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49)
  • “…어?”

    “누가 요한한테 뭐라고 했어요? 혹시 기관장? 그 여자가 이걸 요한한테 줬어요? 나한테 갖다 주라고 시켰고?”

    “…그런 거 아냐.”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한 듯 물어오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정답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미주알고주알 그 사실들을 떠들어 댈 수는 없었다. 기관장이 마지막에 말한 입이 무겁길 바란다는 건 그런 의미일 테니까.

    “그런 게 아니면요. 왜 갑자기 그런 이상한 말을 해요?”

    “…그냥, 소문을 들었어. 일정 등급 이상의 에스퍼에게 가이드가 생기면 그런 일이 생긴다는 소문. …너는, 나한테 뭐 해줄 말 없어?”

    “해줄 말 뭐요? 요한이 짐작한 대로라고, 그런 대답을 원해요? 그래서 평소엔 하지도 않았을 일을 하고 있었다고?”

    “…너!!”

    정말 그러고 있던 거라고? 네가 왜!

    화가 나서 소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태화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손을 끌어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이. 그러나 답답한 마음에 내가 먼저 녀석을 채근하고 나섰다.

    “진짜야? 진짜 그러고 있던 거야? 대체 왜! 그랬으면 당장 나한테 알려 줬어야 할 거 아냐!”

    “요한은요? 누가 요한에게 이런 짓을 시켰는지 나한테 말해 줄 수 있어요?”

    한태화가 한 손으로 해지 합의서를 들고 팔랑팔랑 흔든다. 그 나부끼는 종이를 곤란한 눈으로 바라보다 입술을 깨문 채 녀석과 시선을 마주했다.

    “…누가 시킨 거 아냐.”

    “…시킨 게 아니면? …정말 나랑 가이드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요? 그게 요한 뜻이라고요?”

    “그래, 맞아. 내 뜻이야.”

    그 순간 한태화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기만 한다. 그러나 나야말로 녀석을 노려보며 화를 내고 싶었다. 왜 처음부터 내게 얘기해 주지 않았는지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노려봐 오는 녀석에게 지금 필요한 건 지금의 불안을 해소할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아닐까. 무섭게 하얘진 한태화의 얼굴을 살피다 길게 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가이드 계약 같은 거 어차피 아무것도 아니야. 종이 쪼가리일 뿐이라고. …우리 그런 거에 흔들리지 말자. 나는 네가 네 일상을 무너뜨리면서까지 그러는 거, 정말 바라지 않아.”

    “…….”

    “그러니까 그냥 사인해. 그리고 누가 내 이름을 팔아도 흔들리지 마. 너 하던 대로 하라고. 나도 그럴 거니까. 안 그러면 서로가 서로에게 약점이 돼서 상대를 괴롭히는 관계가 될 뿐이야. 우리 진짜 그러지 말자. 응?”

    “그러니까… 우리가 한 가이드 계약은 그냥 해지하자? 그 말이에요, 요한?”

    “…응. 그랬으면 좋겠어.”

    녀석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겨진다. 힘이 잔뜩 들어간 듯 하얘진 손끝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한태화를 바라보았다. 놈은 여전히 전혀 웃지 않은 채 인형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괜히 바깥으로 나왔나. 추운 바깥에 내놨더니 그 모습이 유독 더 아프게 눈에 박혔다. 따뜻한 곳에서 얘길 할걸. 나 때문에, 내가 한 말 때문에 상처받아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저 파리한 안색이 너무 안타까웠다. 계속 보고 있기도 신경이 쓰였고. 속이 다 쓰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인형처럼 감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던 한태화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나면요? 우린 무슨 사이인 건데요?”

    “그냥… 평범하게 사귀는 사이지.”

    “…평범하게 사귀긴 하지만… 나는 또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거고, 요한은… 보조 가이드로 다른 놈들 가이딩이나 해주러 다니겠네요. 그죠?”

    표정이 없으니까 어떤 의미로 저 말을 하고 있는 건지가 감이 잘 안 왔다. 내켜 하진 않다는 건 알겠는데,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이해를 해보려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결국 내 입에선 이미 정해놨던 말들이 내뱉어졌다.

    “…진성현씨가 가이드로 활동한다고 하더라. 그 사람은 네 피티스트니까…, 가벼운 가이딩으로도 네가 폭주할 일은 없을 거고…. 나는-.”

    차마 다른 에스퍼의 임시 가이드로 갈 거란 말이 떨어지질 않아서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입을 다물자 갑자기 작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한태화가, 웃고 있었다. 꼭 미친 사람처럼.

    #58

    “아, 정말…. 근래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일이 끝나고 돌아와 요한의 대답을 들을 생각에 하기 싫은 일들도 군말 없이 했더니…. 사람이 진짜 머저리가 된 줄 아나.”

    “……태화야?”

    “네, 요한.”

    “너…, 괜찮아?”

    갑자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웃기 시작한 모습을 불안하게 살피다 이름을 부르니 평소처럼 냉큼 대답이 돌아온다. 표정 역시 방금 전처럼 무표정한 게 아니라 작게 미소 띤 얼굴이었다.

    근데 왜 나는 그게 더 무서울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녀석이 먼저 입을 얼었다.

    “괜찮을 리가 있겠어요? 요한이 자꾸 이해 못 할 소릴 하고 있는데. 피티스트? 그 말도 우스운데, 요한이 다른 놈의 가이딩을 한다고요? 그 소릴 들었는데 제가 어떻게 제정신이겠어요? 안 그래요, 요한?”

    “…….”

    어우, 음, 이건 좀… 무서운 반응인데?

    차라리 화를 내는 편이 상대하기가 더 편할 텐데 녀석은 계속해서 웃기만 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렇게 계속 웃었다. 소름 끼치게.

    “취소해요, 그 말.”

    “…뭐?”

    “가이드 계약 해지하겠다는 말, 취소하라고요. 그리고 내게 전속 계약서를 줘요. 요한이 직접.”

    한태화는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못들은 셈 치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저렇게 예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것일 테지.

    내민 손을 내려다보다 움찔거리던 손을 다시 주머니로 넣었다. 아니면 당장 저 손을 잡을 것 같아서.

    “싫은데.”

    “…싫어요?”

    “응. 싫어.”

    “…요한, 잘 생각하고 다시 말해 봐요. 신중하게 생각해야죠.”

    “신중이고 뭐고, 싫다고. 나는 네가 나 때문에 누구한테 휘둘리는 좆같은 상황도 싫고, 내가 네 약점으로 휘둘릴 상황이 싫다고!! 그게 씨발, 무슨 관곈데? 서로가 서로에게 물린 관계? 서로 좆된 관계? 그게 관계긴 해? 이럴 바엔 차라리 그냥- 읍!”

    입이 막혔다. 커다란 녀석의 손은 더이상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인지 내 입을 막고 있었다. 그렇게 입을 막느라 한 뼘 거리로 다가온 눈은 빛 하나 없이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고.

    “하지 마요. 내가…, 내가 시간을 준다고 했잖아요. 그건 이런 말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어요. 지금 요한이 생각하는 말은 절대 그 입을 통해 나와선 안 되는 말이에요. 다시 한번 말하는데, 지금부터는 신중하게 잘 생각하고 말해요, 요한.”

    싸늘한 바람 탓일지, 아니면 한태화의 심리 상태 탓인지 몰라도 입을 막은 손은 무섭게 차가웠고,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을 진탕으로 휘젓던 화도 천천히 가라앉는다.

    화가 나고, 억울하고, 그럼에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슬펐지만,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한태화니까.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막은 손을 치워내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준 시간의 의미, 잘 알아. 그래서… 지금 같이 상황에 떠밀려서 대답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한 번만 그냥 내 말대로 따라와 주면 안 될까?”

    “…가이드 계약을 해지하고… 남처럼 살자는 그 말을 따르라고요? 나보고?”

    얜 정말 한국말을 못 한다니까. 그게 왜 그렇게 해석되냐.

    “가이드 계약을 해지했다고 왜 우리가 남이야. 우리가 에스퍼 한태화와 가이드 서요한으로 만나건 맞지만, 우리한테 그 관계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냥 그런 걸 다 떠나서 서요한과 한태화와의 관계만 남기자고. 이런 건 형식에 불과한 거고, 중요한 건 우리 마음이니까.”

    녀석이 쥐고 있던 해지 합의서를 가져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어깨를 돌려 휙 하니 손을 튼 한태화는 내게 그것을 넘기지 않았다.

    어느새 고개를 든 놈이 형형한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싫어요.”

    “야….”

    “아무리 좋게 포장해 봤자 그 말은 결국 요한 곁에 다른 놈이 가이딩을 해달라고 들러붙어도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에요. 요한의 빈틈을 찾아 파고들 놈들을 나보고 지켜만 보라는 말이라고요. 내가, 그걸 진짜 가만히 둘 거라고 생각해요?”

    “…….”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왜 그 말은 못 믿어요? 내가 요한 하나 못 지켜 줄 것 같아요?”

    …그게 문제지. 네가 지킬 마음이 있는 건 나 하나라는 거.

    이 일에는 나와 한태화뿐만이 아니라 지원 3팀의 사람들까지 얽혀있다. 한태화의 능력으로 나 하나 지키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태화가 과연 지원 3팀 사람들 전부를 지켜줄 수 있을까? 저 별거 없는 종이 쪼가리 하나에 지원 3팀이 달려 있는데. 그건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냥… 사인 좀 해 주면 안 되겠어? 어차피 우리가 그럴 마음만 아니면 아무 효력도 없는 종이야.”

    “…아니요. 아무 효력도 없는 종이라곤 할 수 없죠. 지금도 나와 요한 사이를 이렇게 갈라놓고 있는데요. 아무 효력도 없는 종이에 요한은 왜 그렇게 목을 매는데요. 왜요, 누가 여기에 뭘 걸기라도 했어요?”

    “…….”

    “요한이 아끼는 지원팀 사람들의 목이라도 걸렸나?”

    아 진짜… 이 귀신같은 놈. 얜 그쪽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괴롭혀대며 눈치를 살피자 한태화가 한쪽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정말인가 보네? 왜요, 해지 합의서에 사인받아 오지 않으면 지원팀 사람들을 어떻게 한대요? 그래서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였어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뭐요.”

    “…….”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까. 답답함에 표정을 찡그리는데, 한태화가 손으로 한쪽 뺨을 감싸왔다. 뺨도 손도, 싸늘하게 차가웠다. 녀석과 나의 마음까지도.

    “나한테 말 안 해 줄 거죠? 아니, 못하는 건가.”

    “…….”

    “요한이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볼 줄은 몰랐어요. 항상 말을 잘해서. 그래서 날 막 답답하단 눈으로 쳐다보곤 했었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는 머저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매번 날 그렇게 봤잖아요.”

    “…빈정대지 마라.”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마음껏 빈정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 그렇게 말하자 한태화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왜요, 거슬려요? 그래도 참아요. 나는 지금 다 부수고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까. 둘 다 하나씩은 참아야 공평하죠.”

    저놈의 성질머리. 그러나 한태화가 미쳐서 날뛸 것을 상상하니 얌전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을 향해 순한 눈빛을 보내자 작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놈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진짜 말 안 해 줄 거예요?”

    “…어. 할 말 없는데.”

    “그래요? 그럼 내가 직접 알아봐야겠네요.”

    “뭐? 뭘 어쩌-.”

    그 순간 녀석의 손에 쥐어져 있던 해지 합의서가 불길에 휩싸이더니 그대로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렸다. 놀라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데 그렇게 멋대로 합의서를 태운 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뭘 어쩌겠어요. 원래 이런 일은 위에서부터 패고 내려오면 해결돼요. 그러니 가장 윗대가리부터 족쳐봐야죠.”

    “…뭐?”

    “기다려요. 먼저 요한 입을 틀어막은 사람부터 족치고 올 테니까.”

    “…야, 한태-.”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해대는 놈에게 따지러 벌떡 일어났다가 갑자기 성큼 다가온 모습에 놀라 주춤하고 몸을 물렸다. 그러나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놈은 가볍게 뒷머리를 잡아 나를 끌어당겨 뺨에 입을 맞췄다.

    이 상황에… 이게 무슨?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자 빛없이 까맣게 가라앉은 눈이 바로 앞에서 시선을 맞춰온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갔다 와서 요한도 좀 혼나야 할 거 같으니까.”

    뭣이? 내가 왜?!

    억울함에 얼굴을 찡그리자 놈이 점차 상체를 세워 멀어지며 선선히 웃었다.

    “내 말 안 믿은 거 맞죠? 내가 지켜주겠다던 말. 그래서 팀원들이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 혼자 나서서 막아보려고 한 거잖아요. 어쩌면 내 손을 놓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

    “그 생각을 한번 이상은 했을 거 같은데…. 내 말이 틀려요?”

    헤어져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었는지 묻는 거라면 물론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 끝의 결론은 언제나 하기 싫다였다. 그렇게 그 선택지를 제외하고, 녀석의 말대로 지원팀도 구하고, 한태화 역시 평범했던 일상으로 되돌리려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엔 남는 게 없었다.

    난처한 얼굴로 놈을 올려보자 그렇게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짓고 있던 놈이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꿈도 야무지네요.”

    “…야.”

    울컥한 마음에 입을 열었지만, 그보단 한태화의 말이 더 빨랐다.

    “애초에 우리의 시작이 나였던 건 기억하죠? 요한은 아니라고 도망만 치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끝을 결정하는 것도 나예요. 요한의 선택권은 이제 박탈됐어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띄워 올린 한태화가 그대로 기관 건물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곤 2층에 위치한 기관장실의 발코니로 내려선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윗대가리부터 친다더니, 곧장 기관장실로 날아간 놈은 어찌 보면 첫판에 바로 정답을 찾은 셈이었다.

    문제는 지원 3팀이었다.

    이러다 진짜 나 때문에 다들 좌천되는 거 아냐? 아니, 우리 팀장님이 여기서 더 떨어질 데가 어디 있다고! 한태화가 끼면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단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다 망했어! 절망감에 고개를 내젓다가 얼른 다시 세가 건물을 향해 뛰었다. 2층의 기관장실을 향해서.

    #59

    기관장실의 발코니에 선 한태화는 안쪽에서 잠긴 커다란 발코니 창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부숴버릴까.

    그렇게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고민하던 한태화는 시선이 느껴져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발코니 창 앞에 선 채애현이 웃으며 문을 열었다.

    “좀 평범한 방법으로 방문해 줄 순 없나요?”

    열린 창문을 잠시 바라보던 한태화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선선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열린 문 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들어와 채애현은 다시 창문을 닫으며 한태화를 돌아보았다.

    “춥죠? 더워서 에어컨 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찬바람이 부네요. 따뜻한 차라도 마실-.”

    “우리 요한한테 해지 합의서 들려 보낸 게 당신이야?”

    다짜고짜 물어온 무례한 말투의 질문에 창을 닫고 돌아서서 소파로 향하려던 채애현의 걸음이 멈췄다. 잠시 대답이 없던 채애현은 금세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세 발자국 앞에 한태화가 있었고, 그 거리는 결코 안전한 거리가 아니었다. 특히 채애현처럼 전투능력이 없는 에스퍼에겐 더더욱.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해지 합의서라뇨?”

    “왜 이래. 그런 짓을 할 사람이라곤 당신밖에 없는데.”

    “…서요한씨가 그래요? 내가 그런 짓을 시켰다고?”

    “역시 당신이구나? 우리 요한의 입까지 틀어막은 게.”

    한태화가 서늘한 얼굴로 한 번에 맞췄다고 기뻐하며 입꼬릴 끌어올렸다. 채애현은 다시 한번 한태화와의 거리를 시선으로 쟀다. 역시, 너무 가까웠다.

    “…서서 이러지 말고 앉아서 얘기하죠.”

    앞을 막고 선 한태화를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인 채애현이 뒤편 소파를 가리켰다. 그럼에도 한태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앞을 가로막듯 한 걸음 더 다가선 한태화는 무척 위협으로 다가왔다.

    “내가 분명, 건들지 말라고 했던 거 같은데. 내 경고가 그렇게 우스웠어요, 기관장님?”

    한 달 전쯤,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한태화에게 관심을 가졌던 채애현은 드디어 그가 관심을 보인다는 가이드에 대해 알아냈다. 우연히도 채애현 역시 관심을 두고 있던 가이드였다. 그래서 임시 가이드 발령을 핑계로 한태화를 불러 슬쩍 떠보았다. 그러나 한태화는 관심 없는 태도로 알아서 하라고만 대답해 채애현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 폭주를 일으킨 한태화를 그 가이드가 가이딩했다는 소식을 듣고 샐러맨더를 잡아 오라는 핑계로 다시 부른 한태화는 그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갑자기 잔뜩 날을 세우며 내내 날카롭게 반응하더니 기관장실을 나가기 직전 채애현을 돌아보며 그렇게 경고했다. 서요한은 건들지 말라고.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제 약점을 감싼 채 가시를 세우는 한태화를 보며 채애현은 긴장을 풀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이미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오해가 있나 본데,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의 피티스트인 진성현 가이드가 피티스트로서 우선권을 행사했고, 내부적 절차에 따라-.”

    “왜 이래요. 그런 것쯤 무시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오히려 이용을 하면 이용을 한 거겠지. 아니면 그쪽도 내가 그런 것도 모를 붕어 대가리로 보여요?”

    붕어 대가리? 의미 모를 단어에 인상을 찌푸리던 채애현이 감정 없이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한태화를 따라 표정을 굳혔다. 안하무인에 매번 오만방자하게 구는 한태화가 사실 처음부터 눈에 거슬렸던 그녀였다.

    “…그러게, 왜 자꾸 말을 안 들어서 사람을 나쁘게 만들어요.”

    “하-.”

    그 대답이 어이가 없는지 한태화로부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애현은 금세 여유롭게 응수했다.

    “그렇게 혼자 잘난 것처럼 다니니까 여기저기 적이 늘죠. 그 적은 한팀장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내가 사람이 굽힐 줄도 알아야 한다고 누차 말했잖아요. 그런 게 사회생활이라고. 이참에 내 밑에서 사회생활을 배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봐, 뭘 믿고 그렇게 구는지 모르겠지만, 그만두지?”

    한태화가 굳은 얼굴로 낮게 목소리를 냈다. 채애현의 미소 역시 여전했고.

    “너야말로 태화 그룹 믿고 까부는 건 그만두지. 그래 봐야 너도 기관에 소속된 일개 에스퍼일 뿐이니까.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살고 싶으면 말 잘 듣는 개가 돼야지. 네 그 D등급 짜리 가이드도 그러길 바랄 거고.”

    무표정하던 한태화가 그 순간 확 하고 표정을 찌푸렸다. 고작 이름만 언급했을 뿐인데도 반응이 거친 한태화의 풋내기 같은 태도에 채애현의 자신감이 더욱 커졌다. 부족할 것 하나 없이 다 가졌으면서도, 결국 가이드한테 끌려다니는 걸 보면 그도 어쩔 수 없는 에스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채애현은 자신만만해졌다.

    “…자꾸 우리 요한을 물고 늘어지네? 짜증나게? 왜, 요한 목줄 쥐고 흔들면 내가 흔들릴 것 같아서? 그래서 이렇게 자신만만하신 건가?”

    “그래. 네 말대로 서요한 가이드의 목줄은 내가 쥐고 있어. 그러니 너도 착하게 굴어야지? 예의 바르게도 굴고. 내가 그놈의 숨통을 조이기 전에 말이야. 내가 네 가이드의 숨통을 조일 방법은 이거 외에도 많- 큭!”

    말을 이어나가던 채애현이 갑자기 목을 움켜쥔 채 얼굴을 찌푸렸다. 점차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르며 숨이 막힌 소리를 내던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다리가 그녀가 얼마나 괴로운지를 보여주는 듯했지만 한태화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큭, 윽-!”

    “그냥 확 죽여버릴까도 싶은데…, 그럼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말이야. 요한도 싫어할 것 같고….”

    “컥, 허억 허억.”

    목을 조르다 못해 짓누르던 무형의 기운이 사라지자 바닥으로 떨어져 주저앉은 채애현이 숨을 들이마시며 거칠게 기침을 토했다. 한태화는 주저앉은 채 아직도 고통에서 벗어나진 못하고 있는 채애현의 앞으로 쪼그려 앉으며 시선을 맞췄다.

    고통으로 핏줄이 선 붉은 눈이 눈물을 매단 채로 사납게 한태화를 쏘아보았다. 이 상황에도 기세가 꺾이지 않은 모습에 한태화가 기분 좋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러니 좀 번거로워도 돌아가야겠지?”

    “가, 감히… 나한테 이러고, 너나, 네 가이드가 무사할 줄 알아?”

    그 표독스러운 목소리에도 한태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예쁘게 웃어 보였다. 채애현은 그 웃음에 소름이 끼쳤음에도 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문 채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태화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안 무서워요? 그렇게 객기 부리다 객사할 수도 있는데?”

    “…….”

    “그러니까 요한은 건들지 마. 지금 그 목숨도 요한 덕분에 건진 목숨이니 보전 잘하시고. 힘들게 올라온 자리인데, 오래오래 해 먹으셔야지?”

    “…….”

    “얼마나 오래 버틸진 모르겠지만.”

    나직이 목소리를 깔던 한태화가 쪼그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바닥에 주저앉은 채애현은 고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약을 한번 치긴 해야겠어. 부나방 같은 것들이 분수를 모르고 달려드니까 영 귀찮네.”

    가볍게 목을 돌려 근육을 풀던 한태화가 천천히 걸음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일부러 개입하지 말라고 막아도 줬는데, 태화 그룹을 믿고 까분다는 말을 듣는 것도 좀 억울하고. 그러니까 진짜 그 태화 그룹을 믿고 까부는 게 뭔지 보여줄게.”

    문가에 닿아 문을 열기 전 한태화가 채애현을 돌아보았다.

    “재밌겠네. 그치?”

    “…….”

    한태화의 목소리가 진짜로 이 상황을 즐기듯 발랄했다. 그렇게 제 할 말을 끝낸 한태화가 기관장실의 문을 열고 나가자 열린 문틈 사이로 놀란 듯 어-? 하고 소리를 내는 채애현의 비서가 보였다. 갑자기 기관실에서 나온 한태화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던 비서는 이내 바닥에 주저앉은 기관장을 보고 눈을 크게 키우더니 나가는 한태화를 스쳐 달려갔다.

    “기관장님!”

    달려간 비서가 채애현을 부축해 일으키며 걱정스럽게 살폈다. 그러나 채애현은 한태화가 나간 문을 고집스럽게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누가, 쉽게 당할 줄 알고?

    분노와 모욕감에 몸을 떨며 채애현은 부축하고 있던 비서를 떼어냈다. 그리고 깊게 심호흡하다가 아픈 목을 부여잡고 싸늘히 표정을 가라앉히더니 비서를 향해 말했다.

    “감찰팀, 이팀장 좀 오라고 해요.”

    “기, 기관장님, 정말 괜찮으-.”

    “어서!”

    “네, 네넵!”

    허둥지둥 뛰어나가는 비서의 뒷모습을 보며 채애현은 표독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어쨌든 누가 뭐래도 현 세가의 최고 책임자는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었다.

    채애현은 천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헝클어진 머리를 곱게 쓸어넘겼다.

    ***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돌기만 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신경 쓸 여력이 없어 그 시선들을 무시한 채 기관장실 앞 복도를 계속해서 서성이며 안쪽의 기척을 살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얼마나 돌았는지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 때쯤 기관장실의 문이 열렸다. 혹시라도 나오는 사람이 기관장일까 봐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는데, 놀랍게도 문을 열고 나온 이는 한태화였다.

    들어갈 땐 창문으로 들어간 놈이, 제대로 문을 통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태화!”

    “요한? 여기서 뭐 해요?”

    “당연히 네가 걱정되니까 왔지! 괜찮아? 아무 일 없었고?”

    기관장의 능력은 치료계열이었지만, 병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만약 한태화가 안에서 날뛰는 걸 막기 위해 기관장이 능력을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이리저리 놈을 살피며 열이 나는지를 재기 위해 뺨을 감쌌다.

    “…괜찮은데….”

    “열은? 안 나? 좀 봐 봐.”

    “요한,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해지 합의서를 들이밀 땐 언제고, 지금은 또 내 걱정을 해주고. 나한테 왜 이래요, 정말.”

    뺨과 이마, 목 부근을 짚으며 열이 나는지를 살피는데 한태화가 멀뚱히 서서 그 손길을 모두 받아내면서도 헛소리를 했다.

    “그거랑 이거랑 별개라니까? 진짜 아무 일 없었어? 뭐 또 사고 친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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