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49)
  • 저놈이 왜 여기 있어? 날 노리나? …왜?

    당황한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다가 휙 하고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 앞을 막아선 다른 놈이 있었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됐을까 싶을 정도로 어린놈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람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에 다시 뒤로 걸음을 물렸다.

    얜 또 뭐야?

    분위기상 아무리 봐도 오성파 소속으로 보이는 놈은 처음 보는 앳된 얼굴을 한 채 슬금슬금 가까워지고 있었다.

    뒤에는 샐러맨더, 앞에는 얼굴도 모르는 청소년 놈. 그런데도 왠지 포위됐다는 기분이 들어 등골이 서늘했다. 몸집이 작은 어린놈은 특유의 이상한 분위기가 있어 맹해 보이는 인상임에도 쉽게 달려들 수가 없었다.

    도움을 청해야 해. 그 생각이 듦과 동시에 시선이 기관에서 활동하는 에스퍼와 가이드로 가득 찬 아파트로 향했다. 그래서 아직 붉은 신호임에도 무단 횡단을 하기 위해 몸을 돌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을 때였다.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어깨를 강하게 잡고 뒤로 끄는 바람에 휘청하고 균형을 잃었다. 등으로 와 닿는 상대의 가슴을 느끼며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연일 뉴스를 통해 봤던 얼굴. 분명 보고서를 통해 쉰을 넘은 나이임을 알지만, 화면을 통해 뿌려지고 있는 얼굴은 이제 막 서른 중반이 넘었을까 싶게 젊어 보였다. 근데 바로 그 얼굴이 시야 안으로 비스듬히 들어왔다.

    콜네임 밤나비. 오성파의 수장. 그가 내 어깨를 짚은 채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안녕?”

    “…….”

    밤나비까지 왔다고? 내가 나도 모르는 새 진짜 밤나비와 내통이라도 하고 있었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만큼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일단 어깨를 잡은 팔을 잡고 꺾으며 그 손에서 벗어나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어느새 주위를 포위한 샐러맨더와 청소년 꼬마 때문에 도망가긴 어려워 보였다. 꺾인 손목이 아프다는 듯 작게 미간을 찌푸린 채 손목을 돌리는 밤나비를 보며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도망가야 하는데…. 주의를 끈 후 방심한 틈을 노려볼 생각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할 말 없어.”

    그러자 그 말에 밤나비가 손목을 주무르다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폭탄 같은 말을 던졌다.

    “흠흠, 역시 소개가 좀 부족했지? 음…. 안녕, 아들?”

    “…….”

    뭐?

    황당한 말에 밤나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오밤중에 사람을 찾아와서 한다는 개소리가… 뭐? 미쳤나? 그 생각이 드러났을 내 표정을 보고도 밤나비는 뺨을 붉힌 채 쑥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네 아빠란다. 음… 이거 생각보다 부끄럽네. 그래도… 정말 보고 싶었어, 아들.”

    #70

    “…….”

    저게… 감옥에 있다 보니 노망이라도 났나.

    진심이라는 듯 긴장한 얼굴로 웃고 있는 밤나비를 보며 도망갈 생각도 못 한 채 천천히 입을 벌렸다. I'm your father라니. 대체 언제적 개그코드인지 모를 말에 헛웃음이 터졌다.

    그게 개그코드랍시고 유행할 때도 실소 한 번 터트린 적이 없었는데.

    “…나 고안데?”

    그의 말 중에서 심각하게 잘못된 오류를 짚어주기 위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줬지만 밤나비는 여전히 뺨을 붉힌 채 부끄러워하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게 참…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너무 늦게 찾아왔지? …미안해.”

    “…무슨 말인지 몰라? 나, 부모 없는 고아라고, 이 미친놈들아.”

    “아니지. 없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거겠지. 이제 안 거고.”

    갑자기 친근한 척을 해오는 샐러맨더가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씩 하고 웃는 것을 보며 미쳤냐는 의미로 얼굴을 찌푸렸다.

    이것들이 단체로 약을 했나.

    “…나 엄만 있었어. 기억도 난다고.”

    “그 말은 아빠는 누군지 몰랐다는 말이잖아요. 형.”

    샐러맨더가 선 반대편으로 다가온 꼬꼬마가 순한 눈을 부담스럽게 반짝거리며 올려다보는 것을 보다 밤나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건…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일에 이제는 퇴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우리 엄마 이름은 알아요?”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했지만, 갑자기 존댓말이 나와 나도 당황했다. 그러자 잔잔히 미소 짓고 있던 밤나비가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어쩐지… 온몸의 털들이 일제히 솟으며 소름이 돋았다.

    아냐, 듣고 싶지 않….

    “최진이.”

    “…….”

    “나의 지니. 그렇게 불렀어, 나는.”

    그 순간 한 걸음 다가선 밤나비가 주먹을 쥐고 있던 남의 손을 함부로 잡아챘다. 아차- 하고 놀라며 물러났지만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샐러맨더에게 막혀 그 행동은 무용했다.

    곧바로 기운이 섞여 링크가 이루어지며 끌려가듯 딸려 들어간 밤나비의 근원에서 눈을 떴다.

    별빛이 반짝이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 아주 넓게 펼쳐진 황금 들녘. 허리께에서 바스락대는 밀대를 내려다보다 그 광활함에 놀라 하늘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근원의 크기가 거의 한태화만 했다.

    그렇다는 건 밤나비가 S등급이란 의미였다. 그리고 내 근원에 들어온 느낌이 나는 것 보니 가이드였고. S등급의 가이드.

    말도 안 돼. 한국에… S등급의 가이드가 있었다고? S등급의 에스퍼에 비해 훨씬 더 희귀하다는 그 S등급의 가이드?

    그때 넋을 놓고 보고 있던 하늘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별이 빛나던 하늘이 일시에 일렁이더니 하늘에 작게 구멍이 났다. 그 구멍 사이로 작게 파란 하늘이 보이며 빛이 들어오는 것에 가늘게 눈매를 좁혔을 때, 하늘이, 아니,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나비들이 일시에 날아올랐다.

    별빛을 등에 단 까만 나비들이 일시에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광경 뒤로 파란 하늘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콜네임 밤나비.

    몸을 굳힌 채 그 이름을 이해했을 때 떠올랐던 나비들이 희미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내 근원 안이 그 검은 나비들로 가득 차는 것을 느끼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조금씩 정신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아-, 순간 방심했다. 같은 가이드라도 그 등급이 완전히 다른데.

    휘청하며 무릎이 풀려 쓰러지는 몸을 손을 잡고 있던 밤나비가 힘주어 끌어안았다.

    “근원이… 엄마랑 같구나.”

    “놔….”

    “아주 오랜만에 보는… 그리운 광경이야.”

    “…….”

    “진이야….”

    순간 심장이 철렁할 만큼 슬픈 얼굴로 간신히 웃고 있는 밤나비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만약 그러지만 않았어도 독하게 소리쳤을 것이다.

    남의 엄마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그따위 그리워하는 얼굴 하지 말라고!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남의 근원을 멋대로 밤으로 물들인 밤나비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

    이른 아침, 길거리로 나와 쪼그려 앉아 있던 아이의 시선이 부럽다는 듯 어지럽게 흩어졌다. 어린아이가 길거리에 홀로 나와 있는 모습에 어른들의 시선이 잠시 모이기도 했지만, 바쁜 출근 시간에 쫓겨 애써 떨어져 나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부터 아이를 보고 달려온 여인이 그런 아이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너! 엄마가 어디 가면 말하고 가야 하는 거라고 얘기했어, 안 했어!!”

    “…엄마.”

    달려오자마자 아이를 끌어안은 여인이 안도의 숨과 함께 지금껏 찾아다니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조금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던 아이가 엄마의 화난 눈빛에 주눅이 들어 입매를 삐뚤게 내렸다.

    “누가 말도 없이 여기까지 혼자 나오래! 엄마가 위험하니까 혼자 다니지 말랬잖아!”

    “…….”

    조용하지만 화가 담긴 목소리에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가 작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여인은 그 손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상처 입은 사람처럼 눈을 떨었다.

    아침 시간에 맞춰 가방을 맨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홀로 앉아 부럽게 봤을 아이를 생각하니 여인은 더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엄마가, 엄마가… 곧 학교 다니게 해 줄 거라고 했잖아.”

    “…….”

    거짓말.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삼킨 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까지 그런 식의 약속들이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의 엄마는 유치원을 보내주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유치원은커녕 매번 사는 곳을 옮겨 다니느라 또래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컸던 아이는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안 되는 일에 짜증을 부리거나 어리광을 부릴 만큼 눈치가 없지 않다는 것이 아이의 가장 큰 문제점이기도 했다.

    “진짜야…. 이번엔 진짜 약속 꼭 지킬게. 자, 약속.”

    조심스럽게 내민 엄마의 새끼손가락을 보던 아이는 이번에는 그 말을 믿어야 하는지, 마는지를 고민했다. 그 고민 끝에 시선을 든 아이는 이번엔 진짜라는 듯 눈으로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 얼른 작디작은 새끼손가락을 뻗어 엄마의 손가락에 감았다.

    “진짜? 약속한 거야.”

    “응.”

    그제야 아이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씩씩하게 혼자 일어난 아이를 따라 몸을 일으킨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웃으며 그런 엄마의 손을 잡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또 아파? 놀이공원 갈까?”

    “…응. 그럴까?”

    뜨끈하게 열이 오른 엄마의 손을 잡고 조물락거리던 아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먼저 걸음을 옮겨 빌라 안으로 들어가 둘이 살고 있는 원룸 방으로 엄마를 이끌었다. 집이라기엔 뭐한… 아마도 1년 정도 머물다 옮길 임시 거처 같은 곳이었다.

    “자, 환자분은 여기 앉으세요.”

    “네, 의사 선생님.”

    아이가 먼저 이불 위로 올라가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제 옆을 탁탁 두드린다. 그 귀여운 모습에 희미하게 미소 지은 아이의 엄마가 그 자리로 가서 앉으며 분위기를 맞췄다. 엄마는 친구가 없는 아이의 유일한 놀이상대였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열이 나서요.”

    “손을 주세요.”

    “네에-.”

    아이의 진지한 표정에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이 아이의 손에 닿은 순간 두 기운이 일렁이며 아이는 금세 새로운 세상에 서 있었다.

    푸르게 펼쳐진 잔디밭. 그 익숙한 장소를 둘러보고 있을 때 아이의 귓가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혹시 아빠 보고 싶어?”

    “…….”

    그 말에 막 근원으로 링크했던 아이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엄마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보고 싶었지만, 그 말로 엄마가 상처 입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거짓으로 고개를 저은 아이의 마음을 아이의 엄마인 여인이 모를 리 없었다.

    “보고 싶다고 해도 돼. 그래도 괜찮아. 그건 당연한 거니까.”

    “…정말?”

    “정말이지.”

    “그럼… 보고 싶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라는 사람, 아이는 그 아빠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울고 떼를 쓰며 아빠를 달라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혼자서 몰래 우는 엄마를 알고 나서부터는 아빠라는 단어를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아빠는 보고 싶었지만, 그보단 엄마가 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하자. 엄마의 놀이공원에 올 때 지키기로 한 규칙들, 기억하지?”

    “응. 함부로 막 돌아다니면 안 되고, 여기저기 아무거나 만지면 안 돼. 말이 먼저 다가올 때까지 꼭 기다려야 해.”

    언젠가 엄마가 해줬던 말을 그대로 내뱉으며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 아이를 보며 여인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맞아. 똑똑한 우리 아들. 방금 한 말대로 계속 그래야 해, 알았지?”

    아이는 링크된 후로 한 번도 움직이지 않는 제 발을 내려다보다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시선이 금세 먼 곳을 향했다. 그러자 저 멀리 오래되고 낡은 회전목마가 보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서 신나게 말을 타고 싶었지만 아이는 기다렸다. 그 기다림 끝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뺨을 간질였고, 그 순간 조금씩 회전목마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엄마의 놀이공원.

    아이는 자신만 탈 수 있는 회전목마가 있는 이 세상을 그렇게 불렀다.

    어느새 바로 앞으로 다가온 익숙한 회전목마를 본 아이가 신이 나서 말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배운 대로 힘을 풀었다. 그 기운에 뜨끈하게 달궈져 있던 회전목마가 느릿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짧게 짧게 금이 가 있던 세상이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언제봐도 신기한 모습에 목마를 탄 아이의 고개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래, 지금처럼 항상 기다려줘야 해. 기다리는 게 힘들어도 꼭 그래야 해. 아빠도… 항상 그랬거든.”

    “…아빠가? 아빠도 엄마의 놀이공원에 와 봤어?”

    “그럼!”

    아빠라는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던 아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를 보고 환하게 따라 웃었다. 아빠도 여기에 와 봤구나! 아이는 새삼스레 엄마의 세상을 돌아보았다.

    푸른 잔디밭 위, 홀로 선 낡은 회전목마. 그건 꽤 쓸쓸한 풍경이었지만 아이가 있음으로써 행복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언젠가 이곳에 있었을 아빠라는 존재의 추억까지 겹쳐진 채로.

    “그리고 아들이 커서 다른 사람의 놀이공원에 놀러 가게 됐을 때, 그때도 그 규칙을 지키면 아빠가 아주 기뻐하실 거야. 그렇게 어디에 있든 그 규칙만 기억하면 아빠랑 함께 있는 거라고, 우리 그렇게 생각하자. 응?”

    “응!”

    이제는 다시 서늘해진 목마 위에서 신나게 다리를 흔들던 아이가 크게 대답했다. 아이는 다시 한번 아빠의 규칙을 되뇌며 손가락을 꼽았다.

    기다려야지. 항상. 먼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그리고 먼저 다가올 때까지. 그럼 아빠가 항상 옆에 있는 거야.

    그것이 기억을 잃었던 아이에게 남아 있던 단 하나의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71

    눈을 뜨자마자 길게 숨을 토해냈다. 정말 오랜만에 꾸는 엄마가 나오는 꿈이었다. 잊고 있던 오래된 추억이기도 했고.

    그 후로도 나는 계속해서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출생신고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란 사실을 말이다.

    엄마를 폭주로 잃고, 미아가 되어 지금의 원장님이 운영하시는 보육원에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미아가 아닌 기아(棄兒)였다. 그래서 국적법에 따라 보육원 원장님이 3일 밤낮을 새워가며 이름을 고민하다 자신의 성을 따서 '서요한'으로 출생신고를 해 주었고, 그때부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가이드와 에스퍼에 대해 배우게 됐을 때, 잃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엄마가 폭주로 돌아가셨던 것이란 사실과 그 충격에 기억을 잃었던 것 모두.

    그때부터 서서히 반에서 겉돌다 반항심을 키웠고, 그러다 연장우를 만났지.

    한꺼번에 밀려드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누워 있던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던 밤나비와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S등급의 가이드라면 당연히 움직이지 않고도 가이딩이 가능했겠지. 엄마가 규칙이라고 강조하던 것 중의 하나를 떠올리며 삐뚜름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딘가 이상했던 그 규칙들이 이 남자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걸 알아냈다고 유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건 오랜만에 꾼 꿈 때문일 수도, 혹은… 눈앞에 이 남자 때문일 수도 있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내가 가진 안전가옥 중 한 곳.”

    “…창문도 하나 없고, 나갈 곳이라고는 문 하나뿐인데…, 내가 지금 감금 상태인 겁니까? 납치돼서?”

    방안을 둘러보며 물은 말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밤나비가 선선히 대꾸했다.

    “그럴 리가. 납치 감금이라니.”

    “…그럼 휴대폰 좀 빌려주시죠. 아는 사람 좀 부르게.”

    여기에 밤나비가 있다고 112에 확 신고해 버려야지. 삐뚤어진 표정만큼이나 삐뚠 마음으로 손을 내미니 밤나비가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없는데. 구치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안 만들었어.”

    빈 주머니를 툭툭 쳐서 가리켜 보이는 모습에 덮고 있던 이불을 거칠게 걷어냈다. 그리고 곧장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린 후 문으로 향했다.

    “그럼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잠겼네요? 그것도 밖에서부터?”

    헛도는 문손잡이를 의미 없이 몇 번 더 돌려보다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돌리니 편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밤나비가 작게 어깨를 추어올린다.

    “밖은 위험하니까.”

    네가 더 위험해 보이는데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침대의 가장자리 부근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와서 앉는 게 어떠니?”

    “…….”

    “어차피 나가봐야 기관에선 또 나랑 내통을 했니, 마니 하면서 잡아두기밖에 안 할 텐데. 그런 의미에서 네겐 여기가 더 안전할 거고.”

    오늘 있었던 일을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밤나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세가 내부의 일을 어떻게 저렇게 잘 아는 거지? 진짜 따로 내통자라도 있나?

    “기관 내부의 일을 왜 나보다 잘 아는 것 같을까요. 제 착각입니까?”

    와서 앉으라는 말을 무시하고 문가에 기대 팔짱을 꼈다. 빈정거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떠보았지만 밤나비는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굳게 닫힌 입매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안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어차피 잡혀있는 신세인데. 무엇보다 그런 걸 얘기해 줄 분위기도 아니고. 시간만 버리는 짓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답을 들을 수 있는 현실적인 것을 묻는 것이 나았다.

    “…너무 늦었다곤 생각 안 합니까? 이제 와 내가 부모가 필요할 나이는 아닌데.”

    “…….”

    보기 좋게 지어져 있던 미소가 드디어 사라졌다. 굳은 표정의 밤나비는 여전히 서른 먹은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젊어 보였다. 대체 몇 살에 사고를 친 거야. 연신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이건 누가 봐도 자식 앞길을 망치는 길인 것 같은데요. 탈옥한 범죄자가 내가 네 아빠란다, 하고 찾아오면 내가 기뻐하기라도 할 줄 알았어요?”

    그 말에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너와 내 관계에 대한 일이라면… 어차피 세가에서도 다 알아. 그래서 그 아래 둘 바엔 데려오는 게 더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짓도 벌인 거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안다고요? 세가에서?”

    놀라서 팔짱을 풀며 몸을 바로 하자, 이번엔 밤나비가 꼰 다리 위로 깍지 낀 손을 올린 채 편하게 앉았다.

    “그래. 나도 모르던 네 존재를 알려준 게 바로 세가니까.”

    “……말도 안 돼.”

    나도 모르던 사실을, 세가에서 먼저 알았다고?

    아니… 잠깐만. 그 전에….

    “내 존재를… 몰랐다고요?”

    “…그래. 몰랐어. 그래서 찾지 않은 거야. 정확히는 몰라서 못 찾은 거지. 만약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찾았겠지.”

    “…….”

    “그러니까 와서 앉으라고 했잖아. 할 얘기가 많아서 계속 서서 얘기하긴 좀 그렇거든.”

    웃으며 자신의 앞쪽을 눈짓하는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피할 일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선뜻 다리가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고민하고 있었다. 저 이야길 들을까 말까 하고.

    이건 이미 안정돼 있는 내 삶을 송두리째 뽑아 흔들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다. 그 앞에서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겁이 났다.

    내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이해하고, 그의 사정을 이해해 버릴까 봐.

    이 상황을, 눈앞에 남자를 인정해 버릴까 봐 겁이 났다.

    “만약… 네가 듣고 싶지 않다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을게. 어차피 네겐 변명일 뿐일 테니까. 대신 위험한 건 사실이니까 잠시만 여기서 지내줄 순 없을까?”

    “…….”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인지 밤나비가 담담한 얼굴로 꼰 다리를 풀었다. 그 언제든 일어날 준비가 된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 끄트머리로 엉덩이를 걸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밤나비도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밤인지, 낮인지, 아니면 새벽인지도 모르게 가늠이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이야기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

    손학경은 아주 강한 가이드였다. 그러나 그 강함을 뽐내고 싶어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우연히 가치관이 맞는 사람들끼리 알음알음 모여서 지내다 갑자기 제정된 E&G 특별법에 대항하여 활동하긴 했지만, 그의 성격상 그저 웃는 낯으로 한발 떨어진 채 방관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강한 가이드인 그의 곁으로는 에스퍼들이 모여들었다. 덕분에 손학경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방관자였지만, 가여운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넓은 오지랖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손학경이 그 가여운 이들에게 해주는 가이딩은 그저 가벼운 가이딩일뿐, 그가 진정으로 걱정하고 챙기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애초에 이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된 원인도 그 사람 때문이었다.

    첫눈에 반해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에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던 것이다.

    “진이야.”

    손학경이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몇몇의 에스퍼들과 모여 이야길 나누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까맣게 흑단처럼 흩어지는 짧은 단발머리가 매력적인 여자는 살짝 치켜 올라간 성격 있어 보이는 눈매를 조금 더 치켜떴다.

    “저게 얻다 대고 진이래? 내가 누나라고 부르랬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다른 에스퍼들을 뒤로 한 채 험악한 기세로 따지러 다가오는 최진이를 보며 손학경은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최진이는 정말 모르는 걸까. 자신이 그녀를 다정하게 부를 때마다 질투로 쏟아지는 저 사나운 시선들을. 그는 가끔 한 번씩 그게 궁금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경고하듯 그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의미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사나운 기세를 뿌리긴 했지만, 사실 최진이는 손학경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그녀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강한 사람이었다. A등급의 바람을 다루는 에스퍼. 그녀가 괜히 블래스트(Blast)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누가 자기가 꼬시고 있는 여자를 누나라고 불러. 멋없게.”

    “이 건방진 어린놈 좀 봐! 젖내 나는 어린애가 꼬시긴 누굴 꼬셔. 꼬신다고 넘어는 가고?”

    “응. 이미 반쯤 넘어온 것 같아서 힘내고 있는 중인데?”

    “…죽을래?”

    “아니. 살래. 진이랑 오래오래 살아서 백년해로할 거야.”

    손학경이 다가온 최진이의 팔에 억지로 팔짱을 끼며 귀엽게 방싯거렸다. 그러자 날카롭게 성질을 부리던 최진이가 질린 표정을 짓다 기운 빠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하루 이틀 있었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 좋다는 애들도 많잖아. 근데 왜 나한테 이러냐고.”

    “내가 좋다는 건 너 하나뿐인데? 나 좋다는 애들이 많든 적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 혹시 질-.”

    “시끄러! 그 말,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해? 날려버린다, 진짜.”

    날려버린다는 최진이의 단골 협박 멘트였다. 물론 협박으로만 끝나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정말로 짜증 나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바람으로 날려버리곤 했으니까. 괜히 블래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손학경은 전혀 겁먹은 기색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처음 따라다닐 땐 몇 번 날아가기도 했는데, 근래 들어서 진짜 날려진 적은 없었다. 그게 최진이의 마음이 점차 열리고 있기 때문임을 아는 손학경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말은 사납지만, 행동에서 따뜻함이 묻어나는 사람.

    손학경에 눈에 비친 최진이는 그랬다. 그래서 2년을 넘게 따라다닌 끝에 사귀게 되었고, 청혼도 했다. 오성파라는 중립성향의 반정부 단체가 커가는 중이라 눈 돌아가게 바빴지만, 손학경의 제1순위는 언제나 최진이였고, 그것에 단 한 번도 소홀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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