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냥 맞으라고. 네 머리가 더 단단하니까.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들어봤지?”
“아씨, 선배!”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꿔 볼 겸 농담을 던지자 그제야 최선배와 강선배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지원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밤나비를 잡는 건 현장팀과 청산팀에서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 생각이 들자 시선이 자연히 휴대폰을 향했다. 어딜 갈 때마다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사는 사람처럼 무섭게 메시지를 날려대던 한태화는 정신이 없긴 없는지 요즘 들어 연락이 드문드문 왔다
[붕어대가리: 요한, 보고 싶어요ㅠㅠ 프로필 사진을 요한 사진으로 바꿔주기라도 해주세요ㅠㅠㅠㅠ 오전 10:32]
[싫어 오전 10:34]
[붕어대가리: 너무해요ㅠㅠㅠ 그럼 태화야 보고싶어~ 라고 해주세요ㅠㅠㅠㅠ 오전 10:48]
[보ㄹ시ㅍㅓㅓ 오전 11:04]
[오타 났네? 미안. 일에 집중하자 오전 11:04]
두 시간 전에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끝으로 더이상 답이 없는 화면을 내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화면을 끄려는데, 어느새 뒤로 돌아와 목을 빼고 있던 상원이 놈이 미심쩍다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 붕어 대가리가 설마… 한태화예요?”
“…왜 남의 메시지를 보고 그래? 매너는 개나 줬냐?”
“들키면 어쩌려고요? 알면 싫어할 것 같은데.”
내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상원이는 미쳤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얼른 휴대폰을 뒤집어 놓으며 그런 상원이를 노려본 채 한마디 하는데, 그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던 최선배와 강선배도 참견해 왔다.
“보는 놈이 개매너지, 뭐가 문젠데? 그러게 누가 남의 휴대폰 보래?”
“광땡이 쟤는 가끔 똥인지 된장인지 확인해 보려는 습관이 있더라?”
“냅둬요. 또라이라 그러니까. 저게 된통 걸려서 탈탈 털려봐야 정신을 차려요. 아니면 그런 게 둘 취향이던가.”
둘의 대화에 인상이 찌푸리다 고개를 돌려 노려보는데, 옆에 있던 상원이 놈이 똥과 된장을 먹어 보는 모습을 상상했는지 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한다. 저거 진짜, 토하게 만들어 줄까 보다.
“남의 사생활에 터치하지 말죠? 무슨 팀이 사생활 보호가 안 돼.”
“그러게 누가 기관 최고 유명인이랑 사귀래? 한태화면 세가 내에선 준연예인급인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렇죠. 근데 진짜 한태화 이름을 붕어 대가리로 저장해놨어? 아니지?”
최선배의 말을 받은 강선배가 확인을 구하듯 쳐다봐 오는 것을 외면하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너무 친해도 문제다.
“…붕어 대가리 맞는데요, 왜요.”
“와… 저 용감한 새끼. 저 깡으로 양아치 짓도 했나 봐.”
저 선배가 남의 과거를 또!!
“강선배, 잠깐 나가서 저 좀 볼래요? 궁금해하시는 양아치 짓을 어떻게 했는지 보여줄게요.”
책상에 삐딱하게 고개를 괸 채 최대한 상냥히 웃으며 문 쪽을 눈짓하자 강선배가 허- 하고 기가 막힌다는 듯 웃는다. 그러더니 나와 똑같은 자세를 하고 따라 웃으며 선선히 사과를 해왔다.
“내가 말이 과했지? 사과하마. 근데 너 비품 구매 목록은 보냈어?”
“…제가 말이 과했죠? 사과드릴게요. 비품 구매 목록은 사과와 함께 오늘 퇴근 전까지 보내 두겠습니다.”
“빨리 보내라, 빨리. 농땡이 피우지 말고.”
“…예.”
망할 계급장. 아오.
권력에 굴복한 설움을 느끼며 고통스럽게 가슴을 부여잡고 마우스를 쥔 순간이었다. 갑자기 팀장실의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나온 팀장님이 무겁게 표정을 굳힌 채 다가왔다.
“요한아, 나 좀 보자.”
“저요? …저 뭐 또 잘못 했어요?”
저 양반이 이름으로 부르면 심장부터 내려앉더라. 평소처럼 광땡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이름을 불러오는 팀장님의 목소리에 눈치를 살피며 주춤주춤 일어났다. 후배 상원이 놈이나 선배들 역시 무거운 팀장님의 목소리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잠깐 따라 나와.”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에 강선배를 바라보자 선배가 입모양으로만 벙긋댔다.
‘너의 그 양아치 짓, 보여줘.’
아, 저 선배가 진짜. 이런 진지한 순간에까지.
짜증스레 표정을 일그러트리자 소리를 죽인 채 큭큭 댄 강선배가 따라가 보라는 듯 문을 눈짓했다. 벌써 문을 열고 나가 계신 팀장님의 뒷모습에 얼른 몸을 움직이며 나는 당당히 외쳤다.
“비품 구매 목록은 내일 보내 드릴게요. 저는 팀장님이 부르셔서 이만!”
“…야!! 그거 보내 놓고 가!! 야, 서요한!”
#53
점차 멀어지는 강선배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사무실을 나서 팀장님의 뒤를 따르자 흘끗하고 시선이 날아들었다.
“비품 구매 목록 정리가 아직도 안 끝났어?”
“…곧 할 거예요. 제가 얼마나 바빴는지 제일 잘 아시는 분이.”
“…빨리 끝내. 한동안 더 정신없을 거니까.”
“오성파 때문에요?”
“아니.”
단호한 부정에 고개를 갸웃하며 팀장님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대체 어딜 가시는 거지?
“근데 우리 어디 가요?”
“기관장실.”
“…예?”
“기관장님 호출이야.”
“…저를요? 기관장님이 저를 찾으신다고요?”
내가 그렇게 찾을 땐 코빼기도 안 보여주던 그 기관장님? 놀라서 잠시 걸음을 멈추자 복잡한 표정의 팀장님이 두 계단 위에서 시선을 내렸다.
“2층 테라스 쪽 흡연실에 있을 테니까 기관장님 보고 나면 그리로 와. 나오면 땡길 거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무섭게. 힌트라도 주세요.”
“가봐. 일단 갔다 오라고.”
“저 짤려요?”
“…….”
분위기를 바꿔보려 농담을 던져봐도 팀장님의 무거운 분위기는 변하질 않았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은데…. 기관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
팀장님의 말을 따라 테라스 앞에서 헤어져 홀로 기관장실을 향하는데, 앞서 방문한 사람이 있었던 듯 누군가가 문 안쪽을 향해 인사를 하며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몸을 돌린 순간 곧장 시선이 얽혔다.
…쟤가 왜 여기 있을까.
자연히 자세가 삐딱해졌다.
“여기서 또 보네요. 안녕하셨어요, 서요한씨.”
“…그러게요.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자 진성현이 자세를 바로 하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기관장실이라고 적힌 팻말을 확인하고 난 뒤 그 아래에 선 진성현을 바라보자 녀석이 눈을 접으며 묘한 얼굴로 웃었다.
“기관장님께서 부르셨나 봐요.”
“…진성현씨는 기관장님을 뵈러 왔었나 보고요.”
“예. 다행히 세가에서 편의를 봐줘서 유학도 잘 마쳤으니 이제 슬슬 활동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제 와?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졌다.
“세가에서 편의를 봐준 게 아니라 태화 그룹을 이용해서 빠져나간 거겠죠. 미꾸라지처럼.”
세가가 자선단체도 아닌데, 그럴 리가 있나. 학업을 이유로 활동 유예를 할 수 있는 건 맞지만, 그 기간이 무한정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빈정거리자 웃고 있던 진성현이 표정을 굳혔다.
“…여전히 참, 꾸준히 무례하시네요.”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쪽에겐 무례할 예정이니 싫으면 상대하지 마시고 가던 길 가세요. 다음부터는 만나도 굳이 알은 척하지 마시고요. 그럴 정도로 좋은 사이 아니잖아요, 우리.”
“…그 자신만만한 태도도 여전하시고.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가? 근데 혹시 그 믿는 구석이 우리 태화예요?”
흠. 한번 해 보자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힐끔 시선을 내리자 옅은 갈색의 눈이 똑바로 시선을 맞춰왔다. 그 고집 센 시선에 웃음이 터졌다. 지난번 상처 입은 듯 흔들리던 눈마저 연기였나 싶어서.
“우리 태화라…. 진짜 어지간히 얼굴도 두껍네.”
“아, 임시 가이드셨죠. 그래도 꼴에 가이드라고 에스퍼 욕심은 있나 봐요. 그 말이 그렇게 거슬리는 거 보면.”
꼴에? 와, 이 좆만이를, 어쩌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니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 맞아. 꼴에 가이드라고 그 말이 듣기가 싫네. 네 입을 통해 나오는 거라면 더더욱 싫고. 그러니 조심 좀 하지? 네 말대로 나야 믿는 구석이라도 있지, 믿을 구석도 없어진 게 왜 자꾸 까불지?”
키가 내 턱 부근에 올 정도로 작은 녀석을 비스듬히 내려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이자 되바라져 보일 만큼 당당히 시선을 들고 있던 놈이 피식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믿을 구석이 왜 없어요.”
“…뭐?”
“한태화의 피티스트가 난데. 같은 가이드면서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나?”
“…….”
“들어가 보세요. 들어갔다 나올 때의 그쪽 표정이 보고 싶은데, 바빠서 그 꼴을 못 보고 가는 게 아쉬울 따름이니까.”
그럼 바빠서 이만. 그렇게 혼자서 말을 마친 놈이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기관장실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찜찜한데.
어쩐지 안으로 들어가서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란 예감이 들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 기분을 털어내듯 크게 숨을 내쉬며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자 안에 있던 비서가 앉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 혹시 서요한 가이드십니까?”
“예.”
“어서 오세요. 기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지난번 임시 가이드 발령서 때문에 찾아 왔을 땐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시란 말만 내뱉던 사람이 이번엔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돌려 안쪽의 문을 노크했다. 그러자 안에서 작게 들어와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찾으셨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요.”
“서요한 가이드? 맞나요?”
“예. 지원 3팀 서요한이라고 합니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조심히 문을 열고 인사를 하자 소파에 앉아 계시던 기관장님이 반갑다는 얼굴로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랑은 초면인 것 같은데, 반가워요. 이리 와서 편히 앉아요.”
“…예. 감사합니다.”
기관장님이 가리킨 맞은편 자리로 가서 전혀 편하지 못하게 불편한 마음으로 앉자 상냥하고 인자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물어왔다.
“뭐 마실래요?”
“아니요. 일을 하다 온 거라서 금방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바쁜 사람 불러놓고 이러네요. 그래요, 피차 서로 정신없이 바쁠 테니 용건만 빨리하죠.”
곱게 틀어 올린 머리에 정갈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기관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차를 거절하고 나자 어색해진 분위기에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데 맞은편에 놓인 커다란 책상 위로 속이 비치는 투명한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CEGA 기관장 채애현」
기관장님은 특수계열의 A등급 에스퍼라고 들었다. 치료계열의 에스퍼. 그러나 사실 치료가 아니라 병을 만들어 옮기는 능력으로 더 유명한 편이었다. 아주 무서운 능력의 에스퍼인 것이다.
“요새 많이 바쁘죠? 오성파 일로 모든 부서가 정신이 없을 텐데.”
“저는 지원팀 소속이라서 크게 일이 늘진 않았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청산팀 한팀장의 임시 가이든데, 마음은 많이 쓰이겠지요.”
“…….”
갑작스럽게 나온 한태화의 이름에 입을 다물자 기관장님도 잠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끊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전에 내 권한으로 임명한 임시 가이드 일로 찾아왔었다는 얘긴 들었어요. 신경을 써줬어야 했는데, 워낙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이렇게 보네요. 그때는 많이 서운했죠?”
“…아닙니다. 지금은 한태화씨와도 잘 지내고 있고,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잘 지낸다니.”
껄끄러운 기분에 자리가 불편해져 고개를 숙이자 또다시 대화가 끊어졌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편한 기색의 기관장님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에 놓인 책상으로 다가가 A4 용지에 출력된 문서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바쁜 사람 붙들고 길게 얘기할 필욘 없겠죠. 읽어보세요.”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놓인 문서 한 장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천천히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글자의 나열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임시 가이드 계약의 해지 합의서가 내 손에 들려있었다.
“혹시 기관의 내부 규정에 대해서 잘 아나요?”
“…보통만큼은 압니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요. 알겠지만 기관에선 에스퍼에게 피티스트가 존재할 경우 그 사람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그리고 사실 한팀장에겐-.”
“피티스트가 있죠. 압니다, 진성현 가이드. 방금 이 앞에서 만나기도 했고요.”
기관장님의 말을 끊으며 시선을 들어 올리자 정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나도 느껴질 만큼 날카로워진 내 시선에 잠시 말을 멈췄던 기관장님은 금세 여유를 되찾아 길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알고 있다니 얘기가 더 빠르겠네요. 일방적으로 가이드 발령서를 내린 후에 일이 이렇게 돼서 나도 개인적으로는 유감스러워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게 내부 규칙이니 따라야죠.”
“그 말씀은… 진성현 가이드가 한태화씨의 가이드로서 활동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맞아요.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활동 유예 신청을 했던 진성현씨가 유학을 마치고 세가로 돌아오기로 했어요. 그리고 오자마자 피티스트로서 우선권을 행사했죠.”
하- 하고 헛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잠시 고개를 돌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언성이 높아질 것 같았다. 차갑게 식은 손을 느끼며 주먹을 쥔 채 길게 숨을 내쉬었지만 들끓듯 소란스러워진 속은 전혀 풀리질 않았다.
사람을 장기판의 장기말로 보는 것도 아니고, 저들 편할 대로 휘둘러 대는 것이 진력났다. 등급 낮은 만만한 사람은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건가?
“그러니까… 저는 이제 필요가 없어졌으니 한태화씨의 가이드 직에서 물러나란 소리네요. 쓰다 버린 패처럼.”
#54
“저런. 마음이 많이 상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쓰다 버린 패라니. 꼭 그렇게 부정적인 단어로 본인을 낮춰서 표현해야 하나요? 그냥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서요한 가이드도 갑작스러운 임시 가이드 발령 문제로 불만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모두에게 좋은 일인 거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되겠어요?”
누가 기관장 아니랄까 봐 말은 청산유수네. 앞에 앉은 사람이 복장 터져나가는 줄 모르고. 모두에게 좋은 일? 그 말을 하려면 적어도 내가 임시 가이드 발령을 거부했을 때, 그 이야길 한 번이라도 들어줬어야 했다.
“…그런 것치곤 임시 가이드 발령 때엔 얼굴 한번 뵙기 힘든 분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 일은 방금 전에 사과한 것 같은데요?”
“아뇨. 사과 아직 안 하셨습니다. 서운했냐고만 물으셨고,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라고만 하셨죠.”
“…서요한 가이드는… 사회생활을 잘하기엔 어려운 성격인 것 같네요. 세가에서 적응은 잘하고 있나요?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요. 내가 그 정도는 해결해 줄 능력이 되니까.”
하. 이번에야말로 실제 헛웃음이 터졌다. 마치 나를 위한다는 듯 잘 포장해서 얘기하고 있었지만 결국 권력자인 자신 앞에서 잘 보이라는 말과 진배없는 말에 표정을 굳혔다. 그럼에도 기관장님 얼굴에 서린 미소는 떠나질 않았다. 저절로 이를 악물었지만, 힘이 없는 나로선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다.
“근데 사실 나는 그런 성격을 좋아해요. 솔직하고, 거침없는 그런 거요. 이 나이가 되니 음흉한 사람보단 그런 패기 넘치는 사람이 좋더라구요.”
“…….”
“그래서 해주는 조언이니까 새겨들어요, 서요한 가이드. 기관장쯤 되는 사람에게 빚 하나 지워두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니랍니다. 오히려 득이 되면 득이 되죠. 보니까 실적이 좋아 팀장직도 노려볼 만하던데, 출세 같은 데엔 관심 없어요?”
관심이 왜 없을까. 기관에 들어오면서부터 바라 오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 넙죽 그러겠다고 할 만큼 배알 없는 성격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출세, 좋죠. 저도 좋아합니다, 그런 거. 낙하산이나 청탁으로 팀장직 오르는 게 비겁하다고 말할 만큼 깨끗한 사람도 아니고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요? 멋대로 사람을 임시 가이드로 만들더니, 이제는 멋대로 해지 통보라뇨. 이쯤 되면 이건 제 자존심의 문제죠. 제가 당장 언론사로 달려가 기자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하하하. 재밌네요.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요? 기자를 만나서 기사라도 뿌리겠다고? 근데 어쩌나, 그 기자가 기사를 써줘야 문제가 될 텐데, 기사 자체가 안 나올 거라서요. 내가 그런 정도의 기사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라. 오히려 귀엽네요. 깨끗한 사람은 아닌데 순진한 편이기는 한가 봐요, 서요한 가이드.”
손주가 재롱부리는 모습을 보듯 기관장님의 귀엽다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눈앞에 간교하게 입을 벌린 뱀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독니가 바로 코앞에 놓인 기분에 등골이 서늘했다. 좋지 않았던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다.
“더 길게 말하지 않을게요. 그 해지 합의서에 사인해서 서요한 가이드가 한팀장에게 직접 전달하세요. 그게 내부 규정 절차니까. 임시 가이드라도 한번 맺은 가이드 계약은 그 기간이 끝나기 전까진 당사자 합의 없인 해지가 안 되거든요. 잘 알죠? 이미 알아봤을 테니까.”
“…제가 왜 그래요 하죠? 이건 외압이지 합의가 아닌데요.”
“외압? 하하, 정말 순진한 사람이네. 정말 왜 그래야 하는지 몰라요?”
“…….”
“그걸 안 하면 지원 3팀은 해체됩니다. 팀원 모두 각각 가장 먼 지방으로 발령받아 한직으로만 돌 테고, 지원 3팀은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겠죠.”
…뭐? 놀라서 멈칫하고 몸을 굳히자 기관장님의 눈매가 길게 휘어졌다.
“놀랐어요? 얼굴색이 많이 안 좋네. 거봐요. 그러니까 그런 단어는 함부로 쓰는 게 아니에요. 외압은 이런 게 외압이니까. 아까 그런 건 점잖은 제안에 가깝죠. 그 차이가 이제 좀 이해가 가나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손에 들린 해지 통보서를 내던질 수도 없었다. 그저 잔뜩 힘이 들어간 손힘에 종이가 조금 구겨질 뿐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구김은 이 문서의 효력을 막지 못한다. 그 힘은 이 종이 쪼가리 한 장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나는 아주 무력한 사람이었다.
눈앞에 버티고 있던 집채만 한 뱀의 아가리에 삼켜진 기분이었다. 아득함을 느낀 머리가 조금씩 아파 왔다.
“아참, 서요한 가이드는 입이 무거운 편인가요? 나는 부디 그러기를 바라는데.”
“…….”
다리를 꼰 채 편히 앉아 물어오는 기관장님 말에도 아무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입을 다물어 버린 내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기관장님은 더없이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
기관장실의 문을 닫고 나오니 팀장님의 말대로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팀장님께 물어볼 것도 생겼고. 걸음이 자연히 빨라져 2층 로비에서 이어진 테라스로 향했다. 카페가 있는 곳의 반대편에 위치한 흡연 부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안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 하나가 나가면서 팀장님과 둘만 남게 되었다. 두통이 심해진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다짜고짜 입부터 열었다.
“알고 계셨어요?”
“…일단 와서 한 대 피우면서 머리 좀 식혀.”
“언제부터 아셨어요? 미리 아셨으면 귀띔이라도 좀 해주지 그러셨어요. 아니면 저만 팀장님과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겁니까? 그런 정도는 미리 얘기해 줄 수 있는 관계라고?”
“…안 특별했으면 지금 이렇게 애먼 데서 화풀이하는 거 받아주지도 않았어. 와서 일단 앉으라고.”
“…….”
입술을 깨문 채 화를 삭이다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이렇게까지 화가 나보기도 오랜만이었다. 불안정해진 감정에 머리까지 어지러울 지경이라 일단 팀장님의 말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스트레스로 욱신대는 두통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나도 오늘에야 알았어. 인사팀에서 일하는 동기가 갑자기 한태화의 피티스트가 나타났다고 알려줘서. 그러고 나서 기관장님 연락을 받았는데, 감이 딱 오더라고. 그래서 따라온 거야.”
“…그 기관장님이란 사람… 대체 뭐예요.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지원 3팀을 공중분해 시켜 버리겠단 식으로 협박해 오던데,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길게 흰 연기를 뿜으며 분했던 마음을 토로하자 팀장님이 잠시 시선을 멀리 던지며 말을 고르듯 고심했다.
“…대단한 여자지. 무서운 여자고. 내가 말 안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처음 인턴 요원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 팀 팀장이 바로 그분이었거든? 근데 그때도 참 야망 있고, 무서운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그 협박이 진짜가 될 수도 있단 소리네요.”
그 질문이 어이가 없었던지 팀장님에게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고도 남지. 웃으면서 무게 없이 말해도 허튼소린 안 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 능력에 지원 3팀 하나 공중분해 시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거고.”
그 말에 화가 식으며 빠르게 이성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엔 손끝에서부터 피가 식는 기분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반도 다 태우지 못하고 꺼야 했다. 나오면서 대충 접어 품 안에 넣어 뒀던 해지 계약서가 제 존재를 알려오듯 묵직해지는 느낌이었다.
“…임시 가이드 계약 해지하라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한결 누그러진 내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던 팀장님이 피식하고 기운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내가 한태화만은 안 된다고 했잖냐. 기관에서 어떻게 해서든 약점을 잡아내 그놈 목줄을 쥐려고 혈안이 되어있는데, 임시든 뭐든 그놈이 관심 있어 하는 가이드가 나타났으니 잘됐다 싶었겠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세가에서 하는 짓이 원래 그래. 등급 좀 높다 싶은 놈한테 가이드 하나 붙으면 그 가이드 붙잡아다 목줄로 쓰는 거. 이것도 그 연장선인 거지. 피티스트까지 붙었으니 폭주할 염려는 없어졌고, 그러니 이제 너를 가지고 한태화랑 딜을 하겠지. 널 가이드로 쓰고 싶으면 말을 잘 들으란 식으로.”
…나를 가지고 뭘 한다고? 한태화를 상대로? 그게 무슨!! 담뱃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부들부들 떨렸다. 얇은 담뱃갑은 힘없이 우그러들었다. 마치 나처럼….
“그래서 내가 안 된다고 기를 쓰고 말렸던 건데…. 근데 설마 전속 계약을 맺기도 전에 벌써 이렇게 나올 줄은 나도 몰랐어. 하긴 오죽 티를 냈어야지. 한태화 그놈 새끼가. 쯧.”
“그러니까… 팀장님 말씀은 지금… 기관에서 저를 가지고 한태화한테 협박이라도 할 거라는 말씀이세요?! 그러기 위해서 임시 계약도 해지시키는 거고?”
“그래. 그 말이야. 지금껏 숱하게 그래왔으니까.”
“팀장님!”
“나도 당해 본 일이라, 그래서 잘 알지.”
“…!!”
일순 숨을 삼켰다. …당해본 일? 놀란 얼굴로 굳어 있는데 팀장님이 고단해 보이는 얼굴로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내 가이드를 그렇게 잃었거든. 죽었다는 말은 아니고…. 말을 안 듣고 뻗댔더니 다른 놈 전속 가이드로 만들어 버리데? 그 후 지금까지 그 에스퍼 놈 가이드를 하고 있고. …잘 지내고 있다곤 하더라.”
하!! 막혀있던 숨이 기막힌 말에 한탄처럼 터져 나왔다. 그렇게 간신히 트인 숨을 내쉬며 굳은 얼굴로 팀장님을 살폈다.
팀장님은 A등급의 물과 관련된 능력을 가진 에스퍼였다. 사실 이 등급의 에스퍼가 지원팀 팀장이나 맡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원래도 열성적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서 그저 본인이 원해서 자원한 거겠거니 했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 한직으로만 돌고 있던 거였다. 뻗대다 윗선에 찍혀서. 여태껏 몰랐던 사실에 결국 분노가 터졌다.
“그 가이드는 그걸 받아들였어요?!”
#55
“…처음에야 거부했지. 그랬더니 바로 가장 먼 지역으로 발령을 보내버려서 떨어지게 만들더니, 너처럼 임시 가이드 발령서를 내려서 웬 에스퍼를 하나 붙이더라고. 근데 너도 알다시피 가이드의 기본은 측은지심이니까…. 그 에스퍼가 불쌍했나 보더라고. 울면서도 결국 나를 떠난 거 보면.”