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49)
  • “…….”

    한태화가 책상 위에 놓인 투명한 명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 명패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쩌적- 하고 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허공에서 잘게 부서지는 명패를 멍하니 바라보던 한태화는 낮게 목소리를 냈다.

    “…요한.”

    건조하게 메마른 목소리가 묘하게 습한 기운을 가지고 적막한 방안을 울렸을 때였다. 쾅-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낸 문이 열리며 또다시 여러 명의 사람들이 급하게 들이닥쳤다. 그들 뒤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보려 애쓰던 비서가 난감한 얼굴로 한태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심한 시선으로 방안으로 들어선 익숙한 인물들을 가만히 살피던 한태화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풀었다. 그러더니 아직도 그 뒤에서 난처하게 서 있던 비서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그 손짓에 비서가 얼른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기세 좋게 쳐들어온 지원 3팀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 한태화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으-, 거봐요. 밖에서 기다리자고 했잖아요.”

    “…공중을 날 수 있는 능력자라서 창문으로 가 버릴지 모른다고 한 건 상원이 너다?”

    “그거야! …그럼 다음에 또 찾아오면 되죠.”

    “안 돼. 오늘은 죽어도 광땡이 소식을 들어야겠어.”

    머리를 맞댄 네 명의 사람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희게 질린 얼굴로 한태화의 눈치를 살피는 윤상원이나 그런 윤상원을 타박하는 강세현, 그런 강세현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최인우, 그리고 오늘은 죽어도 서요한의 소식을 알아내야겠다고 말하는 정승원을 보며 한태화는 피곤하다는 듯 손으로 눈가를 눌렀다.

    성질 같아선 그냥 다 쫓아내 버리고 싶었지만, 가족 같은 사람들이라던 서요한의 목소리가 떠올라 성질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있던 정승원이 먼저 고개를 홱- 하고 돌리더니 한태화를 노려봤다. 강세현 역시 팔짱을 낀 채 담담한 척하는 얼굴로 한태화를 쳐다보았고, 그 뒤로 윤상원과 최인우가 몸을 숨긴 채 얼굴들만 빼꼼히 내밀었다.

    “한태화. 우리 광땡이 어디 있냐? 넌 알지?”

    정승원이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협박하듯 물었다.

    “진짜… 한태화씨가 우리 광땡이를 납치해 간 거예요?”

    “뭘 물어요, 빼박이라니까! 저 눈 봐요, 눈! 저건 딱 범죄자의 눈이라니까요? 우리 서선배가 가이드 계약 해지하니까 열 받아서 끌고 간 거라고요! 불쌍한 우리 서선배…. 가족이 없어서 실종신고 해줄 사람도 없으니까 범죄의 표적이 된 거죠. …불쌍해….”

    최인우의 조심스러운 물음 후에 윤상원의 방정맞은 목소리가 뒤따랐다. 한태화는 윤상원의 말에서 이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눈치채고 무심한 얼굴로 턱을 괬다.

    “야, 그 범죄자의 눈이 지금은 널 보고 있는데?”

    “헉!”

    강세현의 말에 윤상원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태화를 보더니 울 것처럼 표정을 찡그렸다. ‘다, 다음 범죄 타겟은 나인가 봐요….’ 하고 헛소릴 늘어놓은 윤상원의 어깨를 최인우가 진심으로 걱정하며 다독인다.

    …요한은 쟤들의 어디가 좋은 걸까. 넘치는 병신미? 해맑은 주접스러움? 유치원생도 저러고는 안 놀 것 같은 유아틱한 정신 수준?

    한태화 눈에 비친 서요한이란 인물은 늘 어른스럽게 쿨하고, 시크하며, 그러면서도 내심 부끄러움이 많은 깍쟁이였다. 저런 분위기에 녹아들 사람은 아니란 의미다. 그게 눈에 쓰인 콩깍지 때문인지도 모르고 한태화는 왜 요한은 저런 놈들이랑 어울리는 걸까, 한팀이라 그런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말을 섞기 싫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반응이 없는 한태화가 답답했던지 정승원이 쿵 하고 발을 크게 구르며 버럭 성을 냈다.

    “야 이 새끼야, 우리 광땡이 어디 있냐고! 걔가 얼마나 출세에 눈이 먼 놈인 줄 알아? 근데 대체 뭔 짓을 했길래 이틀이나 무단결근을 하냔 말이다!”

    #77

    “마, 맞아요! 우리 요한이가 실적 쌓겠다고 얼마나 개처럼 일했는데! 그 실적 깎아 먹을 짓 할 애, 애가 아니라고요!”

    떨리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는 최인우의 말에 옆에 있던 윤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개처럼이라니… 그건 욕 아니에요?”

    “개처럼 일한 걸 개처럼 일했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뒤로 윤상원과 최인우를 달고 있던 강세현이 최인우를 대신해서 그렇게 답하자 윤상원의 얼굴이 껄끄럽게 구겨졌다. ‘열심히- 라던가, 죽을 듯이, 라는 표현도 있는데요.’라고 중얼거리는 윤상원의 의견은 당연히 묵살당했다. 한태화는 듣고 있기 짜증 나는 대화에 차라리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데려갔다고? 요한을?”

    “너, 너, 너밖에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렇게 떨 거면 나서질 말던가. 한태화는 무심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그 시선 끝에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떨고 있는 최인우가 있었다. 최인우는 한태화가 저를 바라보자 그를 가리키고 있던 손가락을 곱게 접으며 강세현의 뒤로 완전히 숨어들었다. 그러자 강세현이 뭐하는 짓이냐는 나무라는 얼굴로 한태화를 보며 얼굴을 찡그린다. 그 모습에 한태화로부터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 아닌데. 나는 요한이 싫어할 짓은 절대 하지 않거든.”

    “…그럼. 우리 요한이가 어딜 갔길래 출근을 안 해? 휴대폰도 우리한테 있어서 연락이 안 되는데? 혹시나 해서 어릴 때 지내던 보육원에 연락해 봐도 연락도 없대고!”

    정승원이 화를 참지 못하겠는 듯 무겁게 발을 굴렀다. 그 순간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묵직해지며 물 내음이 나더니 습하게 변했다. 한태화는 그런 주변을 돌아보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지만.

    “알면 뭐. 너희가 안다고 뭐가 바뀌나? 뭘 할 수 있는데?”

    한태화가 기대듯 의자에 누워 지원 3팀 사람들을 하나씩 차례로 훑었다. 가치를 매기듯 서늘하던 시선은 이내 무가치한 것을 보듯 감정이 없어졌다. 그러자 팔짱을 끼고 서서 말을 아끼던 강세현이 입을 열었다.

    “뭐든. 뭐라도 다 하겠죠. 잊고 있나 본데, 요한이랑 알고 지낸 시간은 한태화씨보다 우리가 더 깁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한태화씨보다 가벼울 거라고 단정하지 마세요. 아주 불쾌하니까.”

    그 딱 부러지는 대답에 정승원과 윤상원이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이제껏 이어지던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삽시간에 사라졌다. 뒤에서 떨던 최인우마저 굳은 얼굴로 한태화에게 시선을 똑바로 맞춰오고 있었다. 한태화는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가벼우면 안 되지. 니들 목 지키겠다고 요한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좋아. 그럼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볼까?”

    “…자꾸 무슨 개소리야? 우리 요한이 어디 있냐고!”

    “오성파, 밤나비.”

    “뭐?”

    “그자가 끌고 간 거 같다던데. 그래서 나도 알아보는 중이고.”

    그 순간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한태화는 그저 의자에 기대앉은 모습 그대로 저들이 무슨 답을 할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지원 3팀 사람들은 금세 소란스러워져서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해대며 난리를 피웠다.

    “우리 광땡이가… 진짜 오성파랑 내통했나 봐. 어떡해….”

    최인우가 발을 동동 구르며 한 말에 윤상원이 찌푸린 얼굴로 소름이 돋은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일단 찾아서 데리고 온 후에 자수를 시키……, 외국에 몇 년 나가 있다 오라고 할까요? 누구 외국에 아는 지인 있는 분들?”

    “말이 되는 소릴 해. 걔가 아무리 돈에 눈이 먼 또라이래도 어디 그럴 주변머리야? 대체 무슨 일인지를 알아봐야지.”

    강세현이 최인우와 윤상원의 말을 잘랐다. 최인우와 윤상원도 진심은 아니었던 듯 금세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승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생각에 잠겨 있던 정승원이 험악한 얼굴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날 봐? 그 얘긴 광땡이 오면 직접 들어야지. 그러려면 일단 잡아 오기부터 해야 하고. 아, 오성파 이 새끼들을 또 어디 가서 잡지?”

    “여기저기 동기들을 풀어서 좀 알아볼까요?”

    “저기에 오성파 전담팀 팀장님이 계시는데,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요?”

    동기를 풀겠다는 강세현의 말에 윤상원이 한태화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지원 3팀의 4명의 시선이 일제히 한태화를 향했다.

    그 집중된 이목에 한태화는 웃으며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요한을 찾기 위래서라면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할 생각이었다.

    ***

    한태화가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인 그 날, 퇴근 시간을 목전에 뒀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지원 3팀의 문이 열리더니 각종 서류 뭉치를 든 남자들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다가 원치 않는 손님을 맞이하게 된 지원 3팀 사람들은 벙찐 얼굴로 낯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뒤따라 들어와 사람들을 시켜 서류 뭉치를 나르게 하던 한태현이 사람 좋은 척 웃어 보이며 멀뚱히 선 지원 3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태화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도와주기로 하셨다고요. 마침 손이 모자랐는데, 다행이네요. 그럼 이건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일방적으로 말을 마친 한태현이 급하게 돌아섰다. 그러자 멍한 얼굴로 서 있던 강세현이 나서 한태현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사무실 한복판에 쌓인 서류를 손으로 가리켰다.

    “자, 잠시만요! 이게 다 뭔지는 알려주고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 태화가 아무 말 없던가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걔가 그렇게 친절한 성격은 아니잖아요. 아시죠?”

    인사를 마치자마자 돌아서 나가려다 붙잡힌 한태현이 그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강세현이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자 이내 웃음을 멈추며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걔가 좀 그렇긴 하죠. 지금은 더 정신이 없을 테니. 그러니까 이건 서요한씨의 내통 혐의와 관련된 증거들의 사본입니다. 태화가 어렵게 빼돌려 왔죠.”

    “내통 혐의 증거요? 그걸 왜….”

    팀원들의 시선이 바닥에 쌓인 서류 뭉치를 향했다. 그러자 한태현이 슬그머니 잡힌 팔을 빼내더니 제 할 말만 마치곤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살펴보시고 그게 조작된 증거임을 밝혀주시면 됩니다. 태화가 이리 가져다 드리면 알아서 잘하실 거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럼 바빠서 이만.”

    또다시 잡힐세라 급하게 나가는 한태현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서 있던 강세현이 짧게 한숨을 내쉬다 혼자 버럭 하고 화를 냈다.

    “아, 진짜… 붕어 대가린지 복어 대가린지, 만나면 내가 죽여버린다!”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은 소원인데요? 그나저나 이걸 왜 퇴근 시간 바로 전에 갖다 주냐고요. 성격 진짜 나쁘다.”

    “양도 장난 아니야. 우리 기관 사람들이 이 정도 양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줄은 몰랐네.”

    서류 근처로 모여든 윤상원과 최인우가 서로를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씩씩대고 있는 강세현을 내버려 둔 채 최인우는 들고 있던 상의를 제 책상 위로 던진 후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일단 기간별로 나눠서, 그 안에서 새로 분류하자.”

    “월별로 분류하고 일별로 쌓아둘게요. 근데 항목별로 총괄팀 경위서랑 대조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총괄팀에서 그걸 내줄지 모르겠어요.”

    벌써 서류 분류 작업에 들어간 최인우와 윤상원을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세현이 서류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받았다.

    “아는 사람 통해서 구해 봐야지. 내가 그쪽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부탁해 볼게. 근데 그거랑 세무팀 지출 내역서도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거긴 나 아는 사람 있어. 내가 구해 올게.”

    손을 들어 보인 최인우가 금세 다시 손을 내리고 서류를 분류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손길들이 하나같이 무척 빨랐다. 평소 게으름을 부리며 제 역량을 발휘하지 않던 윤상원마저도 진지한 얼굴로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순식간에 지원 3팀 사무실에서는 종이 소리만이 들리기 시작했다. 불이 꺼진 빈 팀장실만 제외하고 그 후로 지원 3팀의 불이 꺼지는 일은 없었다.

    철야의 시작이었다.

    ***

    아, 담배 땡긴다.

    자다 깬 멍한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할 일 없이 방안에만 갇혀 있으려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런 거 밖에 없었다. 다행히 TV가 놓여 있어서 백색소음처럼 TV 소리가 흘러나오곤 있었지만, 평소 챙겨 보던 게 없으니 관심이 가지 않았다.

    -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평생 함께 하자고 해 놓고, 가이드 계약 해지라니! 나밖에 없다고 할 땐 언제고!

    뉴스를 틀어놨던 TV에서는 어느새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다. 갑자기 들린 가이드 계약 해지라는 말에 슬짝 상체를 세우자 면장갑을 낀 가이드로 보이는 남자가 앞에 선 남자를 향해 종이를 집어 던지며 분한 듯 노려보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상황이야. 심하게 관심이 가는 대사에 저절로 시선이 향했다.

    - …미안해. 너한테는 내가 면목이 없다. 그러니 그냥 화내. 그리고 화 다 냈으면… 돌아가 줘.

    - 너… 걔 때문에 그래? 네 그 피티스트라는 사람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 거야? 걔 때문에 날 지금 버리는 거냐고!

    뭐? 피티스트? 가이드가 있는데 피티스트가 나타난 상황인가? 처음 보는 드라마라 흐름이 확 읽히진 않았다.

    - 미안한데, 그 사람 욕은 하지 마. 그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어. 떠나겠다는 사람을 붙잡은 건 나야. 그러니까 욕을 해도 나만 욕했으면 좋겠어.

    아, 씨발. 뭐래, 저 개새끼가?!

    - 야 이 개자식아!

    그렇지! 잘한다! 개호로잡놈이라고 말해! 더, 더 욕하라고!

    - 네가 어떻게 나한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니, 울진 말고! 거기서 네가 왜 울어? 개자식은 저 새낀데? 헐?

    황당하다는 얼굴로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이 화면이 전환됐다. 나도 알만큼 유명한 여배우가 눈물을 글썽인 채 소주를 마시는 장면이었다.

    - 나도… 떠나려고 했어. 전속 가이드 계약을 한 사람을 상대로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아서… 떠나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 해주야….

    - 나도…그 사람이 좋아. 내가 그 사람의 피티스트라는 걸 몰랐을 때부터… 사실 좋아했다고.

    친구의 위로를 받던 여자가 예쁜 모습으로 눈물을 떨군다. …드라마 내용이 왜 이래? 저 유명 연예인이 조연으로 나올 리는 없고… 그럼 여자 주인공이라는 건데.

    취한 여자 주인공이 인사불성이 돼서 술집을 나오자 휴대전화가 울리며 웬 남자 이름이 클로즈업되더니 화면이 광고로 넘어갔다. 잠시 후 드라마가 다시 시작한다는 안내와 함께 광고 화면 위로 드라마 제목이 떴다.

    『내 사랑 피티스트』

    #78

    “…하, 씨발.”

    인상을 찌푸리다 리모콘을 찾아 TV를 껐다.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피티스트, 그게 뭐 별거라고! 그게 뭐, 운명의 뭐, 응? 그런 거라도 된다고 생각해서 이딴 드라마를 만든 거야? 작가 미쳤냐?

    사나운 기세로 리모콘을 침대 위로 내팽개치자 매트리스 위에서 한번 튕겨 오른 리모콘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양새를 가만히 살피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

    …운명이긴 하지. 쳇.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렸다.

    한태화는 어디서 뭐 하나. 내가 여기 잡혀 온 걸 알고는 있나? 붕어 대가리 새끼… 판을 흔드니 뭐니 바빠서 나 없어진 것도 모르는 거 아냐? 감찰팀 조사를 받자마자 못 나가고 있으니, 세가에서도 진짜 내통을 해서 도망갔다고 여기고 있을지 몰랐다.

    그렇다고 진짜 여기서 나갈 수도 없는 게 문제다. 여기서 나가서 잡혔다가, 지난 행적을 조사해보니 밤나비랑 있었더라, 하는 게 밝혀지면 그땐 정말 빼도 박도 못한다. 그리고 나만 그렇게 몰리면 상관이 없는데 그럼 한태화에게도 피해가 가고, 잘못하면 태화그룹에까지 피해를 끼칠 수 있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복잡해진 머리를 다시 한번 거칠게 털어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샐러맨더가 샐쭉하게 웃는 얼굴로 들어왔다.

    “커피 한잔 할래? 입 심심할까 봐 챙겨왔는데.”

    방 안으로 들어온 샐러맨더가 따뜻한 커피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내민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 껄끄러운 마음으로 컵을 받아들었다.

    “네가 주는 걸 함부로 받아먹어도 되나 몰라.”

    “그런 새끼가 오늘 아침도 두 그릇이나 처드셨어?”

    “아, 보기랑 달리 음식 솜씨는 좋더라?”

    웃으며 슬슬 놀리니 미간을 구긴 놈이 사납게 노려봐 온다. 그러든지 말든지 커피를 한 모금 넘기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지놈이 나한테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걸 모르나 보다.

    “근데 왜 왔어? 왜, 내가 밤나비한테 네가 만나자마자 주둥이부터 들이밀더라, 뭐 그런 걸로 이를까 봐 입단속 시키려고 왔어?”

    “야 너…, 그게 언제적 일인데!”

    “산 채로 태우겠다는 말이 좀 충격적이었어야지.”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한꺼풀 기세가 꺾인 태도에 작게 웃음이 터졌다. 아, 여기서 벌써 웃어 주면 안 되는데. 더 놀릴 생각이었으나 너무 이르게 웃음이 터져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묘한 눈길로 샐러맨더를 살폈다. 그 시선에 샐러맨더가 험악한 인상을 더 험악하게 찌푸렸다.

    “…뭐냐, 그 기분 나쁜 시선은?”

    “백화점 테러범답지 않게 순진한 구석도 있다 싶어서.”

    그 순간 묘한 표정을 짓던 샐러맨더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때아닌 웃음에 왜 이러나 싶어 쳐다보자, 샐러맨더가 태연한 얼굴로 놀라운 말을 꺼냈다.

    “그거 나 아닌데?”

    “……뭐?”

    “내가 무슨 이득이 있어서 백화점을 테러해. 명품관이라도 털려고? 그러기엔 내 꼴이 무척 소박하지 않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눈만 깜박이고 있자 그 표정을 본 샐러맨더가 씨익 하고 음흉스럽게 웃었다.

    “아, 그래. 그 표정. 그렇게 맹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보스랑 느낌이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네. 그땐 미안했다. 대신 보스한테는 비밀로 좀 해줘. 그 사람 그렇게 안 생겨서 뒤끝이 장난 아니게 길다고.”

    이 새끼가… 지금 그게 중요하냐?!

    “헛소리 말고, 좀 전에 그 얘기 뭐야? 지난번 백화점 테러가 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응, 아닌데? 애초에 오성파 해체한 지가 10년도 더 전인데,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있나.”

    “해…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해체라니? 10년도 더 전에?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내 얼굴에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던 샐러맨더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음… 처음 오성파가 E&G 특별법에 반대해 나타난 건 알지? 그때도 오성파가 하던 일은 세가와 다른 과격 단체 사이의 중재였어. 우리가 원한 건 무조건 등록된 채 국가가 시키는 대로 일해야만 한다는 조항의 폐지였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등록'에 관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찬성하는 분위기가 되고, 등록하지 않은 능력자들은 불법적인 시장을 형성해 버려서 우리로선 그 이상 뭘 하는 게 의미가 없어졌거든. 우리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닌데 이용만 당하기도 했고. 그래서 보스가 활동에 이유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이미 옛날에 해체 시켰어. 그때 해체에 반발하던 일부 핵심 멤버들이 따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는 것까지는 우리가 막을 수 없는 일이었고. 말 안 듣고 집 나간 자식들인데, 뭐.”

    샐러맨더가 집 안의 골칫거리 자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듯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태평한 태도와는 달리 그의 얘기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사실들을 담고 있었다.

    “그 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보스가 직접 나서서 원하는 대로 살게 해줬어. 조용히 살고 싶다는 사람은 외국에 가서 살 수 있게 해줬고,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들은 일부러 세가에 잡히게 만든 후에 변호사 붙여서 죗값 치르고 나와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줬지. 그게 전부 끝나기까지 한 10년쯤 걸렸나? 그 일 다 끝내고 일부러 세가에 잡혀줬던 거야. 네 엄마, 그러니까 블래스트가 떠난 후 보스는 진작 다 정리하고 싶어 했거든.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이라….”

    “…….”

    “세가에서 널 가지고 협박만 해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조용히 살다 갔을 거야. 그 사람이 그렇게 뭔가에 화가 나서 의욕을 보인 건 나도 처음 봤거든.”

    지금 내가 뭘 들은 건가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로 세가에서 나를 가지고 밤나비를 협박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그러지 않았을까 예상하긴 했는데, 실제 그랬다고 하니 화가 났다. 이 새끼들이 진짜, 사람 가지고 장난하나?

    그러나 화를 눌러 참으며 궁금한 것을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내가 세가에 들어오고 나서 오성파의 짓이라고 밝혀졌던 테러가 몇 건인데. 그럼 그건 대체 누가 한 짓이란 말인가?

    “그럼… 그 사이에 오성파가 했다는 짓들은 뭔데?”

    내 말에 샐러맨더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을 받아넘긴다.

    “모르지.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오성파의 짓이라고 기사가 났으니까. 근데 한 10년 전부터인가 웬 묘한 단체가 하나 나타났다곤 들었어. 워낙 비밀스럽게 움직여서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이름을 팔고 다니긴 한다던데.”

    “그게 그럼 정말… 오성파가 한 짓이 아니라고?”

    “오성파긴 오성파지. 그놈들도 지들을 오성파라고 하고 다닌다니까. 물론 보스가 없는 이상 가짜 오성파인 거지만.”

    혼란스러움에 쉽게 납득하질 못하고 있자 샐러맨더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쿵쿵 때렸댔다.

    “애초에 세가 놈들이 보스를 잡아 놓고도 왜 그렇게 오래 구치소에만 있게 했겠어. 죄라고 할게 별로 없으니 잡아 놓을 구실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거기서 탈옥하려고 최근에 몇 개 일 친 거 외엔 정말 조용히 살았다고. 원래도 중립 단체였지, 과격 단체가 아니었고!”

    “……말도 안 돼….”

    “갑자기 보스한테서 나가고 싶단 연락을 받아서 그렇지 나도 조용히 살고 있었어. 보스 연락을 받자마자 세가에 잡히려고 일부러 티 나게 활동 한 거니까. 그래서 육성파랑 손을 잡은 척하고 마침 클럽에 세가 놈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어서 잡혀 주려고 갔던 건데, 근데 씨발, 하필 한태화 그 새끼한테 걸려서 이러다 죽겠다 싶어 도망친 거라고! 아니, 개새끼가 잡혀줬는데 패는 건 무슨 매너야?”

    갑자기 길길이 날뛰며 분하다는 듯 구는 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럼 그때 클럽에… 일부러 나타났었다는 건가? …어쩐지 등장이 빠르더라니. 그 후에 한태화한테 잡혔던 때도 금방 발견돼서 쉽게 잡히긴 했었다. 아,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네 첫인상이 좀 개 같았어야지.”

    “아, 씨발…. 네가 보스 자식인 줄 내가 알았냐? 둘이 하도 느낌이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간 걸 어쩌라고. 수습하려고 컨셉 잡다 보니 좀… 과해져서 그런 거지.”

    컨셉질 한번 뭣같이 하네.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놈을 바라보다 복잡해진 머리에 고개를 숙였다. 따뜻했던 커피가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그만큼 내 이성도 좀 식었으면 머리가 잘 돌아갔을 텐데… 여전히 머릿속은 전쟁이 난 듯 시끄럽고 뜨거웠다.

    “크흠, 어쨌든 이런 얘길 하려고 온 건 아니고, 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재원이 아니다.”

    뭐라는 거야. 재원이는 또 누군데?

    다짜고짜 나온 모르는 사람의 이름에 황당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재원이가 누군데?”

    “…우리 막둥이.”

    “아, 그 청소년. 근데 걔가 뭐가 아니라는 거야?”

    “보스 아들 아니라고.”

    “…….”

    장난스럽게 받아치며 식은 커피를 마시다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진지한 표정의 샐러맨더, 아니, 김동원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하이에나 같은 사나운 인상이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처럼 피 냄새가 배어 나올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김동원을 보는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일 거다.

    “갑자기… 그런 말을 왜 나한테 하는데?”

    “네가 오해할까 봐. 우리 보스 인생에 에스퍼는 네 엄마 하나였어. 아니, 에스퍼고 자시고, 우리 보스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지. …이제는 둘이겠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