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그녀가 손학경이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결혼을 하기로 한 바로 그때, 별안간 편지 하나만을 남긴 채 떠나버린 것이다.
「찾지 말아줘. 때가 되면 돌아올게. 미안해, 학경아.」
그녀가 남긴 짧은 편지를 가장 처음 발견한 손학경은 숨도 쉬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그 새까맣게 올라오던 감정은 그로서도 생전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절망과 분노, 그리고 배신감.
그 진득한 감정 속에서 손학경은 최진이를 찾아 나섰다. 오성파의 세력이 커져서 이미 유명해진 블래스트는 얼굴까지 알려져 세가의 표적이 되기 좋았다. 반쯤은 배신감에, 또 반쯤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최진이를 찾기 시작했던 손학경은 그러다 어느 순간 돌연 찾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마도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그녀가 평소 소원대로 한줄기 작은 바람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러나 손학경은 마음속에서 피어난 그 의심을 부정한 채 그저 그녀가 어딘가 숨어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안정적인 다른 누군가를 만나 잘살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그가 건사해야 할 오성파 식구들의 수는 자꾸 불어나는데, 최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모든 것을 놓은 채 그녀의 뒤를 따를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그래서 손학경은 최진이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가 남겨 놓은 소중한 무언가가 있는 줄을 모르고.
#72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밤나비를, 아니 남자로서의 손학경을 쳐다보았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묵은 상처가 헤집어진 남자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편지 하나만 남긴 채 떠났다고요. 우리 엄마가….”
“그래. 아마… 네가 생긴 걸 알고 그런 게 아닌가 싶어.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 널 보니 이제 알 것 같구나.”
“…무슨 소립니까.”
엄마가 날 가졌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났다고? 왜?
이해 못 할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밤나비가 슬픈 얼굴을 해 보였다.
“네 말대로… 널 범죄자의 자식으로 키우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네 엄만…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일찍부터 혼자 외롭게 자라온 사람이었거든. 그래서 네가 아주 많이 소중했을 거야. 태어난 널 오성파 안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던 거지. 아마 그래서 날 떠난 게 아닐까. ……말을 해 줬으면… 나도 다 버리고 같이 갈 수 있었는데…. 차마 오성파 사람들에게서 날 뺏을 순 없었겠지. 말은 투박해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거든, 우리 지니는.”
“…….”
“그렇게 널 낳아 숨어 살면서도 아주 힘들었을 거야. 세가의 눈도 피해야 하고, …화가 나서 미친 듯이 찾고 있던 내 눈도 피해야 했을 테니까. 이중고였겠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해했다. 왜 엄마가 내 출생신고도 안 한 채 짧으면 3개월마다, 길게는 1년마다 사는 곳을 옮겨 다녔는지. 엄마는 최대한 나를 보호한 것이다. 세가로부터.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와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사실 오성파의 수장인 밤나비는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이의 아들로 살았다면 그것도 결코 편한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근데… 왜 끝까지 찾지 않았습니까?”
어렵게 뗀 입술을 달싹여 묻자 밤나비가 무척 쓸쓸하게 웃었다. 그는 정말 이 넓은 세상에 홀로 남은 사람처럼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사랑해서. 너무 사랑해서… 미웠거든.”
“…….”
“그래서 의심했지. 그녀에게 다른 누가 생긴 게 아닐까 하고.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까… 누구와 같이 있든, 편하게 쫓기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 찾았어. …그러면 안 됐는데…. 진이를 믿고 끝까지 찾았어야 했는데…, 내가 지쳐서….”
홀로 씁쓸하게 웃던 밤나비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소리 없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 힘겹게 시선을 내렸다.
너무 사랑해서 미웠다. 그 말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기적이라고 욕을 해도 좋으니 너만은 꼭 지켜주고 싶었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아빠 노릇이 해보고 싶어서.”
“…그럴 필요 없는데….”
“…….”
혼잣말처럼 나온 말에 마른세수 후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려 노력하던 밤나비가 표정을 굳혔다. 근데 그 단단하게 굳은 얼굴이 매일 아침 거울에서 보던 내 얼굴과 비슷해서 슬쩍 웃음이 났다.
정말 신기하네. 가족끼리는… 정말 닮는구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고, 같이 살지 않았어도.
“그럴 필요 없다고요. 내가….”
“…….”
“…엄마가 죽은 건 나 때문이니까. 그러니까 그냥 날 미워해도 됩니다. 당신은 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거니까.”
순간 아무 말이 없었다. 충격을 받은 듯 밤나비의 눈동자가 사납게 흔들렸다. 짙은 먹색의 눈동자가 시점조차 잡지 못한 채 흔들리는 것을 보며 쓰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서인지 이 순간 한태화가 생각났다. 네가 없었으면… 나는 저 남자의 마음을 평생 이해할 수 없었겠지.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미웠다.
내가 한태화에게 한 짓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한태화는 내 행동에 상처 입고, 화를 냈다. 그게 아마도… 저것과 유사한 마음에서가 아니었을까.
“마지막 순간에 엄마가 가이딩을 해달라고 뻗은 손을 무시했습니다. 엄마가 약속을 안 지켰거든요. 쫓기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는데, 엄마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죠. 유치원을 다니게 해주겠단 약속도, 한곳에 오래 살아서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도, 아무것도 지키지 않아서…. 그래서 내가….”
“아니야!”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밤나비가 한걸음 다가왔다. 놀라서 말을 멈춘 채 고개를 드니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던 남자가 떨리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딱히 피하질 않자 한참 만에야 다가온 손이 귓가와 함께 뺨을 감싼 채 무섭게 떨었다.
그 손은 며칠 전 내 손을 잡던 한태화의 손처럼 차가웠다. 피가 모두 빠져나간 손처럼 하얗게 질린 차가운 손.
“왜, 왜 그런 생각을…. 지금까지 설마… 그런 생각으로 산 거야? 그런 마음으로 너 스스로를 자책하고, 원망하면서… 그렇게….”
“그게 사실이니까요.”
언제나 그랬듯 어렸을 때의 이야기엔 이미 딱지가 앉아 있었다. 이제 와 그게 상처인 양 아픈 척 구는 건 차라리 연기에 가까웠다. 그래서 별스럽지 않게 덤덤히 대꾸했는데, 그럼에도 밤나비의 떨리는 몸은 멈추질 않았다. 떨림이 멈추긴커녕 이제는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밤나비는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내 손을 붙잡았다. 그 탓에 작게 기운이 일렁였지만, 링크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무심하게 시선을 내려 밤나비를 보았다. 그게 언제적 일인데, 이 남자는 그걸 이렇게 안타깝다는 얼굴로 떨고 있는 걸까. 보는 사람의 마음이 다 시릴 만큼 아픈 얼굴로. 그저 그런 감상뿐이었다.
“아니야! 그건 네 엄마가 선택한 거야! 진이에겐 돈이 있었어. 평생을 숨어다녀도 다 쓸 수 없을 만큼의 돈이 있었다고! 그런데도 다른 가이드를 찾지 않고, 폭주했다는 건 진이가, 네 엄마가 그걸 선택했다는 거야!”
“…왜요. 엄마가 왜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하겠어요.”
“널 고아를 만들어서라도 평범하게 기르고 싶었으니까! 네게서 나를 끊어내고, 자신을 완전히 지워내야만 네가 우리란 그늘에 눌리지 않고 평범히 자랄 테니까!”
…뭐?
“지금 네 모습만 봐도 알잖아! 이렇게 평범하게,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잖아! 범죄자의 자식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가이드로서, 그렇게 살고 있잖아. 네 엄마가 목숨을 바쳐서 바란 게 이런 거였겠지. 네 평범한 일상. 그리고 평범한 행복.”
‘여기 꼭 숨어 있어야 해. 절대, 절대 여기서 나오면 안 돼. 그리고… 누가 묻더라도 엄마 이름을 말하면 안 돼. 아무것도 말하지 마. 아무것도.’
밤나비의 말과 함께 엄마의 마지막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에 아무 말도 못 한 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밤나비가 내 손을 잡고 몸을 숙였다.
“왜… 그런 생각으로 살았어. 왜…. 아니야, 내 잘못이야. 내가 널 찾았어야 했는데, 네 엄마를… 찾아서, 그래서….”
“…….”
괴롭게 울부짖던 남자의 몸이 허물어졌다. 밤나비가 아닌 평범한 사내로 돌아간 남자는 그렇게 덜덜 떨리는 몸으로 내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용서를 구하듯 울었다.
그가 30년 만에 토해낸 울음이었다.
‘우리 아들, 엄마가 미안해. 이건 전부 엄마 잘못이니까, 우리 아들은 전부 잊어버려. 미안해. 이런 못난 엄마라서…. 그래도 이런 엄마의 아들을 해줘서 엄마는 무척 행복했어. 정말이야. 사랑해, ――아.’
현재의 기억과 과거의 기억이 뒤엉킨 머릿속이 난장판이었다. 어지러움에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아니면 모든 것을 게워 낼 것만 같았다.
#73
여인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 그 몸을 훌쩍 안아 들었다. 벌써 8살을 넘긴 아이는 훌쩍 안아 들기엔 제법 컸지만, 전혀 버거워하지 않고 여유롭게 아이를 안아 든 여인은 곧장 하늘로 몸을 띄웠다.
발아래로 점차 작아지는 풍경에 아이는 놀랄 법도 했지만, 이미 익숙해서 그런지 그저 느슨하게 엄마의 목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또다시 며칠째 숨바꼭질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한 번씩 아이와 엄마는 숨바꼭질 놀이라고 이름을 붙인 도망을 다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여인은 아이를 안고 날아다녔다. 때로는 아이를 두고 혼자서 사람들을 유인하기도 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아이는 엄마의 말을 따라 몸을 웅크린 채 숨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숨바꼭질이 시작될 때면 그 끝이 늘 이사라는 것을 알기에 사실 아이는 이 숨바꼭질 놀이를 싫어했다.
그럼에도 다시 시작된 숨바꼭질 놀이에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문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찬바람을 맞으면 목을 움츠렸다. 높아진 높이 만큼 차가워진 바람이 서늘하게 목덜미를 감싸왔다. 그러자 움츠린 아이의 목으로 따뜻한 손이, 아니 뜨거운 손이 다가와 바람을 막아주었다.
그러다 건물 사이, 어두운 골목길로 내려선 여인이 아이의 몸을 내려주며 아이에게 시선을 맞췄다.
“우리 아들, 잘 알지? 여기 꼭 숨어 있어. 술래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
엄마의 말에도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다시 시작된 숨바꼭질에 이사 갈 것을 예감한 아이는 사실 내도록 삐친 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 손 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던 아이의 엄마가 움찔하며 다시 손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삐친 게 살짝 풀려 삐친 척만 하고 있던 아이는 모르는 척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이의 엄마는 그 손을 잡지 않은 채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아들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하루만, 하루만 더 하던 게 벌써 팔 년이 돼가네.”
“…엄마?”
“지금인 것 같아. 아니…, 사실 지금도 많이 늦었지. 아는데, 근데도 엄마가 많이 아쉬워서…. 우리 아들이랑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바보같이.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지, 우리 아들?”
“엄마, 갑자기 왜 그래?”
평소와는 다른 엄마의 모습에 아이가 불안한 얼굴로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이의 엄마가 그 어깨를 잡아 누르며 아이를 다시 골목길 안으로 숨겼다. 엄마의 얼굴엔 어느새 평소와 같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들, 지금부터 엄마 말 잘 들어.”
“…….”
아이가 불안한 얼굴로도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한번 엄마의 미소가 짙어졌다.
“여기 꼭 숨어 있어야 해. 절대, 절대 여기서 나오면 안 돼. 그리고… 누가 묻더라도 엄마 이름을 말하면 안 돼. 아무것도 말하지 마. 아무것도. 알겠지?”
아이는 왜냐고 묻고 싶었다. 왜 엄마의 이름을 말하면 안 되는지, 이제껏 둘이서만 살았는데 누가 엄마의 이름을 묻는다는 건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엄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착해. 우리 ――이.”
“응. 그러니까 엄마, 빨리 와야 해, 응?”
“…그래.”
아이의 채근에 여인이 쓴웃음을 지어 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는 안심이 돼서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 입매를 가만히 바라보던 여인의 입술이 아이의 정수리로 쏟아졌다.
“우리 아들, 엄마가 미안해. 이건 전부 엄마 잘못이니까, 우리 아들은 전부 잊어버려. 미안해. 이런 못난 엄마라서…. 그래도 이런 엄마의 아들을 해줘서 엄마는 무척 행복했어. 정말이야. 사랑해, ――아.”
“엄마?”
“엄마, 금방 다녀올게.”
“…응. 빨리 와, 꼭. 응?”
“응!”
그렇게 밝게 대답한 엄마는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으로 바람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아이는 제 어깨를 끌어안았던 엄마의 감촉을 떠올렸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던 그 손을. 아이가 잠시만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엄마의 손은 늘 그렇게 뜨거워졌다. 엄마의 놀이공원에 있는 그 회전목마도 뜨거워졌고.
양어깨를 감싼 채 그 체온을 떠올리던 아이는 미간을 찌푸리다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습게도 그 모습이 퍽 어른스러웠다.
“하는 수 없지. 내가 또 봐 줘야지, 뭐.”
그 말과 함께 아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엄마는 술래를 피해 숨어 있으라고 했지만, 엄마가 걱정되어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모습이 평소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투덜거리듯 중얼대던 아이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곳의 중심엔 늘 엄마가 있었다. 아이는 어느새 달리기 시작해서 복잡한 골목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도로 위에서 엄마를 만났을 때, 드디어 아이의 걸음이 멈췄다.
“엄-.”
엄마를 부르려던 아이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는 밖에선 절대 엄마를 크게 부르면 안 된다고 배웠다. 특히 숨바꼭질 중에는 꼭 지켜야 하는 규칙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주변의 눈치를 보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엄마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걸음 내디뎠다가 금세 다시 멈춰섰다.
무언가 이상했다. 엄마에게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는 다가갈 수 없을 만큼 거칠고 뜨거웠다.
바람은 항상 엄마의 친구였는데. 엄마도 나랑 아빠 다음으로 가장 친한 친구랬는데.
아이의 불안한 눈이 엄마를 곧 집어삼킬 것처럼 거칠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향했다.
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아이가 곧바로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를 부를 수도,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답답함에 울기 시작한 아이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세가 기관의 요원을 통해 구해졌다. 누군가 칼날 같은 뜨거운 바람을 피해 아이를 안고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정승원, 여기서 뭐 해! 시민들 대피부터 도우라니까.”
“아, 선배. 여기서 웬 애가 울고 있어서요.”
우는 아이를 다짜고짜 안아 들고 부모를 찾기 위해 달리고 있던 정승원이 어깨를 치는 선배의 부름에 난처하게 웃으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놀란 얼굴이 된 정승원의 선배가 아이를 확인하고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아수라장에서 부모 잃은 아이 한둘은 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웬 애야? 그럼 어디 다친 곳 있나 봐서 없으면 경찰한테 넘기고, 있으면 구급대원한테 넘겨. 그리고 넌 빨리 와서 물 좀 뿌리고. 아주 뜨거워 죽겠다!”
“알았어요. 조금만 더 찾아보고 금방 갈게요.”
“빨리 와라, 빨리!”
그렇게 외친 선배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정승원은 곤란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의 말대로 배치받은 장소로 복귀해야 했지만, 아직도 작게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아이를 선뜻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정승원은 아직도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아이의 등을 어설프게 다독이기 시작했다. 아이를 다룰 줄 모르는 그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만 좀 울어라. 꼬마야. 이 아저씨가 지켜줄게. 응?”
“흐으-.”
“아저씨가 엄청 강한 에스퍼거든? 우리 꼬맹이 소원쯤은 다 들어 줄 수 있는? 그러니까 그만 좀 울라고. 이러다 탈진해서 쓰러지겠다.”
아이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그러나 그 상냥한 다독임에 점차 눈물을 그쳐가며 히끅히끅 딸꾹질을 했다. 정승원은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이며 고개를 돌려 아이를 맡길 만한 곳을 찾았다. 이제 막 기관에 들어온 스물두 살의 인턴 요원인 정승원은 아직 풋내기에 불과해서 이런 일이 서툴렀다. 그저 진심인 마음만이 앞설 뿐이었다.
“그래, 남자는 그렇게 쉽게 우는 거 아니야. 아저씨가 지켜줄 테니까 그만 울어. 남들이 보면 울보라고 놀린다?”
“…….”
어설프지만 다정한 손길에 아이가 정승원의 어깨 부근의 옷을 세게 쥐었다. 엄마에게 데려다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럼 엄마가 누구냐고 물어올 게 겁이 나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정승원이 구급대원을 찾아내 그에게 아이를 넘겼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아저씨가 금방 와서 아빠랑 엄마도 찾아줄게. 알았지?”
“…….”
그 말에 눈물 맺힌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낸 아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은 정승원은 다시 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폭주를 막기 위해서.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폭주를 막지 못했고, 지칠 대로 지친 정승원이 다시 구급대원을 찾았을 때는 아이가 이미 경찰의 손에 넘어간 후였다.
그리고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던 아이는 깬 이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모든 질문에 고개만 저어댔다. 결국 아이는 경찰관의 도움으로 보육원으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서요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
기억을 잃은 아이는 바람결에 실려 온 자신을 부르는 소리마저 듣지 못했다.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고, 학교에도 다니게 되어 중학생이 됐을 때, 그래서 다시 기억을 찾게 되기 전까지 그랬다.
***
오래전의 일들이 우후죽순 떠올라 정리가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머리가 아팠다.
그러니까 엄마가 오성파의 일원이었고, 세가와 밤나비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며 나를 키웠다는 건가. 그러다 결국… 폭주로 돌아가신 거고. 실제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건 사실만 놓고 보자면 그랬다.
그 후 고아원에서 자란 내가 가이드로서 세가에 들어가게 됐다는 건데…. 그럼 세가는 처음부터 알고도 나를 받아준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인가? 그리고 밤나비, 아니 손학경에게 왜 내 존재를 알렸지? 내가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있던 사람에게?
…이 새끼들 이거 또 날 가지고 협박한 거 아냐? 한태화한테 한 것처럼?
설마 싶으면서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두통이 계속 심해져만 갔다.
#74
지금껏 흐릿했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도 이제는 선명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잊고 싶어서 억지로 지웠던 그때의 일이 전부 기억 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나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말로는 감금이 아니라는데, 창문도 없는 방에 밖에서 잠긴 문을 두고 감금은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우스웠다. 그러나 설령 진짜 감금이 아니라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 무턱대고 뛰쳐나갔다가 세가 사람들에게 잡히면… 나는 꼼짝없이 오성파의 내통자가 된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다. 내가 밤나비의 아들이란 게 밝혀지면 조작된 증거는 더이상 그 조작을 주장할 수 없게 되고 말이다. 그리고 그게 아마 기관장이 가장 바라는 일이 아닐까?
“대체 어쩌라고.”
골치가 아파 머리를 마구 헤집는데 똑똑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빼꼼히 문이 열렸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던 어린 남자애가 고개를 쏙 내민다.
“형, 밥 먹으래요.”
“그래서…, 지금 나오라고?”
“예. 식당은 1층에 있어서요.”
“…….”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이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다 일단 녀석의 말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조금 더 문을 연 녀석이 뒤로 물러나며 나갈 수 있게 공간을 내줬다. 그 사이로 빠져나가자 문이 늘어선 복도의 중간쯤에 서 있게 되었다.
저녁쯤인지 복도 끝 창문으로는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지고 있는 풍경이 보였고, 나름 잘 꾸며 놓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방금 나온 문을 살피자 밖에서 보면 벽처럼 보일 형태의 문이 열려있었다. 그러니까 안쪽에 달린 문손잡이는 그냥 달아 놓은 가짜였던 것이다. 그래서 헛돌기만 한 거고.
진짜 숨겨 놓은 건 맞는 것 같은데….
자세히 구조를 살피지 않으면 모를 공간에 방을 하나 숨겨 놓은 것을 보며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자 먼저 걸음을 옮기던 어린 녀석이 따라오라는 듯 서서 손짓하는 게 보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 얌전히 그 뒤를 따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자 앞서가던 녀석이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왜요?”
“…알 거 없으니까 그냥 앞장이나 서.”
“예…, 형.”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눈치를 보던 녀석이 침울하게 표정을 가라앉히다 이내 타닥타닥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따라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가면서 피식하고 실소했다.
그러니까, 감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지, 지금?
어린 녀석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자 소파와 TV, 사각진 테이블이 놓인 거실의 모습이 나타났고, 그 왼편에 있는 부엌과 한가운데에 놓인 제법 큰 식탁이 보였다. 전형적인 평범한 단독주택의 모습이었다. 딱 한 가지만 빼면.
“와서 앉아.”
폭탄 테러범이 꽃무늬 앞치마를 맨 채 막 찌개가 든 냄비를 식탁 위로 올려놓고 있는 풍경이 일반 가정집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지. …저게 뭐 하는 시각 테럴까? 폭탄 테러만으로는 부족했나?
“…뭐 하냐, 너?”
“보면 몰라? 밥 차리잖아.”
“그 밥, 먹어도 안 죽는 건 맞고?”
“먹고 맛있다면서 더 달라고나 하지 마.”
말하는 사이에도 부산스럽게 움직이다 국그릇에 찌개를 담고 있는 샐러맨더를 멍하니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리는데, 곁에 서서 눈치를 보고 있던 어린 녀석이 옆으로 붙어 오며 실실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동원이형 밥 진짜 맛있-.”
자리를 안내해 주려는 듯 팔꿈치 부근의 잡아끄는 손을 쳐내며 건들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자 순하던 얼굴이 시무룩해져 입꼬리와 눈꼬리가 쳐졌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샐러맨더가 냉큼 끼어들어 어린 녀석의 어깨를 끌고 가더니 식탁 앞에 앉힌 후 힐끔 하고 흘겨본다.
“거, 엄청 까칠하게 구네. 남의 집 막둥이 기죽이지 말고 안 먹을 거면 꺼져, 새끼야.”
“그래? 그럼 그냥 갈까? 아예 밖으로 꺼져주면 돼?”
손으로 현관문을 가리키며 빈정대자 샐러맨더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나 역시 어디 한번 해보라는 의미로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그러자 어린 녀석이 불안한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더니 말리고 나설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때 내 어깨로 손 하나가 올라오지 않았다면 녀석은 그 사이로 끼어들어 말리려 했을 것이다.
“자, 이제 그만들 하고 밥부터 먹을까? 원래 배가 고프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법이니까.”
“아버지!”
불안해하던 어린 녀석이 환하게 반기는 얼굴로 벌떡 하고 일어났다.
아버지?
거슬리는 호칭에 어린 녀석을 힐끔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멋대로 남의 어깨를 감싸 안은 밤나비가 선량해 보이는 얼굴로 넉넉하게 웃고 있었다. 그 허여멀건 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에 인상을 찌푸리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이번에도 건들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식탁의 끝부분으로 가서 홀로 앉자,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트린 샐러맨더 놈이 달려들 것처럼 이를 드러냈다. 제가 꽃무늬 앞치마를 매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