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골목
……형님, 광우 형님.
검붉은 밤의 기억이 파도처럼 흘러넘쳤다. 하얗게 이는 포말 하나없이 막막하게 검은 어둠속으로, 목화는 머리끝부터 잠겨들었다. 배에서 흘러나온 끈끈한 아픔이 먹물처럼 풀려나갔다. 허우적거려봐도 잡히지 않는 사람의 마음처럼.
'형님, 저는.'
목화는 마음속으로 광우에게 속삭였다. '저는……,' 그러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믿는 데에도, 믿음이 깨어지는 데에도 너무나 수없이 많은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서, 어떤 말도 이 물속에선 지푸라기가 되어줄 것 같지 않았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이유도 기준도 없는 것 같았다. 어리고 약해도 총칼만 들면 사람을 죽일 수 있고, 강하고 단단해도 배에 칼 들어찰 구석이 없는 건 또 아니었다.
숨이 차 왔다.
「…….」
목화는 퍼뜩 눈을 떴다. 새벽 5시였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그는 시간을 알 수 있었다. 근 3년간 지켜야 했던 기상시간은 군대처럼 그를 훈련시켜놓았다.
전깃줄에 몇 달 매달려 있던 주황빛 백열등처럼 희미하게 여명을 밝혀오고 있었다.
몇 번을 숨을 거칠게 내쉰 뒤 목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씻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항상 해왔던 대로 면돌르 한 뒤 몇 번 물을 끼얹었다. 머리를 털 땐 머리카락의 물기와 함께 밤도, 꿈도 떨쳐낸다. 셔츠를 칼라까지 빳빳하게 다릴 때에는 이미 머릿속을 깨끗이 비운 뒤였다.
아침식사는 냉장고에 얼려두었던 밥과 누님이 가져다준 반찬 두어개로 마쳤다. 식단은 교도소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를 닦는 순서까지 같았다. 다른 거라곤 씻은 그릇을 개수대에 올려놓은 뒤 다림질을 마친 셔츠와 바지를 입는 정도다.
그래도 출근 준비라는 점이 조금, 달랐다.
전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시간에는 무가지도 잘 나누어주지 않았다. 전철에 실려 가는 40분 동안 목화는 대부분 문 앞을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리고 우연히라도 아는 사람과 마주칠 리 없는 공간에서, 역시 혼자타는 이들의 편친 조간신문의 헤드라인을 천천히 읽곤 하는 것이었다. '과연 손을 잡을 것인가, 권의원과 노당수', 'GNP… 돌파', '…억대 사기 벤처 이사, 해외 도피 끝에 잡혀.'
하얀 등이 커진 동굴과 승강장이 반복되는 동안, 그는 한기(寒氣)처럼 엄습한 혼자라는 감각을 어깨를 움츠렸다 털어냈다. 목화는 그렇게밖에 견뎌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가게가 있는 지하철역에 도착한 건 6시 10분이었다.
이미 지하상가의 가게들은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에 그가 목례를 하고 지나가려 했을 때였다. 석봉 토스트를 굽기 시작하던 아주머니가 그를 불렀다.
「꽃집 총각-. 우유라도 먹고 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에 박목화는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석봉' 아주머니의 호칭이건 호의건 감시 그가 거절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걸, 목화는 아직도 잘 몰랐다. 가판대 뒤에서 달려 나온 석봉 하주머니가 그의 손에 따끈한 베지밀을 쥐어주었던 것이다.
「혼자사는 총각이 뭘 먹었겠어. 매일 이 시간에 나오면서 속도 안쓰려? 자, 이거라도 먹어, 응?」
말주변이 없는 목화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베지밀을 가판대에 올려놓으려 했을 때였다. 그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통로 반대편에서 샌드위치를 파는 아주머니가 식빵을 꺼내던 와중 앞치마를 입을 채로 휘적휘적 건너왔다.
「아따, 수원댁도. 베지밀 하나로 꽃집 총각 손까지 잡아보다니 너무 싼 값 아녀?」
그리고 샌드위치를 다른 손에 억지로 쥐어주려는 걸 목화는 간신히 사양했다.
'괜찮습니다.'
그는 이 말만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간신히 지하상가를 빠져나왔다. 박목화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물 몇 번 떠다주고 전기 배선이나 가끔 들여다 봐주었을 뿐이다. 그런 것으로 받는 호의로는, 과분했다.
꽃집에 도착한 건 여섯 시 10분이었다.
지하철 입구로 올라오자 3월인데도 아직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목화는 가게 문을 열고 천천히 화분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으면 정애 누님이 꽃을 보내올 것이다. 그럴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렸지만, 고속터미널에서 십년 넘게 장사해온 정애누님을 그가 당해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어차피 떼어오는 거 새벽에 보내주는게 뭘 대수냐. 네가 가서 꽃값도 흥정하지 못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그저 받기만 해서 죄송하다는 말 외엔 할 말이 없었다. 과분했다. 모두 좋은 사람들 뿐이었다. 아까 지하에서 장사 잘 하시라고, 정애누님이었다면 틀림없이 했을 인사를 해주고 오지 못한 게 생각났다. 목화는 화분 옮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물이나 한 번 더 떠다주자.
지하철로 사람들이 빠르게 걸어들어갔다. 출근이 시작된 모양이다. 이맘때쯤 뛰어오던 알바생 아가씨가 생각나 그는 피식 웃었다. 누님에게 혼날 거라고 그러더니, 지금은 누님 밑에서 괜찮을까. 그러나 아가씨가 더 이상 오지 않게 된 이유를 떠올리자 그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화분을 다시 내놓으려 허리를 굽혔을 때였다.
문득 그의 앞에 그림자가 졌다.
「……!」 아침 햇살을 뒤로 한 긴 그림자가 눈앞에 떨어진다. 검은 그림자 속에서 목화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 물었다. 잠시 후에는 어떤 동요도 드러내지 않은 단호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목화는 고개를 들었다.
「…….」
「총각, 오늘도 일찍왔네-. ……왜 그래? 눈 부셔?」
다가온 것은 요구르트를 파는 아주머니였다. 언제나 보던 챙 달린 모자와 노란 옷에, 목화는 고개를 숙여 목례했다. 어깨에서 소리없이 힘이 빠져나갔다.
「있다가 태양 여행사랑 같이 점심 먹을 건데, 그때 나 짐 좀 봐줘.」
「……예.」
'총각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하고 아주머니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지만, 목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차마 강권할 수 없었던 요구르트 아주머니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꼭 챙겨 먹어. 누나도 걱정하던데.」
「……예.」
고맙다고 목화가 덧붙이는 사이, 이미 요구르트 아주머니는 지하철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지하철 계단 위로 요구르트 카트를 끌어올려주었다.
「그럼 난 지하 갈게-…….」
예, 그의 대답은 역시 안쪽으로 흩어졌다. 가게 쪽으로 돌아오면서 목화는 잠시 숨을 골랐다. 긴장할 것 없더고,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다음에는 형사가 올 거다. 그 일은 그저 두들겨 맞은 것뿐이라고.
그러나 놈이 다시 온다면.
목화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내쉬었다. 직급이 높으니까, 놈이 직접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다.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하자. 마음 한 구석의 불안을 외면한 채, 목화는 화분을 꺼내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햇빛이 쫓아오고 있었다.
* * *
「어이, 최검.」
김낙원은 복도에서 태연히 평검사(平檢士)인 친구를 불렀다. 창문을 열고 등 돌리고 서있던 최동훈이가 품위 없게도 캑, 하는 소리를 내더니 뒤돌아 보았다.
「…너구나.」
안도의 숨을 내쉰다.
30줄에 들어선 법대 동기의 얼굴을 보고 김낙원이 물었따.
「어째 요즘 너 얼굴이 빵빵하다?」
질문의 답은 이미 놈이 화장실 안의 고등학생처럼 캑캑거렸을 때부터 나와있었다. 김낙원의 시선이 최동훈의 손으로 옮겨지가, 최검은 재빨리 들고있던 담배를 화분에 꽂아 넣고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요즘 흡연이 인사고과에 반영되어서 말이야. 담배를 끊으려니 갑자기 살이 오른다 야.」
사시 합격이라고 알아주는 것도 바빠서 발 디딜 틈도 없는 바깥에서의 이야기이다. 이 건물 안에선 똑같이 사시패스한 놈들이 연줄과 고과에 목숨을 걸었다. 평검사한 지 5년째. 위에 아무 연줄도 없는 최동훈이가 슬슬 부장에게 쪼일 때도 되었지.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안도를 한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넌 그 공부를 하고 들어가서 마음대로 담배도 못 피우냐?」
김낙원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담배를 꺼내물자, 최동훈이 검사의 체면을 버리고 억,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사탕뺏긴 아이의 표정이었다. 김낙원은 쯧. 하고 소리내어 혀를 차곤 호주머니에서 박하사탕 하나를 꺼내 던져주었다.
「금연자는 이거나 먹지.」
아님 피울래? 라는 듯이 짐짓 한 개비를 꺼내 내밀자 최동훈은 맥없이 무너졌다.
금연자가 지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안주삼아 김낙원은 천천히 담배를 음미했다. 복도로 내리쬐던 4월의 햇살이 담배연기에 회색으로 얼룩졌다.
「넌 딴 길로 빠진 놈이 대체 왜 자꾸 오냐?」
최검이 억울한 마음을 담아 묻자, 낙원은 말없이 뒤편의 회의실을 가리켰다. 회의실에 걸린 팻말에는 하얀 글씨가 쓰여 있었다.
'합동수사부'.
「……에이씨, 내가 저놈의 함동수사부에 사법경찰관 좀 빼달라고 건의를 하던가 해야지.」
최검의 투정에 김낙원이 비웃음을 날렸다.
「평검사가 말빨이 서냐? 네가 김부장 앞에서 허리나 똑바로 펴면 다행이게. 요즘 경찰하고 검찰하고 사이는 좀 좋냐? 그 사이에 대가리 내밀지 마, 모자기 다칠라.」
「…알아 임마.」
머쓱해진 최동훈이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수사권 싸움하다 막 들어온 신임 애 하나 옷 벗었어. 공조가 안 되잖냐, 요즘은. 흠 한번 잡으면 터뜨리는 통에, 경권(驚勸)하고 같이 하는 일선에는 아예 잘리라고 신입애들만을 배치시킨댄다. ……에이씨, 예전엔 경찰은 우리 앞에선 고개도 못 들었는데.」
피식, 김낙원이 웃었다.
「웃지 마 임마. 연수원 졸업하고 경찰 간다고 했을 땐 저 성적으로 네가 미쳤나 했는데, 세상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
최동훈이 투덜거렸다. '검사라면 강력부' 운운하며 소신 지원했던 인재가 5년 만에 세상을 알아가는 모습은 아주 흐뭇했다.
이번 해에 결국 다른 부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듯하다. 인사고과에 신경 쓰는 모습에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의 타락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었다.
싱글거리며 김낙원이 물었다.
「그래서 넌 지금 뭐 하길래 그렇게 혼자 총각 티를 내냐? 너 결혼한다고 부주했던 게 작년 같은데.」
「응?」
최검이 자기 양복을 내려다보았다. 자켓 아래쪽이 구겨져 있었다. '이런 홈즈 같은 놈.' 최검이 얼굴을 찌푸리고 중얼거린 욕은 김낙원에게도 들려왔다.
김낙원이 웃는 동안 최검이 대충 설명했다.
「왜, 몇 년 전에 그 APM 쇼핑몰 사건 있잖아. 제 2의 굿모닝 시티 라고 불렸던. 그때 해외 도피했던 혐의자가 하나가 월요일에 잡혀 들어와서.」
김낙원은 곧 기억해냈다.
「아, 벤처 하나가 건물 사들여서 쇼핑몰로 리모델링한다고 분양 해놓고 튀었던 거?」
최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벤처 대표이사가 중국에서 잡혀 들어왔는데, 계속 횡설수설이야. 이쪽은 누가 분양허가를 내줬는지 묻고 있는데,
저놈은 건물주가 자길 속여서 뻥튀기를 해서 샀느니, 억울하다느니 헛소리나 하고.」
「민사(民事)로 끌고 가고 싶은가보지? 사기를 친 게 자기네가 아니라는 거야?」
김낙원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한 말에 최검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누가 공시지가 150억 짜리 건물을 리모델링 허가 받았다고 600억으로 사냐? 자기 말로는 이미 그때 매입손실이 발생해서
분양받은 걸로 모자랐다는데, 분양은 천억 대를 받아놓고 낯짝도 두꺼워. 며칠을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듣다보니 아주 돌겠다.」
그늘진 최검의 얼굴은 담배연기가 사라진 뒤에도 가실 줄 몰랐다. 김낙원이 혀를 찼다.
「그딴 걸로 이 금요일까지 집에도 못 들어간 거냐?」
「야, 그딴 거라니. 그래도 그게 얼마짜린데…… 잘만하면 허가 내준게 주군지 불법 로비 자금부터 캘 수도 있고….」
최동훈이 열심히 변호했지만 김낙원의 쯧쯧, 한 방 앞에는 맥도 추지 못했다. 설사 알아낸다 쳐도 그게 최검의 공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건 두 사람 다 알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결국 최검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동창 중에 김양락이가 이번에 결혼하잖아. 오늘 자기 결혼하기 전에 한번 보자고 그러던데, 넌 안 되겠다?」
「난 못…」
최동훈이 대답하려 할 때였다.
「경정님-.」
합동부 뒷문이 열리더니 서경위가 얼굴을 내밀고 작게 소리 냈다.
김낙원이 그쪽을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서경위가 안심한 얼굴로 도로 문을 닫고 들어갔다.
그러나 김낙원은 담배를 내려놓기는커녕, 재를 털곤 또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있었다. 되려 초조해진 최검이 물었다.
「야, 빨리 가봐. 무슨 일인데 가보지도 않냐?」
「응?」
김낙원은 아아, 하더니 웃으면서 대꾸했다.
「지금 가봤자 할 일도 없어. 이게 겨우 피라미들 잡아오는데 뭘. 요즘은 조폭들도 머리가 좋아서 윗대가리들은 별 짓 다하거든?
기동대수사 들어가서 그런 놈들이나 잡아야 좀 일할 마음이 나지. 특수조직범죄 단속 기간이라고 죽어나는 거야 원래 순경들 뿐 아니냐.」
사법경찰관이니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어쩐지 순경들 쪽에 감정 이입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서경위가 다시 한 번 문을 열고 그를 불렀다.
김낙원이 가볍게 혀를 차더니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5분만 기다려.」
그리고 담배를 손에 든 채 태연히 걸어가는 것이었다. 최검은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빨리 끝나는 일이 있을 리가 없다.
안 본 새 놈은 과장하는 버릇이 생긴 모양이었다. 최검은 설레설레 고개를 젓다 담배연기의 잔향을 맡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받은 박하사탕을 찾아 물고 잠시 우물거렸을 때였다.
김낙원이 슥 앞문을 열고 나타났다.
최검 입에서 하마터면 박하사탕이 빠질 뻔 했다.
「무슨 일이 그렇게 빨리 끝나?」
김낙원이 싱긋 웃었다.
「별 거 아냐. 조서 좀 손봐주는 정도인데 뭘.」
「응?」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최검이 되물었다. 조서라니, 경찰들 조서를 사법경찰관인 김낙원이 손을 본단 말인가?
그러나 김낙원은 웃으며 태연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넌 발로 뛴 애들이 불쌍하지도 않냐? 공소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영장 안 나와서 그 동안 뛴 게 다 헛고생 되는데.」
「아니 그래서, 네가 고친단 말이야?」
경찰이 뛰어서 증거를 잡고 피의자를 데려와 조서를 꾸미고 나면, 검사가 그걸 보고 공소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
판사한테 가져가 영장을 발부 받아오는 건 일단 그 뒤의 일이었다. 그러니 검사가 '공소NO' 를 하면 아예 사건도 안 된 상태에서 종료.
건수는 못 올리고 헛고생만 한 셈이 되는 것이다. 경권이 불만이 여기에서 시작된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서에 법률적으로 손을 댄다는 건, 문제가 달랐다.
「야 너 그건 검사 일인데-.」
「내가 더하는 건 없어. 효력 없는 증거만 몇 줄 빼는 정도지.」
김낙원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래도 최검은 쉽게 떨어질 줄 몰랐다.
「야 너 그러다가 잘못되면, 원래 공소 안 될 수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걸려들 수 있는 거야. 억울한 사람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나 최검이야 심각하건 말건, 김낙원은 웃어넘길 뿐이었다.
「왜, 그래서 하루에 200건 보고 받고 3분당 한 건 처리하는 강력부는 뭐 나은 거 같냐? 똑같이 3분 만에 처리해도 내가 너희들보다야 사건에 대해선 좀 더 알기나하고 처리를하지.
그리고 사실, 없는 건을 꾸미는 것도 아니잖아?」
자신이 절망했던 현실을 지적받은 최검이 입을 다물었다.
김낙원이 웃으면서 최동훈의 어깨를 툭툭 치곤 말을 돌렸다.
「하여간 동창들은 잊고, 넌 시간 되면 집에나 가봐라. 너네 부장 말야, 가정파탄으로 잡혀 들어가야 되는 거 아냐? 그런 일에 며칠씩 야근이나 시키고 말야.」
「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최검이 되물었다.
「나야 당연히 가지. 칼퇴근인데. 게다가 오늘은.」
김낙원이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이곤 화분 위에 꽁초를 비벼 껐다.
「외근할 생각이거든.」
그런 것도 마음대로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최검은 차마 묻지 못했다. 김낙원은 손을 올려 인사하곤 태연히 합동부 쪽으로 걸어갔다.
「잘 가라-.」
그래도 최동훈은 끝까지 인사했다.
그 얼굴에, 김낙원은 최검의 얼굴이 몇 년 전 처음 봤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녀석이 달리진 건 담배 끊느라 최근 오른 볼살 뿐인 듯 했다. 강력부를 떠났다길래 좀 달라진 줄 알았더니, 아직 이상(理想)을 간직하고 있었나.
김낙원이 피식 웃곤 손을 흔들었다.
이런 놈들이 좋았다-. 볼 맛이 있어서.
그가 문에 다가가자 서경위가 재빨리 안쪽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김낙원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심심하니까, 낚싯대라도 당기러 가봐야지.
* * *
물고기를 보러 가는 길엔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3월 말, 햇빛은 털을 벗긴 어린 짐승처럼 따끈했다. '오늘도 가신다고요.' 대체 왜 경찰을 하고 있는 거냐는 마음을 담아 서경위가 질린 얼굴로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김낙원은 싱긋 웃었다.
이번 주 두 번째의 외근도장을 찍으면서, 상관복종이라는 면에까지 성실한 젊은 놈은 그저 한숨만 쉬었더랬다. '경찰대까지 나온 놈이 고생한다.' 김낙원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한 말에 서경위가 항의했다. '일 좀 시켜주세요.'
거기에 박목화나 한번 파보라고 했으니, 아마 지금쯤 서경위는 DB화도 안된 2년 전 서류를 찾으러 책 냄새 풀풀 날리는 문서 창고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성실한 놈을 고생시키는 건 언제라도 즐거웠다.
김낙원은 웃으면서 환승주차장 안으로 미끄러지듯 차를 댔다.
김반장도 홍겨장도 오늘은 따라오지 않았다.
동양과 박광우만 쫓는 한가한 합동부도 아니었다. 이미 김반장 측은 기동대와 함께 다른 조직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경제사범과 폭력범이 합쳐진 동양은 실마리가 잡힐 때 덮치고, 그 간은 좀 더 단순한 형태의 조직들을 쫓는다.
유일하게 하나한 김낙원이 '외근'이라고 나가는 모습에 김반장이 뭔가 말하고 싶은 듯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경정이 수사에 나설 이유는 없지만, 그가 한번 나선 일에 무어라 할수 있는 사람은 또 아무도 없다.
차문을 열고 내리자 멀리서부터 경비가 쫓아오며 소리를 질렀다.
「…권…!」 듣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주차권을 뽑지 않고 세웠다는 얘기다. 김낙원은 부러 경비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 경비의 눈앞에서 경찰수첩을 보인 후 유유히 걸어갔다.
대체 왜 직장을 다니느냐고, 서경위.
바로 이 맛에 한다.
김낙원이 싱긋 웃었다. 미끼의 상태를 보러 가는 길엔 발걸음도 가벼웠다. 삼일 째였다. 어쩌면 그간 이때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고, 낙원은 생각했다.
물고기가 들어가 있는 수조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녹색의 식물들이 수조에 낀 이끼처럼 벽을 타고 올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꽃집 앞에 선 김낙원은 주저 없이 유리문을 밀었다.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밀고 들어오는 그의 뒤로 햇빛이 따라 들어왔다.
「어서……」
인사를 받아,
「안녕.」
김낙원도 싱긋 웃으며 간단히 인사했다.
꽃다발을 만들고 있던 놈의 손도, 얼굴도 그의 인사 한 마디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를 보자마자 한 순간 놀람과 경계와 적개심이 섞인 격렬한 감정이 표정을 용암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곧 놈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은 단단한 돌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 순간이라도 녀석에게 떠오른 델 듯이 뜨거운 분노를 보지 못했다면, 낙원은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저 하얀 셔츠를 사흘 전에 정말 끌러보았던가 스스로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놈의 자제심은 대단했다.
고개를 숙이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비늘을 갑옷처럼 굳힌 물고기를 낙원은 흥미롭게 지켜보앗다. 놈은 상상도 하지 못하리라. 갑옷을 두껍게 입으면 입을수록 깨뜨릴 때를 생각하면서 즐거워지는 인종이 있다는 걸.
이미 한 번 그 안을 맛보았다면, 더더욱.
고개를 숙인 놈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 귀가 두드러졌다. 오른쪽 귀의 하얀 거즈가 바깥의 햇빛만큼이나 시리게 눈에 들어왔다.
그 거즈가 깃발이라도 되는 것처럼 김낙원은 한 발 다가섰다.
놈이 흠칫했다.
꽃다발을 만들고 있던 손이 바스락,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냈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놈은 약간의 동요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 듯 했다.
그 자리에 뿌리박은 나무처럼 단단히 서서 입술을 굳게 다문다.
입을 다무는 걸로는 피해갈 수 없다는 걸 저번에 알만큼 알았을 텐데.
김낙원은 위선적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싫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라곤 침묵밖에 모르다니, 그래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살겠어?
놈에게는 그저 사보이 호텔을 누비는 옛 시대 정도가 딱 알맞았따.
양복 입은 서른 명 사이로 홀로 뛰어들어 배때기에 사시미 칼을 쑤셔 박고, 배신당하면 화면이 꺼매질 정도로 피를 흘려대며 복수하는 흑백 영화의 시대가.
본질을 잊지 말란 말이다. 꽃집이 뭐냐 꽃집이.
낙원은 혀를 쯧쯧 찼다. 그러니 형사도 아니고, 무려 경찰 간부한테 말 못할 꼴이나 당하는 거야.
바로 그 간부인 김낙원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몸은 좀 어때.」
「……!」
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걱정하게 만든' 장본인이 그런 말을 물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모양이다.
더 이상 굳어질 데가 있었나. 낙원은 흥미롭게 쳐다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놈을 휘저었다.
「기간 중엔 몸 상태도 청취대상에 들어갈 텐데, 담당관이 와도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무장 해제는 그 입부터 하지.
보호관찰소의 담당관 따위는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는 직위의 김낙원이었다. 형사들을 데려왔던 지난번으로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 터다. 김낙원은 즐겁게 놈을 바라보았다.
입을 꽉 다물고 있던 놈이, 몇 초 지난 후에야 간신히 입술을 달싹 거렸다.
「……괜찮,」
생각해보니 제대로 된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 저음의 목소리는 뚜렷하면서도 울림이 있었다. 그 목소리로 끝낼 대답을, 낙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
「괜찮, 습니다.」
놈의 입에서 나온 존댓말은 꽤나 어색했다. <어서 오세요>, 를 하는 걸 보면 손님 상대로는 매일같이 쓸 텐데 특별히 생각할 필요가 있나.
직위로 얻어낸 대답에 만족해하며 낙원은 궁금한 듯 물었다.
「장사한 지 벌써 한 달째라면서. 그래가지고 대체 어떻게 손님 상대를 하지?」
말해놓고 나니 정말로 궁금해진다. 김낙원이 말하면서 한발 더 다가섰다. 그러나 물러날 줄 알았던 놈은 의외로 굳건했다.
이번엔 움찔거리지조차 않았다.
김낙원은 놈을 지켜보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사람 사이엔 일정하게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경계거리가 있다. 친밀한 자에겐 팔꿈치 안쪽의 친밀한 거리, 안면만 아는 사이엔 언제든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도록 팔을 뻗은 정도로.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그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사람은 적의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적대감을 갖고 있는 자신에겐 어떨까. 김낙원은 흥미롭게 한 발 한 발, 천천히 다가갔다.
얼마나 다가가야 움직일까. 놈의 의지는 어디까지일까? 냉장고? 진열대? 아니면, 테이블까지……?
테이블 앞에 꼿꼿이 버티고 선 놈의 귀로, 낙원이 손을 뻗었다.
도발은 간단했다.
「……!」
하얀 거즈에 닿기도 전에 박목화의 손이 그를 잡았다. 꽉 틀어쥔 손아귀의 힘이 놈의 성정을 대변하는 듯 했다.
삼일 전의 '그 일'은 어느 정도로 놈에게 영향을 끼쳤을까. 대답을 얻은 김낙원이 웃음을 띠웠다. 그리고 느리게, 소리를 냈다.
「아야.」
그는 잡힌 손가락 끝을 까딱, 움직여보였다. '이만 하지'. 라는 말까지는 할 필요도 없었다. 놈의 손에서 곧 힘이 빠져나갔다.
물고기는 자기가 물고 있는 떡밥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가석방과, 보호관찰.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수준으로 힘이 빠졌을 때에도 김낙원은 절대 먼저 손을 빼려 들지 않았다. 놈이 완전히 힘을 풀고 손을 놓은 뒤에야, 그는 손이 저리다는 양 허공에 몇 번 손을 털었다.
「아야, 아야.」
사과 안 하냐는 듯이 시위하는 그의 앞에서 돌처럼 굳은 얼굴의 박목화가 결국 입을 열었다.
「……죄송, 합니다.」
그제야 김낙원은 싱긋 웃었다.
「사과가 너무 느린데? 돌아가서 사회 적응 훈련 좀 더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동양'에서, 말이지.」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번 대답은 빨랐다. 그리고 단호했다.
김낙원이 놀랐다는 듯이 박목화를 곁눈질했다.
「왜? 아아─… 참, 찔렸었지. 믿을 놈이 없어서?」
「……!」
박목화 얼굴이 한 순간 박제처럼 질렸다. 핏기가 빠져나간 놈의 목을, 칼로 도려내듯 손으로 꽉 잡았다. 그때와 똑같은 자세가 되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 낙원은 놈의 뒷덜미를 잡고 테이블에 짓눌렀다.
놈은 미친 듯이 버둥거렸다. 체중을 다해 두 손으로 눌러야 간신히 억누를 정도였다. 우리에 몰아넣어지는 짐승처럼 놈은 거칠게 날뛰었다.
그때의 기억이 얼마나 생생한가를, 손바닥 아래에서 실컷 느끼고 즐긴 뒤 김낙원이 단번에 놈의 저항을 봉쇄했다.
탁!
한 손을 푼 김낙원이, 막 고개를 쳐든 놈의 눈앞으로 노란 가위를 가져다댔다.
「…….」
이미 한번 저항을 포기하고 놓았던 그 물건을 눈앞에서 보자 박목화의 몸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테이블에 엎어진 놈의 위로 낙원이 허리를 숙였다. 밀착된 놈의 등이 거칠어진 호흡을 따라 올라왔다, 내려갔다. 낙원의 왼손이 아래서부터 셔츠 속으로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잘 손질된 가죽처럼 단단한 근육을 덮은 부드러운 피부가 손에 닿았다. 단추 하나 안 풀린 셔츠 안으로 들어와 봤자인데도, 놈의 복부의 맨살에 손이 닿은 순간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전율했다.
「……!」 조금도 익숙해지지 못한 놈의 반응에, 낙원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몸을 떼어보았다.
자신의 체중이 사라졌는데도 놈은 잠시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별 힘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그대로 굳어있다. 손에 닿는 감촉은 부드러웠다. 이 목을 누를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리고 웃으며 놈을 끌어올렸다. 일어나 마주 보게 되자, 놈의 굳은 얼굴에 희미하게 불안감이 스쳤다.
낙원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구겨졌는데.」
「……?!」
낙원의 손이 다가오자 놈이 흠칫했다. 낙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에 짓눌리느라 구겨진 놈의 셔츠를 잡았다. 놈이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었다.
「…….」
탁탁, 셔츠를 펴는 소리가 잠시 정적을 깨뜨렸다.
손이 스칠 때마다 건장한 몸이 셔츠 아래서 조금씩 움찔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 움찔거림에 유혹당할 것만 같았다. 낙원은 웃으면서 강간범답게 생각했다. 왜 만지고 싶게 만들까, 응……?
이미 다 펴지 않았다면,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자, 됐다'고 하는 듯이 셔츠에서 손을 뗀 김낙원이 짐짓 혀를 차며 말했다.
「셔츠를 구기고 다니면 안 되지.」
흙장난하다 돌아온 아이에게 타이르듯 하는 말투에 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낙원이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친밀한 자보다 가까운 거리에 선 낙원이 마치 놈의 뺨을 쓰다듬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뻗었다. 놈이 자기도 모르게 약간 뒤로 물러나려다, 굳어진 얼굴로 바로 섰다.
무표정한 놈의 앞에서 낙원은 싱긋 웃었다. 언제든지 원할 때에는 이 거리로 놈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담긴 웃음이었다.
「다음에 오지.」
「……!」
뜻밖의 말에 박목화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 눈에 잠시 혹할 뻔 했지만 낙원은 다음을 기약했다.
의외로 부드러웠던 피부는 언제든지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낙원은 담배를 꺼내 물며 몸을 돌렸다.
잡은 고기는 묵혀야 맛이 깊어지는 법이지.
연기를 내뿜으며 나가던 낙원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몸을 떼어도 미처 테이블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거처럼, 박목화는 그 자리에 굳은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낙원이 웃음녀서 말을 던졌다.
「그때까지는 사회 적응을 좀 더 했으면 좋겠군. 인사하는 법도 말야.」
그리고 낙원은 자신의 말대로 인사라도 하듯 고개를 약간 기울이곤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뒤에서는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
막 낙원이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유리문 바깥으로, 산세베리아 모종 앞에 허리를 굽히고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김낙원이 잠시 문 앞에서 비켜섰다.
그러나 남자는 꽃집 안으로 선뜻 들어서려 하지 않았다. 낙원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각이 져 있었다. 어지간한 기성품으로는 폭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은 어깨였다. 양복에 꽉 맞게 들어찬 몸집의 남자가 흘깃 낙원이 서 있던 문 안쪽으로 눈을 돌렸다.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옆으로 길게 쭉 뻗은 눈매가 시원시원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이 시간대에 자기 말고도 양복 입은 남자가 꽃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 신기해, 김낙원은 흥미롭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남자는 곧 등을 돌렸다.
그러나 내려가는 곳은 앞쪽의 주차장이 아니었다.
지하철 계단 쪽이었다.
「……?」
길을 잘못 찾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낙원이 문 밖으로 걸어 나와 계단 위에 섰을 땐, 회색 양복을 입은 남자는 이미 저 멀리 사라져 있었다.
낙원은 희한한 기분으로 계단 위에 잠시 서 있었다가, 곧 상관없는 사람은 잊어버리고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란 옷을 입은 아줌마가 잰 걸음으로 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꽃집 총각-, 나 짐 좀…….」
딸랑, 종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 * *
물이 떨어졌다.
물통을 들여다본 정애가 잠시 혀를 찼다. 새로 들여온 노란 후리지아를 한 통 더 풀어놓으려다, 정애는 꽃을 도로 신문지에 말아놓았다.
「지영아, 물 좀 떠와-.」
정애가 소리를 내자 청바지를 입은 알바생은 냉큼 물통을 집어 들었다.
「언니, 제가 이번에 두 통 떠올게요.」
그 기세에 정애는 웃고 말았다. 어지간히 목화가 일을 시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누가 물통을 뺏을세라 눈까지 부라리며 씩씩하게 나가는 지영의 뒷모습을 보다, 정애는 꽃집 앞에 서 있던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
이곳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남자였다.
회색 양복을 입은 키가 큰 남자를 정애는 자기도 모르게 힐끔 바라보았다. 키 치고도 덩치가 꽤 있는 남자였다.
금요일 오후, 고속터미널의 지하상가는 젊든 나이 들었든 아가씨부터 할머니까지 여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서 있는 남자라곤 장사하는 사람들밖에 없는 이곳에서, 화원 앞에 서 있는 회색 양복 차림의 남자는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어서 오세요-.」
일단 장사하는 사람이라, 정애는 웃으면서 나가 손님을 맞이했다. 저녁이 되자 날은 곧 싸늘해졌다. 몇 걸음 나가자 입구 쪽에서 찬 바람이 불어온다. 가디건을 찾아 팔을 끼우며 정애가 물었다.
「어떤 꽃을 찾으시나요?」
화원 앞에는 색색깔의 장미 바구니가 열 맞춰 늘어서 있었다. 노란 장미와 쏠리가 꽃힌 바구니 앞에서 남자가 힐끗 정애를 쳐다보았다.
시원하게 쭉 뻗은 눈매가 위험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이었다.
뭐하는 사람일까. 정애는 잠시 생각했다.
몸매가 들어찬 양복하며, 조각같이 생긴 건 아닌데도 한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끄는 얼굴하며, 적어도 회사원은 아니었다. 장사만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그녀의 눈으로도 남자의 직업군(群)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꽃을 사러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남자의 눈이 정애를 한 순간 훑듯이 지나갔다. 십년만 젊었어도 자신을 보러 왔다고 착각했을 것 같은 시선이었다. 여자 한번 숱하게 울렸겠구나. 정애는 속으로 웃으면서 일단 몸에 밴대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구경만 하는 사람이라도 막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싸게 드릴게요, 후리지아 향기가 참 좋아요.」
「……걸.」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라 정애는 남자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회색 옷의 남자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면서 다시 한번 발음했다.
「이걸.」
위압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뜻밖의 말에 정애는 잠시 얼떨떨하게 있다가 몸에 밴대로 친절하게 물었다.
「몇 단 드릴까요? 한 단에 3000원인데요.」
「한 단.」
남자는 짧게 끊어 말한 뒤 불을 붙였다.
「포장해 드릴까요?」
정애가 묻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애는 진열대 윗단에 놓인 후리지아가 가득 꽂힌 물통에서 한 단을 뽑아들고 안쪽으로 향했다. 여태껏 틀리지 않은 감이라 해도, 안 살 사람이 사간다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었다.
노란 한지를 둘러 간단하게 포장해서 나왔을 때였다.
「손님……?」
두리번거리던 정애가 문득 담배 냄새를 맡고 진열대를 내려 보았다.
후리지아가 꽂힌 물통 옆에 하얀 봉투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허리 높이의 진열대였다. 떨어뜨리고 간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애는 꽃다발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위에는 검정색 펜으로 휘갈기듯 쓰여 있었다.
'목화'
정애의 얼굴이 한순간 굳었다.
꽃다발을 내려놓고 힐끗 양옆을 돌아본 정애는 천천히 그 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 안에 들어있던 것은 단 한 장의 종이었다.
푸른색의 수표가 팔랑팔랑, 금액이 쓰인 한쪽 끝을 유혹적으로 날렸다.
발행인 박목화, 일억 짜리였다.
* * *
「이야- 너 아주 얼굴이 폈는데?」
김낙원은 동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나온 김양락이 어색하게 웃었다.
「인사해. 여긴 이지원.」
회색 니트를 입은 평범한 여자였다. 낙원이 웃으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낙원입니다. 아직 시간도 있는데 반품하시죠. 저놈한테 과분하신데요.」
김양락을 가리키며 한 접대성 맨트에 여자가 웃었다.
「애기 많이 들었어요. 고시 패스하고 경찰 들어간 괴짜라고. 본고사보기 전날에 대학로에서 공연까지 했다면서요.」
「아아, 그런 걸.」
김낙원이 웃었다.
「그떈 머리를 시나위처럼 허리까지 길렀단 이야긴 못 들으셨나보죠? 저놈이 락(樂),락 해가면서 '락원'이라고 밴드하다, 대학 들어와선 풍물패로 전향했는데.」
옆에서 다른 동기가 흥겹게 끼어들었다. 김낙우원 이야기라면 여성중앙 세 페이지쯤은 문제없이 빽빽하게 채울 수 있는 아들이었다.
「풍물패할 땐 무려 개량 한복까지 입고 다녔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또 어울려서, 이 김양락이 또 그걸 따라하다 여학우들에게 외면 받았다는 거 아닙니까. 서시가 찡그린다고 찡그린 얼굴만 따라한 꼴……」
그 동기는 결국 김양락이 노려보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여간 보통 튀는 놈이 아니었죠. 지금도 그렇지만.」
김낙원이 자기에 대한 평가에 웃어버렸다.
여자가 뭔가를 생각해냈는지 문득 빠르게 말을 이었다.
「락원이면 저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혹시 홍대 롤링스톤에서……」
「거기서 많이 했죠, 그때에는.」
김낙원이 웃으면서 넘겼다. 그러나 이미 여자의 눈은 달라져 있었다. 여자는 잠시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은 듯 했다. 클럽 꽤나 쫒아다녔던 모양이다. 옛날의 열정이 되살아난 듯 숨 가쁘게 물어왔다.
「세상에, 아니 그때 왜 그만두셨어요? 음반 낸다고 얼마나 떠들썩 했었는데-…….」
낙원이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이적 때문에요.」
「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낙원이 풀어서 설명했다.
「패닉의 '이적'이요. 그놈이 먼저 우리 학교 들어와서, 먼저 방송을 탔거든요.」
어이없는 진실에 여자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럼 이만 실례. 파트너가 올 시간이 되어놔서.」
낙원이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에, 웃으면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냥 재미가 없어진 걸 어쩌란 말이냐. 낙원은 걸어 나가며 생각했다. 학교에서 매일같이 머리 깎으라고 하니까 기르고 싶었다. 시험을 봐야 했으니까 놀고 싶었다. 막상 대학 들어가서 압박이 사라지자 열정도 없어졌다. 당연한 수순이 아니던가. 락은 저항의 음악이었다. 강요가 없으면 반항도 없는 법이다.
그래도 10대의 유흥거리론 쓸 만했지. 낙원은 피식 웃었다.
그 유흥에 휩쓸려 대학도 포기하고, 음반도 내지 못한 채 아직도 공연장 주변을 맴도는 옛 밴드의 일원들은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우리 혜정이, 왔어?」
검은 머리의 미인이 며칠 사이 더 화사해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응'. 낙원이 웃으면서 그녀의 손에 장갑이라도 낀 듯이 입을 맞추었다. '오빠도 참.' 하면서도 혜정은 손을 빼지 않았다.
「소개시켜줄게. 오늘 너무 예뻐서.」
'걱정된다.'는 마지막 말은 귓속말이었다. 혜정이 잠시 홍조를 떠올렸다. 둘이 같이 손을 잡고 들어서자 볼룸 안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쳐다보았다. 김양락만 자기 여자를 데려오는 것도 이상해서 대부분의 동기들이 와이프나 애인을 동반하고 왔다. 파트너를 구경하자는 게 목적인 모임에, 김낙원이 데려온 여자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주최자인 김양락에게 낙원이 웃으며 소개시켰다.
「인사해. 여긴 전-혀 기억할 필요 없는 동기 김양락. 그리고 여긴,」
낙원이 헤정의 하얀 니트를 입을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리 혜정이.」
혜정이 까르르 웃으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까 여자를 소개받자마자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들어버린 낙원이 주의사항을 일러두었다.
「아직 졸업반인 학생이니까, 이상한 소린 불어넣지 말고.」
그 말에 볼룸 안에 있던 남자동기들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학생…?!」
이 '처녀도둑', 공공연히 그 소리가 나돌며 동기들이 김낙원 앞에 개떼같이 모여들었다. 언젠가 서경위가 자신을 쳐다보았던 바로 그 흉흉한 눈길의 집중포화를 받으션서도 김낙원은 태연했다.
「그래, 그러니까 이상한 소린 하지 말라고.」
「오빠, 어떤 거?」
헤정이 눈을 반짝이자 여성중앙 세 페이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저놈은 풍물패를 하면서 무려 개량한복을 입고 다녔는데도 여자를 꼬신 놈입니다, 아가씨. 미팅이란 미팅이며 소개팅은 다 휩쓸었죠. 이놈만 들이대면 어느 대학 어느 관든 성사가 안 되는 곳이 없었다니까요…….」
여자관계를 어필하려고 하는가 하면,
「신입생 때부터 머리를 길게 기른 놈이 비행기로 직수입했다면서 지붕도 안 달린 외제차를 끌고 왔을 때에도 재수가 없었는데, 갑자기 우리나라 도로에는 오픈카가 안 맞아 따위의 소리를 하면서 폐차시키곤 '작게 타지'하면서 BMW미니를 갖고 오지 뭡니까. 난 지금도 그랜져가 꿈인데. 이 자본주의 귀족, 쁘디 부르주아의 산물 같으니.」
하며 남자들에게만 통하는 재수없음을 어필하려는 동기도 있었다. 김낙원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한 마디 거들었다.
「난 지금도 작아. 사브니까.」
그리고 할 말을 잃은 동기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단숨에 침몰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랜져라니, 왜 벌써부터 그런 중우한 차를 타려고 하냐? 네 뱃살이 40대처럼 나와서?」
「…….」
이미 배 둘레에 불포화 지방을 벨트처럼 두르고 있던 동기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뒤로는 여자 앞이니 혹여 한번이라도, 라는 마음으로 달려드는 간 큰 놈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김낙원이 웃으면서 혜정에게 물었다.
「음료수 좀 마실래?」
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낙원이 아까 여자 이야길 하려 했던 동기를 불렀다.
「어이.」
아직 아무 퉁박도 받지 않은 동기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왜, 왜?」
말까지 더듬는 동기에게 낙원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부탁했다.
「혜정이가 목이 마르다고 해서.」
5분도 되지 않아, 볼룸 안에 제공되는 모든 음료수가 소프트에서 하드 드링크까지 한잔씩 혜정의 눈앞에 놓여졌다. 콜라를 빨던 혜정이 문득 생각난 둣 물었다.
「그런데 오빠, 풍물패는 뭐 운동하고 그러지 않아?」
간단히 입에 올리곤 있지만, 그래도 '운동권'이었다는 걸 아는 게 대견했다. 낙원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왜, 내가 신입생일 때만 해도 꽤 하고 그랬지. 첫날 강연 온 선배는 철도 노조 만든다고 학생인 것도 숨기고 위장 취업해서 그 나이까지 노조 운동하고 있는 아저씨였고, 자본론까지 읽으라고 줬을 정도니까 말야.」
「그게 뭔데?」
혜정의 물음에 낙원이 간단하게 축약했다.
「무지 후진, 구닥다리 책이야.」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낙원이 싱긋 웃었다.
「글쎄. 자본주의 원칙대로 팔려니 돈도 안 나오고, 공산주의 원칙대로 나눠 갖자니 쓸데없는 책이잖아? 마침 생태주의가 나와서, 난 에콜로지스트(ecologist)답게 해결했지. 리싸이클링 시스템을 따라, 」
「……?」
「휴지공장에 보내버렸어.」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낙원이 '운동권'은 아니었다는 데 혜정이 안심하고 웃었다. 낙원이 마주 웃었다.
비행기로 외제차를 수입하는 부동산 자산가의 아들을, 그들은 무척이나 '정신개조'시키고 싶어 했다. 한참 시대를 지난 듯한 이상과 열정이었지. 풍물패 주제에 소리는 서태지만큼도 모르고 마르크스만 들이팠던 선배들을 떠올리면, 낙원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의 무엇을 보고 개조 가능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바보 말고는 해줄 말이 없었다.
2년간 싱글싱글 웃으며 끝까지 그 없는 선배들에게 밥을 얻어먹던 그는, 태연히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하고 군대를 갔다. 철도 노조 만든걸 자랑으로 여기던 그 노조 간부 선배는 그러고보니 지하철공사가 민영화되면서 잘렸다고 했던가. 낙원은 진심으로 웃었다.
이상(理想)을 좇는 이들을 보는 것을 낙원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룰 수 없는 꿈을 좇다 절망하는 모습을.
하늘만 쳐다보다 발 밑의 맨홀도 보지 못하고 빠져버리는 것처럼,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다 망가지는 사람만큼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은 없었다. 그 맛에 그는 락 밴드를 떠나고도 종종 공연장에 갔고, 풍물패에 몸을 담았으며, 사시를 공부하는 중에도 일부러 고시원에 머물렀다. 그런 구경거리라면 그는 절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꼭 맨홀 뚜껑을 열고, 즐거운 얼굴로 '구경'을 하고 마는 것이다. 땅위에서.
그러고보면-……
낙원은 잠시 흑백의 눈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이미 찔린 주제에 의리, 라는 것에 집착하는 놈에게도 그런 의미로 흥미를 가진 건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놈이 복수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놈의 복수는, 놈에게는 박광우에 대한 배신이 될 것이다. 놈이 스스로 '믿음'을 버리고 절망할 그 복수의 드라마만큼 현재 그를 애타게 기다리도록 만드는 것은 달리 없었다.
「……빠?」
혜정의 물음에 낙원은 고개를 들었다. 혜정을 곁에 두고 또 놈의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기대를 하고 있다곤 해도 지나쳤다.
「오빠, 뭐해?」
낙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답했다.
「네 생각.」
혜정이 피, 하고 마주 웃었다.
그때였다. 문득 김양락이 그에게 다급하게 손짓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혜정에게 웃으면서 말하고 낙원이 일어섰다. 몇몇 남자동기들이 테이블 주변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낙원이 귀찮음을 역력히 드러내며 물었다. 김양락이 낙원의 눈치를 보며 용건을 꺼냈다.
「저기, 왜-우리 학교 최고 지도자 과정 있잖냐.」
「골프치고 술 마시는데 학기당 천만원 내는 놈들?」
낙원이 확인했다. 김양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 동문자격을 준다는 것만으로 그 돈을 투자할 가지가 있는지는 모른다. 하여간 로스쿨 학비만한 수강료의 문턱을 넘은 이른바 '지도급인사'들이 별 것도 없는 수업을 핑계로 골프치고 친목을 다지는 이상한 취지의 과정이라고, 낙원은 그렇게 기억했다.
「그런데?」
낙원이 '담배'라고 중얼거리자 아까 그랜져가 꿈이라고 하던 동기 놈이 재빨리 담배갑을 꺼내 바쳤다. 대학시절 피우던 버지니아 슈퍼 슬림이었다.
낙원이 피식 웃곤 얄상한 담배 끝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거기 남양건설 이사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번에 자기네 회사에서 마곡동을 재개발한다는 거야. 일산 신도시처럼 싹 밀어버리고 환경 조성해서, 김포공항 옆에 호텔타운까지 건설한다는데…….」
30줄에 들어선 동기들은 한창 재테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학창시절엔 재수없네 뭐하네, 무서워서 뒤로만 호박씨를 까던 놈들도 이런 때가 되면 자신을 찾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김낙원이 싱긋 웃었다.
「그래서, 투자하라고?」
회색 연기를 뿜어내는 그의 앞에서 동기들이 주저주저 속내를 이야기했다.
「아니, 네가 투자할 게 뭐 있냐. 단지 믿을만한 이야기인가 싶어서. 그 과정 수료한 사람들이 이번 동문회에도 온대. 너도 시간되면 와서 들어보고,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만 좀 알려달라는…….」
김낙원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정말이냐'고 기뻐하는 동기들 앞을 낙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갔다. 어떤 이야기인지만 봐달라는 건데 못 가줄 것도 없지. 일회일비하는 개미투자자들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가 한 뒷말은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했다.
'재테크에 열을 올려봤다 돈 버는 건 그저 증권사와 부동산회사밖에 없다니까.'
혜정이 있는 자리로 오자 검은 머리의 미인은 새초롬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낙원이 웃으면서 혜정의 손을 잡았다.
「심심하지? 이제 갈까?」
혜정이 '응'하고 기댔다. 낙원이 웃으면서 혜정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때 김양락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야, 2차는 안 갈래-?」
낙원이 고개를 저었다.
「난 됐어. 우리 혜정이 만난 지 삼일이나 됐거든.」
학생들도 하기 힘든 한가한 소리에 저편에 모여 있던 동기들이 입을 헤 벌렸다. 그러나 낙원은 태연히 혜정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난 간다. 둘이 있고 싶어져서 말야.」
거리낌없이 그런 말을 던진 그의 앞에서 혜정이 얼굴을 붉혔다. 자신에게 기대오는 미인의 손을 잡고 낙원이 걸어 나갔다.
동반으로 오고도 2차하러 가는 남자 동기들의 썩을 것 같은 얼굴을 뒤로 한 낙원은, 작별인사처럼 혜정의 손을 잡지 않은 오른손을 여유 만만하게 흔들었다.
김양락이 소리 질렀다.
「2차는 항상 가는 거기니까 시간 나면 와- 내가 쏠테니까……」
그 말에 낙원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까딱, 굽혀보였다.
* * *
혜정을 데려다주고 술집으로 가던 길엔 진눈깨비가 날렸다. 비처럼 날려 떨어지는 3월의 눈을, 그는 잠시 운전대 위에 손을 놓고 쳐다보았다. 날이 미친 모양이었다.
술집과 노래빠가 빽빽이 들어찬 방배동 골목길 앞에서는 그는 차를 세웠다. 더 안쪽으로 차를 끌고 들어가 봤다 사람들에 치일뿐이었다. 주차시키고 걷는 길엔 노랗고 빨간 전단지가 서리 맞은 나비처럼 벽에 붙어 팔랑거리다 서서히 젖어갔다.
남자들의 구둣발에 채인 진눈깨비가 반(半) 고체 상태로 소용돌이쳤다. 검은 구정물로 융해되기 시작한 진눈깨비 위로 하얀 눈이 내려앉아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채이고 짓밟힌 검은 눈이 아스팔트 위로 길게 몸을 눕혔다. 질척이는 포장을 김낙원이 다시 한 번 밟았다.
남자 셋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 꽉 막힐 너비의 보도에는, 질척한 길에도 불구하고 다섯도 열고 양처럼 무더기를 지어 몰려다녔다. '메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고, '메에'. 한 구석에 엎어져 토사물을 쏟는다. 그런 남자들을 끌어들이러 삐끼들도 개떼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안주가 공짜!' '서비스는 무료로……'
이 길은 3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담배를 빼어 물던 김낙원이, 노래방에서 노래빠로 똑같이 노란 간판에 글자 하나만 바꿔달은 건물 앞에서 문득 멈춰 섰다.
달라진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삐뚜름하게 어깨를 맞댄 건문과 건물 사이, 하얀 칠이 벗겨진 나무 문짝이 허름한 경첩을 매어달고 바람에 삐꺽이고 있었다. '낙서하지 마시오' 아래에 낙서같이 써 있는 경고는 '소변금지'였다. 그 뒤로 숨겨진 골목은 이제 아무도 모를 듯 했다.
김낙원은 잠시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문득 오늘 보고 온 놈의 얼굴이 생각났다. 꾹 다문 입으로는 숨 한번 내쉴 것 같지 않은 단호한 얼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굳은 돌 같은 표정.
그러나 그는 놈이 피를 흘렸을 때를 알고 있었다.
나무 문짝 뒤에 숨겨진 골목이었다.
싸이렌처럼 번쩍이는 네온사인조차 발 디디지 못했던 어두운 골목에서 놈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몸을 구부린 놈의 손가락 사에 삐쭉이 튀어나온 흉기가, 화살에 달린 깃털처럼 소유주의 이름을 분명하게 알렸다. 배신이었다.
흥미를 느낀 그가 허리를 굽혀 '괜찮나', 라고 물었다. 붉은 피 대신 토사물을 게우는 사람에게나 물을 수 있는 평범한 물을이었다. 자신이 칼에 찔려 이런 말을 듣는다면 멍청한 새끼라고 욕할 거라는 생각을, 그는 잠시 했다. 그때였다. 눈을 꽉 감고 의식을 잃어가던 사내가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핸드폰 불빛에 그는 사내의 입술을 읽었다.
'괜찮, 습니다.'
「…….」
피식. 그때를 떠올린 김낙원이 잠시 웃었다. 오늘 그 말을 두 번쨰로 들었던 게 생각나서다. 놈은 자기 몸에 대해선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모양이지. 친절한 타인은 밀어내고, 악의 있는 자의 악의는 더 날카롭게 다듬는.
「……여보세요?」
핸드폰의 진동에 낙원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김양락이었다. 정말 안 올 거냐, 묻는 말에 낙원이 어깨를 으쓱하곤 대꾸했다.
「길이 좀 막혀서. 운전 중이라, 끊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핑계를 대고 낙원은 핸드폰을 껐다.
놈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괜찮다'는 말 따위는 하지 못할 정도로, 흑백의 눈을 내리깔게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한 번 놔줬으니 방심하고 있을 테지. 방목(放牧)한 놈을 다시 잡을 때야말로 사냥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낙원이 싱긋 웃었다.
그러나 몇 발자국 옮기던 낙원은 문득 멈칫했다. 퇴근시간이 지나 있었다. 놈을 찾아가는 건 취미가 아니었다. 자신이 즐겁게 하는, 일일뿐이다.
……야근수당을 못 받는 일을 할 필요는 없지.
아까 김양락이 산다고 했던가.
결론은 빨리 났다. 진눈깨비가 회색 담뱃재처럼 날렸다. 낙원은 질척이는 눈 더미에 담배를 던져 넣곤 술집으로 향했다.
그럼 내일은 또 외근이군.
주 3일째, 성실한 서경위가 드디어 폭발할까. 낙원이 웃으면서 걸어갔다.
「목―…」
정애가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꽃집 안, 공기는 싸늘했다. 3월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린다. 라디오에서는 이상기온 현상으로 인한 폭설이라고 연신 떠들어대고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눈을 치우는 목화의 모습이 보였다.
답답한 마음에 목화를 부르려던 정애가, 문득 잠바를 열어 안주머니를 확인해보았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흔히 입는 검은 누비잠바 안엔, 하늘색에 가까운 파란색 수표가 두 번 접혀 옷핀으로 꽂혀 있었다. 핸드백을 누가 잡아채면 어쩌나 싶어 몸에 지니고도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강구한 안전책이었다.
액수를 생각하자 한숨이 나왔다.
스무 살부터 장사를 시작해온 그녀라도 쉽게 만질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수표 한 장의 무게가 너무 컸다.
회색 양복의 남자를 떠올리고 정애는 말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이 돈을 누가 줬느냐는, 성은 기억 안 나지 않아도 얼굴만은 아는 동창처럼 분명했다.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는 '일'할 때에는 검은 옷을 입을 것이다―… 예전의 동생처럼.
유리창 밖에서 목화가 나무판으로 급조한 밀대로 눈을 한쪽으로 쓸고 있었다. 움직이자 더운지,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셔츠를 접어 올린다. 근육이 잡힌 건장한 팔이 드러났다.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금세 회색 시멘트 바닥이 보이게 만드는 팔.
목화를 불러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던 정애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목화를 알았다.
그리고 동생이 있던 곳의 생리도 조금은 알았다. 목화에게 이 돈을 이야기하면, 분명 묵묵하고 조용한 저 동생은 말없이 굳은 얼굴로 돌려주러 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얼굴을 한 목화는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을 터였다.
정애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바닥이 쉽게 사람을 놔줄 바닥이던가.
지금이야 3년만에 교도소에서 나와 발걸음을 안 해서 그렇지, 한번 얼굴을 마주대면 그나마 연을 끊은 것도 헛수고가 되어버릴 거다.
정애는 입을 꾸욱, 동생처럼 굳게 다물었다.
피는 통하지 않아도 친동생처럼 아끼고 있었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목화를 그런 곳에 보낼 순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돈을 돌려줄 방법도 없지 않은가. 차라리 버려버릴까. 까지 생각했지만 발행인이 동생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게 정애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큰 돈을 혹여 목화가 갚아야만 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그렇지만 자신이 계속 갖고 있기에도 또 너무 큰 돈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될 지 뻔히 알면서 목화에게 줄 수는 없어, 갈팡질팡하던 그녀가 뜻밖의 생각을 해냈다.
그러느니 내가 갖는 게 어떨까.
……그래, 좋은 생각이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착복을 하는 게 제일 낫다니.
정애는 재빨리 그 생각을 발전시켰다. 이 2호점 낼 때 은행에 대출 받았던 융자금을 이 돈으로 갚고, 아예 동생을 점장이 아니라 사장님으로 만들어주는 거다. 단지 맡긴 것만으로도 이렇게 열심인데, 자기 가게가 생기고 나면 저가 어딜 가겠어.
거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이 돈은 목화의 퇴직금으로 생각하자. 그런 곳도 은퇴 자금을 해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직'도 나름 조직이니까 직장보험 들어둔 거 탄 셈치고.
「……님?」
「응?」
고개를 들어보니 목화가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셔츠는 여전히 접어올린 채였다.
「누님?」
「얘는, 그렇게 부르지 말래두.」
정애가 평소대로 대답하며 일어났다. 그러나 웃음은 감추지 못했다.
목화가 물어왔다.
「좋은 일, 있으세요?」
정애가 더 환히 웃으면서 목화를 손가락질했다.
「네가 접은 소매가 각이 잡혀 있는 걸 보니까 꼭 막 제대한 애 같아서 그런다, 왜.」
「…….」
목화가 말없이 쑥스런 얼굴을 했다.
그때였다.
딸랑, 소리가 들리더니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목화와 정애가 거의 동시에 인사했다. 여자였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추운지 호, 호 하고 손에 입김을 불었다.
'인사는 했지만', 곁눈질하면서 정애가 생각했다. 한 마디가 부족했다. '바깥이 춥죠', 정도는 건넬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게 좋을 텐데. 정애는 수영을 한 달간 배운 아이를 물가에 데려간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손님, 어떤 걸 찾으십니까.」
목화가 정중하게 물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 앞치마를 두른 건장한 남자가, 어디 불어로 된 메뉴판이라도 읊어야 할 것 같은 태도로 정중하게 물어오자 당황했는지 손님이 더듬었다.
「꼬, 꽃이요.」
여자 손님의 볼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목화가 한 번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물었다.
「……어떤 꽃을 찾으십니까」
꽃 냉장고 앞에 선 여자가 안을 들여다보더니 재빨리 손가락으로 꽃을 가리켰다.
「백합이랑 장미를 싸주시는데요, 개수는 상관없이 만원 안에서 섞어서 싸주시고요, 대는 자르지 말아주세요.」
여자는 주문을 하는 동안 목화를 쳐다보지 않았다. 꽃만 쳐다보면서 주문 사항을 단번에 말한 손님이, 목화가 꽃을 맞추어 꺼내는 동안 한 가지 더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아, 저 그리고……」
「예, 손님.」
꽃을 든 목화가 '손님이 말할 시엔 정면에서 대한다'는 원칙대로 일어나 대답했다. 바로 앞에서 목화를 보게 된 여자 손님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서 손을 내저었다.
「벼, 별 거 아니고요, 집에 꽂아놓을 거니까 신문지 말아달라고요…….」
「알겠습니다.」
목화가 답하고는 꽃을 테이블에 놓았다. 신문지를 꺼내 만 뒤에 먼저 돈을 두 손으로 받아든 목화가, 신문지에 싸인 꽃을 정중하게 건넸다. 여자 손님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꽃을 들고 총총히 나갔다.
「안녕히 가십시오.―」
보이지 않을 텐데도 깍듯하게 목례까지 한다. 그리고 목화는 잠시 안도한 얼굴로 서 있다가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애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불러들였다.
「목화야.」
「예, 누님.」
목화가 정애 앞으로 다가갔다.
정애가 웃으면서 물어보았다.
「너, 아직도 꽃포장 손님 무섭니?」
「……그게,」
드물게 당황하는 동생의 얼굴을 보면서 정애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 높여 웃어버렸다.
「얘는―…….」
꽃포장은 무슨 복잡한 기술이라기보다도 손에 익은 대로 따라가는 손맵시였다. 아직 한 달밖에 안된 동생이, 배우고 실습해본 것만으로 손님 앞에서 포장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처음 손님 앞에서 포장할 때 떨었던 기억이 자신도 선명했다. 아무 뜻 없이 포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다른 데 꽃 사러 갈 때의 경험을 되살려보면 금방 아는데도 괜히 등에서 땀이 솟는 거다.
그래, 지금은 손님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어색할 때지.
그래도 저 무표정한 얼굴의 동생이, 손님이 포장은 됐으니 신문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까지 초조했을 걸 생각하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지원사격을 해줄 이 누나가 있는데도 저 정도니 평소엔 오죽 할까.
「용케 하네, 우리 목화.」
정애는 목화를 칭찬했다. 그래도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집에 꽂아놓는다고 가져가는 사람은 꽃이 시들면 바꿀 것이다. 단골 되기 쉬운 여자 손님이 신문지에 싸인 꽃보다는 동생 얼굴만 신경 쓰다 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미 단골이 된 것 같다는 이야긴 쏙 빼고 칭찬만 했다. 그러니 목화 귀엔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난처한 얼굴로 동생이 한 마디 했다.
「더, 땀나요.」
무엇과 비교해서 더, 하고 하는지 정애는 금세 알아들었다. 교도소 들어가기 전에 하던 일보다, 라는 거다. 웃음이 나왔다.
전직 '어깨'였던 이 건장한 동생이 꽃포장과 손님 상대에 더 땀이 난다는 이야길 들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아까 생각 잘 했어. 정애는 안주머니를 만지면서 생각했다. 사장님으로 만들어야지. 그래야 동생이 더 땀을 흘리지.
그 마음 안에는, 뭔가 받으면 꼭 돌려줘야 하는 동생의 성격을 이용해서라도, 억지로라도 세상과의 끈을 씌워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불안감이 숨어 있었다.
「눈이 그치질 않네…….」
정애가 중얼거렸다.
목화가 창밖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