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49)
  • “저 꼴 보기 싫으면 내가 퇴사를 해야지….”

    “…….”

    “됐고, 그럼 가짜 오성파 사건은 어떻게 전체공개할 건데? 맞불을 놓으려고 해도 뭐가 있어야 기사를 내든 뉴스를 보도하든 할 거 아냐. 그런 게 있다~ 라는 식의 찌라시만 돌릴래?”

    “아, 그거요. 음… 제 생각엔 그게… 쟤한테 있을 거 같은데.”

    “…뭐?”

    손으로 맞은 편에 앉은 김동원을 가리키자 다리를 꼬고 앉아 듣고만 있던 놈이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린다. 놈은 저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다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웃으며 묻는 녀석의 말에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아침에 밤나비를 찾아가 계획을 털어놨을 때 가짜 오성파에 대해 물었다. 그는 자신은 잘 모른다고 답했다. 자신‘은’ 모른다고.

    그럼 다른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데, 아무리 봐도 저 꼬맹이가 알고 있을 리는 없으니 남은 건 김동원뿐이었다. 김동원 역시 부정할 생각은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갔다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녀석의 손에는 제법 두꺼운 서류가 한 뭉텅이 들려있었다. 그 서류 뭉치는 곧바로 소파 앞 테이블 위로 놓였다.

    “그게 그 가짜 오성파 자료-.”

    “자, 모두 동작 그만. 다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마. 이거 싹 다 불태우는 꼴 보기 싫으면.”

    “뭐…, 이 새끼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요한아, 다 얘기된 거 아니었어?”

    서류로 손을 뻗던 팀장님이 놀라서 몸을 물리더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녀석을 보다 정말로 궁금해져서 물었다.

    “너 뭐하냐?”

    “글쎄? 내가 뭐 하는 거 같아?”

    능글맞게 웃으며 물어오는 녀석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무는데,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한태화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귀찮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는 게 뭔지나 말해. 시간 끌지 말고.”

    “아, 역시. 쟤가 싸가지는 없는데, 말은 제일 잘 통한다니까.”

    “…그냥 불태워 버리던지.”

    김동원이 통했다는 의미로 윙크를 하자 한태화가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다시금 내 어깨로 얼굴을 묻는다. 그러더니 남의 옷으로 제 눈을 슥슥 닦았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보고 눈을 닦아내는 사람처럼.

    “에이, 그러지 말라고. 내 부탁이 그리 어려운 건 아니거든.”

    “…….”

    “그 채애현이라는 기관장, 걔 좀 우리 보스 앞으로 끌고 와. 와서.”

    그 순간 김동원이 손바닥으로 서류 위를 세게 내려치더니 사납게 웃었다.

    “씨발, 그년이 좆 같이 심어 놓은 병 좀 고치라고 해.”

    “…….”

    “…….”

    주의가 다시 한번 조용해졌다. 짓씹듯 나온 김동원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팀장님이 저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가만히 표정을 굳히자 이내 그 뜻을 알아들은 팀장님도 하- 하고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조용함이 깨진 건 밤나비가 김동원을 나직하게 불렀을 때였다.

    “동원아….”

    “보스, 말리지 마세요. 제가 이거 들고 찾아갔을 때, 네가 구한 거니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 건 보스셨어요. 그러니 이걸 어떻게 사용할지는 진짜 제 마음대로 합니다.”

    “…….”

    밤나비는 다시 한번 말리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김동원의 모습에 도로 입을 다물며 물러났다. 그러자 김동원 다시 사납게 입을 열었다.

    “니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자수를 하라면 자수를 하고, 그쪽으로 잠입을 하라면 목숨 걸고 잠입도 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 보스만 살려 놔.”

    매번 시비나 걸며 능글맞던 놈이 더없이 진지했다. 사실 나도 내도록 신경이 쓰이던 부분이었다. 저자를 내 아버지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죽는 걸 바라진 않는다. 정작 자수를 하라고 등을 떠민 것은 나면서도 말이다.

    무겁게 마음을 짓눌러오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내렸다. 누가 뭐라 떠들든 나는 그의 진짜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 저렇게 최우선순위로 저 남자를 살리고자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 저 남자의 진짜 가족이자, 그의 아들들인 것이다.

    “요한, 나 좀 봐요.”

    그때 갑자기 기다란 손가락이 뺨을 감싸더니 제 쪽으로 힘을 주었다. 그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한태화가 남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본다.

    “요한, 나는… 요한이 고아였던 때가 더 좋은 거 같아요.”

    “…뭐?”

    “근데 우리 요한이 착한 걸 어쩌겠어요. 그죠?”

    “너 지금, 무슨 소릴-.”

    “좋아. 원하는 대로 해주지.”

    한태화는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고개를 돌려 김동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황하여 김동원과 한태화를 번갈아 쳐다보는데, 김동원이 잘했다는 듯 엄지를 추켜세우기까지 한다.

    저 미친놈이, 왜 저래?

    인상을 팍 찌푸리며 허리를 물리다 문득 밤나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밤나비 역시 흐뭇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뭐, 뭐야. 나 아무 말도 안 했다고!!

    변명이라도 해봐야겠다 싶어 입을 열려는데, 그런 나보다 김동원의 말이 더 빨랐다.

    야, 나도 말 좀 하자!!

    “암시장을 통해서만 거래되는 거긴 한데, 혹시 SG라고 알아?”

    하려던 말을 삼키며 처음 듣는 단어에 인상을 찌푸렸다. SG? 그게 뭐지? 한태화는 혹시 아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옆에서 얌전히 매달려 있던 한태화가 김동원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차분히 설명했다.

    “S가이딩. 속칭 SG. 일시적으로 에스퍼의 능력을 키워준다고 떠도는 불법 마약이에요.”

    “오, 역시 아네. 맞아. 근데 그게 원래는 가이드를 못 구한 무등록자 에스퍼들이 가이딩이 필요할 때 신경 안정제로 쓰려고 떠돌던 약이거든. 그런데 아무 효과가 없어요. 원래 가이딩이야 가이드 외엔 불가능한 거라서 약으로 대체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건 그냥 가짜였던 거야. 근데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거지. 그 마약 성분이 일시적이긴 해도 능력을 증폭시켜 준다는 걸. 뇌의 신경전달물질을 교란 시켜서 말이지.”

    능력을 증폭시킨다고? S등급 가이드의 가이딩처럼?

    김동원의 말에 멍하니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예 있을 수 없는 말은 아니다. 에스퍼의 능력은 정신적인 부분이 크게 작용을-.

    그 순간 갑자기 손이 뻗어와 벌어져 있던 입을 닫아줬다.

    “왜 남한테 속살을 보여주고 있어요.”

    “…….”

    아… 이 미친 한태화야….

    이제야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평소 같은 태도로 돌아간 한태화를 노려보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김동원에게 계속 말을 해보라는 의미로 손을 휘저었다.

    당황했는지 말을 잇지 못하던 김동원이 떨떠름한 얼굴로 한태화를 보다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흠흠, 어쨌든 그 약이 입소문을 타면서 유통되기 시작했는데,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게 아무래도 그 가짜 오성파의 자금줄 같단 말이지. 이거 외에도 더 있겠지만, 워낙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놈들이라 실체 파악이 어렵더라고. 다만, 걔들이 직접 나서서 이 약을 팔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조폭들을 끼고 약을 판매하나 보더라고. 그리고 마침 내가 잠깐 이용했던 육성파도 그 유통처 중에 하나였던 거고.”

    그 말에 얼굴을 문지르던 것을 멈췄다.

    육성파?

    익숙한 이름에 천천히 기억을 더듬다가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연장우 이 씹새끼가 마약에도 손을 댔다고?”

    “아, 맞다. 너 걔랑 아는 사이랬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술만 먹으면 그렇게 서요한을 찾던데. 그게 너였다고 했다, 참.”

    “…연장우?”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있던 한태화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녀석의 질투나 받아주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연장우 이 개새끼가!!

    “그 새끼가 마약까지 손을 댔어?!”

    “아니.”

    “-어? …응?”

    “내가 어쩌다 보니 그 연장우란 놈을 알고 지낸 지가 꽤 되는데, 걔가 쓰레기긴 해도 약에 손을 댈 만큼의 쓰레긴 아냐. 걔 빵에 들어가고 나서 중간 관리자 하나가 돈놀이하다 많이 털렸나 보더라고. 그래서 연장우가 없는 틈에 그 돈을 메우려고 SG에 손을 댄 것 같고. 근데 곧 연장우가 나올 것 같으니까 그쪽 일을 끊어내려고 돈 냄새 따라 움직이다 내 손을 잡은 거야. 마침 그때쯤 내가 보스의 연락을 받고 슬슬 활동을 해보려던 때였으니까. 근데 얼마나 급했는지 의심도 않고 덥썩 잡더라고. 원래도 연장우랑 좀 알고 지냈으니까,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겠지.”

    “…….”

    “그 장부도 그때 우연히 주워온 거야. 기껏 보스한테 갖다주니깐 보스는 너한테 정신이 팔려서 신경도 안 썼지만.”

    #87

    지금도 밤나비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 말았다.

    하, 씨발.

    나 역시 순간 머리를 뜨겁게 달구던 화가 가라앉아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가 무섭게 한태화가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요한, 연장우가 누군데요?”

    “…그냥, 뭐…. 중고등학교 동창이야. 연 끊고 지낸 지 오래된.”

    “흐음. 오래 알고 지냈네요?”

    “…연 끊고 지낸 게 그보다 더 오래됐다.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하지 말라고.”

    내 설명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퉁한 목소리를 내는 녀석을 다독이려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능글맞게 웃고 있던 김동원이 쏙하고 끼어들었다. 아주 불길하게.

    “에이, 그냥 동창은 아니지. 걔가 술만 먹으면 널 찾던데. 그러고 보니까 혹시 걔 첫 가이드가 너 아니-.”

    “이 미친 새끼가! 아까부터 진짜 말이 많네? 안 닥칠래?!”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밤나비나 손재원, 팀장님까지, 모두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요, 요한. …더 의심스럽게.”

    “…….”

    팔을 잡아끄는 강한 힘에 도로 자리에 주저앉게 되었지만, 김동원을 노려보는 시선만큼은 거두지 않았다. 다시 한번 더 허튼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한태화가 나를 가만둘 것 같지 않았다.

    “요한?”

    “아니야.”

    옆에서 뻗어 나온 한태화의 손이 뱀처럼 몸을 끌어 안아왔다. 당황하여 다짜고짜 아니라고 하자, 한태화가 피식하고 웃는 게 느껴졌다. 아, 소름 돋아. 누가 거실 보일러 껐냐?

    “뭐가 아닌데요?”

    “…아닐껄?”

    “그새 또 말이 바뀌네요?”

    “…….”

    “하하. 차수혁 떼어낸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 얼굴도 모를 새끼가-.”

    “친구야! 아니, 친구였다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억울한 마음에 소리를 치며 한태화를 보자, 웃음소리를 내던 놈은 어디 갔나 싶게 가라앉은 눈이 바로 코앞에 놓여 있었다. 얘 눈이 좀… 맛이 갔는데?

    “친구… 좋죠. 근데 요한.”

    “…왜 자꾸 남의 이름을 그렇게 불길하게 불러대냐.”

    “나 없는 새에 새로 임시 가이드 발령을 받았던데…. 발령을 받자마자 그 새끼랑 공룸도 가고?”

    “…….”

    쟤가… 그건 또 어떻게…. 아니, 잠깐만.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한 것 같은데…?

    “얘기만 했다, 얘기만. 공룸 가서 임시 가이드 계약 해지하자고 얘기만 한 거라고!”

    “아-, 얘기.”

    수긍하는 척 웃어 보이는 한태화는 몹시도 불길했다. 끌어안은 팔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숨쉬기도 힘들었고. 절대 이해하는 놈의 반응이 아니었다.

    “그 얘기를 하필 공룸가서 했어요? 그럴 거면 퍽룸(Fuck room)이 아니라 톡룸(Talk room)이라고 해야겠네.”

    “…….”

    장난을 치는 척 말 속에 뼈를 담은 소리에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집중된 시선을 느끼고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여기서 이런 얘기나 해야 하고 있는 게 참… 쪽팔리구나.

    “야, 이 얘긴 나중에 우리끼리만 있을 때 하자. 응?”

    “…그래요. 우리끼리. …톡룸 가서 할까요? 우리의 추억이 담긴 4호실로 가서?”

    아오씨, 개새끼! 저게 끝까지!

    열이 받아서 한태화를 노려보고 있는데 지금 이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들이 인기가 좋네. 우리 지니를 닮아 그런가.”

    이 심각한 상황에도 지나치게 해맑은 밤나비가 밝게 웃더니 한태화를 손으로 가리켰다.

    “근데 이경아, 쟤랑 전속 가이드 계약 같은 걸 맺을 건 아니지?”

    “…….”

    “참고로 난 쟤 싫어….”

    …싫은데, 뭐 어쩌라고요.

    그런 얼굴로 밤나비를 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장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 씨발, 모르겠다. 차라리 그냥 구치소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이 인간들을 데리고 뭘 계획하려고 하다니. 내가 미쳤지.

    “내가… 세가에 들어온 지 이제 22년째인데, 덕분에 오성파랑 손을 다 잡게 생겼네. 그것도 저 정신 나가 보이는 것들이랑.”

    나만큼이나 허탈하게 중얼거린 팀장님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뱃갑을 꺼낸다. 그 반가운 모습에 한태화의 팔에서 손을 빼내 아주 공손히 내밀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한태화와 밤나비는 서로 눈싸움을 벌이며 신경전이나 펼치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니 지금 당장 저 담배를 못 피우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팀장님, 제발요.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손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담배 하나를 건네받자마자 손을 모아 빌었다. 세상이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5. 그 길 끝에

    하얀 피부에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를 지닌 남자가 마이크 앞에 섰다. 전체적으로 색소가 옅어 보이는 남자에게 매끄럽게 감긴 검은 정장은 화보 속 모델만큼이나 잘 어울렸다.

    그러나 모델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선이 선명히 드러난 턱 근육은 경직된 것처럼 단단해 보였고, 표정 역시 몹시 무표정했다.

    - 임시 기관장이 되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은 기자의 물음에 무표정하게 서 있던 한태화가 마이크 가까이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자 세팅된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다. 와- 하고 탄성을 자아낼 만큼 멋진 모습이었지만, 곧 녀석의 입에서 나온 냉담한 목소리에 벌어졌던 입이 다물렸다.

    - 내부 규정 절차에 따라 임시로 앉은 자리니만큼 어떠한 감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외려 규정 외 사사로운 일에 직무를 남용하면서 공석이 된 자리라 무거운 마음이 더 큽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관장이 올 때까지 철저히 내부 규정에 따를 생각이며 성실하게 대리 직무를 이행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플래시가 터지며 여기저기서 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한태화는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플래시 세례를 속에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분명 이런 경험이 없을 텐데도 그 모습이 퍽 익숙해 보였다.

    그때 또 다른 기자가 손을 들었다.

    - 세가의 민영화 법안 발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영화가 진행될 경우 인수 기업으로 태화 그룹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는데, 그와 관련한 다른 계획은 있으십니까?

    가만히 질문을 듣고 있던 한태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임시 기관장일 뿐이고, 법률과 규정에 따라 세가를 잠시 운영할 뿐입니다. 민영화와 관련된 법안 역시 발의는 되었으나 아직 국회에서 계류 중에 있으며 내부적으로도 아직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된 바 없습니다. 또한 그와 관련되어 태화 그룹과 그 어떠한 논의도 진행할 계획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미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태화 그룹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게 가족일 뿐, 제가 태화 그룹의 한태화로 세가 일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신이 나서서 민영화를 진행하진 않겠다는 단호한 한태화의 답변에 기자들이 부산스러워졌다. 그렇게 한참 수군거림이 커지고 있을 때, 또 다른 기자가 손을 들었다.

    - TTP의 김하용 기잡니다. 가장 혼란하고 힘든 시기에 임시 기관장이 되셔서 힘드실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현재 국민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은 밤나비와 세가에서 근무를 했다는 서요한 가이드에 대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은 아니어도 얼마 전까지 서요한 가이드가 한태화 에스퍼의 임시 가이드였고, 밤나비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가이드 계약을 해지하셨던데요, 그와 관련하여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 …….

    그 순간 잠시 회견장 내부가 조용해졌다. 현재 가장 뜨거운 화두를 던진 것은 바로 얼마 전 조작된 증거를 단독으로 보도한 TTP 방송국이었다. 그리고 아마 채애현과도 관련이 있는 곳일 것이다. 기관 내부의 자료가 쉽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한태화는 말없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김하용 기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매를 끌어올려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 서요한 가이드가 저와 임시 가이드 계약을 해지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 …서요한 가이드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라는 의미신가요?

    김하용 기자가 굳은 얼굴로 재차 물었다. 그에 진행을 돕고 있던 세가의 요원들이 나서려고 하였으나 한태화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곤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아뇨. 그 반댑니다. 서요한 가이드는 현재도 제 가이드이며 그 계약은 해지 된 적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해지 합의에 동의한 적이 없으니까요.

    셔터 소리가 요란하던 장내가 술렁이며 소란에 휩싸였다. 그때 또다시 손을 든 김하용이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곧장 입을 열었다.

    - 지금 현재 서요한 가이드의 에스퍼는 김재상이라는-.

    - 김하용 기자님.

    - …예.

    - 저는 분명 제 가이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부디 에스퍼 앞에서 그 에스퍼의 가이드를 다른 에스퍼와 관계 짓는 우를 범하진 않으시길 바랍니다.

    - …….

    경고조로 이어진 말에 긴장한 얼굴의 기자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한태화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 그리고 현재까지 밝혀진 서요한 가이드와 관련된 증거들은 모두 구속 피의자인 채애현 기관장의 지휘하에서 만들어진 자료이며, 그 자료가 전부 조작된 자료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그 순간, 또다시 플래시 세례가 이어지더니 여러 기자들이 한꺼번에 손을 들었다. 그러나 한태화는 회견장 안을 한번 돌아볼 뿐, 그들 중 누구에게도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거, 뉘 집 에스펀지, 참 자~알 생겼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진행되고 있는 기자회견 모습에 TV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화면 속 한태화가 다시금 마이크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88

    - 궁금하신 게 많으실 줄 압니다만, 질문은 브리핑 이후 한 번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일단 조작된 증거들에 대한 브리핑을 먼저 들어보시죠. 그에 관해서는 조작 사실을 밝혀낸 지원 3팀의 정승원 팀장님께서 설명해 주시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태화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로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팀장님이 쭈뼛거리며 나와 단상 앞에 섰다. 얼굴만 봐선 당장에라도 토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술 진탕 마신 다음 날, 딱 저런 얼굴로 출근을 하곤 하셨으니까.

    - 일단… 영상 자료 시청을 위해 전체 소등하겠습니다.

    순간 누가 마이크 앞에 염소를 한 마리 풀어 놓은 줄 알았다. 목소리가 얼마나 떨리는지 평소 땍땍대던 팀장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장 입은 염소가 TV에서 나오고 있어!

    어두워지는 화면을 보면서도 놀릴 거리가 하나 생겼다고 좋아하고 있는데,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었다.

    “선배, 다음 진행 준비해야 한다고 나오시래요.”

    익숙한 얼굴의 상원이가 평소와는 달리 정장을 입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에 오- 하고 놀리는 얼굴을 해 보이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상원이 역시 내 차림을 보고 오- 하고 놀리는 얼굴을 해 보인다. 그게 참 상대를 민망하게 만드는 행동이었음을 깨닫고 속으로 조금 반성했다.

    “긴장되세요?”

    대기실을 나와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는 홀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옆에서 얼쩡대던 상원이가 촐싹거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랬는데, 팀장님 보고 나니까 다 풀렸어. 방금 봤지? 한 10년은 놀려 먹을 수 있는 흑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던데. 그 꼴 안 당하려면 절대 떨지 말아야지.”

    “아, 저도 그거 보고 웃다가 휴대폰 떨굴 뻔했잖아요. 아직 할부도 많이 남았는데.”

    “나도 누가 회견장으로 흑염소를 끌고 왔나 싶었어.”

    “흑염소래. 으하하-. 그나저나 선배 이제 진짜 큰일 났네요.”

    “내가 또 무슨 큰일이 나?”

    아직도 큰일 날 게 남았나 싶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상원이가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며 헛소리를 지껄였다.

    “한태화가 방금 공개적으로 서요한은 내 가이드다! 라고 선언했잖아요. 선배 이제 장가는 다 간 거라고요.”

    아, 난 또 뭐라고. 살짝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그거야 뭐, 나만 장가 다 갔나? 한태화도 마찬가지지.

    “애가… 생각보다 로맨틱해. 박력도 있고. 그치?”

    “…이 선배가 미쳤나 봐…. 방금 인생 골로 가는 소리 못 들었어요? 그걸 나만 들었나?!”

    “상원아,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라.”

    “악! 커플 지옥! 솔로 천국! 망할 커퀴!!”

    긴장도 풀 겸 상원이와 장난을 치며 걷는 사이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는 홀로 이어진 문 앞에 도착했다. 가볍게 유리문을 밀자 회견장 무대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강선배가 뒤를 돌아봤다.

    “왔어? 그럼 누가 가서 팀장님 좀 끌고 내려와. 그 김에 최선배도 좀 데려오고. 가여워서 못 봐주겠네, 진짜.”

    “최선배는 또 왜요?”

    나와 함께 무대 뒤 대기 공간으로 들어서던 상원이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강선배가 얼굴을 찌푸리며 턱짓으로 기자회견장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슬라이드 넘기는데 손을 어찌나 떠는지, 여기서도 다 보이네.”

    “이잉? 진짜요?”

    상원이가 무대 입구로 얼굴만 빼꼼히 내놓고 어두운 회견장 안을 살폈다. 상원이를 따라 얼굴을 들이미니, 노트북 앞에 앉은 새하얀 얼굴의 최선배가 덜덜덜 손을 떨며 신중하게 슬라이드를 넘기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렇지 저 정도면 손만 떠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다 떨리는 것 같았다.

    “…휴대폰 진동 와서 저러는 거 아닐까요? 최근에 최신폰으로 바꿨던데.”

    “누구 청심환 같은 거 없어요? 저러다 쓰러지겠는데?”

    놀리는 것 같은 상원이의 헛소리를 배경 삼아 강선배를 돌아보며 묻자, 선배가 글렀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두 개나 먹고 갔어. 더 먹으면 배도 부르겠다.”

    “…….”

    “헐, 저 정도면 그냥 강선배가 나갔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상원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대 위가 밝아져 얼른 뒤로 물러나면서도 상원이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느새 밖이 다시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저 선배가 올라갔으면 이미 쓰러져서 119 부르고 난리 났을걸? 강선배 무대 공포증 있어서 사람들 시선 몰리면 식은땀만 죽죽 흘리다 과호흡으로 실신해.”

    “…우리 팀, 이대로 괜찮은 거 맞겠죠?”

    “…….”

    놀란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상원이에게 얼굴을 찌푸린 강선배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에 나와 상원이가 웃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서요한 가이드는 도주한 것이 아닙니다. 조작된 증거와 함께 채애현 기관장으로부터 위협을 받은 서요한 가이드는 제게 신변 보호를 요청해 왔고, 이후 지금의 임시 기관장의 도움을 받아 가이드 보호 규정 제 3호에 의거하여 잠시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거짓말이었다. 지금껏 염소 목소리나 내던 팀장님도 지금만큼은 떨지 않고 제대로 목소리를 냈다. 그게 퍽 진실 돼 보였으나… 저게 거짓말을 잘 못 해서 보이는 버릇이란 건 우리만 아는 비밀이다. 거짓말을 할 때만 떨지를 않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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