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49)
  • "놀랐어? 놀라긴 아직 이른데."

    "너, 뭐-."

    꺾인 손목을 낚아채 조수석 헤드에 대고 그대로 칼을 찔러 넣었다. 손등을 파고든 칼날이 헤드에 박히는 느낌이 손잡이를 통해 느껴졌다. 나비칼의 칼날은 기묘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그런 건 원래 베기보단 찌르는 용도였다. 한번 박히면 잘 안 빠지니까.

    “―끄아아악!”

    “박비서!”

    순간 고통에 찬 소리는 지르는 박비서를 돌아본 채애현이 방심한 틈을 타 몸을 돌려 핸들을 붙잡았다. 날을 잡느라 길게 베였던 손바닥 안쪽으로 고통이 번지는 것을 참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차량이 빈 도로 위에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 짓이야! 놔!”

    이를 악물고 손에 힘을 주자, 채애현도 핸들을 잡고 버티며 반대편으로 힘을 준다. 그 사이 칼을 뽑으려는 박비서를 몸으로 밀친 밤나비가 칼을 더 깊이 박아 넣으며 박비서의 턱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크윽-!”

    “이경아!”

    “안전벨트 매요!”

    #114

    박비서와 몸싸움을 시작한 밤나비에게 소리치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그러나 채애현이 다시 한번 왼쪽으로 핸들을 꺾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급제동을 한 차가 앞으로 쏠리며 스키드 마크를 남긴 채 길게 미끄러졌다. 그 충격으로 대시보드에 옆구리가 들이 받쳤다. 억하고 비명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콘솔박스 위로 몸을 걸친 채 계기판 아래 공간으로 다리 한쪽을 욱여넣고 채애현의 목을 팔꿈치로 눌렀다. 컥- 하고 눌린 목소리를 낸 채애현이 힘을 쓰려는 듯 손을 뻗는 것을 보며 액셀을 세게 밟았다. 그러자 다시 앞으로 튀어나간 차가 그대로 옆쪽 가드레일을 향해 달리는 것을 보고 급히 핸들을 꺾었다. 범퍼가 가드레일과 보도 블럭의 연석을 긁으며 심하게 덜컹대다가 다시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충격에 몸이 흔들린 채애현이 힘을 쓰지 못하고 다시 운전대를 붙잡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놈이!”

    “내가, 이자까지 쳐서 돌려준다니까!”

    “놔! 다 같이 죽을 셈이야? 너 미쳤어?”

    “나는 당신이, 태화를 붙잡고 늘어질 때부터, 눈에 거슬렸거든!”

    “꺄아악!”

    계기판의 바늘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차가 갈지자로 휘청거렸다. 전복될 것처럼 휘청거리면서도 속도가 줄어들지 않는 차에 그 안에 든 우리도 엉망으로 뒤엉켰다. 다시 한번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려고 힘을 주자 채애현이 소리를 지르며 왼쪽으로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려 오른쪽으로 꺾으려던 손에서 힘을 풀고 채애현이 힘을 주고 있던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크게 휘청인 차가 반대편 차선을 지나 가로수를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꽉 잡아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치며 액셀을 밟은 발에 더욱 힘을 실었다. 순식간에 차가 가로수를 들이박으며 멈추어 섰다.

    엄청난 속도로 가로수를 들이박은 차로 강한 충격이 덮치며 곧게 서 있던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잠시 후 허리가 꺾인 나무가 천천히 차를 향해 쓰러졌다. 대시보드와 앞유리 쪽으로 튕겨 나갔던 몸은 안전벨트가 당기는 힘에 의해 조수석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러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눈앞으로 가까워지는 나무를 보며 둥글게 몸을 말은 나는 글로브 박스 밑 아래 공간으로 최대한 몸을 밀어 넣었다.

    쾅-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눈앞이 암전되었다.

    ***

    갈비뼈에서부터 번진 고통에 천천히 눈을 뜨자 잘게 금이 간 앞유리 너머로 우그러진 보닛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무가 덮치면서 차의 천장이 안쪽으로 심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게 상황을 살피며 숨을 내쉬자 콜록콜록하고 기침이 터지며 오른쪽 가슴 부근이 끔찍하게 아팠다. 목조차 쉽게 가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안전벨트를 풀려다 낮게 신음을 뱉었다. 칼날을 잡았던 손바닥이 엉망이 된 채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으….”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조수석 시트에 기대며 왼손으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차 안을 둘러보았다.

    에어백이 터진 운전석에는 이마에 피를 흘리는 채애현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아파서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리자 뒷좌석에서 구른 듯 아무렇게나 웅크린 채 정신을 읽은 박비서와 안전벨트를 맨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밤나비가 보였다. 창에 머리를 박았는지 밤나비의 이마에도 크게 피가 번져 뺨까지 길게 핏자국이 나 있었다.

    “으, 윽-.”

    우그러져서 잘 열리지 않는 조수석 문을 간신히 열자 쓰러지듯 아스팔트 위로 몸이 굴러떨어졌다. 그 상태로 기침을 하며 몸을 웅크리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순간 옆구리부터 가슴께까지 끔찍한 고통이 번져서 숨을 참아야 했다.

    “-하아, 하아.”

    참았던 숨을 조심히 내쉬며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은 가슴을 잡고 무릎을 세웠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차의 후미를 돌아 운전석 쪽으로 갔다. 운전석 쪽 창 역시 충격으로 금이 잔뜩 가 있었다. 잠시 숨을 한번 내쉬었다 참은 뒤 팔꿈치를 세워 창을 가격했다.

    챙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에도 피를 흘리고 쓰러진 채애현은 깨어나질 못했다. 그대로 안쪽으로 손을 내려 모든 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뒷좌석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배 부근이 피로 잔뜩 젖은 밤나비는 가늘게 신음하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팔을 들어 어깨에 걸친 후 차 안에서 끌어냈다. 억지로 힘을 주려는 몸의 움직임에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듯 고통을 호소했다.

    “아윽!”

    또다시 옆구리로 번진 참기 힘든 고통과 운전석으로 넘어가 액셀을 밟았던 왼쪽 다리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대로 밤나비를 안은 채 고꾸라진 몸이 다시 한번 아스팔트 위를 굴렀다. 비명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사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폐가 찔린 것처럼 아파서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흐윽, 하아, 하아. 죽겠네….”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때였다. 낮아진 시야 사이로 아스팔트가 검게 진해진 것이 보였다. 차량 밑으로 둥글게 웅덩이가 생기고 있었다.

    “…와, 미치겠다. 콜록, 콜록. 이렇게까지, …하려던 건 아닌데, 윽!”

    코를 찌르는 냄새에 물이 아니라 휘발유가 새고 있음을 눈치채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잠시 옆으로 쓰러진 채 숨을 몰아쉬다 이를 악물고 밤나비를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최대한 차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밤나비를 눕혔다. 기관 테러로 사람들을 대피시킨 듯 거리엔 사람들이 없었고, 차량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잠시 그렇게 밤나비를 눕혀 놓은 옆에서 왼쪽 다리를 살피다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는 차를 바라보았다.

    “…하, 씨발.”

    잠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신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차례로 채애현과 박비서를 차에서 끌어냈다. 일부러 운전석을 노리고 가로수를 들이박았기 때문인지 채애현은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충격에 대비하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몸을 박았을 박비서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완전히 정신을 잃고 쓰러진 박비서의 양어깨를 잡아 짐처럼 끌고 차에서부터 멀어졌을 때였다.

    쾅!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차량이 불길에 휩싸였다. 박비서를 끌다 팔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리자 화끈한 열기와 함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천히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자 검은 차량이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신호탄이 따로 필요 없겠는데….”

    허리춤에 챙겨놨던 신호탄은 몸싸움을 하는 사이 없어졌다. 그러나 긴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불에 타고 차는 신호탄 대용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그대로 아스팔트 위로 누워 팔다리의 힘을 뺐다. 온몸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태화야….”

    파란 하늘 위로 퍼지기 시작은 검은 연기를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빨리 와라….”

    다시금 눈앞이 검게 변하며 정신을 잃었다.

    ***

    - 세가에서 있었던 끔찍했던 테러의 배후자는 가짜 오성파로 불리던 반정부 단체의 소행임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가짜 오성파의 존재 유무에 대한 논란 역시 종결되었습니다. 또한 그 반정부 단체를 이끌던 인물이 세가의 전 기관장이자 횡령죄로 구속된 피의자 채애현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채씨는 기관장을 지내는 동안 세가 내로 이 반정부 단체의 수하들을 잠입시켜 놓았으며, 이를 이용해 도망을 치려다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이라고 밝혀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뉴스가 틀어진 TV에서는 아나운서의 딱딱한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 채씨는 도망치던 중 세가의 요원에게 잡히면서 골절 등의 상처를 입어 현재 외부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이에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국민 청원 운동이 일고 있으며 세가의 새로운 기관장으로 선출된 한태화 기관장은 처벌에 관한 것은 사법 당국에 맡길 뿐이지만, 세가 역시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이 채씨를 잡은 세가의 요원이 서요한 가이드인 것으로 밝혀져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요한 가이드는 채씨를 잡는 도중 중상을 입고 현재 한국병원에 입원 중에 있으며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전해져 주위의 안타까움을….

    무너진 세가 건물을 비추던 화면이 한국 병원의 전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면이 바뀌자마자 TV가 꺼졌다. 검게 변한 화면에 그제야 병실 안으로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작게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서요한을 바라보는 한태화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틀째, 서요한이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몸을 뒤척이려다가 꼼짝도 할 수 없는 느낌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깔끔한 천장에 달린 눈부신 전등이 보였다. 밝은 전등 빛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며 빛을 가리려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멈칫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오른손이 온통 붕대에 감겨있었다.

    아-. 나 다쳤지, 참.

    그제야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인질로 잡아가려는 채애현에 맞서 차 안에서 몸싸움을 벌이다 가로수를 들이박은 일이 떠오르며 그제야 왜 온몸이 아픈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왜 이렇게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지도. 그 사실을 깨닫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침대 옆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태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115

    “…….”

    “…….”

    “…큼, 흠. 인기, 크흠, 인기척이라도 좀 내지. 놀랐잖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탁했다. 헛기침을 하며 어렵게 입을 열자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던 한태화도 그제야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요. 손바닥이 칼에 베여 20바늘을 넘게 꿰맸고, 갈비뼈는 3대나 나갔으며, 왼쪽 다리의 정강이뼈는 부서졌고, 허벅지뼈엔 금이 3개나 갔다는 얘기요?”

    어, 그래. 내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줘서 고맙구나….

    “…생각보다… 많이 다쳤네.”

    “하. 말은 나보다 요한이 더 잘하네요. 저는 심장이 떨려서 말이 다 안 나오는데. …지금 3일 만에 깬 거 알아요?”

    “어쩐지 목이 잠겼더라고….”

    “…….”

    할 말이 그거뿐이냐는 듯 태화가 험악한 기세로 서늘하게 시선을 가라앉혔다. 그 무서운 시선을 피해 눈을 요리조리 돌리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멀쩡한 몸 상태에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근데 그렇게 다친 것 치곤, 상태가 멀쩡한데? 나 엄청 건강 체질인가 봐.”

    “건강…. 하.”

    기가 찬다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살폈다. 정말로 들은 것에 비해선 상태가 좋았다. 갈비뼈가 3대나 나갔다는 것 치곤 숨쉬기도 편했고, 목을 들어 올리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놀란 눈으로 연신 몸을 살피는데,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있던 태화가 작게 혀를 찼다.

    “일단 급한 부분만 치유계 에스퍼가 치료해 놨어요. 자가 치료 능력을 이용하는 능력이라 한 번에 과하게 치료하면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해서 제일 안 좋은 부분만 치료해 둔 거니까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아, 그렇구나. 어쩐지.”

    “…….”

    “…….”

    궁금해하는 것에만 대답을 마친 태화가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러자 금세 불편한 분위기로 바뀌며 숨 막히는 적막감이 흘렀다. 힐끔 눈을 돌려 병원으로 보이는 곳의 천장을 살피다 아,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창백한 안색으로 피를 흘리던 밤나비가 떠올랐다.

    “그, 저, …밤나비는? 어떻게 됐어?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데….”

    “…본인이 지금 남 신경 쓸 상태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 걱정돼서…. 설마… 죽은 건-.”

    말을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표정을 굳히자 태화가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것을 만류한 태화는 조심히 어깨를 밀어 날 다시 침대로 눕혔다.

    “살아있어요. 요한보다도 일찍 깨어나서 멀쩡히 치료받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이다.”

    그제야 한숨 놓으며 뻣뻣이 세우고 있던 고개를 베개에 기댔다. 그러자 태화의 시선이 더욱 세차게 찌르는 것처럼 변했다.

    어허, 저 눈으로 찌르면 찔리겠는데?

    “태화야, 환자를 보는 눈이 너무 차가운 거 아닐까? 내가 지금 좀 서러워지려고 하는데….”

    “…서러워요? 그럼 적어도 저보단 낫네요. 저는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겠다 싶게 3일 내내 지옥이었거든요.”

    “…….”

    그렇게 나오면 나는 할 말이 없지…. 미안한 마음에 입을 다물자 태화가 서늘한 낯으로 한쪽 입매를 끌어올렸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웃는 거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죽을 거면요 요한, 적어도 저는 먼저 죽여주고 가는 친절을 베풀어 주세요. 이렇게 산 채로 피 말리지 말고요. 이게 얼마나… 끔찍한지 알아요?”

    “…….”

    “당신이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모습, 다신 보이지 말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죽여달라고. 알아들어요? 듣고 있어?”

    저게… 고백이야, 협박이야. 쟤가 고백을 이상한 방법으로 하네.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머쓱하게 귀 뒤를 긁었다. 애초에 죽을 생각이 없었다. 살아서 돌아가려고 그런 짓을 벌인 거니까. 근데 저렇게 시체 같은 안색을 하고 있는 녀석에게 그런 말을 해본들 들어 먹힐까 싶었다.

    처음부터 달랐다. 서로의 등급도, 살아온 환경도,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우린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아마 그래서 끌렸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협박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가 저렇게 심각한지 모르겠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둘 중의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도 따라 죽는 결말이 정해져 있는 것은 당연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답이 하나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나 죽으면 너는 나 따라오고, 너 죽으면 나는 너 따라가고. 아주 심플한 문제였다. 오히려 등급이 차이 난다는 이유로 녀석의 약점이 됐을 때가 더 고민스러웠다. 손을 놔야 하는 것을 알지만, 도저히 그 손을 놓을 마음이 들지 않았을 때. 내가 녀석의 차선조차 될 수 없었던 때. 그 순간도 견뎠는데, 이까짓 것쯤이야.

    “싫어. 안 죽일 건데?”

    “…….”

    “너 두고 내가 어떻게 죽냐. 네가 살아있는 한은 무슨 수를 써서든 살아 돌아올 텐데. 그러니 살려두고 나도 살아 돌아와야지.”

    “…요한.”

    “그러니 끔찍하더라도 참고 버텨.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올 테니까. 네 곁으로. 너도 마찬가지여야 하고. 난 버틸 거야. 네가 다시 올 때까지.”

    슬그머니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침대를 벗어난 손이 허공에 놓였다.

    “그러니까 그만 구박하고 가까이 좀 와 봐. 3일 새 얼굴이 반쪽이 됐네. 또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었어? 볼 거라곤 얼굴뿐인데, 관리 좀 하지.”

    “…볼 게 얼굴 뿐은 아니지 않을까요.”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듣고만 있던 태화가 마지막 말에 힘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반박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세 다시 울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내밀고 있던 손의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그나마 멀쩡한 왼손을 잡더니 잡은 손에 세게 힘을 주었다. 그 손 위로 링크가 될 것처럼 기운이 일렁였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안위를 확인하며 그제야 안심할 뿐이었다. 서로가 무사히 살아있음에.

    그렇게 손을 잡고 쳐다보던 태화는 허물어진 표정으로 내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붙인 채 몸을 숙였다. 그런 녀석의 등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 다른 손으로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의미로. 내가 여기 있으니까.

    그러나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태화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

    나흘 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선 태화는 곧바로 열린 임시 총회를 통해 기관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세가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지부의 본청 건물이 무너져 직원들이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고, 채애현이 심어 놓은 가짜 오성파 놈들을 색출해 내려 가장 바쁜 이때, 기관장을 하고 싶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기 싫은 다른 후보들은 모두 기권을 했고, 홀로 남아있던 한태화는 기관 역사에 길이 남을 만장일치라는 결과로 기관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채애현과 박비서는 다른 외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치료가 끝나는 즉시 구치소로 수감 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걸 위해 한태화는 기꺼이 치유계 에스퍼를 보내주기도 했다. 채애현을 구치소에 빨리 처넣으려고. 참 한결같은 녀석이다. 그리고 세가에 잠입해 있던 이들 역시 모두 잡혀 구속되었다고 한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지방 곳곳에 분산시켜 놓았다고.

    무너진 본청은 새로 짓기 위해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문제는 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지낼 곳이 필요했는데, 그에 태화 그룹에서 장학 재단으로 쓰던 건물을 임시로 후원했단다. 그곳에서 다시 한편 조직을 개편해서 남아있는 첩자가 있는지를 살피기 위한 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고 하고.

    물론 이 모든 일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댈 태화가 아니었다. 일에 관해 물으면 환자가 왜 그런 것을 궁금해하냐는 얼굴로 대번에 눈을 흘기기 바쁜 녀석이 그런 친절을 발휘할 리 없었다. 대신 문병을 온 상원이가 전부 알려주었다. 상원이뿐만이 아니라 지금 병실엔 지원 3팀 사람들과 팀장님, 그리고 손재원과 밤나비가 와 있었다.

    오전엔 태화네 가족들이 다녀가서 온갖 잔소리를 들었고, 그 후엔 특진팀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때 같이 왔던 상원이랑 재원이가 남아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듣는 사이 밤나비가 링거대를 끌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놀라서 그 꼴로 어딜 돌아다니냐니까 별거 아니라고 웃어 보인 밤나비는 오히려 내 몸 상태를 걱정했다. 배에 칼까지 맞았던 사람이 괜찮냐고 물어오는 말에 할 말이 없어 기가 막혀 하는 사이 지원 3팀 선배들과 정팀장님이 온 것이다.

    “아주 잘하는 짓이다. 네가 매드 맥스야? 분노의 질주 찍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거기서 가로수를 들이박아!”

    최선배가 오랜만에 보는 화가 난 얼굴로 소리를 쳤다. 아, 또다시 잔소리 타임인가. 그런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강선배가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저거 정팀장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갈 때부터 불안했어요. 잡으려고 했는데, 발만 빨라선. 어휴.”

    “에이 선배님들, 서선배, 아니, 우리 서팀장님 덕분에 채애현도 잡은 건데-.”

    “내가 너 한 번은 이렇게 사고 칠 줄 알았어. 내가 저걸 왜 팀원으로 받았을까. 하.”

    편을 들어주려다 정팀장님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문 상원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듯 손을 들고 물러났다. 그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손재원이 대신 좀 말려보라는 듯 밤나비의 환자복을 죽죽 잡아당겼지만, 밤나비는 오히려 그들을 응원하며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나 끄덕일 뿐이었다. 지금 이곳엔 내 편이 없다.

    #116

    “아니 칭찬을 해도 모자를 판국에 왜 구박을-.”

    “칭찬? 칭찬이라고 했어? 무슨 칭찬? 아이고, 우리 광땡이가 이쁘게 손을 해 먹었네. 이쁘게 갈비뼈도 분질러 먹고, 다리도 분질러 먹었어요. 아주 골고루 분질러 먹어서 배부르겠다 이 새끼야, 라고 칭찬해 주면 돼?”

    “…….”

    평소와는 달리 격분한 최선배의 말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강선배도 그런 최선배의 반응에 놀랐는지 어깨를 붙잡아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놔 봐! 저 등신 같은 게 지금 칭찬해 달라잖아! 그럼 칭찬해 줘야지. 죽을 뻔해 놓고 칭찬해 달라는 새끼, 죽을 때까지 칭찬해 준다, 내가!”

    “서, 선배! 지, 진정해요, 네? 우리 최선배님이 화가 많이 나셨네. 하하.”

    상원이가 얼른 좋게 웃으며 최선배를 타일렀지만 정팀장님까지 나서서 그걸 왜 말리냐며 최선배에게 멀쩡한 내 오른쪽 다리를 가리켜 보였다. 이것도 마저 분질러 버려서 아예 사고를 못 치고 다니게 해야 한다고.

    아주, 매우, 무척 억울했다. 이게 진정 날 걱정해 주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때 그런 정팀장님을 말리고 나선 손재원이 힘으로 팀장님을 밀었다. 그러자 침대에서 점차 멀어지던 팀장님이 잠깐만- 이라며 손재원을 어르기 시작했다. 힘이 안 되니까 말로 저러는 거다.

    “인우가 못 분지르면 내가 분지른다. 나와 봐, 재원아. 다리 하나만 분지르고 조용히 물러날게. 아, 잠깐이면 된다니까?”

    “아씨, 팀장님은 또 왜 그래요! 남은 다리 분지른다고 우리 서선배가 어디 사고 안 칠 사람이에요? 괜히 한태화만 빡쳐서 팀장님을 죽이네 살리네 하지? 기껏 승진해 놓고 또 미운털 박혀서 유배지 돌래요? 그러니까 그만하고 진정들 좀 하세요. 어차피 이제 한태화가 나서서 다신 못 나대게 막을 텐데, 무슨 걱정들이세요.”

    “야… 나대다니? 너 말 다 했어? 저게 내가 못 움직인다고 또 까부네? 내가 이 꼴이라고 너 못 때릴 줄 알지? 저걸 콱!”

    상원이를 향해 그나마 멀쩡한 왼쪽 주먹을 들어 보이는데, 그 뒤로 서 있던 최선배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하고 얼른 손을 내렸지만, 역시나 선배가 혀를 차며 못마땅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 봐, 저 봐. 저거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어허, 말려주면 땡큐다, 하고 있지 선배는 뭘 잘했다고 나서요.”

    상원이가 조용히 좀 하고 있으라고 신이 나서 타박한다.

    채애현을 잡았는데, 칭찬은 고사하고 이렇게 구박만 들어야 하는 건가? 억울한 마음에 천장을 보고 길게 한숨만 내쉬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누구도 그 노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하는 꼴을 웃으며 구경하고 있던 밤나비가 작게 들어오시라고 답했고, 문이 열리며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성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으잉?

    “…어, 어머니?”

    “요한이 너…. 너어! …너 정말….”

    병실 안으로 들어와서 병상 근처로 다가오던 보육원 원장님이 화가 난 표정을 지어 보이다 결국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리셨다.

    으아악! 누구야! 누가 저분한테까지 연락했어! 가만 안 둔다, 진짜!

    “어, 어머니, 그게 아니고요, 아니, 이게 보기보단 많이 다친 게 아닌데…. 아씨, 팀장님이 우리 어머니 불렀어요?”

    “아니거든? 뉴스에서 매일 네 얘기만 하는데, 모르시겠냐? 너 중상으로 입원해 있다고 기사만 몇 개가 떴는데!”

    “누가 허락도 없이 그딴 기사를 내요?! 어떤 미친놈들이-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어머니, 저 중상 아니거든요? 정말 괜찮아요-.”

    “내가 정말, 너 때문에… 흑, 속상해서…. 이게 뭐야. 대체 어딜 얼마나 다친 거야. 내가 그러니까 이 일 좀 그만두면 안 되냐고 몇 번을 얘기했어!”

    침대로 다가온 원장님이 차마 때리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몸을 떨다 또다시 울음을 터트리셨다. 그 모습에 아무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언젠 자랑스럽다고 하셔놓고…. 죄송해요. 많이 다친 거 아니니까 그만 우세요, 네? 자꾸 우시면 저도 속상해요. 그러니까 그만 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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