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49)

당황한 손재원은 주변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잡아 품으로 끌어안으면서도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 거대한 힘이 사람들을 떠받치더니 떨어지는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땅에 가까워졌을 땐, 툭 하고 가벼운 디딤만으로도 착지가 가능했다.

건물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을 보고 넓은 중력장을 펼쳤던 한태화는 옆으로 달려드는 귀찮은 상대에게 불꽃을 폭발시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며 힘을 유지했다. 아직도 건물에선 남아있던 사람들이 뛰어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태화의 발이 묶이자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도 다시 한번 달려드는 에스퍼가 있었다. 그의 이마 위로 뜬 붉은 별을 보고 작게 혀를 찬 한태화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길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그의 앞으로 작은 물방울들이 총알처럼 쏟아졌다. 화들짝 놀란 에스퍼가 뒷걸음질을 치는데, 이번엔 바닥에서 솟아난 물줄기가 그의 발이 잡아챘다.

“으아악!”

“시끄럽게.”

이제야 도착한 정팀장이 잡아 놓은 에스퍼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 뒤에 있던 요원 한 명이 표식이 있는 에스퍼에게 달려들어 뒷덜미를 가격했다.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진 첩자를 돌아보며 한태화는 담담하게 명령했다.

“붉은 별 표식이 있는 자들을 잡으세요.”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곧장 눈앞에 보이는 표식이 있는 자들에게 요원들이 달려들었다. 그사이 뒤따라 오고 있던 서요한은 밤나비를 부축하고 있는 김동원을 향해 달려갔다.

“어떻게 된 거야!”

“당했어. 감찰팀 팀장이 채애현의 편이었어. 치료가 끝난 후에도 시간을 질질 끌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폭발음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어. 어떻게 막아보려 했는데, 몇은 죽고… 보스도 칼에 찔렸어.”

“…칼?!”

김동원의 침통한 목소리를 들으며 서요한이 밤나비를 살폈다. 그러자 창백한 안색의 밤나비가 숨을 몰아쉬며 복부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배어 나오는 것을 보며 서요한은 얼른 입고 있던 점퍼와 함께 긴팔 티를 벗었다. 덕분에 한겨울에 반팔 차림이 된 서요한이 점퍼를 다시 주워 입으면서도 깨끗한 티를 밤나비의 배에 둘러 지혈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손재원은 어느새 사람으로 돌아와 그 옆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아버-.”

“그만! 안 돼, 손재원. 정신 차려.”

“……형.”

밤나비를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려는 손재원을 막으며 서요한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손재원이 밤나비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기엔 아직 시기가 일렀다. 세간에선 아직도 가짜 오성파는 없다는 소리를 하며 음모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성파에 대한 인식 역시 여전히 나빴다. 그러니 손재원이 밤나비의 양아들이란 사실이 밝혀져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서요한이 손재원을 달래고 있던 그때, 갑자기 이마에 별 표식이 있는 자가 서요한의 뒤편 공중에서 나타나 칼을 휘둘렀다. 순간이동 능력자인 감찰팀 팀장이었다.

“형!”

“야, 너, 뒤!”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손재원과 김동원의 외침을 들으며 서요한은 본능적으로 밤나비를 안고 몸을 굴렸다. 그러자 허공을 베어내며 실패한 것을 깨달은 감찰 팀장이 아쉽게 혀를 찼다. 그런 그가 다시 한번 순간이동 능력을 써서 서요한에게 달려들려던 순간이었다. 움찔하며 창백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돌린 감찰 팀장이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순간이동 능력자인 감찰 팀장만큼이나 빠르게 공중을 날아온 한태화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챈 채 살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감히, 누굴-.”

어째서인지 기습을 당한 서요한보다 더 안색이 창백한 한태화가 그대로 감찰 팀장의 뒷덜미를 잡아 바닥에 내리치며 그 몸을 중력으로 짓눌렀다. 그리고는 잠시 시선을 돌려 멀쩡하게 밤나비를 안고 일어나는 서요한을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줄을 잘 서라고 했죠, 이팀장님.”

“…큭!”

“왜 말을 안 듣고 그래요. 내가 많이 유감스럽다니까.”

“아악!”

순간 무릎뼈가 바스라 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끔찍한 고통이 감찰 팀장을 덮쳤다. 비명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던 서요한은 잠시 인상을 찡그려 보이다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서요한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더이상 붉은 표식은 늘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요원들에 의해 하나씩 그 숫자가 줄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현장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저 멀리서 정팀장이 물 벽을 세워 모여있던 가이드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며 서요한은 손재원과 김동원을 불러 모았다.

“일단 이렇게 하자. 본관 쪽에 가면 얼추 정리가 끝나 있을 거야. 치유계 에스퍼도 있을 거고. 이 사람은 내가 데리고 움직일 테니까, 너희는 다른 사람들을 모아서 안전하게 본관 쪽으로 데리고 와줘.”

서요한이 밤나비를 부축해서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도 손재원과 김동원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손재원과 김동원이 고민을 하는 듯하다 결국 서요한의 말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너 믿고 가는 거야. 알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 김동원의 말에 서요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고 있는 밤나비를 잠시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늘어지는 밤나비의 몸을 추슬러 안은 서요한은 김동원을 돌아보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현재 임시 기관장님으로부터 가이드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거든? 이 사람이 보호 관찰 중이긴 해도 일단은 가이드잖아. 그러니 걱정마. 죽게 안 놔둬. 절대.”

“…그래. 고맙다.”

커지는 싸움에 자꾸만 다시 별관 건물 쪽으로 물러나고 있던 사람들에게로 다가간 김동원과 손재원이 양쪽에서 달려드는 에스퍼들을 막아내고 있던 정팀장을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겁을 집어 먹고 자꾸만 뒤로 물러나고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소리 질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서요한은 고개를 돌려 한태화를 쳐다보았다. 잠시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씩- 하고 웃어 보인 서요한이 밤나비의 몸을 다부지게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112

“…이경아….”

“정신 들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얼른 치유 능력이 있는 에스퍼한테 데려다 줄-.”

“채애현….”

“예?”

“채애현을, 잡아야….”

그 말에 서요한이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정신이 없는 현장을 돌아보며 채애현을 찾았다. 밤나비의 말대로 어디서도 채애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김동원으로부터 감찰실에 함께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디로 간 것일까. 그렇게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서요한이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다 다시금 밤나비의 몸을 다잡아 부축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일단 치료부터요. 채애현은 그다음이에요.”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입니까. 여기서 당신을 두고 그 여자나 잡으러 가면, 내가 그 여자랑 다를 게 뭔데요? 됐어요. 말하기 힘들 텐데 억지로 말하지 말고 잠깐만 참아요.”

“…이경아.”

서요한이 다시 본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밤나비가 피식하고 낮게 웃음소릴 낸다. 그러더니 툭툭 서요한이 부축하고 있던 팔을 두드렸다.

“…지금 채애현을 놓치면, 언제 잡을지 장담할 수 없어. 그래도 후회하지 않겠어?”

“…….”

“이경아. 나는 괜찮으니 두고 사람들을 모아서 채애현을 잡으러 가.”

밤나비의 말에 서요한이 결국 다시 한번 걸음을 멈춰 세웠다. 잠시 허공을 노려보는가 싶던 서요한은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는 사람처럼 몇 번이나 울대를 움직이다가 묵묵히 본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쳐다보던 밤나비가 다시 한번 서요한을 불렀다.

“이경아.”

“아, 거. 진짜 말 많네. 무슨 환자가 이렇게 말이 많아.”

“…뭐?”

“뭐든지 우선순위라는 게 있어요. 채애현을 놓치면 후회를 하겠지만, 그러다 당신이 죽으면… 더 큰 후회를 하겠죠. 가짜 오성파 따위는 또 잡으면 돼요. 아니면 내가 그 정도도 못 할 만큼 능력이 없어 보여요?”

서요한의 사나운 기세에 밤나비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곧 작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서요한이 밤나비를 돌아보며 씩- 하고 웃어 보였다.

“내가 그 새끼들 다 잡아요. 그러니 걱정말고 얼른 나아서 그 꼴이나 지켜봐요.”

“…그래.”

부축을 받아 걸음을 옮기면서도 밤나비는 잔잔히 웃음을 터트렸다. 곁에 오래 있어 준 것도 아니건만, 잘 자라준 아이가 손학경은 자랑스러웠다.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옅은 미소를 흘릴 만큼.

진이야, 봐. 우리의 아이야. 정말 잘 자랐지?

손학경은 옅은 미소와 함께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렸다. 문득 그녀가 어디서든 보고 ‘당연하지.’ 하고 자신만만히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

밤나비를 부축한 채 본관 건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참 싸움 중인 곳을 피해서 돌아가느라 측면으로 돌아 본관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있을 건물 쪽으로 향하던 나와 밤나비는 그 앞을 지나는 수상한 사람의 그림자에 걸음을 멈춰 세워야 했다.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요. 서요한 가이드.”

“…네가 왜, 여기….”

그렇게나 찾던 채애현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지키고 선 이는 박명준 비서였고.

분명 태화가 정신을 잃게 만든 후 건물이 무너지기 전 데리고 나와 구석진 곳에 내버려 뒀었는데, 언제 깨어났는지 채애현을 데리고 도망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묶어놨어야 하는 건데. 에스퍼가 아닌 일반인이라고 방심한 것이 문제였다.

“이 귀한 가이드 부자가 이렇게 제 발로 걸어와 주다니. 나도 참 운이 좋다니까.”

채애현이 악의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다가왔다. 밤나비를 부축한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데, 그런 내 앞을 비틀거리며 막아선 밤나비가 낯설어 보이는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아들에게 손대면, 이번엔 정말 가만두지 않겠어.”

“…이거 봐. 이 얼마나 눈물 넘치는 부정이야. 그래, 그 부정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났지! 너희 둘, 너희 부자 때문에!”

이를 악물고 억지를 늘어놓는 채에현의 말에 부축하고 있던 한쪽 손을 내려 주머니를 더듬었다. 정팀장님과 함께 별관 쪽으로 오면서 보급품으로 받은 신호탄이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그것을 조심히 꺼내 허리춤으로 옮기며 상황을 살피기 위해 눈을 굴렸다. 채애현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다들 별관 쪽에만 몰려있었으니까.

아, 그래서 이리 온 거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본관 쪽 주차장으로. 감찰팀 팀장, 그가 순간 능력 이동자였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에 그녀를 데려다 두고, 자신은 시선을 끌기 위해 다시 별관으로 돌아왔던 모양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배에 바람구멍 나고 싶습니까?”

“…그 칼, 쓸 줄은 알고?”

주머니에서 나비칼을 꺼낸 박비서가 손잡이를 접어 칼날을 내보였다. 그에 허리춤에 있던 손을 티가 나지 않게 내리며 빈정거리자 칼날이 곧장 허리께로 다가왔다.

“칼이야 찌를 줄 알면 쓸 줄 아는 거죠. 그러니 가만히 있으세요, 서요한씨.”

옷 위를 긁는 칼날의 느낌에 부축하지 않은 다른 손 역시 얌전히 들어 올렸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채애현을 잡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여기서 이렇게 맞닥뜨릴 줄이야. 굴러들어온 이것이 호박인지 폭탄인지를 알 수 없었다.

“내 아들 등에 바람구멍 나면, 너는 구멍 몇 개 나는 걸론 안 끝나. 그래도 내가 나름 오성파 수장인데, 복수할 힘도 없을까. 안 그래?”

부축하고 있던 밤나비가 내 어깨를 밀어내더니 비틀거리면서도 홀로 섰다. 그런 그에게서 손을 떼면서도 걱정스럽게 살피는데, 날카로운 기세로 경고를 하듯 밤나비의 시선이 박비서와 채애현 사이를 오갔다. 두 사람이 잠시 움찔하며 몸을 사릴 만큼 살벌한 시선이었다.

저 양반이… 저런 얼굴도 할 줄 아네.

매번 허허실실 대던 얼굴의 변화에 놀라워하면서도 항복을 하듯 들고 있던 양손을 조금 더 높이 들었다. 어쨌든 우리가 불리한 상황인 것은 맞으니까. 다친 밤나비가 있는데, 위험한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채애현이 굳었던 얼굴을 풀며 비릿하게 웃었다.

“데려가자.”

“예?”

놀라 미간을 찌푸린 박비서가 반문을 하며 확인을 하듯 채애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채애현이 검은 SUV 차량 앞으로 가 차 문을 열며 태연히 말했다.

“마침 인질로 쓰기 딱 좋은 둘이잖아. 저자가 내 손에 있는 한 가짜 오성파의 짓을 다시 오성파가 한 짓으로 꾸미기도 좋을 것 같고. 저자는 제 아들이 걸리면 그게 뭐든 다 할 거거든.”

차 문을 열어 둔 채 우리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온 채애현이 밤나비를 흥미롭게 살피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서 진득한 살의가 읽혔다. 그 화는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나 때문이라는 것처럼.

“특히 한태화에게 복수하기엔 이만한 인질이 없지.”

광기로 얼룩진 눈이 기묘한 빛을 띠고 반짝이는 것을 내려보다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개 버릇 남 못 주고 아직도 이러네. 당신 눈에 나는 그냥 한태화한테 달린 리드 줄이지? 쥐고 흔들 손잡이거나.”

“그럼 별 볼 일 없는 D등급 짜리 가이드가, 그 외에 무슨 효용 가치가 있지?”

“…하, 씨발.”

“아, 입은 아주 잘 놀리던데? 성화영을 찾아가서 입 놀린 게 너지? 덕분에 아주 인상 깊은 일을 당했어.”

짝!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이 날아와 뺨을 때렸다.

“이경아!”

“어허, 가만히 있으시죠. 이거 안 보입니까?”

뺨을 맞는 모습에 달려드는 밤나비를 팔꿈치로 밀어내며 경고를 해 보인 박비서가 다시 한번 허리 부근의 점퍼를 칼날로 긁어댔다. 그러자 이를 악문 밤나비가 험악한 얼굴로 박비서와 채애현을 노려보았다. 그 사이에도 그가 서 있는 자리에는 핏방울이 떨어져 동그랗게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채 그런 밤나비를 살피다 터진 것 같은 입술을 혀로 확인한 뒤 퉤 하고 피 섞인 침을 뱉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좆같은데,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하하- 지긋지긋하다, 진짜.”

“나만큼 네가 지긋지긋할까. 내가 쌓은 모든 걸 네가 망쳐놨는데!”

채애현이 지껄이는 말에 눈을 휘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럴 때 웃으며 하는 말이 얼마나 찝찝한지 한태화를 통해 배웠다. 상대하기 싫은 미친놈 같아 보이니까.

“뭐, 그 범죄를 저질러 쌓은 것들? 그건 언제고 무너지게 돼 있었어. 나 때문이 아니래도.”

“이 건방진 게!”

“근데 네가 나한테 한 짓들은 꼭, 이자 쳐서 갚아 줄 테니까 기대해.”

“하…, 그래, 기대하지. 끝까지 살아있을 수 있다면 말이야. 박비서, 저것들 모두 태워.”

명령을 내린 채애현이 SUV 차량의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그러자 여전히 내게 칼을 들이대고 있던 박비서가 움직이라고 소리를 치며 간신히 서 있던 밤나비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상처 부근을 손으로 감싸고 있던 밤나비가 가늘게 신음하며 차체를 잡고 몸을 숙인 채 숨을 참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씨발, 네 말대로 배에 바람 구멍 난 사람이야! 환자라고!”

“남 걱정말고 얼른 타기나 해. 네 배에도 똑같은 구멍이 나기 전에.”

“…….”

박비서가 비릿하게 웃으며 밤나비의 어깨를 잡아 뒷좌석으로 거칠게 밀어 넣는다. 그리고는 그 옆으로 타며 조수석을 턱짓했다. 배를 잡고 웅크리고 있는 밤나비를 향해 보란 듯이 칼날을 꺼덕거리는 놈을 가만히 노려보다 천천히 조수석에 올라 차 문을 닫았다. 뒤에서부터 튀어나온 칼날이 목 부근에 닿았다. 최대한 시트에 등을 기댄 채 칼이 향한 곳을 곁눈질하다 시선을 들어 올렸다. 시동이 걸린 차가 움직이며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13

김동원과 정팀장도 같이 싸워 본 사이라고 손발이 잘 맞았다. 그 둘과 요원 몇이 가이드와 일반 사무원들을 데리고 별관 지역을 벗어나는 것을 보며 한태화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한번 쓸어올렸다. 그 역시 떼로 덤벼드는 싸움에 여기저기 셔츠가 찢어지고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슬슬 정리를 해야겠는데. 한태화가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때였다. 눈을 감고 있던 차수경이 서서히 눈을 떴다. 그녀가 펼쳐놨던 텔레파시 장은 진즉 거둬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한참 만에 눈을 뜬 그녀는 가볍게 양손을 들어 올린 모습으로 천천히 싸움판을 거닐기 시작했다. 무심한 얼굴로 느긋하게 걷는 그녀의 발길을 따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붉은 표식이 떠올랐던 자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정신을 파고들어 재워버린 차수경이 피날레를 장식하는 모델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한태화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그녀가 걸음을 멈춘 순간, 모든 싸움이 끝나 버렸다.

“늦어.”

그러나 그런 차수경의 활약에도 한태화는 타박이나 하며 작게 혀를 찼다. 말은 필요 없었지만 처음 출발하면서부터 세운 계획이었다. 사실 차라리 다 죽여버리는 쪽으로 싸웠다면 한태화가 이만큼이나 고생할 일은 없었다. 저쪽에선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데, 이쪽에서는 최대한 죽이지 않는 방향으로 싸움을 끌어가야 하다 보니 정리가 늦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면 나중 일을 계획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이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난 가짜 오성파의 존재를 부각시키면서 그들을 확실한 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원 몰살이라는 결과를 낸다면 누가 진정한 악당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세가의 이미지에도 좋지 않았고.

한태화는 적당히 상대하기가 더 힘들었는지 짜증스러운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그런 한태화의 태도에 차수경이 화를 냈다.

“텔레파시 장이 얼마나 머리 아픈 일인 줄 알아? 이렇게 넓은 범위로 펼치면 잘못 하다간 그대로 폭주라고.”

범위 내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떠들어대는 느낌. 그 속에서 필요한 정보만을 찾아 표식을 새기는 일은 차수경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한태화야 비웃었지만.

“공치사 듣고 싶어?”

“…됐다. 말을 말아야지.”

어차피 차수경은 한태화로부터 좋은 말 듣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못마땅하게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한발 물러난 차수경은 그러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겨 잠들어 있던 그의 정신을 깨웠다.

“뭐해?”

그런 차수경의 옆으로 한태화가 와서 팔짱을 끼고 섰다. 그러자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낸 감찰 팀장이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그는 몽롱한 눈으로 앞을 보다 한태화를 보고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차수경이나 한태화나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까 뭔가 좀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그럴 정신이 아니라서 깊게 파고들진 못했는데….”

말을 하다 도중에 멈춘 차수경이 감찰 팀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인상을 찡그리며 그의 명치를 무릎으로 찍었다.

“억!”

“이 새끼야. 이 새끼가 채애현을 빼돌렸어. 그리고는 시선을 끌기 위해 이곳으로 다시 왔던 거야. 채애현은 본관 쪽으로 가서 차를 타고 달아났나 본데?”

“하―.”

한태화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곧 그가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가봐야 늦겠지?”

“아마도? 10분은 더 지난 것 같은데, 벌써 도망쳤겠지.”

“…됐어, 그럼. 그 여자 갈 곳이야 뻔하지. 정신 감정으로 본거지 알아내서 하나하나 치다 보면 쉽게 잡힐 거야.”

“너… 귀찮아서 그러지? 어째 기관장이랍시고 일 열심히 하는 척 굴 때 이상하다 했다. 넌 그냥 서요한씨에게만 잘 보이면 되는 거잖아.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다니까.”

“시끄러워.”

냉담하게 대꾸를 하면서도 한태화가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남아있던 요원들에게 쓰러진 자들을 모아서 묶어 두란 지시를 내린 후 곧장 본관 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차수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한태화는 처음 기관에 들어와 안면을 텄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아니, 서요한씨한테 하는 거 보면 그렇지도 않은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차수경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불쌍한 우리 수혁이. 하필이면 상대가….”

그녀의 혼잣말이 안타깝게 허공으로 흩날렸다.

***

룸미러를 통해 밤나비의 상태를 확인했다. 뒷좌석에 몸을 숙인 채 앉아 거칠게 호흡하는 밤나비의 어깨가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살피다 채애현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름 치유계 에스퍼 아닌가? 잡아갈 때 잡아가더라도 치료는 좀 해 주지?”

“내가 너희 데리고 야유회 가는 건 줄 알아?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는 빠른 속도로 도로를 질주했다. 지원팀이 오면서 주변의 차량을 통제해 놓았는지 도로 위로 다니는 차는 우리가 탄 차뿐이었다. 잠시 후 저 멀리 진입 금지라고 쓰인 노란 입간판이 나타났다. 그러나 차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힐끔 운전석을 바라보다 박비서에게 보이게끔 손을 들어 올리며 안전벨트를 찾았다.

“안전벨트만 좀 맬게. 무서워서, 원. 살 수가 있나.”

빠르게 다가오는 입간판을 보며 안전벨트의 줄을 넉넉하게 잡아 버클에 끼웠다. 그리고 걱정스럽게 뒷좌석을 돌아보았을 때,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차량의 앞범퍼가 입간판을 쳐내며 빠른 속도로 달렸다. 충격으로 덜컹대는 진동을 느끼며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최대한 시트 쪽으로 붙였다. 그럼에도 목 근처에 닿아 있던 칼날이 얇게 목을 베며 지나갔다.

입술을 깨문 채 고통을 참고 운전 중인 채애현을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흔들리는 몸을 다잡으며 이를 악문 채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가를 빨리 벗어나는 것이 목적인 듯 했다. 하긴, 이번에 다시 잡히면 그녀도 끝일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급하니 나나 밤나비를 인질로 잡아 두고서도 묶지 않은 것이겠지. 이성적인 척하고 있지만, 채애현이고 박비서고, 당장 세가를 빠져나가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더욱 채애현이 도망가게 둘 순 없었고.

차가 흔들릴 때마다 목 부근에서 같이 흔들리는 칼을 곁눈질하다 곧장 칼날을 손으로 잡았다. 손바닥 안이 길게 베이며 화끈한 감각이 번졌다. 그러나 접이식 나비칼은 일반적인 손칼보다 날이 작은 편이었다. 박비서가 건물 안에서 휘둘렀던 나이프에 비하면 길이도 적고, 폭도 좁았다. 물론 힘을 주고 휘두르면 손가락 한, 두 개쯤 날리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 손가락이 날아가기 전에 칼을 쥔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아 비틀었다. 칼날을 쥐고 있던 손 역시 다른 방향으로 돌려 박비서의 팔을 꺾어 버리자, 비명을 지른 놈이 칼을 놓쳤다.

그 떨어지는 칼을 잡아 쥔 채 뒤로 몸을 돌렸다. 나비칼의 특성상 칼 손잡이가 양쪽으로 분리되어 움직이기 때문에 플리핑이라는 묘기 같은 걸 할 수가 있었다. 흔히 조폭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화려한 칼 돌리기 같은 기술이었다. 어릴 때 그게 멋있어 보여서 멋모르고 참 많이도 따라 했었다. 그거 때문에 베이기도 많이 베여가면서.

손에 잡힌 세이프 핸들을 잡고 바이트 핸들과 함께 칼날을 돌리며 손잡이를 접었다가, 그대로 손등 위로 돌려 백핸드로 잡고 또다시 손잡이와 함께 칼날을 돌렸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가던 칼을 스냅을 줘서 위로 튕기자 핸들 두 개가 동시에 잡혔다. 꺾였던 손목을 붙든 채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박비서가 시선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며 씩 하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괜히 아까 쓸 줄은 아냐고 물었던 게 아니다. 이 칼의 특징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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