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49)

다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가장 먼저 정팀장님이 이공간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방어계 능력자인 최주용 에스퍼와 나, 그리고 상원이가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재원이와 김혜지 에스퍼, 마지막으로 박지환 에스퍼 순으로 이동을 했다.

공기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이공간을 빠져나와 주변을 살피자 좌표점으로 삼은 조필상의 집 앞 골목의 풍경이 보였다. 그렇게 하나, 둘 공간을 빠져나온 팀원들은 미리 세웠던 작전대로 조용히 기척을 감춘 채 위치를 잡았다. 공격형 에스퍼인 정팀장님과 손재원은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가 자리를 잡았고, 최주환 에스퍼와 김혜지 에스퍼는 나와 상원이를 데리고 곧장 대문을 부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라?”

염력으로 문을 부순 김혜지 에스퍼 뒤로 딱 달라붙어 있던 상원이가 집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 뒤를 따르던 나와 최주용 에스퍼도 텅 빈 마당에 서서 당황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으로 말이 없어진 사이, 어지럽혀진 마당의 잡동사니들 가운데 쓰러져 있는 화분을 발로 툭 하고 찬 내가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튀었네.”

“어떻게 알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최주용 에스퍼가 당황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지붕 위에 있던 팀장님과 손재원이 마당으로 내려와 빠르게 움직여 집안의 곳곳을 살폈다. 인기척이 있는지를 살피던 손재원은 이내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현재 집 안에는 아무도 없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도망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팀장님을 따라 집안을 둘러보던 상원이가 불어터진 라면이 담긴 냄비를 들고 와 대청마루 위로 내려놓으며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가만히 서서 냄새를 맡던 손재원이 훌쩍 담을 넘어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팀장님과 김혜지 에스퍼가 눈치 빠르게 따라붙으며 순식간에 낡은 한옥 집 마당엔 나와 상원이, 최주용 에스퍼와 박지환 에스퍼만이 남았다.

“아무래도… 정보가 샌 거 같은데.”

조필상의 흔적을 쫓아 사라진 팀장님과 다른 팀원들을 대신해서 집안 수색에 나선 최주용 에스퍼와 박지환 에스퍼를 바라보며 작게 혼잣말을 내뱉자 가까이 다가오던 상원이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선배 설마… 우리 팀 사람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죠?”

“…….”

“…에이, 우리 팀원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우리 팀 사람이 한 짓은 아닐 거야. 그랬으면 너와 재원이가 잠입한 순간부터 난항을 겪었겠지. 그럼 이렇게 꼬리가 잡힐 일도 없었을 거고…. 잠입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오늘 우리가 올 걸 알았거나, 아니면 잠입한 사실은 알지만 너와 재원이의 얼굴을 몰라서 손을 못 쓰고 있다가 오늘 우리가 올 걸 알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

시선을 땅으로 내려 엎어진 붉은 대야를 바라보았다. 김장을 할 때나 쓰는, 요새는 보기 드문 고무 대야의 거친 밑바닥을 바라보며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누군가 돕지 않고서야 조필상이 어떻게 미리 알고 도망을 쳤겠는가. 하늘의 계시라도 받은 게 아니라면 말이지. 먹다 남긴 라면마저 뒤로 한 채, 집안을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최소한의 것만을 챙겨서 급하게 떠난 것도 수상했다.

분명 세가 내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가짜 오성파에게 알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오성파의 짓으로 꾸미면서도 꼬리 한번 잡히지 않고 있던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딱 맞아 떨어졌다. 오랜 시간 어떻게 세가의 눈을 속였는지도.

대체 누구지?

“잠시 이쪽으로 와 보세요!”

마당에 서서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집안을 뒤지던 박지환 에스퍼가 크게 소리를 쳐서 사람들을 모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상원이를 데리고 소리가 난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 방 역시 난장판으로 어지럽혀져 있긴 마찬가지였다.

방안엔 커다란 사각진 어항이 바닥에 쓰러져 있어 진한 물비린내가 났다. 작은 치어들은 이미 숨을 거뒀는지 노란 장판 의로 축 늘어져 있었고, 그 어항을 받치고 있던 받침대로 보이는 3단짜리 서랍장은 방 한가운데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서랍장이 빠진 벽 쪽에 붙박이처럼 박힌 금고가 하나 있었는데, 그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던 상원이가 놀란 얼굴로 박지환 에스퍼를 돌아보았다.

“금고는 어떻게 열었어요? 그런 능력도 있어요?”

“아뇨, 급하게 나가느라 그랬는지 제대로 닫지 않고 서랍장으로 어설프게 막아만 뒀더라구요. 서랍장이 애매하게 튀어나와 있는 게 신경 쓰여서 밀어봤더니 이런 게 있네요.”

#104

상원이가 금고로 다가가면서 작은 방의 불을 켰다. 그러자 검은색 금고 안을 가득 채운 오만원권 현금다발이 보였다. 상원이는 그 사이로 검게 남은 공간을 손으로 가리키며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뭘 빼내 가기만 하고 미처 돈 챙길 시간은 없었나 본데, 정말 어지간히 급하긴 했나 봐요.”

“그런 거 같네.”

우리가 오늘 이곳에 오기로 한 것은 예정에 없었던 일이다.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한태화 때문에 출동을 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쪽도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친 것 같은데…. 내부에 관련자가 있을 거란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그때 다시 마당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걸음을 옮겨 마루로 나가자 난감한 얼굴의 손재원과 팀장님, 김혜지 에스퍼가 복귀해 있었다.

“중간에 차를 타고 도망친 것 같아요. 골목 끝에서 냄새가 끊어졌어요.”

손재원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을 하며 고개를 살짝 숙이자 팀장님이 괜찮다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렇게 허탈한 얼굴의 팀원들이 모였을 때, 그때까지도 집안을 뒤지던 최주용 에스퍼가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뭐 더 찾아내신 건 없습니까?”

“딱히 크게 이상한 건 없습니다. 알뜰하게 챙겨갔네요.”

내 물음에 최주용 에스퍼가 빈 양손을 내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에 난감하게 턱을 쓸다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뭐가?”

풀이 죽은 손재원을 달래주고 있던 팀장님이 내 말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다시 한번 더 난장판인 집안을 둘러보다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진짜로 이상했으니까.

“조필상은 조교수로 불리는 마약상이자 마약제조업자라면서요. 근데 왜 집 안에 마약은 하나도 안 보이고, 마약을 제조할 만한 작업실도 없는 걸까요?”

순간 팀원들이 아- 하고 길게 탄식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용히 있던 상원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약상이라고 해도 약은 안 할 거예요. 그게 그들 사이에선 불문율이래요. 그러니 집안에 마약이 없는 건 이해가 가는데…. 잠입 수사 전에 좀 알아봤는데, 마약 중엔 만들 때 역한 냄새가 나거나 유독 가스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대요. 아무래도 화학 약품으로 만드는 거니까요. 만약 SG가 그런 종류의 약물이라치면 집이 아니라 근처 가까운 곳에 따로 작업실을 두지 않았을까요…?”

상원이가 기억을 떠올리듯 위로 눈을 굴리며 확신이 없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 순간, 고개를 숙인 채 풀이 죽어 있던 재원이가 재빨리 고개를 들어 올렸다.

“냄새…. 이 근처에 이상한 냄새가 나던 곳이 한 곳 있어요!”

“…뭐?”

팀장님이 놀란 얼굴로 재원이를 쳐다보더니 그 후 상원이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서 시선을 멈춰 세웠다. 나는 마루에서 내려와 섬돌을 딛고 마당으로 내려서며 손재원을 향해 턱 짓을 해 보였다.

“앞장서. 가자.”

“예!”

손재원이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됐다는 생각에 기쁜지 하얀 뺨에 핀 보조개가 조금 더 깊어졌다

***

깔끔한 외관의 건물 외벽에는 세로로 길게 상가 이름이 쓰여 있었다.

「파라다이스」

천국 또는 낙원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상가 건물에는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어 어딘지 좀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구석진 자리에 외관만 그럴듯하게 지어진 채 안이 텅 빈 건물을 무심히 쳐다보다 손재원의 뒤를 따라갔다.

녀석은 앞장서서 걸어가 닫혀있는 유리문을 힘껏 밀었다. 그러나 유리문은 살짝 뒤로 밀려났다 멈추며 덜컹거리는 소리만 낼뿐 열리지 않았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혜지 에스퍼가 앞으로 나서 가볍게 손을 돌렸고, 그 손짓을 따라 잠겨 있던 문이 열리며 썰렁한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때부터는 또 손재원이 앞장 서서 안내를 했다. 맨 앞에서 냄새를 맡듯 코를 킁킁대던 녀석은 어느 순간부터는 얼굴을 찡그린 채 손등으로 코를 가리고 움직였다. 잠시 후 녀석이 1층의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던 기계실이라 적힌 철문을 힘주어 열자 다른 사람들도 손으로 코를 막았다. 에스퍼가 아니라 일반인이라도 맡을 수 있을 만큼 좋지 않은 냄새가 조금씩 진해지고 있었다. 어두운 파이프 관이 천장으로 어지럽게 이어진 기계실의 모습 역시 어딘지 좀 음습하고 불길했다.

“와, 이거 꼭 영화 같네요. 영화 보면 이런 데서 꼭 싸우고, 총질하고 그러던데.”

손으로 코를 막아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상원이의 말에 팀원 몇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팀장님이 험악한 목소리로 작게 타박을 했다.

“긴장들 좀 해라. 놀러 나온 줄 알아?”

“에이, A등급 둘에 S등급까지 있는데, 긴장하긴 쉽지 않죠.”

팀장님의 타박에 여유롭게 응수한 박지환 에스퍼가 상원이의 말을 거들며 역시나 산책을 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앞서가던 손재원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정지시키더니 기계실 중간에 난 철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나 잠겼는지 철컥하고 소리만 내며 돌아간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시만요.”

다시 한번 앞으로 나선 김혜지 에스퍼가 손재원을 살짝 옆으로 밀며 철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 후,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끽- 하고 문이 열렸다.

“기관장님 말씀대로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죠. 긴장도 좀 하고요.”

말대로 조용히 문을 연 김혜지 에스퍼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런 뒤 들어가라는 듯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우리는 이공간을 통해 이동했던 순서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안쪽 공간이 나올 줄 알았던 곳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무언가 진짜 본격적인 기분에 이제야 다들 긴장이 됐는지 말들이 없어졌다. 주위를 경계하며 발소리를 죽인 채 계단을 내려가는데, 손재원을 뒤로 보내고 앞장서서 내려가고 있던 팀장님이 갑자기 멈춰 서서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엔 두꺼운 철문이 하나 자리해 있었다. 그 철문 위로는 CCTV가 달려 있었는데, 빨간 불이 들어온 감시 카메라는 정확히 입구 쪽을 향해 있어 누가 들락이는지를 감시하는 듯했다. 그러자 손재원이 나서서 눈을 감더니 팀원들이 선 방향으로 손을 한번 휘저었다.

“뭐 한 거야?”

상원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묻자 손재원이 순하게 눈을 깜박이며 입 모양으로만 대답했다. 다들 말이 없어지자 말을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나 보다.

‘일루전이요. 이제 저기에 안 찍힐 거예요.’

‘오호-.’

감탄을 해보인 상원이가 잘했다는 듯 손재원의 어깨를 다독여주다 이내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그런 거면 사람들 말고 카메라에 대고 힘을 쓰는 게 더 낫지 않았어?”

“…….”

아, 하고 깨달은 사람처럼 소리를 낸 손재원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팀원들은 순진한 손재원의 반응에 피식피식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 정식으로 교육받은 적이 없으니 힘을 쓰는 게 미숙할 법했다. 그래서 천천히 팀원들을 뒤따르며 아직도 혼자 머쓱해 하고 있는 손재원의 등을 툭 하고 쳤다.

“몸은 괜찮아? 줄곧 힘을 썼잖아.”

“아, 네. 괜찮아요. 아침에 가이딩을 받았거든요.”

“오늘 아침? 상원이가 해 줬어?”

“아뇨. 형이 귀찮다고 의무실을 가보라고 해서요, 거기 다녀왔어요.”

손재원은 아직 정식 요원이 아니라서 지원팀의 보조 가이딩 신청 자격이 없었다. 그러니 의무실 이용이 맞긴 한데…. 근데 의무실이면-.

“거기서 오랜만에 아버지를 뵀어요. 가이딩도 받았고요.”

비밀 이야기를 하듯 귓속말을 속삭이면서도 손재원은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밤나비를 봐서 그런지 기분도 아주 좋아 보였다.

“…쟤는 그걸 또 어떻게 알았대….”

못마땅한 얼굴로 앞서가는 상원이를 쳐다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재원이 밤나비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따로 알려 준 적도 없건만, 대충 상황을 보고 눈치챘나 보다. 그래서 일부러 손재원에게 밤나비를 만날 수 있게 해준 거고. 하여튼 눈치만 빨라선….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을 신경 써준 게 내심 고마우면서도 어떻게 알았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그렇게 재원이와 둘이 뒤쪽에 처져있자, 문 앞에 모인 팀원들 사이에 서 있던 상원이가 얼른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손재원을 데리고 합류하자 이번엔 조금 더 강한 힘으로 문의 손잡이를 부순 김혜지 에스퍼가 문을 열었고, 그 안으로 팀장님과 최주용 에스퍼가 들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 꼼짝 마! 지금부터 이곳은 세가의 특별진상규명팀의 지휘에 따라-.”

“…….”

“…….”

그 안은 마약을 제조하고 있는 작업실임이 틀림없었다. 지하라고는 믿기지 않게 밝은 조명 아래에서 화학 약품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지금껏 조금씩 맡아지던 역한 냄새가 강하게 났다. 각자의 파트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도 모두 놀라 굳은 얼굴로 멈춰 서 있었고.

그러나 공무 수행 중이라는 표시증을 앞으로 내민 채 기세 좋게 들이닥쳤던 팀장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 팀장님과 눈이 마주쳤던 이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끌어 내리며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려…주세요.”

“…….”

어눌한 발음으로 손을 모아 비는 외국인을 바라보며 팀장님은 결국 공무 수행 증을 내밀고 있던 팔을 허탈하게 내렸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며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누르던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일단… 경찰에 지원 요청부터 하죠.”

파라다이스는 무슨. 그 천국의 지하엔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설탕 공장이라는 달콤한 이름의 지옥이.

#105

채애현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한 곳을 집요히 노려보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은 명백했다. 꼬리 자르기에 완전히 떨어져 나간 상태. 채애현은 추락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아니야. 내가 여기서 끝날 줄 알고? 내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의 불안감을 달래려는 사람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신감에 찬 얼굴을 하다가도 거칠한 회색 벽의 좁디좁은 구치소 수감 방을 둘러보다 보면 덜컥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계속해서 그런 불안한 상태가 반복되고 있었다.

“나가야 해. 일단 여기서 나가야….”

또다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던 채애현이 손톱을 물어뜯었을 때였다. 그녀가 있는 독방으로 교도관이 다가와 문을 열었다.

“수인번호 809, 접견 신청입니다.”

“…접견?”

“나오세요.”

거친 철문을 연 교도관이 안으로 들어와 능력자 전용 수갑을 채운 후 문 앞에서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문과 교도관을 번갈아 쳐다보던 채애현은 이내 눈빛을 굳히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걸음을 옮긴 그녀가 도착한 곳은 변호인 접견장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던 채애현은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표정을 굳힌 채 시선을 사납게 바꿨다.

“또 뵙네요, 채애현씨.”

“…….”

권해선 검사의 인사에도 채애현은 말없이 한태화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그러자 짧게 한숨을 내쉰 권검사가 뒤편에 선 교도관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교도관은 조용히 다가와 수갑을 풀어준 후 접견실을 나갔다.

“일단 앉으세요, 채애현씨.”

“…….”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채애현이 마지못해 권검사가 가리킨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도 한태화를 노려보는 시선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태화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따분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무심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고,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던 권검사는 하는 수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채애현씨, 아주 재밌는 짓을 하셨던데요.”

“…내가 한 재밌는 짓이 어디 한, 두 개여야지요. 정확히 말하세요. 돌리지 마시고.”

방금전까지도 불안 증세를 보이며 정신없어 보이던 사람답지 않게 무척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퍽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권검사가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완전히 구겼다.

“그거 참… 자랑차시네요. 세가에서 관계기관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오성파의 손학경씨에게 무단으로 능력을 사용하셨던데, 이를 인정하십니까?”

“아하…, 그거. 그래, 그게 있었지, 참. 그 인간이 아직 살아있어요? 생각보다 명줄이 기네.”

“…채애현씨, 잘 들으세요. 혹시나 해서 알아보니까 아주 곳곳에 그 능력을 남발하셨던데, 능력에 의한 살인죄는 에스퍼&가이드의 특별법에 의해 가중 처벌이 되는 중한 범죄행위이며, 최대 사형이 구형됩니다. 지금이라도 공소장 변경을 해드릴까요?”

권검사가 진지하게 얼굴을 굳히며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웃고 있는가 싶었던 채애현의 얼굴도 굳어갔다. 이 일에서 나설 생각이 없는지 한태화는 계속해서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한태화의 태도에 그를 빤히 바라보던 채애현은 갑자기 굳히고 있던 얼굴을 풀며 픽-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진데, 이참에 길동무를 몇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죠.”

“채애현씨, 제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습니까? 우리나라가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명목상의 사형제도 나라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거야 일반인들이 대상일 때의 이야기고요, 능력자들의 경우는 얘기가 다릅니다. 국가에서 데리고 있긴 부담스러운 존재잖습니까. 범죄를 저지르는 능력자들이란 건.”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권검사가 마지막에 가선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채애현은 차마 따라 웃지 못하고 그대로 표정을 굳힌 채 권검사를 노려보았다. 그 옆 앉은 한태화는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말이 없었고.

“치료해 주시죠. 대신 그 건들은 문제 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권검사는 여유롭게 웃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혹시 거절을 당할까 싶어 조바심이 났다. 현재 가짜 오성파의 일로 세상이 떠들썩해진 상태였고, 밤나비의 재심 청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높았다. 덕분에 법원 측에서도, 검찰 측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그런데 만약 밤나비가 불법적인 경로로 인해 병에 걸렸고, 곧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불같은 동정론이 일 것이고, 재심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릴 것이 분명했다. 그건 정말이지 검찰도, 법원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밤나비와 같은 일이 더 있을까 싶어 알아본 결과, 몇몇 높으신 분들의 가족들에게도 채애현이 심어둔 병의 씨앗이 발견됐다. 그녀가 원하는 때 언제든 발현이 가능하도록 말이다. 비록 채애현의 능력 범위 안에 들어가야만 발현이 되는 것이라곤 해도, 찝찝한 것은 사실이었고, 그 탓에 위쪽에선 난리가 났다. 권검사에겐 여러모로 뭣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밤나비의 재심 건은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고, 가족들이 채애현에게 당한 윗분들은 난리를 피우며 검찰을 들들 볶아대고 있었다. 가뜩이나 이전 밤나비 재판이 제대로 된 증거 조사 없이 유죄 판결이 났다며 검찰 기소권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도 많은데, 정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 사태까지 오자 며칠 전 부장 검사가 그녀를 불러 최대한 소란 없게 일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까지 해왔다. 사실 말만 부탁이지 검사장 측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는 그 말은 명령에 가까웠다. 위계질서가 확실한 검사 조직 내에선 명령은 곧 목숨줄이었고.

그러한 초조함을 감추려 가볍게 웃고 있는 권검사를 가만히 쳐다보던 채애현이 불현듯 미소를 짓더니 등받이에 허리를 묻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눈치 빠르게도 본인에게 유리한 상황이란 것을 파악하고 그새 판을 쥐고 흔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을 다실 입장이 아닐 텐데…. 아직 자신의 처지를 잘 모르시나 보네요.”

채애현의 태도에 짜증이 난 권검사가 비웃음을 입에 걸고 빈정거렸다. 그러나 채애현은 여유롭게 응수하며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말했잖아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나에겐 같다고. 내가 누군가를 살려준다면 그건 내 선의에 의한 거죠. 이제 와서 죄명 몇 개 더 늘어난다고 무서워할 입장이 아니거든요.”

허세였다. 채애현은 테이블 아래로 내린 두 손을 맞잡고 힘을 주면서도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웃음을 유지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쳐다보기만 하는 한태화가 신경 쓰이면서도 채애현은 꿋꿋이 권검사만을 쳐다보았다.

그때 한숨을 내쉰 권검사가 얘기나 들어보자며 약한 모습을 보였다. 드디어 선기가 채애현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치료를 세가에서 진행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때 기관장실에 들려서 내 물건 몇 개를 챙겨오고 싶고요.”

그 말에 권검사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터트렸다.

“그건 곤란합니다. 어떤 증거품을 인멸하려는 건 줄 알고….”

“압수 수색이라면 이미 다 끝나지 않았나요? 나는 정말 내 개인적인 물품들을 가지고 나오기 위해서 부탁드리는 거랍니다. 내 다음 전임자가 나타나서 다 버리기 전에요. 제겐 소중한 물건들이거든요. 의심스럽다면 갖고 나온 물품들을 전부 임의 압수물로 제출할 수도 있어요. 환부해 준다는 전제하에요.”

“별거 없던데.”

그때 드디어 한태화가 입을 열었다. 지금껏 아무 말이 없다가 나온 무심한 말에 채애현이 노려보듯 한태화를 쳐다보았다.

“당신 눈엔 별거 아닌 듯 보여도 내겐 소중할 수 있죠. 당신의 그 별거 없는 가이드처럼.”

그 말에 표정을 굳혔던 한태화가 이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까불 기운이 남았나 보네. 아니면 정신을 덜 차렸던가.”

“…….”

“좋아. 그 조건, 받아들이지. 대신 헛수작 부리지 말고, 전원 모두 멀쩡히 고쳐놓도록 해.”

“…그러죠.”

드디어, 드디어!

채애현은 남몰래 웃음을 지었다.

6. 그 길 끝에 네가 있다.

설탕 공장이라 불리던 가짜 오성파의 마약 작업장에서 발견된 이들은 모두 불법 체류 중이던 외국인 노동자들로 밝혀졌다. 그들은 그저 감금당한 채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이라며 본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폭행이 가해졌다며 멍이 가득한 몸들을 내보이기도 했고. 그러나 불법적으로 마약을 제조한 혐의와 강제로 노동을 착취당한 문제로 국가간 분쟁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 일단은 모두 구속된 상태였다.

그들이 만들던 마약은 모두 시중에 풀리는 일반적인 마약들이었다. 합성 대마나 필로폰, 액스터시 같이 일반적인 마약들. 구속된 이들은 진술 조사에서 SG라는 마약은 만든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작업장 한구석에 따로 마련된 실험실 같은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필상이 따로 SG를 만들었을 거라고 진술했다. 아니면 그와 함께 그 작업실을 들락거린 다른 제3의 인물이거나.

#106

아직 정확한 것은 파악할 수가 없었는데, 조필상이 급하게 도망을 치면서도, 한차례 들이닥쳐 증거가 될 만한 서류들을 전부 다 챙겨간 후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현장 조사가 조금 더 필요했고, 그래서 현장팀 팀원들이 모두 조사를 나가 있었다.

대신 나와 상원이와 세가 내에 잠입해 있을 첩자를 찾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대충 누군지 감은 왔으나,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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