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49)

“야.”

절절 끓는 목소리를 내는 놈의 말을 끊으며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놈의 팔을 잡고 몸을 떼어냈다. 그제야 그 보기 힘들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근데… 얘 얼굴이 왜 이래?

“연락은 죄다 씹던 놈이, 얼굴은 또 왜 이래? 다 상했잖아!”

“…요한은요? 요한은 괜찮아요? 다친 데는요? 내가, 내가 늦어서….”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게 질린 놈이 바르르 입술을 떨며 애처로울 만큼 눈썹을 떨었다. 곧 울 것처럼 찌푸려진 얼굴로 이곳저곳을 살피는 불안정한 눈을 보며 까칠하게 살이 내린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아니, 볼 거라곤 얼굴뿐이던 놈 얼굴이 왜 이러냐고!

“밥은 먹고 다녔냐?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상했어?”

“나 말고, 요한요. 좀 봐요. 어떤 새끼가 손댔어요? 털끝 하나라도 다쳤으면, 다 죽여버릴-.”

불안정한 얼굴로 내 몸을 살피며 무서운 소릴 내뱉는 놈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렇게 서로 안부만 묻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문밖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수도 심상치 않았고.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으니까.

“나는 괜찮아. 털끝 하나 안 다쳤어. 누가 연락이 안 돼서 속 좀 끓이던 거 외엔 아주 멀쩡해.”

“……요한. 다행이에요. 정말….”

얌전히 입이 막힌 채 얘길 듣던 놈이 다시금 어깨를 끌어안아 오며 가늘게 목소리를 떨었다. 시간이 없음에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어 어깨에 얼굴을 묻은 놈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는데, 그 등이 잘게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응? 잠깐만….

“너… 울어?”

“…….”

“…아니지? 뭐 이런 일로 울겠….”

누가 이런 일로 우나 싶어 장난스럽게 내뱉으려던 말이 끝맺지 못한 채 입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든 놈의 눈가가 발긋하게 물든 채 젖어있었다. 물기에 젖어 엉망으로 엉킨 긴 속눈썹을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니, 씨발, 뭐, 뭐 이런 거로 울고 난리야? 이, 이게 울 일이야, 어?

“어… 야, 그, 우, 울지 말고, 나는 괜찮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아, 울지 말라고!! 울지 마!!”

“…요한….”

“야, 야야, 울지 마, 울지 말라고! 나 지금 되게 당황하고 있는 거 보이지? 응? 자, 뚝 해! 얼른! 나이 스물 넘은 남자가 이런 일로 우는 거 아니다? 응? 남들이 흉본다고!”

“요한, 미안해요. 내가 좀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는데…. 요한이 이런 일이나 당하게 하고, 내가 바보 같아서….”

“바보든 등신이든 울지 말라고! 얼른 뚝 안 그쳐? 죽을래, 진짜?”

너무 당황스러우니 나야말로 등신에 천치가 된 것 같았다. 우는 놈한테 죽을래? 라는 말이나 해봐야 더 울뿐인 걸 왜 몰랐을까. 또륵또륵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놀라 주변을 살피며 소매를 잡아당겨 얼른 볼을 훔쳤다.

“울지 마. 난 괜찮으니까 울지 말라고. 속상해 죽겠으니까, 그만 울라고. 나 속상한 건 너도 싫을 거 아냐.”

달래려고 나온 진심에 그제야 한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참아보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쉰다. 근데 그래 봐야 붉어진 눈가 하며, 열이 올라 발긋해진 뺨은 감출 수가 있나. 그리고 우는데 입술은 왜 더 붉어져? 미친 거 아냐?

씨발씨발 하는 욕 외엔 생각나는 게 없다. 그렇다고 마냥 그러고 있을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문밖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으니까.

“태화야, 시간 없어. 나 봐. 세가 민영화 법안이며, 기관장 관련으로 터진 기사들, 다 네가 벌인 게 맞아?”

“……네.”

한태화가 양 뺨을 내어준 채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이 코찔찔이가 벌인 일들이었다고? 그게 전부?

…이 새끼 대체 정체가 뭐야?

“기사는 그렇다 치고, 법안은 어떻게 발의한 건데?”

태화그룹과 관련된 언론사가 한, 두 개일리 없으니 그건 그렇다고 쳐도, 대체 그 여당 의원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설득한 거란 말인가? 진짜 로비라도 했나?

설마… 또 내 돈 갖다 썼어? 네 돈은 내 돈이라니까?!

“외할아버지가 여당 쪽 4선 의원이셨어요. 외삼촌도 지금은 장관 자리에 계시는데 그거 끝나면 정치권으로 넘어가실 예정이고요. 제가 가서 도와달랬을 땐 다리만 놔주면서 쪼금 도와주더니 엄마가 외할아버지랑 외삼촌 불러서 앉혀놓고 울고불고하니까 바로 법안부터 준비시키던데요?”

“…….”

코찔찔이가… 어마어마한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인다. …사모님이… 유명 정치 가문 따님이셨구나. 그래…. 넌 정말 다 갖고 태어났구나.

가이드 보는 눈만 빼고.

“법안 발의며, 기관장 행적 파느라 잠깐 눈을 뗀 사이에 그 여자가 이런 일을 벌인 거예요. 겁도 없이…. 그 꼴을 당하고도 또 요한한테 손을 대다니 정말 머리가 나쁘네요, 그 여자.”

“…….”

“경고만 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일을 좀 더 재밌게 벌여봐야겠어요.”

말을 마친 한태화가 코를 훌쩍이며 살짝 붉어진 코끝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더니 아직도 젖어있는 눈가를 손등으로 슥슥 문질러 닦기도 했다.

기관장은 알까? 자신이 저… 코맹맹이 소리나 내는 놈한테 당했다는 걸? 아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나라면 다 때려치우고 속세를 떠나 산으로 숨어들었을 거다. 저런 놈한테 당한 게 허탈하고 짜증 나서.

아직도 문 근처로 사람이 다가오면 무섭게 이는 불기둥을 바라보며 다시 한태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신은 이런 놈에게 모든 걸 다 줬단 말인가. 대체 왜? 나한텐 더럽게 조금 줘 놓고?

“진짜 민영화라도 하게?”

그 물음에 연신 젖은 뺨을 닦아내던 놈이 맹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데…, 이건 내 속만 터진다. 와-.

“언젠가는 하겠죠. 추세가 그러니까. 그렇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예요. 이번 정권은 세가를 놓치기 싫어하거든요. 외국에서 하도 민영화를 해대니까 그런 얘기가 잠깐 나온 거지, 정부 쪽에서 세가를 쉽게 놔 줄 리가 없어요. 힘의 상징이니까. 그러니 법안이 발의된들 통과될 리도 없고요. 태화그룹 쪽도 국제법에 따른 운영 방향을 정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아직 준비가 안 돼 있어서 힘들고요. 이번 거는 일단 민영화의 초석을 다지는 걸 겸해서 판을 세게 흔들어 기관장을 새로 세우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 판을 흔드는 계략을 이 코찔찔이 울보가 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긴 저 꼴을 보면 누가 그걸 믿을까.

“…그럼 새 기관장은 누구로 하려고?”

그 물음에 울어서 발긋해진 얼굴로 맹한 얼굴을 하고 있던 놈이 사르르 녹을 듯 미소를 짓는다. 눈가를 가늘게 접어 눈웃음까지 쳐가며.

“요한이 할래요?”

“…미쳤어?”

“왜요? 요한은 일도 잘하고, 책임감도 있고, 사고도 유연해서 분명 잘-.”

“태화야.”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헛소리를 길게 늘어놓는 놈의 말을 끊으며 깜박깜박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는 귀여운 붕어 대가리의 뺨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예?”

“나 권력자 되게 좋아한다.”

#68

“……예?”

“나 뒤에 무슨 무슨 '장' 같은 글자 붙은 사람 되게, 무척, 매-우 좋아한다고.”

“…….”

“나는 그런 사람이 전속 가이드 계약 맺자고 하면 너무 매력적이라서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계약서에 바로 사인할 거야.”

깜박깜박, 이해가 느린 듯 깜박이던 눈이 잠시 후에야 크게 따지며 작게 입술이 벌어졌다. 천천히 기쁨이 차오르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강조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다녀와. 나는 잘 버티고 있을 테니.”

“…요한.”

“내가 누구한테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넌 네 할 일 하러 다녀오라고. 응? 덕분에 나도 찌그러진 인생 좀 펴진 채 살아보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한태화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탓에 손바닥 안으로 문질러지는 보드라운 뺨의 감촉을 느끼며 힐끔 문 쪽을 살폈다. 시간이 없어도 이를 건 일러야지.

“그 여자가 막 지원 3팀 해체 시켜 버릴 거라고 협박했어.”

“……예?”

“대드니까 사회생활 못 하는 것 같다고, 말이나 잘 들으란 식으로 꼽도 주고 그랬다?”

“…….”

“지금 네가 흔드는 판이 안 먹히면 내가 무척 곤란해질 거란 의미야. 나 진짜 기관에서 월급 받아 가면서 오래, 길게 일하고 싶거든? 팀장직도 달아야만 하고.”

얌전히 입을 다문 채 말을 듣던 놈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봐야 이제 막 울음을 멈춰 발긋해진 뺨에 바보 같아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뭐, 내 눈에만 예쁘면 되는 거니까.

그런 마음으로 물기 어린 예쁜 눈을 보며 내도록 마음에 걸렸던 것들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엔 민망해서 못할 말들이었다.

“널 못 믿은 건 미안해. 네가… 나는 생각해 줄 수 있겠지만 지원팀까지 생각해서 움직여 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서 그랬어. 나한테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라,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그랬던 건데…, 근데 나도 네 손 놓을 생각은 없었어. 그게 내 생각만큼 쉽지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놓고 싶었지만,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고. 그 말을 꼭 전해주고 싶었는데, 놈은 용케 알아들었는지 드물게 진지한 얼굴을 해 보였다.

“방금 이거… 시간을 준 거에 대한 대답이에요?”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문 근처로 까맣게 몰려든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로 이런 분위기에서 그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쑥스럽고, 아까워서 나도 아직 입 밖에 내 본 적 없는 말이니까.

“그건 다음에. 다음에 제대로 대답할 게. 일단… 저거부터 해결하자.”

눈짓으로 문가를 가리키자 한태화가 따라서 시선을 돌리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마요, 저 혼자 온 거 아니니까.”

“어? 누가 또 왔어?”

“그냥 뭐, 도와줄 사람이요. 그보단… 요한.”

“응?”

“기다릴게요. 간절한 마음으로, 요한 대답을 기다릴 거예요. 그것만 꼭 알아줘요.”

“……그래.”

“금방 올게요. 사랑해요.”

남은 아끼고 아껴둔 말을 너무 당연하게 내뱉는 모습을 보며 답을 못하고 쓰게 웃기만 하자 녀석이 이해한다는 듯 옅게 웃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턱을 쥐고 뺨에 입을 맞췄다.

응? 하고 놀라 눈을 크게 키우는데 갑작스러운 기습 뽀뽀를 날린 놈이 여유로운 얼굴로 천천히 상체를 세운다. 입술이 닿았던 뺨을 감싸 쥐고 멍하니 놈을 올려다보다 천천히 문가로 고개를 돌리니 여러 쌍의 눈들이 휘둥그레져 있는 게 보인다.

아… 미친. 야 이 미친 한태화야.

절망스러운 심정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아, 쪽팔려….

“나는 이 상황이 많이 유감스러워요.”

나를 두고 돌아선 놈이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가며 혼잣말인 양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문의 흔적만이 남은 곳을 훌쩍 넘어갔다. 더이상 불길이 치솟는 일은 없었다. 한태화는 그대로 당당히 걸어나가 그대로 맨 앞에 서 있던 중년 남자의 한쪽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중년 남자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줄은 잘 서야죠. 이팀장님. 그 줄을 옮겨타라고까진 안 하겠지만, 적어도 양쪽 줄을 공평히 타야 무사하지 않겠어요? 이제 막 감찰팀 팀장 다신 분이, 일찍 내려가면 팀원들도 얼마나 혼란스럽겠어요. 그죠?”

한태화가 모여든 사람들을 돌아보며 극적으로 환하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도 문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웅성대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때 누군가 얼어붙은 사람들을 가르고 앞으로 나섰다.

“아, 진짜 좀 비켜보라니까요!”

“왔어?”

“그래, 왔다. 너는 형한테 주소 하나만 �� 찍어 보내고 싶디?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 줄 알아? 클라이언트도 돌려보내고 부랴부랴 왔다고!”

무서운 기세로 따져오는 말에도 한태화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더니 나를 보고 손이나 흔들어댔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등장한 사람의 모습에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한태현이라고 했던가? 진성현을 데려왔던 그 남자였다. 한태화의 형이기도 했던. 근데 그 사람이 여긴 왜….

아오씨, 하고 길게 한숨을 내뱉던 한태화의 형은 이내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느라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더니 나를 똑바로 보고 걸어와 곁에 와서 섰다. 그리고 잠시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다가 진지한 얼굴로 감찰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여기 담당자분이 누구십니까?”

그의 물음에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던 중년 남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접니다. 그러는 분은 누구십니까? 기관 내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이미 한태화의 형임이 다 드러난 판에 소개가 늦다니? 어이가 없어 고개를 들어 한태현을 살피는데, 그가 씩 하고 웃으며 상의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그대로 책상 위로 올려두었다.

“H&S 법무 법인의 대표이사이자 태화그룹의 고문 변호사인 한태현이라고 합니다. 세가 법무팀의 외부 고문직도 겸하고 있죠. 기관 내 사람은 아니어도 이만하면 설명이 된 것 같은데.”

“…….”

“그래서, 제 의뢰인인 서요한씨를 무단 감금하고 강요에 의한 자백을 받아내려고 하고 계신 분이 누구라고요?”

조사실 안으로 싸늘한 기류가 흘렀다.

아무도 말이 없는 곳에서 혼자서만 발랄하게 손을 흔들고 있던 한태화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믿을게, 형.”

그 한심한 말에도 한태현은 믿음직스러운 형의 얼굴로 한태화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나만 쪽팔려 죽을 것 같은 건가. …또 소문나겠네. 이번엔 뭐려나. 서달기의 반란? 자리 재탈환? 뭐가 됐든 참… 씨발스럽구나.

누구야. 누가 한태화한테 나 여기 있는 걸 알렸어?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진짜.

빈 의자에 올려놨던 상원이의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 쓰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쪽팔려서 살 수가 없다, 정말.

***

이후 조사가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감찰팀 팀장으로 밝혀진 중년 남성이 입만 열었다 하면 한태화의 형이 득달같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한태화의 형은 온갖 형사법을 끌고 와 적부심 청구가 어쩌고, 강요죄가 어쩌고를 들먹였고, 덕분에 나는 입도 떼지 않은 채 얼마후 감찰팀에서 풀려났다.

그렇게 감찰팀 조사실이 있던 별관 건물을 나와 집으로 가려는데 주차장 쪽에서 차를 끌고 온 한태현이 내 앞에 차를 세우고 보조석의 창을 내렸다.

“타세요. 혼자 보낸 거 알면 태화가 가만 안 있을 거라서요.”

“…저는 그냥 택시 타고….”

“저 진짜 태화한테 혼나요. 택시 타시면 그 뒤를 쫓아갈 건데 굳이 서로 번거로울 필요 없잖아요.”

“…….”

…스토커야? 택시를 왜 따라와. 난감한 기색으로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살피는데, 사람 좋게 웃으며 빤히 쳐다보던 남자가 어서 타라는 듯 상체를 굽혀 보조석 쪽의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 나오는데 달리 댈 핑곗거리도 없었다.

“타세요. 제가 태화랑 약속한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럼, 실례 하겠습니다.”

결국 보조석에 올라타며 차 문을 닫자 한태현이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며 주소를 물어왔다. 안전벨트를 당겨 매며 사옥 아파트의 주소를 불러주자 이내 경로가 탐색 된다는 알림음과 함께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렇게 잠시, 도로를 달리고 있는 차 안에선 말이 없었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창밖만 죽어라 노려보고 있다가 분위기를 풀어볼 겸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화랑 무슨 약속을 하셨습니까?”

궁금한 것부터 묻자 한태현이 난처하게 웃으면서도 선선히 대답했다.

“아, 서요한씨가 안전해질 때까지 끝까지 책임지기로요. 자기 대신이라고 특별히 믿고 맡긴다고 어찌나 성화던지. 안 지켰다간 큰일 날 분위기던데요?”

“…형제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익숙한 길의 도로로 접어든 것을 무심히 살피며 가볍게 묻자 한태현이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좀 유별나죠? 저도 압니다.”

“…좀, 유별나긴 하시네요.”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이라 워낙 예뻐하기도 하고, …미안한 것도 많아서요. 제가 많이 잡혀 삽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돌아보는 한태현을 힐끔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돌리며 입을 다물었다. 스치듯 한번 본 사람을 편하게 대할 만큼 좋은 넉살을 가지지 못한 탓에 어색하게 입을 다무는 데도 한태현은 살갑게 말을 이어갔다.

“일전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 후로 태화한테도 혼나고, 어머니한테도 엄청 혼났어요. 저 스스로도 반성을 많이 했고요.”

“아…. 저야말로 죄송하죠.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고 나와서요. 예의도 없었고. 제가 더-.”

얼마 전 있었던 삭막했던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사과를 하려는데, 그보다 한태현의 말이 빨랐다.

“아닙니다. 손님을 불러놓고, 저희가 너무 배려가 없었죠. …태화 일에서 한걸음 물러선다고 그렇게 다짐을 해 놓고도 결국 또 제자리걸음이기도 했구요. 제 실수가 맞습니다.”

“…….”

그 단호한 인정과 사과에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면서도 작은 궁금증이 일었다. 태화 일에서 한걸음 물러난다는 게 무슨 말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걸 또 깊이 파고들기엔 오늘 두 번째 본 낯선 사람이라 그저 입을 다물고 말자 한태현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헤프네, 이 사람.

#69

“안 물어보세요? 방금 제가 듣기에 따라선 되게 이상하게 들릴 소리를 했는데.”

“음, 물어도 되나 싶은 주제기도 하고, 대충 무슨 얘긴지도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요.”

“태화한테 뭐 들은 얘기가 있으신가 보네요.”

“아뇨, 태화한테 들었다기보단… 전에 따로 한번 회장님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대강 사정을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요? …하여간 노인네가 태화 일만 관련되면 빠르다니까.”

한태현이 나직이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모르는 척 입을 다물자 잠시 고민하듯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말이 없던 한태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다 들으셨겠네요. 저희가… 기관에서 태화를 강제 가이딩 하던 걸 내내 묵인해 왔다는 사실을요. 뭐, 저희도 계속해서 진성현을 불러다 같은 짓을 하기도 했고요.”

“…예, 뭐.”

그건 한태화로부터 들었다. 기관에서 가족들을 매수해 마취총까지 써가면서 강제 가이딩을 했다고. 그러나 굳이 그 설명까지 필요할 것 같진 않아서 대답만 하고 말자 한태현이 쓰게 웃으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어요. 그건 태화가 바라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과 우리 욕심에 태화가 고통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서…. 그래서 사실 서요한씨의 등장이 무척 놀라우면서도 반가웠습니다. 아직도 좀 꿈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난번 같은 실수도 한 거죠. 눈앞에 나타난 기적을 믿을 수가 없어서.”

“…기, 적까지는…. 너무 거창한데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릴 줄 알았던 한태현은 웃기는커녕 진지한 얼굴로 잠시 돌아보다 단단히 표정을 굳혔다.

“아뇨. 저희 가족에겐 서요한씨가 기적 그 자체입니다. 아까도 태화가 진심으로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데…, 그 웃는 모습을 제가 지금 몇 년 만에 본 건지 모르겠네요. 평범한 사람처럼 울고, 웃고, 화내고, 이런 걸 대체 얼마 만에 본 건지…. 아까 제 심정이 어땠는지는 저희 가족들만 알 겁니다. 집 들어가서 얘기해 줘도 믿어 줄지나 모르겠어요.”

내내 굳은 얼굴로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던 한태현이 마지막에 가서야 웃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내가 굳어 있자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그 억지 미소를 바라보며 난감하게 눈을 굴리다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만나면서부터 어리광을 부리며 치대 온 녀석이 떠올라 진짜 우리가 동일인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온도 차는 뭘까. 이쯤되면 거의 동명이인 아냐?

문득 팀장님과 한태화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느끼던 괴리감이 떠올랐다. 그분이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집에 가셔서는 아무 말 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쪽팔려 하는 태도가 웃겼던지 억지 미소를 짓고 있던 한태현이 멈칫하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피식대던 한태현은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 모습을 보고 나니까 이제야 정신이 확 드네요. 사람이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거죠. …감사합니다. 태화에게 곁을 허락해 주셔서요.”

어… 음. 한태화의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이런 기분이 든다. 내가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 스스로가 진짜… 한태화의 기적이라도 된 것 같은 우쭐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건 평생 좋은 건 가져 본 적 없는 내겐 정말 생소한 감정이라 매번 당황스러웠다.

내가 누군가보다 우월한 무언가를 갖고 우쭐대 본 적에 있어야지. 난처하게 손으로 입매를 가리며 익숙한 동네에 들어선 것을 확인한 뒤 어디서 내리면 좋을지를 고민했다. 이 분위기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 허락이란 표현은 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태화, 아니, 한태화씨는… 음, 제게도 분에 넘치게 좋은… 분이라서요. 오늘도 이렇게 제게 일이 생기자마자 달려와 줬고요. 저야말로 한태화씨에 비하면 많이 부족해서… 가족분들께도 죄송하죠.”

어느 가족이 D등급 보조 가이드를 달가워할까. 자꾸 일반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한태화의 가족들이 부담스러워 조심조심 그렇게 대답하는데, 잠시 동안 말이 없던 한태현이 운전 중인 앞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서요한씨가 태화랑 오래도록 잘 지내주셨으면 좋겠네요. 진심입니다.”

“아, …네. 감사합… 아, 요 앞에 횡단보도 앞에서 세워주시면 됩니다.”

맞은편에 나타난 사옥 아파트 단지 입구를 보며 손으로 앞쪽 횡단보도를 가리키자 한태현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태화는 사모님을 닮았지만 태화의 형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닮은 짙은 이목구비라 형제간 닮았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그 찌푸려진 눈매는 딱 한태화였다. 그래서 좀 신기한 기분으로 한태현의 얼굴을 힐끔댔다.

“아파트 단지 앞에 내려드릴게요.”

“아뇨. 제가 사는 데가 사옥 아파트라 이 차에서 내리면 또 어떤 소문이 돌지 몰라서요. 한태화씨랑 다니는 것만도 충분히 시선을 끌고 있는데, 여기에 소문이 더 보태지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습니다.”

분명 누가 보면 또 서달기가 웬 비싼 외제차에서 모르는 남자랑 내렸다며 엄청난 살이 붙은 소문이 돌 것이다. 진저리를 치며 질색하자, 한태현이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횡단보도를 지나 바로 차를 세웠다. 멈춘 차에 얼른 안전벨트를 풀며 한태현에게 다짐을 받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 내리지 마시고 들어가 보세요. 집도 바로 요 앞이라 태화와의 약속도 지킨 거니까요. 그럼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막 안전벨트를 풀려던 한태현이 고민하는 얼굴로 돌아보다 내 감사 인사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예. 태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얼른 차에서 내려 보조석 창문을 통해 인사를 한 번 더 해 보이자 한태현이 찝찝하다는 눈으로 빤히 쳐다본다. 그러나 내 결심이 선 얼굴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렇게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태현을 배웅하다 붉은 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 섰다.

어느새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지나다니는 차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조명 좀 켜지. 관리비는 있는 대로 받아 가면서. 어두운 아파트 단지 입구의 모습에 작게 혀를 차며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옆으로 다가와 선 인기척에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인가 하고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던 나는 멈칫하며 몸을 굳혔다.

“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미친….”

눈앞에 한쪽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은 가볍게 흔들고 있는 샐러맨더가 서 있었다. 그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에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오성파의 주요 핵심 멤버 중의 하나인 김동원. 며칠 전 밤나비와 함께 구치소를 탈옥했던 남자가 내 앞에 서서 산뜻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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