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49)

“으- 쓰기 싫어 죽겠네. 쓰기 싫어, 쓰기 싫다아-.”

타닥타닥 빠르게 들리는 타자 소리와 함께 상원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연신 쓰기 싫다, 쓰기 싫다, 염불을 외고 있었다. 현재 사무실엔 우리 둘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한심한 소리를 함께 구박해 줄 사람이 없었다. 현장팀 사람들은 마약 제조업장과 조필상 집을 다시 한번 조사하러 나갔고, 김영민 가이드와 이소영 가이드는 연장우를 만나기 위해 검찰의 협조를 받아 면회를 갔기 때문이다. 물론 기관장인 한태화가 대신 관계기관으로서 협조를 요청하여 승인을 받아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둘만 남은 사무실 안으로 유독 타자 치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경위서를 입으로 쓰냐? 손만 써, 손만. 그리고 뭘 그렇게 열심히 써. 대충 써서 넘기라니까.”

“어우씨, 저도 대충 쓰고 넘겨버리고 싶은데, 그럼 또 상세 내용 기술하라고 보정 명령 내려와서 반려할 거 아니에요. 이래서 현장 나가는 걸 싫어하는 건데.”

“자랑이냐? 그리고 반려를 몇 번 당하는 게 낫다고 몇 번 말해. 두세 번 반려 당하면 그쪽도 지쳐서 더는 반려 안 시킨다니까.”

“그거 싫어서 이러고 있는 거라구요! 같은 일 두 번, 세 번 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단 말이에요!”

쯧쯧, 사서 고생을 하겠다는데 뭐. 말릴 생각 없이 작게 혀를 차는 사이에도 타자 소리는 무섭게 사무실 안을 울렸다. 그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나더니 빼꼼히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 어, 형도 계셨네요?”

“너-, 무슨 일이야? 또 차출 요청받았어?”

이틀 전, 마약 작업실을 찾았던 이후 손재원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도 모르는데, 아직 정식 요원도 아닌 녀석을 계속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틀 만에 다시 사무실을 찾아온 녀석이 잠시 당황해하다 금세 순하게 웃어 보이며 ‘짠!’ 하고 손에 든 것을 내보였다.

“형, 이거 보세요! 저도 이제 정식 세가 요원이에요. 아직 인턴이긴 하지만!”

신분증 겸 보안카드를 대신하는 에스퍼 증을 자랑스럽게 내민 손재원이 환하게 웃었다. 요원직 인턴 신청을 한 것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빠른 승인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에스퍼 증을 받아서 직접 확인했다.

“그게 벌써 승인 났어? …진짜네. 축하한다. 이제 진짜 직장 동료네.”

“예.”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녀석을 기특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그 사이로 끼어든 상원이가 에스퍼 증을 살피다 삐죽이 입매를 씰룩거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특채 에스퍼 증인가? S등급이라고 승인도 엄청 빨리 났네. 역시, 졸속 행정의 대가! 근데 불쌍해서 어쩌냐, 너 이제 큰일 났는데.”

“제가요? 제가 왜 큰일이 나요?”

혀를 차며 고개까지 내젓는 상원이의 모습에 손재원이 불안해진 얼굴로 에스퍼 증을 내려보았다. 그런 상원이에게 괜한 소리 말라는 눈짓을 해보이며 에스퍼 증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말을 들어먹을 윤상원이 아니었다.

“생각해 봐. S등급 요원을 세가에서 얼마나 굴려 먹겠어.”

“…….”

“한태화야 집안이 빵빵해서 손을 못 댔지만, 너는… 흠. 너 금수저야?”

“아, 아뇨?”

“거봐, 큰일 난 거 맞다니까. 이제 너는 곧 흡혈귀한테 피 빨리듯이 능력을 쪽쪽 빨려서 막 미라 같이 되어서는-.”

“이 미친놈이, 괜히 애 겁주지 마.”

참다못해 상원이의 등을 세게 내리치며 하지 말라고 타박하자, 소금을 맞은 문어처럼 맞은 자리를 문지르려 온몸을 꿈틀거리던 상원이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소리를 빽 지른다.

“아, 뭐요! 애라도 알 건 알아야죠! 좆됐다는 걸 빨리 알아야 쟤도 지 살길을 알아볼 거 아니에요! 내가 다 쟤 생각해서 해주는 소린데!”

“좆돼긴 뭐가 좆돼. 널 만난 게 세상에서 제일 좆같았던 일로 만들지 말고,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말라고.”

“이게…, 그 정도로 힘들어요?”

손재원이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떨며 잘게 눈동자를 떨었다. 눈에 띄게 나빠진 안색을 보며 놀리듯 장난기 어린 표정을 해보이던 상원이가 순간 심술궂게 눈을 접었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고 거드름을 피우며 고리짝 적에나 했을 법한 말을 꺼냈다.

“어. 거의 죽었다고 봐야지. 이런 얘기 아나? 눈 감아 봐.”

“눈, 눈이요? 눈은 왜….”

불안한 얼굴로 눈치를 보던 손재원이 내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면서도 정말 눈을 감았다. 그 순진한 모습에 쟤를 어쩌나 싶어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에도 상원이의 장난은 착실히 진도를 나아가고 있었다.

“손요원, 뭐가 보이나?”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깜깜해요.”

“그러취! 그게 바로 네 미래야! 그거라고!”

“……진짜요?”

이제는 울 것처럼 표정을 찡그린 손재원이 사실을 확인하듯 나를 쳐다보며 불안한 사람처럼 눈을 울먹인다. 그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애한테 겁이나 주고 있는 상원이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내가 그만하랬지.”

“아악! 방금 호두 깨지는 소리가 났어! 내 이마! 내 잘생긴 이마가!”

“두부 으깨지는 소리겠지. 넌 이제 막 기관 들어온 어린 후배한테 그러고 싶냐? 이 화상아?”

“내가 뭘요? 나도 다 쟤 생각해서 해준 피 같은 조언이라니까요! 근데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내 꿀 같은 노하우를 안 알려주는 수가 있어요!”

“꿀 같은 노하우? 너처럼 뺀질거리게 만들어서 어디다 쓰라고? 넌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어. 재원이 너도, 이제 일 끝났으니까 쟤랑 놀지 마.”

진지한 얼굴로 상원이를 피하라고 당부하자 손재원이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새 붉어진 이마를 잡고 문지르던 윤상원이 그런 손재원을 향해 배신감에 찬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그런 상원이를 피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던 손재원이 갑자기 날카로운 표정으로 불이 꺼진 팀장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끈하던 녀석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이 거대하게 부풀며 늑대로 변했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눈을 크게 키웠다.

“…손재원?”

“뭐, 뭐, 뭐야? 설마 그러고 나 치려고?”

뭐야, 진짜 화났나? 갑자기 늑대로 변한 손재원의 모습에 놀라 멈칫하며 몸을 굳히는데, 그 순간 거대한 늑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며 긴 팔을 휘저어 책상을 들더니 그 채로 뒤집어썼다.

콰아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팀장실 쪽의 벽이 터지며 불길이 솟구쳤다. 매캐한 타는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휘날리며, 짙게 피어오른 먼지 바람에 기침이 튀어나왔다.

“이, 이게 무슨- 콜록!”

“뭐야, 콜록, 무, 무슨 일이야?!”

정신을 차려보니 커다란 책상을 방패 삼아 폭발로부터 우리를 보호한 늑대의 품속이었다. 긴 팔에 같이 매달려 있던 상원이와 마주 보다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엉망이 된 사무실로 조금씩 불이 번지고 있었다. 그제야 폭발을 막아준 손재원의 상태가 걱정돼서 녀석을 살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지 너덜너덜해진 책상을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난 늑대가 천천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팀장실부터 해서 특진팀 사무실은 온통 엉망이 되어있었고, 천장에서 전등을 달고 길게 늘어진 전기선에선 위험해 보이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무너진 벽과 폭발로 날아간 책상 및 집기류로 바닥은 발 디딜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설마….”

사무실의 상태에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떨자,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지 상원이가 말을 이어갔다.

“미친…, 세가 본청이… 테러당한 거예요, 지금?”

말도 안 돼. 그런 표정으로 상원이와 마주 볼 때, 우리 둘을 한 팔로 안고 서서 주변을 살피던 손재원이 망가진 문을 발로 차 날리며 그대로 복도 밖 로비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심하게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특진팀 사무실뿐만이 아니라 같은 층에 위치한 다른 팀들의 사무실들도 모두 엉망이 된 것이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로비와 반대편 공룸 쪽은 비교적 상태가 괜찮았다는 점일까. 그곳에 나와 상원이를 내려 준 손재원은 원래 있던 사무실 쪽을 돌아보며 귀를 쫑긋거리다 우물쭈물하는 태도를 보였다.

“설마 저 안에 누가 또 있어?”

그 이유를 짐작해서 물으니 잠시 머뭇거리던 늑대 머리가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뭐 하고 있어. 우린 괜찮으니까 가서 구해줘. 어서!”

“…….”

그 말에도 잠시 더 고민하며 우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늑대는 이내 결심이 선 듯 네 발로 훌쩍 뛰어 전등이 모두 깨진 어두운 복도 안으로 사라졌다. 옆에 서서 불안한 얼굴로 금이 간 3층 벽을 둘러보던 상원이는 그런 손재원을 힐끔 바라보다가 얼른 내 팔을 붙잡았다.

“일단 밖으로 피하죠, 선배.”

“그래.”

지금까지의 폭탄 테러의 패턴을 보았을 때, 폭발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리 없었다. 상원이의 말대로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갑자기 공룸 쪽 부근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사람이 하나 튀어나왔다.

#107

“이, 이, 이게 지금, 무,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세요?”

“박비서님? 박비서님이 왜 공룸 쪽에서-.”

놀란 얼굴로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이를 보며 상원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는 현재 임시 기관장인 한태화의 비서인 박명준이었다.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일반인으로 채애현의 비서였던 그는 한태화가 아직 임시 기관장이라서 그대로 직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식 기관장이 선출될 때까지만 임시로 비서직을 수행하고 있는.

문제는… 그가 바로 내가 의심하고 있던 첩자라는 점이다.

가짜 오성파를 잡기 위해 잠입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손재원의 얼굴을 모르고 우리가 조필상을 잡기 위해 출동하던 날, 그 회의에 같이 참석했던 자.

그 교집합에 남아 있던 인물이 수상한 곳에서 나오자 어깨를 굳히며 긴장을 했다. 일반인인 그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공룸에서 나온단 말인가. 의심스러운 얼굴을 박비서를 노려보는데, 예상대로 놈이 곧장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얼굴이야 걱정하는 사람처럼 찌푸리고 있었으나, 순간 손이 허리 뒤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그것을 눈치채자마자 그가 가까워지기 전 그대로 발을 들어 어깨를 차낸 후 바닥에 쓰러진 이의 팔을 잡아 비틀며 무릎으로 등을 찍었다.

“큭, 왜 이러, 악!”

“너 뭐야. 어디 소속 사람이지? 가짜 오성파야? 이 폭발도 네 짓이지.”

소매 속에 숨겨져 있던 칼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놀라서 눈을 크게 키우고 있던 상원이가 얼른 칼을 집어 멀리 내던지며 손재원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보이더니 무언가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상원이의 얼굴도 불안하게 변했다.

이 일을 벌인 게 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니까.

“이거 아무리 봐도 저놈 혼자 한 것 같지가―.”

아무래도 첩자가 박비서 외에도 있는 것 같다는 얘길 하려는데, 이번엔 공룸 쪽 복도에서 폭탄이 터지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놀라 고개를 들자 마치 슬로우 모션에 걸린 것처럼 우리를 집어삼킬 듯 부풀어 오르고 있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보였다.

큰일 났다.

얼굴과 목, 맨살이 드러난 부분에 스치는 돌조각들을 느끼며 눈을 감았을 때였다.

“요한, 괜찮아요?”

낮고 울림이 풍부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눈에 익은 하얀 손이 뻗어 나와 뺨을 감쌌다. 폭발하던 불덩이 역시 물길이 갈라지듯 갈라지며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았다.

이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걱정을 담은 채 찡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태…화야.”

“네, 요한. 괜찮아요? 제가 너무 늦었죠. …다쳤네.”

속상하다는 얼굴로 손을 뻗은 한태화가 내 뺨과 목덜미 부근을 훑었다. 시선을 내리니 팔을 꺾어 누르고 있던 박비서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태화가 했나? 아직 좀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뺨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며 고개가 들렸다.

“그러게 왜 아직 기관에 남아 있었어요. 일부러 연장우를 만나고 오라고 허락도 해 줬는데…. 요한이 남아 있어서 놀랐잖아요.”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때였다. 공룸에서 터진 폭탄 때문에 제어기가 고장 난 것인지 하얀 수면 가스가 무섭게 새어 나오며 복도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선배, 수면 가스에요! 아이씨, 이 멍멍이 새끼는 왜 이렇게 안 와!”

당황한 상원이가 수면 가스를 보고 손재원이 사라진 복도 쪽을 보며 다급하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순간 복도 너머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거대한 늑대가 불길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사람 키만 한 팔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람이 미약하게 숨을 몰아쉬며 안겨 있었다.

“다른 구조자는?”

다급하게 물은 질문에 늑대로 변한 손재원이 기척을 감지하듯 뾰족하게 선 귀를 몇 번 더 쫑긋거렸다. 그러다 이내 힘없이 고개를 저어 보인다.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무는 사이, 또다시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며 이번엔 발밑이 흔들렸다.

“이번엔 2층이에요! 이거 밤나비 탈옥 전에 오성파가 썼던 방식이랑 똑같은데요?”

건물이 흔들리는 진동에 바닥으로 주저앉은 상원이가 소리를 지르면서도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웅크렸다. 그런 상원이를 보호하듯 그 위로 팔을 늘어뜨린 늑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건물을 사방으로 훑었다. 폭발을 견디지 못한 건물 전체로 금이 가며 위험스럽게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격하게 흔들리는 바닥에 한태화의 팔을 잡고 버티고 서 있던 나 역시 불안한 눈으로 건물 벽을 살폈다. 그 순간, 손바닥 아래의 팔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져 한태화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건물의 흔들림은 멈춰 있었고, 부서져 내리던 천장의 돌 부스러기들이 공중으로 떠올라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사방을 둘러보다 한태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설마… 이 건물 전체에 힘을 쓰고 있는 거야?”

다시 한번, 2층에서 폭발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 폭발에는 건물이 흔들리지 않았다. 강한 힘에 둘러싸인 건물은 전체에 금이 간 위태로운 상태로도 흔들림 없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무너진 천장에서부터 떨어지던 돌무더기들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기관 전체 넓이가 얼마더라?

건물이 흔들릴 때 보다 더 큰 불안감이 느껴져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무리한 능력의 사용은 에스퍼의 폭주를 불러온다.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 다시 한번 떠올라 머릿속을 스쳤다. 점차 불안정해지는 심장 박동에 거친 숨을 내쉬며 세가 건물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체적으로 기억자 모양인 거대한 건물은 결코 좁은 범위가 아니었다. 아무리 S등급인 한태화의 능력이 범위가 넓은 편이라고 해도 그 전체를 커버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태화의 가이딩을 해준 게 언제였지?

찡그린 얼굴로 날짜를 계산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시선을 마주친 한태화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저를 잡고 있던 내 팔을 툭툭 하고 가볍게 두드렸다.

“요한, 빨리 나가요. 여긴 위험해요. 그리고 누가 접근하더라도 절대 곁을 허락하지 마세요.”

“…….”

기관 내에 숨어든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태화도 눈치채고 있었구나. 그 사실을 깨달으며 입안 쪽의 살을 깨물었을 때였다. 조금 더 먼 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번엔 1층. 예전에 오성파가 했던 대로 시간차를 두고 폭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告�. 왜 도망칠 시간을 주는 거지. 설마… 또다시 이 모든 짓을 오성파의 짓으로 덮어씌우려는 건가?

복잡해진 머리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팔이 잡아당겼다.

“한태화 말대로 일단 저랑 나가요, 선배. 여긴 너무 위험해요.”

상원이가 간만에 보는 진지한 얼굴로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런 상원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녀석이 잡고 있는 손을 다른 손으로 물렸다.

“상원아.”

“이런 상황에서 남겠다는 헛소릴 할 거라면-.”

“가서 사람들을 도와. 최대한 빨리 전원을 대피시켜야 해. 건물의 크기가 너무 크고, 범위도 너무 넓어. 태화라도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선배!”

“부탁 좀 하자. 응?”

“…….”

이번엔 내가 상원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절박하게 말했다. 일단 최대한 빨리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했다. 그 사이까지 한태화가 무사히 버텨주어야만 했고. 그러나 태화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윤상원. 요한 데리고 어서 나가.”

고민하듯 말이 없어진 윤상원을 향해 태화가 낮게 윽박질렀다. 그러나 건물을 때려 부수는 것보다 힘든 게 유지 시키는 일일 것이다. 폭발이 터질 때마다 평소와 달리 미간을 찌푸린 채 힘겨워하던 한태화는 지금까지 제자리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무리를 해서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내 시선을 따라 한태화의 발치로 시선을 내렸던 상원이가 내가 이러는 이유를 눈치챘는지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퍼져 나가고 있는 수면 가스를 살피다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108

“아오씨, 미치겠네, 진짜…. 최대한 빨리 다 대피시킬 거니까 신호하면 바로 힘 풀고 튀어나와요! 저 수면 가스 맡고 잠들면 진짜 답 없어지는 거 알죠?”

“…응.”

그 말에 나는 웃고, 태화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윤상원은 길게 시간을 끌지 않고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손재원을 챙겨 계단으로 내려갔다.

“조금만 더 버텨요! 그리고 멍멍아, 너는 내려가면서 남아있는 사람 있으면 구해. 혹시 공격할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공격하는 새끼 있으면 봐주지 말고 그냥 조져! 그리고 다 끝나면 1층 왼편 복도의 방송실로 와!”

계단을 내려가며 그렇게 소리친 상원이의 지휘에 따라 손재원도 훌쩍 뛰어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웃으며 장갑을 벗었다. 그러자 지금껏 가만히 서 있던 한태화가 슬쩍 몸을 뒤로 물렀다. 그래 봐야 반걸음 뒤로 물러난 것에 그쳤지만. 역시나 무리하고 중인 것이다.

“요한, 나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일단 밖으로 대피해 있어요. 제가 금방 따라갈 테니까-.”

“조용히 해. 네가 뭐라든 너 두고 어디 갈 생각 없으니까. 나 대피시키고 싶으면 네가 직접 데리고 움직여.”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녀석의 목을 손으로 감쌌다. 피부가 닿은 자리로 기운이 일렁이며 아찔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난 후, 익숙한 공간에 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넓게 펼쳐진 색색의 꽃밭. 그 위로 펼쳐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분홍빛 하늘.

그러나 그 하늘은 빠른 속도로 금이 가며 깨진 유리처럼 조각나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꽃밭의 가장자리 부근도 빠르기 시들어 갈색빛의 지평선이 서서히 몰려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러면서 괜찮기는. 무서운 속도로 망가져 가고 있는 근원의 모습에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머리 위에서 투명한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말이 잠시 쉬어 가는 회전목마.’

지난번 밤나비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엄마와 나의 근원은 같다. 그러나 엄마는 어린 내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제대로 힘을 쓰지 않았고, 그 근원을 전부 보여 준 적 역시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제대로 된 방식을 몰랐던 거고.

그러나 밤나비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힌트를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근원에 있던 나비를 다른 사람의 근원으로 불러들여 힘을 쓰는 모습 역시 보여주었었다. 그는 전부 내게 알려주고자 그런 짓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의미는 아마도….

“요한, 에스퍼가 힘을 쓰는 상태에서 동시에 가이딩을 하는 건 위험해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둬요, 예?”

“…….”

“요한, 제발 제 말 좀 들어요.”

애절한 목소리가 애원해 오는 것을 무시하며 가이딩에 집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20년 가까이 해오던 가이딩의 방식을 바꾸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 진짜… 마음처럼 쉽지 않네.

“요한-.”

“태화야, 닥쳐, 좀.”

“…….”

“이게 나도 처음 해보는 거라… 생각보다 어렵네.”

“…네?”

제발, 제발 제발, 좀 와라!

나야말로 간절하게 애원하며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팔을 당겨 녀석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그리고 절박하게 빌었다.

제발, 제발 좀.

“아, 좀! 오라고!”

“…요한?”

그때였다.

꽃밭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눈 한번 깜박이지 않은 채 그 먼 곳을 주시하자 하얀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움에 천천히 입이 벌어졌을 때, 눈앞엔 회색의 갈기를 가진 하얀 말이 서서 툭툭, 앞발을 구르고 있었다.

…됐다. 진짜… 다른 방식이 가능한 거였어.

놀라운 마음으로 멍하니 말을 보라보다 조심히 손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조금 머뭇거리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얌전히 서 있던 하얀 말이 한걸음 다가와 내밀고 있던 손바닥에 제 콧등을 콩- 하고 가져다 댔다. 마치 원래부터 나와 알고 있던 사이인 것처럼.

그래, 착하지? 응, 착할 거야. 착하다고 믿을게.

그러니까 내가 널 좀 타도 될까?

가만히 선 백마가 순하게 눈을 꿈벅였다. 그 모습에 마른 침을 삼키다 조심스럽게 말의 옆으로 돌아가 갈기를 쥐고 몸을 끌어 올렸다. 그러면 당장 위협적으로 앞발을 세우며 반항할 것 같았던 녀석은 순하게 제자리에 서서 내가 자리를 잡기까지 기다려 주었다.

신기했다. 그렇게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구는 말도, 안장이 없음에도 편하게 앉을 수 있는 말 등의 느낌도, 모두.

이리 와.

말 등에 앉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후 하늘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 위에서 맴돌던 나비가 살포시 손끝에 내려앉았다. 살짝 간지러운 느낌에 손을 움찔거리자 포르르 날아올랐던 나비는 이번엔 손등에 앉아 숨을 쉬는 것처럼 날개를 접었다 펴길 반복했다.

다들 착하네.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말의 목을 두드려주며 피식거렸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금이 가고 있는 하늘을 살폈다.

가자.

그 생각과 동시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핑크빛 하늘이 닿은 가장자리로 빠르게 달려준 말 덕분에 금세 가장자리 외벽에 손이 닿았다. 말을 타고 달리며 상처 난 자리들을 손으로 훑자 가이딩이 이루어지며 금이 간 부분이 희미해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식이 바뀌었다고 치료율이 오르는 것은 아닌지, 전보다 빠르고 정확한 지점에 가이딩이 가능했지만, 한 번에 말끔히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하늘로 고개를 올렸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간 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요한, 뭔가 평소랑 다른 것 같-.”

“쉬-.”

곤란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고 있을 때였다. 순간 말의 회색빛 갈기가 금빛으로 빛나더니 말의 앞발이 조금씩 허공을 밟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오르듯 말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렇지. 보통 회전목마에 달린 말들은 평범한 말들이 아니지.

“하, 미치겠네…, 진짜.”

“요한, 대체 무슨 일이에요?”

평소랑 가이딩 방식이 달리진 것을 눈치챘는지 한태화가 목덜미를 잡고 있던 내 손 위로 제 손을 올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아직 서툰 가이딩 방식에 적응하기 위해 녀석의 물음을 무시한 채 가이딩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조금 익숙해졌을 무렵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태화야.”

“…예, 요한.”

“너… 알고 있었지?”

“…….”

그 물음에 한태화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까 분명 ‘왜 아직 기관에 남아 있어요.’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건 한태화가 이럴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는 거고, 심지어 그 상황에서 나를 빼내 다른 곳에 보내려고 했던 걸 의미했다.

어쩐지 좀 화가 나려는 마음에 다시 한번 태화를 채근하려는데, 갑자기 삑- 하고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며 스피커가 작동했다. 여기저기 부서진 곳이 많아 작동하는 스피커가 많지는 않은 듯 소리가 직접적으로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대치로 키운 것 같은 마이크 소리가 건물 벽을 타고 윙윙 울리듯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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