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9화 (8/34)

9. 잠복기

과녁을 꽂은 화살처럼 햇살이 5월의 중앙을 내리꽂았다. 10점짜리였다. 주차장에 도열한 차들의 본넷이 봄 끝물의 햇살을 여름처럼 반사해냈다.

김낙원은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차문을 닫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주차장 옆 도로에 제일 가까이 대고 있는 차문을 툭툭 발로 걷어찼다.

「어느 놈이야……?!」

곧 문이 열리더니 검은 잠바를 입은 남자 하나가 기세좋게 튀어나왔다. 본업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듯한 차림에 김낙원이 혀를 찼다.

눈앞에 들이대진 신분증에 형사가 곧 고개를 수그렸다.

「……본부에서 나오셨습니까.」

「응.」

낙원이 반토막으로 대꾸했다. 그리고 턱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형사를 가리켰다.

「이렇게 둘 뿐이야?」

「아닙니다. 지하철 안에도 한 조가 더 있습니다.」

낙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김반장더러 고속터미널에도 한 팀 보내라고 해. 신원 보증인 이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자리 이탈하지 말도록. 주위에서 눈치까면 곤란하다.」

넷, 하고 고개를 숙였던 형사가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실컷 당부를 한 김낙원이 비닐봉지를 들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형사가 놀라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기 그렇게 가시면……!」

김낙원이 응? 하고 뒤를 돌아보곤 싱긋 웃었다.

「나는 다들 친구로 알거든.」

할 말을 잃은 형사들을 뒤로 하고 낙원은 걸어갔다. 꽃집 앞에 서있던 요구르트 아줌마가 그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했다.

「아이고, 친구왔네. 빨리 좀 들어가봐요. 목화 총각이 어디서 손을 다쳐가지고 밥이나 먹을 수 있을지…….」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양, 낙원이 매끄럽게 웃으며 봉지를 들어보였다.

「그래서 제가 왔지 않습니까.」

요구르트 아줌마가 안심을 했다.

「직업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밥을 사다 나르냐. 참 친구끼리 지극 정성이야. ……그럼 난 지하 갈 테니까, 잘 부탁해요-.」

그리고 요구르트 아줌마는 지하로 총총히 사라져갔다. '참 사람 착한데, 요즘 취업이 힘들어서 원,'

혀를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낮에 계속 들락거리니, 완전히 속없는 백수로 낙인찍은 듯 하다.

자신과는 백만광년은 먼 평가에 낙원이 피식 웃으며 가게 문을 밀었다.

딸랑, 귀에 이젠 박힐 것 같은 종소리가 났다.

이번에 놈은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낙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면서 테이블 앞에 서 있던 놈에게 다가섰다.

「손은 좀 어때,」

뻔뻔한 한 마디에 놈이 참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때를 놓치지 않은 낙원이 놈에게 속삭였다.

「이봐, 미안해.」

「……!」

효과는 드라마틱했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놈의 눈이 처음 보는 형태로 커졌다. 한 순간 허를 찔린 얼굴에 낙원이 싱긋 웃으면서 놈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등엔 거즈만이 붙어 있었다.

「그 손을 해갖고 씻기라도 했나보지? 붕대는 다시 감아줄게. ……정말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다친 손을 잡힌 놈은 흠칫했지만 손을 잡아 빼지는 않았다. 어쩐지 순진한 처녀를 꼬시는 기분이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워섬기면서도, 꼬시는 말을 할 때 만큼은 진심이 된 듯한 기분.

「꽃 다듬어 놓을 생각이었나보지?」

흩어진 테이블로 낙원이 시선을 돌렸다.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미안해'의 효과는 여자들이 바르는 주름 개선 화장품의 광고보다도 더 드라마틱했다.

피식 웃던 낙원이, 녀석이 과연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까에 생각이 미쳤다.

상처를 입힌 놈은 적이었을 것이다. 여태껏 이분법으로 세상을 살아왔던 이 순진한 놈이, 자길 상처 입힌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리 없었다.

……정말로 미안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애초 그런 일을 하지 않는 법이다. 놈은 아직 그런것도 몰랐다.

낙원이 생각을 접고 웃었다.

「그런 건 내가 해줄 테니, 우선 밥이나 먹자구. 주말인데다 스승의 날이라, 사람들도 꽤 일찍부터 올 텐데 밥 먹을 틈이 나겠어?」

비닐봉지를 올려놓고 의자를 앞에 놓자, 놈이 주저하더니 결국 앉았다.

낙원이 웃으며 봉지를 벌렸다. 처음에 사왔던 바로 그 쇼마이였다. 줄줄이 늘어선 작은 만두를 앞에서 놈이 젓가락을 들지 않고 멈칫거렸다.

「자.」

그 때 낙원이 숟가락을 뜯어 내밀었다. 놈은 잠시 그 수저를 내려다보았다. 일회용 수저는 아니었다.

「일회용 숟가락으로 먹으면 입맛 버려. 넌 지금 이게 낫잖아?」

「…….」

테디베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어린이용 수저를 내민 낙원이, 싱글싱글 웃었다. 컵에 그려져 있는 모양은 한 달 동안 몰랐어도, 수저에 붙어있는 플라스틱 그림은 눈에 아주 잘 들어 오는 모양이었다.

커다란 놈이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그 수저를 받아들였다. 낙원이 싱긋 웃었다.

정애가 괜히 그 컵을 골랐던 것은 아니었다.

놈을 길들이고 싶어지면, 다들 비슷한 느낌을 받는 모양이다…….

'그 꽃집이 박목화 명의로 되어있던데요. 아셨습니까?'

서경위가 물었다. 어젯밤, 수사본부로 돌아갔을 때였다.

며칠을 혼자 야근을 하던 놈이 가져온 보고에 낙원은 호오, 탄성을 올렸다. 여자가 박목화를 무척이나 믿었나보군,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김정애가 주 거래하는 은행원한테 물어보았더니, 2호점 낼 때 냈던 은행 빚 7천만원을 단번에 갚았답니다. 어디서 그런 목돈이 생겼나, 신기해서 기억하고 있더군요. 1억짜리 당좌수표였답니다. 예금주 박목화로.'

'예금주가?'

서경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알아보니 제 2금융권의 상호저축 은행으로, 박목화 명의의 계좌가 잇더군요. 3년 동안 거래가 없다가, 그 때가 첫 인출이었답니다.'

'규모는?'

서경위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진 창구에서 탐문해서 들은 이야기지만, 계좌 정보를 빼내려면 영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낙원은 아무 말 없이 서경위가 내민 영장 청구서에 도장을 찍었다.

첫 인출이라, 석연치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낙원은 그 둘을 알았다. 놈이 뽑아서 줬더라도 김정애가 받았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 돈이 어디서 났을까.

'그 시절엔 큰 형님이 천만원씩 집어주셨지만서도……,' 김원일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김원일조차 지금은 박목화가 돈이 없다는 걸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김원일이 모르면, 박목화도 모른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쥐었다 폈다.

박광우다.

박광우의 돈이다. 놈이 박목화에게 네 몫이 여기 있다고 알려준 거다. 꽃집에선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제 3자인 김정애를 통해서.

그런데 김정애는 박목화가 손 씻기를 바라는 마음에, 돈을 건넨 게 아니라 놈을 위해 쓰기로 하고……

「너,」

그대 어색하게 부르는 박목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낙원이 고개를 들었다. 수저를 멈춘 놈이 한마디 했다.

「먹어라.」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이 얼마나 순진한 놈인가. 미안하다는 말 한 번에 여린 배를 드러내어, 식사까지 권하는 것이다.

낙원이 젓가락을 들었다.

믿기 어렵지만 박목화 주위엔 순수한 호의가 존재했다.

버림받은 만큼의 운인지도 모른다. 놈이 그토록 믿고 따르는 형님과 누님은 둘 다 분명 놈을 위하고 있었다. 방법이 서로 달라 놈이 몰랐을뿐이다. 박광우는 돈을 집어주고, 김정애는 돈을 써주었다- 놈을 위해서.

참 좋기도 하겠어. 그런 호의도 받고.

낙원이 꼬인 웃음을 쇼마이로 숨겼다.

너한테 잘 해주는 좋은 인간들을 만났으니, 이젠 슬슬 대가를 치를때도 됐지. 안 그래……?

「리본 만들어줄까?」

적당히 먹은 낙원이 웃으면서 물었다. 됐다고, 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낙원은 놈의 '괜찮다'는 장벽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다.

「내가 하겠다는데.」

그러고 그는 리본을 꺼내 척척 감아올렸다. 말리려던 놈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낙원은 놈이 하려던 꽃정리를 하고, 꽃포장을 해냈다. 이걸 보라고, 자신이 한 게 더 낫다고 잘난척 키득거릴 즈음에는 놈은 호의와 적의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 애매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3년 전 W캐쉬를 세울 때부터 김선은 사실 박광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겁니다.」

서경위가 한 말에 김낙원도 동의했다.

「그렇겠지. 3년전에 박목화를 찌른 게 누구였는지 밝혀졌으니, 한 번 그 시점에서 정리를 해보자고.」

수사부는 텅텅 비어있었다.

형사들이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김원일이 김선한테 찔렸다는 이야기가 이미 박목화에 의해 '동양'에 퍼진 뒤였다. 김반장 휘하 형사들은 모두 박광우와 김선과의 전면전을 기대하고 잇었다. '삼일 내로 터진다,' 김반장은 큰 소리 탕탕 치고 본부를 떠났다. 단속 기간 중엔 뜰 놈이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낙원은 말릴 생각도 없이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박광우를 찌를 수 있었다면 박광우를 찔렀을 거야. 그렇지?」

낙원이 말했다.

「예.」

「박목화가 찔린 건 12월 초야. 공판 날짜는 다음해 1월이었지만, 김선이 사채업을 합법화한 게 10월 31일. 놈이 결코 자기 뜻으로 그렇게 합법화를 했을 리가 없다- 여기까지가 사실이지. 그럼 추측을 해보자.」

낙원이 싱글싱글 웃었다.

「합법화를 종용한 건 박광우다. 이건 추측 1번이지.」

「그렇지만 정황상 확실한 추측입니다.」

서경위가 동의했다.

「박광우한테 앙심을 품고 단속기간 중에 박목화를 찔렀다. 이때 김선이 써먹은 게 박목화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는 똘마니 6번, 조희용이야.」

「추측입니까?」

서경위의 물음에 김낙원이 싱긋 웃었다.

「아니, 이건 사실. 내 귀로 들었지.」

5월 7일, 김원일한테.

처음 그 상처를 보았을 때부터 여섯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던 김낙원 이었다. 막내는 어디갔느냐는 물음에 김원일이 '나이트요.' 라고 대답한 것은 범인이 누구라고 저 입으로 밝힌 것과 같았다.

3년을 몰랐던 놈들이 바보였을 뿐이다.

「대가로 나이트 하나를 받았다는군.」

낙원의 말에 서경위가 잠시 조용해졌다.

「……헛되이 외근을 하신 건 아니었군요.」

진심으로 감탄하는 서경위를 보고 낙원이 싱글싱글 웃었다.

「6번을 써서 박목화를 찌른 이유는 박목화에게 칼자루를 쥔 게 박광우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였겠지. 죽어도 좋았어. 그러나 김선은 6번을 그리 신용하지 않았을거야. 그때까지 조희용은 누굴 찌른 적은 커녕, 조폭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약한 놈이었어. 연락원이나 하며 언저리를 기웃대던 놈이었지. 박목화가 거둬주기 전까지는 여기저기 치이고 다녔다는군. 그런 놈이 박목화를 찌르는데 성공해도, 과연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아닙니다.」

서경위가 바로 대답했다.

도검류에 찔린 상처는 일단 경찰로 연락이 온다. 게다가 단속기간이었다. 자신이 줍지 않았더라도 곧 경찰에게 붙들렸을 것이다. 그런 장소였다. 놈들 구역과는 먼 번화가 한 복판, 순찰이 돌고 파출소가 있는 곳.

김낙원이 정리를 재개했다.

「실은 잡히길 바랬던거야. 놈이 불면 경찰 손을 빌려, 박광우를 잡고 싶었던 거지. 동양도 W캐쉬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하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놈은 불지 않았고 박광우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잡히지도 않았지만 전면전도 벌어지지 않았으니 일승일패였지. 놈이 출소할 때 방패로 삼기 위해 나와바리를 줘서 6번을 곁에 두고, 3년간 내내 박광우를 칠 날만 기다리며 한 판을 준비했을거야.」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서경위가 의문을 제기했다.

「박목화가 잡혔습니다. 자신을 의심할 상황이라는 건 몰랐어도, 감방에 들어가는 건 막을 수 있었을겁니다. 박목화는 현행범도 아니었고, 상해 건으로 치자면 오히려 피해자였죠. 병원에 있는 동안 민간인들을 위협하다시피해서 얽어 넣은 것뿐이지 않습니까?」

둘 사이에 정말로 유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이래, 김낙원을 괴롭혀 왔던 의문이었다. 낙원은 중얼거렸다.

「딴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틀림없이, 뭔가 큰 딴짓…….」

대양(大洋)을 유유히 쏘다니고 있었을 커다란 물고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 '딴 짓'을 알고 있을, 수조에 들어온 물고기도, 김낙원은 싱긋 웃었다.

서경위는 영문을 모른 채 쳐다보고 있었다.

* * *

「줘 봐.」

낙원이 양동이를 뺏었다. 목화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낙원은 놈을 끌어다 앉혔다. 그리고 놈 앞에 앉아 오른손을 끌어냈다. 며칠간 계속 해온 탓에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놈이, 복잡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다 한 마디 했다.

「괜찮다.」

이제는, 이라고 덧붙인 말도 낙원은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다. 잡아 끈 오른손을 붙잡고 어제맸던 붕대를 풀었을 뿐이다. 거즈를 붙인 맨 손이 드러나자 낙원이 책상 쪽에서 새 붕대를 가져왔다.

「물일하면 더 오래간다.」

놈 앞에 앉은 낙원이, 붕대를 갈아주면서 웃으며 말했다.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의를 거절하는 방법을 모르는 놈이었다. 유일한 거절의 말인 '괜찮다'를 아무렇지도 않게 타넘는 김낙원 앞에선 놈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붕대를 싸매준 낙원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양동이를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조금 있다 돌아왔을 때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 양동이를 놓자 놈이 일어나 냉장고 안에서 바구니를 꺼냈다. 정애가 오지 않은 지도 벌써 일주일 째였다. 시들어가기 시작한 꽃들을 바꾸려는 거다.

뚝, 그러나 장미줄기를 자르던 놈의 가위가 자꾸 엉뚱한 데를 잘랐다. 손바닥까지 싸맨 붕대가 너무 두꺼웠기 때문이었다.

「줘 봐, 내가 하게.」

낙원이 또 나섰다. 놈은 아무 말 없이 다시 붕대를 풀려고 했다. 낙원이 그 손을 잡았다.

「기껏 해줬는데 풀기냐?」

「두꺼워서……」

놈이 무어라 하려는 것도 듣지 않고, 낙원은 홱 가위를 뺐었다.

낙원이 서슴없이 꽃을 잘라 바구니에 뚝뚝 꽂았다. 장미만 갈려고 했던 바구니였지만, 피었던 장미를 봉오리 상태의 장미로 갈고 나자 어쩐지 심심했다. 바구니를 한 번 더 쳐다본 낙원이 냉장고에서 소재로 쓰는 유칼리 잎을 꺼내, 빈 공간에 세워 옆으로 둘렀다.

옆에 선 채로 그 모습을 쳐다보던 놈이 문득 중얼거렸다.

「너는, 뭐든지 잘하는군.」

감탄으로 받아들인 낙원이 자기가 만들어놓은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완성된 바구니는 정애가 만들어놓고 간 정형화된 장미바구니보다 세련되어보였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장사에 익숙한 사람은 소재를 아끼는 법이다. 원가를 생각한 정애와 자신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은 놈을 보고 낙원이 웃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거에 손 좀 댄 것뿐인데, 이런 걸 갖고 그러면 섭섭하지.」

놈이 무어라 말하려다, 잘 이야기가 되어 나오지 않는 지 그만두었다.

「원래 꽃 좋아했냐?」

낙원이 테이블 위를 대충 치우면서 물었다. 놈이 갑갑한지 붕대위를 만지면서 말했다.

「아니.」

이제 제법 놈은 대꾸를 하고 있었다. 단어 한 마디를 넘어서는 일은 많지 않았어도 엄청난 진보였다.

「왜, 너 이름 목화잖아.」

시덥잖은 농담에 놈이 쿡, 하고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다시 그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놈을 바라보다, 놈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 발을 돌렸다.

「그럼 꽃집은 그냥 누님따라 했다치고, 은퇴하면 원래 뭐하려고 했어?」

「은퇴?」

놈이 생경하게 되물었다.

「뭐 나이트라던가 노래방이라던가, 네 놈들 잘하는거 있잖아.」

아아, 놈이 소리를 내더니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동생들이 하고 싶은 거 해줬겠지. 둘째가 포장마차도 얘기했었고.」

「그래……?」

뜻밖의 말에 김낙원이 믿을 수 없어서 되물었다. 너희 같은 놈들한테 뜯길 텐데, 라는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놈이 이야기했다.

[우리 구역에서 한댔어.]

형님의 위세로 술을 강매하겠다 이거냐. 김낙원이 혀를 찼다.

[너는?]

그러자 놈은 고개를 저었다.

찌르거나, 찔리거나. 문득 오래 전에 놈을 보며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3년전의 건이 없었다면 놈은 그렇게 길바닥에서 생을 마쳤을 것이다. 박광우 밑에서 오로지 미친 소의 뿔로.

낙원은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선 캐묻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완성된 바구니를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바닥에 떨어진 흐드러진 장미들과 잘려진 꽃줄기를 보고 낙원이 치우려 하자 놈이 일어섰다.

아무리 낙원이 하려는 일이라도 더 이상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놈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먼저 쥐었다.

평소라면 '청소 무지 좋아하네.' 하고 농을 던졌을 낙원은 잠시 놈을 쳐다보고 있었다.

놈이 단추를 목끝까지 채우고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와서였다.

[안 덥냐?]

낙원이 물었다. 계절감이 이른 여자들은 벌써 맨 다리에 샌들을 신고 다니고 있었다. 날은 어느새 여름 볕을 띠고 있었다.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가 갈수록 요란해졌다.

팬 앞의 꽃들은 수초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놈은 별로, 라고 말하듯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더위를 안 타지 하던 낙원이 문득 깨달았다.

[삼복더위에도 검은 양복을 입고 다녔냐?]

낙원이 웃으면서 던진 말에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이었다.

더럽게 성실한 놈. 10년 넘게 그 생활을 하면서 내내 그러고 다녔다는 얘기냐. 낙원이 혀를 찼다.

요즘 조폭들의 알록달록 티셔츠 차림을 떠올리면 훨씬 낫긴 해도, 튀는 건 마찬가지다. 낙원이 놈을 놀리듯이 말렸다.

[이봐. 민간인이 되려면 사회화를 해야지. 그렇게 꽉 채우고 다니면 다들 이상하게 볼 걸. 5월이니 지금부터라도 연습해두지 그래. 단추 푸는 연습.]

그러나 놈은 낙원의 말을 진지하게 들은 모양이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 싶더니 목에 채워진 단추를 풀었다. 별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단추 한 개였을 뿐이다. 그러나 낙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놈이 자시 손으로 단추를 푸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한 개,또 한 개. 놈의 사내다운 손끛이 항상 단정하게 목 끝까지 채웠던 단추를 풀어, 날개처럼 펼쳐진 쇄골의 시작부분이 눈에 들어왔을 때에는-.

[…….]

툭툭.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 위를 두드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놈이 그를 돌아보았다. 두드렸는지도 몰랐던 낙원이 어깨를 으쓱하자 놈이 다시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문득 담배가 고파진 낙원이 일어나 서성대다 말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항상 셔츠만 입는군. 이젠 민간인인데. 옷도 좀 바꾸지 그래.]

그러나 놈은 고개를 저었다. 답은 간단했다.

[돈 없어.]

그 구좌에 얼마가 있는지는 몰라도 1억은 문제없이 수표로 끊을 수 있는 금액일 거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던 낙원이 놈의 등만 쳐다보았다. 하얀 셔츠가 꽉 맞게 벌어진 놈의 등은 갑옷을 입은 것처럼 곧았고 힘이 있었다. 김원일을 위시한 '동양'의 바보들이 형님. 하고 무작정 따르는 기분을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놈은 오래된 무사같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순수한 충정의. 누구도 꺾을 수 없을 듯한 등과 다리로 버티고 선 사내다운 무사.

……그러나 그는 바로 그 등이 자신의 아래에서 꺾여 신음하던 것을 기억했다.

그 좁은 골반의 느낌, 신음을 참던 꾹 다문 입술이 떨리던 그 작은 움직임까지도. 낙원은 놈이 볼 수 없는 등 뒤에서 잠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단단한 견갑골과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곧은 허리의 언저리를 시선이 맴돌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놈을 깔아뭉개야 할 때도 아닌 이때에 어째서 이런 욕망을 되새김질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놈은 사내다웠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놈은 사내였고 그 중에서도 '형님'이었다. 어째서 저런 놈에게,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을 두드리려던 손끝을 거둬들였다.

고통을 주려는 목적도 없는 이때에, 대체 어째서. 혜정이. 낙원은 오랫동안 만나러 가지 않았던 여자친구를 떠올렸다. 하도 여기서 요구르트 아줌마니 여직원들 하고나 만났더니, 제대로 된 여자를 본 지 오래 되어 이런 모양이지.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놈의 체온이 느껴지는 건.

이미 놈을 알아서 일거다. 이 일이 끝나는 대로 혜정에게 연락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낙원은 고개를 돌렸다.

[치사하네.]

낙원이 웃으며 한 말에 놈이 돌아보았다.

[박광우 말야. 의외로 치사하단 말이다. 그렇게 옆에 오래 뒀는데 너한텐 셔츠 살 돈 하나 안 남겨줬냐?]

그러자 놈은 고개를 저었다.

[……뭐 하러.]

내 몸이 성한데 뭐 하러. 낙원은 그 말을 알아듣고 피식 웃었다. 언뜻 떠보아도 놈은 진짜 아무것도 몰랐다.

[이만 간다,]

낙원이 일어났다. 그때였다. 꽃을 내놓고 있던 놈이 문득 그를 불렀다.

[김낙원,]

놈이 자신을 부른 건 두 번째였다.

낙원이 멈춰섰다. 돌아보자 한 아름 꽃을 안은 놈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한테서 뭔가 듣거나, 형님이 날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버려.]

'경고'였다. 낙원은 싱긋 웃었다.

[형사들은 몰라도 난 그런 생각은 안 해.]

그럼 왜, 놈의 눈이 그렇게 물었지만 낙원은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꽃집을 나서면서 남긴 말은 평소와 같았다.

[또 오지.]

뒤에서는 놈이, 말없이 그의 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 * *

[빌어먹을 새끼들이 몸을 사리고-.]

수사부는 오랜만에 시끌시끌했다. 김반장과 형사들이 피곤에 지친 얼굴로 돌아와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연 일주일, '동양'구역에 인력을 쏟아 부어 잠복한 뒤에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언제부터 놈들이 자기 체면도 돌보지 않게 되었냐 이 말이야. 동생이 찔렸는데 그래 나서지도 않어? 박광우 그 새끼는 코빼기도 안보이고…….]

상부에서 꽤나 깨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인력을 끌고 가서 아무 성과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업자득이었다.

바로 그렇게 인력을 끌고 갔으니 나타날 리가 없는 거다. 김낙원이 피식 웃었다. 순진하긴, 칼만 수십 개가 매달린 곳에 미친 소가 잡아 잡수하고 목을 내밀 리가 있나.

꽃집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고 잠복형사들은 배치한 것도 우습지만, 사흘이면 터진다고 호언장담 끝에 '동양'구역을 들쑤셔 놓은 것만큼 바보짓은 없었다.

차라리 자신처럼 꽃집에 드나드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낙원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W캐쉬' 자금 쪽은 알아봤나?]

그러나 낙원의 물음에 답한 건 김반장이 아니라 서경위였다.

[아직 자금 추척이 끝난 건 아닙니다만, 통상자금 4,500억 정도 규모의 회사로, 이 업계에서는 작은 규모에 속합니다. 금감원 친구의 말로는 그래서 W캐쉬가 부동산 쪽 담보를 주로 취급하는 게 특이하다는 군요. 그 규모의 회사는 보통 12%의 분할상환을 맡거나, 신불자에게 66%의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일 정도가 고작이라는 겁니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낙원과는 달리, 라이터크기만큼 눈이 커진 김반장이 옆에서 듣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400억이 작단 말요……?! 그럼 그 뭐야 티비에 산와인지 사놔인지 하고 광고 때리는 회사들은 대체-]

그 동안 조사해 오면서 돈의 단위를 이미 숫자로만 인식하기 시작한 서경위가 답해주었다.

[1조원대라고 합니다.]

[그 정도 되지.]

김낙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반장은 더 이상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아예 듣지 않으려 애쓰며 몇 걸음 떨어져갔다. 서경위가 보고를 계속했다.

[W캐쉬에서는 회사나 개인의 부동산을 담보로 잡습니다. 사채회사까지 올 정도면 이미 제 1금융권인 은행에 담보를 잡히고 또 온 부동산들이지만, 여기는 3위가 되었건 4위가 되었건 근저당을 설정하고 봅니다. 그렇게 일단 순위에 들어가면 우선순위가 있는 쪽. 그러니까 먼저 잡은 쪽에 대신 채무자의 빚을 변제해주고 자기네가 부동산을 잡는 거지요. 그러면 시가 100억짜리 땅도 반에 반값도 안 되는 헐값에 산다고 합니다. 그렇게 잡은 부동상을 건설회사로 넘겨서 수익을 내는 겁니다.]

[확실히 그 규모의 사채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군.]

낙원이 동조했다. 김선같은 전형적인 조폭의 머리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야. 박광우였다. 그놈밖엔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야 사채업을 빨리 합법으로 전환한 게 이해가 갔다. 수익으로 합법으로 내고 있는 마당에 자금을 불법 사채로 돌릴 이유가 없다.

머리 좋은 새끼. 낙원이 혀를 찼다.

이런 놈을 잡으러 '동양'의 구역에서 며칠을 잠복해 있었단 말이지, 김반장은.

미친 소 같은 놈을 잡기 위해선 다리가 아니라 머리가 필요했다. 놈의 서식지와 습성을 파악할 머리가.

아마 그리고 약간의 운도 필요하겠지. 망망대해에서 같은 배를 다시 한 번 만날 정도의 운. 역시 꽃집에 드나드는 게 옳았다.

낙원이 생각했다.

그림도 모르는 1000ps의 퍼즐을 맞추려면 최소한 그 틀만은 알아야했다. 놈의 신뢰를 얻어 어떻게 하고야 말겠다는 게 아니다. 단지 놈의 곁에서 자리를 잡고, 자연스레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뿐이다. 미친 소를 잡는 데에는 운이. 그리고 단서가 필요하지. 놈은 무엇도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낙원은 놈이 정보로 생각하는 것만이 정보가 아니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놈의 곁에 있다보면 듣는 게 있을 것이다. 일단 믿어봐. 그리고 이야기를 하자- 무엇이든지.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낙원은 싱긋 웃었다. 오늘도 보아라 놈은 무려 '경고'까지 했다.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이제야 100m를 알리는 부표를 잡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 경계를 세우기 힘드니까 다가오지 말라는, 그런 경고가 아니었던가. 낙원은 웃으며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 수익이 김선한테 바로 떨어지진 않겠지. 사채 수익은 아니니까.]

[예.]

[박광우가 수익을 나눠주기만을 기다린다라…….]

낙원이 피식 웃었다. 3년 전 어째서 '동양PK'의 공조가 깨졌는지 알만했다. 불법 사채 때보다 비록 수익은 올라갔을지 몰라도. 이렇게 된다면 단지 박광우의 하청업자일 뿐이었다. 솔직히 그 자리에 김선이 아니라 다른 누가 들어가도 상관이 없는 일 아닌가.

시키는 대로 사무실이나 지켜라. 그럼 돈은 나눠준다. 비록 돈에 이끌려 전환은 했더라도 김선같은 전형적인 오야붕이 불만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너도 한번 잡혀봐라하고 일을 꾸며 박목화를 찌른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래도 놈은 아무것도 불지 않았지. 문득 아까 '큰 형님은 오지 않는다'고 말했던 박목화가 떠올랐다. 놈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형님은 온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강한 유대감이 엿보이는 말을 떠올리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비틀리게 웃었다.

……이 일이 다 끝나면 꽤나 하고 싶은 일이 한 가지 생겼군. 박광우를 잡아 놈에게 들이대며 말하고 싶어졌다.

'오지 않는다면, 네가 가렴.'

마음 편하게 감방으로 면회 가서 오래오래 만나게 해주마. 나는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라, 면회 시간 정도야 5분은 늘려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고.

배신의 드라마가 없다면, 재미없는 형제애의 드라마에는 눈물의 상봉을 넣어주는 수밖에.

낙원은 싱긋 웃으면서 서경위에게 지시를 내렸다.

[김반장은 김선을 맡아서 피해자 조사 좀 해보라고 하고, 경위는 그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나 더 파봐.]

[예.]

서경위가 대답했다.

* * *

일이 끝났을 땐 거의 11시 였다. 혜정이에겐 결국 오늘도 연락하지 못했다.

문득 허기가 졌다.

꽃집이 생각난 낙원은 웃고 말았다. 이젠 조건반사가 된 모양이다. 놈이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김낙원은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있었다.

……어차피 그리 돌아가는 길도 아닌데. 가는 길에 한번 보면 되지. 낙원은 편하게 생각하고 말았다. 전철역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천천히 속도를 줄이면서 언뜻 쳐다보았을 때였다. 꽃집엔 아직도 불이 켜져있었다.

[……?!]

저놈, 이시간까지 영업을 하고 있단 말야?

낙원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꽃집 바로 옆의 도로에 차를 세운 낙원이 아직 불 켜진 가게로 올라갔다. 몇 개 안되는 계단을 올라가자, 불빛이 새어나오는 가게 유리문 앞에서 모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는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낙원이 반갑게 소리를 냈다.

[이봐,]

[…….]

놈이 돌아보았다. 그를 알아보자 잠시 놈은 기묘한 얼굴을 했다.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왔다는 듯한. 반가워하는지 꺼리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낙원은 몇 걸음 뛰듯이 다가가 물어보았다.

[저녁 먹었냐?]

* * *

결국 간 곳은 일전에 갔던 '불타는 연탄 고기집'이었다. 시간이 늦어 갈 수 있는 곳이라곤 고기집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밥 먹자고 오는 길에도 놈은 내내 말이 없었다. 5월 말, 더위는 하루가 다르게 성큼 다가왔다. 고기집의 온도도 그렇게 올라가 있었다.

'4인분에 소주 두 병이요,'

소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김낙원이 소리쳐 주문했다. 따뜻했던 화로는 이제 밤이 되어도 더웠다. 낙원이 조금 떨어진 채 고기를 굽고 있을 때였다. 붕대를 감지 않은 놈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풀었냐?]

낙원이 물었다. 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낙원이 웃었다.

[또 해줄까?]

놈은 고개를 저었다. 꽤나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낙원이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 소리가 고기를 굽는 연기와 소음에 섞여 사라졌다. 고기가 익기 시작하자 셔츠 소매를 두어 번 접어올린 놈이 젓가락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낙원이 자기 잔도 따르는 김에 놈의 몫까지 술을 따랐다. 물 대신, 이라는 느낌으로 고기와 함께 술이 몇 잔 돌았을 때 낙원이 웃으면서 물었다.

[김효리가 없어서 섭섭하지?]

놈이 피식 웃었다. 천장까지 오른 회색의 연기와 왁자지껄한 소음들 속에서도 놈의 웃음만큼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에 있는데 뭘.]

찔렸다는 걸 낙원은 새삼스레 기억해냈다. 얼마 안 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무척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뭐, 꽃도 안 보내냐.]

낙원이 웃으며 묻자 놈이 고개를 저었다.

[구역에 있는 의원(醫院)이야.]

가면 폐가 된다.

낙원은 놈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미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얼굴을 보여 좋을 것이 없었다. 게다가 굳히 따지자면 김원일이 다친 이유도 박목화와 만나서가 아닌가.

다 나아도 오지 말라고 하겠군. 낙원은 잠시 혀를 찼다. 몇 번 술이 말없이 돌았다. 고기까지 해치우고 나서 낙원이 일어섰다.

[가야지,]

시계를 보자 이미 12시 반이었다. 낙원이 일어나 계산했다.

[지금 가도 몇 시간 못 자겠는데.]

중얼거린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놈이 나와서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싶어 몇 걸음 따라가보던 낙원이, 곧 목적지를 알았다. 전에 갔던 모텔이었다.

* * *

낙원이 먼저 씻고 나오자 곧 놈이 들어갔다. 세찬 물소리가 들렸다. 굳이 잠도 오지 않아, 뭔가 볼 게 없나 찾던 낙원은 그냥 침대에 누워버렸다. 오늘은 성과가 좋구나. 욕실 문을 곁눈질한 낙원이 생각했다. 경고도 받고, 여관에도 오고. 놈이 여자기면 하다면 게임 끝났겠는데. 낙원은 조금 아쉽게 생각했다. 남자 둘이 여관에 와서 무엇이 있겠나 싶어서였다. 낮에 느꼈던 욕망은 최근 놈 탓에 혜정이를 못 만난 탓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여하간 잠이라도 같이 자면 놈의 경계는 더 약해지겠지. 반드시 놈에게 알려줄 것이다. 낙원은 놈이 누울 침대 저편으로 말없이 속삭였다. 어차피 박광우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녀석이다.

'네 큰 형님, 청주에 있다'

친절히 알려줄 날을, 낙원은 진심으로 즐겁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들락거린 건 박광우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었지만 잡은 뒤에도 다시 안 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놈을 꽤 마음에 들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걸. 낙원은 싱긋 웃었다. 그때였다. 욕실에서 놈이 걸어 나왔다.

[…….]

낙원은 잠시 자기도 모르게 놈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면 씻고 나온 놈을 밝은 곳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흰색의 샤워가운이 셔츠처럼 잘 어울렸다. 저런 가운을 입고도 저토록 딱딱하게 보이기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낙원은 웃음을 띠고 생각했다.

그러나 놈이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걸어와 옆에 앉았을 때에는, 더는 웃지 못했다.

이거야말로 우습지만 가운이 셔츠보다 좀 더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사내자식의 노출 따위 별 것도 아닐 텐데.

평소에 지나치게 올려 처닫고 있으니까 어색한 거다. 다 놈 탓이었다.

이리저리 돌리던 낙원의 시선이 문득 놈의 손 위에 가 멎었다.

[너, 손.]

누워 있던 낙원이 몸을 일으켰다. 놈은 오른손으로 침대를 짚고 있었다. 낙원이 그쪽으로 몸을 가까이 댔다. 놈은 흠칫했지만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낙원이 놈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아이가 잘못 그은 하얀 크레파스 자국 같았다. 거즈를 붙이는 곳 바깥으로는 거의 상처가 아물어 흉터만을 남기고 있었다. 파랗게 돋은 핏줄을 겹쳐다 피했다 꿈틀거리며 손등을 횡단하는 흉터를 쳐다보며, 낙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흉터가 된 쪽은 나은 편이었다. 거즈를 붙이는 안쪽으로는 아직도 상처가 퍼렇게 멍울지고 충혈된 채 짓이겨졌던 때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씻고나자 그 부분이 더 두드러졌다.

[…….]

낙원이 형광등 아래 드러난 놈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남긴 흉터였다. 그러나 뿌듯함보다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우선 그를 채웠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잠 못 이루다 회색빛의 새벽녘에 눈을 뜨면 입맛이 쓴. 다른 이였다면 후회나 죄책감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그 느낌.

[……아팠냐,]

물끄러미 손등을 바라보던 낙원이 불쑥 물었다. 묻고 나서도 그는 곧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아프라고 내리쳤던 기억이 뇌리속에 아직도 선명한데.

뻔한 말을 왜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놈이라면 화를 낼 거라는 생각을 막 했을 때였다. 놈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낫다.]

충동은 불씨처럼 그렇게 일었다. 낙원이 충동적으로 놈의 손등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침대에 앉아 있던 놈이 주저하면서도 손을 빼지는 않았다. 이미 붕대를 몇 번이나 싸매줄 때부터 익숙한 몸짓이기 때문이었다.

놈이 정말로 놀랐던건 그의 입술이 손등에 와 닿았을 때였다.

[……!]

입술에 와 닿은 감촉은 까끌했다.

각질이 일어난 손과 악수를 했을때처럼, 피부로도 느낄 수 있는 까칠한 요철. 안으로 패이고 옆으로 찢겨진 우둘두둘한 그 감촉의 언저리를 훔친 낙원의 입술이, 잠시 정신을 차리고 놈에게 머뭇머뭇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그랬던 건 잠시였다. 낙원은 곧 더 거세게 타오른 충동에 이끌려 놈의 손가락 끝에 입술을 댔다. 사내다운 손가락이었다. 놈의 손이라는 걸, 낙원은 분명하게 인식했다. 정상적인 머리라면 여기에서 멈춰야 했다. 놈이었다. 남자인 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인식했을 때에는 오히려 더 멈출 수가 없었다. 충동은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타올랐다. 술을 먹어서 그래. 낙원은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소주 한 병 남짓. 그게 그가 오늘 마신 술의 전부였다. 그러나 더 이상 낙원은 어떤 변명도 생각하지 않았다. 낙원이 놈의 손가락 끝에 혀를 댔다. 놈의 손에서는 물냄새가 났다. 식물의 줄기에서 풍기는 풀냄새와 수관에 흐르는 물냄새. 혀로 냄사를 훔친 낙원이 아직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앉아있던 놈의 목을 훔쳤다.

[……!]

밀어내려 하는 놈을, 낙원이 껴안거나 하는 어떤 강요도 없이 옆에 앉은 채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탐색 같은 몸짓에 이번엔 놈도 피하지 않았다. 목은 부드러웠다. 날개같이 양쪽으로 뻗은 쇄골의 움푹 들어간 사이로, 낙원이 입술을 댔다.

놈이 흠칫 놀랐다. 놈은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아주 내버려두지도 못했다. 익숙하지 않는 놈은 놀랐고, 흠칫거렸고, 아주 작게나마 소리를 냈다. 놀람 이상의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소리만큼 그에게 불을 붙인 건 달리 없었다.

충동은 한 순간 열정으로 타올랐다. 낙원이 놈의 목을 더듬던 입술에 체중을 실었다. 놈과 그가 엉킨 채로 침대에 눕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침대가 한번 크게 들썩였다. 가볍게 먼지가 날렸다. 그러나 스프링이 좋지 않다는 생각 따윈 할새가 없었다. 낙원의 손이 미친듯이 놈의 등을 몇 번 쓸어 내렸다, 도로 올라와 다시 한 번 쓸어내렸다.

끌어안은 체온에 익숙해질 최소한의 시간이 지나자 낙원의 손이 놈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갑주같이 단단한 견갑골을 지나, 곧게 뻗은 허리를 지나, 처음으로 놈의 좁은 골반에 닿은 손이 가운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더듬어왔을 때에는, 놈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폐부 깊숙이서 터진 소리였다. 단순히 놀람만은 아니었다. 오로지 그 소리롤 쫓아 낙원의 손이 더 깊숙이 들어갔다. 좁은 골반 사이에 자리잡은 사내의 상징을 더듬었을 때에는 놈이 자기도 모르게 약하게 몸부림쳤다. 싫은 게 아니었다. 놈의 것은 반쯤 발기해 있었다.

손가락을 핥았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사내로서의 증거를 보았을 땐, 거기에서 끝내야했다. 그러나 당장 낙원이 느꼈던 건 하나뿐이었다. 놈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흥분의 증거를 보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운이 벌어져 있었다. 서로 맞댄 맨살이 뜨거웠다. 놈의 상태만으로 흥분하기 시작한 낙원이, 역시 반쯤 일어서기 시작한 자신의 성기를 충동적으로 놈의 것에 갖다 댔다. 흐읏, 처음 닿는 감촉에 놈이 놀라 멈칫했다. 처움인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와는 고통을 주기 위한 추삽질만 알았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쾌락 의 행위가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생소하고 뜨거운 감촉에 아주 잠깐 수그러들었던 성기가 다음 순간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꾸욱, 서로 맞닿은 부분을 찔러 올리자 놈의 것도 반응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처음 맛보는 감촉을 좋고 나쁜 쪽으로 구분하자면, 미칠 듯이 좋았다.

뜨거웠다. 비볐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라 는 생각조차 그때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충동이 혈관을 점령했다. 욕망이 실핏줄까지 뛰어놀았다. 놈과 몸을 옆으로 겹친 채 성기끼리 비벼 올렸다. 하반신만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입에도 손에도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은 성기가 무섭도록 흥분해 부풀어 올랐다. 놈도 곧 그 움직임올 따라왔다. 뚜렷한 흥분이 민감하게 느껴지자 뇌까지 흔들리는 듯 했다. 놈의 얼굴이 문득 스쳤다. 무어라 말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말이 아니라 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자신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느 순간 둘 다 움직임이 멈추었다. 사정은 거의 동시였다.

「…」

따뜻하고 미끌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문득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게 된 놈의 표정이 숨김없이 눈에 들어왔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묘한 일이었다.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수그러들었던 성기가 약간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꾸욱, 약하게 찔러 올리는 그의 것에 놈의 것도 약간 반응했다. 놈이 어색한지 고개 룰 자꾸 돌렸다. 몸을 겹친 게 한 번도 아니고, 라고 생각했지만 어찐 지 자신에게도 이번이 처음처럼 느껴지긴 마찬가지였다. 낙원이 웃으면서 놈에게 입 맞추려 했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때였다.

고개를 숙였던 낙원이, 잠시 머리를 지나간 이성적인 물음에 감전된 양 흠칫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올 하려고 하는 거지.

시시덕대는 연애처럼 섹스를 하고 키스를 하려고 했나. 낙원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차가운 물을 머리끝부터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애초 놈과 섹스를 했다는 것이. 아니 놈에게 욕망을 품었다는 것 자체가 이 상했다.

놈의 신뢰를 얻자는 거였지 놈과 호모짓을 하자는 게 아니었다.

낙원은 갑자기 자기 자신이 어이가 없어졌다. 피식. 김낙원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너는 뭐하는 거냐고, 호모냐고 놈에게 말하려 했을때였다. 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피하는 놈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낙원은 무어라 입을 열려다 그만두었다. 자신도 숨이 거칠어져 있다는 검 깨달았던 것이다.

「…」

낙원은 놈의 몸 위에서 비켰다. 옆에 잠시 누웠던 낙원이, 바로 옆에 서 놈의 숨소리를 듣곤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머리를 흔들곤 샤워실로 향했다.

흥분했던 흔적을 씻고 돌아왔을 땐 머리를 깨끗하게 비운 뒤였다. 그가 눕자 놈이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실 문이 닫힌 뒤에 낙원은 옷을 챙겨 입었다. 샤워할 때 나간다는 게 원조교제하는 여고생이 아저씨 돈만 들고 월 때의 상투적인 수 법 같아 좀 우습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놈에게 입을 맞추려 하다니, 지금 자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혜정이. 혜정이룰 일단 만나자.

여자를 너무 오래 못 만나서 그래. 미인의 머릿내음을 맡으며 천천히 호텔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일단 자신을 추스른 뒤에야 놈을 만날 일이었다. 약점을 파고들다 자기가 약해지는 꼴이 되어서는 죽도 밥도 안 되었다.

옷을 다 챙겨 입은 낙원이 나가려다, 잠시 멈칫하고는 인터폰 옆에 메모를 찢어 ‘급한 일’ 이라는 글씨를 남겨놓았다.

모텔을 벗어날 때까지. 낙원은 내내 쫓기듯 빠르게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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