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49)
  • …언제 한번 제대로 걸리기만 걸려라.

    후환이 두렵긴 한 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녀석을 향해 씩 하고 웃어주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득득 갈았다.

    #91

    회의실로 사람들이 모였다.

    일단 사무 지원팀의 팀장인 나와, 지원 3팀에서 나온 상원이, 지원 1팀에서 나온 김영민 가이드와 지원 2팀의 이소영 가이드가 모두 참석했다.

    현장팀에서는 총괄팀장인 정팀장님과, A등급의 정신계 능력자인 차수혁, A등급의 방어계 능력자인 최주용 에스퍼, B등급의 공간 이동 능력자인 박지환 에스퍼, B등급의 염력계 능력자인 김혜지 에스퍼가 모두 회의실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총 9명으로 구성된 이 사람들이 특진팀 팀원들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SG 유통 경로를 알아보던 게 막힌 겁니까?”

    수혁이가 나를 보며 던진 질문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현재 진행 상황이 나와 있는 백보드를 가리켰다.

    “예. 일단 김동원이 준 자료를 중심으로 육성파에서 나온 자금의 흐름을 따라갔는데, 돈세탁을 해서 들어가는지 자금이 모두 외국의 페이퍼 컴퍼니 쪽으로 빠지는 걸 확인했습니다. 인터폴에도 수사 협조 요청을 하긴 했습니다만, 단시간 내에 연락이 올 거 같진 않습니다.”

    Ten Ten Corporation 이라고 써진 글씨를 원수 보듯 노려보았다. 저 차명 이사들로 구성된 페이퍼 컴퍼니로 넘어간 자금의 흐름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십새끼+십새끼의 씹새끼들이었다.

    “아무래도 전에 말한 대로 암시장 쪽으로 직접 사람을 투입해서 약의 경로를 따라가는 게 제일 나을 것 같네요. 페이퍼 컴퍼니가 끼면 조사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가뜩이나 언론에서 SG에 대해 떠들어대서 그놈들도 몸을 사리고 있을 텐데.”

    “그렇지. 그게 제일 낫지.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SG 구경하러 온 뜨내기로 위장시켜서 들여보내는 게 제일 나을 거 같긴 한데….”

    김혜지 에스퍼의 말을 받은 최주용 에스퍼가 허락을 구하듯 팀장님을 돌아봤다. 그러나 팀장님이 뭐라 입을 떼기 전에 수혁이가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 중에 그쪽에 얼굴 안 팔린 사람이 있어요? 특별팀일 때 하도 얼굴을 팔고 다녀서 저쪽도 우리 얼굴을 다 알 것 같은데. 저도 육성파 일로 현장 나갔다 온 지 얼마 안 돼서 힘들 것 같고요.”

    수혁이의 지적에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원래라면 평소 실적에 눈이 먼 내가 자원을 하고 나섰을 텐데, 이번 밤나비와의 일로 전국에 얼굴이 팔린 후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리고 원래 현장 잠입 일에는 무조건 에스퍼가 포함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이 팀의 에스퍼들이 모두 얼굴이 팔렸다는 점이다. 덕분에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데, 팀장님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아는 애 중에 이번에 막 기관 인턴 요원 직에 신청하려는 애가 있거든? 이번 일에 걔를 데리고 진행하면 어떨까?”

    “요원도 아니고, 요원을 신청하려는 애요? 그건 거의 민간인인데요?”

    박지환 에스퍼가 걱정스럽게 턱을 문지르며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일반인에 가까운 사람을 무턱대고 잠입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을 때였다.

    “괜찮을 거야. 일단은 걔가 특수계열에 S등급 능력자거든.”

    ……응? 잠깐만, 특수계열의 S등급?

    놀라서 고개를 든 순간 회의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S등급 에스퍼가 또 나왔어요? 오- 대박.”

    “말도 안 돼. 특수계열? 능력이 뭔데요?”

    “이제 막 인턴 지원하려는 사람이에요? 팀장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고 데려오겠다는 건데요?”

    팀원들이 제 각자 놀란 얼굴로 말을 나누는 것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옆에 앉아 계신 팀장님의 팔을 팔꿈치로 툭 하고 쳤다.

    “팀장님, 그거 혹시-.”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열렸다.

    “저, 실례합니다. 정팀장님께서 부르셔서 왔는데요…, 어- 형!”

    “너….”

    문 사이로 조심스럽게 얼굴만 내밀고 있던 어린 녀석이 확 하고 밝아진 얼굴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 손재원이었다.

    ***

    “전 반대예요.”

    내 단호한 목소리에 팀장님은 난감하단 얼굴을 해 보이면서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꺾지 않았다.

    “야, 솔직히 쟤만큼 잘 해낼 애가 어디 있어. 뉴페이스에 S등급이라 어디 가서 큰일 당할 거 걱정 안 해도 되고, 심지어 개과라 냄새도 잘 맡는대. 아마 약 냄새도-.”

    이 사람이 진짜….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럼 뭐해요! 미성년자잖아요, 미성년자! 마약 조사를 하는데 미성년자를 쓸 겁니까?”

    “…아니, 나도 그게 조금 걸리긴 하는데….”

    조금? 조오금? 그게 왜 조금 걸려?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팀장님을 노려보자 팀장님도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그러나 내 눈치를 보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미성년자래도 S등급이면 뭐…. 그리고 한 달만 지나면 해 바뀌어서 미성년자도 아니더만….”

    어지간히 자신의 말을 물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도 다들 내 눈치를 살피고 있을 뿐, 팀장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 같았고. 그런 사람들 사이로 테이블 한편에 앉아 있던 손재원이만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멀뚱멀뚱 날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대체 저 어린앨 데리고 뭘 하겠다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참으며 인상을 팍 찡그리는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소영 가이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럼 보호자 겸 서브로 가이드 한 명이랑 같이 보내는 건 어때요? 서팀장님 말대로 애 혼자 보내긴 좀 그렇고, 지원팀에 요청해서 가이드랑 같이 보내면 될 거 같은데요. 나이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면 친구인 척해도 될 것 같고요….”

    그 말에 최주용 에스퍼가 눈을 굴리며 ‘괜찮은 사람이 마땅히 안 떠오르는데….’ 라고 곤란한 듯 중얼거렸다.

    십 대처럼 어려 보이는 얼굴에 현장 일을 한 경험은 적어도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구하기가 어디 쉬울까. 나 역시 그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는데 이미 다 생각해 놓은 바가 있었던 것처럼 팀장님 그 말을 받았다.

    저 양반,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다.

    “나라고 저 어린앨 혼자 보낼 생각을 했겠어? 다 생각해 놨다고. 현장 경험은 거의 없다시피 한데 눈치 빠르게 잘 해낼 애가 딱 하나 있거든. 그것도 바로 우리 팀에.”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팀장님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다른 팀원들의 시선도 팀장을 따라 옮겨갔다.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반대하고 있던 나 역시 팀장님의 시선 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지루한 얼굴로 회의 자료 귀퉁이에 세모, 네모, 동그라미 따위를 그려 넣고 그 안을 색칠하듯 채우고 있던 상원이가 눈치 빠르게 고개를 들더니 귀에 꽂고 있던 선 없는 이어폰을 뺐다. 딴짓하느라 회의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고 있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왜 다들 날 봐요? 뭐지, 이 분위기는?”

    “그러고 보니… 쟤 현장 잘 안 나갔죠?”

    최주용 에스퍼가 확인하듯 물은 질문에 팀장님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꾸라지처럼 현장 근무 요청을 받은 차출에선 슬그머니 빠져나가던 상원이었다. 그 자리를 매번 내가 메꾸었고.

    “워낙 일하기를 싫어해서 좀 그렇긴 한데…, 근데 뭐든 맡기면 잘 해내긴 하더라구요….”

    요사이 상원이를 붙들고 억지로 일거리를 안겨주던 김영민 가이드가 떨떠름하게 덧붙였다. 확실히 상원이가 뺀질거리는 경향이 좀 있어 그렇지 한번 일을 맡겨 놓으면 처리가 깔끔하기는 하다.

    “B등급이면… 아주 나쁜 것 같지도 않고요….”

    이소영 가이드가 슬쩍 내 눈치를 보면서도 한마디 거들었다. S등급의 한태화의 가이드로 소문난 D등급 짜리 가이드도 있는데, B등급이면 S등급과 나쁜 페어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점차 몰아가는 분위기에 기민하게 눈치를 살피던 상원이가 볼펜을 테이블 위로 툭 하고 던지며 대번에 인상을 찌푸린다.

    “뭔지는 몰라도, 나 안 할-.”

    “쟤로 하자. 상원이면 너도 불만 없지, 서팀장?”

    팀장님이 상원이의 말을 자르며 내게 동의를 구해 왔다. 당연했다. 현재 손재원의 보호자가 나니까.

    밤나비와 샐러맨더가 자수해 버린 후, 손재원은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아졌다. 그래서 내가 살던 사옥 아파트에서 임시로 머물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한태화가 더 나를 집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던 거고. 저랑도 못한 동거를 딴 놈이랑 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나, 뭐라나.

    어쨌든 그 덕에 지금 당장 녀석의 보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었다. 밤나비와 샐러맨더가 자수를 하면서 손재원을 부탁해 오기도 했고 말이다.

    현재 손재원은 한태화의 도움을 받아 밤나비의 양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등급 검사를 마친 후 국가에 등록이 된 상태였다. 등급 검사에서 S등급이 떴으니 당연히 기관에서 활동을 해야만 하기도 했고. 천천히 인턴 요원 직도 신청하려고 하긴 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나서서 반대해 봐야 팀장님 말대로 한 달만 지나면 손재원을 특진팀으로 차출하는 건 일도 아니다. 오성파 내에서 구른 아이니 일을 못 하거나, 적응을 못 할 게 걱정되지도 않았고.

    다만, 그 보호자로 윤상원이라….

    고개를 돌리자 뭔지는 몰라도 내 결정이 중요하다는 분위기는 읽었는지 상원이가 간절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상원이면 뭐…. 며칠 좀 가르치면 되겠네요.”

    “선배!”

    절망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상원이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92

    “안 해! 안 해요! 현장 일 싫다고요! 정해진 퇴근 시간도 없고, 추가 근무만 잔뜩인 일을 내가 왜 해요?! 내가 대체 왜 팔자에도 없는 보모 노릇까지 해야 하냐고요!”

    “사실은 그게 팔자였나 보지.”

    최주용 에스퍼가 놀리듯 말하며 회의 자료가 담긴 파일을 덮었다. 회의가 여기서 끝이란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아이고, 우리 요정님. 파이팅입니다!”

    박지환 에스퍼도 제 일이 아니라는 듯 해맑게 웃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아, 간만에 윤상원이 현장 뛰는 걸 다 보겠네.”

    팀장님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재원에게 다가가더니 자신을 따라오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지금 당장 저 핏덩이한테 가르쳐야 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안 해! 나 안 한다니까요? 내 말 안 들려요?”

    “팀장이 하라면 하는 거지, 말이 많다.”

    악을 쓰는 상원이를 향해 귀가 아프다는 듯 손가락으로 귀를 막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러자 녀석이 눈을 부릅뜨며 달려들었다.

    “선배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내가 아까 서태후라고 놀려서 그래요? 그럼 차라리 주먹으로 쳐요! 때리라고!”

    얼굴을 들이밀며 차라리 때리라고 소리치는 상원이를 놀란 얼굴로 보던 손재원만이 무슨 일인지를 모른 채 멀뚱멀뚱하게 서 있다 정팀장님을 따라 슬금슬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상원이가 싫다고 악을 쓰든 말든, 회의는 무사히 끝이 났다.

    ***

    “선배,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요. 진짜 나한테 저 핏덩이를 맡길 거예요? 날 뭘 믿고?”

    “…….”

    “이거 엄청 중요한 일이라면서요. 근데 진짜 나랑 보낼 거냐구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요-, 네?”

    결정 난 상황을 임시 기관장인 한태화에게 보고하러 가는데, 그 길을 따라나선 상원이가 몸으로 길을 막아가며 결정을 번복시키려 용을 썼다.

    “막말로, 내가 이번 일 말아 먹으면 어쩌려고요? 나 믿어요? 내가 정말 이 일을 잘 해낼 거라고-.”

    “윤상원.”

    “네, 선배!”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려는 것을 막고 선 상원이를 진지하게 부르자 눈을 반짝이는 녀석이 고개를 치켜들며 간절하게 손을 모았다. 그 입이 제발제발 하고 빌고 있는 게 보였다. 저렇게 일이 하기 싫을까. 능력도 있는 놈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난 너 믿어. 너 아니었으면 쟤 성인 될 때까지 절대 이 일 허락 안 했어. 근데 너니까 믿고 허락한 거야.”

    “…선배?”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라고. 내가 누굴 믿고 쟬 맡겨, 그나마 너니까 믿고 맡기는 거지.”

    그 말에 상원이가 똥 씹은 표정으로 변하며 간절히 모으고 있던 손을 허탈하게 내렸다.

    “아니… 선배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그럼 내가 뭐가 돼? 할 말이 없잖아요, 할 말이!”

    또다시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광하는 녀석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2층 기관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지치지도 않는지 옆으로 따라붙은 상원이가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날 왜 믿어요? 우리 엄마도 나를 안 믿는데, 뭘 보고 믿는대? 아 좀, 선배 권한으로 저 다시 지원팀 보내주면 안 돼요? 여기 진짜 저랑 안 맞는 거 같아요.”

    “안 맞기는. 팀원들이랑 요정씨, 요정씨, 하면서 잘만 지내고 있으면서.”

    최선배나 강선배는 워낙 낯을 가리는 사람들이라 지금까지도 팀에 섞여들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팀장님도 그 둘을 지원 3팀에 남겨둔 거고.

    “선배 눈엔 그게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어요? 어떻게 그렇게 나한테 관심이 없어요? 그 인간들이 요정씨, 요정씨 하면서 은근슬쩍 일을 얼마나 많이 떠넘기는데! 저 지금 다크 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왔구요. 내가 진짜! …아, 최선배랑 강선배 보고 싶다….”

    다다다 말을 쏟아내던 녀석이 결국 우울한 얼굴로 눈썹 끝을 내린다. 그러더니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흑흑 우는 척까지 했다.

    하긴, 지원 3팀에서 지낼 땐, 막내라는 이유로 예쁨을 많이 받긴 했다. 어지간하면 쉬운 일만 맡기고, 하기 싫다는 일에선 슬쩍슬쩍 빼줘 가면서 말이다. 그래도 그만큼 빼주면 다른 데서 일을 벌충해 주던 녀석이라 밉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자잘한 일들이라 그렇지 녀석이 처리하던 사무량은 꽤 많은 편이었다. 워낙 빨리 끝내고 놀러나 다녀서 티가 안 나 그렇지. 발도 넓어서 가끔 진짜배기 소식을 물고 올 때도 많았고.

    그러고 보니… 저게 은근 난 놈이네. 뺀질거리면서 실적을 쌓을 수 있는 귀찮은 일엔 나서질 않아 그렇지.

    “그러지 말고 이번 일은 좀 잘 해봐. 세가가 등급이 깡패라는 건 너도 알잖아. B등급이면 일만 좀 괜찮게 해도 고속승진을 할 수도 있-.”

    그때였다. 막 2층에 도착해서 기관장실로 향하는 복도로 들어서려는데, 갑자기 상원이 놈이 내 양팔을 잡고 빙글- 하고 돌렸다. 덕분에 하려던 말이 애매하게 끊어졌다.

    “-아하하. 그, 그렇죠. 이번에 잘만 하면 스, 승진할 수도 있겠네. 워후, 존나 좋다! 근데 선배, 저 사무실에 뭘 좀 두고 온 것 같은데, 가, 같이 가주시면 안 될까요?”

    “뭐하냐, 너?”

    “아니, 저기, 그러니까…, 제가 두고 온 게….”

    눈에 띄게 헛짓거리를 하는 녀석이 의심스러워 눈을 가늘게 좁히는데, 어색하게 웃고 있는 상원이의 시선이 힐끔힐끔 내 뒤쪽을 향한다. 뭐야?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데, 앞에서 상원이 녀석이 난리가 났다.

    “선배, 잠깐만요! 아니, 그게, 선배….”

    “…….”

    “…아이씨, 저것들은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

    그제야 상원이가 못 보게 하려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관장실 앞 복도에 한태화와 진성현이 서서 소란스러운 나와 상원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래. 저게 남아 있었지. 하도 일이 많이 터져서 잠깐 잊고 있었네.

    아직도 내 양팔을 잡고 있는 상원이의 손을 떼어내며 그들이 선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뒤에서 작게 욕설을 내뱉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한 채로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잘 닦인 복도로 운동화가 내는 가벼운 발소리가 울렸다.

    “한태화 기관장님, 너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 요한, 저기, 그러니까요-.”

    “서요한씨.”

    한태화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다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픽- 하고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한태화의 표정을 보니 내 표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나 보다.

    그래도 뭐, 이 상황에 웃어 줬으면 보살 아닌가?

    “나 보고 할 거 있는데. 바쁘십니까, 기관장님?”

    “…….”

    “서요한씨, 태화랑 지금 얘기 중인 거 안 보이세요? 매번 이렇게 무례하게-.”

    “야.”

    내 한마디에 진성현이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야라고 불린 게 기분이 나쁜지 인상을 찡그린 채였다. 근데 나야말로 묻고 싶다. 왜 자꾸 입을 열어야 할 놈은 입을 다물고, 다물고 있어야 할 놈이 입을 여는지에 대해.

    “내가 전에 얘기했던 거 같은데, 피차 반가울 사이도 아니니 봐도 모르는 척하자고. 근데 뭐가 반갑다고 볼 때마다 말을 걸어.”

    “그거야 매번 이렇게 끼어드시니까 그렇죠. 우리 둘이 대화 중인 거 안 보입니까?”

    “아하, …그래, 아직도 ‘우리’구나, 너희?”

    저게 아직도 저러네. 채애현한테 붙어있다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됐으면 알아서 좀 꼬리를 말고 숨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거 때문에, 혹시라도 한태화가 나 때문에 기관에 휘둘리기라도 할까 봐 답지 않게 숨소리까지 참았는데….

    해지 계약서를 내밀던 날, 인형 같은 얼굴로 창백해지던 한태화가 떠올랐다. 물론 지금도 그에 못지않게 창백해져 있었지만.

    “할 얘기 다 끝난 거 같은데, 더는 볼 일 없었으면 합니다, 진성현 가이드.”

    그때 한태화가 내 눈치를 살피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그래놓고는 ‘저 잘했죠, 요한?’ 하는 얼굴로 쳐다봐 오는 녀석을 향해 팔짱을 끼어 보이며 한쪽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 미소에 칭찬받고 싶어 하는 표정이던 한태화의 고개가 슬그머니 돌아갔다. 그럴 수밖에. 지금 내 얼굴엔 딱 두 글자가 떠올라 있을 테니까.

    지랄

    이라고.

    “태화야, 우리 이러지 말고-.”

    “…치워.”

    중간에서 눈치를 살피던 진성현이 갑자기 한태화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그 손은 한태화에게 닿기 전 거칠게 내쳐졌다. 그건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함도, 진성현을 밀어내기 위함도 아니었다. 어느새 한태화의 얼굴엔 순수한 혐오감이 어려있었다. 조금쯤 장난스러웠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변하며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얗게 질려 굳은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가이드 손을 쳐내는 한태화는 오랜만에 보는 옛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이딩을 거부하며 가이드를 혐오하던 때의 얼굴이었다.

    팔짱을 끼고 서서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어 구경하고 있던 나조차 놀랄 만큼 한태화의 얼굴색은 순식간에 나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 손으로 입가를 감싼 채 눈을 찡그리던 녀석이 넓어 보였던 어깨를 작게 움츠렸다.

    “-욱!”

    손을 쳐내면서 닿았던 그 잠깐의 접촉도 견디지 못한 듯 한태화가 욕지기를 올렸다. 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하여 자세를 풀고 다가가 그의 몸을 잡아 세우며 차갑게 식은 뺨을 손으로 감쌌다.

    “한태화, 갑자기 왜 그래. 괜찮아? 나 봐. 속이 안 좋아?”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저를 부축한 내 어깨로 다가와 뺨을 비빈 한태화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가늘게 떨렸다. 그에 걱정으로 한숨을 내쉬다 아직도 버티고 서 있는 진성현을 돌아보며 얘기할 게 더 남았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녀석의 얼굴도 한태화 못지않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작게 벌어지던 입술이 몇 마디 내뱉지 못하고 다물렸다가 금세 다시 벌어졌다.

    #93

    “나는 널 살렸어! 예전에 그랬던 건, 널 살리느라 어쩔 수 없이-.”

    저 개새끼가 진짜. 하아…, 길게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최대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강제 가이딩이라도 해서 살려주다가, 연락을 끊고 잠적했지. 그러니까 적어도 그 주장을 하고 싶었으면 6개월 전엔 왔어야지. 그럼 내가 태화랑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 순간 잡혀 있던 어깨 쪽에서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만나게 돼서 싫다는 게 아니라. 은근히 불만을 표출해 오는 한태화의 등을 다독여 달래가면서 진성현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그러자 잠시 흔들리는 것 같던 시선이 악을 품은 듯 독하게 변해갔다.

    아, 그래. 그렇게 나와야 너 답지. 순간 너무 순순히 나와서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매번 이런 식이니까! 손만 좀 닿아도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게 닿은 사람처럼-! …나라고 이런 대접을 참아가면서까지 살려주고 싶었을까!”

    억울한 사람처럼 소리치는 녀석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내 앞에서 저렇게 억울한 척해본 들 좋은 말이 나올 리도 없건만, 진성현은 정말 진심으로 억울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로선 저 ‘살려줬다’라는 말조차 듣기가 거슬렸다.

    “그래. 그래서 묻는 건데 너 정말 왜 이러는데? 지금이라고 한태화가 달라?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게 닿은 사람처럼 구는데,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이러냐고. 네가 이렇게 나와봤자-.”

    “…….”

    “돈 필요해서 들러붙는 거로 밖에 안 보여. 그걸 정말 몰라서 이래?”

    묻다 보니 정말로 궁금해진 질문에 악을 쓰던 녀석이 입술을 세게 깨물며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다 노려보는 시선에서 힘이 빠졌다고 느낀 순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알아. 나도 아는데…. 그래도… 쟤가 내 피티스트니까. 나도 운명, 뭐 그런 걸 믿고 싶은 건 아닌데, 그래도… 운명이라며.”

    “…하.”

    “우리 사이가 그런 대단한 거라면, 그럼 이런 정도는 이해받을 수 있는 거잖아…. 사실 네가 지금 받는 그 호의, 그리고 그 감정, 그거 원래 내 거 아닌가? 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무슨 말을 하나 싶어 듣고 있던 그때, 어깨에 기대 숨을 내쉬던 한태화가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나처럼 기가 막힌다는 듯 하- 하고 숨을 내뱉은 녀석이 앞으로 나서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그것을 다급히 막으며 입을 열었다.

    진성현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내가 빡쳐서.

    “이런 정도? 한태화가 네 목숨 가지고 장난처럼 협박해도 그따위로 말할래? 이해해 줄 수 있다고? 그리고 뭐, 네 거? 한태화가 물건이냐? 미련 없이 버릴 땐 언제고, 왜, 너 외에 딴 놈한테 그 마음이란 걸 보이니까 이제야 아까워? 뭐 이런 게 다 있지, 진짜?”

    단지 남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이유로 타인을 제 뜻대로 휘두르는 장난 같은 협박. 그건 내가 요사이 지긋지긋하게 당해온 일이었다. 아주 진절머리가 나는 그런 일.

    애써 덮어놨던 상처가 헤집어지자 당연히 감정이 거칠어지며 목소리 역시 격해졌다. 그러나 진성현도 쉽게 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매로 그 역시 독하게 말을 내뱉었으니까.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었다. 한태화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그래, 아까워! 저렇게 사람다울 수 있는 놈인 줄 몰랐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 나니까, 네 말대로 아깝네. 그래서 해 주겠다고, 태화야. 앞으론 나도 네가 원하는 대로 가이딩해 주겠다고!”

    인지할 새도 없이 손이 뻗어져 나갔다. 눈에 욕심이 가득 찬 놈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자, 키가 작은 편인 놈의 발이 들리며 작게 신음이 내뱉어졌다.

    “등신같이, 지가 뭘 쥐고 있던 건지도 몰라서 버렸으면 버린 걸로 끝내. 짜증 나게 자꾸 징징대면서 엉겨 붙지 말고.”

    멱살을 쥔 내 손을 떼어내려 힘을 쓰던 놈이 떼어내지 못한 채 몸을 휘둘리다, 이내 독하게 웃으며 새파랗게 눈을 빛냈다.

    “너도 버렸잖아. 다른 사람들 눈치 보다 너도 손을 놨으면서, 왜 나한테만 이렇게 당당하게 구는데? 너는 뭐 얼마나 달라서?”

    “―뭐?”

    “해지 합의서. 너도 다른 더 소중한 거 때문에 쟤 버렸던 거 아닌가?”

    “…하, ―하하.”

    그 말을 듣는 순간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리며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래, 놈의 말이 맞았다. 놓으려고 했다. 그게 무슨 마음이었건, 그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건…, 마지막까지 그 손을 놓기가 싫어서 평소랑은 다르게 별 지랄을 다 떨었어도, 그런 변명을 빼고 나면 다른 사람 말에 휘둘려 싫다고 악을 쓰는 녀석에게 해지 합의서를 내민 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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