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10화 (9/34)
  • 10. 활동기

    「요즘은 외근 안하시나 봅니다?J 김반장이 물어왔다. 낙원이 흘깃 쳐다보고는 되물었다.

    「피해자 찾는 데 일주일이나 걸리는 이유가 됩니까?」

    「아, 저 그건…….」

    인사나 하려고 왔던 김반장이 주저주저 답을 미루는 사이, 낙원은 그 앞을 슥 지나쳐갔다. 그렇지 않아도 이 일주일간 시끄러운 형사들 맛에 심기가 불편해져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가려 하던 김낙원이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복도에서 서성대던 서경위가 눈에 들이왔다.

    「저어……」

    놈도 같은 이유인가. 김낙원이 경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경위는 원가 말하기 곤란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 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낙원이 쳐다보았다.

    「뭐야?」

    「그게 말입니다…….」

    경위는 웬일인지 뜸을 들였다.

    낙원이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결국 미적미적대던 서경위가 한숨올 쉬더니 말을 꺼냈다.

    「왜, 한 달 전에 남양건설 알아보라고 하셨던 것 말입니다」

    서경위가 어떻게 말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운을 떼었다.

    당연히 동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던 김낙원은 뜻밖이었다. 자신이 언제 그런 일을 시켰던가 싶어서 기억을 되짚었다. 한 달 진 남양건설이라.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한데.

    「……외근하신 뒤에 갑자기 알아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때는 왜 그러셨는지 몰랐는데,」

    서경위의 말에 문득 꽃집 앞에 서 있었던 회색 양복의 남자가 뇌리 에 스치듯 떠올랐다.

    남양건설을 이디에서 들었는지 생각이 났다. 동문회에서다.

    이강우라고 했던가. 이사 아들이라고 했던, 눈에 띄던 남자.

    시계는 피아제에 차는 벤츠였던 놈이. 전철 앞 꽃집서 서성거리다 전철 계단으로 내려갔던 게 뭔가 걸려 알아보라고 했던 듯 했다. 지나가듯 이야기를 한 뒤에 자신도 잊고 있었던 일을, 한 달간 성실하게 알아본 서경위를 보자 꽤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낙원이 묻자 서경위가 보고했다.

    「15년 전통이 있던 건설입니다만, IMF를 이기지 못하고 법정관리 로 들어갔다가 3년 전 1/4분기에 회생한 회사더군요. 회생한 이후의 실적은 다 용지 재개발입니다만, 회생하자마자 맡은 건이 하필이면 제 2의 굳모닝으로 들썩거렸딘바로그건이라바로도산위기를맞았었습 니다.그 쇼크에서 벗어난지는 얼마 안되었고요」

    뭐. 어쨌든 실적이 그렇다면 그 이사 아들이라는 놈이 '동창의 밤‘에 갖고 왔다는 이야기도 주 엉망인 이야긴 아니었던 모양이지. 오히려 흥미가 식은 김낙원과는 달리 서경위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낙원이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다.

    빨리 좀 말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서경위가 미적대다 입을 열었다.

    「현재의 사업자명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인수자 이름이…」

    「법정관리 인수자가 이름이 있다고? 법인이 아니야?」

    잠시 낙원이 담배를 입에서 떼었다. 경위가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하군. 낙원은 생각했다. 건설은 보통 같은 건설회사 계열이 인수하기 마련인데. 법인도 아니고 개인사업자라. 세금 도 꽤 낼 텐데. 어지간히 말 못할 사업 많이 하는 데인가보지.

    그렇게 생각하고 경위를 보았을 때였다. 아무래도 저 젊은 서경위는 대단한 폭탄 하나 짊어지고 있는 듯 했다. 빨간 선을 자를까요. 파란 선을 자룰까요 절단기 앞에서 망설이는 듯한 얼굴의 서경위를 보고 낙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뭔데 그래?」

    일단 잘라 보지.

    낙원의 말에 서경위가 단단히 결심을 한 얼굴로 다가왔다. 회의실 안에선 김반장을 비롯한 형사들이 박광우를 찧고 까부는 데 여념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주위를 둘러보며 가까이 오는 것이다. 별게 아닌 데 저렇게 시간을 끄는 거라면 그 폭탄 경위에게 투척해줘야겠다고 김 낙원은 생각했다. 기다리다 못한 낙원이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을 때였다.

    서경위가 드디어 불었다.

    그 말은 대양(人?)아래 봉인되어있던 핵탄두를 그물로 끌어올린 어부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박목화인 겁니다. 사업자 등록에 있는 주민번호까지 같아서……」

    서경위가 뒤에서 무어라 더 묻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낙원은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운이었다.

    이거야말로 기다리고 있던, 망망대해에서 같은 배를 두 번 만나는 정도의 운이었다. 누구도 꽃집에 잠복해 있는 형사가 ‘동창의 밤’ 행사 에 참석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우선, 놈이 꽃집 앞을 서성댔던 시간조차도 너무 짧았다.

    간부인 자신이 꽃집에 들락거린 것도, 그 시간에 놈을 보았던 것도_ 그리고 동창회 행사에 갔던 것도 우연의 일치였다.

    박광우 그 새끼.

    김낙원이 웃었다. 박목화 이름올 대고 회사를 인수할 놈은 그놈밖에 없었다. 3년 전에 무슨 짓을했는지는 아직 몰라도 동창들한테 한 건 하기 위해 나타난 것만은 분명했다. 그 미친 소의 꼬리를 드디어 밟은 것이다.

    역시 꽃집에 들락거린 자신의 선택은 옳았다.

    「최검.」

    싱긋 웃으며 손짓하자 최동훈이 고개를 내밀었다. 낙원은 나오라고 손짓했다. 근 한 달 만에 보는 녀석은 그간 뭐에 그리 시달렸는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아직도 굳모닝 투 건 하고 있냐?」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업벅이던 최동훈이, ‘제 2의 굳모닝’ 건을 말한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그런데,」

    최동훈이 물으려 하는 말을 낙원이 잘랐다.

    「너, 그때 동창회에서 하라고 하던 투자 했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최동훈이 고개를 저있다.

    「아니. 못 했어. 좀 사정이 있어서……」

    낙원이 물었다.

    「김양락 같은 놈은 얼마나 했든?」

    「아마 4억?」

    최검의 입에선 곧 답이 나왔다. 4억. 결혼자금에 여기저기 긁어모은 돈을 다 합하면 나올만한 액수였다. 좀 무리했군. 낙원이 싱긋 웃었다. 웃는 중에도 머리는 재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김양락같은 놈이 4억을 던져 넣었을 정도면 그때 떠들던 놈들은 얼마나 했을까. 이미 자리 자리가 잡힌 중년층들은 10억, 20억의 노후자금도 쾌히 투척했을 것이다. 10명만 대충 합쳐도 번써 100억이다.

    -우습게 볼 금액이 아니었다.

    김낙원의 얼굴을 살피던 최검이 정신이 바짝 맨 모양이었다.

    「너 웃는 거 보니까 무지 불안한데. 원 일 있는 거지?」

    「꼭 그렇다기보다는 말이지,」

    낙원이 말을 길게 끌자 최동훈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복도 끝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웃는 걸 보니 불안하다니. 이 녀석도 자신의 옆에 왜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낙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순순히 놈의 손에 끌려 구석으로 처박혔다.

    「무슨 일인 거야? 말 좀……」

    「그 동창회관 건물에 기부한 건 얼마래?」

    「잘 몰라도 100억은 될 걸. 야, 제발 그렇게 나쁘게 웃지만 말고 말 좀 하라니깐.」

    최검이 위라고 하건 옆에 버려둔 김낙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동창의 밤’ 때가 떠올랐다. 이미 투자 했노라 떠들었던 사람들, 그 열기에 휩쓸려가던 사람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언젠가 건설 경기의 붐을 타고 한 재산 모아봤거나 아니면 그런 이야길 들어봤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건교부에 아는 사람 이야기나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들온 이야기가 어떻게 불고 소위 ‘터지는’ 지, 그들은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분당에 겨우 2억밖에 안 넣어서 4억밖에 못 빌었다는 이야기 가 공공연히 화제가 되는 곳이었다. 재개발 이야기라면 여유자금이 아 니라 끌어 모을 수 있는 한도까지 끌어넣어. 단기에 승부를 보려고 했을 것이다. 혼전에 4억올 끌어 모은 김양락처럼.

    그때의 열기를 생각하자 잠시 아찔해졌다. 얼핏 생각해도 몇 십 명 온 넘었다. 재개발 건수로 땅을 사는 거라면 대부분 중도금도 취급하지 않는다. 시간을 다투며 현금박치기를 했을 그 마당에. 지금은 근 두 달째였다. 이미 싹쓸이는 끝났을 거다.

    몇 백억이 그 판에서 놈의 손아귀로 둘어갔다.

    「야. 제발 좀 악마같이 웃지만 말고 말 좀 해. 문제 있는 거야? 그런거지.」

    불안해하다 이제는 단정하기 시작한 최검의 말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김낙원은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아무리 몇 백억을 싹쓸이해가기 위한 테이블이라고 해도 오로지 테이블 차지(charge)로 100억을 내놓긴 쉽지 않지. 판돈도 아니고. 오로지 배팅을 시작하기 위한 돈으로 기부금올 그렇게 던지는 놈이 있다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자신도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놈의 기부로 지어진 동문회관에 모였던 그날 밤, 놈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강우'라고 했던가. 최고 지도자 과정으로 동문의 자격을 땄다고 하는 놈은 정말로 어딘가의 이사 아들처럼 보였다. 돈 많고. 한가하고 인맥 쌓아 어딘가에 발 디딜 틈 을 찾고 있는 아직 젊은 놈처럼.

    그 배짱만큼은 안 되겠지만 연기도 수준급이야, 박광우.

    낙원은 싱긋 웃었다.

    단지 그런 것치곤 지나치게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는 게. 그리고 그 토록 눈에 띄는 놈이 한 순간이라도 꽃집 앞을 서성거렸다는 게 꼬리 롤 밟힌 요인이었다.

    박목화의 말은 틀렸다. 낙원은 생각했다. 절대로 오지 않는 게 아니었다. 이미 들렀던 거다. 단지 그 조심스러운 새끼가, 아무리 안전할 때를 골랐다 해도 여하간 꽃집에 왔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그 정도로 보고 싶었나보지.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지 않는다고 단언하 는 박목화도. 어쨌든 보고 간 박광우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초 에 바랐던 배신과 복수의 드라마는 어디로 가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건 오로지 쓰레기 같은 가족 드라마였다. 그나마도 공영방송에서는 쓰지도 않을, 핏줄도 다른 이들의 형제애(兄弟愛).

    그래. 역시 그런 형제애의 드라마엔 감격과 눈물의 상봉이 필요하지. -감방에서의.

    둘이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는 이제 물릴 만큼 아니깐, 꼭 박목화를 면회실로 보내서 마음껏 보게 해주지. 안심하라구.

    김낙원은 웃었다. 단지 그토록 아꼈던 놈이 어쩌다 3년 전에는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고 내비려 두었는지, 낙원은 그게 궁금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최검이 너무나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 도대체 뭐길래……」

    「굳모닝 투에 남양건설이 월로 관련되어 있었냐?」

    낙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최검이 주저하다 이야기했다.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건 아니고, 초기에 건물 매입 매도 건 밖에 없어. 시공은 테크노 벤처에서 다른 곳에 맡겼거든. 분양이나 건설하고 는 상관이 없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피하는 최검의 앞에서 낙원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금연자 최검이 눈을 커다랗게 떴지만 낙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사사실이라고 몸 사리지 말고 제대로 불어. 안 그럼 정보 안준다.」

    ‘요즘 조폭 쫓고 있는 거 아니었냐. 정보는 무슨…,’ 최검이 중얼거리는 말은 무시하고 낙원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야, 야-」

    몇 번 소리를 내던 최동훈이 무너지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최너구리. 꼭 연기를 피워야 말을 하지.

    낙원이 싱긋 웃었을 때였다.

    흘러나온 최검의 말에 낙원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아 왜, 150억짜리 건물을 600억에 팔아넘겼다는 그 애기 말야, 기억 안 나? 벤처 애들이 이상한 데 화살을 돌리더라는…….」

    「그게, 남양?」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응. 그래서 좀 알아봤었는데, 매도차익을 얻은 건 진짜야. 단지 그것만으로는 아무 법적인 문제가 없더라구. 그 건물이 원래도 시가로 따지면 400억이 넘을 텐데 어쩌다보니 담보로 잡혔었나봐. 이리저리 흘러들어가서 남양이 150억에 잡은 물건을 그렇게 엄청난 매도차익을 남기고 판 거지. 그런데 원래 부동산 긁어모아 재개발로 파는 게 본업인 회사더라구. 별 문제는 없이, 찾아봐도 그 450억에 대한 세금까지 다 낸 상태고……」

    3년 진의 450억.

    400억에서 500억 규모의 ‘W캐쉬’.

    갑자기 하청업자처럼 밀려난 김선, 3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박 광우.

    하하, 낙원이 잠시 웃었다. 이제야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최동훈은 뭐가 그리 불안한 지 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잡자.」

    「응?」

    최동훈이 무슨 소리를 하나, 하는 얼굴로 그률 쳐다보았다. 낙원이 싱긋 웃었다.

    「너. 그 건설이 법정관리 들어갔올 때 인수자 이름은 못 봤었지?」

    최검이 거기까지 조사를 뻔칠 이유가 없다. 애초 남양에 대한 조사 도 아니었거니와, 사업자명도 아니고 인수자명이었다. 지나가듯 보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지나가는 이름이 눈에 뛰어 들어오는 건, 내내 ‘동양’을 쫓고 있던 수사부의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거 조폭이야. 조폭들이 하는 사채회사가 그리로 부동산 넘기는 거야. 따로따로 놓고 보면 합법적인 이익이지만」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최동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결탁(結託) 이다.」

    「사업자 명은 대포인 것 같던데. 인수할 때는 어째서 박목화 이름을 썼을까요?」

    서경위가 물었다.

    수사부가 새로 설치되는 데에는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남양’ 인수자의 이름과 그 전과를 들이댄 것으로 충분했다.

    기묘한 곳에서 돌파구를 찾은 최검의 행동은 빨랐다. 최검이 수색영장을 받으러 간 사이. 낙원이 새로운 수사부인 최검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일단 그가 나와 보라고 손짓한 건 오로지 서경위 뿐이었다. 경위는 곧 따라왔다.

    「박목화 이름만 쓰지 않았어도 아니 애초 개인 이름으로 하지만 않았어도 꼬리를 밝힐 일은 없지 않습니까,」

    낙원이 걸으면서 대꾸했다.

    「세금 때문이야.」

    「예?」

    서경위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놈은 양쪽이 연관될 거라곤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어. 각자 조사가 들어갔을 때 양쪽 다 합법적인 이득을 얻는 회사가 되길 바랐던 거야. 털어도 먼지가 안 나려면 제대로 세금올 내야 해.」

    낙원이 말을 이었다.

    「법인으로 하면 세금이 좀 적은 대신 마음대로 장부를 조작할 수가 없어. 자칫하면 공금 유용이 되니까, 사업도 마음대로 벌일 수 없지. 그러니까 개인 이름으로 인수하고 사업을 벌였던 거야. 세금을 좀 더 내면 어때, 들어오는 돈의 단위수가 다른데」

    「……」

    「인수 때 박목화의 이름을 썼던 건. 말 그대로 그때까진 그게 더 편했기 때문이겠지. 사업할 때 대포를 쓰는 건 쉬워도 인수할 땐 서류 구비가 복잡해지니 내세우기 편한 놈으로 골랐을 거야. 애초 누가 그 두 개를 연관시켜볼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텐데, 사업자명도 아닌 그 이름이 밟힐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최검이 굳모닝 건으로 ‘남양’을 조사했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서경위와 합동 수사부가 W캐쉬를 조사할 때 분통을 터트렸던 것도 모두 개인 이름으로 되어 있는 회사가 세금을 제대로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이득, 합법적인 회사. 양쪽을 연관시키지만 않는다면 완벽했다. 둘의 연결고리는 오로지 인수자명과 거기에서 연상되는 박광우 한 명 뿐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전과도 없는 깨끗한 민 인.

    김선은 과연 이런 것을 알까. 잠시 생각했던 낙원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 순간 박광우의 돈이 불어나 합법적인 사채업을 차릴 정도가 되었다는 건 눈치를 깠을 수 있어도, 그게 어디서 나온 돈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박목화는 알까요?」

    「아니. 모르겠지.」

    낙원은 고개를 저었다.

    「박광우가 초기에 돈을 벌어들인 건 딱지방이야. 재개발 하는 곳에 용역반으로 들어가서. 입주권을 받은 주민들을 위협해서 딱지를 빼앗아 부동산 업자들한테 넘기는 거야. 처음엔 넘기기만 하다 돈이 된다 는 걸 알자 아예 용지를 사들이기 시작했지. 그때부터 놈은 자기 임에 있는 놈들의 명의라면 다 가져다 썼어. 박목화. 김원일, 김용오, 이원명……, 자기 것만 빼고 모두 말이야. 한 두 번 한 일도 아닌데. 뭘 한 다 한들 묻기나 했겠어?」

    서경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단하군요.」

    전에 비슷한 대화를 했을 때엔 ‘그 충성을 바친 놈이 바보’라고 했던 김낙원도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서경위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낙원은 싱긋 웃었다.

    「같은 물고기를 두 번 본 거지. 그 넓은 대양에서, 우연히 말이야.」

    「……?」

    ‘또 알 수 없는 소리 한다.’ 서경위 얼굴에 쓰여 있는 말을 본 김낙원이 싱글싱글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뜨거운 정보였다. 놈은 아직 이런 우연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김낙원은 생각했다. 꽃집에서 본 놈을 동문회에서 또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영장만 나오면 뜬다. 내일이면 나올 거야.」

    「그렇게 빨리요……?!」

    서경위가 놀랐는지 소리를 질렀다. 낙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야지. 한 판 벌였으니 놈은 곧 튄다.」

    하루가 급했다. 이미 동창회로부터 근 두 달 째였다. 돈을 그만큼 긁어모았으면 이젠 슬슬 튈 때다.

    언제 튈지 몰랐다. 그나마 인수자명이라도 있는 ‘남양’을 썼을 때 봐서 다행이지, 이번에 튀고 나면 또 어떤 이름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그땐 어떤 우연도 없을 터였다.

    그나마 일단 잡고 보자는 분위기인 단속기간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낙원은 생각했다. 조폭 관련이라면 압수수색 영장 정도는 빨리 나오는 편이었다.

    「그럼 박광우를 잡는 겁니까?」

    서경위가 흥분했는지 빠르게 물었다.

    김낙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잡아봐야 일지.」

    「……?」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건수는 아직 ‘결탁’ 뿐이야. 그나마도 같은 ‘동양’이 하는 사채업과 건설회사니, 채무자들에게 부동산을 넘기게 사주했을 거라는 설(設)로 밀고 있는 거 아냐. 일단 압수수색을 해서 증거 확보하는 게 먼저지.」

    가장 좋은 건 이사 아들 이강우에 대한 체포영장이 나오는 거지만, 놈이 박광우라는 건 아직 자신의 심증일 뿐이었다.

    재개발 건으로 잡아들인다는 건 아직 제대로 된 ‘피해상황’도 발생하지 않은 지금 불가능했다.

    어차피 압수수색할 때 신변확보가 같이 들어간다. 도주의 우려가 있다면 그때 가서 긴급체포를 발동한 뒤,

    나중에 김선을 잡에 대질로 들이대면 그만이었다. 김선이라면 놈이 하는 일을 다 알지는 못해도 놈이 미친 소라는 것만큼은 신나게 증언할 것이다.

    낙원은 그런 생각으로 놈에 대한 이야긴 아직 최검에게 하지도 않았다.

    확실한 것부터 서두르는 거다.

    이야기가 퍼지고 수사가 확대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그물을 넓히다 그물구멍까지 넓혀 놓치느니, 일단 가진 그물로

    대어(大漁)를 잡고 그 뒤에 그물을 넓게 펴보자는 게 낙원의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박광우 이야긴, 최검에게는 일러.」

    서경위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때맞춰 최검이 저편에서 오고 있었다.

    「여어-」

    최검이 인사했다.

    「내일 오전.」

    예상했던 대로였다, 김낙원이 마주 인사했다.

    「여어.」

    낙원이 웃으며 담배를 떼어 손에 들었다.

    내일.

    내일이면 그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요즘은 야근도 꽤 하시네요.」

    서경위가 말했다.

    김낙원이 피식 웃었다. 시계를 보자 10시 반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다 하게 될 때가 생기니까 미리 하지 말라고.」

    서경위가 웃었다.

    「먼저 가시죠. 영장이 나오는 건 내일 오전이니까요. 그때까지는 그래도 쉬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강의 서류 준비만 하는 데도 하루 종일 걸렸다, 그나마도 단속 기간이라 약식으로 영장을 받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열흘씩 걸렸을 작업이었다. 오랜만에 서류에 파묻혀 있었더니 생각보다 피곤했다.

    그래, 젊은 놈이 수고해라.

    김낙원이 웃으면서 일어났다, 옆에 최검을 쿡쿡 찌르자 최검이 응? 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뭐하냐. 너도 일단 가 자. 내일 긴급 나오면 바로 떠야지.」

    최검이 주섬주섬 서류를 챙겨 일어나다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래. 내일 오전.」

    영장이 나오는 시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최검을 보고 낙원이 싱긋 웃었다.

    「그래 내일 오전.」

    아침부터 형사들은 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사무실이 정상으로 돌아갈 11시 가량에 수색, 도주의 위험이 있을 경우 바로 잡는다. 여기까지 확인한 최검이 그제야 일어났다.

    「그럼 집에 가서 마저 하고 오지.」

    낙원이 먼저 손을 흔들며 나갔다.

    「그럼, 내일.」

    뒤에서 인사가 들려왔다. ‘그래, 내일.’

    정말로 내일이었다. 낙원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걸어 나갔다. 3년이면 꽤 오래 끌었지. 이젠 마침표를 찍을 때도 되었어.

    그 상판대기 한번 보고 싶구나. 합동수사부의 형사들이 하던 소리를 낙원은 가볍게 읊조렸다. 회색 양복을 없었던 남자의

    얼굴을 검찰청에 모셔놓고서 ‘미친 소.’ 라고 부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상당한 쾌감이 될 것이다. 낙원은 웃으면서 차에 탔다.

    운전대를 잡자 문득 허기가 졌다.

    저녁을 먹지 못했다는 걸 깨닫자 갑자기 꽃집이 생각이 났다. 그새 습관이 든 건가, 낙원은 혀를 찼다. 그래도 이 밤에

    다시 꽃집을 들를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을 또 혜정일 못 봤군.

    이러다 차이겠어. 낙원은 한가롭게 생각했다.

    문득 집에까지 서류를 들고 간 최검이 생각났다. 놈, 그러다 이혼당할 거야. 낙원은 싱긋 웃었다. 최검이 봤더라면 또 무슨 나쁜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었을 만한 웃음이었다.

    나까지 그런 꼴이 되면 안 되지. 내일 일 끝나는 대로 혜정일 보자는 생각에, 차가 신호등에 걸리자 낙원은 메시지를 찍었다.

    ‘잘 자. 내일 전화할게.’

    오랜만에 미인의 목소리를 듣겠군. 낙원은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 * *

    출근하자 답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빠니까 특별히 받아줄게’ 라는, 오랫동안 팽개쳐둔 데에 대한 투정이 담긴 메시지였다.

    낙원은 싱긋 웃었다.

    오늘, 일은 끝날 것이다.

    오전부터 일을 붙잡은 낙원은 11시에 최검이 사무실을 떠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자신은 현장업무와는 맞지 않았다.

    그에게 현재 필요한 건 최검이 긁어온 자료를 토대로 완성할 그물을 짜는 일이었다. 미친 소를 잡을 그물을.

    「점심 드시죠.」

    서경위가 말한 뒤에야 그는 점심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 없다고 하려던 그에게 서경위가 그에게 말했다.

    「어차피 최검사님이 오시기 전엔 다 이상 일도 못합니다. 쉬세요.」

    서경위 말도 옳았다. 놈이 증거만 긁어모으면 바로 김선과 W캐쉬에 대한 2차 수색이 들어갈 것이다. 일에서 손을 때고 나자 약간의 졸음이 밀려왔다. 문득 놈이 생각났다. 일주일을 보지 못했던 놈이.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바로 눈을 떴다.

    「…….」

    오늘 박광우를 잡고나면 가줘야지. 그러나 막상 ‘그때’가 다가오자 잡고 나서 바로 말을 한다는 건 어쩐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몇 번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마음을 먹었다. 그래, 공판까지 끝나면 말해주자. 놈의 꽃집에서

    꽃다발을 사들고, 미친 소를 잡은 건 다 네 공이라고 이야기해주며.

    낙원은 싱긋 웃었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최검이였다.

    「어떻게 됐어?」

    평안하게 물어본 낙원에게 최검이 답했다. 당황한 목소리였다.

    「도산이야,」

    「뭐……?!」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짧게 소리 냈다. 최동훈이 당황을 넘어 절박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반복했다.

    「문 닫았다고. 도산 공고가 붙어있어. 오늘 일자야……!」

    어떻게 알았을까. 낙원의 머릿속에 처음 지나간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곧 박광우가 미리 아는 건 불가능했다는 상황이 냉정하게 되돌아왔다. 두 달째였다. 하루가 급한 상황에서, 놈이 먼저 튀어 달아난 것이다.

    「돌아와.」

    낙원이 냉정하게 말했다.

    시계를 보았다. 12시 10분이었다. 아직 법원은 문을 열고 있을 것이다.

    「넌 돌아와 W캐쉬에 대한 긴급 수색영장을 신청해. 이쪽은 털면 반드시 나와. 김선을 확보하면 이강우를 수배할 수 있어.

    멀리는 못 갔을 거야. 놈이 더 튀기 전에 잡아야 돼.」

    「뭐?!」

    박광우에 대한 이야긴 전혀 듣지 못했던 최동훈이 전화기로 되물었다. 그러나 답해줄 시간이 없었다. 최검이 무어라 소리치는 것을 씹고 낙원인 전화를 끊었다.

    「당장 돌아와.」

    운도 좋은 새끼.

    전화를 끊은 낙원이 이를 갈았다. 김반장을 비롯한 형사들이 왜 그렇게 미친 소라면 치를 떠는지 알 것 같았다. 감(感)도 좋다.

    딱 하루차이로 눈앞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그래도 놈이 모르는 게 한 가지 있지. 낙원은 재빨리 생각을 돌렸다. 놈이 이강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은 모를 것이다.

    김선을 확보하는 대로 동문자격 수여식 때 찍은 사진을 대질시켜, 박광우라는 게 밝혀지는 대로 긴급 수배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도산까지는 꽤나 솜씨 좋게 끝냈을 것이다. 어떻게든 합법적으로, 투자를 부추긴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도록 준비를 했겠지.

    그래봤자 조폭과 연관이 있다는 게 밝혀지면 끝장이었다.

    얼마나 도피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수배자가 되고나면 여태껏처럼 유유자적하게 아무 물에나 가서 헤엄치지는 못할 것이다.

    실컷 쫓겨봐라.

    낙원은 싱긋 웃었다. 박목화가 그토록 완벽하다 여기는 우상에 흠집을 내는 기분은 끝내줬다. 공판 때 이야기 해주는 것보다 외려 더 좋은 듯 했다.

    최검은 낙원의 말대로 서둘러 돌아왔다.

    「무슨 얘기야.」

    따지려는 최검의 말을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낙원은 양복 상의를 집어 들고 놈을 쫓아내듯 같이 나왔다.

    「너, 3년 전에 강력부 아니었냐? 박광우 못 들어봤어? ‘동양’의-」

    「미친 소?」

    주차장으로 몰리듯이 걸어가며 최검이 되물었다.

    「그게 왜 여기에…….」

    「내가 어제 그랬잖아. 남양의 인수자가 조폭이라고. 그게 박광우의 뿔이라니깐. 이강우가 박광우야 박광우.

    이사 아들입네 하고 나와서 몇 백억 쓸어간 거야. 남양은 도산시켜놓고, 한 몫 단단히 챙겨서 튄 거라고.」

    「……!」

    최검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시퍼레진 얼굴에 낙원은 싱긋 웃었다. 녀석, 돈을 잃을 뻔 했다는 생각에 아주 간이 쏠았나보다.

    때마침 주차장에 도착한 낙원이 최동훈의 차 문을 열고 놈을 밀어 넣었다.

    「W캐쉬야. 영창청구 해 화. 긴급으로, 알았어? 오늘 저녁에 덮치잔 말야-.」

    차 키를 밀어 넣고 시동까지 걸어준 낙원이, 차문을 닫았다. 유리창 안으로 그 시퍼레진 얼굴로도 주섬주섬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 놈이 눈에 들어왔다. 낙원은 피식 웃었다. 부릉, 차가 곧 출발했다.

    1시였다.

    * * *

    ‘또 오지.’

    놈은 그렇게 말했었다. 꽃을 다듬고 있던 목화가 잠시 손을 멈추었다. 매일같이 오던 놈이 안 온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문든 오른손에 목화의 시선이 머물렀다.

    손은 흉터만 남기고 아물어 있었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상처다. 놈이 깨진 화분조각으로 짓이겨 낸 상처였다.

    그렇지만 치료를 해준 것도 또 놈이었다. 매일 와서 풀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싸매주었다. 물일하면 안된다면서 물 떠오는 것조차 방해를 하고는 양동이를 들고 나가 잠복해 있는 형사들을 불러 시켰던 놈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목화는 피식 웃곤 손을 쥐었다 폈다.

    아무래도 ‘미안해’라는 말은 손을 상처 입힌 것에 대한 사과였던 모양이다. 붕대를 풀고 흉터를 본 날 이래로 놈은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형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일어나자 시선의 끝에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꽃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놈이 꽂았던 바구니는 이미 팔린 지 오래였다.

    「…….」

    장사도, 꽃 다루는 것도, 사람 대하는 것도 놈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운다. 못하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자기 마음대로 꽂은 게 저렇게 된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놈은 단지 마음대로 구는 건지도 몰라.

    목화는 생각했다.

    ‘또 오지.’ 놈의 말이 맴돌았다. 분명 또 올 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 언제든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목화는 생각했다.

    물을 뜨러 가야했다. 목화는 이미 쓴 물이 들어있는 양동이를 들고 유리문을 나섰다. 햇빛이 하얗게 내리쬐고 있었다.

    계단 한쪽으로 양동이를 기울여 물을 쏟고 있을 때였다.

    인기척이 났다.

    목화는 고개를 들었다.

    「……너.」

    빙그르르, 양동이가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 * *

    지급받은 총기는 무거웠다. 김낙원은 영 마땅찮은 얼굴로 무겁고 멋없는 검은 총을 몇 번 들었다 놓았다.

    경찰 지정 권총인 39구경 리볼버였다,

    「내가 이거 꼭 해야 돼? 경찰 교육이라고 사법연수원 끝나고 여기 지원했을 때 8주 동안 경정연수 받은 게 전분데. 나 같은 사람한테 있는 게 더 위험한 거 아냐?」

    「현장업무입니다, 경정님.」

    서경위가 홀터(권총집이 있는 조끼)를 매주면서 답했다.

    「발포 규칙은 연수 받을 때 교육 받으셨죠? 실탄이든 공포탄이든 일단 발포를 하시게 될 때에는 사전 경고 세 번 이상

    하셔야 하고요, 불가피한 경우라도 사람을 살상할 목적으로 발포하는 건 피하셔야 합니다. 한 발당 보고서가 보통 10장이라고들 합니다. 두 번 이상 쏘시면 위원회 움직이고요.」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낙원이 투덜거렸다. 바로 이 쓰잘데기없이 까다로운 규칙들을 알고 있는 만큼 지급받기가 귀찮았던 거다.

    그러나 서경위는 “쓰고 싶지 않다‘로 알아들었는지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있어도 공포탄조차 쓰실 일이 없을 겁니다. 기동대와 같이 움직이는 거라 혹시 몰라서 지급받은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끝나면 바로 반납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본인 총기는 본인이 반납하셔야 하는 거 아시죠?」

    바로 그게 귀찮단 말이야, 낙원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경찰 총은 ‘쏴서 맞추는 게 아니라 던져서 맞추는 것’ 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어느 영화엔가 나온 적이 있었지만, 자신이 보기에 이놈은 던지기에도 결코 적당한 놈이 아니었다.

    저녁이었다.

    하루 차로 ‘남양’을 놓친 게 못내 분했던지 최검이 분발했다. 1시에 간 놈이 5시에 돌아왔을 땐 이미 손에 영장이 쥐어져 있었다.

    동분서주하던 김반장이 67% 이상의 폭리로 피해를 받았다는 피해자를 찾아낸 덕택이었다. 김선의 사무실로 바로 진입해 들어가기로 계획이 바뀌자 인력이 급하게 필요해졌다.

    잠복해 있던 형사들을 끌어 모아도 몇 명인데 거기에 기동대까지 부르는 건 지나친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자신에게까지 총기를 지급한 것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어디냐. 낙원은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오늘 김선을 확보하고, 수배령까지 가고나면 ‘동양’

    건은 드디어 종료다. 비록 현장체질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사무실 꼴은 봐야겠다는 마음에 낙원은 기특하게 셔츠기 한 시간 남짓 구겨지는 것 정도는 참아 주기로 했다.

    「가죠.」

    서경위가 문을 열었다. 낙원이 나갔다.

    * * *

    빨강 노랑 빨강, 원색의 네온싸인이 어지럽게 엉켰다. 손님을 잡는 삐끼들과 취객들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거리를 오갔다.

    지직지직, 무전기 소음이 차 안을 흘렀다. 바짝 긴장된 자세로 문가에 붙어 앉은 기동대와는 달리 낙원은 조선시대의 아씨마냥 창가에 앉아 한가롭게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20년은 되어 보이는 4층짜리 건물들이 전면에는 네온싸인을, 뒷면에는 나이트 전단지를 덕지덕지 붙이고 성인경마장의 함성에 오래된 회벽 가루를 흘리는 곳을.

    ‘……1조,’

    1조, 무전기에서 음성이 흘러나오자 기동대는 바로 튀어나갔다. 좁은 봉고를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나가 척척척 뛰어가기

    시작한 놈들의 뒷모습을 낙원은 감탄하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김반장이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1소대는 끌고 온 듯 했다.

    만약 내가 기동대쪽으로 지원 했으면 저런 놈들을 중대로 끌고 다녔다 이거지.

    손 한번만 휘둘러도 착착 소리가 날 것 같은 절도 있는 놈들한테 중대장님 소리를 들을 걸 생각하니 어쩐지 끔찍해졌다.

    낙원은 어깨를 한번 털어주고서 열린 봉고 문을 한가롭게 걸어 나왔다. 길거리는 한순간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 있었다.

    ‘쳐,’ ‘잡아!’ 쿵쿵쿵, 3D경마장의 소음을 단번에 짓누르는 소음들에 섞여 들리는 여자들의 비명소리. 경마장에서는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아도, 길거리를 지나던 취객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위층을 쳐다보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분분히 피했다.

    누가 아직 잡히지 않았나보지. 계단에 발을 디뎠던 김낙원이 도로 계단 앞에서 비켜서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막 라이터를 켰을 때였다.

    「잡아!」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놈이 용케 문 밖으로 튀어나와 계단을 구르듯이 뛰어내려왔다. 김낙원이 담배를 문 채로 가볍게 발을 걸었다.

    「……!」

    앞으로 쏟아지는 놈의 몸을 낙원이 라이터를 든 손으로 막았다. 뒤에서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위에서 우르르 내려온 형사들이 그 자리서 한 바퀴를 구르고 있는 놈을 도로 위로 끌고 갔다. 찰칵, 다시 라이터를 켠 낙원이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이게 다인가?」

    2층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천천히 그가 들어서서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사무실 안엔 액자며 책상이며 남아난 게 없었다.

    중앙에 있던 탁지의 유리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널려져 있었다. 가구 상태만으로도 저놈들을 잡는 데 어떤 공을 들였는지 알만 했다.

    문제는 기동대 손에 끌려 앉혀진 놈들이 겨우 여덟 명이었다는 것이다.

    와작, 유리를 구두로 짓뭉갠 김낙원이 다가섰다.

    여덟 명을 차례차례 쳐다본 낙원이 김반장을 쳐다보았다.

    「김선은?」

    낙원의 말에 김반장이 허탈한 얼굴로 답했다.

    「놓쳤습니다.」

    피식, 낙원이 대놓고 비웃었다. 낙원의 눈이 서른 명에 가까운 기동대 및 형사들과 잡혀 있는 여덟 명을 훑었다.

    「아니, 그럼 지금 저런 하찮은 조무래기들 잡으려고 이 난리를 쳤단 말이야?」

    조무래기, 라고 김낙원이 말하면서 그 여덟 명을 손가락으로 차례차례 가리켰다. 김반장과 기동대의 시선이 꿇어앉혀진 놈들에게 자동적으로 쏠렸다. 약간의 동정마저 섞인 시선이었다.

    기분이 최악으로 떨어진 낙원이 줄담배를 물면서 물었다.

    「그래서 빠져나간 놈이 누구누구야?」

    「김갑선이 수족으로 부리던 넷 중에 오른팔하고, 김갑선 둘이 빠져 나간 것 같습니다.」

    김반장이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낙원이 싱글싱글 웃었다.

    「애초 나온 이유를 망각했지, 김반장? 응. 뒷문 쪽에는 사람을 배치도 안했단 말야? 하기야 겨우 여덟 명 잡는데 한 명이 계단으로 도망칠 정도니, 말 다했지.」

    김반장이 연신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저어 그게, 이미 저희가 들어왔을 때부터 빠져나간 뒤였습니다. 잠복한 이형사 말로는 낮 12시에 조희용 쪽에 차가 나갔다 돌아오는 걸 봤다는데……」

    「눈이 삐었나보지.」

    낙원이 대놓고 비웃으며 돌아섰다. 허탕이었다. 돌대가리같은 아랫놈들 때문에 놓쳤다는 생각을 하자 잠시 피가 끓었다.

    「샅샅이 뒤져서 한 글자라도 쓰여진 종잇조각은 다 긁어와. 이 새끼들 족쳐보고 쓸데없는 걸 알아도 헛발질은 해보는 게 경찰의 본분 아냐?」

    세 번째 담배를 입에 문 낙원이 걸어 나갔다.

    * * *

    어떻게 김선까지 빠져나갈 수가 있나. 낙원은 수사부에 도착하고 나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자신할 수 있는 한 수였다.

    분명히 이번엔 행동도 빨랐다. 잡기로 결정한 것도 오늘이었다. 움직인 것도 오늘이었다.

    ‘남양’이 도산한 것까지는 가능하다 이해할 수 있어도, 하필이면 오늘 김선이 차를 바꿔 타고 교묘하게 빠져나갔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했다.

    「돈 먹은 거 아냐?」

    낙원이 문득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서경위가 고개를 저었다.

    「이형사는 오늘 계획 자체를 몰랐을 겁니다. 모르는데 알려줄 수는 없죠.」

    그랬다. 설사 내통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 계획을 아는 자는 오로지 넷뿐이었다.

    자신, 서경위, 최검 그리고 김반장. 서경위는 내내 자신의 곁에 있었다. 뭘 덮치는지도 모른 채 '남양'에 파러 갔던 최검도 제외였다. 김반장은 피해자를 족쳐서 고소장을 받아내고 있었다. 다른 곳에 잠복해 있던 형사들을 불러 모으긴 했어도 놈들은 또 다시 동양을 덮치러 간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급하게 끌고 모은 기동대는 아예 갈 때까지도 누굴 잡는지, 왜 출동하는지 이유도 몰랐다.

    모르는 데 알려줄 수는 없다. 아는 자만이 알려줄 수 있다.

    한 낮. …한 낮에 차를 바꿔 타고 빠져나간 김선.

    [조회용이, 나이트 하는 놈 아니었어?]

    낙원의 말에 서경위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나이트를 한다고 낮에는 자야 한다는 그 시건방진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여?'

    문득 김원리의 말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막내 똘마니가 변했다고 성토를 해가며 했던 말이었다.

    [나이트 하는 놈한테, 낮 12시에 갔다고?]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서경위가 옆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낙원은 그러나 서경위에게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내통자가 아니라, 외부라면 어떨까. 예를 들면 박광우- 오전에 도산을 하고 튀려던 놈이. 한 낮에 '남양'에 들이닥친 경찰들을 보고 김선부터 빼돌렸다면. 조심성이라면 100억을 동문회관에 쏟아 붓는 배짱만큼이나 뛰어난 녀석이었다.

    설마 자신을 알겠나 하면서도 '일단 며칠 몸을 숨기라'고 김선에게 말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럼 김선은 어디에 있을까.

    오른팔과 조희용까지 데리고 튀었다. 오른팔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조희용까지 일부러 낮 12시에 데리러 갔다는 건 어쩐지 기묘했다.

    낙원의 손가락이 몇 번 테이블을 두드렸다. 뭘 하려고 했던 걸까.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생각은 맴맴, 제자리를 돌았다.

    '일단 식사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보다 못한 서경위가 말했다 때는 이미 저녁9시였다. 뭔가 건질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 김선 사물실에서 긁어온 쓰레기 같은 종이더미에 매달려 있떤 낙원이, 간단하게 고개를 저었다.

    서경위가 한숨을 쉬고는 돌아섰다.

    낙원은 그 뒤로도 두어 시간을 더 매달려 있었다. 간만에 오늘 하루만은 아무 생각 없이 일 좀 해보자고 했더니 꼬이고 또 꼬인다.

    이대로 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다. 낙원은 넝마주이처럼 쓰레기더미에 매달린 채 매 시간마다 서경위에게 물었다.

    [김반장은 아무 얘기 없어? 그 찌거들은 역시 아는게 없다든?]

    조무래기에서 한 단계 내려간 어휘에, 서경위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아직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그러면 낙원의 입에서는 무능한 경찰에 대한 온갖 욕설들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경'자가 붙은 계급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느린 걸로 치면 민중의 지렁이고, 옭아매는 걸로 치자면 민중의 지랄이며, 조직이 노후된 걸로 치자면 그제야 민중의 지팡이라는 것이다. 경찰대를 나온 서경위가 차마 듣기 괴로워 몇 번이나 뭔가 드시겠냐고 물었지만 낙원은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소식이 온 건 결국 밤을 새고 난 새벽 5시였다.

    [불었답니다.]

    오매불망 전화벨만을 기다리던 서경위가 기쁨에 차 말했다. 쓰레기더미를 얌전히 쓰레기통 옆으로 치우고 바닥에서 스트레칭에 매진하고 있던 김낙원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뭐래?]

    놈들이 여우도 아니고, 파놓은 굴이라봤자 다 거기서 거기일 터였다.

    드디어 한 명이 은신처를 분 모양이다.

    서울이래, 경기도래, 아니면 어디 지방으로 튀었다든.

    기쁨에 찬 김낙원이 웃으면서 물었을 때였다. 그러나 서경위가 전해준 말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은 것이었다.

    [박목화에게 갔답니다……!]

    낙원의 웃음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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