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49)
  • 그렇게 잠시 말이 끊어졌다. 그러나 말이 없다고 불편한 분위기로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잠들기 전, 편안하게 흐르는 분위기에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때 문득 한태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기관장이 되면 그럴 일은 없어요.”

    “…또 모르지. 막상 그때가 되면-.”

    “아니죠, 요한. 내가 가이드를 목줄 삼아야만 에스퍼를 통제할 수 있는 무능력자는 아니잖아요?”

    “응?”

    “지금까지는 애매한 등급의 인간들을 기관장 시켜 놓으니까, 자신보다 강한 에스퍼들을 통제하지 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아.”

    “누가 감히 나한테 개길 수 있는데요?”

    자신감 넘치는 말에 멍한 얼굴을 해 보이다 고개를 내리니 한태화가 거만하게 웃는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좀 그래 줬으면 좋겠네요. 오랜만에 몸 좀 풀게.”

    “…….”

    “기대감에 심장이 뛰어요, 요한. 근데 아무도 안 개기면 어쩌죠? 너무 자주 그러면 짜증 날 것 같긴 한데, 아예 없어도 좀 심심할 것 같지 않아요?”

    음, 그래, 내가 또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너한테 일반적인 반응을 바라면 안 되는 건데.

    그저 자신이 기관장이 되면 그럴 일을 하지 않겠다- 라는 말이나 나올 줄 알았는데, 지 자랑을 할 줄은 몰랐다. 근데 또 그게 묘하게 맞는 말이라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한태화가 잔잔한 웃음을 터트리다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채애현은 어떡해서든 총회 전에 밤나비 앞에 끌어다 놓을 거예요. 사실은 그거 불안해서 정기총회 얘길 꺼낸 거죠? 내가 기관장일 때 빨리 그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궁금해서.”

    “…….”

    갑자기 다른 주제를 파고드는 말에 입을 다문 채 눈만 깜박였다. 당황스럽게 한태화를 쳐다보자 녀석이 길게 미소 지으며 칭찬해 달라는 듯 머리를 들이민다. 결국 허탈하게 웃으며 녀석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그래. 눈치 많이 늘었다, 너?”

    “애정을 바탕으로 한 관심 때문이죠.”

    “집착을 바탕으로 한 감시 때문은 아니고?”

    “같은 말이죠.”

    “그게 어디가.”

    슥슥,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흩어지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끼며 허탈하게 중얼거리자, 한태화도 웃으며 ‘착한 사람 눈에만 보여요. 그 둘이 같다는 건.’라고 대꾸하며 배 근처에 뺨을 문질렀다.

    미친놈 눈에나 같아 보이는 건 아니고? 그렇게 반박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의 애교스러운 행동을 받아주다가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태화야,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네?”

    “나 뒤에 ‘장’자 붙는 권력자 되게 좋아한다. 알지? 응?”

    녀석이 하던 대로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내려 시선을 맞추자 한태화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슬쩍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웃고 있는 내 입매를 가려버린다.

    “반칙!”

    “…갑자기?”

    “귀여운 건 나만 할 거예요! 요한이 귀엽기까지 할 필욘 없다고요. 대체 귀엽기까지 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읍!”

    여전히 저 미친놈은… 부끄러움이란 걸 모른다. 왜 매번 부끄러움은 내 몫이란 말인가. 내 입을 막은 한태화처럼 녀석의 입을 막으면서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또 어떻게 가르치나. 한숨 짙은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다음날, 별관 2층의 의무실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음…. 문을 앞에 두고도 선뜻 들어갈 결심이 서질 않아서 고민하다가 한숨과 함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얼굴까지 굳힌 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의자에 앉아있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로- 아, 이경아.”

    앉은 채로 고개만 돌렸던 밤나비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쓱한 기분에 기본 치료 도구만 갖추어진 의무실을 의미 없이 둘러보다 그의 맞은편으로 갔다.

    “…의무원은요?”

    “출장. 다른 팀에 차출돼서 나갔어. 편하게 앉아.”

    앞에 있는 진료용 보조 의자를 가리켜 보인 밤나비가 아주 익숙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마치 제집에 들인 손님을 대하듯 편안해 보이는 모습에 어색하게 웃다 의자에 앉으며 그의 모습을 살폈다.

    밤나비는 현재 재심 신청을 준비하면서도 감찰팀의 보호 관찰을 받고 있었다. 재심으로 무죄 판결을 받기 전까진 여전히 1심 판결에 따른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다만, 한태현이 앞으로는 정부 체재에 반기를 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차원에서 세가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와서 이렇게 감시를 받으며 의무실의 응급 가이딩 일을 맡게 되었다. S등급 가이드를 그냥 두기는 기관 입장에서도 아까웠는지 흔쾌히 받아들였고.

    다만, 그게 내 입장에선 좀 미안한 일이었다. 반정부 단체 수장의 아들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원하지도 않는 일들을 벌였는데, 그것도 모자라 세가에 별로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억지로 일을 시키는 느낌이라…. 재판의 유리한 판결을 위해 가이드로서 등록을 했으면 좋겠다고, 그 말을 하는 것도 참 어려웠는데, 세가에서 일까지 시키게 되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밤나비는 가벼운 응급 가이딩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선뜻 받아들여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거부해오던 등록도 순순히 해주었고. 등록을 해 달란 내 제안에 패악을 부리며 싫다고 난리를 치던 김동원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99

    어쨌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밤나비는 의무실에, 김동원은 이리저리 현장팀을 도우며 사회봉사를 하고 있었다. 비록 양 손목에 도망을 방지하기 위한 전자 장치가 달려있긴 했어도, 세가에서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바뀐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 전반적인 시선도 바꾸게 할 것이다.

    그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미안해서 복잡한 마음으로 손목에 달린 전자 장치를 쳐다보는데, 의료 가운을 끌어 내려 손목을 가린 밤나비가 내 시선을 돌리려는 듯 진료대 위를 톡톡 두드렸다.

    “무슨 일로 왔어?”

    “…그냥 뭐…. 지내실 만은 하세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어. 가끔 무턱대고 찾아와서 네가 밤나비냐고 묻는 멍청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놈들이 있어요?”

    어떤 얼간이 같이 놈이? 그의 대답에 못마땅함으로 얼굴을 찡그리자 밤나비가 즐거운 얼굴로 웃는다.

    “근데 가이딩 한번 해주면 바로 얌전해지던데? 보통 성인이 되자마자 세가로 들어와 일을 시작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생각보다 순진하고 때가 덜 탔어.”

    아.

    그래, 이 인간이 이래 보여도 오성파 수장이지. 저 선한 인상과 느긋한 성품 탓에 한 번씩 잊어버릴 때가 있는데, 그래도 한 단체에서 사람들을 이끌던 사람이었다. 그것도 거친 무등록자 에스퍼들만 모아놓은 틈에서 말이다. 그러니 이만한 일도 해결 못 할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네. 원랜 이렇게 무른 사람이 아닌데, 어쩐지 이 사람 앞에서만큼은 칼로 잰 듯 딱 잘라내는 태도를 취하기가 힘들었다.

    “진짜 잘 지내고 계신가 보네요. 좀 과하게 잘 지내고 계신 것도 같고….”

    “응.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누가 걱정을 했는데요? 아닌데요? 제가 왜요?”

    웃음기 띤 대답에 부릅뜬 눈으로 아니라고 강력히 항의하자 밤나비가 웃음을 터트리며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뻔하다. 또 진이를 정말 많이 닮았다느니, 엄마가 생각난다느니, 뭐 그런 소리일 게 뻔했다.

    “정말로 생각보다 재밌어. 정이 좀 붙으니 여기저기 손 봐야 할 곳도 보이고 말이야. 오성파 활동을 꼭 외부에서만 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내부에서부터 천천히 변화시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그게, 무슨… 제발, 사고만 치지 마세요. 예?”

    세가 내에서 오성파에서 했던 활동을 이어가겠다니.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불안한 얼굴로 애원하듯 부탁하는데도 그저 웃는 얼굴로 말을 넘기는 것도 불안했다.

    누구냐? 누가 이 양반이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처럼 의미 없이 산댔어? 이렇게 목표지향적인 사람이 또 어딨다고?

    “재원이는 잘 지내?”

    내 부탁을 흘리듯 넘긴 밤나비가 태연하게 물어왔다. 은근… 고집이 세다. 장난기도 많고.

    …날 닮았나?

    “꼬맹이는… 생각보다 일을 잘해주고 있어요.”

    “그래? 다행이네. 어디서든 잘할 아이긴 해. 착하고 순한 아이고.”

    “…….”

    그 말에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문 채 턱 근처를 문지르는데, 내가 답이 없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 밤나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경아?”

    “그… 태화가 그러는데…, 그 병은… 곧 채애현을 불러다 치료해 줄 수 있답니다. …몸은 좀 괜찮아요?”

    그제야 찾아온 목적을 말하자 밤나비의 얼굴이 순하게 풀어지며 순박하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응. 괜찮아. 가끔 열이 오르긴 하는데,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는 병은 아니라서. 그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심장이 굳어서 움직임을 멈추는 거라고 하는데, 다행히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는 모양이야.”

    “…….”

    “그리고 그 일이라면 오전에 한태화가 전화해서 이미 알려줬어. 일주일 안에, 빠르면 2-3일 내로 처리해 주겠다고.”

    둘이… 전화 통화를 하는 사이라고? 언제부터? 의외의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태화가요?”

    “응. 네가 걱정이 많으니까, 빨리 처리할 모양이던데.”

    “누가 걱정을 했는데? 아니라니까요? 제가 왜요?”

    한태화는 대체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한 거야. 다시 한번 부릅뜬 눈으로 아니라고 반박하는데, 상대가 들어먹은 얼굴이 아니다. 다 안다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머쓱함을 느끼고 목덜미를 문지르다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을 다 하나고 나니까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만 일어날까 하고 눈치를 보는데, 밤나비가 고민하다 하는 얘기인 것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원이도 잘 돌봐주고, 내 일도 걱정해주고…. 고마워, 이경아.”

    “그런 거 아-. 크흠. 잘 지내고 계시면 됐어요. 이만 가볼게요.”

    “근데 이경아.”

    어쩐지 쑥스러워지는 기분에 자리를 피하고자 몸을 일으키려는데 밤나비가 붙잡듯 불러세웠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자상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별명이 광땡이라며? 가이딩률이 38%라서.”

    “어떤 새끼가-. …누가 그래요?”

    “여기 오는 에스퍼들이. 가끔씩 네 소식을 전해주곤 해.”

    아…. 어떤 놈들이 남의 얘길 팔아? 아무리 S등급 가이드한테 잘 보이고 싶어도 그렇지.

    아니면 밤나비가 꼬여낸 게 틀림없다. 또 저렇게 다 받아줄 것처럼 넉넉하게 웃으며 사람을 꼬여냈겠지. 그러니 오성파라는 단체의 수장도 한 거다. 사람 꼬여내는 기술은 정말 발군이었다.

    근데 잠깐만…. 서데렐라니, 서달기니, 서태후니. 뭐 그런 미친 소릴 들은 건… 아니겠지? …그거 전한 새끼 있으면 진짜 죽인다, 내가!

    “혹시, 다른… 뭐, 이상한 소리 같은 건 들은 거 없고요?”

    “응? 또 뭐가 있어?”

    “아니요. 아무것도 없어요.”

    휴, 다행이다. 아직 그 얘기까진 못 들-.

    “아, 서달기니, 서태후니 하는 그런 거 말하는 건가?”

    “…씨발. 어떤 새끼가…. 여기 왔다 간 에스퍼들 명단 있어요?”

    진정한 서태후가 뭔지를 보여주마. 씨발로 염불을 외며 의무 기록 명단을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미는데, 그 장갑 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밤나비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게 장난인 줄 아시는 모양인데, 장난 아니고 진짭니다. 그런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미간을 찌푸렸다.

    “이경아.”

    “뭐요. 일단 명단부터 줘 보세요.”

    “저번에 링크했을 때, 네 근원 크기를 봐선 높지는 않아도 D등급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거든?”

    “……예?”

    갑자기 나온 예상치 못한 화제에 눈을 깜박였다.

    가이드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과한 가이딩을 한 경우 코마 상태에 빠질 수 있는데, 이때는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을 통해서만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즉, 가이드는 에스퍼 뿐만이 아니라 같은 가이드의 근원에도 링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를 찾아왔던 날 밤의 밤나비는 내 근원으로 링크를 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라 멈칫하고 뻗었던 손을 움츠렸다.

    “그래서 너한테 가이딩 받아 본 적 있다는 에스퍼한테도 물어봤는데, 역시 좀 이상해서. 분명 네 근원은 지니랑 같았거든. 그럼, 그런 등급이 나올 리가 없어.”

    “…….”

    밤나비의 말에 반박을 해보려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가이드의 가이딩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보통 자신의 근원의 모습에 따라 가이딩 방법들이 달라졌다.

    내 가이딩이 근원이 되는 세상을 빙글빙글 돌리는 방식인 것 역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잘 몰랐는데, 그때 밤나비의 얘기를 들으니 한 번에 이해가 갔다. 내 근원이 회전목마라는 건데, 그래서 에스퍼의 세상이 저절로 돌아가며 손에 닿는 부분들이 가이딩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왜?

    당황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고 있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밤나비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아마 네게 무리를 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진이가… 음.”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아니. 내가 그랬잖아. 네 근원의 모습과 진이의 근원의 모습이 같다고. 진이도 넓은 들판에 선 회전목마가 근원이었거든. 그러니까.”

    다음에 이어질 밤나비의 말을 기다리는데, 그가 불현듯 씨익 하고 웃었다.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말이 쉬어가는 회전목마.”

    “…….”

    아-. 내 입이 작게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

    아침을 지나 늦은 오후가 되었다. 밤새 옥상에서 사내의 동태를 살피며 숨어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윤상원이 침낭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이기지 못하고 꾸물꾸물 몸을 움직였다.

    침낭을 쓰고 잤다곤 해도,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어 밤에는 제법 기온이 내려갔다. 이런 날씨에 노숙을 했으니 잠에서 깬 몸 근육들이 뭉친 제 존재를 알려오며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 것은 당연했다.

    “아으- 죽겠다.”

    “괜찮으세요?”

    어제 윤상원이 차에 가서 가져온 침낭을 덮고 있던 손재원이 옆에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물음에 힐끔 손재원을 살피다 끙하고 앓던 윤상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심이 없는 편에 속하는 윤상원이라도 지금껏 자지도 않고 기척을 살피고 있던 사람을 상대로 아프다고 칭얼거릴 순 없었다.

    그저 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내 얼굴을 벅벅 닦던 윤상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그 김에 멀쩡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손재원에게 물티슈를 건넸다.

    “너도 닦아.”

    “네.”

    “아우- 온몸이 다 아프네. 이래서 나는 인도어파라고. 아웃도어는 진짜 안 맞는데…. 다신 이런 짓 하나 봐라.”

    억울하다는 얼굴로 이를 득득 가는 윤상원을 힐끔거리며 물티슈로 얼굴을 닦던 손재원이 침낭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밑에 있는 남자도 일어났어요. 나갈 준비를 하는 거 같은데.”

    “그래? 그럼 우리도 준비하자.”

    “네.”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손재원이 자리를 정리하며 침낭을 거둬들였다. 새벽녘에 늦은 저녁으로 먹었던 빈 편의점 도시락 통들까지 정리하고 있는 손재원의 모습을 보며 윤상원은 길게 기지개를 켜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제 사내가 연락한 사람들의 신상명세를 알기 위해 정팀장에게 대신 요청해 달라고 부탁한 자료가 제시간에 맞춰 도착해 있었다. PDF 파일로 전송되어 온 정보 지원팀의 자료를 살피던 윤상원이 문득 품을 뒤져 손톱만 한 무언가를 꺼내 손재원을 돌아보았다.

    “재원아.”

    “네?”

    “혹시 이걸 저놈한테 몰래 달을 수 있을까?”

    손재원은 윤상원이 내민 것이 무언인지도 모른 채 그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S등급의 특수계 능력과 정신계 능력을 모두 사용할 줄 아는 손재원이 에스퍼도 아닌 일반인인 사내를 상대로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그것이 설령 그의 몸에 무언가를 몰래 달아야 하는 일일지라도.

    그 만족스러운 대답에 윤상원이 씨익 하고 웃음을 지었다.

    #100

    준비를 마친 사내가 환전소 한편에 꾸려져 있던 집을 나와 제 차를 타고 종로로 갔다. 귀금속 상가가 줄줄이 늘어선 곳을 지나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던 사내의 차가 멈춰 선 곳은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붉은 글씨의 현수막들이 줄줄이 늘어져 있는 빈 상가 앞이었다. 그곳에 차를 댄 사내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상가 뒤편으로 걸음을 옮겨 어둑한 골목길을 걸어갔다. 그리고는 형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한옥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잘 지내셨습니까!”

    “어, 그래. 왔냐? 너도 잘 지냈고?”

    “예, 저야 형님 덕분에 자리 잡고 잘 지내고 있었죠. 항상 감사합니다!”

    “그래, 중구 쪽에선 나름 잘 나간다며? 소식은 들었다. 올라와 앉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런닝 셔츠 위로 얇은 점퍼 하나만을 걸친 채 대청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사내가 문간에 서 있던 다른 사내를 향해 손짓했다. 그에 막 문을 열고 들어섰던 사내, 장덕수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마루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장덕수의 앞에 앉아있는 사내는 서울 지역 내에서 유명한 마약상이자 마약 제조업자로 소문이 나서 ‘교수님’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성질이 괴팍하고, 수틀리면 금방 포악해지기도 해서 장덕수가 꺼리는 인물이기도 했고.

    그러나 서울 지역에서 마약을 판매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잘 보여야 하는 이였고, 현금 부자로도 유명한 사람이라 장덕수로서는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야 좆팔이 새끼라며 싫어하지만, 그 앞에서만큼은 교수님, 교수님, 하고 깍듯하게 부르며 떠받들 듯 모시는 장덕수의 얼굴 위 흉터가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그때 그런 장덕수의 속내를 다 읽은 사람처럼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내던 사내가 눈웃음을 지었다. 삼백안에 가까운 가늘고 긴 눈이 뱀처럼 보이며 소름이 돋았다. 어쩐지 진짜 제 속을 읽은 것 같은 눈에 장덕수는 슬쩍 고개를 숙이는 척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점퍼 안 런닝 셔츠 위로 드러난 상체의 곳곳에 익숙한 흉터들이 보였다.

    “그래, 오늘은 어쩐 일로 왔어?”

    조교수님이라 불리는 사내, 조필상이 재떨이를 끌고 와 담배를 끄며 물었다.

    “저 그게… 설탕 한 봉지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그게 하도 여기저기서 찔러대는 바람에 요새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 돼서…. 그래도 교수님이라면 가지고 계실 것 같아서 왔습니다.”

    “…SG? 그걸 누가 찾는데? 신원 확실한 놈은 맞고?”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짓누르던 조필상이 멈칫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장덕수를 쳐다보았다. 장덕수는 그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좀 더 비굴하게 몸을 말았다.

    “예. 알아봤는데, 원래 이태원 산타 놈 고객이라 신원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덕수야, 나랑 지금 장난하냐?”

    “…예?”

    피식 웃으며 나온 조필상의 말에 장덕수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조필상이 그대로 장덕수를 발로 차 마루 밑으로 떨어뜨렸다.

    “악! 형, 형님!”

    “이 씨팔놈이, 지금 상황이 어느 땐데 아무나 설탕을 찾는다고 날 찾아와? 어디서 꼬리 붙인 놈들인 줄 알고? 하, 내가 진짜, 이런 대가리를 가진 놈들이랑 일을 하고 있으니까 힘이 드는 거 아니냐, 장덕수 이 좆 같은 새끼야.”

    “형, 아니, 교수님, 그게 아니고…. 죄송, 죄송합니다. 근데 찾는 놈들이 돈 많은 어린놈들이라, 그럴 가능성이 낮아서…. 죄, 죄송합니다!”

    마당으로 굴러떨어진 장덕수가 얼른 다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절을 하듯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대청마루에 서서 살벌하게 쳐다보던 조필상이 갑자기 제 기운을 풀었다. 그런 다음 제집 주변을 힘으로 훑은 후에야 긴장을 풀고 고개를 돌리며 목 근육을 풀었다.

    사실 장덕수는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조필상은 등록하지 않은 C등급의 에스퍼였다. 일정 범위 내에 에스퍼가 있을 시, 그것을 탐지 및 그 에스퍼의 능력 감별이 가능한 특수 계열의 에스퍼.

    “…꼬리 붙은 낌새가 없긴 한 것 같은데…. 찾아온 놈들이 어리다고? 소개는 산타가 했고?”

    “예, 예! 고삐리처럼 보이는 어린 두 놈인데, 돈은 좀 있어 보입니다. 입은 차림새도 그렇고, 한 놈은 노틸 시계도 차고 있어서…. 꼬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조필상이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어졌다. 잠시 후 조필상은 대청마루에 쭈그려 앉아 점퍼 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 그리고는 마루 위로 대충 담뱃갑을 던져둔 후 라이터를 끌고 와 불을 붙이더니 장덕수를 향해 길게 연기를 뿜어내며 물었다.

    “둘 다 에스퍼야?”

    “…아, 그건 물어보질 않-.”

    순간 조필상이 옆에 있던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안에 있던 담배꽁초가 마루와 마당을 더럽히며 장덕수의 어깨를 맞혔다. 악- 하고 터지는 신음을 참아낸 장덕수가 몸을 웅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봐준다고 머리는 안 노린 게 어디냐 싶으면서도 속으로는 좆팔이, 씨팔 새끼라고 욕을 해댔다. 그러면서도 어깨를 부여잡고 최대한 불쌍해 보이도록 몸을 웅크린 뒤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했다.

    “무, 무등록자 놈들은 그런 걸 물어도 알려주길 꺼려해서, 보통 잘 묻지를 않다 보니…, 죄송합니다, 교수님.”

    “내가 그걸 몰라? 그거야 평소 때나 그러는 거고, 여기저기서 찔러대는 시기니 확인을 했어야지, 이 빡대가리 새끼야.”

    “죄, 죄송합니다.”

    장덕수가 연신 사과하며 고개를 조아리자,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담배를 피우던 조필상이 갑자기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덕분에 원래도 작던 삼백안이 길게 휘어져 실처럼 가늘어졌다.

    “덕수야.”

    “예.”

    “그 손님 중에 가이드 같아 보이는 새끼도 있던?”

    갑자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뜬금없는 것을 묻는 조필상의 질문에 장덕수가 의아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고개를 들고 답을 할 땐 얼른 표정을 풀어낸 후였다.

    “그… 겉만 봐선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좀 비리비리해 보이던 새끼가 있었는데, 어쩌면….”

    “흠. 그래.”

    또다시 조필상이 생각에 빠진 듯 대화가 끊어졌다. 그러더니 잠시 후 능글맞게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덕수야, 그 손님 나한테 넘겨라.”

    “…예?”

    “나한테 데리고 오라고. 직접.”

    “…….”

    어쩐지 좀 징그러운 웃음을 보며 장덕수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한순간에 돈 많은 호구를 빼앗기게 생긴 장덕수가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어두운 골목 안, 그 좁은 골목길에 나란히 서서 한쪽씩 이어폰을 나눠 끼고 있던 손재원과 윤상원은 장덕수에게 붙여놓은 도청 장치를 통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끝났을 때, 두 사람 모두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 일이 좀 귀찮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아요.”

    “조필상인지 뭔지, 이 새끼, 가이드 찾고 있나 봐. 에스퍼인 거 같댔지?”

    “…….”

    생각에 잠긴 채 말이 없던 손재원이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장덕수가 들어간 집의 담벼락에 기대 감청을 하고 있던 손재원이 갑자기 윤상원을 안고 달려 이곳으로 왔다.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묻는 윤상원에게 손재원은 조교수라는 인물이 무등록 에스퍼인 것 같다며 능력 사용의 범위를 벗어나느라 그런 것이라 설명을 했다.

    혹시나 해서 장덕수에게 도청 장치를 붙여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자꾸 손재원 혼자 감청을 하는 것이 답답해서 달아 달라 부탁했던 것이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손재원은 역시 세가의 요원이라며, 윤상원의 혜안에 감탄하기 바빴다. 가끔씩 사람을 황당하게 만들기는 해도, 지금까지 일 적인 부분에서만큼은 믿고 신뢰할 수 있게 된 윤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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