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49)
  • “그럴 수는 없지. 네가 걸렸는데. 대신 화가 좀 났어. 그래서 동원이한테 부탁해서 나왔던 거고, 나오자마자 널 찾았지. 서울 지부 내, 아버지가 없는 편모가정 또는 고아인 사람을. 생각보다 찾기는 쉬웠어.”

    “…….”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눈이… 네 눈매가 진이를 참 많이 닮았거든. 그 외엔 다 날 닮았고. 그래서 한 번에 알아봤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그리움이 담긴 시선과 마주쳤다. 누군가의 자취를 더듬듯 흐려진 시선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밤나비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때쯤 당했어. 기관장이란 여자한테. 그 여자가 내게 병을 만들어 옮겼지. 치료는 아마 그 여자만 가능한 것 같고.”

    “…!!”

    담담한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 밤나비를 쳐다보았다. 목소리만큼이나 덤덤한 얼굴로 밤나비는 웃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세게 쥔 주먹에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지만, 힘을 풀 수가 없었다.

    화가 나서 이가 악물렸다. 그러나 그 여자를 욕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내가 하려는 짓도 그 여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나를 담보로… 나는 그에게 희생을 강요할 생각이니까.

    태화를 보호하고 싶어서.

    밤나비와 내 관계가 전부 밝혀진 지금, 내가 임시가이드였던 한태화도 분명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나와 함께 묶여서 말이다. 그리고 태화그룹에까지 피해를 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움직여야만 했다. 최대한 빨리.

    “그럼… 삶에 큰 미련은 없으시겠네요.”

    말을 하면서도 목이 막히듯 아프게 무언가가 삼켜졌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자연스러웠다. 고요하고 평소처럼 잔잔했다. 들끓는 화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슨 소리지?”

    “자수하시죠.”

    “…….”

    “그리고 터트립시다. 그 가짜 오성파 건.”

    밤나비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찡그리거나 화를 내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다물자 방안이 잠시 고요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밤나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이유는 안 묻습니까? 그렇게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닌데. 나는 지금 당신에게 희생을-!”

    “네가 그러고 싶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그리고 희생이 아니야. 내가 네게 그렇게 해주고 싶은 거니까.”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왜 스스로를 그렇게 자책하고 살았냐고 슬퍼하던 그때와 같았다. 또다시 내가 그런 생각에 빠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담긴 시선.

    이 순간에도 그는 아버지 노릇이 하고 싶은가 보다.

    “대신, 나도 부탁 하나만 하면 안 될까?”

    “…….”

    “…….”

    “…말해 봐요.”

    목이 잠긴 것처럼 가라앉았다. 낮아진 목소리에 잠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밤나비는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름.”

    “…….”

    “진이가…, 네 엄마가 네게 지어준 이름. 알려줄 수 있을까?”

    붙어버린 것처럼 입이 다물어졌다.

    고작, 고작해야 이름이었다. 그게 뭐라고. 그런 생각에 화가 났다. 그런데도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기억을 되찾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엄마가 날 부르던 목소리였다. 언제나 바람결을 타고 흘러와 귓가를 간질이던 애정이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나는 어느 순간에 툭, 무심하게 물건을 던지듯 이름을 내뱉었다.

    “손이경.”

    “…….”

    “엄만… 밖에 나가선 최이경이라고 하고 다니랬어요. 그래도 우리 둘이 있을 땐 항상 그렇게 불렀어요. 손이경으로.”

    크레파스나 스케치북, 문구류 따위를 사면 그곳에 꼭 그렇게 이름을 적어줬다. 손이경이라고. 그때는 어려서 몰랐다. 그게 엄마 아빠의 흔적이 묻어 있던 이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흔적을 짚어낸 밤나비, 손학경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지어지다가 이내 울 것처럼 눈가에 물기를 맺었다. 그럼에도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밤나비를 바라보며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마음에 불퉁한 말만 튀어나왔다.

    “지금 설마… 우는 거 아니죠? 그, 울진 맙시다. …남들이 흉봐요.”

    설마 진짜 울기라도 할까 봐 그렇게 말하자 손학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아.”

    “…….”

    다정한 부름에 놀라 눈을 키운 채 고개를 들자 손학경이 붉어진 눈을 접어 웃으며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나도… 그렇게 부르면 안 될까?”

    그 말에 눈매를 찡그리자 손학경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며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어째 그 느낌이 딱… 한태화가 불쌍한 척하며 엉겨올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 찡그려진 얼굴이 펴지질 않았다. …불쌍한 척하는 거 같은데, 어째. 흠.

    “나는 그 이름을 쓸 생각이 없어요. 안 그런 척해도 그 이름을 지어주신 분이 많이 서운해할 거라서요.”

    지금도 타지에 나간 아들을 대하듯 전전긍긍하는 보육원 원장님은 원래의 이름을 쓰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축하해 주실 분이지만, 내심 서운해하시긴 할 것이다. 3일 내내 내 손을 잡고 무슨 이름으로 지을지 고민한 끝에 나온 이름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쪽만 불러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게 하지 말고.”

    그 말에 고개를 번뜩하고 쳐든 손학경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고마워, 이경아.”

    “…너무 자주 부르지도 말고요.”

    그 매정한 말에도 손학경은 그저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내 주변은 죄다 왜 이럴까. 아니, 내가 문제다. 불쌍한 척하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무르게 넘어가 주는 내가.

    아주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

    머리가 복잡해서 바람이나 쐴까 하고 산책을 가고 싶다고 했는데, 밤나비와 김동원이 나서서 결사반대를 외쳤다. 얼굴이 다 팔린 마당에 밖으로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산골로 기어들어오는 바람에 주변엔 사람 한 명이 없는데 누가 알아본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도 강경하게 반대를 하니 조용히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김에 틀어놓은 TV 속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화면엔 모자이크 처리된 내 사진과 밤나비의 사진이 떠 있었다.

    - 닮았네요, 확실히.

    - 그렇죠? 아니라는 증거를 만들어 내보여도 믿기 어려울 만큼 부자 관계인 것이 보이죠.

    내 내통 혐의가 루머나 낭설이 아니라는 의미로 저런 서두를 꺼내는 시사토론 프로그램의 패널들의 말을 들으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정도로 닮았나?

    물론 요사이 내내 마주한 밤나비의 인상은 친근하면서도 익숙했다. 그래도 그 정도로 닮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마음에 머쓱하게 뺨을 문지르다 다시 채널을 돌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제 일로 삐친 탓인지 김동원이 밥 먹으란 소리가 없었다. 아침에도 삐친 얼굴로 시리얼과 우유를 내려놓고 돌아선 김동원은 어울리지도 않게 새침한 척을 해 보이더니 제 몫의 시리얼이 담긴 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걔가 몇 살이더라….”

    이전에 수혁이와 봤던 신상 명세의 내용을 떠올리며 슬쩍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갑자기 쾅!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나더니 누워 있던 침대가 흔들렸다.

    #82

    “뭐, 뭐야?”

    지진인가 싶을 만큼 흔들린 것은 침대뿐만이 아니었다. 집 전체가 손으로 건드린 푸딩처럼 흔들렸다. 놀라서 몸을 일으키니, 또다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좀 전만큼의 충격은 아니었는지 집이 흔들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무슨, 아니 씨발. 창문이 없으니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있나!”

    게다가 사람을 가둬 놨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재깍 달려와 문을 열어주어야 할 게 아닌가! 빠르게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다가갔지만, 여전히 손잡이만 헛돌 뿐 문이 열리진 않았다. 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이냐고 소리를 질러봐도 문밖으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이, 씨발!”

    이러다 집이 무너지면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다. 불안한 얼굴로 방안을 둘러보다 보조 의자를 끌고 와 그대로 문을 향해 내리쳤다.

    쾅!

    그 한 번의 충격에 문에 달려있던 가짜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문은 열리질 않았고, 누군가 와서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손잡이가 달려있던 부근을 노려 보조의자가 망가질 때까지 문을 내리치자 문이 부서지며 안에 든 잠금장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거다!

    “아오, 씨, 더럽게, 힘드네!!”

    문 몇 번 내려쳤다고 우그러진 철제 의자를 내던진 후, 세 번 정도 발로 문을 찼을 때였다. 문과 벽을 잇던 잠금장치 부근이 떨어져 나가더니, 끼익 소리를 낸 문이 열렸다.

    드디어 열린 문을 나서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가 거실 창으로 바깥의 동태 먼저 살폈다. 진짜 지진이라도 난 건가 싶어서. 그러나 창밖의 풍경에 멈칫하고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한참을 넋을 놓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이런, 미친 한태화!!

    “당장 그만둬!!”

    이 와중에도 야무지게 문까지 잠그고 나간 오성파 놈들을 욕하며 3중으로 된 잠금장치를 풀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눈앞에 엉망이 된 마당의 모습이 드러났다.

    ***

    아침만 해도 해가 있던 하늘로 어느새 먹구름이 끼어들었다. 맑은 물에 진흙탕을 푼 듯 그 범위를 넓혀가는 짙은 구름을 닮은 검은 차량이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 차는 나무가 우거진 길로 들어갔고, 포장되지 않은 길을 달리느라 심하게 덜컹거렸다. 그마저도 좁아지던 길이 아예 끊어져 버리자 완전히 오프로드 차량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숲 길을 달려 더 깊이 들어갔다.

    잠시 후, 나무들에 가려져 있던 넓은 공터가 나타나며 그 안으로 들어선 차량의 앞으로 숲을 낀 소담한 전원주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저긴가 본데.”

    “…….”

    운전대를 잡고 있던 정승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룸미러로 한태화를 쳐다보았다. 내가 네 운전기사냐고 화를 내는 정승원을 무시한 채 뒷좌석에 올라탔던 한태화는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정승원의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낮게 깔린 수풀 위로 차를 세운 정승원이 한태화의 눈치를 살피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린 후 시동을 껐다. 그러자마자 말없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먹구름이 낀 어두운 날씨에도 전원주택을 담은 풍경은 평화롭고 한가로웠다. 제법 아기자기한 모양새의 주택의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을 흘린 정승원은 운전을 하고 오느라 굳은 몸으로 길게 기지개를 켰다.

    “으-, 날씨 좋다.”

    “…….”

    뒤따라 차에서 내리던 한태화가 그 말에 정승원을 힐끔 쳐다보다가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정승원은 느긋한 걸음으로 그런 한태화의 뒤를 따르면서도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서요한 앞에선 짜증이 날 정도로 말이 많던 놈이 오는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아 질릴 대로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원래도 한태화는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는데, 요사이 하도 서요한과 붙어 있는 한태화를 보다 보니 말 없는 모습이 어색했다. 물론 정승원도 처음엔 저 한태화를 귀여운 조카 대하듯 하는 서요한을 보고 얼마나 기함했는지 모른다. 부러 더 쫑알쫑알 애처럼 입을 놀리는 한태화의 모습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그래도 이제는 어쩐지 저렇게 입을 꾹 다문 놈이 어색하게 느껴져 정승원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승원이 낮게 혀를 차면서도 한태화의 뒤를 따르는 사이, 태화그룹의 모든 인력을 동원해 찾아낸 밤나비의 안전가옥이 점차 가까워졌다. 낮게 울타리가 쳐진 마당까지 도착한 두 사람은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마중을 나온 듯 마당의 중간에 서 있던 이들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이야, 진짜 여길 찾아냈네. 하여튼 개 같은 놈들이라니까.”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고 있는 김동원의 옆으로 팔짱을 끼고 선 밤나비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놈이 멀뚱히 서 있었다. 정승원은 처음 보는 인물인 손재원을 빤히 쳐다보다 다시 김동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지만, 정승원도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오성파의 샐러맨더. 그리고….

    정승원의 굳은 얼굴이 밤나비를 향했다. 정말 환장스럽게도 알고 나서 살피니 서요한과 닮은 중후한 얼굴이 미소를 띤 채 그곳에 서 있었다. 정승원은 미치겠다는 심정으로 쓰게 혀를 찼다.

    “근데 꼴랑 둘이 온 거야? 매번 쪽수로 밀어붙이는 게 특기인 놈들이라 개떼처럼 몰려들 줄 알았는데, 생각 외네?”

    말을 하면서도 가볍게 몸을 풀던 김동원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그 뒤를 따라 손재원 역시 말없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긴장한 듯 표정이 굳은 어린 손재원에게 시선을 주다 작게 인상을 찌푸린 정승원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사이 빠른 속도로 한태화를 향해 달려들고 있던 김동원의 앞을 막아선 정승원은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어디가. 넌 나랑 놀아야지.”

    “내가 저 새끼한테 빚이 좀 있어서. 그러니까 뒈지기 싫으면 비키지, 아저씨?”

    달려가던 몸을 멈춰 세우며 정승원과 마주 선 김동원이 서서히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허공으로 하나, 둘 불덩이가 나타났다. 그 뜨거운 열기를 느낀 정승원이 피식하고 비웃음을 터트렸다.

    “나랑 나이 차도 별로 안 나 보이는 새끼가 누구보고 아저씨래? 그리고 넌 죽어다 깨어나도 나 못 이겨, 이 불 도마뱀 새끼야.”

    “허세 떨긴.”

    “허세 아닌데? 그리고 누가 산에서 불장난을 하냐? 자연보호도 몰라, 이 새끼야?”

    “하! 모른다, 이 새끼야!!”

    김동원이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불덩이들이 엄청난 빠르기로 정승원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여유로운 얼굴로 웃음을 터트린 정승원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 손짓에 불덩이 주위로 엄청난 수의 물방울들이 생겨나 들러붙더니 그에게 닿기 전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물 능력자?”

    커다란 크기의 불덩이를 소멸시키면서 생긴 수증기 탓에 주변이 안개가 낀 듯 흐릿해졌다. 휘휘 손을 내저어 수증기를 몰아낸 정승원이 크게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거봐. 죽었다 깨어나도 넌 나 못 이긴다니까. 우리 상성이 그래.”

    “…….”

    “그러니까 이 새끼, 저 새끼는 하지 말자, 이 어린노무 새끼야. 어른한테 건방지게.”

    정승원이 다시 한번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생겨난 물방울들이 형태를 바꿔 김동원을 향해 쏟아졌다. 김동원은 굳은 얼굴로 공중제비를 돌아 뒤로 물러나며 손을 휘저었다. 그의 앞으로 두꺼운 불벽이 나타나 쏟아지던 물방울들을 모두 증발시켜 버렸다.

    “아씨, 하필 물이냐. 근데 알지? 너도 내가 쉽지 않을 거란 걸?”

    “어쩔 수 없지. 최악의 상성끼리 만났는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승원이 김동원을 향해 달려들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땅이 흔들리며 단단하던 대지가 파도치듯 울렁였다. 주변은 어두운색으로 물들어 둥글게 일렁였고,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제멋대로인 모습으로 현실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건… 공간 왜곡?”

    사실은 공간 왜곡 능력에 가까워 보일 만큼 실제 감각이 느껴지는 일루전 능력이었지만, 그걸 자세히 설명해 줄 사람은 없었다. 사방이 탁한 색의 물감들만 푼 듯 검은색과 보라색, 남색으로 물들었고, 그 형태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일그러지더니 우후죽순 땅이 솟아올랐다. 정승원은 제 옆을 스치며 솟아난 땅을 피해 뒤로 물러나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범위가 이렇게 넓어? 어떤 미친 새끼가!”

    흙과 자갈 등이 엉겨 붙은 원통형의 모습으로 솟아오른 땅을 주먹으로 툭툭 내리치며 실제로 단단한 감각을 느끼던 정승원이 손재원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얌전히 서서 눈을 감고 있던 손재원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정승원은 놀라 얼굴이 되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얌전하니 순박하게 생겼던 녀석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제 앞을 버티고 선 한태화를 보며 녀석이 이를 드러냈다. 드러난 입술 아이로 뾰족하게 솟은 송곳니가 시선을 잡아끌었고, 어색하게 으르르 소리를 내던 목소리 역시 점차 짐승의 것을 닮은 울림을 갖기 시작했다.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태화는 그제야 손재원의 능력을 눈치챘다.

    애니멀 테이커.

    그것을 깨닫자마자 몸을 띄운 한태화가 손재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애니멀 테이커에겐 변신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특히 그 종류가 육식계열이라면 상당히 귀찮아졌다.

    #83

    공중으로 튀어 올랐던 한태화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며 손재원의 앞에 나타났다.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빠르게 움직인 한태화가 어깨를 틀어 팔을 뒤로 당겼다. 그 순간 한태화의 팔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다 가라앉으며 쇠처럼 단단해졌고, 눈앞에 손재원이 보인 순간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퍽!

    사람 손에서 난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게 땅을 파고든 주먹 주변으로 둥글게 흔적이 남았다. 그러나 한태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손을 한번 휘저었다. 본능적으로 뒤로 도망치던 손재원을 따라 불길이 따라붙었다. 근육과 뼈가 뒤틀리며 크게 부풀어 오른 기괴한 몸을 한 채 뒤로 물러나던 손재원이 금세 그 불길에 휩싸였다.

    S등급의 불에 당한 손재원의 모습에 한태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처리했다고 안심하기도 전에 그 불길을 헤치며 튀어나온 거대한 늑대가 사람 키만 한 팔을 휘둘러 그가 서 있던 곳을 강하게 내리쳤다. 한태화가 주먹으로 내려쳤던 때보다 더 거대한 소리가 나며 땅이 진동하더니 순식간에 땅이 움푹하게 파였다.

    다리를 강화해서 크게 도약하여 옆으로 피한 한태화의 미간으로 진하게 금이 갔다. 그리고 한태화만큼이나 놀란 정승원이 두 다리를 땅에 딛고 선 거대한 늑대를 아연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말도 안 돼, 한국에 늑대인간이라니….”

    “재원아. 집이 무너지면 이경이, 아니, 요한이가 위험하니 적당히 해.”

    손재원의 모습에 모두가 놀라서 말이 없어진 사이,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구경을 하던 밤나비가 손재원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말에 늑대인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고, 한태화와 정승원의 시선 역시 크게 흔들렸던 집을 향하며 찌푸려졌다.

    “막내야, 어쩔 수 없다. 그 새끼는 네가 맡아.”

    놀라서 한눈을 판 정승원의 모습에 앞을 향해 달리던 김동원이 허공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길게 나타난 창 모양의 불이 정승원을 향해 쏘아졌다. 코앞까지 쇄도한 불창에 당황한 정승원은 옆으로 굴러 피하며 얼른 두껍고 긴 물 벽을 세웠다. 막 다른 손에 든 불창으로 정승원을 찌르려던 김동원은 물 벽을 발로 차 그 반동을 이용하여 공중제비를 돌더니 둥글게 솟아오른 땅 위로 착지한 뒤 히죽거렸다.

    “제법이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뭘 좀 아네? 이런 놈이 왜 이제야 나타났지?”

    “…닥쳐,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야!!”

    노성과 함께 김동원의 옆쪽에 생긴 물방울들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김동원은 솟아난 땅에서 내려와 그것들을 피했지만, 물방울들이 그런 김동원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작게 혀를 찬 김동원은 두껍고 둥근 불벽을 만들어내 그것들을 막아냈다.

    콩알처럼 작게 만들어진 물방울들이 따발총처럼 끊임없이 쏘아져 불벽을 덮쳤다. 불벽은 물에 닿아 흰 수증기를 피어 올리며 조금씩 작아졌는데, 그럼에도 김동원으로선 그 불벽을 치울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을 노려 정승원이 김동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손이 언제라도 물을 만들어 김동원을 공격할 것처럼 준비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큭! 이런 망할!!”

    그러나 점차 가까워지는 김동원의 모습에 손을 휘둘러 공격하려던 정승원의 몸이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토벽에 부딪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정승원이 타격을 입자 연속해서 쏘아지던 물방울들도 멎었다. 김동원은 위력이 약해진 불벽을 없애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납게 외쳤다.

    “막내! 내 쪽은 신경 쓰지 말고 집중해. 그 새끼가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라고!”

    김동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손재원에게 가까워진 한태화가 코앞에서 딱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손재원의 앞에서 불덩이가 폭발하듯 터졌고, 손재원은 얼른 땅을 솟게 만들어 폭발하는 불덩이를 쳐냈다. 그러나 안심할 새도 없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이 그대로 손재원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캐앵!!”

    긴 팔 탓에 근거리가 유리할 것 같아 파고들었다가 날카로운 이에 어깨가 물어뜯길 뻔했던 한태화가 공중에 뜬 채 어깨를 문질렀다. 온몸을 강화했음에도 늑대인간의 이에 닿았던 어깨 부근의 옷이 너덜거리며 실처럼 가늘고 긴 피가 배어 나왔다. 실로 오랜만에 전투 중 얻은 부상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싸울 만한 상대라 재밌네. 센스도 있고, 머리도 쓸 줄 알고. 근데.”

    “-으르르르르.”

    엎어진 몸을 일으켜 한태화를 보고 이를 세우던 손재원이 갑자기 빠르게 뛰어올라 몸을 피했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직격당한 땅이 거대한 반원 모양으로 파였다. 본능에 따라 간신히 그것을 피한 손재원은 안심하기도 전에 한태화의 손에 꼬리가 잡혀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강한 압력에 일어나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경험이 너무 부족해.”

    쓰러진 손재원을 비웃은 한태화가 막 마무리를 하기 위해 주먹을 든 순간이었다. 땅에 솟아있던 기둥에서 떨어져나온 거대한 암석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그 어떤 규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날아들었다. 막 마무리를 하려다 작게 혀를 찬 한태화가 힘을 풀며 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재원에게 염력을 쓰려다가 멈칫하고 몸을 굳혔다.

    손재원, 그러니까 늑대인간의 모습이 다섯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새 나를 베꼈나? 중첩 능력 사용법을?”

    “으르르르르-.”

    능력은 좋으나 힘의 사용이 미숙하던 손재원은 한태화와 싸울수록 조금씩 더 능숙해졌다. 한태화로서도 드물게 칭찬해 주고 싶은 상대였다. 그러나 요한에 대한 걱정으로 이성이 흐려진 한태화는 말없이 그저 서늘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요한의 무사한 모습을 봐야만 머리를 잠식시킨 이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섯 마리를 한 번에 처리하기 좋을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 툭 하고 하얀 뺨에 빗물이 닿더니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고민을 마친 듯 공중에 떠 있던 한태화가 서서히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주변으로 쏟아지던 빗방울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파르르 표면을 떨었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무엇인가를 느낀 늑대인간 다섯 마리가 동시에 뛰어올라 한태화를 노렸다. 문제는 땅에서 튀어온 투명한 줄기들이 그런 늑대인간의 발목과 팔을 잡아채 땅으로 처박았다는 데에 있었다.

    “캥!”

    “그러게, 내가 날이 좋다고 했잖아.”

    빗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정승원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공간 안으로 촉수를 닮은 투명한 줄기 같은 것들이 수십 개 생겨나 닿는 모든 것을 잡아끌어 구속했다.

    그 혐오스러운 광경에 구경만 하던 밤나비가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괴하게 변한 풍경에 투명한 촉수같이 생긴 것들까지 생겨나 흐물거리자 심하게 미관을 해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상황이 점차 불리해 지고 있었고.

    밤나비는 잠시 김동원과 손재원에게 가이딩이라도 해줘서 그 능력을 끌어올려 줘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근원을 넓혀주기 위해서는 최소한 입이라도 맞춰야 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작게 혀를 찼다. 자식 같은 놈들하고 입을 맞춰야 한다니. 밤나비는 찌푸린 얼굴로 저를 잡으러 달려드는 물줄기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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