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49)
  • “너 이-!”

    “동원이도 수고 많았어. 혼자 이걸 다 준비하느라 고생했겠네.”

    “……이 정도야 뭐, 별거 아니지. 보스도 어서 와서 앉아. 배고프지?”

    “그래.”

    사납게 찡그리고 있던 샐러맨더의 얼굴이 밤나비의 칭찬 한 번에 유순하게 풀려버린다. 식탁에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살피던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역시, 당신이 제일 문제지.

    웃는 낯으로 분위기를 한 번에 정리한 밤나비가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앉자 샐러맨더가 다시 부산스럽게 움직여 밥그릇과 국그릇을 각자 앞에 놔주었다. 밤나비가 등장하면서부터 얼굴이 풀려 있던 어린 녀석도 좋다고 박수를 치며 큰 목소리로 ‘잘 먹겠습니다!’ 하고 외치더니 기세 좋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밤나비기 함께 있는 이상 틈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래서 부러 싸움을 걸던 것을 멈춘 채 수저를 들고 밥을 뒤적였다.

    침이라도 뱉은 거 아냐? 저게 나한테 좋은 마음일 리 없는데. 막말로 여기에 독이 타져 있대도 이상하지가 않-.

    “먹지 그래. 약 같은 건 쓰지 않으니까.”

    “…….”

    수저로 밥을 뒤적이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정갈한 자세로 밥을 한 숟갈 떠먹은 밤나비가 슬쩍 눈썹을 들어 올리며 웃음을 흘린다. 그는 웃음이 아주 헤픈 편에 속했다.

    “동원이는 내가 시키는 짓 외에는 나쁜 짓 안 하거든.”

    …그게 자랑이냐, 이 최종 보스야?

    그러나 그 얘기를 듣고도 좋다고 헤헤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샐러맨더와 킥킥대며 작게 웃고 있는 어린 녀석을 돌아보다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상대를 말아야지. 상대해 봐야 자꾸 피곤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내저으며 밥을 퍼먹는데, 생각보다 밥이 맛이 있었다. 샐러맨더가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야, 더 줘.”

    “너… 보기보다 되게 뻔뻔하다.”

    몇 숟가락 뜨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바닥을 드러낸 밥그릇을 샐러맨더 쪽으로 밀며 짭조름한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먹자 녀석이 인상을 구기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 밥을 펐다. 생각해보니 감찰팀에 잡혀가는 날 먹은 점심 이후 식사를 한 적이 없었다. 그 후 얼마나 잠들어 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쳐도 하루가 넘게 공복 상태였던 것이 된다. 혹은 그 이상이거나. 배가 안 고픈 게 이상한 거다.

    “어떤 개새끼들은 밥도 안 먹이고 사람을 취조하더니, 멋대로 사람 납치해 온 나쁜 새끼들은 깨우지 않고 밥을 굶겨서. 생각보다 배가 많이 고프네?”

    일부러 탓하듯 뱉은 말에 밤나비와 어린 녀석이 움찔하며 수저질을 멈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고 미간을 찌푸린다. 밥을 푸던 샐러맨더도 한마디 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 결국 묵묵히 밥공기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았다.

    눈치고 나발이고, 일단 배부터 채워야지. 먹고 기운이 나야 도망이라도 갈 테니까. 일단 속이라도 든든히 채울 생각이었다.

    ***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채애현은 그 말이 참 우스웠다. 뒤집어 생각하며 법에 차등이 생길 경우 커다란 불평등의 문제가 생긴다는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E&G 특별법은 모든 에스퍼와 가이드들을 불평등하게 만들었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그들에 대한 법 적용에 차등을 두겠다는 법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정부에 등록된 채 세가에서 시키는 일을 따랐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부가 세운 기관 안으로 몰려들자 세가는 그 자체로 힘의 상징이 되었다. 그 힘의 상징인 세가의 기관장 역시 제법 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고.

    사실 채애현은 한태화를 오랫동안 주시해왔다. 채애현이 보기에 그는 강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무능력한, 아니 무기력한 이였다. 삶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제가 가진 것을 휘두를 생각이 없어 보였고, 명예욕도 물욕도 없었다. 일을 시켜도 본인이 내킬 때, 또는 세 번쯤 부탁해야 그중에 한 번 정도 제대로 일을 해내기 일쑤인 인간이었다. 그 무엇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자. 채애현이 보는 한태화는 그랬다.

    그리고 그런 한태화를 필두로 한 태화 그룹 역시 참 만만해 보였다. 태화 그룹이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였다. 한태화의 생명 연장. 태화 그룹은 막대한 자금과 물품을 후원하면서도 세가의 일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한태화가 숨 쉬고 사는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그래서 채애현은 지금 이 사태가 잘 이해 가지 않았다. 고작해야 임시 가이드 계약을 해지시켰을 뿐이었다. 그 가이드를 먼 지방으로 발령을 보낸 것도 아니고, 목숨을 쥐고 협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태화는 미친 듯이 날뛰더니 이제는 제 자리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채애현이 보기에 이건 공포탄을 하나 발사했다고 군대를 끌고 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민영화 법안 발의까지야 그렇다 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현 정권 아래에서 그 법안이 통과될 리 없으니까. 문제는 그 법안이 발의된 것을 핑계로 한태화가 고위급 장관들이나 의원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체애현의 기관장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더해 뒤로 몰래 더러운 짓을 하다 일이 생기면 그 일들을 대신 처리해 주며 관계를 형성해온 채애현의 뒷빽들이 죄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자신은 그 일 때문에 사적 지시에 따른 권한 남용 혐의까지 씌워졌는데 말이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하고 채애현은 후회했다.

    한태화가 태화 그룹의 약점인 것은 확실했고, 마침 그녀의 손엔 한태화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서요한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성현이 있었다. 한태화의 피티스트인 가이드가.

    얼마 전, 외부 행사에 참석하느라 뉴욕에 갔던 채애현은 지인을 통해 진성현을 소개받았다. 그렇게 처음 만난 진성현은 자신이 한태화의 피티스트임을 밝히며 손을 잡자고 제안해 왔다. 진성현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태화에게 묘한 죄책감을 가진 그의 가족들 덕분에 태화 그룹의 목줄이 한태화에게 매여있다는 것을.

    #75

    그래서인지 진성현은 당돌하게도 손을 잡자고 제안을 하면서 채애현에게 현재 한태화에게 붙어 있는 그 D등급의 가이드를 치워달라 부탁해 왔다. 이대로 한태화를 흘려보내는 것을 아까워하는 태도였다. 딱 저 갖기엔 싫은데, 남 주기엔 아까워하는 그런 태도.

    그러나 그가 어떤 마음이건 진성현의 제안은 채애현에게도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흔쾌히 승낙한 것이다. 어차피 한번은 한태화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서요한을 이용할 생각이었고, 그 김에 진성현까지 제 손에 들어온다면 그야말로 한태화를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태화 그룹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것을 의미했고.

    그렇게 쉽게 생각했었다. 한태화의 가이드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전부 제 손안에 있으니까.

    그러나 제 생각과는 달리 요사이 채애현은 무척 곤란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검찰에서는 현재 자신의 행적을 파헤치며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긴밀한 관계라 여겼던 이들은 연락을 피하며 은근슬쩍 한태화의 편으로 돌아섰다. 한태화가 자신의 어머니인 성화영을 앞세워 교묘한 방식으로 그들을 구슬리거나, 구석으로 내몰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화 그룹이라는 거대 자본에서 돈까지 끌어다 써가면서 말이다. 그것은 이제껏 시킨 일만 간신히 해내던 무능력한 모습과는 달랐다. 이러다 VIP까지 동원하는 게 아닌가 싶게 놈은 미친 사람처럼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이틀 전에는 세가의 직속 부서 장관에게 불려 나간 자리에서 온갖 질책을 들었다. 그리고 테이블에도 앉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꾸중을 듣던 채애현과는 달리 장관의 맞은편에는 고운 자태로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바로 그 유명 정치 가문의 고명딸로 소문이 자자한 성화영이었다.

    ‘외압이란 게 이 정도는 돼야 누구를 가르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별 같지도 않은 걸로 사람을 함부로 가르치려고 드니까 이런 일을 당하죠. 그죠, 채애현 기관장님?’

    한태화와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미소를 지은 채,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내뱉는 성화영을 보며 채애현은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성화영이 먼저 돌아가고 난 뒤 씁쓸하게 담배를 빼 물던 장관 역시 채애현의 어깨를 한번 치며 조심하라고 했다. 어지간하면 저 여자에겐 밉보이지 말라고.

    채애현은 이를 악문 채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그녀는 이쯤에서 한태화가 제 손으로 다시 수습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 전에 나빠진 사이를 풀 수 있다면 더 좋고. 그러기 위해서 채애현은 현재 자신이 뒷수습을 해주며 약점을 쥐고 있던 이들에게 전화를 돌려가며 도와주십사를 가장한 협박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떠내려가면 그들도 무사할 수 없다. 왜 자신 혼자 직권 남용의 혐의를 뒤집어써야 한단 말인가. 채애현은 억울했다.

    그때, 바쁘게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고 있던 채애현의 기관장실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험악하게 열리더니 익숙한 이가 들어섰다. 막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려던 채애현이 그 소리에 놀라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한태화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더니 그대로 채애현의 멱살을 잡았다.

    “……!”

    “요한 어딨어.”

    “…….”

    한태화의 물음에 놀란 얼굴을 해 보이던 채애현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멱살이 잡힌 채 억지로 끌려 일어나 있던 그녀는 잠시 한태화를 노려보다 억센 손을 거칠게 쳤다. 그럼에도 그 손은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일개 지원팀 사무원을 왜 내게서 찾는지 모르-.”

    “똑바로 말해. 요한, 어딨어.”

    “이거 놔! 먼저 놓고 말해! 감히, 누구 앞에서…!”

    “기관장님. 내가 지금 제정신 같아 보여요? 너랑 말싸움할 시간 없으니까, 그냥 죽여버리기 전에 말하라고. 요한 어딨어.”

    멱살을 잡아 코앞으로 끌어당긴 한태화의 힘 탓에 다리가 들린 채 딸려가던 채애현이 숨을 참았다. 바로 눈앞으로 한태화의 반질거리는 눈이 놓여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시선에 채애현은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한태화의 눈이 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시선엔 싸늘한 분노의 빛이 아닌 그저 길가의 돌맹이를 보는 듯한 무심함만이 담겨 있었다. 언제든 발로 차 없앨 수 있는 것을 보는 시선. 눈앞에 자신을 사람으로, 혹은 생명으로 보지 않는 눈.

    그 시선에 몸을 떨던 채애현은 이내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몸을 흔들었다. 그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러니까 그 사람을 왜 나한테 와서 찾는지 모르겠다고! 일단 이거부터 놓고-.”

    “…짜증 나.”

    “뭐- 큭, 으윽!”

    순간 멱살을 잡고 있던 팔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팔은 아까와는 달리 쇠처럼 단단하게 변해있었다.

    한태화의 육체 강화 능력.

    채애현은 아까와는 다른 악력으로 목을 조이는 힘에 고통스럽게 신음하다 간신히 입을 벌렸다.

    “모, 몰라. …크, 예상, 예상 가는, 큭, 거라면-.”

    “…….”

    “마, 말할, 게.”

    “…….”

    아는 것을 다 말하겠다는 대답에도 한태화는 쉽게 손을 놓지 않았다. 고요한 시선으로 그저 채애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채애현이 그 시선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그제야 손에서 힘이 풀렸다.

    “콜록! 콜록콜록!”

    숨이 쉬어지자 눌렸던 기도가 자극받아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붉어진 얼굴로 한참이나 기침을 내뱉던 채애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붉어진 눈으로 한태화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잠깐을 못 참은 한태화가 채애현을 향해 다시 걸음을 뗐다. 점차 가까워지는 한태화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채애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급하게 입을 열었다.

    “등록한 에스퍼나 가이드라고 아무나 기관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세가의 적대적인 단체에서 보낸 스파이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인턴 요원으로 들어왔을 때 뒷조사를 하게 되지. 그걸 위해 감찰팀이 있는 거고.”

    “쓸데없이 말이 기네. 어디 있는지만 말하라고.”

    “나도 몰라! 감찰팀에서 나간 이후부터 출근하지 않았다고 해서 도망이라도 갔나 싶어 조사를 시키긴 했지만,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고!”

    “그런 얘기나 듣자고 널 살려주고 있는 줄 알아?”

    한태화가 다시 한걸음 다가오려는 모습이 채애현이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예상가는 곳이 있을 뿐이야! 기관장이 되자마자 이상해서 그의 뒷조사를 다시 시켰으니까. 그래서 알게 됐지. 그의 친부가 누구인지.”

    “…뭐?”

    채애현이 그 사실을 알아낸 것은 사실 우연에 가까웠다.

    그녀는 기관장직에 오르자마자 기관에 숨어든 쥐새끼들을 잡기 위해 감찰팀을 돌려 직원들의 과거를 재조사했다. 그리고 그때 등장한 서요한이란 존재가 신발 안에 든 모래처럼 거슬렸다. 사실 그의 뒷조사 결과는 깨끗했다. 비록 고아라 보육원에 오기 전 과거가 불확실하긴 했지만, 8살 아이의 과거 따위가 뭐가 그렇게 중요했겠는가. 평소라면 그냥 무심히 넘겼을 일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한 가지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서요한이 발견된 장소가 오성파에서 한때 이름을 날렸던 블래스트의 폭주 장소 근처라는 것.

    물론 폭주 때의 피해로 간간이 미아가 발생 되기도 하므로 별일 아닌 것으로 넘길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채애현은 찝찝한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조금 더 파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어렵게 붙잡은 밤나비가 S등급의 가이드란 사실을 알고 그를 회유하려다 계속된 실패를 하고 있을 때쯤 아주 뜻밖에 연락을 받았다.

    그 후 채애현은 밤나비를 회유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를 협박했다. 건강 검진이라는 핑계로 서요한의 혈액 샘플을 구하고, 구류 중이던 밤나비의 혈액을 채취해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지를 가지고 밤나비를 협박한 것이다. 아들을 위한다면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언제나 느긋하고 태평해 보이던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진 밤나비는 그 후 무척 말을 잘 듣는 개가 되었다. 구치소를 탈옥하여 도망가 버리기 전까지만.

    그 일로 궁지에 물린 채애현은 다시 한번 서요한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를 미끼로 써서 밤나비를 다시 붙잡을 생각이었고, 한태화도 잠잠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서 감찰팀을 시켜 가짜 증거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친아들이란 이유로 그 가짜 증거들은 신빙성을 갖게 될 것이 분명했고, 지금의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화살들 역시 서요한을 향하게 만들 절호의 찬스였으니까. 그리고 그 전에 가능하다면 한태화와 협상을 해 볼 생각이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덮기 위해서 태화 그룹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사실 한태화가 궁금해하지 않더라도 이 사실을 알릴 생각이었다. 서요한의 친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걸 이용하면 서요한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다는 점과 그런 서요한을 품은 한태화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되리란 사실을 알려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밤나비. 아니, 손학경. 서요한의 친부가 그자야.”

    “…….”

    “지금 상황에서 서요한 가이드가 없어졌다면 그자가 데려갔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지. 놈의 아들이니까. …그러니 너도 나한테 이렇게 구는 짓은 그만둬야 할 거야. 아니면 내가 밤나비의 아들이 세가 내에 잠입해 있었던 거라고 언론에 폭로해 버릴 테니까.”

    “…….”

    채애현의 협박에도 한태화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채애현은 아픈 목을 주무르면서도 승기를 잡은 사람처럼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사실 채애현도 놀라웠다. 고작 그 D등급의 가이드 하나에 S등급의 에스퍼와 가이드가 붙어 있었으니까.

    “하긴 아무도 예상 못 했을 거야. S등급 가이드의 자식이 고작해야 D등급의 가이-.”

    “그러니까, 우리 요한을 데려간 놈들이 오성파 놈들이다?”

    말을 끊는 한태화의 목소리에 채애현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달싹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은… 그래.”

    그러자 한태화로부터 길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또 오성파네. …거슬리게.”

    “…….”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던 채애현이 그 낮은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어쩐지 아까부터 한태화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몇 번 쓸어올리다 피곤한 듯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별안간 벼락같은 시선으로 채애현을 노려보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자꾸 우리 요한을 가만두질 않을까. …짜증나게.”

    “…한팀장, 나는-, 내가 찾아 줄 수 있어. 과거 일은 다 잊고, 나를 좀 도와주겠다고 하면 내가 서요한 가이드를 확실하게 보호-.”

    “입 닫아요, 기관장님. 죽기 싫으면. 다시 한번 그 입에서 우리 요한의 이름이 나오면 진짜 가만 안 둘 테니까.”

    “…….”

    “경고하는데. 누구에게든 요한 이름을 말하는 순간, 죽느니만 못한 삶이 뭔지 알게 될 거예요.”

    무표정했던 얼굴로 길게 눈을 접어 웃은 한태화가 말을 잘랐다. 그 말에 채애현은 굳은 눈으로 한태화를 빤히 응시했다. 방금 저 말은 누구에게라도 서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그의 진심이 들어간.

    “그것도 재밌겠다. 그죠?”

    #76

    “…….”

    이전에도 그랬다. 일을 이렇게 몰아가기 전에도… 한태화는 재밌겠지 않냐고 물어왔다. 그러더니 미친놈처럼 뛰어다니며 채애현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의 경고에 채애현이 입을 다물자, 한태화가 상체를 세우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와 동시에 닫혀있던 기관장실 문이 저절로 열리며 낯선 사람들이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빙긋이 웃으며 손에 들린 것을 채애현에게 내보였다.

    “채애현 기관장님, 저는 서울중앙지법의 권해선 검사라고 합니다. 일단 구속 영장 먼저 확인하시고요.”

    “…이게, 무슨….”

    “채애현씨 당신을 형법 제 356조 업무상 배임죄 위반 및 동법 제 123조의 직권 남용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변명의 기회가 있으며, 진술 거부권 및 체포구속적부심을 법원에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자, 이제 저희랑 함께 가시죠.”

    막힘없이 나온 체포 고지에 당황해하던 채애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체포라니! 나를? 이렇게 쉽게 영장이 나왔다고? 그녀는 당장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껏 자신의 연락을 받지 않던 인물들의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채애현이 참담함에 눈을 감으면서도 분노에 떨었다.

    꼬리 자르기.

    그놈들이 저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던 자신을 무시하고, 잘라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자신을. 채애현은 악을 쓰고 싶은 것을 참으며 이 모든 광경을 무심한 얼굴로 보고 있는 한태화를 돌아보았다.

    “한팀장…, 내가 이렇게 당하기만 할 것 같아요?”

    제 양팔을 잡는 경찰들을 물리치며 채에현이 한태화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한태화가 귀찮다는 태도로 권검사를 향해 말했다.

    “시끄러운데, 저 입도 좀 막아서 데려가죠.”

    그러자 권검사가 펄쩍 뛰는 척을 하며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그런 소릴, 그럼 불법 체포로 적부심에서 걸려요. 그러니 그런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십시오. 우리 검찰은 법대로만 집행합니다.”

    “…됐으니까, 빨리 끌고 가시죠.”

    뭔가 빈정거릴 듯 입을 열려던 한태화가 다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권검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도 경찰들을 향해 끌고 가라고 눈짓했다.

    “한태화! 너, 날 이렇게 대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내가 당장-!”

    “아, 잠시만요.”

    몸을 뒤틀어 반항하며 경찰들에게 힘을 쓰려는 채애현을 빤히 보고 있던 한태화가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그러자 끌고 나가려던 경찰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권검사와 한태화의 눈치만 살폈다. 권검사는 그 곤란해 하는 경찰들의 시선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기다려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태화가 낮은 목소리로 채애현을 불렀다.

    “채애현씨.”

    “…한태화.”

    “당신이 이대로 구속돼서 자리를 비우면 다음 임시기관장은 누가 될 것 같습니까?”

    “…뭐?”

    주먹을 휘두르며 힘을 끌어올리던 채애현이 그 순간 움직임을 멈춘 채 눈을 크게 떴다. 그 경악으로 굳어진 얼굴 앞에서 한태화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부기관장은 당신이 이미 쳐내버려서 공석이고, 그다음이 인사팀 팀장님인데, 내일모레면 정년 퇴임이신 분이라 이런 귀찮은 일에 나설 리가 없거든. 그러면 그다음이 바로 특수 활동팀 팀장님인데, 그분은 지금 장기 출장 중이라 외국에 나가 계시지. 자, 그럼 그다음 순위는 누구지?”

    “…너, 너!”

    “맞아. 바로 나지. 특별 청산팀 팀장. 당신이 직접 앉혀줬잖아. 이 자리.”

    “한태화!”

    “내 이름 그만 부르고, 검찰에 들어가서도 잘 한번 생각해 봐요. 내가 임시기관장으로 앉아 있는데, 그쪽이 다시 기관장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순간 채애현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달싹이다 무섭게 한태화를 노려보았다.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권검사가 천장을 노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음, 협박죄가 성립하고 있는 현장인가. …이쪽은 현행범이고?”

    그런 권검사의 말에도 한태화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추켜 올리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 이제 할 일들 하시라는 태도에 가만히 지켜보던 권검사가 고갯짓으로 채애현을 데려가라고 지시한 뒤, 한태화를 돌아보았다.

    “한태화씨? 검사장님이 하도 간곡히 부탁하셔서 잠시 시간을 달라는 요청을 들어드리긴 했습니다만, 아무리 임시기관장이라도 세가의 부기관장 이상부터는 고위 공무원에 해당하기 때문에 방금 그건 공권력 남용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검사 앞인데, 조심 좀 하시죠.”

    권검사의 말에 짝다리를 짚고 비스듬히 서 있던 한태화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런가요?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죠. 나도 궁금하네. 내 구속 영장이 나올지 안 나올지. 아직까진 체포당해 본 적이 없어서.”

    “…이분이 검찰 알 길 우습게 아시네. 조심해요. 그러다 그 예쁜 손목에 은팔찌 채워 드리는 수가 있으니까.”

    기분이 나쁜 듯 인상을 찌푸리던 권검사가 표정을 풀고 웃어 보이면서도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그런 권검사의 태도에 한태화 역시 그린 듯한 거짓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충고 고마워요, 권해선 검사님. 아, 근데 그 전에 일단 태화 그룹 고문 변호인단부터 먼저 만나 보고 오시죠. 그래야 내 예쁜 손목에 은팔찌를 채워도 채울 테니.”

    “아, 그 유명한 태화 변호인단 말이군요…. 그래요, 개떼로 유명하죠. 근데 제가 또 남들 다 피하는 일에 목숨 거는 타입이라서 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저는 잘 피해 가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가만히 한태화를 노려보던 권검사가 길게 눈을 접어 웃어 보이더니 뒤로 돌아 걸어 나갔다.

    권검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주인을 잃은 기관장실 안으로 한태화만이 남았다. 그는 무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채애현이 앉아 있던 자리로 가서 앉으며 제 형에게 메시지를 하나 넣었다.

    [오성파를 중심으로 찾아. 특히 밤나비가 있을 만한 곳 위주로. 오후 2:38]

    [작은형: ㅇㅇ 오후 2:38]

    왜 하필 밤나비냐, 오성파는 갑자기 왜, 라는 물음조차 없었다. 그것은 한태현이 그걸 물을 정신도 없게 바쁘다는 걸 의미했다. 저와 헤어진 후 사라진 서요한 때문에 한태현은 지금 가능한 모든 인력을 동원해 서요한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태화도 별말 없이 형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간략하게 이응 두 개로 온 답장을 확인한 뒤, 한태화는 피곤한 얼굴로 의자 깊이 몸을 묻었다. 요사이 새우잠을 잘 때 외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움직이고 있었기에 지독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뻑뻑한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던 한태화가 문득 시선을 내렸다. 그의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