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상한 동문
낙원이 들어서자 서경위가 벌떡 일어났다. 바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쩐 일로 이러나 싶어 낙원이 쳐다보자 서경위가 보고했다.
「최검사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낙원이 신기해 휘파람을 불었다.
「최검이? 웬일이야?」
방에 들어가자 정말로 최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이었다면 남자답게 생겼다고 어른들이 좋아했을 선 굵은 얼굴이 그를 보자 반색을 했다.
「바쁜 몸이 여기까지 웬일이냐?」
일전에 조서 문제로 이야길 한 뒤엔 다시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바쁜 몸이, 하고 강조를 한 김낙원이 담배를 물었다.
놈의 얼굴을 보자 반사적으로 담배가 당겼던 것이다.
「아니 뭐 요즘은……」
「요즘은 뭐. 안 바빠? 그때 제 2의 굳모닝 시티 어쩌구 하던 일은 끝났냐?」
김낙원이 바로 꺼내 문 담배에, 우물쭈물 인사부터 하려던 최동훈의 얼굴이 알루미늄 캔처럼 간단히 구겨졌다.
「끝나긴, 아직도 첩첩산중인데. 너는?」
「나야 똑같지.」
김낙원의 대꾸에 최동훈은 전의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불쑥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합동수사부가 어떻게 그렇게 공을 세우나 했더니, 다 뒤에 네가 있는 거였잖냐… 진짜 그러다가 억울한 사람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공소 안 되면 넘어갈 수도 있었던 사람이 너 때문에 공판하다 인생 말아먹을 수도 있는 거야. 남의 인생 쉽게 손대지……」
「법률은 니들한테 맡기고 우리는 건(件)수를 죽여라?」
김낙원이 싱글 웃으면서 비꼬았다. 그리고 태연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뭐, 나야 내사(內査) 들어가도 걸릴 거 없어. 하고 싶으면 해봐.」
「야- 그런 뜻이 아니잖냐.」
건수 올려 계급을 올린 형사들이 감사가 온다고 뭔가 불 리가 없다. 뭔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죄의식도 없을 터였다. 조서에서 몇 줄 고쳐 공소가 좀 더 쉽게 들어가게 해준 것뿐이다. '좀 보지' 라고 하는 자신은 취미였고, 그러면 내놓는 형사들은 상관에 대한 협조였다. 김낙원은 자신만만했다.
다 같이 공을 세우고 계급을 올리라고 있는 시기가 바로 '특범죄단속기간'이 아니던가.
그래도 혹시 만약에라도 있을 선의의 피해자를 우려해 이야기한다는 이상론적 취지 따위가 김낙원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게 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냐?」
담배에 불을 붙이자 녀석은 다급해진 모양이었다. 무어라 더 말하려던 놈이 재빨리 용건을 불었다.
「오늘 '동문의 밤' 있잖냐.」
용건부터 나오게 하기엔 최근, 담배가 적격인 듯했다. 낙원이 첫 모금을 빨아들였다 내뿜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동문회 말야? 넌 그런 데엔 못 가는 거 아니었어?」
「아니 그게……」
어떻게든 이유를 말하지 않으려 우물쭈물하던 최동훈이었지만, 담배 연기를 맡자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담배를 안 피우는 서경위와는 반대의 이유로, 금연자로서 몸부림치는 최동훈이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못 불 것이 없었다.
「저어기, 희경이가 너하고 꼭 가보래서……」
「응?」
희경이 누구더라, 잠시 머리를 굴려본 김낙원이 곧 그 이름을 찾아 냈다. 작년에 결혼한 최동훈의 와이프였다.
슬슬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래도 김낙원은 싱글싱글 웃으며 끝까지 물어보았다.
「나하고 왜?」
김낙원이 물을 때마다 연기를 맡는 녀석은 무척이나 괴로운 모양이었다. 몇 번 한숨을 내쉬더니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물곤 우물거리며 김낙원을 쳐다보았다. 적당히 묻고 같이 가주면 안 돼겠냐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낙원이 그렇게 간단히 물러설 리가 없었다. 결국 최동훈은 고뇌어린 얼굴로 최종 사유를 불었다.
「그 뭐냐, 오늘 무슨 과정 사람들이 동문 자격으로 와서 투자처 설명한다며……. 그거 얘기 좀 너랑 같이 듣고 오라고.」
「그래? 난 오늘 어디 좀 가볼까 했는데.」
최검도 어느새 재테크의 흐름에 합류한 모양이었다. 작년에 결혼했으니 그럴 때도 되었지. 가볼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까만 해도 이상론을 따지던 놈이 이렇게 나오면 한 번 발걸음을 돌려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낙원이 웃으면서 튕기자 최검이 몸이 달았다.
「야야, 부동산 재벌 아들, 이렇게 나오기냐. 넌 우리 학교 붙었을 때 차 받고 사시 붙었을 때 집까지 받았다며. 너야 돈 걱정 없다고 해도, 전셋집 사는 내 입장도 생각 좀 해주라. 아기 갖기 전에 집 옮겨야 한다고 요즘 장모님 성화가 장난 아냐.」
「아냐.」
「응?」
낙원의 말에 최검이 되물었다. 낙원이 태연히 정정했다.
「학교 붙었을 때 아파트 받고 사시 붙었을 때엔 빌딩 받았지.」
'악마 같은놈.' 최검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낙원이 웃었다.
「사(士)자 붙은 집엔 열쇠 세 개 갖고 온다더니. 처가댁에선 안 해주고 너한테 하래?」
이 상황에 목매달고 있는 건 최검이었다. 말을 돌리자 재빨리 반박했다.
「야- 언제적 이야길 하고 있냐. 검사 월급이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교사랑 했다는 둥, 교사는 여유 시간이라도 있지 이게 뭐냐, 시간 없음 돈이라도 내놔라, 희경이가 요즘 이런다구.」
속 다 까보이고 매달리는 최검에게 낙원이 싱긋 웃었다. 하늘 쳐다보다 땅 내려보다, 바쁘게도 산다. 자신은 이렇게 이상을 갖고 있는 녀석이 어떻게든 현실에서 버둥대는 걸 보는 게 아주, 좋았다.
「알었어 그래, 퇴근시간에 들러봐.」
바라던 답을 얻은 최동훈이 확 밝아진 얼굴이 되어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한 시라도 빨리 담배의 유혹에서 벗어나고 싶은 듯 했다. 나가면서 최검이 소리를 질렀다.
「정말 고맙다-, 나 간다.」
그래, 낙원이 웃으면서 답했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오자 밖에 있던 서경위가 그를 경애의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왜.」
김낙원이 묻자 서경위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닙니다. 검사님께 인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굉장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못 듣고 고맙다는 소리만 들었나보다. 평소 경찰들에게 거만하게 구는 검찰만 보던 서경위 입장에선, 정말 고맙다는 놈의 인사가 무척 거창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서경위 얼굴엔 '사시 패스했다는 얘기가 거짓말은 아닌가보다.'라고 쓰여 있었다. 낙원이 피식 웃었다.
「지금 저놈한텐 담배만 피우면 다 굉장할 걸.」
농담을 하지 못하는 서경위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을 껌벅였다. 낙원은 더 이상 설명해주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김선 뒤에 누가 있는지는 알아봤어?」
낙원의 물음에 곧 업무 모드로 돌아온 서경위가 답했다.
「아직 별다른 자료는 없습니다만.」
하루만에 뭔가 나올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던 김낙원이, 서경위의 다음 말에 조금 놀랐다.
「어제 금융감독원에 'W캐쉬'로 문의하니까 답변이 오더군요. 연 66.9%를 받는 합법적인 기업입니다. 이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 투자자 중에 배당률이 높은 축으로 뽑아본 명단입니다.」
보고서를 받아든 김낙원이 막상 보고서는 펼치지 않고 서경위를 아래부터 위까지 훑어보았다.
「경위, 어제 야근했나?」
「예? 아, 네.」
서경위가 답했다. 특별히 공을 들였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낙원이 곱게 타일렀다.
「어디 그래갖고 여자친구 건사할 수 있겠어? 지금은 김반장이 일할때야. 나중엔 얼마든지 야근할 수 있어. 바빠질 때를 위해서 체력 좀 아껴둬.」
서경위는 처음엔 당황하는 얼굴이었지만 곧 김낙원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예.」
성실하고 진지하며 농담이 통하지 않는 부하를 향해 낙원이 싱긋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오늘 동문회 일정을 깜빡 하고 차를 가져와 버렸지 뭔가. 아무래도 가면 술도 좀 나올 듯 한데, 와인 한 병 정도는 마시고 운전해도 괜찮겠지?]
* * *
[……경정님,]
조수석 시트를 젖혀 안전벨트를 하고도 편안하게 자고 있던 김낙원이, 그를 부르는 소리에 깼다.
[일어나세요, 경정님.]
운전석에 앉은 서경위가 그를 깨우고 있었다. 절대로 김낙원이 시킨 일은 아니었다, 서경위 본인이 야근 대신 자원해서 따라온 일이었다.
'경찰이 음주운전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전에 데리러 왔을 때 알았던 바대로, 경위의 신념은 확고했다. 동문회에 대리운전기사로 따라올 정도로 말이다.
낙원이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운전하기도 귀찮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대리 운전을 시키기엔, 가격이 좀 나가는 차를 끌고 온 게 패착이었다.
이럴 때 확실한 상식이 있는 부하를 둬서 얼마나 다행인가. 초과근무를 시킬 필요도 없이 알아서 따라와주니 말이다.
낙원이 시트를 당기면서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듯 미안하다는 티를 냈다.
[나올 때 전화를 할 테니 근처에서 놀고 와. 꼭 운전을 해줘야만 하겠다니 어쩔 수는 없어도, 이거 정말 미안한데.]
[괜찮습니다.]
서경위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하여간 경정님께 음주운전을 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안전벨트를 풀던 낙운이 그 말에 웃고 말았다.
[꼭 0.05%가 넘을 때까지 먹어야겠는 걸.]
이 뒷말이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 서경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낙원은 웃으면서 차 밖으로 걸어나왔다.
주차장 저 편에 도착한 최검이 보였다.
낙원이 인사하기 전, 최동훈이 먼저 크게 팔을 휘두르며 그를 불렀다.
[어이, 여기야 여기-.]
* * *
동문회관은 새 건물답게 번쩍거렸다. 몇 년 전의 구질했던 건물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로웠다. 자심에게도 몇 번씩 걸려왔던 모금 전화를 떠올린 김낙원이, 그 사이 누가 쓸데없이 돈 좀 처발랐구나 했다.
[이런 데랑 교회에 돈 내는 놈들이 제일 이해가 안 가.]
낙원이 중얼거렸다. 옆에 최동훈이 동감했다.
[그게 바로 내가 희경이한테 하는 말이라니깐. 십일조만 저축했어도 그놈의 제테크 벌써 했겠다고. 그럼 천국에 제태크 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내 원 참.]
낙원이 피식 웃고 말았다.
투덜거리던 최동훈이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 건물은 이번 동문 된 그 최고 지도자 과정 사람 중에 하나가 들어오자마자 몇 억을 쾌척해서 공사를 끝냈다는군. 무슨 건설 이사 아들인가? 그 왜. 지금 투자 설명한다는 사람 말야.]
[그래?]
돈은 꽤 있는 모양이군. 낙원이 적당히 맞장구쳤다.
'동문의 밤'이라봤자 특별한 행사는 아니었다. 기부금을 낸 사람을 잡아놓기 위해 학교에서 열어주는, 이른바 후원자 응원하기 모임이었다. 그때였다. 사회자가 '이번에 동문회관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신……' 하고 소개를 시작했다.
박수소리와 함게 누군가 단상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저 사람인가보다. 생각보다 젊은데.]
최검이 중얼거렸다. 과자를 집어먹고 있던 낙원이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단상에 올라온 남자가, 막 사회자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은 뒤였다.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별 일도 아닌데 거창하게 소개해주셔서 쑥쓰럽군요.]
겸손한 인사로 운을 뗀 남자에게 다시 한 번 박수가 쏟아졌다. 날카로운 눈과 몸짓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띤 부드러운 웃음과 인사 탓에 남자는 꽤나 호의적으로 보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동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어쩌구 하는 의례적인 소리는 귓전에도 스치지 않았다. 김낙원의 눈은 오로지 회색 양복을 입은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었다.
* * *
[남양건설이라고 하셨던가요.]
낙원이 남자에게 잔을 건넸다. 옆에는 최검이 서 있었다. '이제 서울엔 더 이상 개발할 데도 없어,' '거기가 최적이야.'
남양주의 투자가치를 역설하던 다른 동문을 보던 남자가, 잔을 받으며 고개를 돌려 김낙운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만,…]
[김낙원입니다.]
날카로운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가 마주 웃으면서 그 손을 잡았다.
[그렇습니까.]
손은 크고 힘찼다.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낙원이 옆에 서 있던 최검을 끌어당겨 소개했다.
[최동훈입니다.]
[이 분도 경찰청에서?]
남자가 물었다.
[아, 아닙니다.]
최동훈이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시선이 최동훈을 훑더니. 곧 웃으면서 손을 잡고 짧게 흔들었다.
[이강웁니다.]
최동훈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김낙원이 말을 덧붙였다.
[아내가 투자 좀 해보라고 성화하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다지 뭡니까. 어떻습니까, 그쪽 경기는.]
남자가 유연하게 대답했다.
[경기야 바닥이죠. 뚫고 들어갈 구석이 있을까 기웃거리고는 있습니다만.]
[저 분은 꽤 믿고 있는 모양인데-…….]
김낙원이 투자하라고 힘주어 말하는 40대의 동문을 가리켰다. 와인 몇 잔에 취기가 돈 붉은 얼굴의 저 동문은 강남 K&C 로펌의 과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야길하는 걸 들어보니 이미 몇 억 쏟아부은 듯 했다.
먼저 투자 이야기를 뿌렸을 남자는 객관적인 양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만큼 괜찮은 이야기니까요.]
[그렇습니까. 그 부근이라면 아버지가 사셔서 좀 들었던 적이 있죠. 몇 년째 개발 시세가 묶여 있다면서요.]
낙원의 말에 남자가 태연히 답했다.
[자세한 투자 이야기라면 저쪽에서 들으시는 편이 더 정확하실 겁니다. 다 일아들 보셨으니 투자를 하시는 거겠지요.]
[그렇겠지요.]
낙원이 싱긋 웃었다. 그때였다, 저편에서 그들을 본 김양탁이 더없이 반가운 얼굴로 인파를 헤치며 다가왔다.
[이야- 왔구나, 왔어.]
이미 김양락과 남자는 서로 '아는사이'가 된 듯 했다. 김양락이 와인을 소줘럼 걸쳤는지 벌개진 얼굴로 남자에게 낙원을 소개했다.
[어떻습니까, 우리 부---우--자- 김낙원이가. 사시 패스 했다고 한 달에 1억씩 나오는 빌딩 턱하니 받는 녀석이니 보는 눈이 다르겠죠?]
그리고 김양락이 내놓고 낙원에게 묻는 것이었다.
[어떠냐? 이분 얘기 들어볼만 해?]
낙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별 얘긴 못 들었는데.]
김양락이 붉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응? 그러면 안 되지. 자, 마십시다. 마셔요. 잔 들고-]
김양락이 내민 잔에 남자가 들었다. 낙원 역시 피식 웃곤 손에 들린 잔을 같이 들었다. 얼떨결에 최검도 같이 들었다.
[부자를 위하여.]
'위하여', 낙원과 최검과 남자가 다 같이 한 모금씩 마셨다. 강한 조명에 내놓은 탓에 탄닌 맛이 강해지긴 했어도, 웬 일로 그럭저럭 먹을 만한 와인을 내놓았다고 낙원이 생각했다. 술 밝히는 김양락이 주접을 부리는 이유도 알 것도 같았다. 갑자기 놈에게 술을 먹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텨지나갔다.
[…….]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생각난 놈 탓에, 김낙원은 웃어버리곤 술잔에 남은 술을 끝꺼지 기울였다. 옆에서는 김양락이 활발하게 떠들고 있었다.
[우리 오늘 또 2차 가자구. 강우씨도 같이 갑시다. 네? 얘기다운 얘기를 더 해봐야죠. 들을 것도 많은데……]
* * *
아침에 일어나자 머리가 아팠다.
숙취를 느껴본 것도 간만이었다. 김낙원은 누운 채 시계를 집어 들었다. 11시 30분, 이미 한낯이다. 햇빛은 두개골을 수술톱처럼 비집고 들어와 두통을 끊임없이 광합성해내고 있었다.
두통의 와중에도 오늘 아침 서경위에게 전화를 걸어 '병가' 라고 못 박았던 것만은 기억이 또렸했다. 선견지명이지. 낙원은 스스로에게 감사했다.
오늘 하루는 자유였다.
무엇을 할까, 낙원은 잠시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진정한 의문이 무엇을 '먹을까' 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뭔가 속을 채울 국물 같은 것이 필요했다.
고춧가루를 좀 풀어 얼큰하고, 사골국처럼 비리지도 않은, 장국과 수프의 중간형태처럼 걸쭉한 어떤 것-.
곧 습관처럼 특정한 음식을 떠올린 김낙원이 일어나 대충 웃을 차려 입었다.
딸랑.
종소리는 익숙해져 있었다.
[……어서오세요.]
그래도 이젠 인사는 제법 하는군. 낙원이 눈에 익어버린 가게로 들어서면서 놈을 힐끗 쳐다보았다. 놈은 항상 그렇듯 빳빳하게 깃을 세운 단정한 하얀 셔츠에 검은 앞치마 차림이었다. 불쑥 저 단정한 차림을 흐트러뜨리고 싶은 욕구가 일었지만 성욕보다 식욕이 먼저였다. 오늘은 시간도 많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뭐해? 뜯어.]
경계를 세우고 있던 놈이, 비닐을 뜯고나자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숨길 수 없는 특유의 음식 냄새가 올라왓던 것이다.
[순대국 처음 보냐?]
비닐 밖으로 컵라면 용기에 든 음식들을 꺼내는 놈에게, 낙원이 뭐가 어이가 없냐고 묻는 양 툭 내뱉었다.
해장, 하자 떠오른 건 순대국이었다. 편하게 입고 이 근처까지 차를 몰고 온 김낙원은 시장에 주차할 곳이 없자 근처의 놈의 꽃집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침 시계를 보니 점심때였다. 그 뿐이었다.
2인분의 음식을 본 박목화는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입을 다물고 있지만도 않았다.
[일 안 합니까?]
어떻게 낯 시간에 이렇게 들락거릴 수가 있느냐는 비아냥 섞인 물음이었다. 저놈도 말을 할 줄 알았나싶어, 낙원이 책상 앞에 앉으며 물었다.
[숙취야.]
놈이 다시 어이가 없어진 얼굴을 했다. 표정이 선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표정으로 보이던 얼굴은 의외로 다양했다. 미묘한 표정변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더 흥미로웠다. 막 순대국에 숟가락을 사져다대던 낙원이 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대화할 마음이 들었나 보지?]
[…….]
놈이 다시 무표정해졌다. 걸려들었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낙원이 놈의 앞으로 국 한 그릇을 밀어주면서 다시 말을 걸었다.
[여기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나?]
알바생부터 정애까지 차례차례 쫒아낸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말없이 국을 퍼먹고 있는 놈 앞에서 낙원은 태연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혼자 밥을 먹을 땐 어쩐지 비참한 느낌이 들지. 이렇게 사람이 안 보이는 데에선 단지 밥 먹는 시간을 잊어버리는 정도겠지만. 오히려 커다란- 그래. 예를 들면 학생식당 같은 곳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고 해봐. 눈앞에 사람이 많이 보여도 대화를 나눌 사람은 하나 없는 그런 곳에서 말야. 밥맛 꽤나 비참해지지.]
아마 놈에게 떠오른 곳은 교도소일 것이다.
낙원은 싱긋 웃었다.
[대체적으로 그런 곳일수록 객관적으로도 맛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 그렇겠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고 생각이 들어도 대부분, 죽은 자가 먹는 것처럼 맛이 없어지거든. 도대체 혼자라는 건 뭘까, 응? 사실 법 먹을 때 같이 있는 사람이 꼭 좋아하는 사람이리란 법도 없고. 날씨 얘기나 할 사이일 때가 많은데. 밥 먹을 때 항상 침 튀겨가며 이야기 하길 원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응?]
문득 놈이 숟가락을 멈추었다.
[……니까.]
중얼거렸던 놈이,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양 다시 숟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러나 김낙원은 분명하게 들었다. 놈의 말을.
'혼자니까.'
스쳐지나가는 듯한 말이었다. 그래도 분명히 대화는 시작되었다. 김낙원은 속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혼자 밥 운운하는 낙원 본인의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다. 낙원이 평생 혼자 밥을 먹어야만 했을 때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혹여 그럴 일이 생기더라도 여유롭게 식사를 즐겼다. 그는 단지 감방에서 나온 보호관찰자들의 재소일기를 참고했을 뿐이었다.
스스로는 느껴본 적도 없는 이야기에 놈이 끌려나온 것을 기뻐하며, 낙원은 부드럽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뭐 여하간에 나도, 혼자 먹기는 싫었다는 이야기지.]
[…….]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순대국집은 맛은 있어도 시끄럽고 구질했다. 그 곳에서 혼자 먹었다면 더 두통이 일었을 것이다. 이 꽃집은 나름 좋은 장소였다. 상도 크고 조용했다.
어쨌든 동질김을 형성하는 데에는 꽤 성공한 모양이었다.
놈이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감방 밥같이 먹지 않는 것만 해도 꽤 보기 좋았다. 김낙원 역시 여유 있게 퍼먹기 시작했다. 잠시 꽃집 안에는 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마 전화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울린 것은 김낙원의 핸드폰이었다.
[여보세요.]
한가하게 받은 김낙원에 비해 수화기속 서경위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응, 그래 알았어.]
낙원은 잠시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끝까지 천천히 비운 뒤에야 일어섰다.
[오늘은 반차밖에 안된다는군. 다음에 또 보자구.]
옷을 제대로 갈아입으려면 집에 들려야 할 듯 했다. 하필이먄 총경이 올 건 뭐냐. 얼굴도장을 찍어야 할 필요성에 일어나면서도 김낙원은 못내 아쉬었다.
[자, 그럼 다음에.]
일어나 나거던 그의 뒤로 놈의 인사가 들려왔다. 이제는 놈도 꽤 익숙해진 듯했다. 웃으면서 나가려던 김낙원이 문득 유리문 앞에서 멈칫했다.
[…….]
그 회색양복의 남자를 어디서 보았는지가 기억이 난다.
바로 이 유리문 앞이었다.
김낙원은 문을 열고 나갔다. 딸랑, 종소리가 귓전에서 울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계단 위로 올라갔다. 마치 그때 이곳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던 남자를 발견했을 때처럼.
남양이라, 경위한테 알아보라고 시켜야겠군.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이번 걸음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 * *
다시 조용해졌다.
……그래도 오늘은, 뼈까지 시린 기분은 들지 않았다.
햇볕이 따뜻해서인지도 모른다. 꽤나 본다운 햇빛에, 박목화는 책상 위의 음식물을 다 치운 뒤 냄새가 빠져나가도록 창문을 열었다. 꽃다발 연습을 하기 위해 막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을 때였다.
[목화꽃집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상호명으로 말한다는 것도 꽤 쑥쓰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전화기 저편에서 열흘 넘게 목말라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화야,]
정애였다.
[누님.]
목화는 그녀를 뱃속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로 불렀다. '누님.' 자기도 모르게 한 번 더 부른 목화를 마치 쓰다듬어주듯 정애가 불러주었다.
[목화야-…….]
목소리만으로도 따스했다. 목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에 메여서였다. 버림받았다는 생각만으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역으로 자신이 얼마나 신뢰에 굶주려 있었는가를 깨달은 목화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꾹 다물었을 때였다.
[ 그 뭐니, 경정인가 하던 형사는 이제 갔니?]
경정과 형사 사이의 계급의 차이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정애가 물어왔다. 목화 역시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예, 누님.]
[다행이다. 난 또 당분간 가지 말라고 하길래 꾹 참았지. 이젠 다 끝난 거지?]
그제야 목화는 누님이 한 질문이, 지금 김낙원이 출발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하기야 누님이 내내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것을 알 리가 없다. 목화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정말 오랜만의 누님이라는 실감이 들어서였다.
[아니오, 더 올 겁니다. 누님.]
오늘도 '다음에' 를 붙였던 김낙원을 떠올린 목화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전화기 저편에서 희미한 웃음소리를 들은 정애가, '그래도 아주 나쁘지는 않은가보다.' 하고 안심했다.
일단 안심하자 그렇게 그 호칭이 거슬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누님이 뭐니, 얘는. 대체 왜 다들 그렇게 이상하게 부르고…….]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를 할 뻔 했던 정애가 말을 흐렸다.
[다들, 이요?]
목화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정애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네가 그러니 일해주는 아저씨들도 장난삼아 그러잖니.]
그런가 싶었는지 목화는 더 말하지 않았다. 정애는 마음을 놓았다. 하미터면 이야기할 뻔 하지 않았나.
그 날 찾아온 '동생들' 에 대해선 당분간 비밀이라는 걸, 정애는 상기했다.
그래서 그녀는 진짜 용건으로 말을 돌렸다.
[이제 슬슬 어버이날 준비해야지.]
[벌써요?]
목화는 놀란 듯했다. 벌써는 4월 중순이 넘어가고 있는데. 정애가 웃으며 차근차근히 가르쳐주었다.
[무슨 소리니. 원래 한 달 전부터 준비하는 건데. 네가 좀 늦었지, 이번에는 내가 먼저 꽃을 잡아줬으니까 괜찮지만, 지금 시장에 나가도 작은 카네이션들은 두 배씩 올라 있다고.]
동생은 5월이 되어야 준비할 모양이었다. 놀란 기색이 진해져왔다.
[그래도 작은 건 한 달 정도 가니까 미리 준비라는 게 가능하지. 코사지 용으로 쓰는 커다란 카네이션은 오래 가지 않아서 꽃값이 금값이 되는 4월 말이나 5월에 구비라는 수밖에 없어. 안개는 열흘 전쯤부터 쟁여놓고. 꽃도 꽃이지만 리본도 2주 전에는 만들기 시작해야 해.]
[…….]
[일할 애들도 미리미리 구해야지. 그 자리에서라면 바구니가 800개는 나갈 텐데. 사릏 전이면 어린이날이잖니. 그 전에 바구니에 오아시스 넣고 편백으로 만드는 작업 다 해두고, 그 날엔 꽃을 꽂는 거야. 다음 날엔 코사지 만들고. 8일이 어버이날이지만 진짜 대목은 7일이니까, 5월에 들어가면 남은 날은 사실 일주일도 채 안 돼. 모자란 재료 사오기도 벅찬데 사람 구할 시간은 없어.]
어버이날 대목이란 이야기는 들었어도 이렇게 바쁠 지 생각하지 못했던 동생은, 막상 수치로 닥치자 막막한 듯했다.
[여기는 그날 주문 들어오는 코사지만 천개야. 나야 매년 겪던 거니, 지영이랑 아줌마 몇 부르면 되지만……]
직접 가지 못하는 정애도 애가 타긴 마찬가지였다, 손이 빠르고 일 익은 여자 다섯이면 여기는 해치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꽃다발 하나도 아직 땀 뻘뻘 흘리는 동생에게 지하철 역사의 꽃집을 통채로 맡긴다는 건 무리로 보였다.
어버이날은 꽃집 최대의 대목이기도 했지만 생굿을 벌이는 날이기도 했다. 크리스천인 알바생 지영의 말을 빌리자면, '예수님처럼 딱 사흘만 죽었다 살아났으면 좋겠어요' 라고 하는 정도의 난리였다.
일 년 중 유일하게 모두가 꽃을 필요로 하는 단 하루의 모습을 동생이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정애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는 그간 생각했던 절충안을 이야기해주었다.
[일단 어린이날엔 아줌마들을 그리로 보낼게. 그날 하루에 준비가 끝나게 해보렴. 당일 아침에 사람 시켜서 꽃 보낼게. 그 날 알바생 좀 쓰게 구해보고.]
이쪽도 일손이 딸릴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 누님.]
그래도 동생의 대답만은 신뢰가 갔다.
죽을 각오라도 한 듯한 기세의 답을 들으면 동생의 전직이 실감난다. 정애는 전화기를 붙든 채 잠시 웃었다. 그래, 어떻게든 될 것이다.
[누님만 고치면 되겠다,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