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49)
  • “중학교 때부터 죽어라 말을 안 듣더니, 아주 위험한 일만 골라서…. 애초에 내가 이 일 하지 말자고 했지! 이게 뭐야. 가이드라서 위험할 일 없다고, 현장도 잘 안 나간다고 해 놓고, 이 꼴이 다 뭐냐고….”

    “죄송해요. 네? 아,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 했다니까요? 저 지금 진짜 멀쩡하고, 괜찮아요. 남은 상처도 치유계 에스퍼가 와서 다 치료해 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금방 나을 거라니까요?”

    사정 사정을 하며 빌기 시작한 내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말을 멈췄다. 다들 네가 그렇게 약하게 구는 사람이 다 있어? 라고 경악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유일하게 멀쩡한 얼굴이던 팀장님만이 원장님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를 해주셨다.

    “보영씨, 요한이 말대로 치유계 에스퍼도 오기로 해서 금방 다 나을 테니까 그만 우세요.”

    팀장님의 말에 그제야 원장님이 ‘정말요?’라고 물으며 눈물을 닦아내셨다. 그러자 팀장님은 아주 다정하게 어깨를 다독이며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신다.

    …근데 이 분위기는 뭘까? 보영씨?

    ……응?

    두 분을 번갈아 쳐다보다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아주 많이 분위기가 이상했다.

    “두 분 다 그만.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떨어지세요, 빨리. 팀장님? 훠이! 저리 가요.”

    “……큼.”

    “요한아, 정말 괜찮은 거야? 응? 어딜 어떻게 다쳤는데. 얘기 좀 제대로 해 봐.”

    떨어지라는 말에 팀장님이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면서도 은근히 더 원장님 곁으로 달라붙는다. 원장님은 그런 소린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상태를 묻기 바빴고.

    …그러니까 이 분위기 뭐냐고. 이상한 느낌에 원장님의 손을 간절히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어머니…. 설마 두 분… 사귀세요? 아니죠?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거….”

    “응? 승원씨가 말 안 했어? 우리 사귄 지 꽤 됐는데?”

    “…예?”

    사귀신 댄다. 심지어… 꽤 되셨다고…. 가만히 팀장님을 올려다보다 링거대를 붙잡았다.

    하하. 어쩐지, 저분이 유독 날 챙기면서 잘 해주시더라. 아니지, 그 새벽에 술 드시고 전화하셨다는 얘길 들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야… 그걸 왜 잡아? 좋게 말할 때 링거대 놔라. 응?”

    “…뭐? 보육원에서 올라오는 과일 때문에 잘 해줘? 에라이, 양반아!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이 연애 반대! 무효예요, 무효!”

    링거대를 들고 휘두르려고 하자 손재원이 다가와 말리며 진정하라고 소리쳤다. 상원이도 얼른 내 어깨를 잡고 말리며 팀장님보고 도망치라고 소리를 질렀다. 팀장님은 떨떠름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네가 뭔데 반대냐며 되레 큰소리치기 바빴다. 그리고 그 소란 속에서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밤나비가 원장님께 다가가 고맙다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보이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내 친아버지라고.

    정말로 완벽한 개판이었다. 언제나처럼.

    “어머니! 정팀장님이 제 남은 다리도 분질러야 한다고 했다고요!”

    “야 이 미친놈아! 그거야 너 걱정돼서, 아니, 보영씨, 그게 진짜 분지르겠다는 게 아니라…, 야 서요한!”

    채애현도 인정한 고자질 솜씨가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

    회색칠 된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어딘지 좀 서늘하고 삭막했다. 군데군데 놓인 탁자와 의자들 역시 삭막한 분위기를 한층 더 삭막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중 한 테이블을 잡고 앉아 팔짱을 낀 채 침묵하고 있는데, 그 옆에 앉아 있던 태화가 흥하고 삐친 얼굴로 턱을 괴고 있던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러게, 그럴 거면 따라오지 말라니까.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의 등받이로 등을 기댔다. 그러자 잠시 후 삐걱- 하는 철문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들어섰다. 정복을 착용한 교도관과 푸른색의 뻣뻣한 죄수복을 입은 남자였다. 교도관은 이내 아무 말 없이 남자의 손을 구속하고 있던 수갑을 풀어준 후 접견실을 나갔다. 그러자 태연히 손목을 돌리던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맞은편 자리로 와서 의자를 빼고 앉는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라서 반갑냐? 난 아닌데?”

    “여전히 까칠하네, 서요한.”

    연장우가 어릴 적 짓던 표정과 똑같은 표정으로 피식거리고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놈의 모습을 가만히 눈으로 살폈다.

    까까머리가 풋풋했던 모습이 아닌, 이제는 단단하면서도 어딘지 좀 삭막한 느낌의 어른이 앞에 앉아 있었다. 그게 꽤 낯선 기분이라서 느낌이 묘했다. 그러나 슬쩍 웃어 보이는 미소는 어릴 때와 같아서 한숨이 길게 나왔다. 곰처럼 커다란 덩치로 내 눈치를 볼 때마다 지어 보이던 웃음. 그거 하나만은 여전했다.

    #117

    “왜 보자고 했어. 이제 피차 안부 물을 사이도 아닌데.”

    무너진 기관 건물에 국민들의 후원금이 모였다. 그리고 여전히 기관의 가장 큰 후원사인 태화 기업의 도움을 받아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그곳에 새로운 세가 건물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태화 기업에서 임시로 후원한 장학 재단 건물도 심하게 좋은 편이라 이미 다들 정을 붙이고 있었다. 20층짜리의 서울 알짜배기 땅에 위치한 건물은 갑자기 일터를 잃은 세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래서 다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우리 특진팀은 가짜 오성파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사실 해체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가짜 오성파의 잔당 무리를 잡기 위해 조금 더 유지하고 있기로 결정이 났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모인 팀원들을 데리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김영민 가이드와 이소영 가이드가 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 두 사람은 테러가 났던 날 만났던 연장우가 ‘서요한’이 아니면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말과 함께 협조를 거부했다며 직접 만나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 왔다.

    물론 한석만을 통해 내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어쩌면 그러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한숨이 나오긴 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태화에게 연장우를 한 번 만나보겠다고 말했다. 물론 태화는 이제 가짜 오성파의 유통처 문제를 알아볼 것도 아닌데 왜 만나는 거냐고 불퉁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저렇게까지 찾아대니 궁금했다. 대체 왜 보자고 하는 건지.

    “아직도 화났어? 여전히 뒤끝이 길구나.”

    “…야, 뒤끝은 나만 길어? 어디서 지는 아닌 척을 해? 내가 연락 끊으니까 솔직히 너도 빡쳐서 같이 연락 끊은 거잖아. 그래놓고 너, 뒤에서 나만 나쁜 놈 만들어놨더라?”

    가장 억울했던 부분을 따지고 들자 연장우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면서도 순순히 인정했다.

    “뭐, 좀. …빡치긴 했었지. 고작 그런 일로 연 끊은 새끼, 나라고 좋았겠어?”

    이 새끼 봐라? 짜증스럽게 눈을 부라리자 녀석이 피식하고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그러더니 여러모로 복잡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제법 어른스러운 표정을 해 보였다. 그건 만나지 못했던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자리 잡은 표정인지 무척 낯설었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알겠더라. 그때 그렇게 말려준 친구가 진짜 친구였다는 거. 그러고 나선 후회 많이 했어. 근데도 찾아갈 용기는 없었고. 아직도 나는 네가 싫어하는 일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알잖아. 내가 할머니 밑에서 없이 자라서 성공하는 게 꿈이었던 거. 돈 통에 빠져 원 없이 쓰고 사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고.”

    “…….”

    물론 안다. 녀석은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물려받은 교복이 손목 위로 껑충 올라와도 바꿀 엄두도 못 낼 만큼. 고아인 나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걸 허세와 싸움질로 감추고 다녔던 치기 어린 시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씁쓸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원 이루니까 좋냐?”

    “아니. 그게 좀… 허무하더라고. 그래서 결과보단 과정이 중요한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지. 너 보니까 더 확실히 알겠고. 너는…. 어머니에 대해선 알아냈어? 과거에 대해 알아보는 게 네 꿈이었잖아. 화려하게 뉴스도 탔던데. 네 아버지가 누군지. 그거 보고 나도 좀 놀랐다.”

    그 말에 나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연장우는 그 당시 유일하게 과거에 대해서 얘기했던 친구였다. 그래서 더 친밀했고, 서로밖에 없었다. 녀석에게 가이딩을 해준 이유기도 했고. 그러나 사실 너무 오래전 기억이라 그때의 감정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걸 다시 끄집어내는 것도 어쩐지 좀 낯간지러웠고.

    “어.”

    “역시, 너도 성공했네.”

    머쓱한 기분이 들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삐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태화가 소매를 잡아 당기며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알려왔다. 그 손길에 시선을 내렸던 연장우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뉴스에서 봤습니다. ‘서요한 가이드는 현재도 제 가이듭니다-.’ 라고 하는 거. 아주 인상 깊어서 한 번쯤 꼭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네요. 반갑습니다. 연장우라고 합니다.”

    “…….”

    “…….”

    “요한 언제 갈 거예요?”

    연장우가 뭐라든 무시한 태화가 곱게 웃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턱을 괸 채 눈을 휘어 웃어 보이는 미소는 무척… 심술궂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다 연장우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녀석도 한쪽 눈매를 비스듬히 올리며 살짝 빈정 상한 얼굴로 내밀고 있던 손을 거둬드리고 있었다.

    아씨…. 저 새끼 뒤끝 진짜 긴데…. 어쩐지 좀 불안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쪽이죠? 우리 클럽 시원하게 해 드신 분이.”

    그때 연장우가 클럽 와썹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그래, 그 건물을 시원하게 날려 먹은 장본인이 여기 있었다. 쟤가 그 클럽의 실질적 소유주랬고. 한석만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곤란하게 미간을 구기자 나를 보고 웃던 얼굴을 무표정하게 굳힌 태화가 ‘그게 뭐?’ 하는 얼굴로 연장우를 돌아본다.

    “값은 제대로 쳐준 걸로 아는데.”

    “맞습니다. 태화 그룹 법무팀에서 나온 변호사란 사람들이 아주 시원하게 금액을 제시하더군요.”

    “근데 굳이 그 얘길 꺼낸 이유는?”

    “아니, 뭐…. 근데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왜 자꾸 반말이신지.”

    그 말에 태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 새끼들이 왜 이러지? 미쳤나? 왜 갑자기 둘이 기 싸움을 하고 난리야? 불안감이 스멀스멀 부피를 키웠다.

    “꼬우면 너도 까.”

    “음? 나는 까도 너는 까면 안 되지. 나보다 어린 사람 같은데.”

    “무등록자 에스퍼 상대로 내가 존댓말까지 해줘야 하나? 당장 여죄 만들어서 형량 안 늘려준 걸 고마워해야 할 텐데.”

    “…아- 그래요. 그게 그렇게 되네.”

    가만히 태화를 바라보던 연장우가 슬쩍 입매를 끌어올려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러더니 곧장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그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요한아, 나 이제 그만 용서해 주면 안 되냐? 클럽 그렇게 되고, 나도 이제 이 생활 청산하기로 해서 하는 소리야. 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걸 뭐, 이제 와서…. 뭐야, 너 대체 나 왜 불렀어?”

    왜 갑자기 나를 끼우냐? 그런 눈빛으로 연장우를 흘기는데, 녀석이 문득 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존나 불안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네가 내 첫사랑인데. 네 첫 가이딩 상대도 나 아니야? 내 첫 가이드가 너였고, 네 첫 에스퍼가 나였잖아. 그치?”

    저… 미친 새끼가! 놀란 눈으로 꿈벅꿈벅 연장우를 보다 삐걱거리는 목을 간신히 돌려 태화를 쳐다보았다.

    와…. 하하. 이런 게 환장한다는 거구나. 저게 결국 이렇게 사고를 치네.

    씻은 듯이 표정이 사라진 태화가 턱을 괴고 있던 얼굴을 살짝 띄운 채 연장우를 노려보다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이 무언가에 의해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아, 씨발, 깜짝이야.

    그 눈빛에 놀라 얼른 고개를 돌리며 연장우를 노려보았다. 절로 이가 악다물어졌다.

    “무슨 개소리야! 그런 개소리나 하자고 부른 거야, 너?”

    “개소리라니. 사실이잖아. 그때 우리 참 좋았는데. 그치?”

    “…너 진짜 미쳤어? 감빵에 있더니, 아예 돈 거야? 여기서 막 전기의자로 고문 같은 것도 하고 그래? 왜 멋대로 기억을 조작해! 우리 그때 친구였-.”

    “그럼 용서해 줄 거야?”

    “…….”

    아… 하하. 하하하.

    갑자기 진한 피로감이 몰려와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손바닥 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묘하게 즐거워하는 기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SG 유통처에 관한 건 내가 좀 알아봤어. ‘우리 사이’에 그 정돈 당연한 거니까.”

    “됐어! 필요 없어, 새꺄! 우리 사이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에이, 흥분하지 말고 들어 봐. 걔들이 자금줄로 SG만 팔았겠어? 어떤 마약 딜러도 마약으로만 돈을 벌진 않아. 꾸준히 돈이 들어오는 일이 아니라서 부수적으로 뭘 더 하게 돼 있거든. 그게 아니면 굳이 조폭을 끌어들일 리가 없지. 이 바닥 생리가 그래요.”

    “…….”

    그 말에 솔깃하고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슬쩍 손바닥을 내리고 연장우를 쳐다보자 옆에서 작게 ‘요한-.’ 하고 경고해 오는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씨, 일 좀 하자! 불퉁한 표정으로 태화를 보는데, 그 사이에 연장우가 말을 이어갔다.

    “근데 걔들한테 현금 부자라는 소문이 있거든. 그럼 딱 하나지.”

    “…뭔데?”

    “도박장.”

    “도박장?”

    “응. 도박장을 운영하지 않고서야, 현금 부자 소린 듣기 힘들지. 한석만한테 서울 쪽에 영역 구분 애매한 도박장 좀 알아봐 놓으라고 지시했으니까, 그 자료 보내달라고 해. 그럼 보내줄 거야.”

    “어, 어어.”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연장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간다고? 설마? 뒷모습을 보이는 연장우를 향해 내가 손을 뻗었다.

    야, 오해는 풀어주고 가야지! 나만 죽으라고? 전에 질투한다는 명목으로 했던 짓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며 손끝이 떨렸다. 그러자 등을 돌리고 멀어지던 연장우가 아,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니까 너도 나 그만 용서해라. 그래야 곧 태어날 조카 얼굴도 보여주지.”

    …응? 뭐라고?

    “…조, 카?”

    “응. 나 결혼했어. 곧 애 아빠도 돼. 그래서 이 생활도 정리하는 거야. 그러고 나니까 친구가 그리워지더라고. 남자 인생에 불알친구 하나는 있어야 하는 거잖냐. 우리 애도 제대로 된 삼촌 하나는 있어야지.”

    “…….”

    너…. 너 이 새끼!

    “그리고 한태화씨, 놀려서 미안합니다. 첫사랑이란 말은 농담이었어요. 무시당하니까 순간 화가 좀 나서. 그러니 다음에 봤을 땐 서로 존댓말 하면서 존중해 주는 그런 사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아이 태어났을 때, 요한이랑 같이 놀러 올 수 있죠.”

    “…….”

    태화를 향해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인 연장우가 제 할 말만 내뱉곤 그대로 접견실을 나가 버렸다.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와…. 와하, 저 새끼…. 쟤가 아빠래.”

    “…지금 그게 중요해요?”

    가자미 눈을 한 태화가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그러나 나는 이미 흥분상태였다.

    너는 이게 안 중요해? 왜 안 중요하지?

    “나보고 삼촌이래잖아! 이게 어떻게 안 중요해?! 아씨, 벌써 떨려. 어쩌지?”

    애 아빠는 미워해도 애는 미워하지 말자는 소리가 있다. 마침 깡패짓도 청산한다고 하고. 그럼 됐지, 뭐! 설레는 마음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자 태화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 푹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미 연장우를 용서하기로 했다.

    ***

    교도소를 나와 한태화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아직도 삐친 한태화는 말 한마디 없이 운전만 했다. 그 옆에서 나도 깊은 고민에 빠져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 방면을 표시하는 이정표가 나왔을 때쯤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갑자기 뭐가요.”

    전방만 주시하며 운전을 하던 태화가 힐끔 시선을 주는 것을 보며 결연하게 말했다.

    “우리도 빨리 전속 계약서 내자. 너 그거 아직 가지고 다니지? 당장 세가로 가서 인사과에 제출하자.”

    “…….”

    그 말에 놀란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운전만 하던 녀석이 슬쩍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돌아보았다.

    “갑자기요? 내가 그렇게 내자고 할 땐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지금 딱 결심이 섰어. 가자.”

    “왜요. 그 결심이 왜 하필 지금 섰는데요?”

    평소엔 제가 먼저 언제 인사과로 갈 거냐고 칭얼대던 녀석이 지금은 떨떠름하게 이유를 따져 묻는다. 쟤가 아주 배가 불렀다.

    “지는 거 같잖아! 누군 결혼을 해서 애 아빠가 된다는데! 내가 저 새끼한테만은 질 수 없지! 가자!”

    “지금… 고작 저딴 놈 때문에 나랑… 전속 계약 맺겠다는 건 아니죠?”

    “뭐야. 그게 왜 그렇게 돼? 사람이 그렇게 꼬아서 생각하는 거 아니야. 직관적으로 생각해야지.”

    “…요한이 방금 한 말이…. 하아.”

    그러나 태화의 깊은 한숨에도 만족스럽게 웃으며 윗배를 통통 두드렸다. 아, 이제야 좀 배가 덜 아픈 것 같네. 연장우의 소식에 기뻤던 것도 잠시 사촌이 땅을 산 것처럼 배가 아팠다. 너만 행복하게 사냐. 나도 행복하다 이거야, 이 새끼야. 그런 생각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우지 못하는데, 운전만 하고 있던 태화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으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쟤 저렇게 나올 땐 뒤끝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불안하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요한, …애 갖고 싶어요?”

    “……뭐?”

    저게 뭔 개소리야?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입양을 하자는 소린가? 근데 네가 아빠면… 애한테 너무 미안하지 않냐? 그러나 태화가 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임신하고 싶은 거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내가 노력했을 텐데.”

    “…장우가 앉았던 전기의자에 너도 앉았다 왔어? 무슨 개소리야?”

    “지는 것 같다면서요. 그게 그 말 아니에요?”

    아, 이 새끼가 국어를 못 한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지냈다. 그동안 말을 잘 들어서 깜박했네. 벽에 대고 말을 하는 것 같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넌 어떻게 그 말이 그 의미가 돼? 제정신이야?”

    “그럴 리가요. 요한이 미친놈이라면서요. 지난번에 미쳤다고 인정도 한 거 같은데?”

    “…….”

    “그래서 애가 들어설 때까지 싸주면 돼요?”

    싸…? 뭘 싸? …쟤 미쳤나 봐. 원장님이 미친놈은 상대하는 거 아니랬는데…. 그것마저 깜박하고 있었다.

    “싸긴 뭘 싸. 너 돌았어? 소름 돋으니까 그만해!”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요한. 나는 준비 됐어요.”

    “내가 준비가 안 됐는데, 네가 준비가 되면 뭘 해!?”

    “요한은 준비할 것 없어요.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야 이 미친 붕어 대가리 새끼야! 너 과학 시간에 졸았어? 초등학교 안 나왔냐? 내가 어떻게 임신을 해! 아니, 할 수 있대도 안 해, 내가 왜 그런 해괴망측한 걸―. 아, 씨발. 내가 왜 이걸 진지하게 받아주고 있지? 나도 미쳤나 봐!”

    “요한, 사람이 그렇게 꼬아서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직관적으로 생각해요. 열심히 싸다 보면 언젠가-.”

    “닥쳐, 이 새끼야!”

    내가 한 소리를 그대로 읊는 녀석에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안전벨트를 손으로 꽉 쥐었다. 운전을 저 새끼한테 맡기는 게 아니었다!

    “나 집에 갈래. 집으로 가, 집으로!”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요. 우리 집으로.”

    “우리 집 같은 소리 하네! 내 집으로 갈 거라고!”

    “아, 그렇죠. 우리 집이 이제 요한 집이죠. 인사과 가서 전속 계약서 제출하고 나면 약속대로 집이며 차며, 다- 요한 명의로 바꿔줄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미쳤다. 저 새끼가 질투로 눈이 돌아서 아무 말이나 막 하나 봐.

    “내릴래! 나 내릴 거야! 당장 차 세워!”

    “고속도로에서 차를 어떻게 세워요, 요한.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너는 지금 말 되는 소릴 하고 있고? 차 세우라고!”

    달리는 차가 들썩였다. 열리지 않는 문을 철컥거리며 창문을 손바닥으로 탕탕탕 두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차는 미친 것 같은 속도로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쟤가… 나쁜 물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러나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다 나한테 배운 건데. 그러니 아마도 우린 이렇게 평생을 살겠지. 서로 신경을 긁으며 악악대고 소리를 지르다가도 또 좋아 죽기도 하면서, 그렇게 재밌게.

    근데 아무리 그래도 임신 드립은 좀 아니지….

    “미친놈아 차 세우라고!”

    “요한이 미쳤다면 미친 거죠. 근데 걱정마세요. 뭐 박을 거 같으면 차 띄울게요. 나 믿죠, 요한?”

    “믿기는 개뿔! 안 믿어 새끼야! 차 세우라고!”

    달리는 차가 요란하게 들썩거리면서도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마치 우리처럼.

    <38광땡> 완결.

    SZ직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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