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49)
  • “…그게 어떻게 별개가 되지? 나는 그게 안 돼서 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야! 자꾸 말 씹을래? 괜찮냐니까? 무슨 일 없었냐고!”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한태화를 향해 소리를 치자 손바닥 안으로 뺨을 대고 비비던 놈이 내 양 손목을 잡아 내렸다.

    “…이봐, 또 못 믿네. …별일 없었어요. 일은 이제부터 칠 거라서.”

    “…뭐?”

    #60

    “그러니까 요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따라오지 말고요.”

    “…야, 너 지금….”

    “지금 요한이랑 같이 있으면 화를 안 낼 자신이 없는데, 나는 요한한테 화내고 싶지 않아요.”

    내 양 손목을 잡아 내린 손이 떨어져 나가며 한태화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진짜로 화내면 요한이 날 싫어할 것 같아서요.”

    “…….”

    “그러니까 화 풀고 올 때까지 나 꼭 기다려요. 알았죠?”

    쟤가 뭐라는 거지?

    놈이 떼어낸 양손을 내려다보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어느새 놈은 뒷모습을 보인 채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에 홀로 남아 나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일전에 내가 따라오지 말라 했을 때의 한태화는 나에게라면 화풀이를 당해도 좋다고 끝까지 쫓아 나왔다. 그리고 그때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나는 녀석을 따라가지 못한 채 가만히 서서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한 걸음이 내겐 무척 무거웠기 때문이고, 그 이유 역시 알고 있었다.

    한태화에게 달린 족쇄는 나 하나뿐이지만, 내겐 너무 많은 족쇄가 달려 있었다.

    한태화라는 족쇄뿐 아니라 지원 3팀이 족쇄였고, 고아라는 족쇄에, D등급이라는 족쇄까지. 내 발을 옭아맨 족쇄는 너무 많아서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고 힘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한태화에게 가고 싶으면 둘 중의 하나여야 했다. 이 족쇄를 다 풀어내든가… 아니면….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강해져서 가볍게 끌고 가든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4. 그 고난 길

    이틀 전 한태화가 그렇게 가 버린 후, 놀랍게도 연락이 두절 됐다. 청산팀은 정신없이 밤나비가 있을 곳으로 의심되는 곳들을 모두 헤집고 다니고 있었는데, 한태화는 그 현장에도 나오지 않은 채 뭐가 그렇게 바쁜지 연락도 없이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어제는 지원 3팀의 모든 업무가 올스톱됐다. 응급 상황을 대비해 대기로 돌린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내가 뜻대로 해주질 않으니 경고조로 업무에서 배제 시켜 버린 것이다. 여기서 더 버티면 지원팀을 해체 시켜 버릴 테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새로 작성한 임시 가이드 해지 합의서에 혼자만 서명해서 분쟁조정위원회로 넘겼다. 원래라면 당사자 쌍방의 서명을 받아 인사팀에 넘기면 되는 일이었지만, 한쪽만 계약 파기를 원할 때는 분쟁조정위원회로 넘어가게 되어있었다. 분쟁조정위원회에서는 양측의 얘기를 듣고 난 후, 협의 과정을 거쳐 해지가 필요하다면 승인을, 불필요하다면 불허 결정을 했고.

    그 과정으로 들어간 내 해지 합의서 역시 현재는 ‘협의 중’ 단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단계에 들어가자마자 지원팀으로 업무가 밀려들었다.

    이쯤되니 팀원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게 아니라면 퇴근 시간 땡 하면 칼퇴하기 바쁜 최선배가 불금이라는 이유로 회식을 제안할 이유가 없었다.

    “한잔 더 줘 봐.”

    “…….”

    기관에서 좀 떨어진 동네에 위치한 이 갈매기살 전문 고깃집은 우리 팀의 단골 회식집이었다. 회식 때마다 편하게 이 부서, 저 부서 눈치 보지 않고 욕하기에 최적인 장소기도 했고, 각자 사는 곳의 중간지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쪽 구석 테이블에 옹기종기 붙어 앉은 5명의 직장인들이 이상해 보일 장소도 아니었고.

    “진짜 말 안 할 거야? 팀장님도요?”

    “…….”

    “…….”

    최선배의 물음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선배가 답답하다는 듯 앞에 놓여있던 소주잔을 들고 원샷 했다. 그 뒤를 따라 함께 노려보던 강선배도 원샷을 하더니 팀장님을 째려본다. 그런 두 선배의 기세에 눈치를 보고 있던 상원이도 얼른 술을 따라 마시며 고기를 세 점이나 처먹었다.

    파도타기를 셋만 하고 있는 건가.

    소외감을 느끼며 슬쩍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마시려는데 타겟을 변경한 두 선배가 이번엔 나를 노려본다. 결국 마시려던 술잔을 곱게 상 위로 내렸다. 술 하나를 마음 편히 못 먹는 즐거운 회식의 자리였다. 아이고, 즐거워라.

    “뭘 물어요. 벌써 각이 딱 나오는데. 갑자기 왕따시키듯이 우리 팀만 업무에서 배제하다가 서선배가 해지 합의서를 내자마자 다시 일 주는 거 보면 뻔하죠. 서선배의 계약 해지를 조건으로 우리 팀 목을 건 거지. 근데 그런 일이 가능한 건 기관장님밖에 없고, 선배도 마침 얼마 전 기관장실을 다녀왔네? 이건 빼박이죠.”

    …저 말을 하는 사이 고기를 다섯 점이나 주워 먹은 놈이 연신 쩝쩝대며 말을 마쳤다. 또다시 불판 위 남은 고기를 노리는 놈의 젓가락을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쳐내며 남은 고기 한 점씩을 최선배와 강선배, 그리고 팀장님의 앞접시에 놓아주고 손을 들었다.

    “이모님, 여기 갈매기살 3인분이랑 소주 한 병 추가요.”

    “알았어. 바쁘니까 술은 알아서들 가져다 먹고.”

    주방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이모님의 고개가 다시 주방 안으로 사라지자 상원이가 냉큼 냉장고 안에서 시원한 소주 한 병을 꺼내왔다. 투둑- 하고 깐 소주병을 내려놓으며 빈 불판을 아쉽게 바라보던 놈은 마카로니가 마요네즈에 범벅이 된 샐러드로 관심을 돌렸다. 저 안주빨 새끼.

    “그 좋은 머리를 제발 일할 때 좀 써봐라. 너 차출 할 때마다 내가 욕을 얼마나 먹는 줄 알아?”

    샐러드 접시에 얼굴을 박고 먹고 있는 상원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팀장님이 남은 술을 털어 마시며 접시 위에 올라온 고기를 집어 드셨다. 상원이는 여전히 샐러드 접시에 코를 박은 채 대답했다.

    “공무원은 시키는 것만 잘하면 돼요. 일을 나서서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숨은 좀 쉬어가면서 먹어라, 이 안주빨 새끼야.”

    새로 깐 소주병을 들고 잔이 빈 선배들의 잔을 채우며 타박하자 헤- 하고 웃던 놈이 젓가락을 쥔 채 얼굴 아래로 손을 가져다 대고 꽃받침을 하더니 역겹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내는 안주빨의 요정이에용.”

    “…저 새끼 젓가락 뺏어.”

    “이 미친놈이. 처먹지 마. 아-무 것도 먹지 마. 그 요정 내가 굶겨 죽여 버릴 거야.”

    “아, 씨발, 내 눈….”

    최선배의 젓가락을 뺏으란 말에 강선배가 상원이로부터 젓가락을 뺏으며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한 번만 더 그러면 진짜 굶겨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그저 손으로 눈가를 감싼 채 그 끔찍했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진저리를 쳤다.

    “앗, 이 나쁜 악당들! 젓가락은 안주빨 요정의 무기인뎅!!”

    “…적당히 해라, 윤상원.”

    “옙, 선배님. 들고 계신 젓가락만 주시면 입을 꼭 다물겠습니다!”

    “네 입에서 요- 어쩌고란 단어가 다시 나오면… 죽는다?”

    “…어떻게 죽는데요?”

    “요한이보고 너 끌고 나가랠 거야. 직속 선배랑 데이트 면담, 좋지?”

    강선배에게 젓가락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던 상원이가 그 말에 슬쩍 눈알을 굴려 내 눈치를 본다. 그래서 입 모양으로 데.이.트? 라고 물으며 손으로 문 쪽을 가리키자 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강선배는 상원이에게 젓가락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잠시 딴짓을 하며 노는 사이 이모님이 추가한 고기를 가져다주셨다. 많이 먹으라고 더 담았다는 이모님에게서 고기 쟁반을 냉큼 받아든 상원이는 입을 다문 채 생글생글 웃으며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때 혼자서 심각한 얼굴로 술을 비우고 있던 최선배가 입을 열었다.

    “광땡아, 우리 요정이 말, 맞아?”

    미쳤나 봐. 저걸 받았어.

    경악한 얼굴로 최선배를 보는데, 마찬가지로 경악한 얼굴의 강선배가 최선배를 쳐다보다가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엔 집게를 들고 꽃받침을 시도하려던 상원이가 그 서슬 파란 시선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강선배 아니었으면 진짜 눈이 썩을 뻔했다.

    “…선배, 벌써 취했어요?”

    “말 돌리는 거 보니까 맞나 보네. 하-.”

    뭐래? 아니, 상원이의 말이 정확하긴 한데, 그거 때문에 말 돌린 거 아니라고요! 차마 소리를 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자 최선배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럽게 고개를 젓는다. 취했네, 취했어, 저 선배.

    “세가에서 하는 짓이 그렇죠, 뭐. 근데 선배, 물도 한 잔 마셔봐요. 자요, 어서. 옳지, 착하다, 우리 선배.”

    옆에 있던 강선배가 취한 최선배를 달래며 얼른 물을 마시게 한다. 술도 약한 양반이 혼자 깡소주로 달리더라니, 취한 최선배는 착하게 물을 받아 마셨다. 눈살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살피다 술잔을 들려는데 옆에서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계시던 팀장님이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요한이 너는, 이제 어쩔 건데?”

    음. 그 물음에 술잔을 들려던 손을 물리며 가볍게 팔짱을 꼈다.

    “…글쎄요. 차선책으로 생각하고 있던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아직 고민중이라서요.”

    “치킨 게임인지 뭔지로 버텨본다며?”

    “아, 그건 폐기했어요. 한태화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거든요.”

    그 대답에 팀장님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쉬다 빨리 익히려고 집게로 고기를 누르고만 있던 상원이에게서 집게를 빼앗아 들었다. 사실 상원이가 구워주는 고기는 심하게 맛이 없었다. 익은 고기는 다 맛있다는 주의라 정말 익히기만 하니까.

    “한태화랑은 어쩔 거예요? 걔랑 연락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선배 자꾸 휴대폰만 보는 게 그런 거 같던데. 싸웠어요?”

    “너는… 대체 그 좋은 눈치를 왜 일하는 데만 안 써? 그리고 한태화가 네 친구야? 왜 자꾸 반말인데?”

    “저 한태화랑 동갑인데요?”

    아, 그런가? 상원이놈 하는 짓이 하도 애 같아서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상원이랑 한태화가 동갑이긴 했다. 팀장님께 집게를 뺏긴 대신 젓가락이나 빨고 있는 저게, 그러니까 스물다섯이라는 거다. 아… 갑자기 현타오네.

    “한태화 편드는 거 보니까 안 볼 생각은 아닌가 보고. 그럼 뭐지? 어떻게 할 거예요? 생각하고 계시던 방법이 뭔데요?”

    #61

    그때 강선배가 쥐여 준 물잔을 술 마시듯 홀짝대고 있던 최선배가 상추를 집어 들더니 곱게 접어 상원이의 입으로 넣어줬다. 그러니까 맨 상추만.

    “우리 요정이 많~이 먹어. 자.”

    “우웁-, 아. 우리 선배, 취했네. 저걸 계속 받아주는 걸 보니.”

    입안으로 우겨져 들어온 상추를 질겅질겅 씹던 상원이가 빈 물잔에 다시 물을 따르더니 ‘선~배에, 요정 막둥이 잔도 한 잔 받아주셔야죠.’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며 최선배에게 물잔을 건넸다. 그러자 선배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잔을 쥐고 또다시 홀짝였다. 저게 두 잔째니까 한잔 정도 더 마시면 최선배의 술도 슬슬 깰 것이다. 신기하게 금방 취했다가도 물을 마시면 깨는 게 최선배의 술버릇이었다. 최선배 외엔 다들 주당들이라 취할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그때 다 구운 고기를 각자의 앞으로 나눠주고 있던 팀장님이 가만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상원이와 같이 최선배에게 물을 챙겨주던 강선배 역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어느새 테이블에 둘러앉은 팀원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한 것을 보며 나는 흠, 하고 팔짱을 낀 채 허리를 바로 세웠다. 무척 부담스러운 시선들이라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믿어요?”

    “…뭐?”

    “갑자기… 뭔 헛소리야?”

    팀장님과 강선배의 말에 그들을 빤히 바라보자 테이블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내 말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지원 3팀이 해체될 수도 있어요. 그러고 나면 팀장님 포함 선배들이랑 상원이가 지방으로 발령받아 영영 서울 본원으로는 못 올 수도 있고요. 나 때문에 위에 찍혀서.”

    그러나 그 말에도 누구 하나 표정이 바뀌는 사람이 없어 작게 웃음이 터졌다. 팀원들이 모두 다 그게 뭐? 라는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구박이 패시브라 그렇지, 의외로 끈끈한 사이다운 반응들이었다. 나라도 다른 선배들 때문에 지방 발령받는대도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을 테니까.

    저들이 지금 걱정하고 있는 건 나에 대한 것이었다. 이래서 내가 지원 3팀을 지키고 싶어 했던 거고.

    “근데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팀장님이랑 선배들, 그리고 상원이까지. 제가 책임지고 다시 본원으로 부를 겁니다. 이 말 믿어 줄 수 있냐고요.”

    “…방법이 뭐냐고 물었는데, 무슨 헛소리야? 그런 낯간지러운 소린 마음속으로만 해.”

    “한태화랑 붙어 다니더니 애가 아주 이상해졌네. 소름 돋게 왜 저래?”

    “에이, 서선배 무안하게 왜 그래요. 자, 서선배 안 부끄럽게 이쯤에서 거국적으로 짠할까요?”

    “네가 제일 짜증 나니까 닥쳐.”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팀장님과 강선배의 핀잔에 편을 들어주는 척 돌려까기를 한 상원이를 노려보자 녀석이 주둥이를 댓 발 내밀며 편을 들어줘도 난리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삐쳤다고 주둥이를 내밀어도 되는 건 한태화뿐이라서 얼른 주둥이를 집어넣으란 의미로 눈을 치켜뜨는데, 옆에 앉아 있던 강선배가 ‘왜 이 새끼까지 입을 내밀어. 미쳤어? 안 집어넣어?’라고 나를 대신해 화를 내주며 상원이의 입술을 손으로 때렸다. 잘한다, 우리 선배.

    그러자 자기만 미워한다고 투덜대던 상원이가 들고 있던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에 양옆으로 소주잔 3개와 투박한 물잔이 다가와 톡 하고 부딪쳤다. 눈치를 보던 끝에 드디어 한잔 마시고, 팀장님이 구워 놓은 고기를 한 점 입에 넣고 씹는데, 말을 아끼던 팀장님이 입술을 훔치며 물어왔다.

    “그래서 그 고민 중인 방법이 뭐냐고. 이렇게 끌어놓고 별거 아니면 죽는다?”

    그 말에 잠시 눈을 깜박이다 고기 한 점을 더 입에 넣으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진짜 별거 아니라서 죽게 생겼네, 하고 생각하며.

    “고자질이요.”

    “……뭐?”

    아연해 진 팀장님 포함, 팀원들 3명도 이해 못 할 얼굴을 해 보였지만 그저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 추가요!”

    “갖다 먹어!!”

    “예~.”

    이모님의 타박에도 기분 좋게 웃으며 소주병을 하나 꺼내왔다. 먹고 기운 내야 이 무거운 한 걸음도 옮길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마음으로 웃는데 나를 제외한 팀원들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그러나 그 눈초리도 소주병을 흔들어 보이자 금세 사라지고 즐거운 회식 자리만 남았다.

    ***

    금요일 저녁, 회식으로 달리느라 토요일 내도록 술병에 시달렸다. 그리고 일요일까지 푹 쉬고 출근을 하면서도 내 표정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술병 때문이 아니라 한태화 때문에. 주말 내내 놈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 새끼 봐라? 뒤끝 존나 기네?

    좋은 마음이 들 리 없으니 당연하게도 별별 욕이 다 나왔다. 월요일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해야 하는데 한태화 때문에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 얼굴 좀 풀어요, 무서워서 말도 못 걸겠네.”

    웬일로 일찍 출근한 상원이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다 멈칫하며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러든가 말든가 미간을 찌푸린 채 기계적인 마우스질로 기관 내 프로그램을 돌리던 나는 잠시 뒤 어이가 없어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씨발, 진짜 이걸 하네.”

    “…왜요, 왜 그러는데요?”

    자리로 돌아가 점퍼를 벗고 있던 상원이가 움찔하고 몸을 떨더니 눈치를 봤다. 그러다 굳은 얼굴로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 내 모습에 슬그머니 뒤로 다가와 모니터 쪽으로 목을 길게 뺐다.

    “이게 뭔데요? ……분쟁 위원회 해지 승인이 벌써 떴어요? 이거 원래 2주쯤 걸리지 않나? 아직 협의 과정도 없었잖아요. 근데 벌써? 와, 역시 졸속 행정의 대가, 세가.”

    빈정대던 상원이가 짝짝짝 박수 치는 소리를 들으며 모니터를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분쟁 조정 위원회의 승인은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내 경우 계약 해지 사유가 피티스트가 우선권을 행사해 온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협의 없이 승인이 나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해지 신청이 승인되었다는 목록 아래에 New가 떠 있는 수신 문서를 클릭하자 새롭게 도착한 임시 가이드 발령서가 화면을 채웠다. 당연히 상대 에스퍼는 한태화가 아니었다.

    “이건 또 뭐야? 임시 가이드 발령서가 또 내려왔네? 해지 승인 나자마자? 와, 미쳤네. 이 인간들 주말에도 일했나 봐요. 금요일 오후 5시만 되면 전화도 안 받던 인간들이.”

    그건 너고. 금요일 오후 5시만 되면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받지 않는 상원이를 힐끔 흘겨보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두고 보자 했더니, 이건 해도 너무 한 거 아닌가. 상원이 말대로 미쳤다는 말 외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침묵하고 있는 사이 출근한 강선배와 최선배에게 상원이가 곧바로 상황을 설명했다. 오죽했으면 그 얌전하던 최선배마저도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직도 술이 안 깬다며 피곤한 낯으로 출근했던 팀장님은 그 말에 멀쩡한 얼굴이 되더니 감히 자신의 팀원 일을 제게 묻지도 않고 처리했다며 광분을 하다 사무실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물론 또 한껏 어깨를 늘어뜨린 채 실망을 해서 돌아올 걸 알지만, 저래야 불편한 마음이 좀 풀릴 것을 알기에 말리지 않았다. 팀장님 동기들이야 동기라는 이유로 들들들 들볶이겠지만.

    어쨌든 예상했던 일이라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차분히 오전을 보내고 있는데 메시지 두 개가 연달아 오기 시작했다. 혹시나 한태화인가 싶어 휴대폰을 살폈지만, 메시지의 주인들은 한태화가 아니었다.

    [차수혁: 형, 저 좀 봐요. 오전 11:06]

    [알 수 없음: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임시 가이드 계약을 하게 된 에스퍼 김재성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오전 11:06]

    오라는 놈의 연락은 안 오고. 한숨을 내쉬며 메시지를 살피다 일단 차수혁에게 먼저 답장을 썼다.

    이미 일어날 줄 알고 있던 일임에도 속이 쓰리고 기분은 씁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공룸 사용을 신청한 뒤 연락이 온 김재상 에스퍼에게 그쪽에서 보자고 전했다. 일을 하고 있던 선배들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3층에 있는 공룸으로 가서 2호실 문을 열자 먼저 와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어?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

    아, 귀찮게 됐네. 작게 혀를 차며 문을 닫자 방 한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의 얼굴이 확신에 차 있는 게 보였다.

    “맞지? 지난번에 나 폭주 막아줬던 그 가이드? 나중에 한태화가 와서 찾던 걔.”

    “…폭주 중이었는데, 제가 기억이 나나 봅니다?”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그렇게 묻자, 지난번 자신의 가이드 외에 사람에겐 가이딩을 받지 않겠다고, 다친 자신의 가이드를 불러오라고 지랄을 떨던 병신이 멀쩡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 한태화 때문에. 그 후로 걔가 와서 기억해 내라고 사람을 좀 닦달했어야지. 그래서 기억해 내려고 용을 쓰다 보니 흐릿하게나마 기억이 나더라고. 안 그래도 그때는 고맙-.”

    “근데 왜 다짜고짜 반말이야. 너, 나랑 친해요? 우리가 언제 안면 까고 말을 텄다고 말이 짧지? 아니면 지금도 폭주 중이라 머리가 오락가락하나?”

    “…아니, 그… 미안합니다.”

    “그래요. 사회생활하는 사람들끼리 조심 좀 합시다.”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남자가 볼을 붉히며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김재상이랬나? 지난번 폭주 중일 때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굴더니, 멀쩡할 때 만난 그는 그래도 아주 막돼먹은 놈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면 얘기가 통하겠다 싶어 테이블로 다가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맞은편을 눈짓하자,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김재상은 선뜻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꾸벅 인사까지 해 보였다.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끝까지 가이딩을 해주셨더라고요. 그래서 그 후로도 몇 번 기억이 났는데, 그러다 보니 혼자서 친밀감이 쌓여 반가워서 그랬습니다. 바로 반말부터 한 건 미안해요.”

    “사과는 한 번이면 됐습니다. 다음부터는 안 그러시면 되죠. 근데… 전속 가이드 분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왜 갑자기 임시 가이드 발령서가 나온 거죠?”

    세화라고 했던가? 제 전속 가이드 이름을 부르며 발광을 하던 놈 탓에 그 이름이 정확히 기억났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재상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다친 게 많이 충격이었는지… 이제 그만 퇴사하고 쉬고 싶다고 해서요, 그 후에 전속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그랬군요.”

    폭주 때 이성을 잃고 헛소리를 늘어놓기에 이참에 그 세화라는 가이드가 이런 놈과는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앞에서 쓸쓸하게 웃고 있는 놈을 보자니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극한에 몰렸을 때 본심이 나오는 법이다. 사실 가이드 입장에서 이놈은 그다지 좋은 파트너는 아니다. 지금 잠깐 불쌍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 사실까지 덮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는 서요한씨는… 한태화씨와 완전히 끝난 겁니까?”

    #62

    들은 소문이 있긴 한지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김재상을 보며 천천히 표정을 굳히다 자세를 바로 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여기서 보자고 했던 겁니다. 제가 사정이 있어서 한태화씨와의 임시 계약을 해지하긴 했는데, 완전히 끝난 건 아니라서요. 그래서 괜찮으시다면 이 임시 가이드 계약을 상호 합의 하에 해지했으면 합니다.”

    그러자 김재상이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어떠한 답이 나올지 몰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도 채근하지 않고 얌전히 입을 다문 채 답을 기다렸다.

    사실 새로운 해지 합의서를 인사팀에 제출하더라도 불허가 날 가능성이 더 컸다. 일단 기관장이 그걸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고, 이렇게 빨리 새 발령서가 나온 것으로 보면 이미 나에 관한 내부 지침이 내려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남자의 도움이 계속해서 필요했다. 허가가 날 때까지 해지 합의서를 낼 생각이니까. 나는 한태화와의 일을 마무리 짓기 전까지는 다른 에스퍼와 임시든 뭐든 가이드 계약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기관에서 바라는 대로 끌려가 줄 생각도 없었고.

    그때 생각의 정리를 마친 듯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저도 서요한씨를 보기 전까지는 같은 부탁을 드리려고 왔던 겁니다. 아직 세화를 잊기가 힘들어서요…. 근데 서요한씨를 보고 나니 생각이 좀 바뀌어서요.”

    “…생각이 바뀌었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전에… 경보 시스템이 발동한 그 순간에도 끝까지 저를 가이딩해 주셨잖아요. 그때 일로 제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이라는 신뢰가 생겨서요. 그래서… 괜찮으시다면 임시 계약을 계속 이어나가 보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전속도 아니고 기간제 임시 계약이니 서요한씨도 마음 편하게-.”

    “아뇨. 저는 그 임시 계약이라도 해지하고 싶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김재상 에스퍼. 제가 다른 사람과는 가이드 계약을 맺을 생각이 없어서요.”

    호감을 표하듯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나가던 김재상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거절을 할 것이라면 단호해야 한다.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단단히 표정을 굳힌 채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자 남자가 금세 푹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아무래도 첫인상도 나빴을 텐데….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나 봅니다.”

    “…….”

    자책 어린 말에도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그저 시선을 내렸다. 저 말에 마음이 약해질 만큼 무른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무른 마음을 먹기엔 삶이 좀 거칠었어야지. 그 순간 김재상이 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