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미친 소의 뿔
너울너울, 설게 익은 잠의 경계를 온갖 기억들이 넘실거리며 흘러넘쳤다. 노오란 집어등(集魚燈)도 하나 켜지지 않은 막막한 검은 어둠 속으로 목화는 아이처럼 머리끝부터 잠겨들었다. 배꼽 주변이 아려왔다.
'형님, 저는,' '누나, 나는.'
……수많은 말들이 물에 막혀 기도에 잠기고 폐에 잠겼다. 헐떡이던 숨 사이로 어느 순간 거침없는 목소리가 파고들어왔다.
보여줘.
「…….」
목화가 눈을 번쩍 떴다.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목화는 일어나 앉은 채로 배를 멈칫멈칫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오래된 상처가 화끈거렸다. 속삭였던 놈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목화는 고개를 저었다.
세수를 마치고 옷을 입을 때까지 흉터는 따끔거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목화는 빳빳하게 다린 하얀 셔츠를 입고 단추를 체웠다.
덜컹거리는 전철이 지상으로 올라가자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에는 지하와 마찬가지로 어두웠던 것을 상기하고, 목화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역입니다. 당 역은 승강장 사이가……」
내려가 계단을 올라가다, 정기권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목화가 창구로 가자 얼굴이 익은 여직원이 반갑게 인사랬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구멍 뚫린 유리창 안에서 보일지 안 보일지는 몰라도 목화는 꾸벅 목례했다. '안녕하세요.' 인사와 함께 만원짜리 네 장을 넣자 직원이 표와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표는 두 장이었다.
「……?」
정기권 위에 얹어진 하얀 무료승차권에 목화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여직원이 아무 말 없이 싱긋 웃어보였다. 목화가 머쓱하게 받아들고 꾸벅, 다시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가게 문을 열자 신문이 넣어져 있었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무가지(無價紙)인가 싶어 집어 들어 본 목화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성총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은혜신문이었다.
햇빛이 역사 계단을 내리쬐고 있었다. 모판을 차례대로 내놓은 목화가, 가게 안에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평범한 의자였다. 문득 이 의자에 감독관처럼 앉아있던 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앉을수 있나 신기했다.
한낮이 될 때까지 꽃집엔 누구도 드나들지 않았다. 종교 신문이 온 여파일까, 알바생의 이야기가 생각난 목화가 잠시 웃었다. 목화는 눈을 감고 잠시 잠을 청했다.
오후 5시, 최초의 손님의 왔다. 벨소리였다.
* * *
「누구야?」
오랜만에 접하는 낭보(朗報)에 김반장이 실실 웃어가며 물었다.
「누가 그런 반가운 일을 해줬디야?」
홍경장이 상기된 얼굴로 김반장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김선이랍니다. 정보통에 의하면 김선이 자기 오른팔한테 시켰답니다.」
어째서 그토록 홍경장이 흥분을 했는지, 몰려든 형사들 모두 그 순간에 이해했다. 거칠게 담배를 비벼 끈 김낙원조차 벌떡 일어났다.
「김선이 박광우와 한 판 붙는 단 얘기야……?!」
좀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는 이경사가 소리를 내질렀다. 기쁨에 찬 소리였다.
김원일이 찔렸다는 이야기만으로는 판도가 바뀌지 않아도, 김선이 지시했다면 문제가 달랐다. 김원일은 박광우와 직접 선이 닿아있는 놈이었다. 김선이 그놈을 쳤다면 전면전이다.
그리고 그런 한 판을 바라지 않는 형사는 아무도 없었다.
「둘만 싸우면 '동양PK'따윈 금방 와해될 걸.」
「한 번만 칼 들면 폭력으로 몇 놈 잡고, 잡은 놈들은 서로 형량 올리려고 다퉈서 불고.」
'꿩 먹고 알 먹고', 전에 내부 싸움이 일어난 폭력 조직 하나를 그렇게 쪼개먹었던 기억이 있는 형사가 군침을 삼켰다.
그러나 홍경장은 손을 내저었다.
「아뇨, 밑에 애들은 김선이 시킨 줄 모른답니다. 다른 조직하고 붙은 줄 안다는 거예요.」
형사들 얼굴이 머쓱해졌다.
김반장이 얼굴을 찌푸리곤 되물었다.
「그렇게 숨긴 걸 어떻게 알았대?」
홍경장 역시 그런 의심도 안 할 신출내기 형사는 아니었다.
「정보통 말로는, 사무실에 시멘트 공사가 잘못 되어갖고 홈통을 통해서 지하에 말이 울릴 때가 있답니다. 그날 물탱크 청소를 하러 지하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오른팔하고 김선이 속닥대는 걸 들었다는 겁니다. '오래 기다렸지' '오월 칠일', 뭐 이런 말이 몇 번 들리더니 김원일을 솎아내자고 그러더래요.」
허어, 김반장이 소리를 냈다. 홍경장이 말을 이었다.
「글쎄, 하여간 그러니까 자기만 안다는 거지요. 나중에 다른 놈들이 모른다는 걸 알고 나니까, 못 들을 걸 들었구나 싶어서 무서워서 달려온 겁니다.」
「……그럼 뭐야, 전면전은 아니고 물 밑서 하나씩 쳐나가겠다는 건가?」
일단 의심을 거둔 김반장이 물었다. 홍경장은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의견을 내놓은 건 이경사였다.
「글쎄, 김원일이 살았으니 비밀이 언제까지 지켜지지는 않을 테고, 그래도 전면전으로 고취시키느니, 알려지기 전까진 한두 놈 더 쳐가면서 승기를 잡겠다는 속셈일 순 있겠지. 지금까지 보면 박광우가 워낙 전면에 나서질 않잖아. 그러니 내세울 놈을 먼저 쳐나가자,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것 같기도 한데?」
형사들이 고개를 주억거겼다. 일리가 있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는 놈의 한계였다. 주먹계에서는 그저 앞에 나선 놈이 최고다. 여태껏 박광우를 톱으로 유지해줬던 건 박목화고, 또 김원일인 것이다. 구심점이 될 만한 '얼굴'들을 쳐내고 나면 '동양'에서 김선이 우세를 차지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럼 박목화도……」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누군가 말을 꺼냈다.
김반장이 휙 돌아보았다. 홍경장이었다.
「김선이 박광우한테 쭉 승세를 잡으려고 애써왔으면, 혹시 3년 전에 박목화를 찌른 것도 김선이 아닐까요?」
「에이-, 그렇다면 안 불 리가 있나. 김선한테 충성할 이유가 뭐가있다고.」
「그럴수도 있겠는데, 보라구, 김원일도……」
의견이 분분해졌을 때였다.
탕, 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간다.」짧게 울리고 사라진 목소리에 형사들이 문을 쳐다보았다. 김낙원이었다.
뭔지 모를 기세에 형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건 시계를 쳐다본 김반장이었다.
「칼퇴근이구만.」
그제야 형사들이, 입을 다투어 한 마디씩 말하기 시작했다.
「머리 좋은 것들은 다-……」
* * *
막 나오던 차의 뒤로 돌진하다시피 후진해서 차를 세웠다. 끼익, 그 자리로 들어가려 했던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고는 욕설을 쏟아냈다.
「야 이 새끼야……!」
그러나 김낙원의 귀에는 그 욕설조차 들리지 않았다.
놈은 모르고 있었다.
'의심하기도, 싫다.'
여관에서 했던 놈의 말만이 귓가에 들려왔다. 칼을 쥔 배신자가 누구든 간에, 누가 그 칼의 진짜 주인인지 놈은 몰랐다. 몰랐으니까 입을 다물고, 몰랐으니까 의리를 지킨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돌아가지 않은 거겠지.
-아는 게 두려웠을 테니까.
꽃집까지 올라가는 김낙원의 걸음은 빨랐다. 일주일 동안 가지 않은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발걸음에는 망설임 따윈 끼어들 틈이 없었다.
3년 전 칼의 주인이 김선이었다면, 김원일을 쳐낸 건 박목화와 만났기 때문이다. '오월 칠 일'. 그 날짜가 나온 이유를 안 건 김낙원 뿐이었다.
김원일과 손잡았다고 생각하던 김선은 다시 놈을 노릴 것이다.
놈이 위험했다.
꽃집까지 올라간 김낙원이 눈에 익은 유리문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그래서, 자신은 놈에게 위험을 경고라도 하러 왔단 말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거칠어진 숨을 고른 김낙원이 머리를 저었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놈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낙원이 유리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득 가게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알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그가 본 것은 탁 수화기를 내려놓는 박목화의 모습이었다.
「박…」
입을 떼어 놈을 부르려 했을 때였다. 정리하고 있었던 듯 꽃으로 엉망이 된 테이블 앞에서 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부름에 응해서 고개를 든 것은 아니었다.
놈은 싸움에 나선 장수(將帥) 같았다.
무기질적인 놈의 얼굴은 그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물에 끌려나오기 전의 물고기, 미친 소의 '뿔'이라 불렀던 시절의 바로 그 얼굴이었다. 들었구나. 김낙원은 그 순간 방금 전의 전화의 정체를 깨달았다. 김원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찔린 놈은 누가 칼의 주인인지 알았을 터였다. 테이블 앞에서 놈이, 움직였다.
설마 저놈, 김선에게 갈 생각인가. 그 가능성이 스쳐지나간 순간 낙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놈이었다. 동생인 김원일이 자기와 만나서 다쳤는데, 곧바로 찌르러 간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놈이었다. 닉원이 자기도 모르게 놈에게 손을 뻗었다.
「박목…」
두 번째로 낙원이 놈을 부르려 했을 때였다.
스윽, 놈은 김낙원의 옆을 지나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놈은 끝까지 자신을 보지 않았다. 어깨를 스치고 나가는 놈을, 김낙원은 미처 잡지 못했다.
물고기가 '뿔'이 되어 그물을 빠져나갔다.
* * *
4층짜리 노회한 건물들의 그림자가 길 건너의 건물로 각진 손을 뻗쳤다. 길바닥부터 덮어씌운 그림자의 현수막이 오래된 하얀 벽돌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덕지덕지 붙은 전단지처럼 벽을 타고 오르는 그림자들 속에서, 빨갛고 노란 원색의 네온사인이 번쩍 눈을 떴다.
「어서 오십쇼-!」
50m남짓한 골목에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북창동 술집들 앞에서 삐끼들이 힘차게 외쳤다.
'중학생'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서른 살의 삐기 문석경도 그 중 하나였다. 10대에는 '대학생', 20대에는 '고등학생'의 닉네임을 가졌던 그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어려 보이려는 삐끼들의 기원을 담아 막 이름을 갈아 끼운 참이었다. 그러나 경기는 영 나아질 생각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동양 놈들한테 상냥한 월사금을 맞추는 데만도 다달이 빠듯했다. 놈들이 또 올린 탓이다. 힐끔, 저 멀리 번쩍번쩍한 3D 경마장 위의 2층을 훔쳐 본 문석경이 침을 퉤 뱉었다. 오늘도 벤츠인지 아우디인지 폼나는 외젲 승용차를 타고 툴근한 김갑선이 생각나서였다.
그때 검은 구두가 그의 앞을 지나쳤다.
「하이구 손님, 여기저기 다녀봤자 뭐합니까요, 그저 저한테 오시면-…」
'정성을 다해드립니다.' 입에 붙은 선전용 문구와 비굴한 웃음을 담아 말하려던 문석경이, 고개를 들었다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 목……!」
제대로 소리조차 내지 못한 문석경의 앞을 이미 '전설'은 뚜벅뚜벅 지나가고 있었다. 그 그림자가 사라진 뒤에야 삐끼 문석경이 가게는 팽개치고 거리로 뛰쳐나가 소리를 질렀다.
「목화 형님……!」
'목화 형님이 돌아왔다.'
길어봤자 100m도 안 되는 거리 곳곳에 숨어있는 골목들로 외침은 발 없는 천리마가 되어 퍼져나갔다. 애저녁부터 여관서 뒹굴던 작은 형님들부터 경마 게임에 죽치고 있던 새파란 깍두기들까지 그 소리를 듣고 하나둘씩 기어 나왔다. 목화 소리에 반긴 건 어깨들만이 아니었다. 그간 미친년 날뛰듯 천정부지로 치솟은 월사금에 치일대로 치인 가게주인들도 뛰어가는 삐끼들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돌아왔느냐고, 정말로 그가 맞느냐고.
「목화 형님!」
반신반의하면서도 뛰쳐나왔던 놈들 중에 하나가 목화를 보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어디, 하고 몇 명의 깍두기들이 고개를 길게 빼었다. '정말이냐.' 눈앞에서 보면서도 묻는 놈에 말로만 듣던 실물을 보고자 달려가는 젊은 놈들도 있었다.
「돌아오셨습니까.」
누가 먼저 이렇게 인사했는지는 모른다. 용케 3년 전부터 물갈이가 안 된 누군가였을 것이다. 90도 각도로 굽혀 목청껏 내지른 그 인사에, 하나둘씩 똑같은 각도로 허리를 숙이고 질세라 더 소리 높여 인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돌아오셨습니까……!」
6개월만 감방에 가 있어도 나와바리가 갈리는 세상이었다. 서른 명도 넘는 깍두기들이 누군가 돌아왔다는 소리에 적의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인사하는 모습은 최근 들어서는 더더욱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개중에는 목화를 처음 보는 젊은 놈들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목 놓아 부르는 무리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에는 그런 구분은 이미 무의미해진 뒤였다. 이중 목화를 개인적으로 알고 따른다고 할 수 있는 자는 어차피 몇 되지 않았다. 요는 이름이었다. 이 구역에서 박목화라는 이름 세 글자를 모르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구치소에만 들어갔다 나와도 자기 자리 챙기기 힘든 놈들이 '의리'와 '형님'에 거는 기대는 현실과 반비례해서 점점 더 커져갔다. 그 허황된 솜구름을 먹지는 못해도 볼 수는 있게 해주는 존재가 바로 박목화였다.
그 이름만으로도 목화 형님은 특별했다. 떠난 우상에 대한 추앙은 해도 해도 질리지 않았다. 게다가 행동대장 김원일이 어제 길가에서 썰렸다는 소리에 잔뜩 흉흉해진 때였다. 말로만 듣던 예전의 '형님'이 눈앞에 나타나자 무엇에 품는지도 모를 기대심리가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을 넘어 사십 명도 넘게 강렬한 열광을 띠고 전염되었던 것이다. 이 남자라면 무언가 할 것이다. 이 남자라면…이라는.
그 기대감은 남자의 걸음에서 나왔다.
수없이 불러대는 놈들사이에서도 발걸음 하나 눈짓 하나 흐트러트리는 법이 없었다. 칼처럼 뿔처럼 벼려진 남자는 이 길에 들어섰을 때부터 분명한 '목적'을 갖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디로 향하는 건지는 곧 모두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김선의 사무실이었다.
인사를 하던 놈들이 목화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목화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온 형님의 등만으로도, 깍두기들에게는 뒤를 따를 이유가 충분했다.
사무실 앞에 있던 반짝이 양복 하나가 그 무리를 보고는 얼굴색이 변해서 뛰쳐 올라갔다.
「……!」
이미 그때엔 1층 3D게임장에 있던 사무실의 아랫놈들까지도 그 무리에 합류하러 나왔다, 형님의 뒤를 따라 계단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큰일입니다. 큰……!」
소리가 채 닫히지 못한 문 사이로 삐져나와 계단을 메아리쳤을 때에는, 그저 '형님', 이 한마디에 죽으라면 죽을 단순한 놈들이 목화를 따라 다 같이 올라오고 있었다.
말 없는 사신(死神)이 동생의 몫을 받으러 왔다.
「박목화.」
제지받긴커녕 줄줄이 자기 아랫놈들까지 끌고 들어온 놈을 본 김선이, 낮게 중얼거렸다.
「…….」
낙원은 혼자 꽃집 안에 앉아 있었다. 이미 퇴근시간은 지난 지 오래였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놈을 기다리는 거라면 번지수가 틀렸다. 낙원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놈은 이곳을 떠났다.
테이블 위에는 정리하다 만 꽃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 위에는 검정색의 긴 앞치마가 놈이 던져놓고 나간 그대로 있었다. 버려진 그물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난 김낙원이, 테이블을 걷어찼다.
「……!」
우당탕, 테이블이 흔들리다 간신히 제자리에 섰다. 그러나 이미 그때엔 꽅들이 물기어린 바닥에 떨어져 내린 뒤였다.
부상병처럼 망가진 장미꽃을 구둣발로 잘근잘근 뭉개서 죽여 놓으며, 김낙원이 천천히 생각했다.
놈은 김선을 찌르러 갔다.
김선을 찌르고 감방으로 돌아가든, 박광우 밑으로 돌아가든, 어찌되었든 놈은 이미 이곳을 떠난 뒤였다. 차마 의심하기조차 싫어, 물어보느니 차라리 3년 동안 감방에서 썩고 나오는 걸 택한 대단하신 의리였다. 이제 누가 찔렀는지 알게 된 놈이 다시 이곳에 돌아올 이유가 있을 거라곤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기분이 저조하다 못해 바닥을 쳤다.
놈이 돌아가길 바라지 않았던가. 여하간 놈이 돌아간 마당에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생각하던 김낙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자신이 원하던 드라마가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놈이 돌아가 그토록 의리를 지키던 박광우를 찔러 죽이는 배신과 복수의 홍콩 느와르를 보길 바랐지, '조폭이여 의리 만세' 따위의 하품 나오는 가부장적 한국 드라마를 보길 바랐던 게 아니었단 말이다.
놈이 실은 배신당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놈이 의리를 지킨 게 옳았다는 걸 알아서 또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야말로 진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좋으냐?」
김낙원은 여기에는 없는 놈에게 물었다. 그리고 잠시 텅 빈 허공에 귀 귀울였다.
「…….」
당연히 답은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너무 빤해서 들을 필요도 없는 답이었다. 낙원이 잠시 잔뜩 꼬인 눈으로 항상 놈이 서 있던 테이블 앞을 힐끗 보고는 담배를 물었다.
형님이 너를 배신한 게 아니란 걸 알아서, 기쁘냐.
-나는 짜증이 난다.
푸르스름한 불꽃이 담배 끝에서 타들어갔다.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고 보니 꽃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얼마만인가. 쓰잘데기 없이 배려가 많았던 스스로에게 낙원이 혀를 찼다. 뺨은 한 번 치고 얼르기만 했구나. 확실히 자신이 형사들에 비해 지나치게 자상하고 착했던 듯 싶었다.
밥만 사다 날랐다. 떡밥을 주다 못해 하루는 종일 일까지 해줬지. 고맙다는 인사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달아난 놈을 생각하자 열이 올랐다. 여기에 잇는 자신을 생각하자 더더욱 열이 뻗쳤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있지 않나. 놈은 정말 고개 한번 돌리지도 않고 이곳을 떠났더랬다. 본래부터 어울리지 않던 꽃집 따윈 팽개쳐두고 원래 살던 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런 놈이 돌아올 리 없었다. 혹시나 하는 가능성 때문이라면 형사를 배치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직접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냐.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이 김낙원이 주인 떠난 빈집을 지키는 개가 되었지?
그때였다.
탕탕. 누군가 안에서 잠긴 유리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꽃 필요한데요…….」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김낙원이 흘깃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저런 손님이 한두 번 온 게 아니었다. 내일은 스승의 날이었다. 이런 날 팽개쳐두고 간 건 명백한 놈의 잘못이었다.
「저기요…….」
낙원이 피식, 비틀린 웃음을 짓고는 일어났다. 유리문 앞으로 다가서자 학생인 듯한 어린 여자애가 볼에 홍조를 띠었다. 이놈의 꽃집엔 여자만 오는 거냐. 열어주는 줄 알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여학셍 앞으로, 입매를 비튼 김낙원이 유리문 안쪽에서 후- 깊게 담배연기를 뿜어넀다.
그리고 아주 친절한 한 마디를 던졌다.
「영업 안 해.」
「……!」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벌린 여학생은 뒤로 하고, 낙원은 도로 의자에 돌아와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손님은 그 뒤에도 줄기차게 왔다. 매번 무시를 하는데도. 지친 김낙원이 결국 욕설을 입안에 문 채로 나가, 꽃집 앞에 있던 모관들을 아무렇게나 겹쳐 안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간판 불부터 가게 안의 불까지 모조리 꺼버렸다.
어두운 빈 꽃집에서, 김낙원이 이어 문 담배의 파르스름한 불꽃만이 피어올랐다.
* * *
「박목화.」
소파에 앉아있던 김갑선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미 끝장을 보리라 생각하고 온 박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열만 따지면 '큰형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놈이 동생을 찌른 순간에 이미 서열 따윈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눈앞의 놈은 단지 적일 뿐이다.
박목화가 내려다보았다.
김갑선이 자기도 모르게 잠시 눈을 피했다.
그 눈이 박목화 뒤로 따라 들어온 사십 명이 넘는 깍두기들의 병풍에 가 닿았다. 김갑선이 무의식 중에 탁자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초조한 기색을 드러넀다. 김선의 뒤에는 수족처럼 부리는 넷밖에 서 있지 않았다. 박목화의 말 한마디에 전면전이 시작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방 안을 죽 둘러보던 김갑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이를 드러내고 친밀한 척 웃었다. 또아리를 튼 구렁이의 독니 같았다.
「그간 잘 있었니?」
「…….」
목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걸음 다가섰을 뿐이다. 뒤에 있던 놈들은 뭔지도 모르는 채 숨을 죽이고 형님의 등만 바라보았다. 날이 선 칼을 맞두 대하는 듯한 위압감에 김선이 움찔했다. 날에도 이름이 있다면 그건 살의(殺意)였다. 찌를 땐 찌르는 것 밖에, 일할 땐 일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게 박목화였다. 박목화의 모든 신경은 현재 눈 앞의 김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부담스러운 감각에도 불구하고 김선은 곧 허허 웃으며 말을 붙여왔다.
「이제라도 돌아온 것 같아서 다행이구먼.」
두 걸음째, 박목화가 다가섰다. 이제 탁자까지는 세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다시 한 걸음 다가서기 전, 김갑선이 웃으면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정면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이 친구도 그동안 자네 때문에 꽤나 속을 썩었거든…….」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바로 옆, 김선의 건너편의 소리에 앉아있던 놈이 그를 불렀을 때에는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님.」
「……!」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3년 내내 악몽으로, 의문으로 얼마나 많이 반추했던가. 수없이 들어왔던 그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
형님. 저는-.
돌아본 박목화의 시선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김선의 칼날, 3년 전의 배신자이자 과거 막내 동생이었던 조희용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후두둑. 아물다 못해 흉터밖에 남지 않은 3년 전의 상처가 갑자기 화끈거렸다. 찐득한 액체가 떨어지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힌 박목화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왜. 네가 왜.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피처럼 뽑아 올렸던 물음이었다. 병원에서 또 감방에서 수없이 되물었던 그 물음이 다시 한 번 저 깊은 안쪽으로부터 치솟았다. 답해줄 상대도 없는 그 물음을 얼마나 많이 되풀이했던가.
'형님. 저는…….'
그 뒤는 무엇이었을지, 그때 듣지 못했던 놈의 대답을 혼자 수없이 상상했었다. 자신만은 변명이 되었건 욕설이 되었건 놈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 주리라 생각하며. 왜. 왜. 그 의문만을 가슴속에 묻어준 채.
그렇게 3년을 기다렸다.
목화가 숨을 삼키고, 나직하게 물었다.
「……왜 그랬냐.」
3년간 기다려오던 그때를 맞은 목화의 뼈에 사무친 물음이었다. 그러나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항상 동정을 담아 자신을 보던 눈을, 말없이 옆으로 돌렸을 뿐이다.
목화는 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원일이 말이 맞았다. 막내는 변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두운 골목길에서의 얼굴, 수없이 떠올랐던 여섯째의 얼굴과는 많이 달랐다. 덩치답지 않게 순한 인상 탓에 그토록 놀림감이 되었던 막내였건만, 지금의 얼굴은 누구도 그때를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거칠고 막막했다. 나와바리를 받았다더니 그 탓인가.
그 대가가 탐났던 거냐.
고작, 그랬던 거냐.
……5년 전 처음 봤던 막내가 생각났다. 덩치 탓에 일전에 들어와, 고교 중퇴 후엔 연락원으로 일해가며 정식 조직원이 되는 것만이 꿈이었던, 참으로 순하고 착했던 녀석. 들어오게 해준 뒤엔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저 '형님. 형님', 자신밖에 몰라 김원일이 몇 번 골려주기도 했던 녀석이었는데. 헤헤 웃던 원일이 곁에서 같이 고개숙여 웃던 네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네가, 말했냐.」
원일과 동생들이 꽃집에 왔다는 걸 아는 건 한때 막내였던 이 녀석 뿐이었다. 놈을 내려다보며 목화가 낮게 물었다. 의문이 아니었다. 슬픔, 확신이었다.
「…….」
놈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거친 눈으로 목화를 노려보았을 뿐이다. 적의(敵意)를 드러낸 흉흉한 눈빛이었다. 눈까지 마주 대한 녀석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거칠고 사나웠다. 목화는 잠시 놀랐다.
무엇이 놈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형님. 저는.'
아직도 그 이후의 말을 그는 듣지 못했다. 목화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유를 들어야 했다. 자신을 배신한 이유를. 누구든 그 이유만큼은 끝까지 들어주겠노라고, 자신은 옛날 그렇게 맹세했다…….
「김갑선.」
목화가 고개를 돌려 불렀다.
어떤 존칭도 제하고 부른 그 호칭에, 사무실 안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목화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내부에서 김선은 그럴 가치가 없는 자였다.
「몇 년 떠나있었더니 예의를…….」
깍두기들 앞에서 체면을 지키고자, 초조한 얼굴에 억지웃음을 띠고 나무라려 드는 김갑선의 앞으로 목화가 치달렸다.
「……!」
여기까지 한 걸음씩 똑같은 걸음걸이로 움직이던 박목화였다. 그랬던 그가 김선까지 남은 다섯 걸음을 한 순간 당겼을 때에는,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김선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눈알만 아래로 내려떴다. 목젖 아래 은빛의 칼날이 종이 한 장 들이밀면 걸릴 것 같은 거리에서 멈춰 있었다.
「나는 이미 떠났다.」
박목화가 나직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사무실 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사십 명이 넘는 어깨들의 눈이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 태 그의 등에 꽂혀 있었다.
「나를 돌아오게 하지 마라.」
'그러니까 내 동생을 건드려서.'라고 앞에 붙인 작은 소리가 똑똑히 들린 건 그 탓이었다.
「……!」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정적을 가른 건 박목화가 탁자에 꽂은 작은 칼이었다.
탁! 김갑선의 목젖에 꽂힐 뻔 했던 칼이 두꺼운 나무 탁자에 꽂혀 손잡이를 부르르 떨었다. 겨우 꽃을 다듬을 때 쓰는 작은 과도였다.
김갑선의 목젖을 긋는 데는 그거면 충분했다. 의미를 알아들은 김삽선이, 잠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부르르 떨리던 칼이 그 자리에 멈췄을 때에는, 박목화가 올 때와 똑같이 성큼성큼 걸어 나간 뒤였다.
* * *
여덟 시, 가게로 돌아오자 불이 꺼져 있었다.
잠그고 갔던가. 박목화는 문을 안쪽으로 밀어보았다. 달랑, 작은 소리가 났다. 누군가 대신 불을 꺼준 모양이었다. 누군가 생각했을 때였다. 문득 김낙원의 얼굴을 떠올라, 그는 잠시 실소했다. 그럴 리가 없다. 어두운 가게 안으로 목화가 한 걸음 들어섰다. 가게 안은 환기구가 멈춘 커다란 수조 같았다. 습하고, 물에 스민 연기 내음이 났다.
딸랑, 등 뒤에서 유리문이 닫혔다.
아직 채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용화가 손을 뻗어 문 옆을 더듬었다. 딱딱한 스위치가 손 끝에 걸렸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찰칵, 작은 소리가 들렸다. 목화가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
라이터에서 파란 불길이 치솟았다.
담배를 문 낙원이 첫 모금을 빨아들였다. 빨간 불꽃이 담배 끝을 타들어가자 부정형(不定形)의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은 어둠 속으로 너울거리며 사라져갔다.
담뱃불에 비친 얼굴을 본 모양이다. 눈이 이쪽을 살펴보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김낙원?」
놈의 입에서 자시느이 이름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낙원이 아직 긴 담배를 옆으로 버리고 짓밟았다. 치익, 담배가 작게 단말마를 질렀다.
놈이 문가에 있던 스위치를 켜자 냉장고에 불이 들어왔다. 위잉-. 냉장고가 보라색 조명을 소음으로 토해냈다. 바닥에 떨어진 물에 잠긴 담배 필터가 어둠에서 벗어나 보라색을 띠었다. 수조같은 빛깔이었다.
그인 것을 확인하자 안심했는지 놈이 주어 걸음, 이쪽으로 다가왔다.
놈이 자신을 보고 안도했다는 사실에 낙원은 비틀리게 웃었다.
내 무엇을 믿지. 겨우 하루, 무상(無償)의 도움? 아니면 몇 번 같이 먹었던 밥……? 확실히 어르기가 지나치게 길었나.
낙원은 놈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눈에 익을 대로 익은 놈이었다. 물살 하나 없이 갑옷처럼 단단한 사내다운 몸집에, 그보다 더 단단한, 찔러도 비명소리 하나 나오는 법 없이 눈만 처닫고 마는 얼굴.
언젠가 생각했었지.
그 눈깔, '괜찮다'는 말 따위는 하지 못할 정도로 내리깔게 해주겠다고.
「……왜.」
그때였다. 몇 걸음 밖에 멈춰선 놈이 그에게 물어왔다.
왜 여기에 있느냐고.
어둠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처박혀 있었던 김낙원이. 불쾌함을 담아 피식 웃었다. 내내 자신이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어온 말이었다. 답을 모르는 물음을 놈에게서까지 듣자 짜증이 났다.
「좋든?」
그래서 그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놈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낙원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일어났다.
「좋으냐고.」
텅 빈 허공에 대고 물었던 말이었다. 그땐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김낙원이 놈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김원일이 김선한테 찔려서, 좋냐고.」
그래서 형님이 너를 배신한 게 아니란 걸 알아서 기쁘냐, 는 물음이었다. 놈은 바로 자신의 앞에 있었다. 놈은 꽃집에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다녀왔는지 몰라도, 놈은 어쨌든 박광우에게 돌아간 게 아니라 이곳으로 왔다.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들을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빙 돌아 온 질문이었지만 핵심은 같았다. '왜' 였다.
너는 왜 여기에 있느냐.
답은 없었다.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낙원은 문득 웃었다.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내가 돌아갈 이유를 만들어주지.
성큼, 바짝 다가온 낙원을 보고 놈이 눈을 크게 떴다.
「……!」
낙원이 놈을 쓰러뜨린 건 한순간이었다. '달려들었다.'는 편이 옳은지도 모른다. 확 떠민 행위에 의표를 찔린 박목화가 잠깐 뒤로 넘어갔다. 놓쳤다고 생각했던 물고기였다. 수조에 돌아온 놈을 다시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보라색 조명이 잠시 놈의 얼굴을 스쳤다.
놈은 그대로 순순히 넘어져 있지 않았다. 바로 일어나려는 놈을, 위에 올라탄 낙원이 이마를 손으로 처박았다. 쿵, 다시 쿵. 두어 번 뒤통수가 흔들린 놈이 낙원의 밑에 깔린 채 몸을 뒤집으려 들었다. 좁고 어두운 바닥에서 두 남자가 엉켜 뒹굴었다. 철컹, 누군가의 발이 냉장고 유리를 걷어찼다. 몇 번 밀고 밀리는 사이 찬 공기와 함께 꽃내음이 확 밀려들어왔다. 냉장고 문이 열린 모양이었다. 위잉 위잉, 냉장고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수조처럼 냉장고 속의 꽃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조 벽에 부딪친 물고기가 몸을 돌리듯이 놈의 그림자가 한순간 반전되었다. 손을 바닥에 짚고 몸을 일으키려 든다. 그러자 포식자가 조금 더 빨랐다. 선명해진 보라색 조명 아래, 낙원이 옆에 있던 사기화분을 집어 그 손을 서슴없이 내리쳤다.
파작, 화분이 깨져나갔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단지 놈의 숨이 거칠어졌을 뿐이다. 물고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을 더 내리쳤다. 위잉, 꽃 냉장고가 토해낸 보라색 조명에 바닥에 번져나가는 검붉은 액체가 비친 것은 조금 뒤였다. 깨진 화분조각으로 놈의 오른손을 짓누르던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멈칫했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러자 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놈이 왼손으로 위에 있던 낙원을 후려쳤다.
「……!」
겨우 왼손, 그것도 아래에서 들어간 한 방이었다. 그러나 전직 족폭 행동대장의 주먹은 좀 노는 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낙원의 몸이 말 그대로 허공에 떴다,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위액이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제대로 스위치가 들어간 놈은 일단 싸우면 끝장을 봐야만 한다는 원칙대로 낙원을 올라타 주먹을 치켜들었다. 피에 젖은 한쪽 셔츠소매가 냉장고 유리에 더 붉게 비쳤다.
낙원이 아래에서 그 소매를 움켜쥐었다.
「…….」
비명소리 따윈 나지 않았다. 그러나 놈이 멈칫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고통은 짐작이 갔다. 거칠어진 숨소리 사이로 낙원이 속삭였다.
「쳐.」
손가락에 찐득한 액체가 묻어났다.
「경찰 폭행으로 몇 년 감방에서 더 썩으면 어때. 놈들은 널 반길 텐데.」
속삭임이 그의 웃음처럼 가볍고 짙었다. 네 동생들에게 돌아가. 박광우에게 돌아가 봐. 부추기면서도 김낙원은 그리 된다면 모조리 감방에 처넣어주겠다고 생각했다. 교도소에서 감격스런 해우(邂逅)라도 하지 그래.
다행스럽게도 놈은 주먹을 휘두르지도, 그렇다고 내리지도 못했다. 낙원이 소매를 쥔 손에 힘을 주고는 다른 손으로 놈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놈이 움찔했다.
놈의 이마에 맺힌 땀이 보라색 조명에 붉게 빛났다.
그동안 어르기만 했다고 반성했건만, 최초의 뺨 한 대의 기억만은 그대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낙원이 누운 채로 싱긋 웃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위에 있던 놈은 그를 저지하지 못했다. 놈은 다시 주소에 들어온 물고기가 되었다. 바닥에 앉은 낙원이 그걸 확인이라도 하는 양 놈의 손을 확 끌어당겼다. 놈이 끌려오면서도 이를 악 물었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 놈을 보자 그 입을 벌리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흉폭한 욕구가 혈관을 펌프질하듯 뛰놀았다. 쿵쿵. 격렬한 라틴 댄스라도 추듯 한 손으로는 놈의 다친 손을 꽉 잡은 낙원이, 다른 손으로는 놈의 몸을 쓸어내렸다.
「……!」
놈이 튕기듯이 뛰어올랐다. 낙원이 마치 진정시키려는 듯이 놈의 귓가로 고개를 숙이곤, 놈의 귀를 핥았다. 아주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으려 들던 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부림쳤다. 치고 박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눈치 챈 것이다. 두 번째인데도 알아차리는 게 늦기도 하지. 그간 얼마나 마음을 놓고 있었나를 반증으로 알게 된 낙원이 피식 웃었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하는 놈을 낙원이 잡아 눌렀다. 한 손밖에 짚지 못하는 놈은 아까처럼 바로 뒤집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음 놓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격렬하게 반항하는 놈을, 낙원이 두 번째로 사냥했다.
방목(放牧)이 좀 길었다.
비늘을 잡아 뜯듯이 뒤에서 귀를 물어뜯었다. 비릿한 맛이 났다. 냉장고의 불빛과 비슷한, 붉은 맛, 아문 지 얼마 되지 않은 여린 살을 살짝 씹자 이번에야말로 놈이 소리를 냈다. 흐윽,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담뱃불이 꺼지는 소리보다 더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단말마를 냈다고 놈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죽기는커녕 귀를 찢어도 좋다는 기세로 날뛰려는 녀석을, 낙원이 거칠게 바닥으로 처박았다. 그리고 피로 젖은 팔을 무릎으로 짓뭉갰다. 부르르, 놈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잠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새 낙원이 놈의 벨트를 끌러 내렸다.
놈이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미 놈은 균형을 잃고 있었다. 단단한 허벅지를 뒤에서 몸으로 눌렀다. 한 손으로밖에 힘을 주지 못한 놈의 무릎이 꺾이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낙원이 자신의 옷을 내렸다. 맨살이 닿자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는 놈의 허리를, 낙원이 잡았다. 삽입은 처음처럼 갑작스러웠다. 매끄럽니 않은 진입에 놈이 더더욱 몸부림쳤다. 그러나 낙원은 놈의 허리를 꽉 잡고 진입을 계속했다. 몸을 약간 뒤로 빼었다가 비틀어 넣는 행위를 반복하자 그의 밑에서 놈이 발버둥 쳤다. 저항은 나름 거셌지만 벗어나기엔 미약했다. 힘이 빠진 짐승의 목덜미를 물고 마지막 저항을 즐기며 낙원은 놈의 내부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공들여 넣었다, 느리게 몸을 뺀다. 끈질긴 추삽질에 자신과 엉킨 다리가 경련을 일으켰다. 아까 깨진 화분에서 흙이 흩어진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식물뿌리를 잡고 있었던 젖은 흙냄새에 짓이겨진 꽃냄새가 섞여 코끝을 스쳤다. 꽃집 바닥에서 뒹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 순간 흐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놈이 악 다문 이 사이로 신음을 내뱉었다. 낙원이 흥분했다. 더, 라고 말하듯이 그는 격하게 파고들었다.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두어 번 만에 놈이 신음처럼 거칠어진 숨소리를 냈다,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몇 번 더 흔들자 놈의 몸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위잉-……. 냉장고가 모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동안 신음 같은 숨소리가 수면으로 뛰어올랐다, 사라졌다.
츠읏, 낙원이 귀 뒤를 핥았다. 미약한 저항과 맞바꾼 듯 한 부드러움이었다. 답하려는 건지 부추기려는 건지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놈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낙원이 셔츠 위로 천천히 놈을 쓰다듬었다. 단추를 푼 건 목에서부터였다. 단단한 근육 속에 숨겨진 의외의 부드러움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맨 살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어느 순간 유두를 건드렸다.
「……!」
놈이 날뛰려는 것을 낙원이 몸으로 누르곤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한 감촉이 손에 감겨든다. 급박하게 뛰던 놈의 심장이 어느 순간 느리게 뛰기 시작했다. 아주 잠시 안온함을 느꼈던 낙원이, 막상 그런 놈을 느끼자 세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유두를 비튼 낙원의 손에 놈이 숨을 삼켰다. 흐읍. 물속으로 들어갈 때 호흡을 참는 것 같은, 급박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
안으로 깊숙이 박아 넣자 비좁은 내부가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그는 놈의 모을 짓이기듯 움직였다. 놈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몇 번을 거칠게 넣었다. 빼던 낙원이 놈 깊숙한 곳에서 멈췄을 때에는, 이미 최후가 다가와 있었다. 낙원이 강하게 몸을 경직시켰다.
길지 않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의미는 달라도 이 느낌은 놈에게나 자신에게나 같을 터였다.
잠시 조용했다.
「……」
낙원은 놈을 내려다보았다. 놈은 눈을 꽉 감고 있었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언젠가 골목에서 주웠을 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고통을 견디기 위해 눈 닫고 입 처닫은 놈의 얼굴. 기분이 나빠진 낙원이 부러 천천히 몸을 뺐다. 빼면서도 안으로 쿡쿡 들이 밀자, 흔들릴 때마다 놈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고통을 드러냈다. 몇 번 확인삼아 더 흔들어본 낙원이 완전히 몸을 빼었다.
그래도 놈은 바닥에 누운 채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원하던 대로 깔아뭉갠 셈이다. 그러나 어쩐지, 뒤끝이 좋지 않았다.
낙원이 일어났다.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그러했다. 그럼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일어난 낙원이 잠시 문 앞에 서서, 어두워진 유리문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가다듬었다. 구겨진 주름을 펴고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하게 쓸어 넘겼다. 밀회라도 한 뒤 같군. 여유를 찾은 김낙원이 싱긋 웃었다.
딸랑, 문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놈은 누운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줏빛 조명에 비친 놈을 힐끗 쳐다보았던 낙원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꽃집을 나섰다.
핸드폰을 꺼내들자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응, 김반장.」
무슨 일이지, 묻자 김반장이 격앙된 목소리로 박목화의 행적을 알려왔다. 김선 사무실로의 당당한 행차라, 화려한 재등장이었다. 낙원은 예상했던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들어주었다. 범인 다 아는 추리소설에서 어떻게 잡나 하는 추리과정만 몇 번을 다시 보는 것과 비슷한 심리였다. '그 재수 없는 눈깔을 봤을 때부터 독한 놈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걸……' 그러나 김반장이 똑같은 추임새를 넣자, 갑자기 지겨워졌다.
「추리소설 주인공으로 경찰이 왜 그렇게 인기가 없는지 알겠군.」
「예?」
중얼거렸던 말이 들린 모양이다. 김낙원은 싱긋 웃으면서 부정도 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박목화의 위치를 확보했다.」
'어떻게', 말로는 아니었어도 놀람이 충분히 전해져왔다. 게으른 놈들에게 질타하는 심정으로 낙원이 천천히 말해주었다.
「꽃집에 왔더군, 여기 일단 몇 명 배치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이런 것도 내가 말해줘야 하나?」
「……아닙니다.」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간부가 실사에 멋모르고 끼어들면 다친다고, '몸조심하시죠.' 따위의 말을 붙이지 않을 김반장이 아니건만 이번만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잠시 핸드폰에서 얼굴을 뗀 김반장이 형사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려왔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늦어도 30분 내로 기동대의 형사들이 도착할 것이다.
그 뒤엔 더 이상 여기에 올 일은 없을 테지. 드라마는 이미 깨어졌다. 그가 좋아하는 건 느와르지 한국 조폭 액션물은 아니었다. 그런 건 경찰들이나 하라고 해. 낙원은 새 담배를 꺼내 물며 생각했다.
……게다가 놈에겐, 이미 만족하지 않았나.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쯤 낙원이 김반장을 불렀다.
「김반장.」
「예.」
재빠르게 대답한다. 낙원이 싱긋 웃으며 일렀다.
「알고 있겠지만 현재 박목화는 민간인이네. 구타행위나 영업방해는 곤란해.」
곤, 란, 낙원은 이 두 글자에 힘을 주어 일러두었다. 곤란해 할 테니 그렇게 하란 소리다. 그러나 이미 쫓기는 기분이 된 김반장은 거기에 숨은 뜻을 파악하지 못한 듯 했다.
「예, 알겠습니다.」
보아하니 말 그대로 '정말 안 된다'고, 설정에 어두운 간부가 원칙을 내세워 간섭하는 걸로 생각하는 듯 했다. 낙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서 쓸 때마다 도움을 구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원리원칙이냐.
문득 아까 놈에게 맞은 배가 욱신거렸다. 생각보다 오래 간다. 역시 놈을 편하게 두기 싫어진 낙원이 무어라 덧붙이려 했을 때였다. 등 뒤에서 하얀 불빛이 비쳐 들어왔다.
낙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
꽃집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럼.」
여타의 인사도 없이 낙원은 슬라이드를 내렸다. 툭, 김반장과의 전화를 끊은 낙원이 잠시 불을 켠 꽃집을 쳐다보았다.
지금 설마 영업을 하겠다는 건가.
어이가 없어하던 낙원의 머릿속에, 퍼득 자기다운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놈이 내 앞에서 부러 약한 척을 했나.
그렇게 생각하자 놈의 저항이 미약했던 것도 의심스러워졌다.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확실히 그깟 손 좀 다쳤다고 맷집도 주먹만큼 강한 놈이 갑자기 그리 약해질 리가 없었다. 아직도 겨우 한 대 맞은 배가 욱씬거리는 마당이다.
놈이 자신을 농락했나.
적장하장 격으로 생각한 낙원이 성큼성큼 도로 꽃집으로 다가섰다. 몇 걸음 만에 꽃집 앞에 선 낙원이 유리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낙원의 시선이 가게 안을 돌았다. 바닥은 어지러웠다. 보지는 못했어도 아까 전의 흔적이라는 것은 금세 알았다. 모판이 뒹구는 옆으로, 깨진 화분조각이 흩어진 흙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꽃 냉장고의 문까지 열려 있는 것을 본 낙원이, 놈이 안쪽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리본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파티션처럼 시야를 가로막은 리본대를 확 걷어치웠다.
「박,……」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부르지 못했다. 놈은 버려진 쓰레기처럼 의자에 구겨져 있었다. 왜 저렇게 있는 거지.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놈에게 다가갔다.
항상 셔츠를 단정하게 입고 있던 녀석은 아직 옷매무새도 다듬지 못 한 채였다. 구겨진 옷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많이 다쳤나. 낙원이 생각했을 때였다. 놈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그라는 것을 알자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 부딪친 시선에는 숨기지 못한 분노가 부싯돌처럼 불꽃을 튀겼다.
마음이 불편해진 낙원이 눈을 돌렸다. 그러자 책상의 왼쪽에만 쌓여 있는 거즈와 붕대가 보였다. 생각보다 오른손이 많이 다친 모양이다.
아까 놈이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게 떠올랐다. 쳇, 낙원이 속으로 혀를 찼다. 30분 뒤엔 형사들이 올 터였다.
다시 보지 않을 놈이라도 이런 꼴을 보이게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낙원이 걸어가, 놈의 손을 잡아 끌어냈다.
「내놔봐.」
놈은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그를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그와는 절대로 눈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끌려나온 놈의 손은 엉망이었다. 단단한 도자기에 이가 나가듯 찍히고 흠집난 손등엔 물때처럼 피가 엉켜 있었다. 붉은 피로 범벅이 된 손등을 낙원이 잠시 내려다보다, 책상 위에 있던 거즈를 집어 우선 피를 닦아냈다. 흐르지 않을 정도로 찍어내자 그제야 상처가 제대로 드러났다. 엄지와 검지 사이, 손아귀부터 손등까지 살이 거의 찢어져 있다. 흉터가 남을 듯 했다. 놈의 귀에 낙인을 찍듯 잇자국을 남겼던 자신을 잊은 양, 낙원이 혀를 찼다.
하얀 소매는 피에 젖어 있었다. 낙원이 소매의 단추를 풀고 걷어 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접고 나서야 본래의 하얀 빛깔이 드러났다. 피는 팔뚝까지 흘러 있었다. 낙원이 닦아내려 했지만 이미 굳은 피는 쉽게 닦이지 않았다. 낙원이 잠시 나가 냉장고 안에서 생수를 가져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듯 한 작업에, 낙원이 의자에 앉은 놈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
거즈를 물에 적셔 팔에 갖다 대자 차가운 지 놈이 흠칫했다. 잠시 적응할 때까지 기다린 낙원이 마치 조각상에 먼지를 닦아내듯 부드럽게 피를 닦아냈다.
이상한 일이다. 눈앞에 있는 놈은 아직 옷조차 다듬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고 하든지 간에 지금은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라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놈을 어떻게 해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약할 때를 배려하는 신사적인 마음가짐 따윈, 낙원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누군가 무력해졌을 때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런 구경거리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고 즐길 것이다. 그러나 놈에겐,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다 닦아낸 낙원이 놈의 손을 다시 잡았다. 책상 위에 놓인 소독약을 바르자 놈이 흠칫 몸을 긴장시켰다. 꽤 아픈 모양이다. 위에 거즈를 붙여준 낙원이 붕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놈의 손을 싸매주기 시작했다. 꽤 익숙한 솜씨였다.
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에 간호대 다니던 여자와 사귄 적이 있지.」
불쑥 그렇게 말을 꺼낸 낙원이, 놈을 올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다들 그 여자한테 배운 줄 알던데.」
「…….」
놈이 다시 눈을 피했다. 그라나 아까처럼 격렬한 거부는 아니었다. 낙원이 다시 손을 싸매주면서 이야기했다.
「대학들어가기 전에 밴드를 했는데 기타를 쳤거든. 연습을 하니까 손가락이 갈라지더라구. 몇 번 갈라지고 붕대 감고 그렇게 반복해야 굳은살이 배는 거야. 사실 그때 익숙해졌지.」
하얀 붕대가 놈의 손등을 다 가리자 기분이 나아진 낙원이 손을 땠다. 일어나 그의 눈에 엉망이 된 귀가 들어왔다. 낙원이 손을 뻗었다. 놈은 흠칫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
낙원은 놈의 귀에 거즈를 대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귀를 치료한 뒤 잠시 한 걸음 떨어졌다, 다시 다가갔다.
흠칫하던 놈은 그가 반대편 소매도 피 묻은 쪽과 똑같이 접어 올려주기 시작하자 안심하고 그를 내버려두었다.
안심……?
낙원은 잠시 그 단어에 이질감을 느꼈다. 놈이 자신의 치료에 안심한다? 먼저 치료할 수밖에 없는 상처를 입힌 건 자신이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그랬다면 병 주고 약주는 이 짓에 내내 짜증을 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놈은 분명 자신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피하지, 않는다.
붕대를 감아주기 전까지는 그토록 분노를 표시하던 놈이, 겨우 약 좀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준 것만으로도 그를 내버려두고 있다.
다른 누군가였다면 바보냐, 고 비웃고 지나갈 낙원이 오랜만에 비꼬임 없이 순수하게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아까 놈이 자신을 본 뒤 안심한 걸 보고, 뺨 한 대 치고 너무 오래어른 결과라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도 몰랐다.
감방생활에 익은 놈이니 최초의 뺨 한 대는 서열싸움으로 생각했다 치자.
그래도 그렇게 자기를 꺾어놓은 상대가 사온 음식을, 보통 먹을 수가 있을까. 그간 그가 사와서 먹인 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엔 감방음식처럼 먹어치우던 놈이 그래도 나중에 가선 조금씩 천천히 먹었던 것을 그는 상기했다. 그때마다 그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더랬다. 그렇지만 아무리 별 뜻 없이 가져온 음식이라도, 어찌되었든 자신 같은 사람의 손에 들린 걸 보통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바쁜 날이라 해도, 자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꽃집 일까지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보통이라면, ……아니, 놈은 그렇지 않지. 소매를 다 접어올린 낙원은 잠시 놈에게서 떨어졌다.
놈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아까만큼 화를 내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만은 느껴졌다.
놈은 약하다.
낙원은 갑자기 깨달았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이 단단하고 강한 놈은 약했다. 호의에, 도움에, 친절에, 그리고 아주 작은 정(情) 따위에.
놈은 아르마딜로였다. 갑옷 같은 외골격의 껍질을 두른 놈은 어떤 포식자에게도 먹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손발의 일부만을 뜯기고 피를 흘리며 둥지로 들어가, 몇날 며칠을 혼자 웅크려 나을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배를 쑤실 수 있는 쇠꼬챙이를 갖고 있는 인간에만은 맥없이 몸을 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린 배를 찔려, 안에서부터 긁어내 파 먹힐 때까지.
수없이 버림받은 놈은 더럽게 순수했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적의는 적의, 그리고 호의는 호의다. 병 주고 약 주면 남들은 팽개쳐버릴지 몰라도, 그 약이 정말 호의에서 나온 것이기만 한다면 놈은 언제든지 그 호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따위니 어찌되었든 '형님'이겠지. 자신을 찌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때 병원에서 공판까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채 팽개쳐두었음에도 그저 박광우는 자기 형님이고, 손 내밀어준 건 누님이니 또 누님의 꽃집으로 돌아오는 거지.
이렇게 약한 놈에게 여태껏 손을 내민 사람이 두어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아니지, 한 사람 더 있긴 했지. 주나가 아니라 조카였다는, 이미 버린 박하연. 낙원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저 단단한 놈이 약점을 갖게 된 이유를 알 것도 싶어서였다.
그런 짜증나는 여자도 상흔을 남기는데, 그럼 나는 어떠냐.
낙원은 싱긋 웃었다.
속이 꼬인 웃음이었다.
사탕으로 아이를 꾀면서 뒤로 숨긴 손에는 쇠꼬챙이를 쥔 기분으로, 낙원은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치지 않은 쪽의 쉬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일, 또 오지.」
형사들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힐끗 시계를 본 낙원은 웃으면서 걸어 나갔다.
* * *
「……새끼가,」
김갑선은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목으로 삼켜진 뒷말을 가래처럼 끓었다. '지깟 놈이 감히.' 각종 안주와 양주로 채워진 테이블을 앞에 놓고도 분노는 사그러들 줄을 몰랐다. 청량리 오와붕 시절, 리어카 끌고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자기 앞에서 침을 뱉었다고 일주일을 뒤져 결국 종로서 과일 팔던 애꿎은 노점상 하나를 다리병신으로 만들어놓았던 김갑선이었다.
누가 됐든 일단 눈 밖에 나면 깔아뭉개야 하는 그가 아랫놈들 앞에서 꼬리를 말았으니, 술 따위로 화가 삭혀질 리 없었다.
「형님,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박목화 지깟게 그래봤자 지금은 그냥 꽃장사 아닙니까.」
한때 박목화를 형님으로 모셨던 조희용이 살살거리고 속삭였다.
「-여차하면, 한 번.」
뒷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둘 다 알고 있었다. 장사하는 놈들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그들만큼 잘 아는 자들은 없었다. 룸 안에는 둘뿐이었다. 박목화 이야기엔 여자들도 끼우기 힘들었다. 김갑선이 수족처럼 부리는 넷 다 룸 밖에 서서 문을 지키고 있었다. 김갑선이 실룩실룩 웃음을 지으려다, 문득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주 죽여 놓을 게 아니면 그렇게 뒤집기만 하는 건 위험해. 낫는 대로 또 와서 아랫놈들 들쑤시면 좋을 게 없어.」
김원일을 찔렀단 소리에 들썩거리는 아랫놈들을 간신히 윽박질러 쫓아내놓고 나온 길이었다. 이미 떠난 박목화 따윌 믿고 함부로 입 놀리는 놈들은 아가리를 찢어주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병신을 만들어버리는 건데 그랬죠.」
조희용이 혀를 쯧쯧 차며 술잔을 올렸다. 김갑선이 잔을 받으면서 웃었다.
「네 놈도 많이 컸어? 병아리 껍질을 쓰고 짹짹거리면서 애새끼마냥 목화 그 새끼밖에 쫓아다닐 줄 모르더니. 요샌 제법 뽄세를 갖췄단 말야. 그러고보니 네가 그때 목매고 좋아하던 년도 있었지. 금희였나. 저 아래 술집에서 일하던 년. 고것이랑 같이 살겠답시고 했던 일 아녔어? 일 끝내고 내가 네 구역 주면서 같이 밀어줬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됐지?」
이제 생각난 양 조희용이 아, 했다.
「지금쯤 시골 다방서 티켓 팔고 있을 겁니다. 선수금 받고 넘겼으니 거기서 돈 못 뽑았으면, 아마……」
두 사람 다 그런 여자의 말로는 익히 알았다. 김갑선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하도 뻣뻣하게 굴길래 대단한 줄 알았더니, 한 반 년 데리고 살아보니 별 것도 아니었지?」
한 때 그 여자에게 목을 매달았던 조희용이 맞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갑선이 은근하게 물었다.
「그렇게 떠받들던 박목화 그 새끼도, 찔러보니 별 것도 아니었지?」
조희용이 실실 웃었다. 위험스런 웃음이었다. 박목화를 생각하는 조의 얼굴엔 어딘가 소름이 돋는 데가 있었다. 김갑선 눈이 가늘어졌다.
「사실은 네 놈. 그렇게 쫓아다닐 때에도 한 구석에선 미웠던 게 아니냐. 워낙 다들 박목화, 박목화, 떠받드니 뒤에 꼴아박혀 있던 네 놈은 속이 슬슬 꼬여갔던 게지.」
조의 웃음이 짙어졌다.
「다, 사람이 다, 그렇죠.」
흐후, 실룩대던 김갑선이 소리죽여 웃었다. 눈이 더 가늘어졌다. 베베 꼬인 동조자들끼리의 웃음이 룸 안에 소리없이 퍼져나갔다.
「고 금희 년도 박목화라면 꺼벅 죽었고 말이지.」
「저는 호구인줄 알고 말이지요……」
맛을 단단히 보여줬다는 양 조가 뇌까렸다. 김갑선이 양주병을 들었다.
「그 때 네놈을 쓰길 잘했지. 빌빌거릴 땐 언제고 그 새끼 창자 맛을 한번 보더니 사람이 달라졌단 말야.」
한 잔 받으라는 분위기에 조희용이 두손으로 잔을 공손히 받쳐 들었다. 콸콸. 술이 쏟아지듯 흘렀다. 김갑선 표현대로 '사내다워진' 조가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김갑선이 빈 술잔에 또 다시 술을 부었다.
「이번에도 내 생각이 맞았어. 단속 기간이 되니까 미친 소는 안 나타나. 3년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 김원일한테 연락을 받아도 안나타났단 말야……」
김갑선이 비웃듯 중얼거렸다.
「그런 주제에 저들끼리는 의리 챙기는 척 지랄하긴.」
몇 잔을 연속으로 마신 조가 '맞습니다. 형님'하고 답했다. 벌써 조금 혀 꼬부라진 티가 났다.
「그 새끼 혼자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는 돈 다 끌어안고 떵떵거리는 꼴 더이상 봐주긴 싫은데 말야. 김원일로 박광우 끌어내는 게 글렀음, 일단 하나씩 해치워볼까.
……어때, 그렇게 의리에 목숨거는 박목화는 어떻게 끌어낼까. 응?」
혼자 중얼거린 김갑선이 조를 돌아보았다. 조희용은 어떻게 답해야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김갑선이 실룩실룩 웃으면서 조에게 물었다.
「자아. 이젠 다들 네가 배신자인 걸 아는데도 네가 과연 쓸모가 있을지 한번 말해봐라. 그놈 해치울 방법이 뭐가 있을까? 밤중에 가게 부수는 것 따위 말고.」
김갑선이 낮게 중얼거렸다.
「3년이 짧았으니 이번엔 한 30년. 입 닥치게 말이야…….」
배신이라는 연장 없이 정면으로 덤빌 자신은 없는 조희용의 눈알이 몇 번 데굴데굴 굴렀다. 무엇에 생각이 미쳤는지 희번득 이채를 발했다.
「그때 제가 아직도 지들 꼬붕인 줄 알고 김원일이 오라가라 전화를 했을 때 말입니다. 놈이 누님 소리를 하던데 말입니다……」
모의(謀議)가 룸안에서 천천히 익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