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49)

딸랑- 하고 종소리가 나며 열리는 문에 고개를 들어 올렸던 사내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원래도 험악했던 얼굴을 더욱 험상궂게 만들었다. 덕분에 그의 뺨 위로 길게 나 있는 흉터가 흉물스럽게 꿈틀거려서 막 문을 열고 들어오던 두 사람은 움찔하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너희 뭐냐?”

“서, 설탕 사러 왔는데요?”

마트도 아닌 곳에 와서 설탕을 사겠다는 말에 보통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겠지만, 사내는 심각한 얼굴로 더욱 험상궂게 찡그릴 뿐이었다.

설탕이란 속칭 SG라 불리는 마약의 은어였다. 그리고 그 은어는 절대 저런 고삐리 같아 보이는 녀석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뭐라고?”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사내의 시선이 다시 한번 두 사람을 훑어내렸다. 두 사람 중 앞에 선 이는 단정한 얼굴에 예쁘장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어린 티가 났다. 어른인 척 해보려던 건지 차분해 보이는 스타일로 차려입은 옷들이 하나같이 모두 고급스러웠다. 그러나 저 얼굴로는 아무리 많이 쳐줘야 이제 막 성인이 된 스무 살짜리로 보일 뿐이었다.

그 뒤에 숨듯이 서 있는 놈은 더 했다. 후드티에 집업 후드를 덧입고 온 이는 코까지 내려오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보이는 코와 턱만 봐도 수염이 제대로 나지 않아 맨들맨들한 것이 어린 티가 났다.

척 봐도 어른인 척하는 고등학생들이었다. 그것도 담배나 술을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무려 마약을 사러 온 고삐리들.

내심 긴장을 하고 있던 사내가 굳은 얼굴을 풀고 입가에 비웃음을 건 이유였다.

“여, 여기 오면 구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새끼가 그랬는데?”

“…….”

앞에 서서 말을 하던 남자아이가 되물은 질문에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여길 알려줬던 사람이 자신이 누군지는 절대 밝히지 말라 했나 보지. 사내의 비웃음이 더욱 진해지면서 나름 상냥한 척 목소리를 꾸몄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누가 여기 오면 살 수 있다고 그랬는데?”

“…….”

“말 안 하면 못 사는데? 여긴 다 인맥으로만 오는 곳이라. 아직 어려 뭘 모르네.”

“아씨… 말하지 말랬는데. …어쩌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남자아이가 제 뒤에 선 후드를 뒤집어쓴 놈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지간히 여기 분위기가 무서운지 앞에 선 남자아이의 옷깃을 쥔 채 가늘게 떨고 있던 후드 놈이 사내를 힐끔대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그냥 가자. 나중에 그 딜러 형한테 구해달라고 하고 도, 돈을 더 주면 되잖아. 돈도 많으면서….”

“…그럴까?”

앞에 선 남자아이의 물음에 뒤에 선 후드 남자아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말이 사내의 귀를 잡아챘다.

돈이 많아? …뭐가 얼마나 많아서?

“야, 너희.”

“왜, 왜요?”

사내가 부르는 말에 후드 놈은 경기를 일으킬 것처럼 놀라는 게 보였고, 앞에 선 놈은 놀랐으면서도 놀라지 않은 척을 했다. 그래 봐야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 모습에 사내가 웃는 얼굴로 일어나 녀석들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여기가 그냥 올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누구 얘길 듣고 왔는지 말해줘야 나도 내보내 줄 수가 있어요. 어떤 새끼가 여길 알려줬냐고.”

“…….”

“야, 그, 그냥 빨리 말해 드, 드리자….”

코앞으로 다가온 사내의 모습에 앞에 선 남자아이가 겁을 먹은 얼굴로도 입술을 꾹 깨물고 버텼다. 그러나 뒤에 선 후드 놈은 영 패기가 없는지 앞을 버티고 선 남자아이의 팔을 잡아 흔들며 눈에 띌 만큼 몸을 떨었다.

정황상 돈줄은 요 앞에 선 놈 같았다.

“말해 봐. 그놈한테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진짜요?”

“애새끼들이 속고만 살았나, 아무 말 안 한다고.”

그래도 딴엔 나름 의리가 있는지 고민하는 척 버티는 남자아이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사내는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냈다. 딱 봐도 돈 많은 호구다, 이 새끼.

“그… 클럽의 딜러 형이 알려줬는데….”

“딜러? 딜러 누구?”

“…산타 형이요.”

“산타? 이태원 산타? …그 새끼 요새 안 보이던데, 클럽 전전하고 다니디?”

“그, 그건 모르겠고, 뉴스 보고 산타형 만났을 때 물어봤더니 여길 알려줬어요. 이제 가도 돼요?”

“야…, 잠깐 기다려 봐.”

사내가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씨발, 그놈의 뉴스. 사내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요새 뉴스나 기사를 타고 유명해진 SG를 찾는 어중이떠중이는 발에 차이도록 넘쳐났다. 인터넷으로도 그건 어디서 구하냐는 질문들이 넘쳐났고.

그러나 원래도 SG를 푸는 놈들은 신중하게 움직이길 선호했고, 그 물량도 한 번에 많이 푸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약들처럼 많이 사다 보관해 둘 수도 없었다. 그런데 요새는 방송까지 타는 바람에 아예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좆 같은 세가 놈들. 혼자서 욕설을 중얼거리던 사내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두 어린놈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짝다리를 짚고 서서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가 원래 사던 건 뭔데?”

“…….”

“씨팔, 여기까지 와 놓고 더럽게 꾸물거리네. 괜찮으니까 말해 보라고.”

“…아이스요.”

금세 포악해지는 사내의 태도에 눈치를 보던 남자아이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이스라…. 어린 것들이 발랑 까져서, 벌써부터 뽕이나 하다니. 사내는 고민스럽게 턱을 문지르며 떠보듯 가볍게 물었다.

“작대기 하나에 얼마씩 주고 샀어?”

“…150이요. 가끔 크리스탈급 들어오면 200에도 샀고요.”

“뭐? …얼마?”

산타, 이 미친 새끼. 어린 애들을 상대로 뭘 얼마나 남겨 먹은 거야. 시중에서 구하는 금액보다 3배가 넘게 비싼 가격에 내심 욕설을 내뱉은 사내가 얼른 표정을 굳히며 앞에 선 놈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이 어린놈이 그런 돈을 덥썩덥썩 줄 정도로 마빡에 돈이 튄다고? 사내의 눈이 의심스럽게 좁혀졌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녀석의 차림새를 살폈다. 문득 그의 시선이 남자아이의 손목에서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하, 잘난 집 도련님이네.

형광등 불빛 아래로 드러난 곱상한 얼굴은 확실히 귀티가 났다. 세상 때라고는 모르는 얼굴로 마약을 찾는 게 우스워 그렇지, 저 손목에 찬 시계만 해도 수천만 원을 호가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사내는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하필 그가 갖고 있던 SG가 딱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나만 있었어도 호구 하나 제대로 물었을 텐데. 아는 놈들 통해서 구해봐야 하나….

사내는 아쉬운 얼굴로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루트를 떠올리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는 놈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무리 봐도 돈 많고 순진한, 아니, 호기심 많은 어린놈들이었다. 사내는 이내 사람 좋게 웃으며 녀석들을 손짓해 불렀다.

“야, 일단 오늘은 개통 기념으로 다른 거 줄 테니까, 다음에 다시 와. 그때 몇 개 구해다 놓을 테니까.”

“진짜요? 진짜 구해 줄 수-.”

“야아-.”

뒤에 선 후드 놈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앞에 선 놈의 팔을 붙들고 말렸다. 사내는 오히려 그 조심스러워하는 행동에 완전히 의심을 지우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곧장 환전대 뒤로 돌아가 허리를 숙인 채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산타가 여기 가 보라고 하면서 말 안 해 줬어? 여기만큼 양심 있는 안전한 가게도 없다고? 일단 이거나 가져가서 써 보고 효과 좋으면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와라? 응?”

액체가 찰랑이는 작은 병이 환전대 위로 소리가 나게 놓였다. 그러자 그 소리에 움찔하고 몸을 떨던 놈들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움찔움찔 다가왔다.

“이, 이게 뭔데요?”

“침대에서 쓰면 존나 죽이는 거.”

“…예?”

“니들 딱 봐도 둘이 붙어먹은 거 같은데, 잘 때 이거 한번 써봐. 죽인다, 아주. 물건이야, 이거. 하룻밤에도 홍콩을 몇 번이나 갔다 온다니까?”

“…어, 어어….”

앞에 선 놈이 질 나쁜 단어에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뺨을 붉혔다. 그리고 어느새 호기심으로 눈을 빛낸다. 귓가가 발긋한 거 보니 뭘 상상해도 제대로 상상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사내는 그 반응에 꼴에 남자라며 저질스럽게 웃다가 뒤에 선 놈을 힐끔 쳐다보았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표정이 보이진 않지만, 뒤쪽 녀석은 뭔가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옷깃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사내는 그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앞에 선 놈에게만 들릴만한 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딱 봐도… 네가 위지? 가서 이거 한번 써봐. 아랫놈 죽어난다, 진짜. 내가 보장한다니까?”

“…위험한 건 아니죠?”

“씨팔, 뭘 당연한 소릴 해. 위험한 거면 내가 다음에 또 오라고 하겠어, 이 새끼야?”

“……주세요.”

“야!”

뒤에 선 후드 쓴 놈이 말리는데도 앞에 선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빛냈다. 그 모습에 사내가 킬킬대고 웃으며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세 번 정도 나눠 쓸 수 있는 양인데, 아무리 좋아도 하루에 다 쓰진 말아라. 응?”

“…….”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놈이 뒤에서 열심히 말리는 손을 피해 기어이 작은 유리병을 제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후드 놈을 달래 데리고 나가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엔 언제쯤 오면 돼요?”

“글쎄…. 한 3일 뒤에 와 봐. 그때까지 그거 잘 쓰고 있고.”

친절하게 손을 흔들며 하는 사내의 말에 남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들어왔을 때처럼 딸랑- 하고 종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그때까지 여유롭게 서 있던 사내는 얼른 휴대폰을 찾아 꺼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일단 산타 새끼한테 먼저 저 돈 많은 어린놈이 누구인지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97

문을 닫고 나와 길을 걸어가던 두 사람 중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윤상원이 홱- 하고 후드를 넘기며 얼굴을 드러냈다. 여러모로 심기기 불편한 듯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니, 저 새끼 저거, 미친 거 아냐? 애들한테 뭘 주는 거야? 양심도 없이!”

“형, 얼굴은 계속 가리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목소리가 너무 커요.”

“시끄러워! 내가 이런 거나 뒤집어쓰고 있으니까 저딴 말을 듣는 거 아냐. 뭐? 딱 봐도 네가 위? 뭘 어떻게 봤길래 네가 위야? 키도 내가 더 큰데? 마약상이라는 새끼가 사람 보는 눈은 더럽게 없어선, 아오씨!”

손재원의 지적에 차마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조용조용히 분노를 삼키던 윤상원이 이를 갈았다. 손재원은 그런 윤상원의 모습에 티가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며칠을 같이 지내본 결과 이럴 땐 그냥 말을 돌리는 게 가장 낫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슬쩍 윤상원의 허리를 한팔로 끌어안았다.

“그럼, 갈게요.”

“아, 잠깐만. 그거 줘.”

막 윤상원을 안은 채 이동하려던 손재원이 코앞으로 내밀어 진 손을 보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뭐요?”

“뭐긴 뭐야, 네가 방금 받아온 거 말하는 거지. 그거 나중에 경위서 써서 같이 제출해야 해. 싫으면 네가 직접 제출할래?”

“아-, 아니요. 여기요.”

그제야 손재원이 허둥지둥 제 주머니 안에 있던 것을 꺼내 윤상원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작은 병을 챙기면서도 음흉한 얼굴을 해 보인 윤상원이 손재원의 어깨를 제 어깨로 툭 하고 쳤다.

“왜에~? 아쉬워? 어차피 제출만 하면 되는데, 반은 덜어 줄까?”

“아니요. 필요 없는데요.”

은근슬쩍 몸을 붙이며 놀려오는 윤상원을 피해 홱 하고 고개를 튼 손재원이 단호하게 거절하면서도 불이 꺼진 간판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 목덜미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본 윤상원은 장난기가 동했는지 툭툭 어깨를 치대며 더욱 신나게 놀리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닌데? 아까 보니까 눈을 막 반짝이면서 쳐다보던데? 내가 비밀로 해 줄게 반만 가져가. 형 입 되게 무거워. 그리고 원래 네 나이 때가 호기심이 강하고 그럴 나이지. 이해한다, 형은. 나도 이미 다 겪어봐서-.”

“…형, 갈게요.”

참다못한 손재원이 윤상원의 허리를 잡고 크게 도약하더니 낮은 건물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대비할 새도 없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게 된 윤상원이 놀라서 ‘으아악-!’ 하고 소리를 치려 했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손재원의 손이 입을 막고 있었다.

그렇게 단 한 번의 점프만으로도 건물의 옥상 위로 올라간 손재원은 성인 남자를 들고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건물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러더니 다시 환전소가 있던 건물의 옥상에 도착했다.

발이 옥상 바닥에 닿자 그제야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사이 정신을 차려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옴팡지게 물어뜯은 윤상원이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손재원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화가 난 윤상원과 잇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번갈아 쳐다보다 푹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별말 없이 윤상원의 머리 뒤로 넘어가 있던 후드를 도로 씌워주며 조금씩 청력을 키웠다.

그런 손재원의 태도에 윤상원이 이걸 어떻게 죽일까 하는 눈빛으로 노려보다 작은 목소리로 욕을 쏟아냈다. 그러나 묵묵히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상대에 지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말없이 이러면 죽는다? 가만 안 둘 거야, 진짜.”

“…….”

“어엉? 대답 안 하네?”

“…네.”

기운 없는 대답에 이를 악문 채 노려보던 윤상원이 봐줬다는 듯 흥, 하고 턱을 치켜들며 옥상 바닥으로 철푸덕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쓰고 있던 후드의 가장자리를 접어 귀 뒤로 넘긴 채 손재원을 따라 감청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 능력이 없는 윤상원으로서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봐도 길거리에서 나는 소음 외에는 들리는 것이 없었다.

- 아 씨팔. 산타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무슨 일 있나?

건물 안에서 선명히 들리는 소리에 손재원의 머릿속에선 사내의 행동이 그려지듯 읽혔다. 그렇게 가만히 쭈그려 앉아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던 손재원이 작은 소리로 윤상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지 않으면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윤상원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거나, 손을 깨무는 등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괴롭혀왔기 때문이다.

“산타한테 전화 중인가 봐요.”

“아, 우리가 누군지 확인하려고? 근데 걔랑 통화 안 될 텐데? 며칠 전에 외국으로 잠적한 새끼가 퍽이나 받겠다.”

“…네. 안 그래도 혼자 화내고 있어요.”

“화를 내면 받나? 엄한 데 기운을 쓰네. 쯧쯧.”

사내가 봤으면 화를 내다 못해 주먹을 들었을 것 같은 얄미운 얼굴로 어깨를 들썩인 윤상원이 계속해서 집중하라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아래 방향을 손짓했다. 특성화된 능력은 별 노력 없이도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고스란히 들려줬다. 그러나 그 말을 해봐야 또 가자미 눈을 한 윤상원으로부터 ‘지금 에스퍼라고 재냐?’라는 소리나 들을 거라 말없이 집중하는 척 입을 다물었다.

- 여보세요? 어, 난데. 너 요새 산타 소식 들은 거 없냐?

사내는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자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건 듯 산타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 외국으로 튀었다고? 언제? …지난주? …그 새끼 튀기 전엔 어디서 판 벌렸는지 알아? …클럽? 확실해?

사내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으며 흥분이 가셨다. 그러나 건물 안을 돌아다니는 발걸음은 신이 난 사람처럼 가볍고 경쾌했다. 그때 윤상원이 손재원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쭉쭉 잡아당기며 입 모양으로만 ‘뭐래?’ 하고 물어왔다.

손재원은 차마 그 손을 치워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머리카락을 내맡긴 채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우리 말을 믿는 거 같아요.”

“오-.”

“걸음 소리가 가벼워요. 신났나 봐요.”

“신나겠지. 호구 하나 잡은 기분일 텐데…. 너, 그 시계 조심히 쓰고 한태화한테 꼭 반납해라. 아까 그 새끼가 노골적으로 시계만 보는데, 으- 그 눈, 너무 소름 끼쳤어.”

“…네.”

윤상원의 말에 손목을 감싸고 있는 메탈 소재의 시계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손재원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입을 나오기 전 몇 가지 지시사항을 전달해주기 위해 나왔던 서요한의 뒤로 한태화가 따라붙어 있었다. 그는 서요한이 말하는 내도록 아무 말이 없다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가려던 손재원을 불렀다. 그리고는 아주 재수 없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제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줬다.

‘그 꼴로 돈 있는 행세를 하겠다니, 기관 재정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세가 재산 현황을 한번 보고 받아야겠는데.’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은 손재원을 보고도 멋대로 시계를 쥐여주며 그딴 소리나 지껄이던 한태화는 금세 표정을 바꿔 서요한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더니 ‘이제 끝난 거죠?’라고 하며 발랄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쓰고 나서 돌려달라는 말조차 없이, 가지든 말든 알아서 해라, 라는 태도로 그렇게 가버린 것이다.

‘조오-온나, 재수 없네.’

멀어지는 한태화의 등을 보며 중얼거린 윤상원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때를 떠올린 손재원이 다시 한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태화는 정말로 재수가 없었다.

지난번 싸웠을 때만 해도 그렇다. 마치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듯 시험하는 사람처럼 조금씩 강도를 올려가던 한태화는 그러다 어느 순간 짜증이 난 것처럼 굴며 거침없이 힘을 썼다. 그런 태도가 같은 등급의 상대에게조차 무력감과 패배감을 선사했다. 그리고 매번 서요한 곁에 붙어 애교를 부리다가도 누가 다가가려 하면 물 것처럼 눈을 빛내는 것도 정말… 꼴 보기 싫었다.

말은 험하게 해도 속은 다정한 요한 형이 어쩌다 그런 녀석에게 걸린 건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던 때, 서로 근황이나 묻던 사내가 드디어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 야, 근데 너 설탕 남는 거 있냐? 찾는 손님이 있는데. …없어? 하나도? …아-, 알지. 요새 그거 물량 구하기 힘든 거. 그냥 물어나 본 거야.

상대가 뭐라고 했는지 사내가 달래듯 목소리를 바꿨다. 그러나 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그럼 좆팔이 새끼, 그놈도 아직 그거 파냐? 걔가 설탕 공장 쪽이랑 다이다이 텄다는 소문이 있던데. …응. 믿음직한 소문이라 이거지? 그래. …응, 알려줘서 고맙다. 좋은 거 나오면 연락 주고. …그래, 끊는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사내는 거칠게 욕을 뱉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듯했다. 작게 난 삐꺽대는 나무 소리를 들으며 손재원은 윤상원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눈치 빠르게 그 시선을 읽은 윤상원이 ‘왜왜왜? 무슨 일 있어?’라고 입 모양으로 물어왔다. 그에 손재원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탕 공장이 SG 공급처 말하는 거 맞죠?”

“응. SG를 직접 제조해서 만드는 곳을 설탕 공장이라고 한다던데…. 뭐야, 설마?”

설명을 이어가던 윤상원이 기대감 어린 얼굴로 눈을 크게 키웠을 때였다.

- 아오 씨팔. 그 새끼한텐 진짜 전화하기 싫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사내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아,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저 명동의 솔잎꾼입니다. 예, 덕수요.

설설 기는 목소리로 길게 인사말을 늘어놓는 사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재원이 윤상원을 향해 씩- 하고 웃어 보였다. 그 하얀 뺨에 보조개가 패인 순간, 손재원이 작게 입을 열었다.

“물었어요.”

“-그러치! 드라마를 그렇게 봤는데, 내 연기력이 안 먹힐 리가 없지! 내가 봐도 완벽했다고!”

윤상원이 기분 좋게 눈매를 늘어뜨리며 싱글벙글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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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윤상원: 입질 시작! 오후 11:27]

잘 준비를 하고 있다 머리맡에서 울리는 진동에 손을 뻗어 휴대폰을 보았다. 상원이다운 그 간략한 보고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시계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밖에 있는 건가. 날도 추운데.

[고생하네. 조금만 더 기운 내라. 오후 11:29]

[윤상원: 진짜 너무 힘들어요ㅠㅠ 저한테 다신 이런 거 시키지 마세요ㅠㅠ 제가 정말 잘할게요, 태후님~ 오후 11:30]

[윤상원: (눈물)(눈물)(눈물) 오후 11:30]

[까불지 또? 잘하고 있으니까 좀 더 힘내봐. 재원이는? 오후 11:31]

[윤상원: 몰라여ㅠ 손재원따위, 옆에서 감청 중인지 아닌지 알게 뭐예요! 말 안 해줄거야ㅠㅠ 선배 미워ㅜㅜㅜㅜ 오후 11:32]

[응 그래. 감청 중이구나. 수고해라 오후 11:32]

그때 불쑥 고개를 내민 한태화가 휴대폰 화면을 머리로 가렸다.

“뭐야. 윤상원이네.”

“너 지금… 뭐하냐?”

“이 밤중에 누구랑 그렇게 연락 중인 건가 해서요. 질투할 수 있는 기회인가 싶었는데…. 아쉽네요.”

“…….”

아쉬운 듯 웃는 얼굴을 보고 왜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질색하는 얼굴로 순하게 웃고 있는 한태화를 내려다보다 휴대폰을 베개 옆으로 던졌다. 그 신경질적인 손놀림에 한태화가 작게 큭큭거리며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그만 웃어.”

“네-.”

“야.”

“예, 요한. 저 이제 안 웃고 있는데요.”

목소리에서 웃음기나 거두고 그런 말을 해라.

“안 웃기는…. 일주일 후에 정기총회지? 거기서 새 기관장을 뽑는 거고.”

“그렇죠. 근데… 그게 왜요?”

남의 옆구리에 얼굴을 묻은 채 웃고 있던 녀석이 멈칫하고 움직임을 멈췄다가 갑자기 그걸 왜 묻냐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일주일 후, 기관장을 선출하기 위한 정기총회가 열렸다. 지금껏 버티며 구속 수사를 받던 채애현이 드디어 기관장 직에서 사퇴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의로 한 것은 아니고, 워낙 국민 여론이 좋지 않자 윗선에서 그렇게 하라고 압박을 한 것 같았다. 어쨌든 그 덕분에 임시 기관장이 아닌 새 기관장을 뽑아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새 기관장은 일단 세가의 직속 부처인 행안부 장관이 실적에 따른 인사 리스트를 받아 적당한 후보를 고르고 난 후, 총회에서 투표를 통해 결정된다.

다행히 한태화는 후보에는 올라가 있었지만, 총회에서 최다 표를 받아야만 기관장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이 좀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표가 쏠리면 한태화가 아닌 다른 사람이 기관장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새로운 기관장. 그 후보로 들어간 사람들을 떠올리며 걱정스럽게 표정을 찌푸렸다.

“새 기관장이 뽑히면… 그 사람도 그럴까?”

“뭘요?”

“가이드를 인질 삼는 거. 그걸로 에스퍼는 멋대로 휘두르고.”

“…….”

허리에 팔을 두른 채 허리 쪽에 턱을 대고 있는 녀석으로부터 시선이 느껴졌다. 부담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틀어 녀석의 시선을 피하는데, 문득 허리를 안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요. 누가 또 그러면, 이번엔 나한테 전속 계약을 해지해 달라고 하려고요?”

“음…, 글쎄.”

“요한.”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풀리며 일어나려는 듯 몸을 세우는 한태화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뒤에 말을 이었다.

“안 그럴 거야. 안 그럴 건데… 어쨌든 난 최대한 널 지키는 방향으로 가겠지.”

“…그게 결국 버릴 거란 말 아닌가요?”

“다르지. 임시 가이드 계약 하나 해지하자고 했다가 네가 그렇게 미친놈처럼 들쑤시고 다니는 꼴을 봤는데, 또 그러라고? 밥은 제대로 먹고 다녔나 싶게 있는 대로 살은 빠져선, 잠도 제대로 못 잔 놈처럼 허옇게 뜬 얼굴로 돌아다니는 꼴을 봤는데. 차라리 기관 놈들이 휘두르게 두다가 네가 빡 쳐서 다 때려 부수는 게 낫지.”

“…이번엔 진짜 그 정도로 안 끝나요.”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눈매를 좁혔던 놈이 금세 풀린 얼굴로 실실대며 웃다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배 위로 고개를 올린 후 잠을 잘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 얼굴이 편안해 보여서 나도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번엔 내 손 꼭 잡고 있어요. 미친놈 날뛰는 거 안 보려면.”

“이젠 스스로도 인정하나 보다? 너 미친놈인 거?”

“제가 요한 말을 잘 듣잖아요. 요한이 그런 거라면 그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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