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49)
  • “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쉽게 따라와 주는 남자가 고마워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씁쓸한 표정의 김재상도 지난번엔 정말 감사했다고 인사를 해오며 얼추 자리가 마무리돼가고 있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 놨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차수혁: 형, 어디서 볼까요? 오전 11:51]

    [1층 로비에서 봐 오전 11:52]]

    차수혁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한 뒤 빠르게 답장을 보내면서 먼저 일어난 김재상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한발 앞서 문을 열고 나가던 김재상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계약 해지 합의서는 서요한씨 쪽에서 준비해 주시고, 준비가 끝나면 제게 연락을 주세요. 그때 만나서 인사팀으로 같이 제출하는 걸로 하죠.”

    “예, 그러죠. 다시 한번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지난번엔 신세를 많이 졌-.”

    “요한 형?”

    “…어? 차수혁?”

    공룸이 들어서 있는 긴 복도를 빠져나와 계단으로 향하고 있는데, 맞은편 복도에서 급하게 나오던 사람이 아는 척을 해왔다. 말이 끊긴 김재상과 함께 시선을 돌렸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청산팀 사무실이 3층에 있었다는 걸.

    멀뚱히 선 수혁이의 뒤편으로 보이는 청산팀 사무실의 푯말을 살피다 아직도 놀란 얼굴을 하고 수혁이를 쳐다보았다. 급하게 나오며 상의를 꿰어 입고 있던 녀석은 놀란 얼굴 그대로 나와 옆에 선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우리가 선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놈의 얼굴이 공룸 복도를 향하는 순간 무표정하게 변했다. 그 모습에 난처함을 느끼며 입가를 손으로 감싸는데, 험악하게 낯빛을 바꾼 수혁이가 별안간 무서운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야. 왜 저렇게 무섭게 오는-.

    “어?”

    “…….”

    “…괜찮으세요, 요한씨?”

    갑자기 다가온 수혁이가 팔을 잡아 제 뒤로 끌면서 김재상과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녀석이 서 있는 방향으로 몇 걸음 끌려가던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나 금세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가며 잡아주더니 낮은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온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나를 감싼 채 앞을 버티고 선 수혁이는 제 앞에 선 김재상 에스퍼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처음엔 당황해하던 김재상도 금세 담담한 얼굴로 차수혁을 마주 보더니 태연히 내 안부를 물어왔다. 그러고는 괜찮다는 답을 듣자마자 수혁이를 마주 노려본다.

    뒤에 서서 상황을 살피고 있던 나로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왜 지들끼리 눈싸움을 하고 난리야? 내 에스퍼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엄한 놈들 둘이서 나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에 황당함을 느끼고 입을 벌렸다. 어이없네, 진짜.

    그렇게 짜증 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다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모든 게 다 귀찮다. 그렇게 머릿속을 비우고 나니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어디 있냐, 한태화야. …보고 싶다.

    ***

    무슨 오해를 어떻게 했는지 계속해서 김재상을 노려보는 차수혁을 끌어다 뒤로 물리며 김재상에게 먼저 들어가시라 인사를 했다. 그러자 선선히 웃으며 물러난 김재상은 ‘인기가 많으시네요.’라는 개소리를 내뱉으며 자리를 비켜줬다.

    그렇게 혼자 씩씩대고 있는 수혁이를 끌고 1층 야외 주차장 한편에 마련된 흡연 장소로 갔다. 내려오는 내내 아무 말이 없던 놈은 내가 담배를 꺼내자마자 거친 손길로 담뱃갑을 휙 하고 낚아채 가더니 제가 먼저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아까부터 지가 왜 지랄이야? 저게 지가 차였었다는 사실을 또 까먹었나 보다.

    당황과 짜증이 함께 떠오른 얼굴로 놈을 바라보다 도로 담뱃갑을 빼앗아와 새 담배를 하나 꺼내 무는 사이, 길게 연기를 뿜어낸 녀석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린다.

    “아까 그 새끼가 임시 가이드 발령받은 상대예요? 근데 벌써 가이딩까지 해줬어요?”

    담배에 불을 붙이다 슬쩍 시선만 들었다. 어쭈? 어째 말투가 거칠다? 그게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헛웃음이 났다.

    “…너, 나 취조하냐? 말투가 영 불손하네? 내가 굳이 대답해야 할 필요성이 안 느껴지는데.”

    “요한 형!!”

    “귀 안 먹었다. 작게 말해. 그리고 어디서 자꾸 성질이지, 이게?”

    작작하란 의미로 짜증스럽게 몇 마디 내뱉자 그제야 한 꺼풀 가세가 꺾인 놈이 불만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리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숙인다. 그럼에도 불만스러운 목소리는 여전했다. 아주, 누가 보면 지가 내 에스펀줄?

    “아까 그 상황 뭐냐고요. 한태화랑 임시 계약 해지했다는 소문은 또 뭐고.”

    “…….”

    “형 설마… 한태화랑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나는 거예요? 다른 에스퍼랑 가이드 계약이라도 하게요? 그럼 적어도 다음 순서는 저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뭐, 또 이상한 소문이 도나? 이번엔 무슨 소문이 어떻게 돌고 있는 건데?

    “야,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왔길래 자꾸 헛소리를-.”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리죠? 태화랑 헤어지다니…. 요한아, 정말이니?”

    오늘따라 왜 자꾸 의외의 인물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는 걸까.

    갑자기 뒤에서 등장한 한태화 어머니, 그러니까 사모님의 모습에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피우고 있던 담배를 끄며 달려갔다.

    “여, 여긴 어떻게-.”

    “…네가 김비서에게서 내 연락처를 받아 갔다고 들었는데, 기다려도 연락이 없길래 걱정돼서 와봤지. 근데… 방금 그게 무슨 소리니? 태화랑 헤어지다니?”

    아. 차라리 빨리 연락드릴걸. 고민하느라 연락이 늦어진 사이에 이런 일이…. 그것도 하필 이런 타이밍에….

    “아니, 저, 그게-.”

    “너희 둘… 싸웠니?”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 싸운 건 맞는데, 그게 사정이 좀….”

    미치겠네? 상황이 왜 이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뒤에 서 있던 차수혁이 슬그머니 나섰다.

    “요한 형? 이분은 누구…?”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차수혁을 보며 나는 얼른 절박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야! 너까지 나서지 마! 제발!! 그러나 이쪽으로 오지 말라는 내 신호를 못 알아먹었는지 개만도 못한 눈치를 가진 수혁이가 어른 앞이라고 담배를 끄면서도 경계심을 세운 얼굴로 기어이 다가와 뒤를 지키듯 버티고 섰다.

    그리고 사모님은 커다란 덩치를 가진 수혁이를 경계하는 얼굴로 올려다보다 슬쩍 그 앞에 선 내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 연약한 힘은 내가 두어 걸음 따라가자마자 뒤에서 반대편 팔을 붙잡아 온 수혁이에 의해 막혔다.

    “…….”

    “…….”

    그렇게 서로 영문 모를 얼굴을 한 채로도 내 양팔을 잡고 물러나지 않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망했다는 심정으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진작 교회든, 절이든 갈 걸. …제발 이제 저 좀 품으로 귀의시켜 주시면 안 되나요?

    없는 신이라도 찾아보고 싶은 간절한 순간이었다.

    #63

    바람피우던 현장을 아내의 친정어머니께 들킨 사위의 심정을 아는가?

    나는 이제 알 것만 같았다. 그 죄인이 된 심정을.

    “뭐… 드시겠어요?”

    “…좀 놀라서. 캐모마일 티가 좋겠구나.”

    “…예에….”

    불편한 마음에 대답을 길게 늘이며 얼른 계산대로 가서 커피와 캐모마일 티를 시켰다. 어렵지 않은 주문에 금방 나온 커피와 티를 트레이에 올린 채 자리로 돌아오니 고운 자세로 앉아 계시던 사모님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 시선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공손히 앉아 차를 권했다. 그러자 생각의 잠긴 얼굴로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사모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아니야. 주차장에서 내려서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누가 큰소리로 네 이름을 부르길래 거기 있나 싶어서 갔어. 그러다 듣게 된 거고. …태화랑 싸웠니?”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저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의미로 고개만 끄덕이며 죄인 된 심정을 느끼던 나는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게도 단 한 번 본 분이었지만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어 저절로 말을 고르게 된다.

    “그게… 싸우긴 했는데, 좀 애매해서요.”

    “…무슨 일인지 알려주면 안 될까? 내가 나서는 게 싫으면… 아무 말도 안 해도 되긴 해. 근데 걱정이 돼서…. 태화가 뭐 잘못했니?”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태화는 잘못한 게 없어요.”

    아니, 아예 잘못이 없진 않지. 삐쳐선 연락도 없는 새끼니까. 근데 그런 자잘한 문제로 앞에 계신 분께 걱정을 안겨 드리긴 싫었다. 그래서 아니라는 의미로 강하게 부정하자 사모님이 안도하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다행이구나. 그럼 혹시… 네 문제야? 아까 그 차수혁이란 사람과 관련된?”

    “아닙니다!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수혁이랑도 아무 관련이 없고요!”

    “그럼 왜… 태화랑 가이드 계약을 해지했을까?”

    “아… 그게….”

    최대한 머리를 굴려 이 상황을 설명할 말들을 골랐다.

    사실 팀원들에게 말했던 방법으로 고자질하겠다던 상대가 바로 사모님이었다. 나는 힘이 없고, 그런 내게 힘을 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가장 처음 떠오른 분이 이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따뜻한 품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품으로 안아주셨던 분이니 내 곤란한 상황도 도와주시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이전에 회장님의 비서라던 사람에게 받았던 명함을 찾아 연락을 했다. 사모님의 연락처를 좀 알려 줄 수 있겠냐고.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그는 선뜻 연락처를 줬는데, 정작 내가 그 연락처를 받고도 좀 오랫동안 고민했다. 이래도 되나 싶어서.

    그러니 사실 지금 이건 기회라고 볼 수 있었다. 제대로 고자질할 수 있는 기회. 그저 상황이 조금… 예상과는 달라서 망설이고 있을 뿐이었다.

    “해지 계약은…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니?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니?”

    “제가… 제 주변을 지킬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요. 그래서 해지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뭐?”

    “도움을 요청할 만한 분이 달리 안 떠올라서요….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놀란 얼굴로 굳어 계시던 사모님이 나를 빤히 바라보셨다. 그러다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던 내 손을 잡고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누가 널 괴롭혔어? 누구니, 그 사람.”

    그러니까 인자하긴 한데, 온기가 하나도 없는, 만들어 낸 것 같은 그런 인자한 웃음이었다. 마치 화가 난 한태화가 억지로 미소 지을 때와 같은…. 역시 참 많이 닮은 모자다.

    익숙한 그 미소를 따라 웃음을 지으며 이제껏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신나게 일렀다. 세가와 기관장이 한 짓에 대해. 어차피 한태화가 다 알고 찾아간 마당이니 입조심하라던 기관장의 충고는 이미 어긴 셈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그 충고가 무서울 리 없었다. 그보단 기관장이 정말 지원 3팀을 없애기 전에 먼저 나서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입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일렀다. 마치 ‘엄마 쟤가 나 때렸어-.’ 라고 이르는 어린애처럼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듣고만 계시던 사모님께서는 그 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기관장이 우리 태화를 움직이려고 만만한 널 협박했단 소리구나. 그렇지?”

    ‘예, 바로 그겁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최대한 슬프고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우리 요한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대신 혼내줘야겠다. 그치?”

    “그럼 저야 너무 감사…, 저…, 음.”

    신나게 고개를 흔들며 대답하다 멈칫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그만큼 살벌했다. 사모님의 분위기가….

    작게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였다. …예상보다 정도가 과한데?

    “널 건드렸어? 차라리 태화를 건드렸으면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내버려 뒀을 텐데…. 만만해 보였나 보다, 우리 요한이가. 근데 요한아, 이런 건 초장에 기를 잡아야 하거든. 우리 착한 요한이야 이런 걸 잘 모르겠지만.”

    “…….”

    착한… 예? 누가요?

    내가 절대 착하지도 않거니와, 사모님의 저 말이 뭘 뜻하는 건지도 모르지 않는 눈치를 가졌다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입을 벌린 채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다 좋았다. 예상처럼 흘러가는 상황은 좋았는데… 사모님의 반응은 예상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럽게 입만 달싹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모님은 태연하셨다. 화가 나신 듯 차가운 태도도 여전하셨고.

    “사실 내가 태화가 저렇게 되고 나서부턴 정말 착하게 살았거든? 그럼 하늘에서도 예쁘게 봐줘서 우리 태화를 살려주지 않을까 싶어서. 근데 원래부터 그렇게 착했던 사람은 아니야. 내가 그런 걸 정말 잘했거든.”

    “…그런 거라 하시면?”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거.”

    “…….”

    “나 원래 그거 정말 잘해. 가진 게 많거든.”

    수줍게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린 소녀 같은 분에게서 나온 말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요새 귀가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응?

    “어쩐지 요새 태화가 자꾸 우리 친정집, 그러니까 외가 쪽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서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그게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나.”

    “태화가 대체 뭘 하고 다니는데요? 걔가 요새 연락이 잘 안 돼요.”

    이제야 듣는 한태화의 소식에 상체를 앞으로 하며 다급히 물었지만, 사모님은 그저 웃으시며 고개를 저으셨다.

    “우리 요한이가 듣기엔 험한 얘기야. 그래서 태화도 몰래 움직이고 있는 거겠지. 그러니 좋은 소식이 있을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렴.”

    “아니, 제가 꽤 험하게 산 편이라서요, 그 정도로 놀라진….”

    “요한아.”

    그때 또다시 따뜻한 손이 손을 잡아 왔다. 당황하여 말을 멈춘 채 시선을 들자 사모님이 다정하게 웃으며 손등을 다독였다.

    “걱정하지 마. 이 일은 나랑 태화가 알아서 처리할 게. 그러니까 믿고 조금만 기다려줄래?”

    “…아니, 저기, 그… 예. 가, 감사합니다.”

    “아니야, 이런 일로 감사는 무슨. 당연한 일이지. 근데… 그럼 아까 그 수혁이란 애는 누구니?”

    “…예?”

    갑자기 수혁이는 왜요?

    멈칫하고 몸을 굳히며 의아한 얼굴로 이해를 못 한 채 눈을 깜박이는데,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사모님의 입매가 그린 것처럼 올라갔다.

    왜 한태화 빡쳤을 때 미소가…… 응?

    “…….”

    “누구야? 너랑 친한 애니?”

    “…….”

    “누굴까?”

    모자는 정말 놀라우리만치 닮아 있었다. …한태화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재고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또다시 죄인 된 심정으로 수혁이에 대해 변명을 하며 어쩐지 앞날이 다소 어두워졌음을 느꼈다.

    ***

    그렇게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하루가 더 지난 다음 날 밤. 막 잠이 들려던 늦은 시각에 드디어 한태화로부터 연락이 왔다.

    - 화나서 연락 안 한 거 아니에요. 진짜 바빠서 연락을 못 한 거예요. 제가 요한한테 이렇게 길게 화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

    근 일주일 만에 연락을 하는 주제에 대뜸 전화를 받자마자 변명부터 하는 한태화의 말을 들으며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까닭은 쇳소리가 날 만큼 낮아진 목소리 탓이었다.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선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뭐라고 탓할 수도 없게 말이다.

    “…목소리는 왜 그래? 어디 아파?”

    - 아뇨.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지금도 나흘 만에 잠깐 시간이 나서 눈을 붙이는 거라서요.

    “너…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뭘 하길래 연락은 안 되고, 잠도 못 자고 다녀?”

    그 물음에 휴대폰 너머에서 작게 웃는 기척이 났다. 나흘 만에 눈을 붙이려 한다는 놈은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는지 뒤척일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가 났다.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자세를 바로 한 채 천장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좀 더 귓가로 붙였다. 길고 느릿한 숨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느껴졌다.

    - 그러는 요한은 뭐 한 거예요? 엄마 만났다면서요?

    “너…, 그게 궁금해서 전화 한 거지? 지금까지 보낸 메시지는 죄다 씹더니.”

    불퉁하게 대꾸하자 또다시 이불이 바스락대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렸다.

    #64

    - 씹은 거 아니라니까요. 지금도 요한 목소리를 들으니까 살 것 같은데요. 요한 덕분에 엄마가 지원 사격해줘서 이제야 시간이 좀 났어요. 근데 뭐라고 했길래 엄마가 그렇게 화가 나서 달려온 건지는 좀 궁금하네요.

    조금씩 늘어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선 피곤함과 함께 잠기운이 묻어났다. 지금까지 만나오면서 한 번도 듣지 못한 목소리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새끼, 진짜 잠도 안 자고 돌아다녔나 봐.

    자연히 목소리가 불퉁해졌다. 잠도 안 하고 뭐 한 거냐고, 진짜.

    “뭐라긴 뭘 뭐래. …그냥 다 일렀다. 왜?”

    - 왜긴요. 잘했다고 칭찬해 주려고 그러죠. 잘했어요, 요한.

    “너한테 칭찬받으려고 한 짓 아니거든? …너는 대체 왜 그렇게 바쁜 건데? 너 요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대자로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귀에 댄 채 물으니 녀석이 힘없이 웃는 게 느껴졌다. 잠기운이 묻어나던 목소리는 어느새 조금씩 끊어지며 늘어졌다.

    - 나쁜 짓이요. …요한이 알면… 화낼 일….

    “…….”

    - 요한… 너무, …보고 싶어요.

    그 말을 끝으로 말이 없어진 녀석에게선 색색 고른 숨소리만 났다. 얼마나 피곤하면 전화를 하다 잠이 들었을까.

    작게 혀를 차며 꽤 오랜 시간 잠든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나도.”

    - …….

    “나도 그렇다고.”

    나도 너 보고 싶다고.

    - …….

    “잘 자, 한태화.”

    - …….

    대답이 없음에도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몸을 돌려 눈을 감았다.

    누군가를 믿고 기다리는 일. 그건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고,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가며 점차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날 일어나보니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끊긴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어쩌면 놈도 내가 자는 소릴 듣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붕어대가리: 목소리 들어서 너무 좋았어요ㅠㅠ 오늘 하루도 잘 보내요♥ 나 없다고 다른 에스퍼 만나고 다니면 진짜 혼나요 (화)(화)(화) 오전 6:23]

    화내고 있는 이모티콘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메시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누가 보면 굉장히 애틋한 연인 사이쯤 돼 보일 메시지에 허탈하게 웃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마뜩잖은 얼굴로 메시지 창을 내려다보다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그렇게 출근을 해서도 신경은 온통 휴대폰에 쏠려 있었지만.

    이 새끼, 화 풀렸다는 거, 거짓말 아냐?

    그런 의심에 출근 후 내내 휴대폰를 노려봤지만, 놈의 연락에 휴대폰이 울리는 일은 없었다. 가끔 쓰잘머리 없는 수혁이의 메시지가 오거나, 어제 인사팀으로 함께 해지 합의서를 제출한 김재상으로부터 연락이 왔지만, 모두 쓸모없는 연락들이라 다 씹었다. 좋은 마음도 아닌데 일일이 답장을 해 줄 여력이 없었다. 그럴 바엔 좀 있을 점심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말지.

    또다시 울리는 휴대폰을 애써 무시하며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사무실 문이 세게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선배!!”

    “아, 깜짝아. 뭐야? 미쳤어? 놀랬잖-.”

    “선배, 이거 봐요!! 이거 맞아요? 진짜야?”

    “…뭐?”

    코앞으로 휴대폰를 들이미는 상원이의 손을 치워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일하다 말고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슬그머니 놀러 나갔던 놈이 조용히 들어오진 못할망정 소란스럽게 구는 모습에 한소리 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원이가 치워냈던 휴대폰을 다시 코앞으로 들이밀며 소리쳤다.

    “좀 보라고요! 이게 정말 사실이에요? 선배라면 한태화 통해서라도 뭐 들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한태화? 내도록 골머리를 앓게 만들던 이름이 상원이의 입에서 나오자 그제야 궁금증이 생겼다. 다른 선배 둘도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상원이가 들이민 휴대폰을 빼앗아 화면을 확인했다.

    별거 아니면 넌 진짜 죽는…….

    『세가(CEGA) 민영화 초읽기?! 여당의 박ㅇㅇ 의원, 민영화 추진 법안 발의』

    그 강렬한 헤드라인 아래 함께 게재된 사진에는 익숙한 세가 건물의 전경 사진이 나와 있었다. 그에 당황하여 상원이를 바라보다 휴대폰을 다잡고 기사를 자세히 읽었다.

    『대한민주당 박ㅇㅇ의원은 효율적인 세가의 운영 및 세금의 불필요한 남용을 막기 위하여 세가의 민영화를 주장했다. 그와 더불어 뜻을 함께한 다른 의원 17명과 세가 민영화 추진 법안을 오늘 국회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박ㅇㅇ 의원은 이전에도 세금의 무분별한 사용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데이데이뉴스 김ㅇㅇ 기자』

    이게 뭐야? 놀라운 기사에 멍한 얼굴로 상원이를 보며 물었다.

    “뭐야… 우리 진짜 민영화해?”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저도 궁금해서 선배한테 달려온 건데. 한태화 통해서 뭐 들은 거 없어요?”

    “…없는데? 걔는 애초에 이런 데 관심 둘 애가….”

    말을 하던 도중 멈추며 입을 다물었다. 문득 어제 한태화와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대체 뭐 하고 다니고 있냐는 물음에 한태화는 분명… 나쁜 짓을 하는 중이랬다. 에이…, 설마? 이렇게 큰일에 걔가 나섰을 리도 없고, 민영화 법안 발의가 나쁜 짓은 아니니까….

    “그럼 우리 진짜 민간 기업으로 넘어가는 거야?”

    “그거 태화그룹이 제일 유력시 되는 일 아닌가? 태화에서 의원 로비라도 했나?”

    “아무리 로비를 했대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아요?”

    “…….”

    모여든 최선배와 강선배, 상원이가 하는 얘기를 듣는데 유독 한 단어가 귀에 거슬렸다.

    로비? 그거… 나쁜 짓 맞지?

    “이러다 어중간한 등급의 능력자들은 다 잘리는 거 아니에요? 외국 사례 보면 그렇던데? 우리 부서, 좀 위험한 것 아니에요?”

    “…그러게. 광땡아, 진짜 한태화한테서 뭐 들은 얘기 없어?”

    상원이와 얘기를 나누던 최선배가 돌아보며 묻는 말에도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태화… 너 진짜 어디서 정말 뭘 하고 다니는 거냐고!!

    ***

    어제 내도록 민영화에 관한 얘기로 기관이 떠들썩했다.

    그리고 그 열기가 식기도 전에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세가와 관련된 기사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방만한 세금 운용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적자를 보는 운영 방식에 대한 문제점이라던가, 이번 밤나비 탈주에 관한 기사들이 연이어 터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또다시 강렬한 헤드라인을 단 기사에 기관은 정말 초비상 사태에 놓였다.

    『세가(CEGA) 기관장 채애현, 횡령 및 직권 남용 관련 의혹』

    그 타이틀로 터진 기사는 채애현 기관장의 횡령에 관한 의혹 및 개인적인 업무에 에스퍼들을 이용한 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점심때쯤 한 번 더, 로비를 받고 사적 업무를 지시했다는 내용이나 개인 용무로 공간이동 에스퍼를 이용했다는 내용 등, 큰 건부터 작은 건까지가 차례대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정적인 기사들이 몰아치자 기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기관장의 부정에 관한 기사에 가뜩이나 밤나비 건으로 인식이 나빠져 있던 세가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고, 슬슬 이럴 바엔 정말 민영화를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제부터 한태화와 연락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어제는 내도록 전화기가 꺼져있더니, 오늘은 켜져 있는데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야, 전화 좀 달라고. 오전 9:37]

    [씹냐? 오전 9:56]

    [전화라도 받으라고 오전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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