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 겨울이야기(3월의 보름을 조심하라 외)
<겨울>
1. 이브
카페는 조용했다. 테라스 창으로 비쳐든 하얀 햇살도 난방이 틀어진 실내로 들어오면 가습기의 수증기처럼 부옇게 흐려졌다. 갈색 마룻바닥에는 누군가 흘린 커피얼룩처럼 의자 다리가 그림자를 길게 흘렸다.
오늘은 아르바이트생이 없는지 주인이 주문을 받으러왔다.
“스트롱으로.”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커피를 주문한 김낙원은 잠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4시 반, 바깥의 거리는 방학을 맞은 10대들로 넘쳐날 지 몰라도 카페에 들어온 손님은 그 뿐이었다.
“미학(美學)으로 하시겠습니까?”
로스팅한 곳을 묻는 물음에 김낙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메뉴판을 가지고 커피를 만드는 스툴로 돌아갔다.
스툴에 올려진 세 개의 주전자에서는 두 개만이 김이 올랐다. 온도계를 넣어둔 주전자와 물을 끓이는 주전자였다. 한 개는 온도를 맞추기 위해 부어주는 찬 물로, 주인은 꾸준히 커피를 내리는 물의 온도를 65도에서 80도 사이로 맞추고 있었다.
어디서 바리스타 수업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자기 가게에서 물 온도를 꾸준히 맞춘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까다롭다는 점에선 프로고, 가격에 비해 지나친 공을 들인다는 점에선 아마추어였다.
그래도 여기에 드나든 지 벌써 두 달 내내 저 공을 들이는 걸 보면 까다로운 프로로 남을 지도 모르겠다. 손님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미학의 스트롱입니다.”
주인이 커피 잔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려 정중하게 내려놓았다. 속칭 몽고 잔으로 불리는 에르메스의 '말을 탄 기사 시리즈' 에서 나온 커피 잔이었다.
처음 왔을 때에는 특색 없는 흰 색 노리다께더니 두 달을 드나들자 에르메스로 내온다. 그렇지만 김낙원이 정말로 이 가게에서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단골에게 잔은 바꿔서 내놓을지언정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지 않는 침묵의 미덕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아직 회사에 있을 4시 반에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가 이상하게 보일 법도 하건만, 카페의 주인은 그에 대해서는 절대로 묻는 법이 없었다.
침묵은 금이지.
만족스럽게 커피 잔을 집어 들던 김낙원이, 다음 순간 과묵한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
벌써 12월이었다. 더운 여름부터 문턱이 닳아라 드나든 꽃집은 이제 난방을 틀지 않으면 손이 곱을 지경에 이르렀다.
놈의 몸이 나을 때까지 두 달을 매일같이 들러 출근도장을 찍어가며 도운 것은 그였다. 정직이 풀리고 나서도 내내 그리로 퇴근해줬건만, 놈은 아직도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왔냐, 가냐. 이런 인사조차 먼저 한 적이 없는 것이다.
거만한 새끼, 내가 가는 게 당연하다는 거야 뭐야.
아무 생각 없을 박목화를 자기만의 비틀린 잣대로 단정내린 김낙원이 투덜거렸다.
와서 좋다는 표시를 굳이 말로 바라는 건 아니지만 호의로 인식은 해야 가는 맛이 있을 게 아닌가. 최근 김낙원의 가장 큰 불만은 바닷물에 푼 소금처럼 사라져버리는 자신의 호의였다. 놈은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었다.
과묵은 병이야.
김낙원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단정 내렸을 때였다. 돌아갔던 주인이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커피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김낙원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대로 된 커피를 내리는 사람에게 쓸데없이 심술을 부릴 필요가 없다. 커피 맛에는 충분히 만족했다. 놈의 꽃집이 있는 이 시장통에서 겨우 한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제대로 된 카페를 찾은 것은 행운이었다.
“아, 여긴 이브 때 몇 시까지 하죠?”
돌아가던 주인에게 낙원이 소리쳐 물었다. 주인이 몸을 돌려 대답했다.
“그 날은 12시까지 합니다.”
알겠다고 낙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날은 오래 할 줄 알았다. 평소엔 칼같이 10시에 닫는 바람에 놈의 가게가 끝나고 나면 여기는 올 엄두를 내지 못했더랬다. 잘하면 시간을 맞출 수 있겠는데.
놈도 이런 커피를 마셔는 봐야지. 낙원은 자기만의 기준에 '과묵이 병인 놈'을 멋대로 끼어 맞추고는 만족스럽게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오늘도 진하고 깔끔했다.
남자는 꽃 포장을 하고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를 목 끝까지 채우고, 바지 위에 검은 색의 커다란 앞치마를 매듭지은 단정한 모습으로 능숙하게 손을 놀렸다.
이제는 꽃묶음에 녹색 마를 두른 뒤 아래에 하얀 포장지를 대고 묶어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철사 위에 제법 능숙하게 리본을 두른 꽃다발을 손님에게 내밀었을 때였다.
“만 오천 원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어어, 하고 소리를 냈다.
“만 삼천 원에 해주세요.”
아까 냉장고에 있는 걸 가져가면 만 삼천 원이고 새로 하면 만 오천 원이란 말을 듣고 포장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여자는 당당했다.
반면에 하얀 셔츠와 검은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건장한 몸을 가진 남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곤란해 하고 있었다.
아까 포장하기 전에 얘기 듣지 않았느냐든가, 새 꽃이라서 곤란하다든가, 이천 원씩 깎아줄 수는 없다든가 하는 수많은 흥정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만 사천 원만 주십시오.”
그러나 박목화는 아직도 흥정만은 서툴렀다. 너무 쉽게 깎아주자 그렇다면 삼천 원으로 되지 않을까, 하고 밀어보려던 여자가 뒤에서 들려온 남자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만요.”
장갑을 낀 키가 큰 남자였다. 어디에 있든 눈에 띌만한 부류의 남자였다. 그의 웃는 얼굴에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저 친구가 냉장고 속에 있던 걸로 만 삼천 원이라고 했죠?”
아까부터 지켜봤다는 듯이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건넨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 녀석이 워낙 여자한테 약해서, 여자 손님만 오면 사정없이 깎아주는 게 문제라니까요.”
김낙원은 웃으면서 박목화의 어깨를 쳤다. 툭툭 치는 듯 했지만 꽤 힘을 준 두드림이었다.
“만 사천 원만 주세요.”
'아니 뭐……' 여자는 말을 흐리더니 결국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꽃다발을 받아들고 나가면서도 김낙원 쪽을 두어 번 쳐다보았다.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낙원은 박목화를 보면서 혀를 찼다.
놈도 남자에게는 제법 흥정을 붙이곤 했다. 하지만 여자 손님이 문만 열고 들어와도 땀 흘리는 놈이다 보니 상황은 뻔한 것이었다. 여자라도 차라리 미녀한테 약하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아줌마건 할머니건, 세상의 반이 여자인데 그저 여자라는 것만으로 약해져서야.
저렇게 약한 것도 병이다. 김낙원이 부러 놈에게 들리게 혀를 찼다.
“여자 좀 그만 밝혀라, 응?”
그렇다 해도 '밝힌다'는 말은 박목화에게 적합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부러 제법 억울할 법한 말을 했는데도 놈은 별 반응 없이 돌아서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언제 그랬냐고 하면 박목화 팬클럽이라도 만들 듯한 기세인 전철 역사 여직원들과 아래 환승로에서 장사하는 아줌마들에게 목화가 끼치는 영향을 일일이 열거해주려고 힘을 줬던 김낙원은 뒤에서 피식 웃었다. 놈다워서였다.
그러나 그는 놈이 놈답게 반박대신 정리를 선택했다고 해도 가만 두지는 않았다.
“씹냐?”
이것도 나다운 일이지.
“…아니.”
이 정도는 되어야 입을 한번 열어주는 게 문제라니까. 낙원은 생각했다. 바닥에 널린 포장지 쪼가리들까지 깨끗하게 정리한 목화가 천천히 소파로 향했다. 원래 있었던 의자를 들어내고 자기 취향의 소파를 가져다놓은 것은 낙원이었다.
물소가죽으로 된 소파는 부드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윤기가 흐르면서도 천연 가죽 특유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 광택이 났다. 팔걸이 부분은 낮아서 편히 팔을 올릴 수 있고, 등받이는 높아서 안정감을 주면서 꽃집 벽에서 내려오는 냉기를 막았다.
김낙원은 슬며시 웃었다.
푹신한 것과는 평생 인연이 없었을 놈이, 의자라는 이유만으로 별 생각 없이 앉았다 푹 파묻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어깨가 넓고 단단한 체구의 남자가 허리를 세우고 앉다가 어색하게 파묻히는 것만으로도 희화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놈과 어울리지 않는 위화감에서 오는 웃음은 놈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들었다.
꽃집이 아무리 정애가 녀석을 붙잡아놓은 공간이라고 해도, 녀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탓에 결국 매일 와 여기 놈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때 뭐할 거냐?”
낙원이 물었다.
꽃포장에 익숙해졌다 싶더니만 긴장하는 건 여전한가.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은 계절이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같은 길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까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손에 눌리면 부드러워졌다. 쓸어 올리면 도로 땀처럼 따가워질 것이다.
“가게.”
일하는 게 당연하다는 양 대꾸한다. 시선은 만들고 있는 리본을 향해 있었다.
가게 소리가 바로 나온 걸 보면 노는 날이라는 개념은 아예 갖고 있지를 않은 것임에 분명했다. 낙원은 눈썹을 움직이며 뭐라고 하려다가, 혹시 몰라 다시 물었다.
“이브에는?”
“……?”
놈이 돌아보았다. 그리고 왜 같은 것을 자꾸 물어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짧게 대꾸했다.
“가게.”
-꽃집에 목숨 걸었냐.
낙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놈은 왜 물어보냐는 질문도 없이 소파에 다시 파묻혀 이번엔 종이를 자르기 시작했다.
잠시도 쉬지를 못하는구만. 여름에 그랬듯이 아예 휴가를 내서 데리고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저토록 당연하게 이브에도 일한다고 말하는 놈을 데려갈 수 있을지는 미심쩍었다.
남들은 커플지옥이니 솔로부대니 잔뜩 꼬여서 날마다 포스터를 만들고, 커플은 커플대로 누가 더 염장을 지르나 경쟁을 하느라 바쁜 이때에, 대체 왜 저 놈은 가게에 목숨을 거느냔 말이다.
“너……,”
연에도 안 해봤냐고 비꼬려던 김낙원이, 말을 하다 멈췄다. 정말로 해본 적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혹시 놈이 고등학교 때 풋사랑을 해봤으면 모를까, 바로 소년원으로 들어갔다. 나와서 미친 소 밑에 주구 창창 버텼는데 연에를 해봤을 리가. 부대낀 거라곤 술집여자 아니면 덩치 크고 머리 짧은 사내새끼들 뿐일 텐데.
물론 깡패들이라고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지만-
김낙원은 무척 회의적인 눈으로 긴 가위를 칼처럼 들고 종이를 베어내는 놈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단추 하나 풀지 않은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저 속에는 부드러운 목덜미가 숨어있다지만, 놈이 곧은 목과 어깨로 숨기고 있는 한 사람들 눈에는 뜨일 리 없었다.
일반 여자에게 저 놈이 자기 신분을 속이고 접근할 재간이 있을 리 없을 뿐더러, 그래도 좋다는 정신 나간 여자가 있었더라도 놈이 굴러들어온 떡이구나 하고 집어들 오지랖이 있었을 것 같지 않았다.
놈 인생에 여자가 있었다면 박광우가 붙여준 술집여자 정도일 것이다.
그때였다. 놈이 왜 부르다 마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고작 가윗날을 잡고 있을 뿐인데도 날카로운 것을 쥐고 있는 놈의 손은 위협적이었다.
“……”
꺾이지 않을 것 같은 그 팔목에 이어진 것은 여름도 겨울도 언제나 똑같이 고수하는 하얀 셔츠였다. 김낙원은 그 셔츠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었다. 흔히 깍두기들이 젊은 혈기에 혹은 왜색에 젖어 새긴 문신 따위가 아니었다. 놈이 숨기고 있는 것은 놈 자신이었다.
사람을 죽인, 갑옷 두른 무사(武士).
현대에서는 그걸 전과자라고 하지. 낙원은 비틀리게 웃었다. 이렇게 꽃집에 있어도 언뜻 내비치는 놈의 본모습을 볼 때면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아마도 놈이 어울리는 장소가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보았던 그 어두운 골목. 미친 소의 앞에서 두려움 없이 날뛰다가 칼에 난자당하고 길바닥에서 객사하는 게 어울리는, 사보이 호텔 로비를 빨갛게 물들이기에도 시대가 지난 뿔.
그리고 이제 놈이 그 뿔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도 박광우는 잡히지 않았다. 김갑선조차 소식이 없었다. 중요 증인이 없는 수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리멸렬하게 진행되었다.
이대로 몇 달이 지나 일이 끝나고 나면, 언젠가 전화벨이 울리고 놈이 미친 소의 부름을 받게 된다면-……
그래도 아직 너는 여기에 있지.
김낙원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크리스마스 때 놀아본 적은 있냐?”
“……원일이 단골집에 다 같이 가서 술을 먹기는 했는데.”
다시 그 얘기냐, 라는 얼굴로 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김낙원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 내가 제대로 놀게 해주마.”
그러자 박목화는 잠시 손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노는데, 라는 얼굴이었다. 이제 슬슬 어지간한 속엣말 정도는 말을 듣지 않아도 얼굴을 보면 읽히곤 했다.
낙원은 책상 위에 있던 달력이 완벽한 답안이라도 되는 듯 집어 들어 놈 앞에 들이밀었다.
“달력 봐라. 빨간 날이야.”
잠시 허를 찔린 놈이 아무 대답도 못하는 사이, 낙원은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이브에는 8시에 닫는 거야. 낮부터 와서 기다린다. 알겠어?”
“어째서……”
놈이 무어라 말하려는 것을 낙원이 막았다.
“이봐, 난 여기에 돈 한 푼 받지 않고 여름부터 내내 출근해줬다고. 이 정도로 사람이 베풀어줬음 뭐 보답이 와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밥을 사지. 너에겐 나에게 커피를 살 수 있는 영광을 주마.”
의기양양한 말에 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너도 가끔은 사람답게 살아보라고.”
낙원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사람'을 정의해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에 있을 때 놈을 호의라는 거미줄로 일상에 감아놓는 수밖에 없다. 낙원은 지금 그가 생각하는 것이 과거 정애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터였다.
그가 원하는 것도 어차피 비슷했다.
정애가 이 동생이 일상에 발붙이고 살아가길 원한다면, 낙원은 놈이 자신의 눈앞에 있기를 원했다. 눈앞에서 움직이는 놈을 바라보기를. 그리고 놈의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한 사이가 되기를, 또 바랐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회색 유니폼이 추운지 검정 단화를 신은 발을 동동거리며 역사 여직원이 물건을 내놓고 있는 목화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공기를 하얗게 얼렸다 사라졌다.
겨울이 되면서 생화를 바깥에 내놓지 못하게 되어 썰렁해진 가게 앞을 자잘한 소품이나 조화로 대신해 내놓고 있던 박목화가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단순한 아침 인사라 생각하고 물건을 가지러 가게로 들어온 목화의 뒤에서 인기척이 이어졌다. 인사를 건넨 역사 아가씨가 따라 들어와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뭔가를 꺼내놓았다.
“이 앞 트럭에서 팔더라고요. 중국제지만 어차피 하루만 쓰는 거니까, 하나 가지세요.”
“괜찮습니다.”
목화가 재빨리 거절했지만 여직원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추운지 계속 발을 구르면서도 '이런 건 아무래도 제값주고 사면 아깝다니까요,' 하는 종류의 말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오늘 이브인데 어디 안 가세요?”
“일해야죠.”
여상히 대답한 목화는 이런 질문을 또 받아본 적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오늘이 바로 김낙원이 멋대로 시간을 비워두라고 주문했던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냈을 때에는, 이미 여직원은 활짝 웃으면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요? 오늘 바쁜가보다-”
그리고 여직원은 그의 앞에 뭔가를 내려놓은 채 웃으면서 나갔다.
“다음에 좀 한가해지면 얘기해주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예, 하고 목화는 얼떨떨하게 답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그녀가 내려놓은 금색의 물건이 반짝거렸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트리에 다는 작은 금색 종이였다.
첫 손님을 묘하게 치렀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떤 재질인지 가볍고 반짝거리는 종 위쪽에는 빨강과 녹색의 리본도 매어져 있었다. 종을 손에 들고 잠시 고민하던 목화는 나가서 가게 손잡이에 매달아놓았다. 어차피 그는 평생 트리 같은 것은 장식해본 적이 없었다. 선물 준 사람이 오며가며 볼 수 있는 곳이 가장 좋을 터였다.
그리고 그는 여느 토요일 아침처럼 장미 한 송이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가게 안은 조용했다. 전철역에서 내보내는 캐럴도, 중국산 트리 장식을 파는 노점상이 내지르는 소리도 여기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붉은 기가 도는 반질반질한 종이를 제법 익숙해진 손길로 접고 있던 박목화가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섰다.
“장미 한 송이 포장되나요?”
그렇게 물은 것은 학생인 듯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예, 있습니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섰다.
누님이 일러두었던 대로 토요일마다 미리 열 송이씩 만들어두길 잘했다고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로 꺼내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냉장고에서 포장된 장미를 꺼내던 그는 멈칫했다. 꽃을 꽂아두는 물통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꽃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러자 오늘 저녁을 비워두라고 엄포를 놓던 김낙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이 많은 토요일이라고 해도 어차피 꽃이 없으면 장사를 하지 못한다. 굳이 그 말을 들어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일이 그렇게 될 듯 했다. 일방적이라고는 해도 시끄러운 녀석의 약속을 지키게 된 쪽이 안심이 되는지, 아니면 장사를 하지 못하는 게 더 신경이 쓰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반년 넘게 꽃집을 드나들면서 처음으로 억지를 부린 놈의 요청이었다.
녀석이 왜 그렇게 오늘에 집착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원했으니 들어주자고 박목화는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뭐가 달라서 그런 걸까. 빨간 날이라고 해도 공휴일이 뭐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지 않나. 크리스마스라는 건 애들한테나 중요한 게 아니었나……
'이브에는 8시에 닫는 거야.' 낮부터 와서 기다리겠다고 했던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박목화는 장미 줄기 아랫부분을 잘라 여자에게 건넸다.
“2천원입니다.”
돈을 꺼내준 젊은 여자가 장미를 받아들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박목화가 정중하게 인사했을 때였다. 어쩐지 미적거리면서 가게를 나서던 여자 손님이, 유리문을 열면서 용기를 낸 듯 이쪽에 대고 인사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요-……”
딸랑, 유리문 사이로 종소리와 함께 전자음으로 연주되는 캐럴이 들어왔다 도로 사라졌다. 오늘 두 번째의 인사였다. 젊은 여자까지 그렇게 인사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메리 크리스마스라.
이벤트는 이벤트인 모양이다.
전철역 앞의 광장에 트럭을 대고 펼쳐놓은 플라스틱 트리들을 목화는 유리창 바깥으로 힐끗 바라보았다.
'만원에 열 개-'
소리치는 노점상의 목소리가 유리문 바깥에서부터 약하게 들려왔다. 여직원 하나가 바깥에 내놓은 골드 크러스트에 달아주고 간 금색 방울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저게 천원이나 하는구나.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저런 게 싼 거구나라고 생각한 건, 보통 때라면 노점상 규제에 나설 전철역 여직원이 박스에 담아놓은 트리장식들을 싸다고 사서 그에게 줬기 때문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곧 책상 안쪽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바쁘지 않니?”
누님이다. 목화는 약간 놀랐지만 곧 대답했다.
“장미를 찾는 손님만 몇 명 왔습니다, 누님.”
그러자 '아직 퇴근시간이 안됐나…' 하고 말을 흐린 정애가 물었다.
“그래? 꽃은?”
냉장고를 흘깃 바라본 목화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장미는 두 단 남아……”
그 두 단을 다 팔면 오늘 저녁에는 일찍 들어갈 생각이라는 말을 막 하려고 했을 때였다.
“두 단?!”
갑자기 전화기 저편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정애누님이 큰 소리를 내는 적은 드물었으므로 목화는 잠시 말을 멈췄다.
“오늘은 이브에 토요일이잖니- 그 자리에선 지금 있는 두 단으로 한 송이짜리만 만든다고 해도 겨우 20개로는 택도 없어. 퇴근 시간 되고 그러면 그때부터 밤까지 손님이 얼마나 많이 오는데……!”
그렇게 큰 대목은 아니라서 미리 챙기지 않았더니. 정애는 전화기를 든 채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마음잡고 팔면 전철역에서 못해도 한 송이짜리로만 100개는 팔 텐데. 있는 걸로 경험삼아 해보라고 하기엔 이대로라면 퇴근 시간까지 버티지도 못할 판이었다.
꽃을 사오라고 할 수도 없다. 올해 마지막 피크를 치고 있을 꽃 값을 생각하면 마진은 송이당 100원도 남지 않을 터였다. 이쪽에서 꽃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다행히 이쪽은 물량만큼은 풍부했다. 아직은 길이 막히지 않으려나. 시계를 힐끗 본 정애가 재빨리 방법을 제시했다.
“장미만이라도 이쪽에서 보낼게, 목화야. 이브에는 어차피 장미가 제일 잘 나가니까.”
동생은 말이 없었다. 부담을 느끼나 라는 생각에 정애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너무 많이 사둬서 난 어차피 오늘 다 쓸 수도 없어. 꽃은 내일이면 시들 테고.”
그러니까 오늘 쓰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목화는 말이 없더니, 잠시 후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예.”
꼭 이렇게 해야 받아준다고, 정애는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이 시간에 어떻게 차를 수배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래, 그럼 곧 그쪽으로 보낼 테니까. 나도 저녁에 좀 빨리 끝나거든 그쪽으로 갈게-…”
케이크라도 사가야지. 크리스마스가 이벤트라는 생각도 하지 않을 동생의 성격에는 분명 케이크 같은 것은 먹을 생각은커녕 지나가다가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
목화의 대답에 정애가 전화를 끊었다.
오늘 저녁에 가게가 좀 시끄러울지도 모르겠군. 목화는 놈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이유도 모르는 채 끌려 나가는 것보다 누님에게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목화는 곧 냉장고 안에 남아있던 장미 두 단을 풀어 한 송이씩 따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40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택배 왔습니다-”
딸랑거리는 문소리에 박목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대한통운부터 트라넷까지, 각각 로고도 색깔도 다른 택배 모자를 눌러쓴 녀석들이 신문지에 쌓인 꽃들을 어깨에 짊어진 채 들어오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입니다, 생각보다 꽃을 많이 찾는 모양입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셋째였다.
여기에 김원일이 재빨리 이야기를 거들었다.
“글쎄 저희는 크리스마스라면 단란주점에서 단란하게 노는 날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누님이 꽃이 필요하다면서 부르시는 통에……”
“예. 그렇게 된 겁니다요, 형님.”
자기들의 독단으로 움직인 일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놈들 앞에서 박목화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리로 드나들지 말라고 당부했던 여름 이래 녀석들이 꽃집으로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놓고 가라.”
그래도 간만에 보러 온다는 생각에 누님의 부름을 받고 그저 좋아라 응했을 녀석들을 차마 혼낼 수 없었기 때문에 박목화는 그렇게 한 마디만 하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일단 짐을 내려놓은 녀석들이, 박목화의 안색을 살피더니 조금씩 어깨를 늘어뜨렸다.
“형님, 김갑선을 아직도 못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은 뭐 우리가 그렇게 신경 쓸 거 있습니까.”
김원일이 목화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니 막말로 대한민국 경찰들이 끝내주게 무능한 게 우리 탓도 아니고, 그 놈이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결론은 꼬리 말고 도망간 거 아닙니까요.”
“……”
박목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꼬리 만 개가 돌아와 봤자라고, 제법 허세를 부리면서 말하던 김원일이 뭐에 생각이 미쳤는지 아!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형님, 제가 그 5월에 와서 도왔다가 찔린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러자 뒤에 축 늘어져 있던 이, 삼, 사, 오가 모두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아유 형님도, 뭘 그런 걸 갖고.”
“한두 번 당하는 일입니까 그게.”
“그 날 일도 재밌기만 했습니다요.”
“악덕 공장주만 없었어도 더 재밌었을 텐데.”
동생들은 시시덕거리면서 그 날의 일을 떠들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오로지 형님이 자기를 걱정해줬다는 것에 들뜬 김원일이 싱글 벙글 웃으면서 박목화를 설득하려고 들었다.
“형님, 아무렴 저희가 그깟 김갑선 따위한테 또 당할 일이 있겠습니까. 제가 그때 찔린 것도 다 그 놈의 방심 때문에 그런 겁니다, 방심. 아무렴-……”
분명 그 말도 맞았다. 그 날 이후 몇 달 째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는 김갑선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망자 신세가 된 김갑선이 그날처럼 해코지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박목화가 오지 말라고 했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큰 형님도 어디에 계신지는 몰라도 분명 저희가 잠깐 택배 오는 것 정도는 봐주실 거라고요.”
“맞습니다……!”
그 날 이후 몇 달이 지났는데도 공영 주차장에서는 언제나 형사의 차가 잠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광우형님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해 경찰도 모른다는 증거였다. 잡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지만, 사라진 시기가 김갑선과 같다는 것이 기묘했다. 김갑선은 대체 무슨 돈으로 도피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날 이후 형님에게 아무런 소식도 없다는 점이 목화에게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요인 중에 하나였다.
별 일이 없으리라고 믿었다.
단지 아무것도 모른다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랬으므로 녀석들을 모두 출입금지를 시켰던 것이다. 꽃집은 이미 노출된 장소였다.
“돌아가라.”
그랬으므로 김원일이 아무리 너스레를 떨어도 목화 쪽에서는 같은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넉살 좋은 김원일이라도 목화 형님이 두 번 말한 것에 토를 달지는 못했다. 오늘도 안 되는구나, 하고 김원일이 고개를 저으면서 돌아서자 은근히 기대를 하고 왔던 이, 삼, 사, 오 모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버이날을 생각하고 왔는지 넷째는 글쎄 손에 목장갑까지 끼고 왔더랬다. '일 다 끝내고 오랜만에 다 같이 누님 모시고 술집이나 갈까 했는데.' 막내가 작게 맞장구쳤다. '그러게, 누님한텐 새끈한 젊은 놈 하나 안겨드리고.' 둘째가 한숨을 쉬었다. '글쎄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오늘은 악덕공장주도 안 보입니다.' 셋째의 말에 원일이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마지막으로 말을 붙여보았다.
“형님을 뒤로 하고 꽃만 두고 사라진다는 건 글쎄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단 말입니다요. 제 가슴의 불길이……”
그때였다.
“불길이, 뭐?”
비꼬는 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언젠가를 떠올리게 하는 데자뷰에, 김원일 휘하 이, 삼, 사, 오 모두 뒤를 홱 돌아보았다.
“경찰 양반……!”
김낙원이었다.
그 익숙한 얼굴을 본 놈들이 모두 움찔했다.
목화 형님이 그렇게 가라고 했던 이유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짭새에게 괜히 눈에 뜨이지 말라고 한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마주쳐버렸으니 움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난 김원일이 곧 어색하게 하하, 웃으면서 넉살을 떨었다.
“경찰 양반- 거 양반은 못되는구만.”
김낙원은 피식 비웃었다.
“미친 소도 아무쪼록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걱정하고 있던 바로 그 이야기를 정면으로 듣자 단순한 그들은 아무도 얼굴에 나타난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양반이 못 될 정도로 어떻게 알고 이 순간 불쑥 나타난 김낙원이 사실은 몇 달간 잠복근무를 해온 형사보다 더 끈질긴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줄곧 큰 형님을 쫓아 오늘까지 형님의 가게에 드나들고 있는 이 녀석 때문에 그토록 목화 형님이 가라고 한 게 아닐까 라고까지 생각하는 듯 했다.
놈들 머리에 전구가 켜졌다 꺼졌다하는 꼴을 뒤샹의 현대 미술처럼 감상해준 김낙원이, 들고 온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먹어라.”
“……우와- 아직도 형님 밥을 챙겨주는 거요?”
그렇다. 그들은 단순했다. 그 모든 경계도 밥 앞에서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봉지를 본 넷째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김원일 휘하 넷 모두가 그 봉지를 본 순간 기억해냈던 것이다. 이 형사가-김낙원의 계급은 그것보다 높았지만, 누구도 '높은 형사' 이상으로는 기억하지 못했다-어버이날에도 목화 형님의 밥을 들고 왔다는 것을.
“진짜다.”
“보통 정성이 아녀.”
“징하다, 징해. 반년도 넘었잖어. 셋째 니 마권 뽑는 정성에 버금가는데.”
김원일이 연신 혀를 내둘렀다. 그 동안 관찰력 좋은 넷째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냈다.
“저것 보십쇼! 또 만두구만요.”
“……!”
모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그때에는 샤오롱바오였고 이번에는 빠오즈라는 말을 하려던 김낙원이었으나, '만두' 라는 한결같은 표현에 한숨을 쉬고는 상대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낙원은 목화 앞에서 봉지를 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놈들이 뒤에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진짜다.', '저 경찰양반은 만두를 좋아하나봐.' 자기들이 속삭이고 있다고 착각하는 놈들의 대화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목화형님에게 몇 달째 같은 것만 먹이는 거 아냐?' 문제는 여기까지 갔다는 점이다. 만두만 먹이다니, 올드보이냐? 김낙원이 뭐라도 차갑게 한 마디를 하려던 차에 의외로 김원일이 나서서 쑥덕거리는 입들에게 감사라는 개념을 깨우쳐주었다.
“형사들이 맨날 지들끼리 밥 시켜먹고 이쪽은 손가락 쭉쭉 빨면서 음식고문 하던 거 생각하면 그래도 백번 고마운 일 아니냐. 반년도 넘게 목화 형님 끼니를 챙겨줬구만- 경찰 양반 진짜 한 우물을 파는 양반이요, 그래.”
그건 그렇다고 동생들 모두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을 때였다. 낙원이 뜯어준 봉지에서 만두를 집어든 박목화 역시 놀랍게도 한 마디 했다.
“맛있다.”
평범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꽃집 안에 있던 남자 여섯이 모두 놀랐다.
“……!”
놈들이 형님, 하고 신음처럼 목구멍에서 외쳤을 때는 하마터면 김낙원조차 똑같은 어조로 박목화, 라고 부를 뻔 했다.
호의를 베풀면 호의인 줄 알아라, 하고 끊임없이 챙겨주면서도 자신의 수고를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김낙원이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강요 속에서도 놈의 말은 '음'에서 '고맙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놈의 입에서 설마 맛있다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까지 만두만 사다주네 어쩌구 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던 녀석들은 모두 놀라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인가하고 반신반의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래도 넉살좋은 김원일이 가장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 만두가 그렇게 맛있습니까, 형님.”
그러면서 음식을 넘겨다본다. 얼마나 맛있기에 그러나 호기심 어린 눈초리에 낙원이 나서서 그 호기심을 싹둑 잘랐다.
“그럼 네 형님이 거짓말을 하겠냐?”
잔뜩 비꼬는 그 말투에 김원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뭐 그렇다는 게 아니라…”
사실 놀란 건 낙원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티 나지 않게, 김원일이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아무 말 없이 만두를 집어 먹어보았을 뿐이다.
한입 베어 물자 고기에서 터져 나온 빵에 벤 육수가 입안에 착 감돌았다.
맛은 평소와 같았다. 놈이 설마 얘들 앞이라 편을 들어줬나 생각했던 낙원이 설마, 하고 웃어넘겼다. 그리고 다른 데로 신경을 돌렸다.
“그래서 왜 온 거야?”
“아 그것이……”
그제야 놈들이 서 있는 자리에 놓인 짐이 눈에 들어왔다. 신문지에 겹겹이 싸인 꽃 뭉치들이었다.
“이 꽃들은 다 뭐냐?”
설마 오늘도 어버이날처럼 난리판을 벌여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 이마를 찌푸리면서 낙원이 묻자 김원일이 잽싸게 나섰다.
“글쎄 나도 이런 날 꽃이 나갈 줄은 몰랐는데, 누님 말씀으로는 장미가 잘 나간다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크리스마스라는 건 본래 단란주점에서 단란하게 노는 날인 줄로만 알았……”
이상한 정의를 옆에서 들이대건 말건 낙원은 오로지 한 가지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오늘도 그 난리를 치겠다고?”
박목화에게 몸을 돌리면서 한 물음이었지만, 답은 김원일 쪽에서 나왔다.
“그러고 싶은데 형님이 혼자 하시겠다고-…”
낙원은 이마를 찌푸렸다.
바닥에 놓인 꽃 더미의 양은 그 악몽의 어버이날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장미 한 송이나 다발만 포장하면 되는 거라고 해도, 오히려 그 때문에 바구니를 꽂는 것 이상으로 손이 갈 터였다. 게다가 아무나 꽂으면 일단 나가는 어버이날 바구니와 달리 크리스마스 꽃다발은 티가 나므로 숙련된 솜씨가 필요하다.
결국 놈이 전부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그렇게 하고 나서 파는 건 저녁이 될 것이다.
박목화를 돌아보자 놈은 이미 혼자 조용히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미 한 송이를 포장하기 위해 마를 자르는 놈을 보던 김낙원이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저걸 다 하고 저녁에 팔겠다?
“낮부터 데리러 온다고 했던 건 잊었냐?”
낙원이 묻자 놈이 간단하게 대꾸했다.
“원래 일하는 날이다.”
화가 치솟으려는 것을 누르고 낙원이 다시 물었다.
“설마 이브에 꽃도 미리 보내놓지 않고 전철역에서 사가는 놈들한테 꽃 판답시고, 그랜드 하이얏의 디너를 날리겠다는 거냐?”
그러자 꽃을 손질하고 있던 목화가 얼굴을 찌푸렸다.
“꼭 오늘이어야 하나?”
낙원은 그 순간 충분히 알아들었다. 네 문제니까 알아서 하라는 얘기다.
그렇지. 약속이야 내 마음대로 했지.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 그래' 라고 얌전히 물러날 김낙원도 아니었다.
옆에서는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것들이 '꼭 사랑싸움 같다 히히' 따위의 소리나 하고 있었다. 화가 치솟던 김낙원이 그 소리를 듣고 조금 마음을 가라앉혔다가, '그럼 경찰 양반이 형님의 이거?' 라는 개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새끼들이,”
김낙원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놈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여기 아직도 미친 소가 나타날까봐 120일째 잠복근무중인 놈들도 있다. 지금 너희들 여기에 있다고 바깥에 대고 소리만 질러도 감청 허가 떨어져. 여기에 형사들이 매일같이 쓰레빠 질질 끌고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게 해줄까, 응?”
그러자 놈들이 단숨에 졸아들었다.
“아니 뭐 경찰 양반 그렇게 갑자기……”
폭력에는 강해도 말에는 약한 게 놈들이었다. 발로 걷어차 테이블을 뒤집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놈들에게 진짜 위협은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형님이었다.
낙원은 본래 화가 난다고 목소리를 높이거나 힘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화가 나면, 그는 우선 웃었다. 그리고 차가워진 머리로 상대를 밑바닥부터 쑤시고 뒤집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일선에서 구를 대로 구른 형사들도 그에게는 쉽사리 대하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작두로 사람 손목을 자른 김작두라고 해도 여기에서는 형님의 김원일이었다. 집요하게 배때기를 쑤셔서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은 둘째건 셋째건 여기서는 그저 형님의 '동생들' 일 뿐이었다. 미친 소 아래의, 말이지.
김낙원이 여전히 웃으면서 낮게 뇌까렸다.
“새끼들이, 박목화가 이쁘다고 니들까지 이쁜 줄 아나.”
평소라면 형님이 무려 이쁘다는 소리에 쇼크를 받고 떠들었을 놈들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용하게 만들어놓으니 좀 나았다.
낙원이 박목화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놈은 일하던 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놈의 시선을 받자 낙원이 웃다가, 점차 얼굴이 굳었다.
기분이 상했다. 어지러웠다.
상당히 불쾌했다. 수많은 말이 머릿속에 엉켰다.
그런데도 엉킨 실타래 같은 말들 중에 어떤 것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화가 날수록 명료하게 정리되던 머릿속이 지금은 뒤죽박죽이었다. 확실한 건, 바닥에 온통 널려 있는 장미꽃들과 작업대 앞에 있는 놈을 보면 화가 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는 놈의 팔을 잡았다.
“나가서 얘기 좀 하자.”
“……”
박목화가 짧게 숨을 내쉬더니 손에서 가위를 놓았다. 통 속으로 가위가 떨어졌다. 놈은 잡힌 팔을 굳이 뿌리치지 않고 따라 나왔다.
가게를 나서기 전 낙원은 문가에 서 있던 둘째를 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겉옷.”
둘째가 얼떨떨한 얼굴로 낙원의 손을 쳐다보고 서 있자 안쪽에 서 있던 셋째가 재빨리 안쪽에 있던 형님의 점퍼를 꺼내왔다. 낙원은 한 손에 옷을 받아들고 놈을 잡아 끈 채로 가게 문을 열었다.
계단을 내려가 주차장에 있던 차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낙원은 놈에게 점퍼를 걸쳐준 것을 제외하고는 돌아보지 않았다. 놈은 어깨에 옷을 걸쳐주었을 때만 잠깐 움찔했을 뿐이었다. 생각 외로 놈은 잠자코 따라왔다.
차 안으로 들어가 히터를 틀 때까지도 낙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뭔가 말을 하려던 낙원이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어떤 부분에 정말로 화가 난 건지 알 수가 없어져서였다.
약속을 어겨서? 아니면, 놈에게는 약속이 아니라서……?
그런 것 따위 언제 상관했나. 김낙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차 안의 시계는 3시를 알리고 있었다. 아직 8시까지는 한참 남았다.
그때까지 끌고 갈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놈이 무어라 하던 좀 도와주다 적당히 놈들에게 맡기고 뜨게 하면 그만이었다. 따라오게 할 말은 얼마든지 많았다. 정애 누님 일 좀 방해해주겠다던가, 하다못해 동생들에게 놈이 약점이 되듯 거꾸로 동생들을 약점 삼아도 되는 노릇 아닌가.
계획을 지키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약속이 되는 거였다. 억지로 끌고 가도 좋지 않냐고 놈에게 강요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낙원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늘 알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분노였다. 화가 났는데도 평소와는 달리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차가운 머리로 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핸들 위를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차창 앞으로 역사에 붙어있는 하얀 꽃집이 보였다. 그 꽃집 안에는 놈의 동생들과, 정애가 보낸 꽃 더미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은 했을 녀석이, 아무런 미련 없이 일하기로 결정하게 만들었을 그 꽃 더미.
“……”
옆을 돌아보자 놈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낙원은 자신이 웃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놈의 시선을 따라 입가를 만져본 그가 피식 웃었다. 왜 화가 났는지 갑자기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애가 보낸 꽃에도 지는 게 짜증이 났던 거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낙원은 피식피식 웃었다. 내가 아까 같은 방식으로 화를 내게 될 줄이야.
놈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호의를 퍼붓고 일상에 매어두는 것 정도는 정애도 했다. 아니, 그 여자는 '여자' 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위에 있었다.
누님, 좋은 말이지. 낙원은 웃으면서도 얼굴이 다시 굳는 것을 어찌하지 못했다. 자신이 돌아오라고 했어도, 그 돌아올 꽃집을 마련해준 건 여자였다. 놈은 '누님의 꽃집'에 돌아온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우선하는 건 형님일 것이다.
언젠가 전화벨이 울리면 놈은 미련 없이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미친 소의 뿔로 돌아갈 터였다……
그때였다. 놈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들려, 낙원은 피식 웃었다.
“됐어.”
자신이 바란 건 사과 따위가 아니었다.
사과를 할 정도로, 어찌되었건 만나주지 않으면 미안한 놈의 '일상'에 속하기를 바랐던 게 아니었다. 낙원은 처음으로 분명하게 자각했다.
그는 놈에게 일상 이상이기를 바랐다.
전화가 울려도 놈이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놈을 이 일상에 붙잡아 놓을 수 있는 쐐기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놈은 절대로 배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호의를 퍼붓는 동안은 자기 것이라고, 그렇게.
놈이 배반하지 못하는 것은 미친 소라는 것을 깜빡 잊은 채.
기껏해야 누님이 보낸 염병할 꽃 하나에 밀려나는 자신이 놈을 붙잡을 거리가 될 리 없었다. 자신이 그간 눈을 가리고 있었던 진실이 무엇인지 낙원은 처음으로 자각했다.
자신은 놈의 약점이 되지 못했다. 놈에게 위협할 거리로도 써먹을 수 없다는 점에선, 정애나 동생들보다도 놈에게 차지한 부분이 작었다. 아니 어쩌면 놈의 배에 두 번이나 상흔을 남긴 그 조 뭐라는 놈보다도 적을지도 몰랐다.
당연한 일이다. 머리로는 알았다. 그러나 다시 웃음은 사라졌다.
“……”
코트를 뒤져 담배를 찾으면서 낙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알았을까. 이 김낙원이 고작 꽃 따위에 밀리고 이 정도로 자괴감을 느낄 줄 말야.
그래도 웃음이 나오지 않아서 그는 담배를 물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는 불을 붙이면서 놈에게 말했다.
“올라가라.”
첫 모금을 빨아들인 그는 연기를 내뿜으면서 겨우 웃었다. 패배한 기분은 좆같았다. 더 좆같은 건 졌다는 걸 알면서도 뛸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잃을 걸 뻔히 알면서도 주식 판에 기웃거리고 도박에 뛰어드는 놈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이며 손 털고 일어나기에는 늦었다. 혹시, 라는 장밋빛 기대보다도 그쪽이 더 진실에 가까웠다. 놈에게서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단지 재충전에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내일 오마.”
한 대 피우고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이다.
낙원의 말에 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에서 나갔다. 언뜻 들려오는 캐럴과 사람들 사이로 선명하게 보이는 커다란 하얀 점퍼를 눈이 아프게 노려보다가, 낙원은 채 한 대를 다 피우지 못하고 아직 긴 담배를 버렸다.
지금 카페에 가서 12시까지 있으면 제대로 차인 놈처럼 보이겠군.
생전 처음으로 맡는 역할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출발했다.
“……”
박목화는 의아했다. 말이 많은 놈이라 빈정대고 화를 내다 제풀에 그만둘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낙원이 그렇게 웃지도 않고 소리 없이 화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박목화는 올라오면서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했던 약속이라고는 해도 어딘가에 예약이라도 잡아놨다면 화를 내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사과를 해도 말없이 있다 가버릴 줄은 몰랐다. 매일 오던 놈이 반년 만에 한 부탁을 자신이 너무 가볍게 생각했나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꼭 오늘이어야 하나.
오늘이 그렇게 대단한 날인가. 크리스마스라니, 아주 어릴 때 외에는 그다지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자각도 없이 지나보내며 살아왔다. 목화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꽃집 문을 열었을 때였다. 그는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형님, 이렇게 자르면 되는 거지요?”
칼 들 때의 몸짓으로 둘째가 긴 가위를 들고 포장지를 자르다 돌아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접는 게 맞지요 형님,”
셋째가 마권 접듯 잘린 포장지를 열심히 접고 있었고, 넷째와 막내는 뒤에서 양동이에 한가득 물을 떠와 장미 겉잎을 하나하나 떼는 중이었다.
“거 빨리 빨리 못하냐. 이렇게 많이 쌓였구만. ……아이구 형님, 오셨습니까요.”
그리고 한창 이것저것 지시를 하던 원일이 그를 돌아보고는 90도 각도로 인사한다. 도구도 동생들도 너무나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일사불란하게 일하는 모습에 목화는 잠시 놀라 입을 떼지 못했다. 테이블로 걸어와 그동안 해놓았던 것을 점검해보았지만 그 동안 이상하게 일하고 있었던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형님의 놀란 얼굴을 본 김원일이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핫핫핫, 형님 놀라셨지요.”
“……그래.”
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알고 한 길만 가는 동생이 이토록 자신이 하는 것을 잘 보고 따라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자 김원일이 더더욱 커다랗게 웃었다.
“저희가 그동안 누님 가게에서 일 좀 배웠죠. 그 악덕공장주 양반도 몇 번 왔……”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원일이 재빨리 말을 흐렸다. 목화는 아까 원일이 지시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녀석이었나.
“누님을, 도왔다고?”
원일이 미적미적거리더니 조금씩 털어놓았다.
“에 저 그게…… 그러니까, 그때 여름에 말입니다. 형님이 입원해계실 때 누님도 병원에 계시다 퇴원해가지고, 일이 잔뜩 쌓여서 그 양반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는 일마다 자랑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아까 놈을 그냥 보낸 게 조금 더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목화가 생각을 접으려고 했을 때였다. 원일이 목화의 뒤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하여간 그 양반 성격이 보통이 아니던데 얌전히 갔습니까?”
아까 못내 웃지 않고 담배를 피우던 놈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일이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경찰 주제에 해코지는 안한단 말여……' 그리고 목화가 무어라 할 틈도 주지 않고 엄지를 세우는 것이었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전후의 인과관계는 알 수 없었지만 원일의 결론은 그런가 보았다. 확실히 놈은 경찰치고 해코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적대를 하면서 드나들 때부터도, 놈은 차라리 백수 취급을 받을지언정 이 역사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경찰이라고 알린 적도 그가 전과자라고 알린 적도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호의를 베풀기 시작한 뒤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목화는 몇 달 째 여기서 잠복을 하는 형사들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다. 간부인 놈이 어떻게 했으리라. 대개 손을 턴 전과자들이 형사들에게 시시때때로 시달리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형님 그런데 대체 종이를 어떻게 말면 줄기에 감깁니까?”
잠시 얼굴을 찌푸렸던 목화는 셋째의 도움 요청에, 더 이상 놈에 대한 신경을 끊고 안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녀석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직접 말고 포장을 해야 하는 것은 그였다.
내일 온다고 했으니 내일 한 번 더 사과를 하자.
기왕 일하려고 남았다면 일하는 게 옳았다. 목화는 결론을 내고 돌아섰다.
“이야, 잘 팔리네요.”
원일이 장미가시를 바쁘게 떼면서 감탄했다.
크리스마스 정도가 무슨 이벤트겠어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그들의 짐작은 어버이날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빗나갔다.
저녁이 되자 딸랑딸랑, 문에 매어놓은 종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손님은 자꾸만 들어왔다. 전철역 앞에는 트리 장신구를 팔던 트럭에 이어 케이크 트럭도 등장했다. 평소라면 잡상인들을 그냥 두지 않을 역사직원들도 오늘만은 오천 원짜리 케이크를 기분 좋게 사가고 있었다.
“케이크도 무지하게 잘 팔리는데요.”
넷째도 놀랐는지 중얼거렸다. 케이크를 손에 든 사람이 들어와서 장미 한 송이씩 사가는 경우도 많았다. 빨간 장미만 묶어서 만든 다발도 생각 외로 잘 나갔다. 꽤 많이 준비해뒀다고 생각한 것도 동이 난 것은 금방이었다.
8시는 일하는 사이에 정신없이 지나갔다. 허리를 폈을 때에는 9시 40분, 이미 열 시를 향해갈 무렵이었다.
이런 날 그렇게 가자고 졸랐단 말인가.
목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놈은 가끔씩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억지를 부리고 일상을 비틀고 싶어 했다. 여름에 휴가를 부르짖을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또였다. 그렇지만 비수기라면 몰라도 가게가 이렇게 바쁜 날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고 목화는 속으로 놈을 달래듯이 생각했다.
10시가 되자 정애누님이 왔다.
“목화야, 여기 선물.”
붉은 색의 패딩점퍼를 입고 하얀 목도리를 두른 누님이 건넨 것은 전철에서 팔던 5천 원짜리가 아니라 외국어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있는 제과점 케이크였다.
케이크라니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어쨌든 누님이 사오신 케이크다. 일 잘 했냐고 동생들에게 묻는 누님은 그 빨간 옷 때문에라도 어딘가 어린 시절 상상했던 산타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진짜 잘 했다니까요 누님.”
애처럼 칭찬을 바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는 원일이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그래, 고기 먹으러 가자.”
몸집만은 어른인 동생들이 진짜로 바라는 선물을 주겠다는 누님의 말에, 온 가게에 함성이 일었다.
“누님-!”
다섯 놈들 모두가 소리를 지르자 가게가 웅웅 울렸다. 각자 빠르게 택배모자를 챙겨든 동생들이 가게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고기만 머릿속에 들어찼는지 녀석들의 동작은 매우 빨랐다. 모자 로고를 본 정애가 왜 이렇게 다르냐고 웃고 있었을 때였다.
한참 웃던 정애가 가게를 둘러보더니 한 마디 했다.
“오늘은 형사양반이 안 왔나보네.”
목화가 대답하기도 전에 원일이 먼저 이야기했다.
“아, 왔다 갔어요.”
누님은 그래? 하고 더 이상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크리스마스니까' 라고 중얼거렸다.
어느새 놈이 누님이 물어보는 게 당연한 사람이 되었나. 묘한 기분이 된 목화가 누님의 그 말에 문득 신경이 쓰여 물었다.
“크리스마스면, 뭐 특별히 만나야 하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응? 하고 정애가 돌아보았다. 그리고 상식으로 여겨지는 것도 너무 모르는 동생이 안쓰러웠는지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다들 애인 만나잖니. 그래서 요즘은 애인 없는 사람들이 뭐라고 난리도 피운다더라. 나도 지영이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그런가요, 하고 목화는 입을 다물었다. 놈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목화는 더 알 수가 없어졌다. 애인들이 만나는 날이라면 더더욱 남자 둘이 어딜 가서 앉아 있는 것도 이상할 듯한데, 왜 그렇게 가기를 원했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누님, 갑시다!”
그때 택배 모자를 모두 눌러쓴 놈들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목화도 옷을 입었다. 정애가 나가면서 투덜거렸다.
“글쎄 그 누님 소리는 좀 그만하래두……”
이 카페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처음 보았다.
낙원은 스툴에 앉아 카페를 돌아보았다. 혼자 버틸 거면서 4인석 자리를 차지하기도 뭐해서 앉은 자리였다. 주인이 신경 쓰지 말라고 이야기했지만 담배를 피우기에도 이쪽이 더 편해서 옮겨 앉았다. 아르바이트생이 문이 열릴 때마다 '만석입니다', '죄송합니다, 만석입니다' 하고 외치고 있는 걸 보면 단골답게 행동해준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묘하게 착해졌단 말이야.
낙원이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한지 잔이 빈 것을 볼 때마다, 주인이 리필을 해준 탓에 아직도 까만 액체가 반쯤 차 있었다. 여기 커피는 매우 진해서 연달아 마시자 이미 속이 좋지 않았다. 더 이상의 리필은 됐다는 표시로 일부러 손을 대지 않고 있는 커피였다.
기분풀이로 하는 인맥관리도 모두 끝났다. 돌아가며 전화했더니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 다시 갈아 끼운 참이었다. 오는 길에 기분풀이 용으로 사왔던 재테크 관련 서적들도 이제 다 읽어갔다.
'10억으로 00펠리스 입주',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 '종자돈 10억으로 부자……'
재테크로 정말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을 유혹해서 주머니를 털고, 아마도 작가만을 부자로 만들어 줄 이런 책들은 언제나 읽는 재미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트릭이 나오는 탐정소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즐겁게 읽을 수도 있으면서, 동시에 어디에서 들춰보고 있어도 그를 '소시민'으로 보이게 해주는 훌륭한 아이템인 것이다. 이쪽 코너를 기웃거리는 젊은 여자를 유혹하는 것도 과거엔 딸려오는 즐거움 중에 하나였더랬다.
어쨌거나 더 이상 읽을 게 없었다. 다섯 권이 모두 증권사에 돈을 받아먹었는지 아무리 넘겨보아도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걸 보면, 재테크서적을 가난한 출판사 직원이 모두 대필하고 있다는 설도 꽤 신빙성이 있어보였다.
비웃는 재미도 없어 책을 아무 의미 없이 뒤적거릴 무렵, 아르바이트생의 '만석입니다' 라는 말을 뚫고 남자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아니 난 저기에 앉으면 되니까.”
그리고 남자가 그렇게 말을 하자마자 설거지를 하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주인과 눈을 마주친 남자가 반갑게 소리를 냈다.
“야아, 오랜만이다.”
시끄럽던 소음을 뚫고 들려온 소리는 꽤 선명했다. 주인이 역시 반가워하는 얼굴로 인사했다. 낙원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앉아서 메뉴판을 받고 막 넘겨보더니 커피를 시켰다. 낙원은 심심했던 김에 책을 펼쳐놓고 적당히 시간이 되면 페이지을 넘겨주면서 귀를 기울였다. 남자가 주인이 만들기 시작하는 걸 보자 탄성을 내질렀다.
“진짜로 카페를 하네.”
신기해하는 목소리였다.
“난 네가 ……로 돌아올 줄……”
주문내용을 소리치는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 때문에 띄엄띄엄 끊겨서 들렸다. 여기 주인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카페하기 전에 전직이 뭔지는 몰라도 전 동료 정도의 관계가 아닐까, 낙원은 추측했다.
문득 자신이 어째서 두 달 간 이 카페에 줄기차게 드나들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잘 끊이는 것과 별개로, 여기 주인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커피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 위화감이 들었다.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게 어울릴 느낌이, 아마도 그에게는 놈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씁쓸한 기분이 든 낙원이 조금 식기는 했지만 반쯤 차 있던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때였다. 주인이 뭐라고 남자에게 대답하더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주인의 마지막 한 마디만이 귀에 꽂히듯이 들어왔다.
“……나도 이제는 성격이 많이 유(柔)해져서.”
그 순간 김낙원은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커피를 뱉을 뻔 했다.
“……!”
그가 이 두 달 간 드나들면서 봤던 아르바이트생만 해도 이십 명을 넘었다.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고 이틀 이상 간 아르바이트생을 그는 많이 보지 못했다.
일주일을 넘기면 잘 넘기는 편이었다. 어찌나 주인이 아르바이트생을 혹독하게 다루는지, 까다로운 아마추어가 가게 주인이 되면 저렇게 된다고 생각했던 게 며칠 전이었다. 그날은 아예 낮에 아르바이트생이 없어서 주인이 직접 주문을 받으러 다녔던 것이다.
지금 '만석입니다'를 외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만 해도, 그가 스툴에 앉아있는 동안 주인으로부터 커피 잔에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리고 스푼을 무슨 방향으로 놓는다는 것까지 일일이 지시를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입으로는 예-예- 하고 있지만 눈썹이 축 처진 것을 보아하니 솔직히 내일까지나 버틸지 의문스러웠다.
“야, 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냐? 손님한테 친절한 걸 네 성격이 나아진 걸로. 너 원래 인턴한텐 가차 없었어도 환자한테는 친절했다고.”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비아냥거렸다. 당신 뭘 좀 아는군, 하면서도 주인의 전직을 알게 된 낙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야, 의사였냐.
세밀한 부분까지 깐깐한 걸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의외는 의외였다. 박목화와는 정반대의 부류에서도 오로지 위화감만으로 비슷하다고 느꼈다는 게, 자신이 꽤나 놈에게 집착하고 있었다는 반증 같아서 김낙원은 다시 커피를 넘겼다.
남자가 주인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는 아르바이트 생을 턱으로 가리키더니 혀를 쯧쯧 찼다.
“너 솔직히 말해봐, 쟤 얼마나 고생시켰어?”
“고생은 무슨.”
주인이 간단히 넘겼다. 잘해봤자 어제부터 일한 애니 정말로 고생은 얼마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전직 동료가 미심쩍은 얼굴로 앉아있더니 곧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미스 박은 결혼해서 퇴직했다는 둥, 누구는 결혼한 게 언제인데 너무 바빠서 애를 가질 수가 없다는 둥.
낙원은 곧 그쪽에는 신경을 끊었다. 몇 년만이냐던가, 그래도 한국에 돌아와서 반갑다는 소리는 나왔어도 왜 그만뒀냐는 이야긴 없었다. 전 동료인 의사가 이유를 묻는 게 아니라 그저 이렇게라도 만나서 반갑다는 소리를 한다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카페가 계속 유지만 된다면 그로써는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세상엔 생각 외로 기묘한 사람이 많은 법이다.
그가 연수원 나와서 경찰이 되었을 때에도 신기해하던 사람들은 많았다. 꼭 가던 길 끝까지 갈 필요 있냐고 반문하면, 그런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해서 그를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 그러고 보면 자신도 처음엔 박목화에게 어째서 가던 길 끝까지 가서 객사하지 않느냐고 화를 냈었지.
……매우 오래전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고작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리필해 드릴까요?”
“아, 예.”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려던 걸 잘못 말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내일은 빨간 날이었다. 속이 좋지 않아도 출근할 일은 없었다. 식은 커피 잔을 가져가 씻는 카페주인을 보면서, 어찌되었건 그 사람 잡는 깐깐함으로 맛있는 걸 내놓으면 좋지 않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길을 틀었으니까 놈을 만났다.
놈을 만나고 나서는, 아예 그 길조차 버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미 떠올리기도 무안할 정도로 울고불고 총을 쏘고 별 지랄을 다 해놓고는 뭘 뻗대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진다는 건 기분이 더러운 일이지만 놈에게라면 이미 승패가 끝난 얘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호의에 약한 놈이 정애의 호의와 자신의 호의 중에서 무언가를 선택할 일이 없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오늘처럼 꽃에도 진다는 건 자신만이 알면 족했다.
놈의 머리에 '선택'을 넣게 해서는 안 된다. 생각이 없을 때 더 많은 호의를 퍼부어야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박광우에게 부름이 왔을 때 가는 놈을 붙잡아도 이상하지 않도록, 은혜를 인질 삼을 수 있도록 평소에 착실히 준비해둬야 한다.
그래서 그는 새 커피에는 거의 입도 대지 않고 일어났다.
“더 있다 가셔도 됩니다.”
주인이 그렇게 말했지만 벌써 11시 반이 넘어 있었다.
“아닙니다. 가봐야 할 데가 생각나서.”
보나마나 놈은 그 동생들과 함께 고기나 구워먹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라고 그 깡패새끼들의 입맛이 바뀔 리가 없었다. 정애가 어디서 5천 원짜리 케이크나 가져오지 않았으면 다행이었다.
“이제야 연락이 오셨나봅니다.”
주인이 계산할 때 한 말에 낙원은 피식 웃었다.
“아니오, 이제 연락 해볼까하고.”
받는 것도 아니다. 고작 전화를 걸자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기분이 좋아지는걸 보면, 정말로 자신에게는 놈이 꽤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놈과는 반대였다.
어쩔 수 없지.
미친 소를 쫓는 동안 어떻게든 그물에 걸려든 뿔에 계속해서 거미줄이라도 쳐보면, 언젠가 거미줄이라도 단단한 밧줄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계산한 다음 뒤에 있는 주차장으로 나가면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바깥은 생각 외로 쌀쌀했다. 비가 온다더니 눈이 올 지도 모르겠군. 하늘을 쳐다보자 별 하나 보이지 않고 구름이 깔린 것이, 새벽녘에는 눈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라이드를 밀고 박목화의 번호를 누르면서 차를 찾았다. 귀에 댄 핸드폰에서는 띠- 하고 송신 음이 나면서 띠리리, 띠리리, 컬러링 하나 되어 있지 않은 놈에게로 전화가 걸리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길가의 가로등 불빛과 몇 시간 전의 기억을 의지해 그는 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기집이 시끄러운지 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핸드폰에서 들리는 소리에 낙원이 막 핸드폰을 내려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려 했을 때였다. 잠깐 옆으로 돌려진 핸드폰 불빛에, 은회색의 날카로운 빛이 비쳤다.
“……!”
검정색 옷이 비친 순간 그는 직감적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그가 한발 늦은 뒤였다. 상대가 앞으로 튀어나온 순간 손에 들린 물건의 정체가 드러났다. 20cm 가량의 날카로운 칼이었다. 낙원은 피하려 했지만 팔을 휘두르는데 그쳤다.
……푸욱. 살에 은색의 칼날이 들어오는 소리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가깝게, 마치 효과음처럼 들렸다. 귀가 아니라 몸으로 들었기 때문이라는 건 나중에야 깨달았다.
몸이 크게 흔들렸다. 눈을 깜박였다.
등이 아주 차갑고 귀가 멍멍했다. 아주 느리게 느껴지는 그 한순간에, 크게 뜬 눈으로 칼날이 빠져나가려는 것이 보였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보다 다른 손이 훨씬 더 빨랐다. 상대가 다시 흉기를 쥐기 전에 온 몸으로 상대에게 부딪쳐간 건 순전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터억, 몸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머리로 울렸다. 시야가 흔들렸다. 부서진 안경처럼 계속 내려오려는 시야로 다시 뻗어오는 손이 보였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을 때였다.
“거기……!”
누군가 익숙한 목소리가 주차장을 웅웅 울렸다. 달려오기 전에 상대의 손이 칼을 다시 잡아챘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급격하게 의식이 흐려졌다. 눈을 깜박였다. 간극이 있었다.
“……”
희미하게 뜬 눈에 들어온 건 소리를 치고 있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까 그 의사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목화야……?”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던 목화가 잠시 멈칫했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였다. 형님이 왜 그러시나 멀뚱멀뚱 쳐다보던 동생들 중에 귀가 밝은 막내가 엇, 하고 소리쳤다.
“형님 핸드폰인데요.”
그러나 목화가 넘겨받았을 때에는 이미 부재중 통화로 전환된 뒤였다. 누구일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열어보자 예상대로였다. <낙원>이라고 놈이 입력한 이름이 떠 있었다. 고기집이 시끄러워서 듣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동생들은 핸드폰을 넘겨준 뒤에 다시 고기 판에 달려들어 먹고 있었다.
목화는 잠깐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찌되었건 원래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한 것은 녀석이었으니, 마음을 추스르고 전화까지 한 이상 지금이라도 같이 먹자고 이야기는 해줘야 하지 않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전화를 걸고 꽤 기다렸는데도 녀석은 받지 않았다.
“그 양반은 집으로 간 모양인데요, 형님.”
원일이 불쑥 끼어들어 이야기했다. 알고 있었나. 목화는 핸드폰을 내렸다. 진화를 거는 걸 원일이 보고 있었는지는 몰랐다. 목화는 '지금은 통화를……'이라는 음성이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는 핸드폰 플립을 닫았다.
그런지도 모르지.
“내일 오겠죠, 형님. 아, 여기 1인분 더 주세요-!”
원일이 여상하게 말하고는 아주머니에게 소리쳤다. 잠깐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던 목화가, 곧 핸드폰을 옆으로 치워놓았다.
원일이 말이 맞았다. 놈은 내일 올 것이다. 내일 오면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하자.
“12십니다. 케이크 자릅시다, 케이크……!”
둘째가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면서 외쳤다.
목화는 고개를 끄덕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