.

    그는 핸드폰을 쥔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놈에게 전화를 하는 게 좋을 지, 아니면 그냥 기다리는 게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기다리는 것은 익숙했다. 단지 기다려도 소용이 없을 때가, 더 많을 뿐이다.

    목화는 핸드폰을 다시 열었다. 통화 목록을 눌렀다. '낙원'이 떴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목화가 잠시 손을 멈추었다. 몇 초가 지나자 화면이 꺼졌다. 거울처럼 어두워진 화면을 내려다보던 목화가, 결국 핸드폰을 닫았다.

    와도 안 와도 놈의 마음이었다. 기분이 나빠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 놈에게 강제를 할 수는 없었다.

    좀 더 기다려보지.

    마침 바깥에 서성거리던 손님이 보여, 목화는 핸드폰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멈칫하다, 다시 핸드폰를 집어 주머니에 넣고 나갔다.

    “어서 오세요-”

    ……일주일 동안 박목화에게선 전화 한 번 걸려오지 않았다.

    김낙원은 핸드폰을 열었다. 그간 전화 걸려 온 목록엔 다 서경위와 수사부 뿐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는 핸드폰을 도로 닫았다.

    “짐은 이게 답니까?”

    고용한 간병인이 충전기와 새 양복이 든 종이가방을 들고 묻고 있었다. 김낙원은 사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퇴원일이 될 때까지 찾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여기 옷 좀.”

    김낙원의 말에 간병인이 와서 스웨터 팔을 걷어주었다.

    서경위를 시켜 단골 양복집에서 새로 맞춰온 셔츠는 오른팔에 두껍게 댄 붕대와 고정기 탓에 한쪽 팔을 아예 낄 수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오게 한 스웨터는 서경위가 신묘하게도 잘 골라온 덕에 그나마 입을 만은 했지만, 팔은 계속 접어 올려야 했다. 실려올 때 입었던 건 모두 피범벅이라 구두까지 전부 증거물로 보낸 뒤였다.

    그 날 꽤 아끼는 구두를 신었던 게 아까울 뿐이었다. 이탈리아로 본을 떠서 주문을 넣고 받는 방식의 수제화니 다시 만들려면 두 달은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피에 젖은 채 증거물로 보관되어 있던 걸 다시 신을 수가 있나.

    낙원은 범인을 족치고 싶은 마음에 이를 갈았다.

    “다 준비하셨나요?”

    간병인이 물었다. 준비가 끝난 김낙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말로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였다. 그를 감히 칼로 찌른 게 누군지, 그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역시 비공식적이긴 해도 놈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편이 좋을 테지. 그렇게 생각해놓고도 그는 스스로가 우스워 짧게 웃고 말았다.

    단지 그런 핑계를 대고서라도 놈이 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간병인이 짐을 챙겼다.

    “차 대놨습니다. 가시죠.”

    바깥은 생각 외로 추웠다. 병원 로비를 나가자 찬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병실에서 겨울을 망각했던 김낙원이 이 해 마지막 날에 병원을 나섰다. 로비에는 '해피 뉴 이어'라고 쓰인 반짝이 전구가 달려 있었다.

    이브에 들어왔으니 오늘로 일주일 째였다.

    일주일 동안이나 놈을 보지 못한 것은 사정조사를 받은 뒤로는 처음이었다.

    문득 조사받을 때의 그 미칠 듯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오른팔이 부자유스러워서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상처 입혔던 것은 살면서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지 않았느냐고, 낙원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갈 수 있을 때 가는 거라고.

    반년을 매일같이 드나들었는데, 일주일을 사라진 동안 놈은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어제는 심지어 서경위에게 꽃집 쪽에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느냐고 물어보기조차 했다. 혹여 박광우가 놈을 불러냈나 싶어서다. 그러나 서경위에게서는 아무 이상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남의 일이었다면 비웃으면서 반년 동안 개를 키웠어도 찾으러 나가보지 않느냐고 약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 되자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처럼 비웃던 말이 없는데도, 불행히도 그러했다.

    보통 상대가 이 정도로 반응이 없으면 포기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연애에 골병드는 놈들을 볼 때마다 혀를 차면서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집착이라고 말해왔던 그였다. 그런데도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변명은 그 중에서도 가장 우습게 생각했던 말이었다.

    상대가 봐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바로 그 소리.

    최동훈의 재수 없는 '인과응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김낙원은 그 순간 이마를 찌푸렸다.

    “어느 쪽으로 갈까요?”

    그러나 운전을 해야 하는 간병인이 물어왔을 땐, 김낙원은 박목화가 있는 꽃집으로 가고 싶다는 스스로의 욕망을 자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공동 쪽으로.”

    빌어먹을. 낙원은 스스로에게 뇌까렸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다.

    “거기가 댁이신가요?”

    “……아니.”

    친구가 있다고 하려던 낙원이 입을 다물었다. '친구'라고 해도 싫어할 일이지만, 그나마는 될까 싶어서였다. 가상이긴 해도 키우는 개만도 못하고, 누님이 보낸 꽃보다도 못한 자신이 과연 친구씩이나 될까.

    “아는 놈이 있어서.”

    그래서 그는 씁쓸하지만 그렇게 뇌까렸다. 운전을 하던 간병인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브에 미안하다는 이야길 들었을 땐 최소한 놈이 자신을 일상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나마도 이 일주일 간 알 수 없게 되었다.

    놈에게서는 전화 한 통 없었다.

    하다못해 전철역사 여직원이나 요구르트 아줌마라고 해도 일주일이나 보이지 않으면 걱정을 했을 놈이었다.

    아, 물론 그네들은 나와는 다르겠지. 그쪽은 여자니까 말이야.

    생각할수록 불쾌해져, 낙원은 비틀리게 웃고 말았다. 자신이 무엇을 질투하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여자에 사람인 아줌마는 제쳐놓고라도 첫 번째의 비교대상은 키우지도 않은 가상의 개에, 두 번째는 꽃 더미가 아닌가. 그것도 팔라고 보낸 꽃 더미.

    그만큼 자신의 위치가 낮다는 소리다. 자각하자 웃음이 흘러나왔다.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실소였다.

    이래서야 협조를 요청한다 해도 놈이 받아들여줄 지는 의문이었다.

    과연 놈이 움직여줄까. 자조적으로 생각했던 낙원이 뒷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그래도 최소한 그 핑계라면, 놈이 왜 왔냐고 해도 할 말은 있지 않겠나 싶었다.

    아니, 왜 왔냐고 물어보는 것보다 왔냐고 한 마디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두려웠다.

    두렵다는 감정이 과묵에도 치밀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아예 아무 흥미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군. 사실 그 날 미안하다고 했던 것도, 자신이 끌고 가니까 귀찮아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닐까. 거기에서 낙원은 생각을 멈췄다. 자신답지 않았다. 어차피 결론은 나 있는 것이다.

    갈 수밖에 없다고.

    ……녀석을 보러.

    낙원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31일이라 그런지 차가 많았다. 길이 막혀서 생각할 시간이 쓸데없이 더 많아졌던 것 뿐이다.

    김낙원은 생각을 전환했다. 놈이 무심한 걸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계속 얼굴을 내밀고 약한 거미줄이라도 지속적으로 치겠다는 결의를 굳힌 이상, 놈이 뭐라고 하건 뭐라고 하지 않건 간에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가야 했다.

    그러니 우선은 놈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솔직하게 기뻐하도록 하자- 일주일간 보지 못했던 녀석이 아닌가. 이 해 마지막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어디냐. 그는 스스로를 달랬다.

    하얀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그고 단단한 등을 편 채 일하고 있을 놈을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눈이 가늘어졌다.

    그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본 건 오로지 그 뿐이리라. 눈으로 보이는 단단함과는 달리, 손을 뻗어 만져보면 놈의 피부는 예상 외로 부드러웠다. 눈과 손으로 보고 만졌던 흉터를 그는 선명하게 떠올렸다.

    이봐, 나도 찔려봤어. 우습지만 그렇게 김낙원은 속으로 말을 걸었다. 너를 담금질한 쇳물이 뭔지는 알 것 같다고. 그렇지만 그 칼날보다 나에겐 네가 더 무섭다고도, 그는 속으로 이야기했다.

    입 밖으로는 절대 내지 않을 소리지만, 조희용에게 쓰러진 놈을 보았을 때만큼 가슴이 조여 온 적은 달리 없었다. 이번의 습격보다도 그때를 떠올리는 쪽이 더 숨이 가빴다. 그리고 우스운 이야기지만, 일주일 만에 찾아간 자신에게 놈이 어떤 얼굴을 할까를 생각하면 심장이 뛰었다.

    단순히 놈의 얼굴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두려워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동기 면에서는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걱정은 바라지도 않으니 공조 정도는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야.

    “소공동에서 시장 쪽으로 꺾어서.”

    “예.”

    히터를 켰어도 조금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창밖을 보고 있던 김낙원의 지시에 따라 차가 역사를 따라 빙 돌았다.

    차를 대지 말고 가라고 하자. 보통 김낙원처럼 운신이 부자유스러울 경우엔 집 앞에 도착해도 반드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안까지 데려다주는 간병인이 놀라서 물었다.

    “정말 여기서 내리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간병인이 걱정되는지 차를 대면서도 덧붙였다.

    “집안에서 필요하시면 다시 부르세요. 명함하고 핸드폰은 코트 주머니 왼쪽에 넣어뒀습니다. 두 시간 정도 뒤에 병원에서 연락이 갈 테니 명함을 잃으셨어도 그때 또 도우미를 요청하시면 됩니다.”

    간병인의 말에 낙원은 대강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간병인이 차를 세우고 나와서 문을 여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왼손으로 문을 열고 내렸다.

    다친 건 오른팔이었다.

    당연히 혼자선 불편했다. 그렇지만-

    “저기에 도와줄 사람이 있으니까.”

    도와주게 만들 테니까.

    김낙원이 속으로 그렇제 중얼거렸다.

    탕, 문을 왼손으로 세게 닫고 거리에 서자 찬바람이 불었다. 한쪽 팔을 낄 수 없어 어깨에 얹은 코트가 바람에 나부꼈다. 방한복으로서의 구실을 전혀 못하는 코트를 왼쪽으로 끌어당겨 습관적으로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김낙원이, 익숙한 담뱃갑을 찾지 못하고 잠시 이마를 찌푸렸다.

    어차피 항생제 투여중이라 피울 수 없다는 사실은 뒤늦게 깨달았다.

    담배가 없는 병원길이라니, 두부가 없는 퇴소보다 더 심심하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계단을 올라간 김낙원이 꽃집의 유리문을 보고는 멈춰 섰다.

    가슴이 분명 답답했는데, 지금도 놈의 반응을 상상하면 조여 오는데, 그런데도 저 안에 있을 놈을 떠올리자 얼굴이 저절로 움직여 웃음을 만들었다.

    참 죽을 지경이었다. 담배만 한 대 있으면 비웃어보겠는데.

    김낙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결국 웃고 말았다.

    일주일 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놈은 저 안에 있을 것이다.

    “……”

    어떻게 하면 더 아파보일까.

    목에 감은 고정기에 싸여있는 오른팔을 내려다보면서 김낙원은 고민했다. 효과적으로 아파보일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약하다'는 것도 꽤 쓸 만한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병원에서 새로이 깨달았으니 이제는 그게 가장 필요한 상대에게 써먹어야 할 때였다. 박목화에게 쓸 게 아니라면 언제 써먹겠나.

    유리에 비친 얼굴은 창백했다. 일단 안색에는 만족했다. 기왕이면 오늘 아침만이라도 면도를 시키지 말 걸 그랬나, 김낙원은 생각했다.

    스웨터도 코트도 너무 새것인 듯 했다. 그나마 왼손으로 머리를 대강 헝클어놓은 김낙원이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고는 실소했다. 하다하다 못해 놈에게 동정심이라도 유발하려는 자신이 그토록 우스울 수가 없었다.

    나도 갈 데까지 갔군.

    김낙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뭐가 되었든 정애가 보낸 꽃보다도 못했던 그 날보다 더 비참할까.

    놈의 시선을 조금 더 끌기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느끼게 해서, 녀석이 자신을 도와주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였다.

    혼자 집에 가서 간병인을 부르기는 죽어도 싫었다. 놈이 한숨을 내쉬고 물 한잔만 가져다준다면 다친 보람이 느껴질 듯 했다.

    그 동기가 동정심이라도 무슨 상관이랴. 놈이 옆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는 무의식중에 싱긋 웃었다. 그리고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잠깐 놀랐다. 웃는 그 순간만큼은 본색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혈색이 좋다 못해 흐트러진 머리카락마저 놀러가는 차림 같았다. 아무래도 아파보이도록 웃는 연습이라도 해야 할 모양이다.

    딸랑, 왼손으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김낙원은 스스로에게 약하다고 최면을 걸었다. 평생 처음 해보는 약한 척이었다.

    “잘 있었냐.”

    낙원이 최대한 아파보이게 웃으면서 놈에게 인사했다.

    연 일주일째, 녀석은 오지 않았다.

    내일 오겠다던 놈이 크리스마스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날 이후 발길을 뚝 끊은 것이다.

    크리스마스 당일 혹시 사고가 있나, 라고 중얼거린 목화에게 '형님, 사고가 있었다면 그 놈은 형님한테 잽싸게 전화해서 아프건 말건 징징거릴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쇼.'라고 말한 것은 원일이였다. 일정부분 진실을 꿰뚫고 있었던 그 말엔 힘이 있었다.

    “요즘 그 총각 안 보이네.”

    아침에는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춥다고 가게 안에서 동동거리면서 한 마디 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요즘 심심해'라는 소리도 덧붙였다.

    “그 총각이 언제부터 왔더라……”

    '난 자리'라.

    밥을 시킨 식당에서 '정말 오랜만에 시키시네요'라고 이야기했을 때의, 그런 것?

    목화는 짧게 웃고 말았다.

    “요즘은 바쁜 듯합니다.”

    목화가 전화를 하지 않는 놈을 대신해 대답했다. 그러자 손님이 올까봐 유리문 앞에서 서성대며 바깥을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물어보았다.

    “바빠? 그 총각은 드디어 백수를 벗어난 거야?”

    목화는 침묵을 지켰다.

    놈이 그동안 어떻게 신경을 써주었는지 느꼈던 것은 그런 사소한 말을 들을 때였다.

    꽤 긴 시간 동안 놈은 내내 있는 집 한량이나 백수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소속을 밝히지 않았다. 놈이 말을 했더라면 계속 경찰이 드나드는 꽃집에 대해 역사 사람들이 보는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놈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청년백수 실태에 대해서 고충을 토로하고 대통령 욕을 두어마디 섞을 뿐이었다. 천연덕스럽게 백수 노릇을 한 놈은 역사 여직원이나 아주머니에게 불쌍하다며 과자니 차니 얻어먹고는,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만하게 굴곤 했다.

    왜냐고 물었을 때 놈이 했던 대답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어차피 자기의 정체성은 한량에 가깝다고 했다. '젊을 때의 공부로 마르지 않는 샘인 공권력에 빨대를 꽂고 사는 거지.' 경찰에 간부치고는 지독하게 꼬인 말을 했던 듯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지언정 놈은 사람들에게 소속을 밝히지도, 그의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다.

    그것만큼은 처음부터 한결같았다.

    “……”

    반년 여, 이젠 꽃집생활에 거의 적응했다. 꽃다발 손님이 온다고 전처럼 긴장하는 일도 없었고, 마주하는 사람들과 인사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혹시라도 옛 일을 끌어들일까 스스로 저어하던 것도 이제는 많이 사라졌다. 흥정은 아직 서툴러도 조금 손해 보면 말겠거니 했다.

    정애누님 말이야 원가가 삼분의 일 지점에 와야 꽃집은 망하지 않는다지만, 어차피 여기에서 일하는 건 그 혼자 뿐이었다.

    혼자만의 일. 집세를 내고 밥을 먹고 가게 세를 누님에게 보내줄 수 있는 정도면 족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누구도 그를 전과자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구, 손님 왔네. 난 이만 나가볼게.”

    그는 서둘러 나가는 요구르트 아주머니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총각. 그 친구 오거든 너무 부담 느끼지 말라고 잘 다독이고-…”

    어떻게 답해야 할 지 모르는 사이 아주머니는 가게를 나갔다.

    놈은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그는 사실 저 호칭도 싫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그낭 박목화였고, 정애의 동생이었으며, 꽃집 총각이거나 아저씨인 것 같아서였다. 양쪽의 호칭 다 마음에 들었다. 편안했다.

    그리고 그 편안함을 지켜준 것도 놈이었다.

    조폭들이 형사들에게 원한을 가진다면 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구역에 손을 턴 놈이 있으면 때마다 들쑤시고 태연히 들어와 흙발로 짓밟는다. 조직보다 더 끈질기게 들러붙는 것들이 형사였다. 손 털고 나면 조직에서 달에 한번 보호세만 내면 되지만 놈들은 사글세를 뜯고 나서 이자도 뜯는다는 소리도 공공연히 돌았다.

    만일 처음 형사들이 왔던 날 같은 것이 계속되었다면 그가 어떻게 해도 이 가게를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님에게 더 폐가 되기 전에 그 스스로 물러났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몇 달 동안 바로 앞에서 잠복하는 형사들의 얼굴도 몰랐다.

    그렇게 만든 것은 놈의 힘이고, 호의였다.

    ……왜냐.

    두 번 세 번 생각할수록 알 수가 없어졌다. 강간을 당한 것도 놈이 최초였다. 저항할 수 없게 짓눌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교도소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손을 씻으려 하니 당하는 일이라고 그는 나름 납득했다. 그러나 놈이 목숨을 구하러 와주리라곤 예상도 하지 못했다.

    희미한 의식에도 놈이 소리치고 울부짖고 총을 쏘았던 그 소리들만은 기억했다. 누군가 와준 적은 그때껏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 견뎌왔고, 그러다 죽게 되면 죽는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 부분에까지 화낸 것도 역시 놈이 최초였다. 돌아오라고 말해준 것도 놈이었다. 만일 놈이 아니었다면 그는 다시 조직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오랫동안 드나들면서, 당연한 듯 와, 당연한 듯 밥을 같이 먹어준 것도 놈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놈 탓에 웃고 있었다.

    간극이 너무나 컸다.

    처음의 적대와 폭력은 명확했다. 그러나 이후에 놈이 가진 호의도 그 이상으로 분명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놈도 처음이었다. 적의는 적의로, 폭력은 폭력으로, 공포는 무시로 대응해온 것이 목화였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이 바뀌어버린 호의에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왜 바뀌었는지 모르는데 대응할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에게 있어 '왜'를 고민해야 하는 존재는 여태껏 많지 않았다.

    타인의 이유를 묻는 것은 그에겐 대개 대답이 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묻는다 해도 답이 돌아오지 않거나 돌아오더라도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그는 되도록 입을 다물었다. 매일같이 놈이 호의만을 가진 양 드나들 때에는 그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끊고 나면, 혼란만이 남는 것이다.

    왜 오지 않는 걸까.

    그 전에, 놈은 왜 왔던 걸까.

    혹시 놈이 다시 온다면 이제는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목화는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째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힐끗 쳐다보았다. 오늘도 오지 않는다면 전화를 해봐도 괜찮을 것이다. 목화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전화기를 집어들었던 목화는 역시 내일이 낫겠다 싶어 다시 내려놓았다.

    “……”

    내일이면 해가 바뀌었을 테니 안부를 묻는 것부터 시작하자.

    단순히 묻는 것을 미루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만, 목화는 거기에서 생각을 멈추었다. 이미 신뢰를 가져서는 안 되는 인간에게 신뢰를 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지만 더 이상은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도 삼킨 양 속에 무언가가 걸려서 그의 탐색을 막고 있었다…

    딸랑, 딸랑. 문에 달려있는 종과 함께 크리스마스 때 달아놓은 금색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하고 일어나던 박목화가 한 발짝 들어온 손님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굳었다.

    “잘 있었냐.”

    익숙한 목소리로 인사를 해온 놈의 목에는, 붕대를 감은 오른팔을 지탱하고 있는 고정기가 걸려 있었다.

    “……!”

    박목화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김낙원이 어떻게 당황한 얼굴을 하건 말건 상관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놈의 어깨를 잡고는 고정기에 싸인 오른팔 앞에 고개를 숙였다. 부러져서 깁스를 한 건지 다쳐서 붕대를 감았는지는 보면 알았다.

    “어떻게 된 거냐.”

    목소리는 낮았다.

    외려 놀란 것은 김낙원이었다. 조금 더 끌다 이야기하려 했던 그는 예상치 못한 박목화의 태도에 사실대로 불었다.

    “찔렸지.”

    그러자 놀랍게도, 박목화의 얼굴이 변했다.

    …저 단단한 얼굴은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기억을 더듬은 김낙원이 잠시 놀랐다. 어버이날이 지난 뒤 김원일이 찔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막 전화를 받고 나가던 놈의 얼굴이었다.

    그물을 찢고 뛰쳐나가던 날카로운 뿔의 얼굴,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상대를 치받아버릴 듯한 무기질의 칼 같은 느낌.

    놈은, 화를 내고 있다.

    김낙원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기분이 해괴했다. 머리끝부터 따뜻한 물이 흘러내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자신은 놈의 테두리 안에 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다치니 화를 낸다. 상상 외로 감동적이었다. 그 감각이 한없이 감미로웠다. 여태껏 져왔던 꽃 더미나 요구르트 아줌마 따위에서 단숨에 김원일 이상이 된 듯 했다.

    “누구냐.”

    낮게 묻는 그 목소리가 연인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몰라, 아직 찾고 있으니까.”

    김낙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갑자기 찔린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놈이 화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좋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이런 기분에 놈의 동생들이 놈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하는지도 모른다. 김낙원은 형님 형님 거리던 놈들을 떠올리고 희미하게 생각했다. 어찌되었건 그 형님은 지금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김낙원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사실상 놈의 테두리라는 것은 놈의 보호권 안에 있다는 말과도 같다. 보호권이라니, 그 주체가 박목화만 아니었어도 김낙원은 누가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이냐고 화를 냈을 터였다.

    경찰간부가 전직 조폭의 보호권 안에 드디어 들었다고 좋아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것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보호받는 자가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는 남자로서도 우스운 일이라는 것도.

    그러나 박목화였다. 그랬으므로 그는 더 이상 생각을 깊이 하길 포기했다. 아무려면 어때. 그저 감격스러웠고 그저 좋았다. 일주일 간 전화 한 번 걸지 않았던 것도 이미 자신이 언젠가 오겠거니 당연히 여겨서 상관하지 않은 것일 터였다.

    세상이 간단히 바뀌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김갑선?”

    한없이 천국의 꽃밭을 거닐고 있던 김낙원은 드디어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의 꽃밭으로 돌아온 것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공조수사를 굳이 부탁할 것도 없이 알아서 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건 모르지. 그렇지만 흉기로 봐서나 기다렸다 찌른 걸로 봐서 나, 강력범 전과가 있는 놈일 가능성은 높아.”

    박목화가 그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어디를 어떻게 찔린 거냐.”

    김낙원은 순순히 왼손으로 오른팔을 가리켰다. 고정기에 싸여있어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왼손으로 어느 부근에서 찔렸는지는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 명치 부근을 툭툭 두드리자 박목화가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한 번에?”

    “숨어있다 바로 달려들더군. 팔로 감싸면서 찔렸어.”

    '걱정 받는다'는 건 이런 느낌인가.

    이런 식의 관심을 놈에게 받을 줄은 몰랐다. 미인계에 넘어가 술집에서 기밀을 털어놓는 놈들의 심정을 그는 갑자기 이해했다. 날카로운 눈매가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날아갈 듯 했다.

    이대로라면 집에서 놈에게 물 한잔을 얻어 마시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김낙원이 한없이 꿈에 부풀고 있을 때였다.

    박목화가 일어났다.

    “……?”

    성큼성큼 나가더니 창문에서 블라인드를 올리고 바깥을 살핀 목화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네가 살았다는 걸 놈이 아나?”

    낙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당연히 알 것이다. 실패한 것은 스스로 더 잘 알 터였다. 그는 팔을 찔렸고, 놈은 흉기를 회수해가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어디에서?”

    “카페 주차장. 그 날 널 데려가려던 카페에 쭉 혼자 있다가, 너한테 전화한 바로 그 뒤에 찔렸지.”

    일말의 죄책감이든 책임감이든 '같이 갈 걸 그랬다'는 말만 끌어내면 성공이었다. 상관이 있건 없건 박목화를 끌어들여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김낙원은 놈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 마디만 그렇게 나오면 바로 집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내일은 1월 1일이었다. 아무리 독한 정애라도 설날에는 꽃집을 쉴 것이다. 누님이 쉬면 박목화도 쉬도록 꼬드길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놈과 함께 있을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그의 집에는 침대도 하나 뿐이었다. 잘 하면 놈을 바로 옆에서 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김낙원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팔을 다쳤으니, 놈도 경계하지 않겠지.

    술도 담배도 당분간 금지여도 놈만 있다면 상관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범인을 잡아 처넣을 때에는 처넣더라도 감사의 의미에서 사식 한번은 넣어주겠다고 김낙원은 생각했다.

    “너, 집에 혼자 있냐.”

    “……!”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박목화가 한 말에, 김낙원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곧 서둘러 대답했다.

    “그래.”

    다른 뜻이 있어보여서는 안 된다. 낙원이 최대한 평정을 지키려 노력하면서,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왜, 와주게?”

    박목화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잠시가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김낙원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아파트가 떠올랐다. 녀석과 소파에 같이 앉아있는 것만 생각해도 황홀했다.

    왼손으로도 커피 정도는 끓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저녁쯤엔 해먹기 힘드니 외출을 하자고 해도 괜찮겠지.

    별 생각을 다하면서 긴장을 풀려고 했지만 정말로 바라는 게 있을 땐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낙원은 차라리 한 번 더 녀석을 밀기로 했다.

    “아무래도 한 손으로는 힘들어서 말이야.”

    왼손으로 오른팔을 가리키면서 한 말이었다. 박목화가 쳐다보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김낙원은 최대한 아파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놈을 기다렸다. 더 없이 초조했다. 그 짧은 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놈과 한 소파에 앉아서 63인치 벽걸이 TV로 보신각의 종치는 소리를 들을 생각만 해도 꿈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꿈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박목화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만히 있더니 드디어 그를 쳐다보았다. 우습게도 정말로 두근, 하고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 한 마디가 놈의 입에서 떨어졌다.

    “같이 가자.”

    “……!”

    김낙원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귀로 들은 그 말이 정말 놈의 입에서 떨어진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정말이냐?!”

    자기도 모르게 김낙원은 소리를 냈다. 팔만 멀쩡했다면 놈의 팔을 확 쥐었을 것이다. 정말로 같이 갈 수 있는 건가. 그 정도로 놈은 나에게 신경 쓰고 있는 건가……?

    그때였다.

    박목화가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더니 이야기했다.

    “내 방에 먼저 가 있어.”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김낙원이 입을 벌린 사이, 박목화가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목숨을 노린 놈은 실패했으면 다시 온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집에 가지 마라.”

    그리고 김낙원은 박목화의 보호권 안에 든다는 것이 정말로 어떤 것인지를 체감했다. 놈이 자신이 상처 입은 것에 화를 내는 것이 좋았다면, 놈이 하는 말도 들어야 했다.

    어이가 없었다가,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가, 다시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몇 번 입을 열었다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놈의 동생들처럼 형님하고 무작정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엔 방금 전까지 꿨던 꿈이 너무 컸다. 그러지 말고 내 아파트로 가자고 김낙원이 무어라 말을 덧불이려다가, 뭔가를 휘갈기는 놈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입이 열리고 말이 나왔다.

    “……네 방이 어딘데?”

    짤랑, 열쇠와 메모지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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