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네가, 왜.
소리는 핏자국처럼 번졌다. 작고, 진하게. 내뱉은 사람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지만, 들어버린 사람의 귀에는 평생토록 따라다닐만큼 끈끈하게.
한때 남자에게 동경과 불안을 담아 안부를 건넸던 입술이 주저주저 달싹였다.
…형님, 나는…
남자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귀를 기울였다. 배가 화끈거렸다. 칼에 찔린 남자보다 더 힘들게 입술이 달싹인다.
무어라 변명하는 듯 했다. 그러나 흐린 목소리는 어둠의 뱃속으로 삼켜질 뿐이었다.
눈앞이 까매졌다 노래졌다.
문득 골목 바깥에서 구두소리가 들려온 듯도 했다.
“…….”
놈이 움칫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후두둑.
어두운 골목과 네온사인이 비쳐드는 경계에 서서, 놈은 남자를 뒤돌아보았다.
한 걸음만 나가면 거리다. 투둑. 그러나 그 한 걸음 앞에서 놈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왜?
어째서, 그는 묻고 싶었다. 그러나 새어나온 것은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뿐이었다. 흐으. 흐으.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한 발짝. 쓰러지듯이 앞으로 간신히 발을 떼자 놈은 뒤로 물러났다.
한 발짝. 밝은 불빛에 그림자가 진다.
골목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삽시간에 사라진다. 시야가 흐려졌다.
투둑. 불에 달군 듯한 배를 감싸 쥐었다.
비틀대면서 몇 발짝,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은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고꾸라질 듯 휘청거리는 몸으로 몇 걸음 안 되는 골목을 기어 나왔을 때에는 이미 놈은 보이지 않았다.
네온사인만이 원색적인 빛을 뿜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빨강. 노랑. 주황. 투두둑. 그보다 더 원색적인 액체가, 검은 어둠 속에 검붉은 빛을 띠고 흘러 나왔다.
몸이 한 순간에 주저 앉았다.
시멘트 바닥에 검붉은 액체가 떨어지던 소리가 드디어 멈추더니, 움켜쥔 손가락을 타고 옆으로 흘러 넘쳤다.
“……찮나?!”
모르는 목소리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지나가는 사람일 것이다.
“…!”
그러나 그의 귀에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문득 뜨거운 뱃가죽으로부터 뭔가 울컥 치솟았다.
왜,
너는 왜 그런 눈을.
남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번들거리는 어둠 속엔 배신의 이유를 말해주는 이 따위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네온사인이 원색적인 빛을 뿜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빨강. 노랑. 주황.
그리고 어디선가, 그 모든 빛깔을 담은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 * *
3월의 보름을 조심하라
-예언자가 줄리어스 시저에게, 셰익스피어
* * *
1. 목화 (木花)
녹색은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식물은 아토피와 새 집 증후군을 완화시킨다.
‘히노끼 나무, 아토피 완화’ ‘선인장은 전자파를 차단해줍니다’ ‘산세베리아는 공기를 정화하며’ ……
코팅된 신문기사와 맞추어, 남자는 화분을 테이블 위에 종류별로 내려놓았다.
햇빛을 받고 물을 먹지 않는 선인장과 산세베리아부터 바깥쪽으로.
햇빛을 받고 물도 먹어야 하는 관음죽은 가운데에.
어린아이 손바닥같이 생긴 팔손이도 마찬가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아나운서가 프로모터에 뜨는 글자를 어색하게 읽듯이, 남자는 식물들의 이름과 효과와 키우는 방법을 들었던 그대로 기억을 되뇌이며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음지식물을 꽃집 앞 가장 안쪽, 그늘진 곳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사장니임-.”
난처한 듯 ‘님’을 길게 끄는 목소리가 지하철 입구에서부터 달려왔다.
타다닥 달려오는 발걸음은 빨리도 그의 앞에 정체를 드러냈다. 코가 닳은 자주색 운동화였다.
“또 그렇게 제가 오기 전에 다 내놓으시면 어떻게 해요. 아이 참, 정애 언니한테 엄청 혼나겠네. 이러다 월급도 못 받는 거 아닌가 몰라.”
무릎길이의 청스커트를 입은 알바생이 치마 길이만큼 발랄하게 투정을 부렸다.
예의 없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고 않은 적당한 투정이었다.
정애 누님이 일 도우라고 보내놓았는데 매번 가게를 다 연 다음에야 오니 미안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몸 성한 남자의 입장으로 아가씨에게 화분을 들게 하는 게 뭣하다는 이야길, 어떻게 하면 맘 상하지 않고 잘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몰라 박목화는 그저 싱긋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알바생의 탄성이 터졌다.
“와- 사장님 웃는다…! 오늘은 운수 대통이다아…!”
놀라서 쳐다보자 되려 반짝이는 눈으로 소리를 지른다.
부담스러운 마음에 슬그머니 물 떠올 통을 찾으러 들어가는 길에도, 알바생의 수다는 그칠 줄을 몰랐다.
“어머, 모르셨어요? 사장님 웃는 얼굴 하늘에 별따기인데, 한번 별 따면 다들 팬 되는 거. 사장님 스타라니깐요, 스타. 여기 앞에서 요구르트 파는 아줌마랑 태양 여행사 언니랑 사장님 멋지다고 난린데. 제가 떡볶이랑 순대 사러 가면 거기 아줌마가 사장님 몫으로 2000원어치 더 주는 것도 모르시죠? 정애 언니 사장님 누나랬더니 은근히 안심을 하잖아요, 글쎄.”
박목화는 재빨리 양 손에 물통을 들고 역사 안 화장실로 향했다.
할일을 또 빼앗겼다는 걸 아직 눈치채지 못한 알바생이 등 뒤에서 줄기차게 떠들고 있었다.
“사장님이 워낙 말이 없으셔서 다들 한 마디라도 들어보려고 뻔질나게 우리 가게 들르는 거라고요. ‘어서 오세요’ 한 마디에 뒤로 넘어가서는…”
* * *
사진 속의 남자는 단정하되 위협적인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사진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질 좋지 않은 인쇄 사진이었지만 이것만은 인상적이었다.
렌즈 너머 지금 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들을 노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흑백의 눈.
김낙원은 나눠준 페이퍼에 인쇄되어있던 사진을 잠시 내려다보다, 사진 속의 눈매를 손가락으로 간단히 뭉개버렸다.
“…‘동양PK’는 최근 폭력범죄조직의 양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원래 ‘동양’은 유흥업소를 터는 군소 폭력배에 불과했죠. 그러나 유흥업소에서 긁어모은 현금으로 97년 IMF사태 당시 부도로 도산한 기업 등의 부동산 경매에 참여하여 저가로 인수하고, 경기가 진정된 후에 아파트 건설업 및 재개발 사업에 개입하면서부터 기업형 조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마이크를 잡은 목소리는 발음 좋고 평온했다.
“이때 주도했던 것이 박광우로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여러분께 나눠드린 페이퍼에 여태까지 조사된 대강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습니다만 사진은 없습니다. 전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잠시 파란이 일었다.
확인하려는 듯 여기저기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지만, 김낙원은 신경도 쓰지 않고 늘어져 있었다.
중국산 안락의자는 회의용으로는 꽝이란 말야. 잠을 잘 수가 없잖나.
“일명 ‘미친 소’로 불리는 박광우는 철거반 용역 시절 소위 ‘딱지방’에 딱지를 공급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코스닥 시장의 활황과 벤처 열풍에 편승한 조직들의 기업화가 가속화되지요. ‘동양’ 역시 그 중의 하나입니다만, 이 인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이 지배적입니다. 본래는 유흥업소에서 긁어모은 현금으로 돈놀이 수준의 사채업을 하던 ‘동양’이 작금에는 제 2금융권의 금융회사로 탈바꿈하여-….”
“이 과정을 주도하면서 동양은 박을 따르는 사람들과, 전통적으로 유흥업소 갈취업을 해왔던 김갑선을 따르는 자들로 나뉘게 됩니다. 박(Park)과 김(Kim), 여기까지가 동양이 ‘동양 PK’로 바뀐 과정입니다.”
문득 옆에 있던 서경위가 김낙원에게 속삭였다.
‘경정님, 그런데 어째서 둘이 손을 잡고 있는거죠?’
‘연애라도 하나보지.’
45세 김갑선의 너구리같은 얼굴을 떠올리면서, 김낙원은 심술궃은 대답을 던지곤 싱긋 웃었다.
농담에 익숙하지 않은 서경위의 눈이 동그래졌을 때였다.
졸지에 상대역이 되어버린 박광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오해는 마이크에서 풀어주었다.
“최근 조직들의 평균 조직원수는 20-30명의 소규모 단위로, 유사시엔 조직간 연계 활동을 강화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즉, 다른 폭력조직에 폭력배들을 알선, 공급해주는 소위 조폭 복덕방을 통해 지방 조직원들을 동원하거나 유사시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인력 풀(pool)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선(線)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금, 박선(線)이 필요로 하는 건 이런 인력입니다. 폭력이 필요할 때 다른 군소조직에게 용역을 주느니, 일정 지분을 떼어주고 한솥밥을 먹던 이들의 인력을 쓰자는 것이지요.”
그제야 납득한 서경위가, 차마 경정인 김낙원에게 무어라 하지는 못하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김낙원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나 좋은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3년 전 <특별조직범죄 단속기간> 당시,”
김낙원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저희는 동양 PK의 행동대장을 검거했습니다. 박광우가 미친 소라면 미친 소의 뿔에 해당되던 자로, 철거반 때부터 해온 오른팔이었죠. <조직폭력배 관리대상> 중 하나로 3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한 달 전 대선 특사 때 가석방으로 풀려났습니다.”
프리젠테이션 화면에 커다랗게 사진이 떴다.
페이퍼에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던 사진 속, 김낙원이 손가락으로 뭉갰던 날카로운 눈이 회의실 사람들 모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박목화입니다.”
* * *
“그래서 그놈을 다시 잡기라도 하자는 거야?”
커피 한 잔 뽑아온 홍경장이 볼멘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프리젠테이션이 끝난 뒤였다. 자판기 앞엔 제복 입은 이들의 소음으로 가득 찼다. 새로 지급된 아이보리색 셔츠가 못내 불편한 지, 홍경장은 셔츠 칼라를 손으로 몇 번씩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그러나 얼굴을 찌푸린 건 셔츠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박목화 놈 독한 건 그때 충분히 겪었구만.”
혼잣말같이 중얼거리지만 남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과연 누군가가 못마땅한 얼굴로 맞장구치러 나섰다. 김반장이다.
“놈 잡았을 땐 동양은 이제 다 끝난 줄 알았지. 누가 박광우는커녕 김갑선 손도 못 대보고 끝날 줄 알았나. 독한 새끼, 선고받을 때까지 입 벙긋도 안 하더구만. 그게 벌써 3년 전이야? 그런 놈이 벌써 풀려 났어? 나 원 참.”
김반장이 쯧쯧거리고 혀를 차면서 허리께를 더듬었다.
포켓을 더듬는 게 딱 담배를 찾는 폼이다. 홍경장이 눈짓으로 자판기 옆 벽의 빨간 글씨를 가리켰다. <금연>.
김반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같이 심사가 불편해진 얼굴로 홍경장이 거들었다.
“누가 아니랍니까.”
박목화 이야기라면 할 말 있는 사람은 많았다.
여기가 검찰청 내의 합동수사부만 아니었다면, 벌써 현 법조계의 무른 공판과 가석방제도를 소리 높여 비난하는 말이 한둘쯤은 터져 나왔을 것이다. ‘밥 다 해놓으니 코풀고 가네’ 류의.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내심은 모두 비슷했다. 눈앞의 빨간 글씨도 심사가 불편해지는 데에는 훌륭히 일조했다.
박목화가 금연자의 사탕 몫을 해냈다.
“들으셨어요? 박목화 그 새끼, 동양 쪽 구역에서는 3년 전부터 완전히 영웅이랍니다. 그때 한 마디도 안 해갖구선, 윗선은 하나도 못 잡았잖아요. 근래에 보기 드문 의리파 주먹이래나 뭐래나. 젊은 놈들이 괜히 들떠갖고, 김선 밑의 애들까지 떠받든다는 겁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가는지….”
옆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던 이경사까지 혀를 찼다.
홍경장이 셔츠 칼라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면서 짜증을 냈다.
“아니 그래 기집애들이 오빠하고 꺅꺅대는 것처럼 떡대같은 새끼들이 형님, 형님하는 꼴을 한 번 생각해봐요. 소름이 돋나 안 돋나.”
한 차례 웃음이 지나갔다. 3년 전 ‘동양’을 상대했던 이들에게만 전염된 웃음이었다.
제복들 사이에서도 웃음을 공유한 이들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 원 안에는 서로에게 익숙한 얼굴뿐이었다. 적어도 형사 급의 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도 높은 직급의 마지막 한 사람은 눈치 채지 못했다.
한쪽 벽에 기대어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김낙원이, 쿡쿡거리고 웃었다.
그 원 안에서 김반장이 <금연>을 노려보면서 물었다.
“아직도 박목화를 찌른게 누구인지 ‘동양’ 놈들은 모르나보지?”
홍경장이 억울하다는 양 답했다.
“글쎄 저희 탓인 줄 안다니까요. 내 원 참.”
김반장이 <금연>자를 노려보며 억울함에 동조했다.
“하기야, 자기 형님한테 찔려놓고 입 한 번 안 여는 놈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어. 덕분에 김선 애들까지 꺅꺅대고 있으니 발판은 확실히 다졌겠구만. 박광우 속이 꽤 쓰리겠어? 자기가 버린 카드가 더 커져서 돌아왔으니.”
홍경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모르죠, 한 마디도 안 한 걸 보면 사실은 박광우가 뒤에서 보상을 약속했던 건지 누가 압니까. 박목화가 다시 박광우랑 손잡기만 하면 이번엔 김선이 새 되는 거죠. 박목화 따라서 애들이 옮기기라도 하면 ‘동양’이 더 이상 ‘동양 PK’일 이유가 있나요.”
이경사가 옆에서 웃기지 말라는 얼굴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럴 리가 있어? 그 독한 놈이 끝까지 안 분 건 다 자기 손으로 박광우한테 칼침 먹이려고 한 거라구. 아무렴 자길 찌른 놈한테 돌아 가려고.”
“그럼 김선이 유리해지나?”
김반장이 고개를 기웃했다.
곧 설왕설래, ‘김선이 유리해진다’ , ‘아니다 박선이 유리해진다’ , ‘박목화가 아예 애들을 따로 끌고 나온다’ 하면서 토론이 벌어졌다.
김낙원은 원의 한쪽에 서서 흥미진진하게 그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양의 뒤에 붙는 알파벳이 P가 되든 K가 되든, 그런 건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궁금한 건 놈의 향방이었다. 지금 이 소란을 불러온 자.
교도소 안에 남겨졌던 도마뱀 꼬리, 미친 소가 버린 과묵한 뿔, 앞으로 어떤 판을 벌일지 모르는- 배신과 복수가 주제인 드라마의 주인공.
서경위가 커피를 뽑아 와 그에게 건넸다.
그러나 김낙원은 손을 내저었다. ‘자판기 커피는 마시지 않아.’ 그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토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다음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중구의 허경장이, 난처한 얼굴로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기, 그게 말입니다….”
김반장이 힐끗 쳐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원의 압력이 시선으로 작용했다.
이경사도, 홍경장도 불청객을 보는 눈으로 힐끔 쳐다보았다. 허경장이 더 난처해진 얼굴로 우물쭈물하더니 간신히 말을 꺼냈다.
“바, 박목화가 말이죠, 아예 조직으로 돌아가지를 않았다 말입니다.”
형사들의 머리에 미처 그 소리가 제대로 입력되기도 전이었다.
“무슨 얘기지?”
김낙원이었다.
벽에 기대어 있던 그가 몸을 일으키자, 마치 그가 그 자리에 갑자기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시끌시끌하던 자판기 앞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겨, 경정님.”
허경장이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김낙원이 한 걸음 다가섰다. 형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비켜섰다.
경정이면 총경 바로 아래의 직위로, 경장보다 4직급이나 높은 과장급이다. 일개 형사인 허경장이 함부로 말을 섞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 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그게 말입니다. 박목화가 보호관찰 중인데 말이죠, 그게 저희 관할이란 말입니다….”
허경장이 계속 더듬자 김낙원이 말을 끊었다.
“그런데?”
“그, 그런데 딴 짓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김낙원 앞만 아니었다면, 홍경장이건 김반장이건 나서서 냅다 허경장 머리를 갈겼을지도 모른다.
‘뭐라는 거야, 그래서!’
실제로 설전을 벌이던 모두는 허경장 하나만 초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김낙원이 약간 짜증을 내면서 재촉했다.
“뭘 하고 있는데?”
“그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가게를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김낙원은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가게인데?”
당구장이나 호프류를 생각하고 있던 김낙원과 경찰들에게, 허경장이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한 다음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게, 꼬, 꽃…….”
* * *
“사장니임-.”
또 할일을 빼앗겼던 알바생은 무려 남자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을 떠서 나온 박목화는 잠시 요즘 여학생의 대담함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알바생은 그의 손을 낚아채려는 것이었다.
“또 그러신다, 그렇게 혼자 물 뜨러 가시기에요? 이리 주세요.”
양동이를 뺏으려는 알바생을 박목화는 난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빨리 주세요, 어서요. 저 정애 언니한테 혼난다니까요. 네?”
손을 내저으려고 해도 이미 양손에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든 채라 그럴 수가 없다.
그러나 여자에게 그렇게 무거운 것을 들릴 수 없다는 이야길, 그는 어떻게 말로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박목화는 그에게 가장 간단한 길을 택했다.
“…….”
아무 말도 없이 꽃집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박목화의 뒤로, 알바생이 종종거리면서 따라왔다.
“진짜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저 일 잘 해요, 사장님. 고속터미널에선 호남선 꽃시장에서 영동선까지 그런 물동이 들고 하루에 10번은 왕복했다고요.”
문득 박목화가 우뚝 섰다.
누가 이런 어린 여자애한테 그런 일을 시켰나 싶어서였다.
알바생이 그의 얼굴을 보더니 헤헷, 하고 혀를 내밀면서 웃었다.
“아니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그렇다는 거죠 뭐.”
그는 휴우, 하고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도로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야 알바생이 쫓아오면서 또 입을 놀렸다.
“우리 사장님 그런 얼굴도 할 줄 아네요…! 잠깐 무서웠던 거 아세요? 와, 박력도 있고 우리 사장님 멋쟁이-.”
박목화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 * *
“그러니까, 꽃집 사장?”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되물은 건, 김낙원이 아니었다. 홍경장이었다.
허경장이 바짝 얼은 얼굴로 경정 쪽을 눈짓했다. 그제야 실수를 깨달은 홍경장도 굳어서 재빨리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김낙원은 끼어든 데 대한 어떤 제지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더 이상 눈앞의 허경장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무 것도 없을 듯 했다.
일단 그는 보이지 않는 원 밖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그제야 허경장이 홍경장 쪽을 바라보면서 땀을 닦았다.
“그, 그렇단 말입니다. 분명히 꽃집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허경장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여전히 생각 중인 경정을 힐끔 본 김반장이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왜 그걸 하고 있는데?”
“그, 그건 저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비슷한 심정이었다. 제복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허경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박목화가 무엇을 하건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땀만 한 됫박 흘리는 게 안되어 보였는지, 경정 눈치만 보며 뒤로 물러나 있던 이경사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
“위장인가보지.”
홍경장이 곧 동의하고 나섰다.
“그렇죠. 보호관찰 중이니까. 뭔가 개심했다는 둥 하면서 위장할 보통 가게가 필요했던 거 아닐까요?”
가석방 중에 있는 범죄자들의 눈물겨운 노력들을 알고 있는 수사부의 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에 나가고 성경을 끼고 사는 놈들도 수두룩한 마당이다.
수요일에도 예배가 있다는 걸 놈들을 보면서 처음 알게 된 형사들도 많았다.
그런 마당에 꽃집을 못할 건 없지.
그렇지만 이런 일차적인 수긍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찝찝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하필이면 꽃집을 할 건 뭐람. 어울리지도 않게.”
김반장이 툭 내뱉은 뒤에야 그 찝찝함의 정체가 드러난 듯 했다. 홍경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진짜 안 어울리는데요. 그놈이 그런다고 누가 믿는다고….”
“그래, 그 눈깔만 봐도 손님들 다 도망갈 텐데 말야.”
3년 전 박목화를 실제로 겪었던 몇 명이, 원 안에서 ‘눈깔’소리에 실소했다.
독한 놈, 하고 기억하는 데에는 꾹 다문 입보다도 그 기분 나쁜 눈이 한 몫 한다.
역시 웃으며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이경사가, 도로 기분이 안 좋아진 얼굴로 한 마디 했다.
“다시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가 보지.”
무뚝뚝한 소리에 김반장이 반색을 하면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럼 이번엔 좀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네.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거면 협조를 할 거 아냐. 안 그래? 놈이 순순하기만 하면 박광우 쪽도 실마리가 좀 잡힐걸. 허경장, 보호관찰 담당이 누구야? 내일은 그쪽하고 같이 가보자구.”
이야기가 일단락된 것 같자 자판기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가 가느니 마느니, 나도 한번 구경하고 싶다느니, 3년 전 한번이라도 상대를 해봤던 사람이라면 모두, 말 잘 듣는 박목화를 한번쯤 보고 싶은 게다.
결국 예전에 ‘동양’ 담당이었던 김반장이 나서서 인원을 제한했다.
“됐어, 됐어. 나하고 홍경장이면 돼.”
순순해졌는지 어떤지는 돌아와서 이야기해주면 될 거 아니냐고, 주위를 달래고 있을 때였다.
불쑥 예상치 못했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도 가지.”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에 김반장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말한 건 김낙원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
김낙원은 주머니를 뒤적이며 태연히 반장을 쳐다보았다.
반장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동양 건(件)과 경정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3년 전에도 경정이 합동수사부에 있기는 했지만 사법을 맡은 사람이었다.
박목화에게 이를 가는 형사들도 아니고, 구름 위의 간부가 굳이 가석방 중인 놈에게 직접 가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김반장이 주위를 훔쳐보았지만 허경장도, 이경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했다.
마지막으로 김낙원을 힐끔 쳐다보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는 경정에게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김반장은 일단 조심스레 말리려 했다.
“아니 경정님께서 가실 필요는-….”
경찰로 묶여있다고 다 같은 경찰인 건 아니다.
경사나 경장급의 형사가 갈 일에 간부인 과장급의 경정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
간부는 실사(實査)에 신경쓰지 말라는 내심을 덧붙여, 막 ‘저희들 일이니까요’ 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김낙원은 효과적으로 말을 막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고 불을 붙였던 것이다.
모두 바라마지 않던 하얀 필터를 맛있게 빨아들인 김낙원이,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일은 외근이군.”
회색 연기가 번졌다.
<금연>. 빨간 글씨 앞이었다.
* * *
“아, 서경위.”
몰려나가는 제복들의 틈바구니 사이로 김낙원이 불렀다.
파출소 생활 2년만에 김낙원 밑으로 배치된 젊은 서경위가 재빨리 다가왔다.
“시키실 일이라도…?”
“아냐, 업무상 얘긴 아니고.”
김낙원이 담배를 잠시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옆을 휘휘 둘러보더니 짐짓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사귀는 사람 있나?”
서경위 얼굴이 확 붉어졌다.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얼굴만으로 대답을 알아챈 김낙원이, 쯧쯧하고 혀를 찼다.
서경위가 머리를 긁적이다 물었다.
“경정님께선 사귀는 분이-….”
“아, 혜정이. 이번에 학교에서 무슨 공연을 한다는 군.”
아직 졸업도 안 한 여학생을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서경위가, 처녀도둑을 보는 총각의 눈으로 김낙원을 쳐다보았다. 김낙원은 웃으면서 태연히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문득 물었다.
“애인하고는 자주 만나나?”
“아니오, 그러지는 못합니다.”
서경위가 감을 못 잡은 채 대답했다.
“내일도 못 만나고?”
“예, 그렇죠.”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경위가 대답하자, 김낙원이 웃으면서 눈을 찡긋했다.
“그래갖고 애인이 남아나겠어? 자네도 좀 일찍 퇴근해서 애인 좀 챙기지 그래? 난 내일 혜정이가 공연이라 꽃 좀 줄까 하고 있는데, 마침 외근이라 말이야….”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된 서경위가 머리를 긁적였다.
일찍 퇴근해서 여자친구한테 가게 외근을 종일로 빼달라는 이야기였다.
이게 아까 외근을 나간다는 이유였나 하면서도, 이제 막 모시게 된 상관에게 무어라 할 처지가 아닌 서경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습니다.”
“그래.”
김낙원이 웃으면서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서려는 그에게 서경위가 조언했다.
“경정님, 제가 그 근처 화원은 많이 가봐서 압니다만, 거기 화원들은 다 꽃도 포장도 별로예요. 꽃을 사 가시려거든 신촌 현대라도….”
그러나 김낙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하러?”
“아니, 저, 그래도 잘 해가셔야….”
뜻밖의 반문에 몇 년 된 여자친구에게도 백화점에서 꽃을 사다주는 서경위가 말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김낙원이 하얀 벽, 빨간 글씨 옆에 보라는 듯이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내일 꽃집 가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