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월의보름을조심하라-4화 (3/34)

4. 진실위의 거짓

「좋은 아침.」

낙원이 산뜻하게 인사했다. 눈 때문에 진창이 된 아스팔트길과 어두침침한 하늘을 다시 한 번 쳐다본 서경위가 떨떠름한 얼굴로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경정님.」

매스컴에 소재거리가 떨어질 때면 하나마나한 이니셜 처리를 하고 종종 등장해주는 고급 맨션의 로비였다. 경정이 열어주지 않으면 아예 맨션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어, 로비 앞에 달려 있는 비디오폰 앞에서 있던 서경위가 '여긴 왜?'라고 묻는 듯한 침묵에 한숨을 쉬었다.

「경정님, 오늘 새벽 다섯 시까지 술을 마셨다고 전화하지 않으셨습니까. 수면직후인 지금이 혈당알콜치가 최대인 때라고요. 경찰이 어떻게 음주음전을 합니까. 제 차를 타십시오.」

병가를 내달라고 전화했더니 카풀을 하러 왔나.

젊은 놈이란. 낙원은 지나치게 성실한 서경위 탓에 아침부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비디오 폰을 껐다.

「곧 내려가지.」

이미 일어나 있던 차라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지 진창이 된 길로 열심히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침나절 뒹굴거려 보려던 계획이 좌절되었을 뿐이다.

옷을 입고 내려가자 서경위가 얇은 양복 차림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타시죠.」

소나타였다. 국민차를 보고 픽 웃고 만 낙원이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일은 잘 했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서경위가 조수석에 놓여있던 파일함을 뒤로 건넸다.

「박목화, 전과 3범. 중졸. 17세 때 과실치사로 소년교도소에서 1년 6개월 복역한 걸 시작으로, 소년원 나온 뒤로는 곧장 박광우 밑에 들어가,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면서 2000년도 이전에 이미 폭력상해로 전과 2범이 되었더군요.」

이미 다 아는 사실을 열심히 조사한 서경위를 보고 낙원이 싱글싱글 웃었다.

「수고했네.」

서경위가 차를 출발시켰다. 그래도 이런 건으로 며칠씩 입 다물고 팔 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이 성실하고 똑똑한 놈은 반격까지 할 줄 알았다.

「3년 전에 이 부서에 계셨더군요, 경정님. 박목화라면 그때 잡혔을 텐데요.」

이미 다 아는 사실이 아니었더냐. DB화도 안된 걸 뻔히 알면서 개고생을 뭐하러 시켰냐는 비난을 간접적으로 돌려 하는 말이었다.

낙원이 재미있어하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응, 있었다 뿐인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졌는데.」

「……?」

길바닥에서, 교도소까지 말이야.

도검류에 찔린 상처는 경찰의 조사를 받는 게 원칙이긴 하지만, 발견자가 낙원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바로 신병인수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서경위가 의아해하는 얼굴이 잠시 백미러로 보였다. 하기야, 경찰대 졸업한 지 2년밖에 안된 녀석이 알 리가 없지. 낙원이 웃으면서 물었다.

「창문 좀 열어도 되겠어?」

「네? 네.」

형사들은 박목화라는 것을 알자마자 환호했다. 영장을 신청할 필요도 없이 꼼짝도 하지 못하는 동안, 김반장이 '동양'구역의 상가 주인들을 협박 반, 감언이설 반으로 꼬여 진정서를 접수시켰다. 그 진정서를 근거로 영장까지 받아낸 건 김낙원이었다.

단속기간 내내 그물이 조여지자 동양에서 행동대장을 잘라낸 게 분명했다. 누가 했는지는 금방 알았다. 미친 소인 줄 알았던 도마뱀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잘린 꼬리는 배를 꿰맨 뒤에도 입을 꾹 다물었다.

놈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특수조직범죄 처벌 대상자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뒤였다. 일단 경찰이 잡고 나서 증언을 확보, 진정서를 내면 검찰은 구속 영장을 발부하고 기소한다. 검찰과 경찰의 이인삼각 플레이는 '특별범죄단속기간'이라는 운동회를 뛰는 동안만은 발이 딱딱 맞았다. 병원에서 유치장으로 놈은 바로 들어갔다. 공판이 끝난 뒤엔 교도소였다.

길바닥에서 교도소까지, 나는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놈을 주워 잠자리까지 책임졌노라 김낙원은 자신했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김낙원 앞에서 운전하던 서경위가 물었다.

「그런데 왜 지금도 박목화인 겁니까? 아무리 지금도 '동양'에서 박목화를 추앙하고 있다지만, 박목화가 행동대장이었던 건 3년 전이잖습니까. '동양PK'는 박광우와 김갑선이고요. 이미 손 털고 나왔다는데 더 잡아넣을 것도 아니고, 특별히 박목화를 구슬러야만 박광우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응? 그럴 걸.」

김낙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서경위가 무어라 더 묻기 전, 김낙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그놈 얼굴도 몰라.」

「……그게 말이 됩니까?!」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서경위가 무의식 중에 언성을 높였다. 대한민국에서 무슨, 얼굴도 모르는 조폭 두목이 있을 리가 있나. 뭘 생각하는지 빤해서 '진짜라니까,' 김낙원이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듯 손을 내저었다.

「경위. 경위 손이 경위 얼굴을 얼마나 알겠어. 면도하는 턱이나 좀 알겠지. 얼굴을 제대로 아는 건 눈 뿐이야.」

「…….」

「그 눈이 박목화였던 거지.」

서경위가 '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게, 움찔하는 어깨로 읽혔다. 낙원은 피식 웃었다.

놈이 이렇게 크기 전엔 얼굴을 아는 놈이 보다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십년이 지난 지금은 박목화와 몇몇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얼굴'을 아는― 놈이 어디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 건, 박목화 뿐이었다.

서경위가 반박했다.

「그렇게 중요한 박목화를 3년 전에 왜 찔렀다는 겁니까. 세상에 눈 빼놓고 다니는 사람도 있답니까.」

김낙원이 싱글벙글 웃었다.

「첫째, 그 눈은 지금 김원일이라고, 박목화 바로 아래에 있던 놈이 하고 있다.」

박목화 정도로 유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김낙원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둘째, 왜 질렀는지는 우리도 잘 몰라. 박목화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지. 단속 기간 중엔 행동대장인 박목화는 언제 잡힐지 모르는 상황이었어. 그냥 찌른 게 아냐. 서경위. 놈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던 거야. 영원히, 말야.」

「…….」

자신이 줍지 않았더라면 놈은 죽었을 것이다.

구급차 안에서 놈은 의식을 잃은 뒤에도 내내 자기 배를 꽉 누르고 있었다. 차 안의 응급요원조차 힘줄 돋은 손을 떼지 못해 손 위로 손을 겹쳐 눌렀다. 돌처럼 누은 놈이 땀과 피를 섞어 흘리는 몇 번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형님',이 그가 알아본 유일한 말이었다.

놈은 내내 그렇게만 달싹이고 있었다. '형님, 저는.'

서경위가 곧 항변했다.

「……그렇지만 박목화는 아무것도…….」

「응, 그래. 우습지 않나?」

김낙원이 싱글벙글 웃었다.

「찔린 뒤에도 불지 않을 놈을, 굳이 입막음까지 하려고 했다는 게 말야. 그게 바로 놈들의 '의리'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 뒤에도 의리 따위를 지켜가며 아무것도 불지 않는 놈을, 자신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놈의 눈이 떠올랐다. 고개를 숙인 놈의 시선은 물에서 끌려나와 땅에 패대기쳐진 상어의 눈 같았다. 날카롭지만 멈춰 있다― 뭍으로 끌려나왔던, 그 시간에. 그런 눈을 하고서도 입 꾹 다문 바보를 어떻게 믿지 못했을까.

못 믿을 놈이 바보인지 지키는 놈이 바보인지, 이 정도쯤 되면 헷갈릴 지경이다.

김낙원이 담배를 물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연기가 회색의 스카프처럼 굽이치며 빠져나갔다. 서경위가 문득 중얼거렸다.

「자료를 보니까 두 사람은 10년 전에 철거 용역반을 했을 때부터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는데요…….」

「박목화가 전과 1범 때 얘기지? 그때도 박목화 혼자 잡혔잖아. 박광우는 한 번도 잡힌 적이 없지.」

상판대기 한번 보고 싶구나. 3년 전 합동수사부에서 하던 말이었다. 박광우라는 것도 본명은 아닐 것이다. 몇몇은 그렇게 추측했다. 놈은 그저 박목화의 '광우형님'이었다. 박목화가 그렇게 부르니 모두 박목화의 성을 붙여 박광우라 불렀다. 놈은 그렇게 박목화가 누군가를 패고 찌르고 한 번씩 감방에 다녀올 때마다 같이 위상을 올려가며,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돈으로 조직을 회사처럼 만들고, 저가 무슨 마피아라도 되는 양 조직에는 얼굴도 들이밀지 않고 커온 것이다.

그리고 매우 똑똑하게도, 적당할 때 발판을 바꿔치운 거지.

서경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동양이 커가면서 구역 잡을 때에도 그랬죠. ……박광우도 대단하네요. 그 정도의 충성을 받다니.」

김낙원이 칼같이 말을 잘랐다.

「그 정성을 들이는 게 바보지.」

「…….」

서경위가 잠시 후에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런지도 모르죠. 뒤집어쓰는 사람은 정해져 있나 봅니다.」

배신당하는, 이라면 맞을지도 모른다.

놈에 대한 자료라면 꿰고 있는 낙원이 피식 웃었다. 3년 전 그가 놈에 대해 몰랐던 거라곤 그 눈깔의 흑백뿐이었다. 땀과 피를 흘려가며 골목길에서 구급차를 타고 가던 내내 지금의 입술처럼 처닫고 있던 그 눈깔.

「지금 그를 도와주는 건 자원봉사자더군요.」

「……자원, 봉사?」

중국산 회의실 의자에 어떻게든 몸을 파묻던 실력으로 시트 깊숙이 앉아있던 김낙원이 느리게 반문했다.

서경위가 설명했다.

「김정애라고, 고속터미널에서 꽃장사하면서 혼자 사는 서른아홉 살 여자예요. 동생이 재소할 때부터 들락거리기 시작해서 그 뒤에도 뚝 교도소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모양이더라구요. 박목화는 감방에서서는 꽤 모범수여서, 자원봉사자한테 기술을 배우는 시간에 친해졌다고 합니다. 박목화와는 누나 동생하는 사이래요.」

「…….」

「지금 박목화가 하고 있는 가게도 김정애가 맡긴 거라는데요. 종종 와서 가게도 봐주고 간다고 합니다. 보호경찰관이 사회적응 모범 케이스라고 무척 자랑스러워하면서 말해주더군요.」

「……여,」

「네?」

잘 듣지 못한 서경위가 되물었지만 김낙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란 말이지…….

꽃집을 누가 마련해줬나 의문을 품긴 했었다. 꽃바구니 꽂는 솜씨가 아무리 봐도 한 달짜리 솜씨는 아니더만은, 여자였나. 어쩐지 속이 비틀렸다. 웃음이 나오다 말았다. 주제에, 여자 꼬시는 재주는 있었다 이거지.

하기야 얼굴이 밉상은 아니지.

내리깔아도 우습게 보이기는커녕, 거꾸로 상대를 깔보는 듯해 남자를 끓어오르게 하는 그 까만 눈깔이 떠올랐다.

같은 남자에겐 재수없는 눈깔이지만 여자에겐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

건장한 몸에 일그러지지 않은 단정한 이목구비까지 떠올리자 나이 먹은 여자가 좋아할 법도 하겠다 싶었다. 기생오라비같은 꽃미남은 TV를 볼 때나 좋아할 테고.

실제로 본인이 '기생오라비'계열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김낙원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싱글 웃었다.

「한 번 가보지.」

「네?」

운전하던 서경위가 반문했다.

「놈이 마음잡게 만든 여자잖나. 한 번 볼 가치가 있지 않겠어.」

입으로 내뱉고 나니 속이 더 꼬였다. 아마, 놈이 조직으로 돌아가지 않은 게 여자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럴 거다.

자기도 모르게 비틀린 얼굴을 하고 낙원이 덧붙었다.

「오늘은 외근하지.」

* * *

「…카네이션, 응. ……안 핀 걸로 칠백 단만 우선 잡아놔. 응, 응,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카네이션은 한 달은 가니까. 식목일? 휴일도 아닌데 이젠 대목도 아니지 뭐. 물건 들여놓을 것도 없어. 안개는 그때 가서……」

문 바깥에 구두 끝이 보였다. 정애가 힐끗 바라보곤 전화를 끊었다.

「손님 오셨다. 나중에 다시 할게.」

전화를 끊은 정애가 서둘러 앞치마를 하고 나갔다.

바깥에 서 있던 손님은 남자 둘이었다.

「어서 오세요― 뭘 찾으……」

반갑게 미소를 띠며 맞이하는 정애를, 낙원은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서류 근무를 하는 오전 내내 신경 쓰다 외근 도장 박자마자 차 타고 달려왔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내 서방 꼬신 년이 너냐’의 기세가 생각날 정도였으니, 아마 서경위도 그래서 따라오겠다고 우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고대하던 여자는 평범했다. 배에 둘러맨 전대 같은 가방도, 걸쳐 입은 주머니 커다란 자주빛 카디건도 천생 그저 장사하는 여자였다. 서른아홉치고는 괜찮은 얼굴이었지만, 아이한테 빨리는 철분만큼 젊을 때 고생을 했는지 이마에 오래된 고생줄이 잡혀 있었다. 그저 평범했다. 이 여자의 무엇이 박목화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토록 놈이 단호하게 말할 정도로.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가, 손님맞이용 미소 속에서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여자를 깨닫고 경찰 신분증을 들이대었다.

「……!」

여자의 얼굴에서 단숨에 웃음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대신 들어찬 건 경계심이었다. 굳은 얼굴만 보면 박목화와 친남매라고 해도 믿어줄 듯 했다.

「……그 애가, 뭔가 잘못했나요?」

응.

김낙원은 속으로 대답했다. 돌아가지 않았잖나. 원래대로라면 놈이 박광우를 찌르고, 나는 손 하나 안 대고 ‘동양’이 와해되는 드라마를 보고 있어야 마땅한데.

그러나 뒤에서 재빨리 끼어든 건 서경위였다.

「아닙니다. 김정애씨. 탐문차 왔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민간인입니다.’

서경위가 김낙원에게 양해를 구하면서도 명심하라는 양 입모양으로 의사를 전달해왔다.

조폭 여자가 어떻게 민간이냐고 따지려던 김낙원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박목화도 가석방중이니 신분상으론 민간인이라고 할게 뻔했다. 어쨌든 저놈이 따라온 이상 여자한테 강압적으로 나가긴 글렀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안심시키는 게 나을 듯 했다.

「그렇습니다. 긴장 푸세요.」

김낙원이 싱글, 먼저 웃었다.

여자는 굳은 얼굴을 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볼터치를 브러쉬로 한 번 문질러준 정도의 효과였다.

「워낙 경찰이 온 일치고 좋았던 소식이 없어서. ……들어오세요, 안이 좁긴 하지만 그래도 바깥보다는 나으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서경위가 동시에 말했다. 낙원이 힐끗 고개를 돌려 놈에게 시선을 던진 후 싱긋 웃었다. 어떻게든 여자를 편안하게 해보려던 서경위가 찔끔하고 입을 다물었다.

안에 들어가자 꽃펀지였다.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커다란 꽃 냉장고에 잠시 낙원의 눈이 머물렀다가, 곧 웃고 말았다.

「앉으세요.」

여자가 플라스틱 의자를 두 개 내주었다. 낙원이 먼저 앉았다.

「젊으신데, 형사신가요?」

먼저 말문을 연 여자에게 서경위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닙니다. 형사는 경장에서 경사까집니다. 이 분은 경정이세요.」

여자 얼굴이 묘해졌다. 낙원이 속으로 웃었다. 상관 계급이 낮게 보였으니 빨리 정정하려고 나선 것까지는 좋다만, 너나 경대 출신이니 계급을 알지 일반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얘기하면 알겠냐.

「보통 수사반장이라고 부르는 계급이 경위죠. 이쪽은 서경위. 저는 김낙원입니다.」

낙원이 싱긋 웃으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여자 얼굴이 굳어졌다. 뭔지는 몰라도 반장급을 턱 끝으로 부리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안 것이다.

「김정애씨.」

낙원이 부르자 바짝 긴장한 여자가 대답했다.

「네.」

낙원이 웃으면서 물었다.

「아까 그 애, 라고 부르시던데. 박목화 말씀하신 게 맞죠?」

「네.」

이번에도 대답은 빨랐다. 낙원의 웃음이 짙어졌다.

「친인척 관계라도 있으신가요.」

정애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지만…….」

낙원이 말을 잘랐다.

「어떤 관계입니까.」

「청주서 만났을 때부터 제가 먼저 누나라고 부르라고, 누나 동생하는 사이로……」

낙원이 웃으면서 말을 잘랐다.

「일반적으로 피 한 방울 안 통하는 사람에게 새로 연 가게를 맡기고 신원 보증을 섭니까.」

「그건 워낙 그 애가…」

또 ‘그 애’ 다. 낙원의 얼굴이 묘하게 비틀렸다.

「교도소에서 자원봉사자와 수감인이 사적인 관계를 맺는 게 금지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전혀 아니에요. 그 애와 저는 단지.」

무어라 여자가 더 말하려는 것을 낙원이 막았다.

「당신 친동생이 박목화와 닮았다는 얘기겠죠. 당신은 박목화가 어렸을 때 돌봐주던 사촌 누나와 닮았고.」

「……!」

여자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 몰랐던 모양이다.

잽이 들어갔다.

다른 여자 대신이라는 걸 좋아할 여자는 없다. 낙원이 웃었다.

「막목화는 북제주군 우도(牛島) 태생입니다. 어렸을 적 서울 둔촌동의 삼촌 집으로 입양되어 자랐죠. 그 집에 있던 딸, 두 살 차이 나는 사촌 누나 박하연씨가 박목화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사촌 누나가 박목화와 절연을 하게 된 이유는 압니까?」

「……모릅니다.」

여자의 대답이 느려졌다.

「박목화가 열일곱 살 때 살인을 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알고는, 있습니다만…….」

신원 보증을 서기 전 전과 서류는 보았을 터였다. 감낙원이 웃으면서 물었다.

「과실치사였다고요?」

「……네.」

「어떻게 죽였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여자가 빠르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긴……」

「죽인 게 박하연씨의 남자친구였다는 이야긴 당연히 하지 않았겠죠.」

여자의 낯빛이 갑자기 분을 한 번 더 바른 듯 하얘졌다.

낙원이 싱긋 웃었다.

「말다툼 끝에 한 대 쳤다. 턱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진술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사인(死因)은 뇌출혈, 과실치사로 판명나 소년교도소에서 1년 6개월 복역했죠. 나와서도 박하연씨와 삼촌댁이 받아주지 않아 시설에서 3개월간 있다가 박광우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YS정부 끝물, 서울시가 마지막 남은 달동네들을 밀면서 용역 철거반을 운영하던 시절이었죠. 철거반 일을 하던 당시 몇 명을 병신으로 만들어놓았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여자가 간신히 말했다. 낙원이 대신 대답했다.

「19명입니다.」

「…….」

「각목과 파이프로 집단 린치 끝에 열아홉 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그 중엔 한쪽 안구가 으깨진 사람도 있습니다.

실명 1, 척추 부상 3, 그 외 장애 판정을 받은 자 15. 어지간한 폭력 사태는 시에서 용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박목화가 폭력 상해로 전과 1범이 된 이유입니다.」

여자는 말이 없었다. 낙원이 이야기를 계속 했다.

「겨우 똘마니 여섯을 데리고 다닐 때에도 박목화는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박광우가 딱지방을 운영하고 부동산 투자를 늘려가면서, 조직 구역이 확장될수록 박목화한테 다친 이들도 많아졌죠. 그러나 이후의 피해자는 합산도 되지 않습니다. 신고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폭력 상해로 전과 2범이 된 박목화의 진술은 이렇습니다. ‘감각이 마비된 상태다. 때려도 찔러도 아프지 않다.’ 실제로 6개월 뒤 나온 뒤에도 그는 전과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행동대장이었죠.」

그런데 달라졌다.

이유가 겨우 너냐. 낙원의 차가운 눈이 힐끗 여자를 훑고 지나갔다. 여자는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3년 전 누구에게 찔렸는지, 이야기하던가요?」

「……모릅니다.」

여자의 입술은 삽시간에 수분이 빠져나간 것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묻지 않았어요…….」

「실제로 찌른 게 누구인지도 저희도 모릅니다. 그가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정황상 지목된 건 한 사람뿐입니다. 바로 박목화를 동양에 거둬들였던 박광우죠.」

네가 그에 대해 도대체 무얼 알고 있나.

뭘 안다고 놈을 돌아서게 했나.

몰아붙인 낙원이 웃으면서 물었다.

「박광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여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조직에 돌아가지 않도록 한 건…….」

「제가 그렇게 한 게 아니에요.」

여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어 그의 말을 끊었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애가 정한 거예요. 제가 만나기 전부터, 그 애는 이미 결심하고 있었어요. 돌아가지 않는다고, 다시는 안 한다고. 그 애가 얼마나 착한 데요, 그 애는,」

여자가 과거는 몰라도 지금의 목화를 믿는다는 소릴 힘주어 하건 말건, 김낙원의 귀에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하나 뿐이었다. ‘제가 만나기 전부터 그 애는 이미 결심하고 있었어요.’

비록 ‘그 애’라는 단어가 거슬리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 순수한 박목화의 의지인 것이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갈 길을 바꿀 놈이 아니지.

그럼 무엇 때문일까. 낙원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순서는 분명해졌다. 놈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나서 여자가 가게를 맡겼다. 꽃집을 하는 이유는 분명해졌다. ‘형님’ 에게 목숨을 바쳤던 놈이니, ‘누님’ 에겐 더 약하겠지.

그러나 진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돌아가지 않는다고 결심한 건 무엇 때문일까. 언제 그렇게 생각했을까? 여자와 만나기 전부터라고 한다면, 3년 전일까……?

찔렸을 때?

역시 박광우에 대한 의리인가. 낙원의 웃음이 싸늘해졌다. 죽여도 칼날을 세우지는 않겠다는 바보 같은 충성이냐. 너는 무슨 송강이고 박광우는 무슨 선조라도 된다든.

배신당해도 그저 좋다니 거 대단한 똘레랑스구만.

「……그 애 보셨다면 아실 거예요. 얼마나 진실되고 착한 애인데요.」

포대기처럼 감싸려 드는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렇지. 박목화를 만나보면 알 일이지.

낙원이 싱긋 웃었다. 그는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만나보죠.」

마치 처음 보러 가는 양, 낙원은 그렇게 말했다. 이미 여자에게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순서를 분명히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여자를 만나러 온 보람은 있었다.

「질문에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순수한 봉사자이신 것을 알게 되어 기쁘군요.」

낙원이 웃으며 한 말에, 여자가 붙잡았다.

「그 애는……」

「당분간 조사할 게 좀 있을 겁니다.」

당분간이라면 얼마나, 라고 여자가 물으려 했지만 이미 김낙원은 가게 문을 나서고 있었다. 서경위가 서둘러 일어나 의자를 정리하고 낙원의 뒤를 쫓았다.

가게 안에서는 여자가 불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걸음 간 뒤에야 서경위가 작게 그를 불렀다.

「경정님.」

「왜?」

낙원이 걸으며 용건을 물었다. 서경위가 항변했다.

「그 열아홉 명은 철거민들이 아니라 구역다툼을 하던 다른 철거반 아닙니까.」

「그래서?」

낙원이 태연히 반문하자 서경위가 잠시 말이 막힌다 싶더니 더 격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박하연씨와 관련된 그 과실치사건(件)은 진상이 밝혀진 사건 아닙니까. 죽은 피해자의 패거리가 여학생들 꼬여다가 집단 성폭행을 하던 놈들이었다는 거요. 박하연씨도 그럴 뻔 했던 걸. 박목화가 먼저 알게 돼서 가서 치고 박다가 우발적으로 죽인 거 아닙니까.

재판때에야 증거가 없어서 외면당했지만, 몇 년 뒤에 다른 피해자 조사하다 얽혀 나오지 않았습니까. 박목화는 그 전까지는 학교에서 꽤 모범적인 생활을 하던 수영부원이었습니다. 오히려 교도소에서 범죄자로 재사회화되어 출소한 경우던데, 어떻게 그걸­……」

「누나한테 집착하다 죽인 것처럼 말하냐구?」

낙원이 웃으면서 되물었다.

「네.」

서경위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사회적응 모범 케이스가 될 정도로 갱생의 길을 열어준 여자한테 박목화를 의심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게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올바르기도 하지. 젊은 놈다웠다. 그래도 여자 앞에선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걸 보면 아주 못 쓸 놈은 아닌 듯 했다.

기특한 마음에, 진실이 뭔지나 가르쳐주지 하고 낙원이 싱긋 웃었다.

「그땐 그게 진실이었잖나? 그 누나와 집안이 박목화를 호적에서 파낼 정도로 말야.」

낙원의 말에 서경위는 조금도 납득하지 못하고 항의했다.

「그래도 진실은……」

「그게 뭐. 지금 박하연씨가 진상을 모르는 것 같아? 그때 피해자 줄줄이 조사할 때 박하연씨도 참고인으로 왔었어. 알았다고 다시 박목화를 집안에 들이던?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는데 조폭된 놈하고 얽힐 것 같아? 일은 이미 그때 끝난 거야. 진실은 그때 판정난 거고.」

서경위는 아무 말도 못했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 말은 한 가득인데, 어떤 면에선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그래도 가슴으로는 아닌 것 같아 볼 가득 항의를 물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저라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서경위가 단호하게 말했다. 김낙원은 피식 웃었다.

「그래, 너 같은 놈도 있어야지. 그래야 일이 돌아가지.」

진심으로 김낙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으므로, 그는 말을 덧붙였다.

「자네가 말했듯이, 뒤집어쓰는 놈은 정해져 있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서경위가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김낙원이 서경위의 소나타 키를 손에 쥐고 흔들고 있었다.

「난 이만, 간다.」

‘경정님’, 이라는 외마디 소리가 나올 타이밍을 놓쳤다. ‘일은 대체 언제 하십니까.’ 라던가, ‘저는 어떻게 돌아갑니까.’,

같은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김낙원이 아니었다. 계단 위로 성큼성큼 올라가는 낙원의 뒤로 모든 항의가 바람에 흩어졌다.

오전근무는 했잖나.

서경위가 들었다면 울화병이 치솟았을 소리를 태연히 지껄이며, 김낙원은 걸어갔다. 이미 3시였다. 빨리 가지 않으면 퇴근 시간 전까지 한 시간도 놈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건 아쉽지.

낙원이 웃었다.

* * *

이제는 짤랑, 하는 종소리가 반갑기까지 했다.

「―안녕.」

「……!」

낙원이 인사를 던졌다. 저번에 방목(放牧)되었던 놈은 역시 긴장을 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꽃더미를 쌓아놓은 테이블 앞에 서 있던 놈의 어깨가 단박에 굳었다. 이제는 안 오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품었다 깨져나가는 게 눈에 읽혀, 김낙원이 싱글싱글 웃었다. 어떻게 하나, 내가 온 건 만우절 농담도 아닌데.

바로 어제 보았는데도 처음인 양 굳는 것 좀 봐라.

이 맛에 낚싯줄을 당길 때 살살 풀어줬다 되감아 올리는 거지.

테이블 위에 꽃을 늘어놓고 한 손엔 가위, 한 손에는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놈에게 낙원이 서슴없이 걸어갔다.

「뭘 하고 있지?」

놈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가 다가가자 놈이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수납통에 치워버렸다. 거꾸로 꽂힌 노란색 가위 손잡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낙원이 싱긋 웃었다.

「오늘은 인사 안 하나?」

항상 ‘어서 오세요.’ 를 들어왔던 김낙원이었다. 자신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너무 빨리 인사한 건 생각하지 않고 박목화에게 따지자, 목화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쳐다보지 않고 인사하면 될 것을, 꼭 몸을 돌리고 마는 건 조직에서 익힌 고질적인 습관 탓일 거다.

그 탓에 ‘싫은 얼굴’이 정면으로 드러났다.

「어서, 오세요.」

「…….」

놈은 저 얼굴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알고 있을까.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침묵했다. 어찌나 끌리는지, 입을 열었다가 놈이 기겁할 찬사가 줄줄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어루만지고 싶다던가, 끌어안고 싶다던가, 혹은 꼬집어서라도 놈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다는 종류의 욕망에 대해서.

‘괜찮습니다.’ 따위는 내뱉지 못할 정도로 혹사시켜, 녹포가 될 때까지 처박고 싶은 하반신의 욕구와도 닮아 있는 욕망이었다.

「안녕.」

낙원이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웃으면서.

「그래서 뭘 하고 있지?」

놈에게 다가갔다. 테이블 앞에 서 있던 놈은 이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리 중입니다.」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내는 데에도 불구하고, 낙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시켰다.

「이제 꽃이 들어왔나 보지?」

「아니오.」

낙원이 계속 쳐다보고 있자 놈이 간신히 설명을 덧붙였다.

「……물에 담갔던 줄기를 잘라 물 빨아올리기 좋게 하고, 잎도 떼어주는 겁니다.」

「그래? 오래된 꽃을 살리는 방법이라…….」

낙원이 담배를 물면서 물었다.

「정애 누님이 가르쳐주던가?」

「……!」

박목화의 얼굴이 변했다. ‘싫은 얼굴’ 따위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던 수동적인 얼굴 따윈 흔적도 없었다. 단숨에 드러난 놈의 진면목은 오로지 찌르고 베기 위해 벼려진 듯한 칼이고 뿔이었다. 칼도 얇다란 샤벨 따위가 아닌, 내려치면 단번에 생사를 가를 듯한 참도(斬刀).

여자의 이름이 놈에가 가져온 변화는 드라마틱했다. 낙원이 웃었다. 속이 비틀린 웃음이었다.

「누님 얼굴 보기 당분간 힘들걸.」

놈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임전태세였다. 한 마디만 삐끗한다면 뒷일은 싹 잊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놈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낙원이 부러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나이는 들었어도 미인이던데. 박하연씨던가? 네 사촌 누나가 여섯 살 쯤 더 먹으면 그런 얼굴이겠어.」

「……!」

박목화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낙원이 놈의 얼굴을 관찰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같이 이야기 좀 했지.」

「…….」

낙원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옛날이야기.」

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낙원이 흘깃 놈의 얼굴을 보고는 첫 입을 댄 뒤 연기를 내뿜었다.

「너도 어지간히 운이 없어. 살인까지 해가며 지켜주려고 했던 사람은 막상 믿어주지도 않아서 버림받고.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못 돌아가고. 십년 넘게 몸 바쳐 도왔던 형님은 자기가 급해지니까 네가 뭐라도 불까, 못 믿어 도마뱀 꼬리 자르듯 잘라버리지를 않나.」

연기가 잠시 박목화의 얼굴을 덮었다. 매울 텐데도 놈은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김낙원은 놈의 눈을 보면서 천천히 물었다.

「사실은 무섭지? 김정애도.」

박목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쥔 놈의 주먹이 대답을 대신했다.

「언제 버림받을까. 너도 모르는 네 놈의 본성이 드러나서 무 자르듯 단칼에 관계를 정리당하면 어쩌나. 아직까진 잘 해주고 있으니 좋다가도 불안할 거야. 박하연씨 이름 하나에 ‘정애누님은 내가 지킨다.’ 고 달려들려던 네가 하얗게 질리는 걸 보면 뻔한 거지.

내가 뭘 어떻게 이야기를 했을까. 김정애가 너를 이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무섭지?」

김낙원이 한 발짝 다가섰다. 여유만만한 그의 태도와는 반대로 박목화 쪽은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깍지까지 허옇게 튀어나올 정도로 쥔 주먹을 쥐고 또 쥐었을 뿐이다. 지하철 바람조차 이길 정도로 매일매일 산세베리아를 반들반들하게 닦아가며 지키고 있던 꽃집이 약점인 게 아니었다. 놈의 약점은 그렇게 가게를 하게 만든 정애고, ‘누님’이었다.

「김정애는 당분간 안 와.」

「……!」

낙원의 말에 놈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다 아래로 내려갔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에 깨진 유리 같은 허탈감이 삐죽이 낯을 들이밀었다.

낙원이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진실과 섞인 거짓을 입에 담았다.

「걱정 마. 아직 다 이야기한 건 아니니까. 조사 중이라고 해서 오지 않는 것뿐이야. 아직은, 말이지.」

여자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은 서경위 말을 따르자면 ‘진실’이었다. 그러나 낙원은 그런 말 따윈 당연히 하지 않았다.

흘깃 본 놈의 어깨가 다시 내려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안심한 모양이다.

여자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가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다는 게 약점이라는 건, 꽤나 기운 빠지는 일이었다. 차라리 사랑 타령하는 남녀 관계라면 낫다. 이해나 간다. 그러나 ‘형님’과 똑같이 ‘누님’ 하고 있을 놈의 오지랖에 그 여자와 성적인 관계가 있을 리 없었다.

그게 외려 더 불쾌했다.

낙원이 놈의 바로 옆에 섰다. 놈이 긴장했다. 그러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낙원이 놈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놈이 흠칫했다. 단단한 복부가 셔츠 위로 만져졌다. 손바닥의 체온에 적응을 한다 싶자 노골적으로 성적인 낌새를 띠고 낙원의 손이 아래로 더듬어갔다.

「……!」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놈의 입에는 다시 미끼가 물려 있었다. 전에 문 보호관찰보다 더 강력한 미끼가.

다른 한 손으로 담배를 물고 있던 김낙원이, 잎에 담배를 물며 연기를 내뿜었다. 후, 입김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변환되어 놈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하얀 거즈를 붙이고 있었던 놈의 귀에는 딱지가 얹어져 있었다.

자신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날, 그가 직접 찌르던가?」

김낙원이 두 번째로 물었다. 처음 놈을 엎칠 때 던졌던 질문이었다.

박목화는 대답하지 않았었다.

「…….」

이번에도 말은 없었다. 그러나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쥔 놈은 고개를 저었다. 3년 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공판을 치뤘던 놈이, 세 번째 찾아온 그에게 이 정도나마 대답을 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삼고초려(三顧草慮)지, 삼고초려.

김낙원이 진심으로 즐겁게 웃었다. 세 번씩이나 찾아왔음 뭐 나오는 게 있어야지. 아무리 박광우의 뿔이라도, 뽑아 가면 그만 아니겠어.

김낙원이 웃으면서 뒤에서 안은 자세로 놈의 배를 더듬었다.

그리고 한 순간, 김낙원의 손이 벨트에 걸쳐진 옛 상처를 찾아내어 눌렀다.

「……!」

「그럼 누가 했지. 지금 너 대신 일하고 있는 김원일이?」

낙원이 웃으면서 물었다.

「너, 이 바닥 처음 뛰어들 때부터 똘마니 여서 데리고 일하지 않았어. 그 중에 하나였나? 보통 가깝지 않으면 네가 연장을 맞을 리 없잖아, 안 그래? 같이 일해오던 너보다 박광우 안위가 더 중요해서, 아니면 박광우가 보상할 뭔가가 탐나서 널 찔렀나?」

김낙원의 말을 예리한 칼 같았다. 다 꿰맨 수술자국을 올올이 뜯어 배를 도로 난도질하듯 묻는 질문에 놈이 부르르 떨었다. 인내의 한계에 달한 것이다.

낙원이 웃으면서 담배를 끼운 다른 한 손으로도 수술자국을 어루만졌다.

「참을 필요 없어, 말만 해. 이미 널 찌른 놈인데 혼자 의리 지킬 필요는 없지. 누구야? 그때 뭘 하고 있었길래 박광우가 그렇게 몸을 사렸어?」

피할까, 주먹을 휘두를까, 아니면 뭔가 토해낼까. 우리까지 몰아넣은 김낙원이 즐겁게 놈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딸랑.

뜻밖의 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저기 꽃 좀-……」

낙원도, 놈도 같이 돌아보았다.

어색하게 들어온 40대의 아저씨였다. 손님을 본 놈이 낙원에게서 돌아섰다.

「어서 오세요.」

인사가 가게 안을 울렸다.

꽃집에 들어왔는데 커다란 남자 둘이 있자 손님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입으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남자가 하네.’

놈이 한 걸음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는 특별히 손을 들어 놈을 제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놈은 아주 쉽게 그에게서 떨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러나 쉽게 떨어진 만큼 놈은 손님에게로 다가가면서도 계속 이쪽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게 눈에 보여서, 낙원에 뒤에서 싱긋 웃었다.

담배가 필터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낙원이 책상 옆면에 대고 담배를 비벼 껐다. 회색 연기가 작게 오르다 재를 흘리고 사라졌다. 놈이 손님을 어떻게 대할까. 그 점에 흥미가 생긴 것뿐이었다. 손님이 간 뒤에 다시 물어도 늦지는 않으리라, 낙원이 의자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앉았다.

꽃 냉장고 앞을 서성대며 그를 힐끔힐끔 보던 아저씨 소님이, 박목화가 다가서자 고개를 들었다.

「어떤 꽃을 찾으십니까.」

「뭐, 아니, 저……」

당화하는 게 당연했다. 말을 잘 잇지 못하는 손님을 보고 뒤에 앉아 있던 낙원이 속으로 웃고 말았다. 어떻게 대하는지 한 번 보자 했더니, 볼거리는 처음부터 제공하는 셈이었다.

대체 저 정중한 말투는 뭐냐.

어느 꽃집에서 ‘…십니까’ 따위의 말투를 쓰겠냐. 90도 절만 안 하지, 꼬붕이 쓰는 말투 그대로였다. 아지 사회 물 좀 더 먹어야겠어. 낙원이 속으로 혀를 차며 웃었다.

당화하던 아저씨가 꽃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장미 같은 걸로……」

그러나 손님 쪽도 결코 손님답지는 않았다. 장미면 장미지. ‘장미 같은’은 또 뭐냐. 꽃이라면 장미밖에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손님도 우습긴 매한가지였다. 어쩐지 손님 구격이 재밌어진 낙원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래도 놈은 ‘장미 같은 꽃은 뭡니까’라고는 묻지 않았다. 참을성 있는 태도로 꽃 냉장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골라보십시오.」

그러자 아저씨가 한참을 서성대더니 결국 다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문 앞의 결정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한 다발만 해주쇼.」

어처구니없는 주문이었다. 뭘 어떻게 한 다발을 해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만일 낙원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이 손님 같지 않은 손님에게 한 마디 했을 터였다.

그러나 놈은 인숙하다는 듯이 물어보았다.

「한 다발이면 몇 송이를 넣어드릴까요.」

전부터 느꼈지만 인내심만큼은 대단한 놈이었다.

그러나 이미 손님이기를 포기한 아저씨는 그저 손을 휘휘 내젓고 말았다.

「아 그냥 만원. 만원에 맞춰서 알아서 해줘요. 저기 뭐야, 빨간 장미에 안개 같은 것도 좀 넣어서……」

빨간 장미와 안개라니. ‘그냥’ 치고는 최악의 선택이다.

낙원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누가 그런 꽃다발을 가지고 다니기만 해도 비웃을 마당에, 눈앞에서 그런 꽃다발을 주문하는 사람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 어느 여자한테 가도 딱지 맞을 조합이야. 어지간하면 다른 거 하지 싶었지만, 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냉장고 안에서 그 두 가지를 꺼내들고 있었다.

꽃을 보기만 해도 더없이 촌스러웠다.

저놈의 최소한의 미의식도 없는 걸까. 꽃집 주인이 되어서 손님에게 다른 꽃을 권하는 센스도 없는 거냐.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 채 그 혐오스런 조합을 포장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그는 기묘한 것을 보았다.

놈이, 땀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

날은 결코 덥지 않았다. 4월이 되자 날씨가 달력을 읽기라도 하는 양 추위를 거두긴 했어도, 빈말로도 덥다고 할 수 있는 날씨는 아니었다. 그나마 봄다운 온기도 바깥에 나가 햇빛을 받을 때나 느끼는 거지, 지하철 역사 벽을 한쪽 벽으로 사용하고 있는 꽃집에는 싸늘한 공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놈의 이마에선 구슬진 땀이 맺히고 있었던 것이다.

손님도 그 광경을 본 모양이었다. 벌써부터 만원을 꺼내들고 왔다 갔다 하던 손님이 놈에게 물어보았다.

「덥소?」

「아닙니다.」

꽃다발에 하얀 한지를 대고 있던 박목화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자 아저씨가 희한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꽃 포장도 보기보다 힘든가보네, 이 날씨에 땀까지 흘리고……」

「……아닙니다.」

그러나 정답이라고, 놈의 얼굴은 말하고 있었다.

이 날씨에 땀 흘리던 이유가 그거였나.

갑자기 웃음이 치밀어 올랐다.

철거반 시절엔 한번 떴다 하면 구역다툼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른 철거반이 도망갔다는 전설의 박목화였다. 여섯 달씩 살고 나올 때마다 아래 있던 똘마니 숫자가 십 단위로 달라져, 나중엔 경찰 기동대만한 수십 명의 숫자를 데리고 다니던 행동대장이었다. 형사들조차 세 명 이하의 인원일 때에는 그저 모르는 척 지나쳐야 했던 동양의 ‘미친뿔’, 형님 중에 형님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지금도 그 세계에서는 우상이라는 박목화가.

바로 그 박목화가 꽃포장 하나에 구슬땀을 흘린다.

빽계(백계, 경찰계)건 묵계(조폭계)건 믿지 못할 이 일에, 낙원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낙원은 결국 의자에서 일어났다. 소리를 참아도 플라스틱 의자가 삐걱대는 바람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불편하던 참이었다. 어떤 포장이길래 구슬땀을 흘리나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낙원은 웃음을 속으로 누르고 일어나 놈을 구경했다. 자신이 일어난 걸 알았을 텐데도, 놈은 꼼짝도 하지 않고 여전히 구슬땀을 흘려가며 포장에만 온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포장은 무척이나 평범했다.

정성스레 놀리는 놈의 손과 꽃다발을 몇 번 번갈아 쳐다본 낙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빨간 장미에 안개 넣은 촌스러운 꽃다발에, 철사 끈 좀 매고 하얀 한지 대고 돌리면 끝나는 이 촌스러운 포장이 뭔가 그리 어렵다고 땀을 흘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포장지 색깔을 고민하기를 하나, 주름이라도 창의적으로 잡기를 하나, 어찌나 정성 들여 한지 두 장을 엇대어 대고 마를 두르는지, ‘뭘 해도 마찬가지’ 라는 말 한마디를 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게 아주 고문이었다.

리본까지 대는 데에는 족히 10분 넘게 걸린 듯 하다.

주물러 터뜨렸겠다 싶은 꽃다발을 받아든 손님이, 놈에게 돈을 건네 뒤에도 애매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자기가 말해놓고도 역시 저 촌스러운 꽃다발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일 테지. 낙원이 막 그렇게 단정 지었을 때였다.

우물쭈물하던 아저씨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낙원이 상상할 수 없었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거, 비닐봉지 좀 주쇼. 꽃 좀 넣어가게.」

「……!」

그는 잠시 놀라 자기도 모르게 손님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부끄러운 조합이라도 해도 그렇지, 포장한 꽃다발을 비닐봉지에 넣어가겠다는 건 무슨 발상인가.

그러나 놈은 당황하지도 않고 태연히 응대하는 것이었다.

「검은색으로 드릴까요?」

이제 보니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음식물 쓰레기인 줄 아느냐, 하고 비꼬는 것이다. 낙원이 자기답게 판단하곤 놈의 단수를 속으로 한 단계 높여 생각하려 했을 때였다.

그의 판단은 도 한 번 아무렇지도 않게 깨어졌다.

놈의 말에 손님이 반색을 하며 좋아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럼 더 좋지.」

놈은 비꼰 것이 아니었다.

「네.」

옆에서 마치 이럴 때 슨다는 양 놈은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를 꺼내들었다. 낙원은 침묵했다. 정말로 꽃다발을 봉지에 넣고, 그나마다 보이면 안 된다는 양 꽁꽁 위를 싸매서 받아든 아저씨가 마음을 좀 놓았다는 듯 꽃집을 나섰다.

「많이 파쇼-.」

아저씨의 인사가 꽃집을 울렸다.

컬쳐 쇼크라는 게 무엇인지 이제야 알 거 같았다. 그 자리에 잠시 가만히 서 있던 낙원이 놈에게 따지듯 물었다.

「저렇게 꽃을 비닐에 싸가는 사람도 있나?」

상식이 깨진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낙원의 머릿속엔 아까까지 했던 다시 담배를 피울 거라는 생각이라든가, 구슬땀 흘리던 놈을 비우어야한다는 마땅한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오로지 마지막의 검정 비닐봉지만이 뇌리에 남았을 뿐이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든 목화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답해주었다.

「꽤, 있습니다.」

「꽤?」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꽤’ 있단다.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바닥에 흩어진 꽃줄기를 쓸어 담던 박목화가 잠시 손을 멈추고 한 번 더 대답해주었다.

「신문지에 싸가는 사람도 있고요.」

「포장한 걸?」

낙원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되묻자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도대체 왜……?」

놀라운 이야기였다. 새로운 사실이었다. 동시대의 대한민국 서울에서 이런 컬쳐 쇼크를 받을 줄은 몰랐다. 다른 방향의 정보긴 해도, 이 누추한 꽃집에 세 번씩이나 온 보람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김낙원이 낮게 소리를 지르자 다 쓸어 담은 박목화가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다시 구서에 놓더니 대답했다.

「쑥스럽다고 하더군요.」

쑥스럽다니, 대체 뭐가?

낙원이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설마 여자에게 꽃을 주는 게 쑥스러워서, 신문지에 싸고 검정 비닐에 넣는다는 더 부끄러운 짓을 벌인다는 건가?

「하기야 빨간 장미에 안개 꽃다발이라니 수치스러울 만도 하지.」

낙원은 자기 나름대로 판단한 뒤 중얼거렸다. 부끄러운 건 알아서 다행이군, 스스로의 확신을 더할 때였다.

그 소리를 들은 박목화가 피식 웃었다.

「제일 잘 나갑니다.」

「……!」

낙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물론 그 촌스런 조합이 제일 잘 나간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도 그를 입 다물게 하기엔 충분했지만-.

결정적인 건, 놈이, 웃었기 때문이다.

……웃을 줄도 알았던가.

그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힐끗 놈을 쳐다보았다. 신기했다. 놈이 웃을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못 견디게 이상하고 신기했다.

그리 환하게 웃은 것도 아니었다. 일상에서 얼마든지 보일 수 있는 실소(失笑)에 불가했다. 아무리 굳은 얼굴만 하는 놈이라도, 안면 경직증이 아닌 이상엔 아무렴 평생 동안 웃어본 적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신기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굳어 있던 이목구비가 한 순간 볼만하게 형체를 바꾼다는 것이.

입도 눈꼬리도, 시원하게 일그러진다.

……사내자식 웃는 얼굴이 눈에 박혀온 건 처음이었다.

아마 놈의 굳은 얼굴을 어떻게든 일그러뜨리고 싶었던 최초의 욕망이, 생각도 하지 못한 형태로 실현되는 바람에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납득시킨 김낙원이 담배를 물었다.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놀랄 필요가 전혀 없었다. 불을 붙이면서 낙원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무렴, 언제든 놈도 웃고 산 적이 있었겠지.

그런데 놈이 언제 웃었을까.

어머니처럼 졸졸 따랐다는 박하연 앞에서, 목숨 바쳐 따르던 박광웅 앞에서? 그리고 누님이랍시고 따르는 김정애 앞에서는-.

낙원은 생각을 멈추었다.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놈이야 웃었건 울었건 무슨 상관인가. 아니, 울었을 리도 없지, 울 때가 되면 놈은 그저 뭍에 끌려나온 물고기 비늘처럼 굳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을 테니.

그리고 그런 것 따윈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어쩐지 담배가 당기지 않았다. 불을 붙이려던 김낙원이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다. 단지 자신은 신기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봐온 놈의 얼굴이 내내 입 다문 굳은 얼굴밖에 없어서, 아마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손님이 온 건 처음이군.」

낙원이 중얼거렸다.

놈은 어제 웃었냐는 듯 평소의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저 얼굴만 백날 보느니, 손님 왔을 때 놓아주고 보길 잘했다고 낙원은 생각했다.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지 않았나. 낙원이 자신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피아제가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퇴근 시간은 삼십 분 남았다. 문득 배가 고팠다.

「밥 좀 시켜봐.」

「……?」

낙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에, 박목화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낙원이 뭘 보냐는 듯한 얼굴로 되풀이했다.

「밥 시키라고.」

설마 여기서 먹고 갈 거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당황해서 쳐다보는 박목화에게, 낙원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뒤로 손님은 둘이 더 왔다.

아주 안 되는 꽃집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아저씨 같이 웃기는 손님은 더 이상 오지 않았지만 포장할 때마다 박목화가 땀 뻘뻘 흘리는 건 똑같았다.

편한 의자를 찾는 그에게 박목화는 리본대 안쪽을 가리켰다. 잠시 뒤에 앉았던 낙원이 의자에 걸려 있던 놈의 겉옷을 보고 웃었다. 하야나 셔츠를 단정하게 입은 놈의 겉옷은 잠바였다. 그것도 어디 공사장에서나 입을 것 같은 검은 잠바.

거기에 잠심 파묻혀 있던 낙원은 곧 바깥으로 나왔다. 리본대 뒤도 나름 어둡고 편했지만 이런 구경거릴 놓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김낙원은 놈을 시켜 팔걸이의자를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뒤로 들어가는 통로를 의자로 막고 책상 옆에 다리를 꼬고 앉은 김낙원은, 손님들이 어떻게 쳐다보건 자신의 편안한 자세를 고수했다. 자신이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긴장이 되는지 놈이 흘리는 땀이 비지땀이 되어갔다. 그런 놈을 낙원은 빙글빙글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되도록 이쪽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놈이 두 번째 손님의 꽃다발을 한창 만들고 있을 때였다.

책상 위 충전기에 꽃혀 있던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곁눈질로 놈을 본 김낙원이 손을 뻗었다. 딸깍, 하는 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핸드폰을 집어든 그의 눈이 액정에 뜬 이름을 훑었다.

‘누나.’

놈이 입력시킨 것 같지는 않았다. 닭살 돋는 호칭에 누군지는 금방 알았다. 김정애다.

당분간 조사를 받을 거라는 말에 경찰이 갈 때를 어림잡아 전화를 걸어보았을 것이다. 저녁마다 여기에 들러본다고 했으니, 오늘 저녁에는 가도 되는 건가 가늠하려 하는 것일 테지.

낙원이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핸드폰 옆면의 화살표 버튼을 눌렀다. 몇 초 누리지 않아 부르르 떨리던 핸드폰이 부재중 모드로 전환되었다. 여자의 전화가 끊기기를 기다린 김낙원이 소리 없이 폴더를 열었다 다시 닫았다.

액정에 떠있던 ‘부재중 통화’와 여자의 이름이 사라졌다.

김낙원이 팔을 뻗어 핸드폰을 다시 충전기에 꽃아 넣은 뒤에야, 꽃 포장이 끝난 박목화가 고개를 들었다.

「이만원입니다.」

목화가 손님에게 돈을 받아들었을 때에는, 김낙원은 태연한 얼굴로 다리를 꼰 채 팔걸이의자에 편하다 못해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뒷정리를 하기 전 문든 놈의 눈이 벽에 걸린 시계를 스쳐지나갔다.

낙원이 모르는 척 물었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나?」

약간 초조해 뵈던 놈의 얼굴이 시계를 보고는 안심과 뒤섞인 허탈함으로 바뀌는 것을, 낙원은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막상 김정애가 오면 자신과 마주칠 게 걱정되면서도, 오지 않는 게 또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섭섭할 것이다. 그렇다고 놈이 먼저 전화를 걸어 볼 수 있는 성격은 또 아니었다.

아니까 전화를 막은 거다.

낙원이 싱긋 웃으면서 말을 던졌다.

「배달이 늦는데.」

백반을 시킨 지 확실히 시간이 좀 지나 있었다. 그때였다. 그 말을 듣기라도 한 양 가게 문이 활짝 열렸다.

「총각, 배달 왔어-.」

딸랑거리는 종소리마저 덮을 정도로 소리를 내며 밥집 아주머니가 커다란 쟁반을 머리에 이고 들어왔다. 멀뚱하게 앉아서 쳐다보는 김낙원과는 대조적으로, 서 있던 박목화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키 작은 아주머니가 머리 위에서 쟁반을 채 내릴 새도 없이 받아들었다.

성큼성큼 돌아와 책상 위에 올려놓는 건장한 몸집의 놈에게 낙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놈이 약한 타입을 알 것 같았다. 연상의 여자다.

고맙다는 등 너스레를 떨던 아주머니가 박목화가 돈을 주려하자 손사래를 쳤다.

「아냐, 돈은 나중에 그릇 가지러 올 때 줘, 꽃집 총각.」

‘꽃집 총각’

들어본 놈의 별명 중 단연 최고였다. 오늘 이 곳에서 받는 몇 번째인지 모를 컬쳐 쇼크에 김낙원이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그러나 찌개에 덮인 랩을 벗기는 놈의 얼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익숙한 모양이었다.

이 안에서는 그렇게 통하려니, 웃음을 누른 김낙원이 납득하려 할 때였다. 둘 중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소리를 밥집 아주머니가 태연히 하고 나갔다.

「총각 친구 온 건 처음 보네, 잘 먹어, 나 갈게-.」

……친구? 누가?

놈이 더 놀란 모양이었다. 딸랑, 종소리가 울리고 유리문이 닫힐 때까지 놈은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김낙원이 웃고 말았다.

「먹어.」

나름 편안한 자세를 찾은 김낙원이 책상 앞에 앉아 밥을 한 숟갈 뜨며 말했다. 그러나 막상 랩을 다 벗겨놓은 놈은 옆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아까 시킬 때에도 일인분만 시키려고 했던 게 떠올라, 김낙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유치장에 있는 놈들도 자기 집어넣은 형사랑 밥 잘만 먹던데. 밥 먹는 걸 갖고 뭘 내외하고 그래?」

낙원의 말을 대놓고 거부할 수는 없는 놈이 결국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로 처박은 채 말 그대로 밥만 먹기 시작했다. 밥 한 숟갈 뜨고, 밑반찬 한 숟갈 뜨고, 다시 밥을 뜬다.

교도소 밥처럼 먹는 모습에 낙원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놈이 그토록 열심히 먹는 백만의 반찬에 젓가락을 가져다댔다.

잠시 후엔 찌개를 한 모금 떠서 먹었다.

「…….」

이래서 같이 먹지 않으려고 했던 건가.

낙원이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가만히 놈을 쳐다보았다. 놈을 우습게보고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찌개는 미원 투성이에 반찬은 짰다. 배달집치고 심각하게 간이 안 맞는 음식이었다. 일부러 이런데서 시켰나 싶어 쳐다보았지만, 놈은 그가 쳐다보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먹고 있었다. 미각도 아직 사회화가 덜 된게 아닐까.

정말 먹을만 하냐고 심각하게 물으려다, 낙원은 생각을 바꿔 싱긋 웃었다.

「내 몫까지 먹도록.」

그리고 낙원은 일어났다.

여자도 못 오게 했으니 오늘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리본대 위에 걸쳐놓았던 양복 자켓을 입고 나가는 낙원의 뒤에서, 왜 이인분 씩이나 시켰는지 이해하지 못한 박목화가 잠시 숟가락을 멈추었다.

낙원이 문든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는 놈이 다시 수저를 집고 있었다. 먹으라고 하지 않아도, 누가 먹던 밥이건 목화의 상식으로는 밥을 남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원이 한 말은 목화가 잠시 수저를 입에 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구. 그 날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는 들어야 하지 않겠어? 네 똘마니 여섯인지, 아니면 박광우 본인인지 말야.」

그리고 최후로 밥 얹힐 소리를 한 낙원이 태연히 손을 흔들었다.

벌써 저녁이었다.

야근 수당도 못 받는 일은 너무 열심히 했지.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낙원은 웃으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

전화를 받지 않는다.

벌써 15분이 지나도록 전화가 걸려오지도 않았다.

정애는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설마 이 시간까지 조사를 받고 있는 걸까.

설마, 싶었지만 그러지 않다면 다시 전화를 주지 않은 동생이 아니었다.

경찰이 말한 '당분간'의 기간이 어느 정도일지 알 수가 없었다.

정애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아무 연관도 없는 봉사자라는 걸 알아서 기쁘다는 둥 하고 간 걸 보면, '당분간'은 동생 쪽에 나타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너무 애매한 말이다.

기간이라도 제대로 알면 좋을 텐데, 답답하고 심란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주일만 뒤에 연락해보자.

한숨과 함께 정애가 결정하곤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가게는 이미 다 정리한 뒤였다.

근조화환을 취급하는 겅애의 가게에서는 여섯시가 지나가면 소매로 꽃바구니나 파는 게 전부였다.

자신이 굳이 남아있을 필요도 없었다.

「갈게.」

알바생 지영이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2호 사장님한테 안부 좀 전해주세요.」

당연히 그리로 가는 줄 아는 지영에게 무어라 더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속으로 잠시 한숨을 내쉰 정애가 앞치마를 벗어 넘겼다.

「오늘 분 입금하고 와. 입증금 까먹지 말고.」

「네-.」

항상 하는 일이었다.

지영이 돈 들은 앞치마를 넘겨받고 뛰어갔다.

정애는 가게를 돌아보며 비어있는 곳마다 아까 꽂아두었던 꽃바구니를 가지고 나와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몇 개의 발걸음이 섞인 소리에 정애는 잠시 시든 꽃바구니를 가지고 들어가려던 손을 멈추었다.

지하상가까지 울리던 소리가 몸집을 드러낸 건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검정색 두구 몇 개가 계단 아래로 내려섰다.

잠시 정애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건장한 '어깨'가 계단 앞에 있는 꽃집까지 오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몇 명인지도 모를 검정 옷들에, 자신이 목표라는 걸 정애가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핸드폰을 가게 안에 뒀다는 건  뒤늦게야 깨달았다.

정애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뇌리에 스쳐지나간 건. '당분간' 만나지 못하리라 여겼던 동생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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