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49)
  • “…그게, 무슨….”

    “원래도 A등급 이상한테는 별짓을 다 해. 이것도 그런 일에 연장선상인 거고. 가이드를 약점 삼아 자기들 멋대로 굴리는 거. 사실 A등급이 뭐 많은 것도 아니고, 기관 전체로 보면 한 서른 명쯤 되나? 그러니 당연히 크게 소문이 나지도 않았지. 나만 해도 그 사람한테 피해라도 갈까 봐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까.”

    “…….”

    이런 일이… A등급쯤 되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말이었다.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자 담담한 기색의 팀장님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A등급 이상 중에 임시 가이드로만 버티고 있는 놈들은 다들 그 사정을 아는 놈들일 거야. 아니면 나처럼 크게 당한 놈들이거나. 보통 임시 가이드까진 건드리지 않거든. 근데 넌… 상황 좀 다르니까, 벌써 시작한 모양이네.”

    하. 허탈하게 한숨을 내뱉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복잡해진 머리에서 열이 나는지 손바닥에 닿은 이마가 뜨끈했다. 한태화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 생각을 하다 멈칫하고 몸을 굳혔다.

    ‘나는 그냥 요한을 찾아 곁에 두고 싶었던 거예요. 그로 인해 세가에 이용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냥 이용당해 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요한 외엔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졌으니까요.’

    며칠 전 그렇게 고백해 오던 한태화의 목소리기 귓전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러니까… 알고 있었어? 심지어… 이용당해 주겠다고… 그렇게 마음먹은 거라고?

    왜?

    …나 때문에?

    ‘요한만 곁에 있어 주면 돼요.’

    그 잔잔한 웃음기가 담겨 있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설마… 지금도 이용당하고 있는 건가? 그래서 평소랑 달리 일도 열심히 하는 거고? …아니야. 한태화, 그건 아니어야 할 거야….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기운 없이 웃음을 터트리자 팀장님이 담배를 하나 더 빼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딴생각 말고, 한태화 구슬려서 말이나 잘 듣게 만들어. 그럼 적어도 너한테는 손을 안 댈 테니까. 나도 최대한 막아보긴 하겠지만, 나야 이미 눈 밖에 나서 바닥 친지 오래라 힘이 없네…. 미안하다, 요한아. 내가 무능해서….”

    기운 없는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고개를 드니 팀장님이 나만큼이나 복잡해 보이는 모습으로 힘없이 웃고 있었다. 덩치도 좋은 양반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게 보기 싫어 자연히 목소리가 불퉁해졌다.

    “…팀장님이 왜요. 나쁜 건 기관 놈들인데.”

    “…그냥, 말리기만 할 게 아니라 사실대로 말해줬어야 했나 싶어서…. 근데 이건 세가에서도 입단속을 시키는 일이라, 괜히 말했다가… 그 사람한테 피해라도 갈까 싶어서 자세히 말할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널 지켜 줄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봐도 내가 참 못났네. 팀장이란 게 제 팀원 하나를 못 지켜서….”

    “그런 말 마세요. 팀장님이 절 위해서 얼마나 힘쓰고 계신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아까는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욱해서 그랬어요. 아시죠? 마음에도 없는 소린 거?”

    정신 차려야지.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팀장님의 모습을 보며 이마를 문질렀다. 머리에 오른 열을 식히려고 노력하며 눈에서 힘을 뺐다. 당장 이건 지원 3팀이 걸린 문제다. 그러니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차가운 이성과….

    “요한아, 그러지 말고… 너, 눈빛이 또 왜 그래? 왜 맛이 갔어? 야, 뭐 이상한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지? 응?”

    좆 같은 일에 대항할 깡이다.

    “팀장님.”

    “…왜 그렇게 불러. 사람 불안하게….”

    “치킨 게임이라고 알아요?”

    “뭐?”

    “오토바이 두 대가 서로 마주 보고 달리다가 먼저 멈추거나 방향을 트는 놈이 지는 게임인데요, 어릴 때 뭣 모르고 몇 번 해 봤거든요. 근데 제가 그 게임에서 져 본 적이 없어요.”

    “…….”

    죽어도 뭐, 어쩔 수 없지. 그런 마음으로 끝까지 달리는 놈을 이길 놈이 몇이나 될까. 그 덕분에 한때 별명이 겜블러였다. 그런 류의 목숨 걸고 하는 미친 도박에서 진 적이 없어서.

    그땐 그랬다. 어리석고, 무모했다. 그래서 이길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그런 깡이었다.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액셀을 밟는 거. 브레이크도 방향 전환도 없이 그냥 정면만 보고 달리는 거.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나 흡연실을 나가자는 의미로 문 쪽을 눈짓하자 입을 벌린 채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팀장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쩌렁쩌렁한 게 좀 전에 힘없는 목소리를 내던 분은 어디 갔나 싶어 혀를 찼다. 다 연기였구만, 이 양반.

    “너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얌전히 있으라니까?!”

    “얌전히 있으면요? 한태화 혼자 그 꼴을 당하게 두라고요?”

    “그래, 둬! 어차피 놈이 자초한 일이야! 심지어 상관없는 너까지 끌어들인 일이고! 그러니 그놈이 알아서 하게 그냥 두라고!”

    역정을 내듯 소리친 팀장님이 흡연실을 나가려고 서 있던 내 앞을 막아섰다.

    “한 번만 눈 딱 감고 있어. 내가 그놈이랑 얘길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싫어요.”

    “뭐, 이놈아?!”

    “싫다고요.”

    “야, 너 미쳤어?!”

    아오 귀야. 기차 화통을 삶아 드셨나, 갑자기 왜 이렇게 목청이 좋아지셨어. 아픈 귀를 문지르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친 건 아니고, 상관없는 일이 아니니 이렇게 나서는 거죠.”

    “…그건 또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좋아해요, 한태화.”

    “…무…… 뭐?”

    다 알아들었으면서 못 알아듣는 척하시긴.

    “좋아한다고요. 그래서 별것도 아닌 놈들한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마음고생 하는 거 보기 싫어요. 진짜 미치게 싫다고요.”

    놈은 그냥 평소처럼 개떡같이 일하면서 내 옆에서 예쁘게 방싯거리며 대가리가 꽃밭인 붕어 대가리로만 지내면 된다.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했다.

    “…….”

    “어차피 사표 쓰고 나가봐야 활동 요청서 들어오면 거부도 못 하는 처지니 끝까지 싸워봐야죠. 누구 하나가 브레이크를 잡을 때까지 달리다가-.”

    그 순간 입이 막혔다. 갑자기 앞에 서 계시던 팀장님이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으웩- 짠데 담배 냄새까지 나!

    “아냐, 너 그거 아냐. 놈이 너 좋다는 건 있을 수 있어도, 왜 너까지… 아냐, 그거 아니니까 도로 말 주워 담자. 내뱉었던 말 다시 꿀꺽해봐, 착하지 우리 광땡이?”

    “으읍- 숨. 읍!”

    “삼켜, 도로 주워 삼키라고! 난 못 들었어! 너도 그런 거 아냐! 아니라고!”

    현실을 부정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팀장님의 손을 붙잡아 입에서 떼어내려 했지만 이분도 나름 에스퍼라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망할, 숨 막힌다고요!! 악!

    이제는 기관장님보다 앞에 계신 팀장님이 더 위협적이었다. 몸을 버둥거리다 간신히 손에서 빠져나와 도망치듯 흡연실을 빠져나오자 뒤에서 연신 ‘광땡아, 안 돼!’를 외쳐대는 팀장님이 따라붙었다.

    이건 뭐 내 다리 내놓으라고 달라붙는 귀신보다도 무서웠다.

    그렇게 팀장님을 피해 달아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절대 쉽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한태화를 이용하게 둘 생각도 없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요한은 제가 지킬 거니까요.’

    한태화의 말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이었다.

    ***

    [붕어대가리: 보고싶어요ㅠㅠㅠ 오전 3:09]

    [붕어대가리: 자요? 어떻게 잠이 오지? 나 안 보고 싶어요? 오전 3:12]

    [붕어대가리: 요한? 오전 3:18]

    [붕어대가리: 진짜 자요? 오전 3:18]

    [붕어대가리: 그럼내가요한집으로갈게요 오전 3:19]

    [붕어대가리: (기쁨)(기쁨)(기쁨) 오전 3:20]

    [씨발 잠좀자자 오전 3:20]

    [붕어대가리: 잘 자요…ㅠㅠㅠㅠㅠ 오전 3:23]

    한태화가 심하게 바빠졌다. 밤나비가 탈옥한 마당이니 청산팀 누구라도 정신이 없을 만 했다. 그래도 내심 저게 혹시 나 때문에 무리를 하고 있는 거면서 말을 안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는데, 여전히 한태화는 해맑기만 했다.

    [붕어대가리: 오늘도 외근 나왔어요… 요한을 못 본지 3일째예요ㅠㅠ 오전 9:27]

    [붕어대가리: 요한은 출근했어요? 오전 9:27]

    [ㅇㅇ 오전 9:28]

    [붕어대가리: …짜증나요 오전 9:30]

    [아침부터 짜증이 왜 나? 오전 9:33]

    [붕어대가리: 나는 요한 얼굴을 3일째 못 보고 있는데… 그 사무실 사람들은 맨날 보잖아요…. 나는 이제 눈에서 진물이 날 것 같은데ㅠㅠㅠ 오전 9:34]

    […… 오전 9:34]

    [붕어대가리: 진물 날 것 같다니까요ㅠㅠㅠ 오전 9:36]

    [약 발라 오전 9:36]

    [붕어대가리: ………… 오전 9:37]

    [붕어대가리: 숨이 안 쉬어져요…… 오전 9:39]

    [태화야? 오전 9:44]

    [붕어대가리: 네 요한 ^0^ 오전 9:45]

    [뭐야, 숨이 안 쉬어진다더니 잘만 살아있네 오전 9:46]

    [붕어대가리: ……아니에요. 지금 막 숨이 넘어가려고… 요한 살려줘요 인공호흡해줘요 오전 9:48]

    [ㅗㅗㅗㅗㅗ 오전 9:50]

    [붕어대가리: 너무해요ㅠㅠㅠㅠㅠ0ㅠ 근데 그래도 좋아요♥ 오전 9:54]

    [ㅗㅗㅗㅗㅗㅗx100 오전 9:58]

    [붕어대가리: ♥♥♥♥♥x1000000000 오전 10:11]

    #56

    …붕어 대가리가 하트를 보내왔다. 그럼 나는 붕어 몸뚱이나 지느러미쯤 되는 건가? 기분이 좀 이상한데. 저장 명을 바꿔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얼른 휴대폰을 뒤집어 책상 위로 올렸다. 그 행동이 조금 늦은 듯했지만.

    “왜? 답장 안 해? 너도 빨리 그 흉측하고 시뻘건 거 보내야지.”

    “…아니, 도대체가 이 팀은 사생활 보호가 너무 없어요. 왜 자꾸 남의 휴대폰을 봐요?”

    “그 흉물스럽고 시뻘건 게 내 안구를 테러했다는 생각은 안 들고? 워낙 시뻘게서 눈에 보이는 걸 어떡하냐? 왜, 눈이라도 감고 다녀줄까? 어이구, 부하 새끼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왜 오셨는데요? 뭐 시키실 일 있으세요?”

    말을 말아야지. 3일 전 있었던 일로 완전히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팀장님을 흘겨보다 시선을 내렸다. 더러워서, 내가 팀장직을 꼭 달고 만다. 그럼 그때 꼭 정팀장- 하고 부르면서 맞먹어야지.

    복수의 칼날을 갈며 마우스를 잡고 의미 없는 클릭질만 하고 있는데, 팀장님 그런 내 어깨를 툭 치며 문 쪽을 눈짓했다.

    “한 대 하고 오자.”

    왠지 지금 따라 나가면 잔소리만 잔뜩 들을 것 같은 분위긴데. 찝찝한 마음에 엉덩이를 뭉개니 팀장님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하는 수 없이 겉옷을 챙겨 일어나 뒤를 따르자 팀장님이 곧장 주차장 쪽 흡연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됐어?”

    “…뭐가요.”

    “반항기냐? 아니면 진짜 뭘 묻는지 몰라서 '뭐가요'야?”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는 팀장님의 손에 들린 담배가 무척 위협적이었다. 이분도 어릴 때 좀 노셨던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을 품으며 곱게 시선을 내린 채 입을 열었다.

    “…일단 임시 가이드 계약은 해지는 하려고요. 선배들이나 상원이한테 피해는 안 가게 해야죠. 근데 아시다시피 저도 요샌 걔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시간 나면 직접 보고 말하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

    그러자 조용히 담배 연기를 내뱉던 팀장님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놈 그거…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닌데….”

    “한태화요? 뭐 짜증이야 좀 내겠지만… 잘 설명하면 되죠.”

    “가끔 너랑 대화하다 보면 내가 아는 한태화랑 네가 아는 한태화가 다른 사람 같을 때가 있는 거 알아?”

    “…사람들이 걔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조금쯤 있어서….”

    말을 하면서도 양심이 찔려 목소리가 줄어들자 단박에 팀장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응,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지. 소문보다 더한 놈인데, 너무 포장돼서 소문이 났으니까. 과소 포장.”

    “…….”

    사나운 시선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담배 연기를 머금었다. 여기서 한태화 편을 들어봐야 잔소리만 늘어날 것을 알기에 시야를 어지럽히는 흰 연기로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다물자 팀장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 해지도 문제는 문젠데… 너, 다시 임시 가이드 발령서가 내려오면 어쩔래? …이리저리 알아보니까 그럴 분위기던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한테 임시 발령서가 또 내려온다고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기가 막힌 말에 표정을 굳히자 팀장님이 짧게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는 척 시선을 피한다.

    “그래. 너를 다른 놈 임시 가이드로 발령시킬 생각인가 보더라. 그래야 그 임시 발령 철회를 가지고 한태화랑 협상을 할 수 있을 테니.”

    “이것들이 진짜. 사람이 장난감으로 보이나. 하, 씨발 별. …뭣 같이 나오네.”

    “…뭐 어쩌겠어. 월급 받는 입장에서 까라면 까는 거지. 그럼 너는 어쩔 거냐니까?”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어오는 말에도 잠시 침묵하며 끝이 짧아진 담배를 꺼서 버렸다. 그리곤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자 붉어진 불씨가 타들어 가며 가는 연기를 피어 올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긴요. 저라고 별수 있어요? 까라면 까야죠.”

    “…네가 그렇게 순순히 한다고? …그때 말한 치킨 게임인지 뭔지는 뭔데? 그건 무슨 소리야?”

    “뭐겠어요. 그냥 한태화 옆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겠다는 소리지.”

    “…뭐?”

    “한태화는 한태화대로 가이드를 두고, 저는 저대로 에스퍼를 두고, 기관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귈 거라고요 설마 사귀는 사적인 부분까지 간섭하겠어요? 시키는 대로 하면서 붙어 있죠, 뭐. 기관에서 포기할 때까지.”

    내 말에 팀장님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한참 후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가이딩 따로, 사귀는 거 따로, 그렇게 지내겠다고?”

    “예. 에스퍼랑 가이드가 가이드 계약을 맺었다고 반드시 사귀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놈은 놈대로 평소처럼 지내고, 저도 그렇게 지내면서 연애나 해보려고요. 저놈들이 질릴 때까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듯 위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팀장님이 그 손끝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이 얘길 하면 저런 반응일 줄 알았다.

    “…그걸… 한태화가 받아들일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그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이 모든 일의 전제는 그걸 한태화가 이해해야만 한다는 거다.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됐지만… 놈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설득해 봐야죠.”

    “…그게 설득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해? 너… 교육받으면서 심리 이론 배울 때 졸았냐? 아니, 주변에서 뭐 보고 배운 건 없어? 너는… 에스퍼들끼리 가이드를 두고 싸움이 왜 난다고 생각해? 심리적 의존 부분이 큰 만큼 제 가이드 곁에 누가 얼씬거리기만 해도 싫어하는 게 에스퍼야. 그게 한태화라고 다를 것 같아?”

    “음…. 역시 어렵긴 하겠죠.”

    하- 하고 팀장님으로부터 날카로운 숨이 터져 나왔다. 팀장님이 불이 붙어 있던 담배를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가 재떨이 통을 향해 거칠게 집어 던졌다. 어차피 A급 물 능력자라 어지간한 불에는 상처도 입지 않을 것을 알기에 걱정이 되진 않았다. 팀장님도 그저 본인의 심정을 보여주신 거란 것도 알고.

    “어렵긴 하겠죠? 아니, 불가능한 일이지! 그게 어떻게 따로 돼? 너는 돼? 한태화가 다른 놈한테서 가이딩 받고 와도 괜찮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그럼 헤어질까요? 네가 기관에 끌려다니는 꼴 못 보겠으니, 헤어지자. 그렇게 말하면 그건 받아들인대요? 아니, 걔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제가 싫어요. 시작도 해보기 전에,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근데 헤어지기는 싫고, 그놈이 끌려다니는 꼴도 좆같아서 못 보겠고, 다른 방법이 없는데 어떡해요. 그래서 치킨 게임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먼저 지치면 우리가 지는 거고, 세가가 먼저 지치면 우리가 이기는 거죠.”

    “……요한아.”

    팀장님의 나직한 부름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듯 고개를 숙이자, 팀장님이 진정하라는 듯 부드럽게 어깨를 잡아끌며 등을 쓸어주었다.

    “…네가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는데… 그런 관계가 어떻게 오래가냐. 응?”

    “그건… 한태화 하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전… 잘해낼 자신 있어요. 그 정도 마음은 돼요….”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왜 그 책임을 한태화한테만 떠넘기는데. 너도 막상 그렇게 지내다 보면 다를 수 있어. 네가 지치지 않을지를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는데.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놈들이 없었을까 봐? 나도 몇 놈 봤는데, 그거 버티는 놈 못 봤어.”

    “…….”

    “…그냥 이쯤에서 끝내면 안 되는 거냐? 응? 너희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나는… 너만 안 다치면 돼.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팀장님의 타이름에도 입을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안 해 본 생각은 아니었다. 사실… 놈의 자유로운 생활을 지켜주려면 그편이 제일 확실하긴 했다. 녀석이 지금까지처럼 거칠 것이 없이 지내려면 힘없는 내가 떨어져 나가 주면 된다. 그럼 나 때문에 휘둘릴 일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쉽게 그 선택을 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그 선택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놈 손을 놓는 게 아쉬워서. 처음으로 욕심부려본 그 손을 놓는 게 죽기만큼 싫어서….

    그 말이 목에 걸린 듯 나오질 않았다.

    ***

    다음 날, 한태화가 드디어 출근을 했다. 그리고 녀석은 출근 도장을 찍자마자 지원팀으로 달려와 곁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요한, 휴대폰 좀 줘보세요.”

    “…남의 휴대폰은 왜?”

    함께 점심을 먹고 들어와 일을 보고 있는데 곁에서 혼자서도 잘 놀고 있던 놈이 책상 위에 있던 내 휴대폰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휴대폰에 손이 닿기가 무섭게 그 손등을 세게 때렸다. 이놈이, 어딜!

    “아야-.”

    “물어봤으면 대답을 들어야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가져가는 건 무슨 경우야? 그럴 거면 왜 물어봤어?”

    “…뭐 켕기는 거 있어요? 왜 감추지?”

    아픈 손등을 쥐고 엄살을 떨던 놈이 가늘어진 눈으로 의심스럽게 흘겨 오는 것을 보며 휴대폰을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제가 붕어 대가리로 저장되어있는 걸 알면 저놈이 곱게 넘어갈 리 없지.

    “그런 거 없어. 그러는 너야말로 남의 휴대폰은 왜 보겠대?”

    “자꾸 보고 싶다는 문장만 치면 오타가 나니까 터치 패드가 고장 난 건지 살펴보려고요.”

    “…뭐?”

    “그냥 새로 하나 사줄까요? 그럼 오타 없이 보내 줄 수 있죠?”

    “…….”

    그때 그게 짜증 났었구나. 음…. 붕어 대가리가 꼭 이럴 때만 기억력이 비상하지. 뒤끝 긴 붕어 대가리 같으니.

    #57

    일부러 낸 오타를 트집 잡는 녀석을 흘끔거리다 모르는 척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최대한 빨리 할 일을 끝내고 놈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계속 옆에서 말을 걸어오니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이제는 얘가 뭘 알고 이러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선배들이 죽을상을 한 채 우리 쪽으론 시선도 안 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원이야 진즉 일 핑계로 도망을 쳤고. 그 모습을 살피다 컴퓨터를 끄고 겉옷을 챙겨 일어나며 선배들을 돌아보았다.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 그래? 갔다 와. 어서 가, 어서.”

    확 밝아진 안색의 최선배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옆에 앉아 있던 한태화를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녀석은 얌전히 나를 따라오면서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어딜 가는데요?”

    “…잠깐 너랑 할 얘기가 있어서.”

    “저랑요? 무슨 얘기요?”

    “…….”

    녀석의 물음에도 대꾸를 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겨 1층 로비의 보안대를 지났다. 그렇게 기관 건물을 빠져나와 조금 걷자 작게 꾸며 놓은 공원이 나타나며 드문드문 놓인 나무벤치가 보였다. 점차 쌀쌀해지는 날씨에 마침 사람도 없었고.

    바람이 좀 차서 그렇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안성맞춤인 분위기였다. 챙겨 나온 상의를 걸치며 벤치로 가 앉아 옆자리를 두드리자,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놈이 쪼르르 곁으로 와서 앉는다.

    “무슨 얘긴데요? 심각한 얘기예요? 혹시 휴대폰에 손대려고 해서 화났어요?”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무슨 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 잠시 고민했다. 3일간 이놈을 어떻게 설득할지를 고민하느라 머리가 다 빠질 지경이었는데,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준비해 놨던 말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너 요새 일 열심히 하더라?”

    일단 가볍게 시작한 질문에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놈이 갑자기 씨익 하고 웃는다.

    “그래서 자주 못 봐서 서운했어요? 너무 일에만 몰두하는 것 같아서? 요한이 나보고 개떡 같이 일하면서 팀장질하고 있다고 해서 열심히 한 건데.”

    “…정말 그 이유가 다야?”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뭐예요? 진짜 무슨 일 있어요?”

    “…….”

    능글맞게 웃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잦아드는 걸 보며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손끝에 만져지는 종이의 질감에 잠시 고민하다 그것을 꺼냈다. 그렇게 지난 3일간 스트레스의 주범이던 것이 놈에게 건네졌다. 그러자 의아한 얼굴로 접힌 종이를 받아 펼친 한태화가 천천히 적힌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주머니에 넣은 손을 꼼지락거리는데, 역시나 아까와는 달리 싸늘한 목소리가 녀석에게서 흘러나왔다.

    “이게… 제가 이걸 뭐라고 해석해야 하죠?”

    가만히 문서 위로 타이핑된 글자들을 읽어나가던 시선이 볼에 와 꽂히는 순간, 으- 하고 움츠린 어깨를 떨었다. 날도 날인데, 저놈 때문에 더 추운 느낌이다.

    “해석할 필요 없어. 그냥… 임시 계약만 해지하자는 거니까.”

    “…설마, 서프라이즈예요? 그럼 이거랑 같이 전속 계약서도 줘야죠. 내가 오해라도 해서 화라도 내면 어쩌려고요.”

    “전속 계약은 안 해.”

    그 말에 억지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하게 굳는다. 이를 악문 듯 턱에 힘이 들어간 모습에 자연히 고개가 숙여지며 시선 역시 돌아갔다. 어쩐지 놈을 보고 있는 게 힘이 들었다. 한태화가 상처받은 게 보여서.

    사실 아까부터 내 가슴도 불편하게 싸르르 한 게 영 불편했다. 나는 이제 네가 상처받는 것도 싫은가 보다, 태화야. 주머니 안에서 초조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억울함에 주먹이 쥐어졌다.

    진성현의 말대로 누군가의 피티스트라는 건 예사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나 기관에 소속된 가이드와 에스퍼라면 더욱 그랬다. 그 피티스트에겐 상대방에 대한 우선권이 주어지니까.

    “…다시 말해 봐요.”

    “태화야-.”

    “이름! …후, 이 상황에서 그렇게 부르지 마요. 이름은 부르지 말고 방금 한 얘기 다시 해보라고요. 나랑, 뭘 안 해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려다 간신히 참는 모습에 어깨가 튀어 올랐다. 한태화가 나한테만은 유독 무르게 구는 것을 알고, 지금까지 편하게 대해 왔지만, 그렇다고 화내는 녀석까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주머니에 넣어 뒀던 손을 꺼내 해지 합의서를 들고 있는 녀석의 손을 잡았다. 거칠게 쳐내려는 듯 돌아가던 한태화의 어깨는 결국 힘이 빠진 채 얌전히 내려앉았다. 정신 나간 머저리. 왜 갑자기 그 단어가 떠오르는 걸까.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내 말 잘 듣고 사실대로 말해줘. 너…, 요새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이유가 혹시 나 때문이야? 누가 너한테 나랑 가이드 계약 하고 싶으면 그러라고 시켰어?”

    “…….”

    “만약 누가 그렇게 시켰대도… 그거 하지 마. 평소대로 살라고. 그냥 계속 개떡같이 일해. 그리고 아무 말 말고 그 종이에 사인해. 아무것도 아니야. 이깟 거 그냥 종이에 불과한-.”

    “누구예요?”

    얌전히 듣고만 있을 줄 알았던 놈이 그렇게 물어왔다. 녀석의 어깨를 잡고 확답을 들으려던 나는 움찔하고 손을 떼어내며 녀석을 향해 기울이고 있던 상체를 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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