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11화 (10/34)
  • 11. 납치

    [그게 무슨 소리야.]

    낙원은 얼굴이 굳은 채 물었다. 어째서 놈이 여기서 튀어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잘못 들었겠거니, 낙원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서경위는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박목화에게 갔답니다.]

    [김선이?]

    두 번째 질문을 반복하고 나서야, 낙원은 자신이 바보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경위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글쎄요, 김반장님 말이라 자세한 건 저도…….]

    낙원이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났다. 양복 상의를 집어 들고 뛰쳐나오자 복도에는 어슴프레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뛰다시피 걸어가면서도 머리속은 복잡했다. 어째서 놈의 이름이 여기에 나오는 걸까. 김선의 행선지에 어째서 박목화가……

    뭔가 착오가 있겠지. 낙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주를 하고 있는 김선이 박목화에게 갈 이유가 없었다. 설마, 자기 사무실에 행차를 했을 때의 원한을 갚고자 도주하는 중에 들린 것도 아닐 테고.

    김선 성격이 유난해도 설마 그러진 않겠지. 그러나 비웃는 낙원의 얼굴 한 켠엔 이미 불안이 떠올라 있었다.

    어제 김선 사무실을 습격할 때 김반장이 잠복해있던 형사들을 불러 들였던 게 생각이 났다.

    박목화 혼자 놈들을 맞았다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냐, 낙원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놈은 혼자서 김선 사무실로 당당히 쳐들어가 김선 목에 칼을 들이대었던 놈이었다.

    김선에 똘마니 둘이 붙어있다 하더라도 그깟 놈들을 상대를 하지 못할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의 와중에도 불안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었다.

    일주일.

    일주일을 보지 못했다.

    ……그 사실이 이렇게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올 줄은 몰랐다.

    얘기 좀 들어보고 가보자.

    낙원은 간단한 마음을 먹었다. 오전 7시에는 벌써 문을 여는 부지런한 놈이니까, 그때 힐끗 보고 지나가면 아무 일도 없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걱정할 놈을 걱정해야지. 낙원은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벌써 조사실 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밤을 샌 홍형사가 서 있다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경정님이 내려오실 필요까지는……,]

    그를 보자 곤란한 얼굴이 되어 앞을 막으려는 홍형사를 낙원이 치웠다.

    [필요는 내가 정해. 박목화 얘기는 누가 한 거야?]

    홍형사가 주춤주춤 비켰다. 건너편이 눈에 들어왔다. 김반장이 어깨 한 놈을 붙잡고 윽박지르는 모습이 유리벽에 가로막혔는데도 불구하고 귀에 울리는 듯 했다. 밤새 강압수사라도 한 모양이지.

    낙원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저놈이 한 거야?]

    홍형사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 김선이 차까지 바꿔 타고 도망가는 마당에 박목화한테는 왜

    갔다든?]

    낙원이 묻자 홍형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요, 저희도 그건 잘……]

    홍형사의 말이 채 다 떨어지기도 전에, 낙원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경정님, 거길 그렇게 들어가시면……!]

    김반장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수갑을 차고 있던 어깨도 그를 쳐다보았다. 낙원이 어깨를 보고 싱긋 웃었다.

    [너냐?]

    김반장이 무어라 할 새도 없었다. 김반장이 앉아 있던 의자를 집어든 김낙원이, 수갑을 찬 어깨를 내리쳤다.

    [……!]

    어깨가 놀라 눈을 치켜떴다. 무어라 말하려는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낙원이 의자를 계속해서 휘둘렸다.

    두 번, 세 번, 등을 구부릴 사이도 없이 명치를 가격하는 바람에 어깨가 앉아있던 의자가 끼이이 뒤로 밀려갔다. 그 의자

    가 벽에 닿아 더 이상 움직일 공간도 없었을 때에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던 어깨가 간신히 소리 하나를 내질렀다. [말…….]

    김낙원이 다시 의자를 치켜들었다.

    [뭐.]

    똑같은 기세로 휘두르려는 찰나, 어깨가 컥컥대며 필사적으로 소리

    쳤다.

    [말할께요……!]

    [네가 뭘 안다고 말을 해?]

    낙원이 한 번 더 내리찍었다. 어깨가 숨을 들이킨 채 멈췄을 때였다.

    몸에 닿기 직전에 낙원이 멈췄다.

    [김선이 어딜 갔다구?]

    숨을 몰아쉬던 어깨가 간신히 대답했다.

    [박, 박목화한테요…….]

    낙원이 하, 소리 내어 웃고는 다시 의자를 치켜들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김선이 거길 왜 가?]

    제발, 이라고 하듯 수갑을 찬 손을 치켜든 어깨가 재빨리 소리쳤다.

    [박목화가 돈 있는 데를 불까, 조희용이랑 둘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다.]

    돈?

    낙원이 멈칫했다. 박목화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였다.

    [박목화가 무슨 돈이 있다는 거야?]

    되묻던 낙원의 머리에 갑자기 박목화의 돈이 스쳐지나갔다. 1억을 뽑았던, 바로 그 계좌……!

    의자를 팽개치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뒤로 공포에 질린 어깨가 '저도 몰라요…,' 하고 신음했다.

    방을 나갈 때까지 김반장이 낙원에게 말 한 마디 걸지 못하고 멍하니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낙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3년 전에 만들어진 계좌라고 했다.

    인출은 단 한번 뿐이었다.

    3년 전에 박광우가 무엇을 했는지 이제는 안다.

    매도차익 450억, W캐쉬의 자본금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본래 하던 사채업의 규모가 있었을 테니 그 돈을 고스란히 쏟아 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박광우가 놈의 몫으로 얼마를 떼어줬을까?

    [서경위, 그때 그 계좌 추적했나?]

    방으로 뛰어 들어온 낙원을 경위가 놀라 쳐다보았다. 새벽 6시였다.

    [아니오, 아직……]

    낙원이 시계를 쳐다보았다. 은행이 열려면 아직 세 시간 반이나 남아 있었다.

    [문 여는 대로 그것부터 알아봐.]

    돌아서는 낙원의 등 뒤로 서경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그때 전화하지.]

    낙원이 짧게 말하고 방을 나섰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간이면 이미 놈은 출근했을 것이다. 놈은 꽃집에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 * *

    [정신 못 차리는데. 약이 좀 많았던 거 아냐?]

    [아까 이 새끼 달려드는 걸 보셨잖습니까. 약이 많았을 리가 있나요.]

    흐으, 목화는 신음을 삼켰다. 목구멍 안쪽이 화끈거렸다.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물. 필요한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말도, 신음도 여기서는 내서는 안 되었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평생을 그를 지탱해온 무의식이 단단하게 목을 잠가 놓았다.

    [이렇게 정신 못 차리면 들을 것도 못 듣는데…….]

    잘 아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집중하기 전에 의식은 누님의 머리카락처럼 산산히 흩어졌다.

    ……

    한낮이었다. 하얀 햇빛이 역사 계단으로 쏟아져 내렸다. 촤아-, 양동이 물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하얗게 빛났다. 빙그르르, 양동이가 한 바퀴 돌았다. 그 위로 비친 건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전의 만남이 마지막이라고 여겼던 막내의 얼굴에, 그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

    여기엔 어째서, 라고 물으려 했을 때였다. 막내가 웃었다. 비열하게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막내의 말이 귓전에 울렸다.

    '고속터미널에 누님이 있다면서요.'

    막내의 시선이 계단 너머를 향했다. 그의 시선이 따라갔다. 은색의 본넷이 하얗게 빛났다. 막내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들어있던 건 익숙한 색깔의 머리카락 한 줌이었다.

    목화가 그 머리카락을 받아 쥐었다.

    '따라오시죠, 형님.'

    빈정대듯 말하는 투에는 이전의 자신을 부를 때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늘은 어쩐지 형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일이 있을 때에는 혼자인 범이다. 머리카락을 쥔 채 목화는 조희용을 말없이 따라갔다.

    차 앞에 서자 선팅된 창문이 내려갔다. 덜컹, 작게 열린 틈새로 목화는 똑똑히 누님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보는 정애누님이, 차 안쪽 구석에 처박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뜨고 있었다.

    몸을 가눌 수 없는 듯 했다. '누님,' 목화가 소리를 냈을 때에는, 차 안쪽에 타고 있던 놈이 바로 창문을 올려버린 뒤였다.

    '약 한 방에 저렇게 가던데. 같이 가시죠,'

    조희용이 옆에서 말했다. 누님을 실제로 본 목화는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 시간 끌 틈이 없었다. 차 문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조가 옆에서 속삭였다.

    '이상하게 굴면 바로 차 빼버릴 테니까-.'

    놈의 손에는 주사기가 쥐어져 있었다.

    목화는 아무 말 없이 소매를 걷고 팔을 내밀었다.

    한낮, 거리에 사람은 많았지만 그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팔이 따끔했다. 목화는 조희용이 차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이미 누님을 잡고 있던 놈은 안쪽으로 들어간 뒤였다. 김갑선이었다.

    '오랜만이군,'

    비열한 웃음이 눈앞을 스쳤다. 어질, 세상이 흐릿해지려는 찰나 주저앉듯 차 안으로 목화가 몸을 실었다. 조희용이 따라 들어와 차문을 닫았다. 목화가 고개를 숙였다.

    '출발해,'

    시동을 계속 걸고 있던 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이를 악 다문 목화가 차 안에서 김갑선을 확 밀쳤다.

    '……!' 김갑선이 쏠린 순간 반대편의 차문을 박목화가 열었다.

    탕, 문이 세차게 열리며 출발하던 차의 기세에 힘없이 문에 기대어 있던 정애가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끼이익, 뒤에 오던 차량의 급정거 소리가 요란하게 도로를 울렸다.

    이미 이쪽은 몇 미터 움직여 나간 뒤였다. 정신이 흐릿해졌다. '이 새끼가……!' 김갑선이 뺨을 갈겼다. 철썩, 목화는 힘없이 엎어졌다. '돌아갈까요,' 운전석에서 누군가 물었다. 그래도 끝까지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하던 목화가, 김갑선의 말에 드디어 정신을 놓았다.

    '씨팔, 그냥 출발해'.

    누님. 정애누님. 많이 다치시면 안 될 텐데, 뒤차가 잘 섰어야 할 텐데.

    목화가 손에 그때까지 쥐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산산히 흩어지고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그 외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었다…….

    [어지간히 정신 못 차리네.]

    [약은 정량이 맞는데…….]

    자신 없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조희용이었다. 몇 년을 그의 뒤에 숨어 그를 졸졸 따르던 그 목소리. 이 3년간 그에게 수없이 꿈을 꾸게 했던 그 목소리였다. 왜, 네가 왜, 수없이 묻고 또 물으며.

    [차라리 약을 더 넣죠, 하여간 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자백젠데.]

    [그쪽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인질도 없는데 맨정신을 저놈이 불겠어?]

    김갑선의 목소리였다. 뭘 불라는 걸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헤매던 목화는 잠시 생각했다. 저번에 한 일에 대한 보복이 아니었나. 나에게서 들을 게 뭐가 있던가.

    인질도 없다는 소리에 그래도 약간 정신이 들었다.

    누님은 정말로 여기에 계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목화는 바로 생각했다. 그것만은 의식이 뚜렷했다. 놈들이 뭔가를 들어야겠다고 작정했다면, 원하는 걸 들어줄 때까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같은 곳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이렇게 큰 안심이 될 줄은 몰랐다.

    여기 계시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목화는 안심하고 또 안심했다. 안심을 할수록 다시 저신이 흐려져갔다…….

    새벽, 도로에는 차가 얼마 없었다. 낙원이 밟고 또 밟았다. 흘깃 본 속도는 200을 넘어 있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낙원은 더 이상 속도계를 쳐다보지 않았다.

    끼이익-.

    꽃집의 30m 앞에서부터 브레이크를 밟은 뒤에야 간신히 차가 섰다.

    낙원은 차문을 열고 익숙한 길을 뛰어올라갔다.

    없었다.

    꽃집은 텅 비어 있었다. 오전 7시, 평소라면 높이 출근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꽃집엔 아무도 없었다. 낙원이 유리문을 밀어보았다.

    딸랑, 종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유리문은 힘없이 열렸다. 애초 잠기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박목화-…….]

    텅 빈 꽃집엔 그가 부른 이름만이 흘렀다.

    리본대 뒤에까지 들어갔던 낙원이, 꽃집 안에 울리는 자기만의 발소리에 몇 걸음 걷다 정신을 들었다.

    여기에서 놈을 찾고 있어보았자, 없는 놈은 없는 거였다. 낙원은 도로 꽃집을 빠져나왔다.

    나와서 보자 꽃집 앞에는 채 들여놓지 못한 모판이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가게를 닫을 시간도 없었던 거다.

    놈은 끌려갔다.

    믿을 수 없는 눈앞의 현실에 낙원은 잠시 서 있었다. 정신이 들자 제일 먼저 튀어나온 건 욕설이었다. 그래, 혼자서 김선 사무실에 왕림 했을 때는 언제고 겨우 똘마니 둘을 데려온 김선을 못 당한단 말인가?

    […….]

    -그래, 그건 말이 안 돼.

    낙원은 그 자리에 선 채 생각했다.

    김선이 사라진 건 낮이었다.

    형사들은 김선 사무실을 덮치기 위해 불러두었다고 해도, 몸부림이 있었다면 일반 신고조차 들어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놈은 이 지하철 역에서 아이돌이고 스타였다.

    우락부락한 놈들이 몸싸움을 해서 끌고 갔다면 하다못해 요구르트 아줌마나 지하철 여직원이라도 경찰에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박목화는 자기 발로 놈들을 따라갔다.

    어떻게……?

    낙원이 막 생각하려 했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저기요,]

    돌아보자 역사의 여직원이었다. 드나드는 동안 낯이 익어 있었다.

    낙원은 사무적으로 인사했다. 직원이 그를 살피며 물었다.

    [친구 분 만나러 오신 거 맞죠……?]

    [예.]

    목소리는 왜인지 모르게 갈라져 있었다. 낙원이 목을 가다듬고 있자 직원이 알려주었다.

    [어제 이 앞에서 정애씨가 차 사고가 났거든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목화씨가 어딜 가셨는지 내내 연락이 안 되네요. 보호자가 없어서 찾고 있는데,]

    [……알겠습니다.]

    낙원이 여직원의 말을 최대한 부드럽게 끊었다.

    [어디라고요?]

    병원으로 가는 길엔 엑셀에서 거의 발을 떼지 않았다. 바보새끼, 낙원은 다시 한 번 욕설을 퍼부었다. 박목화가 어떻게 끌려갔는지 대강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자보지도 못할 연상여자한테 목숨까지 바칠 작정이냐.

    눈앞에 있었다면 시원하게 비아냥댔을 것을, 직접 하지도 못하니 속이 끓었다. 아주 누님에 죽고 누님에 살지. 김선이 그 누님을 끌고 오자 얌전하게 두 손 묶고 따라갔을 거다.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떻게 김정애가 끌려가는데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을까 생각하다, 어제 잠복했던 형사들을 불러들인 김반장을 생각하고 낙원이 이를 갈았다.

    새끼가 고속터미널에 배치했던 두 명까지 불러들인 것이다. 겨우 여덟 명 잡을 주제에, 기동대도 모자라 다른 곳에 잠복 중이던 형사들까지 전부 불러들인 저의가 뭐냐, 짜증이 물밀듯이 솟구쳤다. 위험했다.

    바로 이러니까 나 같은 놈한텐 총을 지급하면 안 되는 거야. 낙원은 김반장 위장이 빵구나서 죽을 때까지 괴롭혀주겠다는 생각으로 간신히 살의를 가라앉혔다.

    차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한 모양이지, 차 사고라고 한 걸 보니.

    그래도 같이 끌려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박목화는 지금쯤 이미 간이고 쓸깨고 다 빼준 뒤 여자와 함께 두 구의 시체로 거리에 나앉았을 거다.

    김선은 박선과 달랐다. 놈들에겐 민간인이라는 구분도 없었다. 혹여 구분이 있다면 '좆밥' 정도의 개념이리라. 얼마든지 쉽게 말아먹을 수 있는 사람들.

    약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겐 얼마나 잔인해지는지, 김갑선의 행적을 낙원은 알 만큼 알고 있었다.

    궁금한 건 왜 김정애가 신고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답은 도착하자마자 알았다.

    여자는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계속 저 상태입니까?]

    면회가 허락되지 않는 시간이라고 막는 간호사에게 경찰 신분증을 들이대고 들어온 참이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그러니까 왜 이 시간에 면회를 하냐는 듯한 얼굴로 답해주었다.

    [아, 지금은 진정제 때문에 그럴 꺼에요, 2시에 진정제를 놔줬거든요.]

    [지금은, 이라면……]

    [왔을 때도 저 상태였어요.]

    아침교대하기 전이라 피곤한 간호사가 귀찮다는 듯이 한 마디 덧붙였다. 낙원은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다.

    [심하게 부딪쳤나요?]

    간호사가 차트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교통사고 환자죠? 사고로는 좀 긁힌 것 정도구요. 선생님 말씀으로는 약물반응이 있었다고 하시던데요.]

    어떤, 이라고 묻기도 전에 낙원이 쳐다보자 간호사가 덧붙였다.

    [수면제요.]

    혼자 뛰어내리진 않았단 얘기군. 슬슬 상황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님을 본 놈이, 자신과 맞바꿔 차 밖으로 김정애를 밀러냈을 거다. 문득 담배가 당겼다. 짜증이 나서였다. 지가 뭐 얼마나 대단한 놈이라고, 여자랑 목숨을 바꿔……?

    그때였다. 김정애가 정신을 차리는 듯 몸을 뒤척이며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낙원은 여자에게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쨌든 이 여자가 목화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었다. 여자를 마구 흔들고 싶은 것을 참고 낙원이 여자에게 최대한 사무적으로 물었다.

    「김형사, 기억납니까……?」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던 여자의 눈이 깜박이더니 곧 눈물이 고였다.

    「박목화가, 잡혀가죠?」

    확인하자 여자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적으로 물었던 낙원이었다. 그러나 막상 여자의 대답을 듣고 난 뒤에는 가슴에 뭔가 얹힌 듯이 확 메여왔다. 몇 번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을 누른 김낙원이 눈앞의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너만 아니었다면', 입이 근질거렸다. 너 때문에 지금 박목화는 죽어가고 있을 거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여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김정애는 소리도 안 나오는 입으로 무언가 내내 달싹거리고 있었다. 낙원이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라구?」

    여자가 내내 달싹이던 말이 그의 귓전에 닿았다.

    「…은색…」

    낙원이 바짝 귀를 가져다댔다. 여자는 어젯밤부터 내내 달싹이던 말을, 울면서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은색 아우디, 서울 4에 32……목화……」

    * * *

    -목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 했다. 목화는 눈을 감은 채 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그렇게 부를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누님도, 형님도, 이곳엔 없다.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구. 정신 좀 차리게 해봐.」

    「좀 더 넣어볼까요?」

    「더 하면 골로 갈 텐데,……이봐, 그만두랬잖아!」

    팔이 따끔거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혔다…….

    이여싸나 이여싸나

    너른바당 앞을재연

    혼질두질 들어가난

    저승질이 왓닥갓닥

    이여도사나 이여도사나

    어머니는 해녀였다. 파도가 일렁이는 시퍼런 바다로 나아가, 한 길 두 길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해녀. 전복 따위를 캐는데 정신이 팔리면 숨이 막혀서 저승길이 오락가락 한다는 노래만을, 목화는 자장가로 유일하게 기억했다. 바다는 넘실거리는 검은 어둠이었다. 아래로, 아래로, 색깔 없는 어둠에 머리부터 풀려나와 떨어져가는 꿈을 목화는 어렸을 때부터 꾸고 또 꾸었다. 꿈은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곧 꿈이었다. 양수(羊水)에서 해수(海水)로 바로 흘러나온 작은 숨이 물에 가로막혔던 그 기억은 새벽마다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평생 섬에도 바다에도 가본 적이 없는 자신이 수없이 꾸었던 그 꿈 탓에, 삼촌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별 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 형이라 불러야 하는 반백의 남자를, 목화는 차가운 면회실에 가만히 쳐다보았다. 열아홉 살의 겨울이었다. 삼촌이었던 남자의 코트에는 눈이 물방울이 되어 붙어있었다. 일어나던 남자가 마지막으로 목화에게 한 마디 했다. '다시는 찾지 마라.' 하연이, 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목화는 알아들었다. 목화는 자신의 주먹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조카가 된 누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했던 짓은 결국 살인이었다. 한 번 친 것뿐으로 죽을 줄은 몰랐다고 했어도, 죽일 마음이 하나도 없었냐고 판사가 묻는 말엔 목화는 차마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자면 다 똑같은 년이라고, 너희도 까보라는 그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분명 살의(殺意)가 주먹에 피처럼 맺혀 있었다. 그래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버림받은 줄도 몰랐던 어머니의 존재를 알려준 이들은 십칠 년을 가족으로 살아왔던 이들이었다. 처음으로 감방에 들어갔던 그 해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의식(意識)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수없이 되뇌었던 익숙한 목소리가, 거칠어진 말투로 비아냥댔다.

    「시간이 많지 않다구요. 엄살 좀 적당히 피우고 입 좀 여시죠, 형님.」

    계속 버티면 몸에 안 좋을 거라는 상투적인 문구를 들으면서도 목화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차피 몰랐다. 알아듣지 못하는 위협을 듣는 동안 흐려진 정신이 3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덩치만 컸지 순했던 막내가 그의 뒤에 숨어 쫓아다녔던 그때로. 연락원을 하면서도 내내 놀림 받고 치이던 막내를 거뒀던 건 우연이었다. 그렇게 이 일을 하고 싶으냐고 목화가 물었을 때, 막내는 얼굴까지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막내가 자신을 불러내 찔렀던 그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묻고 싶었을 뿐이다. 너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느냐고. 어째서였느냐고. '와 그랬나'. 이젠 조카가 된 박하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답하고 또 답했지만 그녀의 물음은 물음이 아니라 물음표를 붙인 확신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귀에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러나 목화는 3년 내내 귀를 열어둔 채였다. 왜 그랬냐고, 내 탓이냐고, 사실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냐고.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를 흔들어온 의문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는 의문이었다. 신음처럼 고통처럼 목화는 그 의문을 누르고 또 눌러왔다. 형님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겐 뭔가 '문제'가 있었다. 자신은 영원히 알 수 없는, 타인만이 알고 떠나는 문제가.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자꾸 그를 버리고 못 믿을 리 없었다.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 의문은 꾸준히 그를 갉아 들어갔다. 사람들은 누구도 그를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약을 너무 많이 넘었단 말야. 왜 내 말을 안 들어!」

    「어제 봤잖습니까, 그 양을 맞고도 달려들었던 거.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안하는 거 보세요. 아직 더 버틸 수 있다니까요 이 새낀. 정말이예요.」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이 꿈틀거린다고 목화는 생각했다. 눈앞은 흐려졌다, 맑아졌다 도로 흐려졌다. 숨이 막혔다.

    「러시아 애들이 갖고 온 약이 뭐 얼마나 효과가 있겠어요. 자백제라는데 입 한 번 안 여는 것 좀 봐요. 더 넣어보자구요. 시간이 없다면서요-.」

    흐려진 거울처럼 흔들리는 시야로 은색 점 하나가 날카롭게 다가왔다. 팔이 따끔하다는 감각마저,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 * *

    긴급 수배를 내렸다. 내리고 나니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었다. 낙원은 한참 사무실안을 서성대며 전화기와 시계를 번갈아 노려보다가, 뭐 하러 이러고 있나 스스로를 비웃었다.

    쳐다본다고 전화기가 울릴 것도 아니었고, 시계를 멈춘다고 시간이 안 가는 것도 아닌 것을. 낙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부러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어떤 불편한 자리에서도 최대한 편한 자세를 찾는 건 그의 특기였다. 낙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서경위는 은행 쪽으로 나간 뒤었다. 놈들이 끌고 간 때가 거의 2시 무렵이었으니, 이제는 박목화가 끌려간 지 벌써 만 하루가 다 되어가는 셈이다. 슬슬 놈들이 은신처를 바꿀 때가 되었는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려 했던 낙원이 곧 그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아무리 돈을 바라도 김선은 결코 길게 기다리지 않을 터였다. 은신처를 바꿀 때에는 박목화를 '버릴'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던 낙원이, 곧 다시 눈을 감았다. 문득 째깍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낙원은 시계를 뒤집어놓고 도로 눈을 감았다. 뭐가 어찌되었든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띠리리, 전화벨이 울린 순간 낙원은 소파를 부술 듯한 기세로 일어나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전화기 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익히 아는 것이었다.

    「경정님.」

    서경위였다.

    「여기 은행입니다만.」

    그래, 은행문이 열자마자 갔었지.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는 무척 격앙되어 있었지만 낙원은 사무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래, 얼마야.」

    「100억이랍니다……!」

    「……」

    -박광우, 이 미친 소새끼.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낙원이 비틀리게 웃었다. 한 몫 떼어줬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의 돈을 박목화 몫으로 은행에 묻어놓고 있었단 말인가. 웃음 뒤엔 곧바로 투덜거림이 뒤따랐다. 이 돈이 있는데 꽃집을 하고 있었던 건방진 새끼를 향해서였다. 이런 돈을 가졌으면 어디 로또 당첨자들처럼 해외로 튀든지, 옆에 경호원이라도 구르고 있어야지, 꽃집이나 하니까 납치를 당하지. 그러나 서경위는 아직 이 돈의 단위조차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런 돈이 개인 구좌에…박목화는 정말로 몰랐던 겁니까?」

    서경위의 물음에 낙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목화가 알았다면 차라리 좋겠다. 놈들은 알까. 낙원은 머리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이금액을 안다면 오늘 안에 박목화를 버리는 짓은 차마 하지 못할텐데. 낙원이 시계를 다시 돌려놓았다. 1시였다. 시간은 이미 만 하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면서 낙우너은 지시를 내렸다.

    「어느 지점이든 그 구좌에서 인출하려고 하면 일단 잡아놓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낙원은 전화를 끊었다. 아래에선 김선 은신처를 알기 위한 조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인된 바로는 어떤 은신처에도 놈들의 흔적 따윈 없었다. 아랫놈들이 잡였는데 김선이 자기 은신처에 맘 편하게 기어들어가진 않겠지. 또 다시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 두자, 생각한 낙원은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잠을 청했다. 그러나 막상 잠은 오지 않았다. 이건 일이야. 낙원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박목화를 찾는 게 아니라 김선을 잡으려고 하는 거라구. 전직 조폭의 목숨 따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인 낙원이, 문득 정말로 박목화의 목숨만을 생각할 놈들을 떠올렸다. 김일원과 동생들. ……그래, 놈들은 놈들이 더 잘 알겠지. 조회용이 아는 곳이라면 김원일도 알 것이다. 그 생각을 한 낙원이 바로 튕기듯 일어났다. 김원일은 어디에 있을까. 구역에 있는 의원(醫院)이라고 박목화가 말했던 걸  떠올린 낙원이, 방을 뛰쳐나갔다. 시간도 무엇도, 모든 게 일그러진 듯이 느껴졌다. 숨이 차왔다. 다시 한 번 물속에 거꾸로 쳐박히는듯한 느낌에,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해매던 목화가 담담하게 생각했다. 죽어가는 건지도, 몰랐다. 둔중한 고통이 밀려왔다. 의식 저편으로 사라져 가면 다시 올 대에는 한층 예리해진 칼날로 그를 후벼팠다. 점점 높아져가는 고통의 파고(婆高)에 정신은 하얗게, 점점 더 잘게 부셔져갔다.

    「독한 새끼.」

    발에 채인 목화가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었다.

    「……!」

    몇 마디의 욕설과 구타가 뒤에 이어졌다. 묶인 팔이 쓸려왔지만 그 감각조차 어딘가 일그러져 있었다. 억지로 눈을 뜨게 한 김갑선이 얼굴을 들이대었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목화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놈이 입가를 실룩거리며 말을 걸었다.

    「……편하게 가는 건 포기한 모양이지, 너도」

    가까이 얼굴을 댄 김갑선이 작게 속삭였다.

    「내 손에 가는 쪽이 더 편했을 텐데 말야.」

    실룩실룩,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갑선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마치 뭔가를 들었다는 양 조회용을 향해 소리쳤다.

    「신용금고란다. 나는 다녀와 볼 테니, 넌 이 새끼 잘 붙들고 있어. 아무 곳이나 주워섬긴 걸 수도 있으니까.」

    「말을 하던가요?」

    조회용이 신나서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김갑선의 뒷모습이 반쯤 어그러진 채로 비쳤다.

    「그래, 이 새끼는 알아서 하고.」

    만일 돌아와 은행을 확인할 생각이라면 숨은 붙여놓으라고 말해야 하는데도, 김갑선은 그렇게만 말하고 차로 가려고 했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끈 김선이 여기에 막내까지 떨어놓고 튀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목화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나 조회용은 말이 안 맞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조가 다가왔다.

    「알아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어떤 짓을 해도 괜찮다는 잔인함이 비릿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희번득거리는 조회용의 눈이, 목화가 마지막으로 본것이었다. 구역을 두 시간 꼬박 해매 다녔다. 박목화에게 먼저 듣지 않았더라면 애초 의원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엔 물어볼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만 지나면 소란을 떨 거리는 낮에는 조신한 창녀처럼 침묵을 지켰다. 노리빠들은 '노래방 영업 중'이라는 간판에 한낮의 하얀 달처럼 힘을 잃은 네온은 악착같이 켜두고 있었지만, 누가 들어갈지는 의문이었다. 똥개 한 마리가 거리 저편을 가로질러 그늘에 숨겨진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걸 본 뒤에야, 그는 깨진 벽돌 두어 장만 깔린 작은 미로 같은 골목들을 자기 발로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제법 여름 같은 햇살에 등에서는 땀이 났다. 단 2m를 들어와도 tu터를 내린 듯 달라진 세상에, 문득 돌아보면 전신주에 엉킨 전깃줄만이 이 거미줄 같이 좁다란 미로에서 사는 사림이 있음을 알리곤 했다 하기야 이런 길을 헤매는 사람도 있는데 사는 사람이 없으리란 법도 없지. 왜 자기 발로 찾아다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놈들이 내 얼굴은 아니까. 낙원은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곤 줄기차게 찾아다녔다. 몇 번씩 환상 같은 벨소리가 들려 핸드폰을 꺼냈다, 도로 집어넣는 일이 반복되었다. 미로에 빠진 자들이 그러하듯 출구가 있을까 생각할 때마다 박목화의 말이  떠올랐다. 놈이 말했으면, 있을 것이다. 놈을 형님으로 떠받드는 작자들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잠시 혀를 찼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 이런 골목에서 내내 놈의 등만 보고 다녔다면 그럴 법도 하다고, 낙원은 아주 잠시 납득했다. 한 귀퉁이가 떨어진 '의원'두 글자의 간판을 매단, 여관은 같은 의원을 발견한 건 그렇게 해매 다닌 지 두 시간이 지난 뒤였다. 계단에 올라서자 오래된 나무 계단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나름 경보장치인가 생각할 정도의 속도로, 카운터에서 덩치 두 놈이 튀어나와 하나는 앞으로, 하나는 뒤로 퇴로부터 차단했다.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낙원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김원일, 박목화 때문에 왔다-」

    「……어라, 그때 그 형사양반 아녀?」

    뒤를 막고 있던 놈이, 갑자기 친근한 소리를 냈다. 낙원이 뒤를 돌아보자 놈은 바로 김원일네 '둘째'였다. 아까 움직일 때에는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던 걸 떠올린 낙원이, 괜히 놈들이 여태껏 구역을 잡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배에 붕대를 감은 김원일이 내려왔다. 찔렸다더니, 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형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낙원이 피식 웃었다.

    「조희용이나 김선이 아는 곳을 대봐. 시체를 뒤도 한 일주일 들키지 않고, 차 한 대와 사람 넷 정도가 몸을 숨길 수 있는 서울 안의 장소로.」

    전일 낮부터 6시 사이에 톨게이트를 빠져나간 은색 아우디 차량은 없었다는 보고를 떠올린 낙원이, '형님의 일'을 말해주었다.

    「정애와 맞바꿔서 김선한테 끌려갔다, 바보새끼가.」

    「……!」

    김원일을 비롯한 놈들이 눈을 부릅떴다. 형님을 바보새끼라고 부른 탓일까, 김선한테 끌려갔다는 이야기 탓일까. 김낙원은 짐짓 태연한 척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 거기의 제분공장으로 가고 있어.」

    「관활에 청원하겠습니다.」

    서경위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김낙원이 맞섰다.

    「확실해지면 그때 불러, 시끄러워졌다가 튀면 어쩌려고 그래.」

    그때엔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그러나 서경위는 물러나지 않았다.

    「경정님이 단독 행위를 하시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서경위는 강하게 대답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경정님, 최소한 제가 갈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리십시오. 청원을 하고 갈 테니까요.」

    「그걸 언제 기다려……!」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김낙원이,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서경위는 그를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다.

    「단동행동을 하시다가 어떤 문제라도 발생하면 모두 경정님 책임이 됩니다. 2인 1조를 기본으로 하는 이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경정님은 현장 경험도 없으시고요. 똑같이 도주를 해도 조를 이루고 있으면 증인이 생깁니다. 절대로 단독행동은……」

    서경위는 단호했다. 너는 뭐 현장경험이 얼마나 있더냐, 고 반박하려던 낙원은 경대 졸업 2년인 서경위가 파출소 경험은 최소 4년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군대도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놈들이, 연수라곤 8주밖에 받지 않은 자신보다야 확실히 '경찰'에 더 가깝다. 같은 이유로 기동대와 움직일 때에도 어디까지나 현장 투입된 간부의 선을 지켜왔던 김낙원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낙원은 자신을 가라앉혔다. 조건은 다 같았다. 서경위 말이 맞았다. 단독행동은 금물이었다.

    「……제가 갈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경정님. 최대한 빨리 청원을 할테니까요.」

    왜 지금 와서 자신이 혼자 움직이겠다고 뻗대고 있었을까. 그걸 기다리지 못해서 혼자 뛰어들 생각을 했다니, 어지간히 흥분했던 모양이었다. 낙원은 몇 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남이 하면 '혼자 뛰어들려고 하다니 지가 슈퍼맨이야'라고 비웃었을 일이었다. 그런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낙원은 어떻게든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평소라면 서경위가 말릴 필요도 없이 당연히 청원 경찰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단독 돌격 따윈 자신의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담배 한두 대 태우며, 진정해. 놈의 일이라고 다를 건 없어. 김선을 잡는 게 중요한 거야. 놈이 중요한 게 아냐. 낙원은 스스로를 가라앉히고는 다시 전화기를 잡았다.

    「기다리지. 관할에도 청원을 넣어줘. 얼마 정도면 되지?」

    가라앉은 목소리에 서경위가 안심하는 게 느껴졌다.

    「30분 정도면 될 겁니다. 대 지급으로 넣겠습니다.」

    한 갑이면 되겠군. 낙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한 공장을 보고 차 속도를 늦추었다.

    「올 때 담배나 한 갑 사와.」

    완전히 평소로 돌아온 게 꽤나 기뻤던 모양이다. 담배라면 어지간히 질색을 하는 서경위가 밝게 대답했다.

    「옛!」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낙원은 천천히 차 속도를 줄였다. 진입로에 들어서자 햇빛이 한 겹 엷어졌다. 6월 초가 아니라 겨울의 오후 다섯 시인 것처럼, 차갑게. 아니, 냉기가 느껴지는 건 이곳이 폐공장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몇 년간 사람의 온기가 없었던 공장부지엔 차고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과거 제분공장이었던 꽤 커다란 건물이 낡은 그림자를 삐걱대며 그리웠다. 먼지 덮인 길의 양 옆으로, 과거 재료를 쌓아두는 창고로 썼던 건물들이 다 벗겨진 파란 페인트로 10가지 숫자를 단 채 슬레이트 지붕을 잇대고 있었다. 용케도 이런 곳을 찾는구나 싶었다. 낙원을 일번 창고 뒤쪽에 대로 잠시 창문을 연 채 그 황량하고 서늘한 공기를 맛보았다. 하얀 소복의 귀신 대신에 은색 아우디의 도폭들이 들락거리는, 현대의 흉가였다. 낙원이 차문을 열고 나왔다.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5시 30분이었다. 햇빛은 잘못 꽂힌 화살처럼 몸을 한껏 꺾고 있었다.

    * * *

    「형님,」

    조가 실실거리고 웃었다. 목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흐으, 폐를 비집고 숨이 가쁘게 빠져나왔다. 시야가 까매졌다, 노래졌다, 갈 때가 된 전구처럼 깜박거렸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쓰러진 목화의 앞에 조회용이 몸을 구부리고 앉아 속삭였다.

    「항상 남을 내려다보기만 하시더니, 내려다 봐지는 기분이 어떻수.」

    내가 언제 너를, 목화는 어떻게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바짝 마른 목구멍에서는 숨소리만이 간신히 빠져나올 뿐이었다. 귀에서는 이명(耳鳴)이 웅웅 울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갖은 폼은 다 잡았지. 앞장서서 깃발을 들면 따라가기나 하는 쫄병 기분을 알기나 하죠? 응, 형님.」

    바로 앞에 앉은 조회용이 은근하게 속삭여왔다.

    「뒤에 숨어 지내면서도 뭔가가 장치끝에 탁탁 걸리더라니깐, 김원일이 머리 한번 탁 치고 사내새끼가 라고 할 때마다 배때기를 콱 찔러 버리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어.

    그런데 만날, 이놈의 병신같은 팔다리가, 안 움직이더라 이거요.」

    "……."

    "언제 제일 안 움직였던 줄 아쇼? -당신 등 볼때."

    희번득, 조의 눈이 위험스럽게 움직였다.

    "괜히 그 때 배를 찔렀던 게 아니란 말야……."

    조희용이 그의 배를 뾰죽한 뭔가의 끝으로 가볍게 쿡쿡 찔렀다. 쓰러진 짐승을 건드려보듯이, 그렇게.

    "김갑선은 내가 겨우 금희 년이나 나이트 때문에 그러는 줄 아는데, 그깟 것들 때문에 내가 당신을 찌른 게 아냐. 물론 그땐 그년이 좋았으니까 별 짓 다 했지만 난 더 절박했어."

    목화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것을 확인한 조가 실실거리고 웃으면서 손에 든 흉기를 치켜들었다.

    불빛을 받은 흉기가 잠시 노랗게 반짝거렸다.

    "내 평생 당신을 후벼팠던 그날만큼 해방감이 느껴진 날이 없어. 보쇼, 지금은 이렇게 내 손이, 내 맘대로 움직인다구……!"

    흉기를 쥔 조의 손이,목화를 내리찍었다.

    쓰러져있던 목화의 몸이 움찔 튕겨 올랐다.신음도 비명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튄 것은 붉은 액체였다.

    하하하, 피를 뒤집어쓴 조희용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와 함께 찐득한 붉은 피가 바닥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차가웠던 시멘트 바닥이 점점 뜨끈해져갔다…….

    * * *

    부지 안은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낙원은 차에서 나와 말없이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은 무척 길었다. 힐끗, 낙원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6분이 지나있었다.

    앞을 서성대던 낙원이 차문을 열어놓은 채 운전석에 옆으로 주저앉았다. 담배를 입에 물려다, 혹시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내려놓았다.

    다시 차 안에 있는 시계를 쳐다보자,겨우 7분이 지나 있을 뿐이었다.

    삼십분이 꽤 길군.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놈이 사라진 지 이미 26시간째였다.

    만약 여기도 아니라면-…….

    청원을 기다리면서 30분을 또 허비하고 나면, 그때야말로 일주일 후에 시체로 발견될 놈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혼자 뛰어든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영화를 찍자는 게 아니었다.

    혹여 일이 잘 풀린다 해도, 공은 커녕 면책을 피하는 게 고작일 것이다.

    뭘 그렇게 초조해 하는거냐. 낙원은 스스로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달칵, 하는 듯한 작은 소리가 어디선가 울렸다.잘못 들었나,하면서도 낙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귀를 기울였다.

    '스으', 작은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분명히 뭔가 끄는 듯한 소리였다.

    낙원은 성큼성큼 걸어가다 멈칫했다.혼자 움직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그는 잠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10분이었다.

    어차피 곧 도착할 텐데. 살펴보기만 하자, 낙원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단지 시간낭비가 아니라는 것만 알면, 그거면 되는거야.

    소리가 들린 곳은 뒤쪽이었다. 창고 뒤편은 잡초가 어린아이 키만큼 문성하게 자라 있었다. 낙원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갔다.

    그러나 이쯤이라고 생각했던 5번 창고 뒤편에 도착했을 땐,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낙원은 창고의 옆면으로 조심조심 향했다. 옆에는 한때 연통이 올라왔을 법한 동그란 유리창이, 창살에 걸린 조각만을 남기고 깨져 있었다.한때 날카로웠을 그 유리조각도 먼지라는 거미에 이미 무장해제를 당한 뒤였다.

    낙원은 옆에 몸을 붙인 채 그 유리창에 눈을 갖다 대었다. 긴장한 시선이, 창고의 내부를 훑고 지나갔다.

    "……."

    그러나 창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부서진 의자 쪼가리나 몇 개 남아있는 창고 안을 내려다본 낙원이, 잠시 고개를 저었다.

    잘못 들은 모양이지.

    막 몸을 떼었을 때였다.

    '……야,'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창고 안에서 들려왔다. 낙원은 다시 한 번 재빨리 유리창에 눈을 갖다댔다.

    그러나 이 창고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낙원이 생각했다.

    지상에는 1층 높이로 올라와 있는 이 창고들은 반지하 건물이었다. 만약 창고끼리 지하를 공유한다면…….

    낙원의 시선이, 양옆이 벽으로 막혀있는 창고를 쭉 따라가다 어둠 속에서 멈추었다. 그는 벽에서 몸을 떼고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6번 창고로 가기 위해서는 길을 가로질러야 했다.

    놈들은 분명 셋이었다. 하나는 박목화를 보고 있다 하더라도, 둘 중에 하나는 분명 보초를 서고 있을 것이다. 단독행동은 금물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낙원이 살펴보기만 하자는 마음으로 일단 창고 앞으로 향했다.

    길 건너로 시선을 던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는 어느새 노란 빛을 뿜어내며 어둠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문득 길을 내려보았을 때였다.

    한창때엔 트럭이 지나갔을 넓은 길에는 먼지만이 쌓여 있었다.무심코 내려다보던 낙원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그 흙먼지에는 얼마 안 된 타이어 자국이 두 번, 뚜렷하게 나 있었다.

    새로 난 그 자국은, 6번 창고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

    머리보다 발이 빨랐다.

    낙원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단독행동이 어쩌고 라는 건 한순간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진 뒤였다. 김선이었다.

    타이어 자국이 두개란 말은 김선과 똘마니들이 왔다가 다시 나갔다는 이야기였다.

    박목화가 불었든 안 불었든 '버렸다'는 거다.아까 들었던 사람 소리……!

    6번 창고의 문에는 사람 손자국이 이미 난 뒤였다. 낙원은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들었다.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 따윈 나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건 놈이었다. 박목화였다.

    계단 아래에 불빛이 비쳤다. 녹슨 난간을 잡고 내달렸다. 쿵쾅쿵쾅, 거친 발걸음 소리가 창고 안을 울렸다.

    "잠깐 보고 와야겠는데."

    조희용이 실실거리며 일어났다. 늘어진 박목화의 몸을 조가 툭툭, 발로 건드려보았다.

    "어차피 이젠 안 움직이잖아, 형님."

    그렇게 말하고 조가 막 돌아섰을 때였다.

    "……!"

    조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어둠 속에서 낡은 의자가 날아와 조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조가 잠깐 입을 벌린 사이 김낙원은 놈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한순간 비틀거린 조가 김낙원에게 달려들었을 때였다.낙원의 부먹이 놈을 강타했다.

    "……억!"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비명이 터졌다.

    두 번, 간격을 좁힌 김낙원이 팔꿈치로 놈의 눈을 번갈아 찍었다.

    "아아악!"

    얼굴을 감싼 놈이 비명을 터트리며 주저앉았다.

    김낙원이 그의 명치를 걷어찼다. 몸을 뒤집은 놈을 낙원이 의자를 집어 들고 눌러 찍었다. 쾅,쾅,쾅. 서너 번을 찍어누른 김낙원이, 쓰러진 조희용의 목을 구둣발로 짓밟았다.

    커억, 놈이 고통스럽게 뒹굴다 양손으로 김낙원의 다리를 붙잡았다. 낙원은 오른발을 빼려 들지 않고 다른 한 발로 놈의 명치를 세차게 걷어찼다.

    "……!"

    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낙원은 아무 말 없이 의자로 놈의 머리를 내리치고 또 내려쳤다. 몇 번 덤비려 들던 조가 바르작대다 결국 눈을 까뒤집었다.거기까지 확인한 뒤에야 김낙원은 의자를 옆으로 팽개쳤다.

    콰당, 창고 안이 울렸다.

    낙원은 소리 따윈 신경쓰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노란 불빛 아래 쓰러져있는 익숙한 사내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놈의 이름을 불렀다.제대로 이름만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목화-…,"

    구둣발에 찐득한 액체가 묻었다.불길한 예감에 김낙원이 천천히 허리를 굽혀 손을 내밀었다.손가락에 묻은 것은 피였다.낙원의 시선이 시내처럼 흐르고 있는 붉은 액체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박목화였다.

    낙원은 놈에게 다가갔다.가까이 다가가서 본 놈의 배에는,은빛의 흉기가 엉긴 채 꽂혀 있었다.

    "……."

    죽은 거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놈을 낙원이 내려다보았다.

    이미, 죽었어.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갑자기 가슴이 콱 메여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단지 사내놈이 숨을 쉬지 않는 것 뿐인데. 친구도 무엇도 아닌 놈이 자빠져 있을 뿐인데.

    눈앞이 까매졌다, 노래졌다, 최후에는 흐려졌다.

    처음 보았을 때도 배때기에 칼 꽂고 있더니, 이 새낀 3년이 지나서도 똑같은거냐. 어디선가 칼 맞아 쓰러져 죽을 상이라 생각하긴 했어도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피식, 낙원은 웃으려 했다. 그러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웃음 대신 떨어진 것은 눈물이었다.

    툭.

    눈앞이 흐려졌다, 맑아졌다. 다시 흐려지자 다시 한번 툭.창고가 울렸다.낙원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의 끝에는 조희용이 들어왔다, 다시 흐려졌다. 낙원은 눈을 깜박였다.

    걸어갔다. 단 몇 걸음이었지만 걸음은 길고 힘겨웠다. 허리에 아직도 차고 있던 총을 꺼내 겨누었다. 노란 불빛에 비친 검은 총기에 조의 눈이 커졌다.

    뒤집어진 바퀴벌레처럼 누운 채로 바르작대며 피하려 했다.

    딸깍.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하얗게 질린 조희용의 얼굴이 문득 흐릿해졌다. 낙원이 눈을 깜빡였다. 투두둑.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뚜렷해진 놈의 얼굴로 낙원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창고가 울렸다.

    그러나 낙원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첫발은 공포탄이었다. 아직 살아있다는걸 깨달은 조희용이 진짜로 공포에 질려 바닥을 뒤로 엉금엉금 기어가며 애원했다.

    '살려……,'

    낙원은 조의 머리를 정확하게 겨누었다. 이대로 방아쇠를 당기면 살인이었다. 낙원은 분명하게 인지했다. 징계거나 파직이거나 형을 살거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무슨 상관이람. 놈은 이미 죽었다. 조를 죽인다고 놈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그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새낄 죽이는 건, 자신의 마음이었다. 낙원은 총구를 머리에서 아래쪽으로 향했다, 도로 머리로 올라왔다.

    총구가 움직이는 동안 조희용은 벌벌 떨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낙원은 싱긋 웃었다. 네가 목화를 찔렀을 땐, 목화는 그런 애원도 하지 못했을 거다.

    방아쇠를 당겼을 땐 낙원은 울면서도 웃고 있었다.

    탕, 창고가 두번째로 흔들렸다. 쿵, 조의 머리가 시멘트를 박으면서 으스러졌다. 피가 빠르게 흘러나왔다.

    낙원은 돌아보지 않고 박목화의 곁으로 다가갔다. 박목화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누워 있었다.

    저 새끼를 죽였다고 네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지. 그렇긴 하지. 그러나 낙원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죽어 자빠지라고 내가 널 3년 전에 주워 교도소까지 보내준 줄 아니.

    갑자기 화가 치민 낙원이, 누워있는 목화의 멱살을 잡았다.

    "이 병신 새끼야……!"

    같은 놈한테 두 번을 찔려 죽으려고 3년을 기다렸냐. 그깟 김정애가 뭐라고, 네 목숨하고 바꿔 이 새끼야.

    그래, 그거 좋겠다. 멱살을 잡고 두어 번 흔들던 낙원이 싱긋 웃었다.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누님을 끌고 와서 죽이면, 그땐 눈 좀 뜰래?"

    아직 총알은 네 발이 남아 있었다. 김정애 한 발, 박광우 한 발, 김원일 한 발.

    마지막 하나는 동생 하나를 골라서. 그 정도면 네가 눈을 뜰까, 응?

    속삭였다.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놈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멱살을 쥐었던 낙원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피식, 낙원이 소리내어 웃었다. 놈은 죽었다. 죽어 있었다. 죽은 놈 앞에선 누굴 죽여도 살아날 리가 없었다.

    갑자기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낙원은 놈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낙원의 시선이 놈의 얼굴에 머물렀다.

    일주일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주춤주춤, 낙원의 손이 놈의 얼굴에 닿았다. 아직 따뜻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살 수 있었을까. 그 생각을 하자 낙원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청원 따위를 일 분이라도 기다리는게 아니었다. 자신은 아까 대체 무엇을 했던가. 담배를 물었다 놓았다 차 앞에서 서성대며 흘려보냈던 시간들을 생각하자 미칠 것만 같았다.

    뭘 생각하고 뭘 망설였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들린 소리가, 놈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건지도 몰랐다.

    바로 찾아 뛰어들었어야 했는데. 바로 왔어야 하는건데. 이 장소를 찾기까지 허비한 시간들이 하나하나 화살처럼 쏘아져 들어왔다.

    김원일을 찾는 데 들인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었다. 어째서 그 전에 자신은 본부 사무실에서 누워있었을까. 놈이 이곳에서 고통으로 쓰러져 있었을 때, 자신은 소파에서 부러 누워 잠까지 청하고 있었다.

    그저께 들러만 보았어도 놈을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 것을, 낙원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생전 처음으로 제대로 하는 후회였다.

    쓰고 쓰고 또 쓴데도 입에서 뱉을 수가 없었다.

    비탄도, 신음도, 무엇도 목구멍을 넘어오지 않았다. 병신 새끼는 자신이었다. 놈을 놓쳐버린 자신이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한채 낙원은 자신의 행동을 씹고 또 되씹었다. 말하더라도 놈이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변명의 기회도 없다는 것이 더더욱 쓰디썼다.

    투두둑. 눈물이 흘러내려 떨어졌다. 그마저도 사치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서든지 자신이 몸만 돌렸더라면 놈을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낙원을 무겁게 짓눌렀다.

    자신은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쫓았던가. 미친 소 따위, 박목화를 하루 전으로만 돌아가 잡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한번 제대로 보지도 못한 눔을 쫓겠답시고 소를 몰고 동양을 몰고 김선을 몰아,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박목화 하나만을 내주었다. 다시는 돌릴수 없는 놈의 목숨을 내주었다.

    툭. 시멘트 바닥으로 손이 떨어졌다. 흐려진 시야로 쓰러져 있는 놈의 오른손이 들어왔다.

    거즈가 떼어진 손등에는 자신이 그어놓은 상처가 선명했다. 혈관 위로 삐뚜름하게 그어진, 깨진 화분조각으로 짓누른 상처.

    저것 때문에 더 반항하지 못했을까. 낙원은 멍하니 생각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붕대를 감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상처였다.

    반쯤 나아가고 있었더라도,오른손이 다친 건 확실히 타격이 컸을 터였다.

    김선도 김선의 똘마니도 없이 오로지 조희용 하나만 지키던 상황에서도 탈출하지 못한 건 저 상처 때문이 아니었을까.

    낙원은 놈의 오른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옆에 놓았던 총기를 집어들었다.

    퍽, 그는 거꾸로 쥔 총기로 자신의 오른손을 내리쳤다.

    기세는 아까 조희용을 의자로 내리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퍽, 퍽, 퍽.

    한 번씩 내리칠 때마다 땀과 눈물이 함께 튀었다.

    왼손이 저리다 못해 어깨까지 마비된 때에야 낙원은 그 짓을 그만두었다.

    "으아아……!"

    내리칠 때까지는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던 소리가, 그제야 눈물을 담고 터져나왔다.

    참을 수가 없었다. 놈이 죽은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왜 누워만 있는 거냐,"

    낙원이 소리쳤다.

    "일어나, 일어나서 차라리 날 치란 말이야……!"

    네 주먹이면, 조희용 같은 건 한 방에 갔을 텐데.

    네 손이 그렇게 아팠던 만큼 날 치란 말이야. 차라리 치란 말이야.

    그 따위로 누워 있지 말고, 칼 따위 꽂고 있지 말고, 어서……!

    막 다시 놈의 몸을 잡아 흔들려 했을 때였다. 가슴을 깊이 누른 낙원의 손에, 아주 작은 미동이 느껴졌다.

    "……!"

    낙원은 총을 집어던지고 놈의 몸 위로 고개를 숙여 감싸안았다. 곽 누른 귓전에는 아주 약간의 미동이 느껴졌다.

    ……두근. ……두근.

    환청인가, 낙원은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놈의 몸은 따뜻했다. 환청이라도 더 듣고 싶은 마음에 낙원은 놈을 끌어안고 귀를 더 세차게 대었다.

    "경정님-!"

    우당탕,창고가 수십 명이 뛰어 들어오는 소리로 가득 찼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낙원은 알아듣지 못했다. 낙원의 귀에는 한 가지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놈의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들것을 가져와, 구급차를 불러!"

    뒤에서 무엇을 하든 그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놈은 아직 따뜻했다. 그거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놈을 그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을 때 격렬하게 저항했다.

    경정님, 제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서너 명이 달려들어 그를 떼어놓았을 때에는 낙원이 정신을 잃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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